회의론자들의 특징은, 사마와띠 왕비 이야기(Dhp21-23)에서
Appamādo amatapadaṃ 압빠마도 아마따빠당
pamādo maccuno padaṃ 빠마도 맛쭈노빠당
appamattā na mīyanti 압빠맛따 나 미얀띠
ye pamattā yathā matā 예 빠맛따 야따 마따.
마음 집중은 죽음을 벗어나는 길
마음 집중이 되어 있지 않음은 죽음의 길
바르게 마음이 집중된 사람은 죽지 않는다.
마음 집중이 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
Evaṃ visesato ñatvā 에왕 위세사뜨 나뜨와
appamādamhi pānditā 압빠마담히 빤디따
appamāde pamodanti 압빠마데 빠모단띠
ariyānaṃ gocare ratā 아리야낭 고짜레 라따.
이 같은 진실을 완전하게 알아
항상 마음을 집중시키는 현자에게 있어
마음 집중은 기쁨을 주고
언제나 성스러운 길에 머물게 한다.
Te jhāyino sātatikā 떼 자이노 사따띠까
niccaṃ dalhaparakkamā 닛짱 달하빠락까마
phusanti dhīrā nibbānaṃ 푸산띠 디라 닙바낭
yogakkhemaṃ anuttaraṃ 요각케망 안웃따랑.
현자는 지속적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여
내적 고요함과 평화를 성취하나니
닙바나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경지,
닙바나는 위없는 참된 기쁨이며 행복이다.
(법구경, Dhp21-23)
게송 21~23 인연담, 사마와띠 왕비 이야기
‘쿠주따라’라는 여자 시종이 있었는데
부처님께 꼬삼비 근처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때, 꼬삼비 국 우데나 왕의 왕비로서 오백 명의 궁녀를 거느리며 호화스러운 궁전에 살고 있었다.
왕비에게는 궁전의 꽃을 돌보아 주는 쿠주따라라는 여자 시종이 있었는데 이 시종은 수마나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꽃가게에서 부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선근(善根)이 깊었으므로 설법을 듣자마자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고, 왕궁에 돌아와 왕비와 궁녀들에게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가르침을 전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런 공덕으로 그날부터 쿠주따라는 힘든 노동은 하지 않게 되었으며, 왕비와 궁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리고 쿠주따라는 그 이후부터 부처님의 설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곳에 가서 설법을 듣고 와서는 왕비와 궁녀들에게 전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쿠주따라는 마침내 경율론 심장에 통달하게 되었다.
사마와띠 왕비와 궁녀들은 쿠주따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배우기는 했지만 한번도 부처님을 뵈온 적은 없었으므로 기회가 있으면 꼭 부처님을 뵈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원을 이야기하면 왕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왕에게는 그 소원을 말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하지 못하고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 쪽의 벽에 구멍을 내어 그 구멍을 통해서 부처님을 뵈오면서 합장 공경을 올렸다.
‘마간디야’라는 왕비가 있었는데
한편 꼬삼비 국왕 우데나에게는 또 다른 왕비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간디야였는데, 브라흐민 마간다의 딸이었다. 예전에 마간다는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부처님의 준수한 모습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모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자기의 딸 마간디야를 부처님께 바치겠노라고 제의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마간다여, 여래가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기 직전에 마왕은 요염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의 딸들을 나에게 보내어 유혹하였더니라. 그렇지만 여래는 모든 감각적인 욕망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런 제의에 대해 아무런 동요가 없었느니라. 그렇거늘 하물며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으로 가득 찬 여자를 내가 어찌 즐거이 생각하겠느냐 ? 여래는 그 여인의 털 한 올조차도 여래의 몸에 닿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간디야의 부모는 사람의 몸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를 여실히 깨달아 아나가미 필라를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딸을 동생에게 맡긴 다음 출가하여 빅쿠ㆍ빅쿠니가 되었다. 그들 부부는 머지 않아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다.
한편 그들의 딸 마간디야는 자기의 용모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큰 수치심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 일로 입은 창피함을 반드시 갚아주리라고 별렀다.
얼마 뒤에 그녀의 후견인이던 그녀의 숙부는 왕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서 마간디야를 꼬삼비 국왕 우데나에게 바쳤다.
부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그래서 왕비가 된 마간디야는 사마와띠 왕비가 부처님을 존경하여 벽에 구멍을 내고 부처님께 존경의 예를 올린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이 부처님을 곤경에 빠뜨릴 기회라고 생각하여 왕에게 이 사실을 왜곡하여 보고했다. 즉, 사마와띠 왕비는 부처님과 매우 불결한 내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데나 왕은 그 말을 대수롭게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그 구멍을 보았으나 별다른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간디야의 농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삼현금속에 뱀을
왕은 사마와띠의 궁에서 며칠 머문 다음에는 마간디야의 궁에서 머물곤 하였다.
어느 때 왕은 마간디야의 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간디야는 이제 며칠이 지나면 왕이 사마와띠 궁으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자 질투심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간디야는 또다시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왕이 언제나 삼현금(三絃琴)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남몰래 삼현금의 빈 통 속에 뱀 한 마리를 넣어 두었다. 그런 다음 왕이 사마와띠의 궁에 도착하자 왕의 신변이 염려된다면서 왕이 사마와띠의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침실을 조사해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삼현금 속의 뱀을 침상 위에 풀어놓았다.
뱀은 쉬잇 ! 소리를 내며 침상 위에서 똬리를 틀었다. 마간디야는 그것을 보이면서 이것은 왕비가 왕을 독살하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왕도 마간디야의 말을 믿게 되었다.
왕은 분노하여 사마와띠 왕비를 왕궁 뜰에 세우고 그 뒤에 오백 명의 궁녀들을 세웠다. 그런 다음 독을 묻힌 화살을 시위에 먹여 직접 사마와띠를 겨냥하여 쏘았다.
이때 사마와띠 왕비와 오백 명의 궁녀들은 이에 조금의 증오심과 원한심도 갖지 않고, 도리어 왕과 마간디야에게 자비의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우데나 왕의 활 솜씨는 아주 유명했다. 전하는 말로는 그가 쏜 화살은 바위도 꿰뚫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의 경우에는 그가 쏜 화살이 왕비를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었는데, 그 화살 끝에는 연꽃이 매달려 있었다.
왕은 이 신비한 결과를 보고는 마침내 왕비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다는 것을 알아 사마와띠 왕비와 궁녀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부처님과 빅쿠들을 궁으로 초청하여 그녀들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계속되는 마간디아의 음모
그렇지만 마간디아의 음모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의 숙부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마와띠 왕비의 궁에 불을 지르라고 사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비 궁이 불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궁 안에 있던 왕비와 궁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좌선 수행에 마음을 집중했고,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사까다가미를, 어떤 사람은 아나가미를 성취하였다.
사마와띠 왕비의 궁에 불이 났다는 소식은 곧 우데나 왕에게도 전해졌다. 왕은 급히 화재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서 궁 안의 사람들을 구해 낼 도리가 없었다.
우데나 왕은 이것이 마간디야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눈치를 보이면 마간디야가 자기 소행이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 뻔했으므로 교묘하게 증거를 잡아내리라 마음먹었다.
왕은 마간디야를 의심하는 빛을 전혀 보이지 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이제야 안심이다 ! 사마와따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내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서 늘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이제는 안심이다 ! 누가 이런 좋을 일을 해준 것일까 ? 아마 나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한 일일 테지.」
왕이 이런 말을 하며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옆에 있던 마간디야는
「대왕이시여, 이 일은 제가 한 것입니다. 제가 제 숙부에게 부탁하여 사마와띠와 궁녀들이 모두 궁 안에 있을 때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지른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짐짓
「틀림없이 그랬겠지.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소. 당신 이상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나는 당신에게 큰 보상을 해야겠소. 그리고 이 일을 도운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 그들을 어서 불러 모으시오.」
그래서 마간디야는 숙부를 비롯하여 이 사건을 도운 친척들을 불러 들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간디야의 친척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친척이라면서 궁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는 동안 왕은 왕궁 뜰에 깊은 구덩이를 여러 개 파두었다가, 마간디야를 비롯하여 이번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하체를 하나씩 하나씩 그 속에 묻었다.
그런 다음 그들의 머리 위에 볏집을 깔고 불을 붙여서 그들의 머리와 피부가 타 들어가는 고통을 맛보게 하였다.
그런 잔혹한 형벌로 그들을 꾸짖고 나서, 우데나 왕은 커다란 쟁기로 땅을 갈아 그 들을 흙과 범벅이 된 상태로 죽여 버렸다.
빳쩨까붓다를 화장시킨 과보로
이 사건은 큰 반향을 일으켜서 빅쿠들 간에도 화제가 되었다.
어느 날 법당에 모인 빅쿠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들어오시었다. 빅쿠들은 어째서 사마와띠같이 선량한 사람이 불에 타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과보의 전말을 이렇게 이야기해 주시었다.
다만 금생만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마와띠 왕비와 오백 명의 궁녀들은 전생에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았던 것이다.
전생의 어느 때 그녀들은 왕비와 궁녀로서 왕과 물놀이를 갔었다. 물놀이가 끝난 다음 그녀들은 어디에든 가서 따뜻한 불을 쬐고 싶었는데, 그때 마침 근처에 초막이 하나 있었으므로 그녀들은 거기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 안에는 마침 빳쩨까붓다께서 깊은 선정에 들어 계시었다.
이 빳쩨까붓다께 화상을 입게 한,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어 큰 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빳쩨까붓다를 화장시켜 버렸다. 그들은 그 행위가 원인이 되어 그 후로도 여러 번이나 불에 타죽는 과보를 받았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의 세 편 게송을 읊으시었다.
마음 집중은 죽음을 벗어나1)는 길
마음 집중이 되어 있지 않음은 죽음의 길
바르게 마음이 집중된 사람은 죽지 않는다.
마음 집중이 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
이 같은 진실을 완전하게 알아
항상 마음을 집중시키는 현자에게 있어
마음 집중은 그에게 법희(法喜)를 주고
그를 언제나 성스러운 길2)에 머물 게 한다.
현자는 지속적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여
내적 고요함과 평화를 성취하나니 닙바나3)는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난 경지,
닙바나는 위없는 참된 기쁨이며 행복이다.
1) 죽음을 벗어남 :
영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담마를 깨달아 빠리닙바나(열반)에 들면 다시는 태어나지(윤회) 않으므로 죽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벗어난 다고 하신 것이다.
2) 성스러운 길 :
담마를 깨달은 성자, 또는 깨달아 가는 수행자들이 걷는 길.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참답고 성스러운 행위, 청정하고 의연한 행위 속에서 자유를 누린다.
3) 닙바나(Nibbana) :
깨달음, 또는 진리를 깨달아 얻는 마지막 경지. 이 경지에 이름으로써 삶의 둑카로부터 벗어난다. 불교가 이상으로 삼는 경지로, 모든 수행자는 이 경지를 목표로 수행한다. 열반(涅槃).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Nirvana).
(거해스님역)
법구경 21번게송과 22번, 23번 게송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연담은 거해스님의 것으로서 보기 쉽게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였다.
마음집중이란
21-23번 게송은 마음집중에 대한 것이다. 마음집중을 삼매라고 표현할 수 도 있지만 법구경 인연담에서는 ‘알아차림’에 대한 것에 더 가깝다.
인연담에서 ‘측실’격인 마간디아왕비가 ‘정실’격인 사마와띠왕비을 죽이기 위하여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사마와띠왕비와 쿠주따라 여자시종을 따르는 궁녀들은 불난 중에서도 마음집중을 하여 명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까다가미(사다함)를, 또 어떤 이는 아마가미(아나함)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마음집중이 삼매수행이 아니라 위빠사나 통찰수행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법구경인연담의 특징
법구경인연담은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에 의하여 편집되었다고 한다. 청정도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붓다고사는 담마빠다(법구경)에 대한 주석을 하였는데, 이것이 350개로 이루어진 법구경인연담의 시초라 한다.
붓다고사가 법구경에 대한 주석을 한 이유는 법구경의 게송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 인연담은 주로 부처님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알고 보면 전생의 인연에 따른 것이라는 형식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법구경인연담은 매우 교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 교육용으로 적합한 듯하다. 외국의 자료에 따르면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법구경 인연담을 들려줌으로서 인과응보등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교육용으로서도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 내용에 대하여
이처럼 법구경 인연담이 전생에 일어났었던 일이 현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식의 업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종종 비현실적인 내용도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하여 어떤 불자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초기경에서 비현실적인 묘사로 된 부분에 대하여 설령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이라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회의론자도 있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경은 아마도 사띠빳타나경(염처경)이나 마하사띠빳따나경(대념처경)뿐일 것이다.
이처럼 회의론자들은 자신들의 눈이나 귀로 확인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부처님의 8만4천이나 되는 법문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어 있다. 어느 경이든지 무상, 고, 무아를 설하고 연기에 대한 가르침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설한 8만4천 법문에서 비록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내용이 있을지라도 내용중에 무상, 고, 무아, 연기등 근본 가르침이 실려 있다면 이는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계승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비현실적인 내용을 포함하여 설법을 하셨을까.
8만4천 법문을 한 이유
일반적으로 부처님이 8만4천 법문을 한 이유는 사람들마다 모두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한 것을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ṃ, 청원경, S6.1.1)에서 볼 수 있다.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ṃ-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이렇게 여러종류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법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근기가 낮아서 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다 보니 8만4천가지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하신 것이다.
중생의 기질이 달라서
중생의 기질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중생의 기질에 대하여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
이렇게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였다. 이렇게 중생의 기질에 따라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이는 재가자들이 부처님의 담마를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담마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재가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법문 대신 먼저 보시(danā), 지계(sīla), 생천(sagga)을 설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방편설이다.
방편없이 곧바로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늘 듣는 제자들에게는 대기설법 또는 방편없이 곧바로 담마를 설명하였는데, 이를 아비담마라 한다. 아비담마는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설하였기 때문에 비방편설법, 비대기설법이라고 한다.
이런 아비담마는 후대에 쓰여졌다기 보다 부처님 당시부터 부처님이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법의 체계화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후 붓다고사등 기라성 같은 장로비구들과 최근에는 미얀마의 ‘레디사야도’에 이르기까지 논쟁과 탁마를 통하여 정착되었다고 한다.
믿을 것은 오로지 사띠빳타나경(염처경)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들은 초기경에서 조금이라도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설령 그것이 무상, 고, 무아,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지라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믿을 것은 오로지 사띠빳타나경(염처경) 한 종 뿐만 있는 것으로 보이는 회의론자들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말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한 경에 대한 이야기들 뿐이다.
그런 회의론자들이 있어서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성자가 되는 조건으로 ‘의심’에 대한 것이 있다.
예류자(수다원)가 되는 조건
경에서 예류자(수다원)가 되는 조건으로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이는 초기경에도 나와 있다.
10.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야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īlabbataṃ vāpi yadatthi kiñci, 시-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ābhiṭhānāni abhabbo kātuṃ 차 짜-비타-나-니 아밥보 까-뚱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와 쿳다까빠타 (Khp 7), 전재성님역)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예불문으로 사용 되는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에서 부처님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조건으로서
1)Sakkāyadiṭṭhi (삭까-야딧티, 유아견)
2)vicikicchitañca 위찌낏치딴짜, 의심)
3)Sīlabbataṃ (시-랍바땅, 계금취견)
위 세가지가 타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삼세에 대한 의심 16가지
이 세 가지중에 특히 의심에 대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그런 의심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잘 설명되어 있다.
6.
그가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이런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즉, 과거에 대해서
“나는 정말 과거에 존재했는가
아니면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되었을까?”
라고 언급하신 다섯 가지 의심과,
미래에 대해서
“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
아니면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어있을까?
나는 미래에 어떠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되었다가 무엇이 될까?”
라고 언급하신 다섯 가지 의심과,
현재에 대해서
“지금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도 안으로 의심이 있다.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라고 언급하신 여섯 가지 의심이 모두 사라진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6절)
회의론자들은 과거에 대하여 5가지, 미래에 대하여 5가지, 현재에 대하여 6가지 하여 모두 16가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삼세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나 같다. 그것은 결국 ‘연기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
연기법은 조건법과 같은 것이다. 모든 법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눈을 예로 든다면 부처님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S.ii.72)”라고 하셨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재도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도 역시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론자들이 삼세에 걸쳐서 “나는 무엇인가”“나는 정말 미래에도 존재할까”라는 등의 16가지를 의심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고 따라서 해탈과 열반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눈이 나쁜 이들은
어떤 이들은 눈이 나빠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보통사람들 보다 눈이 좋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몽골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평균시력이 2.0이라서 보통사람들 보다 더 잘 본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가까이서 고막이 터지도록 말해도 못 알아 듣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나이 든 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잘 듣기 위해서는 보청기를 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남들이 잘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매우 민감한 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고가의 음향장비를 구비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귀는 매우 예민한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하지만 박쥐만큼 더 예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쥐는 인간의 가청영역을 초월하여 고주파수의 소리도 듣고 어둠속에서도 비행을 하기 때문이다.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물안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안에 사는 개구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은 오로지 우물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항상 동그란 형태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물 밖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에 대한 인식은 다를 것임에 틀림없다.
태어나서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은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들어서는 알고 있지만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또 다른 세상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비현실적이거나 초월적인 내용이 들어 갔다고 하여 못 믿겠다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인식수준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일것이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전생, 윤회, 지옥, 천상, 육도, 삼계 등과 같은 말이 나오면 눈으로 보여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자신의 눈이나 귀 또는 인식으로 인정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폐해는 이들 회의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불교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이나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듯이
부처님은 인식수준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 그래서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싸리뿟따]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마핫티파도빠마경-Mahāhatthipadopama Sutta-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28, 전재성박사역)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코끼리의 발자취에 비유하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것이 코끼리 발자국인데, 그 발자국안에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모든 가르침을 포용한 것이기 때문에 회의론자들의 사량분별로 진위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조건으로서 법에 대한 의심의 극복을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2012-01-0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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