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 마하시 사야도의 집성제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5. 17:40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 마하시 사야도의 집성제 법문

 

 

 

사성제는 언제 들어도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이런 사성제에 대한 법문을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을 통하여 보았다.

 

세 가지 갈애가 결국 다시 태어남을

 

이번 법문집의 내용은 집성제(諦)에 대한 것이다. 집제(集諦, 사무다야 삿짜. Samudaya-saccā)라고도 번역되는 집성제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초전법륜경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Idam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samudayo ariya saccām:      둑카사무다얌 아리야삿짬

Yayam tahā ponobhavika            야얌 딴하 포노바위까

nandiragasahagata                  난디라가사하가따

tatra tatrabhinandini . . .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seyathidam,                        세이야티담

kamatahā,                         까마딴하

bhavatahā,                        바와딴하

vibhavatahā.                      위바와딴하

 

“비구들이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초전법륜경-Setting Rolling the Wheel of Truth, 집성제)

 

 

 

 

 

 

짯따리 아리야삿짜니( Cattāri Ariyasaccāni 사성제음악동영상

 

사성제(짯따리 아리야삿짜니).docx  사성제(짯따리 아리야삿짜니).pdf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하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이렇게 괴로움의 원인은 명확하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는 이런 세 가지 갈애가 결국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 된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이 세 가지 갈애가 남아 있는 한 끊임없이 윤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

 

불자들에게 있어서 윤회라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이는 불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윤회를 믿을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스스로 불자라고 칭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일반적으로 단멸론자들이 부른다. 불자라기 보다 단멸론을 주장하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불교탈을 쓴 단멸론자의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아(아트만)]라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고, 육체[]는 무상하게 변해가다가
목숨[생명]이 끊어지면 연기법에 따라 육체[]와 함께 정신[수상행식]도 소멸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멸론자)

 

 

이것이 단멸론자 들이 주장하는 윤회부정에 대한 것이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다.

 

이런 단멸론자들은 주장을 보면 경전상의 부처님의 말씀을 교묘히 왜곡하여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이제 막 불교를 접하려는 이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단멸론자들은 왜 생겨났을까.

 

오취온이 집성제라고?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자는 것이 가장 큰 케치프레이즈이다. 그러다 보니 윤회없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경에 대한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오온오취온으로 구분하여 오취온만 멸하면 오온은 고와 무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과 함께 자연스럽게 소멸한다는 교묘한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오취온은 고성제에 속한다.

 

이렇게 오취온이 고성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는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오취온을 집성제라고 어이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성제와 집성제도 구분하지 못하는 단멸론자들의 주장은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이 그토록 우려 하였던 명백한 단멸론이고, 그런 주장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주장하는 것을 보면 마치 고장난 녹음기를 트는 듯 하고 때로는 또라이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단멸론자들이 현재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지따 케사캄발린의 유물론

 

부처님 당시에도 단멸론이 있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라 하여 여러가지 신흥사상이 난무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 단멸론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지따 케사캄발린은 어떤 주장을 펼쳤을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의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 유물론

 

아지따는 일체가 지·수·화·풍의 네 원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현세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네 원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의 주석)

 

 

 이와 같은 아지따의 주장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은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으면, 몸을 이루는 땅의 요소(地大), 몸 밖의 생명이 없는 땅의 본체(덩어리)로 돌아간다. 이 말의 의미는, 살아있는 몸에 있을 때에는 딱딱함, 거친 것으로 나타나는 땅의 요소(地大)가 죽고 나서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땅의 요소와 융합하고 이어서 땅의 물질로 변했다가 다시 나무와 식물 따위의 땅의 요소로 변환된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물의 요소(水大)는 생명 없는 물의 본체(덩어리)로 흘러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축축함, 유동성은 물의 본체의 축축함과 유동성으로 변한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불의 요소(火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불의 본체와 합쳐지고, 살아있는 몸에 있던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바람의 본체로 흘러 들어간다. 모든 인지기능(, , , 혀 등의 감각기관들)은 우주로 이동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유물론자들은 허무주의자들로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안식이나 이식 등 을 개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단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허무주의자들은 어떠한 실재나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 가치까지도 부정하여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무()의 사상이라 볼 수 있다.

 

단멸론자들의 특징 두 가지

 

단멸론자들은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실증주의 이다. 감각적 인지주의란 한 마디로 보이는 것만 믿고, 들리는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과학적 실증주의란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한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상에 등장하는 목신, 천신 그리고 신통, 윤회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전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심하다 보니 그들이 믿고 따르는 경전은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경과 사띠빳타나경(염처경)이나 마하삿띠빳타나경(대념처경)등 수행관련 경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에서도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 않는 단계'에 대하여 말씀 하였다.

 

'다시 돌아오 않는 단계'는 불환자를 말한다. 수행의 네 가지 단계중에서 세 번째 과위로 6도 윤회에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천상에 태어나는 과위를 말한다. 집착을 완전히 끊어 버리면 마지막단계인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경전에서 사향사과에 대한 성자들의 이야기는 윤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윤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내생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단멸론자들에 있어서 윤회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와 같다. 그래서 윤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내생과 윤회에 대한 경전상의 내용이 모두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경을 왜곡하며 갖은 논리로 부정한다.

 

수행자들은 함부로 수행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수행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행관련 이야기를 해 보았자 비난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 한다. 예를 들면 "수행한다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일까"등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비난 받지 않은 도는 도가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수행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수행이야기를 해 보았자 본전도 못 건진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수행관련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수행처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수행을 하면 할 수록 윤회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어떤 이는 천주교를 믿다 불교에 입문하였는데, 처음에는 윤회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미얀마에서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기 시작하자 부처님의 말씀이 틀림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행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윤회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각자 얼굴이 다르게 태어 났을까 그리고 왜 타고난 성향은 모두 다른 것일까. 이것 한가지만 보아도 윤회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재생과 윤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경전에 명확하게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오래 전에 쓰여 졌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견해이다.

 

이렇게 재생과 윤회에 대하여 의심하고 반신반의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풍부한 전생이야기를 집성제 법문에 실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과 결부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대단히 잘못된 견해라 하였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감명받는다. 특히 사성제에서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견주어 보고 그 가르침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믿고 따른다. 이것이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 즉, 삿다(saddha, 信)를 말한다. 이런 믿음은 유일신교에서나 보는 맹목적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가졌을 때 경전에 목신이나 천신, 내생과 윤회, 신통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더라도 온전히 받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령 목신이나 천신, 내생과 윤회, 신통에 대한 내용이 자신 감각적 인지로 알 수 없고, 과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과감하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해 버린다.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단멸론자들은 눈, 귀와 같은 물질적 형태가 스스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또 감각기능에 속하는 의식(, mana)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하나로 표현되는 의식의 소멸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우주와 융합되거나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단멸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고 한다.

 

 

“바보이든 현명한 이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보는 내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도 내생에서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과보를 누리지 않는다.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린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이것이 유물론자, 허무주의자, 단멸론자들의 견해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멸론 또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라 한다.

 

이처럼 살아있을 때만 존재하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부처님은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라고 초전법륜경에서 말씀 하셨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단멸론자들의 견해는 집성제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전에도 삶이 있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

 

이렇게 단멸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죽어서 어떻게 될까. 그들의 말대로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고 내생도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악행을 피하거나 선행을 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과 같이 정말로 죽은 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죽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주장하던 바대로라면 살아있는 자아(앗따, atta)나 유정(有情, 삿따. satta)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지따가, 사람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도 자아와 유정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쾌락을 누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라고 합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단멸론자들은 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두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죽음 이전에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탐진치를 소멸하여 열반에 들지 않는 한 지은 업에 따라 각자 적합한 세상에 다시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이 윤회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때문이라 한다. 그것은 집성제에 있어서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하며 이런 갈애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아는 더욱 더 강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수행을 논한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자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모든 쾌락을 누리자는 말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내생도 없고 윤회도 없고 죽으면 끝인데 무슨 수행이 필요할까.

 

 

단멸론자들의 말로는

 

이렇게 공덕도 쌓지 않고 악행을 삼가지 않는 쾌락주의적 견해를 가진 단멸론자들의 말로는 어떨할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일 죽은 뒤에 내생이 있다면, 이들 악업은 당연히 좋지 못한 불선과보를 맺을 것이지만, 죽은 뒤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죄업은 소멸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런 죄업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따른 모든 과보로부터 자유로이 탈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같은 허무주의적 사상이 크게 와 닿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죽기 전의 바로 현생에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쾌락의 대상을 갈구합니다. 그 때문에 즐겁게 사는데 전념합니다. 이와 같이 맹렬하게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에 따른 업과 행을 낳고, 매 번 행위를 할 때마다 새로운 생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즐거움이 있고, 현생의 쾌락을 향유하게 되며, 이 갈애의 충격파는 식의 흐름인 삶의 연속체(바왕가)에 전해집니다. 그 결과 죽음과 가장 가까운 속행의 식, 또는 ‘업을 결정짓는 의식’이, 죽을 때 나타나는 표상인, ,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 죽음의 마음(쭈띠 찌따, cuti-citta)과 함께 죽음에 임하면, 세 가지 표상 중 어느 하나로 조건 지어진 새로운 생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단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갈애 때문에,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악행 외에는 지은 게 없기 때문에 그가 받을 새로운 생은 낮고 비참한 세계인 악처일 가망성이 매우 큽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단멸론자들은 지금 여기서 즐겁게 살자고 한다. 내생은 생각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견해를 가진 것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갈애 때문이고,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될 재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생전에 되는 살고 제멋대로 행동한 과보로 인하여 비참한 세계 즉, ‘악처에 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다는데

 

마하시 사야도는 집성제 법문에서 갈애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요인이라 하였고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전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전생이야기를 하면서 단멸론자들에 대해서도 언급도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斷滅論, 웃체다 와다, uccheda-vāda)과 결부시키려 하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튼 대단히 잘못된 시도라고 해야겠습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위 글에서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마하시 사야도가 법문하던 1960년대 당시 미얀마에서도 단멸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던 듯 하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단멸론자들의 주장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사성제중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이 일어나는 요인에 대한 것이다. 고통이 일어나는 요인은 초전법륜경에 설명되어 있듯이 갈애 때문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 세가지 갈애 때문에 재생이 일어나고 윤회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배고픔, 목마름,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과 욕망에 얽혀서,

늘 여기저기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다.

 

 

다음은 초접법륜경에 있어서 집성제에 대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내용이다. 편의상 문단을 나누고 소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중요사항을 컬러풀하게 하여 강조 하였다.

 

 

 

 

마하시 사야도

(29 July 1904 – 14 August 1982)

Mahasi Sayadaw U Sobhana

 

 

 

 

 

마하시 사야도의 집성제 법문

 

 

집성제()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Idam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samudayo ariya saccām:      둑카사무다얌 아리야삿짬

Yayam tahā ponobhavika            야얌 딴하 포노바위까

nandiragasahagata                  난디라가사하가따

tatra tatrabhinandini . . .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seyathidam,                        세이야티담

kamatahā,                         까마딴하

bhavatahā,                        바와딴하

vibhavatahā.                      위바와딴하

 

“비구들이여,

집성제(集聖諦)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고 만족을 찾는 것이다.

무엇이 갈애인가?

 

그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담마짝까빠왓따나경-초전법륜경-Setting Rolling the Wheel of Truth, 집성제)

 

 

이들 세 가지 갈애1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諦)이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ā-tahā),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자 하는 탐욕이다.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hā),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을 지니고 영원한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인 갈애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재생의 괴로움에서부터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괴로움의 근본 원인입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의사가 병을 치유할 수 있도록 병의 원인을 찾아내서 진단을 내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몸소 이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를 관통하신 결과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하셨습니다.

 

태어남을 가져오게 하는 뽀노바위까(ponobhavikā, 감각적 욕망)

 

집제集締는 굶주림으로 갈구하는 갈애 그 자체입니다. 이 갈애, 즉 땅하tahā는 목이 마르고 배고픈 느낌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애는 감각대상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입니다.

 

 

감각 대상에 대한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뽀노바위까, ponobhavikā)2합니다.

 

 

2.

뽀노바위까(ponobhavikā) pono(다시)+bhavikā(존재하게 하는 것)의 합성어로,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 또는 ‘재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술어는 갈애(taha)가 있는 한 윤회는 다시 태어남(jāti)을 일으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청정도론(Vis.XVI.61)과 대념처경, 주석서에 따르면 이 뽀놉바위까를 다음과g17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이라는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시 태어남을 만든다’는 뜻이 ‘뿌놉바와(punobbhava)’이고, ‘습관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것’이 ‘뽀놉바위까(ponobbhavikā)’이다.

 

 

중생이 갈애에 붙들려 있는 한 재생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재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갈애는 감각대상에서 즐거움을 찾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마치 기름이나 염료액이 표면에 퍼진 상태로 있다가 배여 나오듯이 이 갈애는 즐거워 보이는 감각대상을 좋아하며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이유

 

이 갈애는 여기저기 즐길 거리를 찾아 다닙니다. 쾌락을 찾는데 절대로 지치거나 지겨워하는 법이 없고 즐거워 보이는 감각대상이 있으면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의 경우, 상류층 사람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하류층 사람들의 삶이 결코 매력적이거나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태어난다 해도 자신들의 삶을 여전히 즐기며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축생의 삶이 즐거운 것이 못되고 혐오스럽고 끔찍스럽게 생각됩니다. 우리가 뱀이나 벌레의 형체를 연상하는 것은 역겹습니다. 그렇지만 축생으로 태어날 경우에는, 중생들은 자신의 형체를 아주 좋아하고 그 삶을 즐깁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 만족할 것을 찾는 갈애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에 대하여 모든 존재, 모든 감각대상, 그 어느 곳에서든 여기저기서 즐길 것을 찾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짬뻬야 용왕과 우빨리 왕비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짬뻬야 용왕 이야기3

 

 

3.

 짬뻬야 용왕 이야기는 본생담의 짬뻬야 자따까(Campeyya Jātaka)(J.506)에 나온다.

 

 

보살은 전생의 어느 때 쌈빠 강 부근의 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짬뻬야라는 용왕이 누리고 있는 즐거운 삶을 부러워하게 된 보살은 보시와 지계의 선업을 쌓는데 매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죽은 뒤에 용의 세계에 화생化生하게 되었고 이어서 완전한 형체와 모양새를 갖춘 용으로 짬뻬야 용왕의 왕좌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 nāga)은 뱀의 일종입니다. 사람에서 뱀으로 재생한다는 것은 정말로 무섭고도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보살은 자신의 혐오스럽고 끔찍스런 새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보시와 지계라는 선업의 과보로 나는 육욕천六欲天4 중 어느 한 곳에 날수도 있었다.

 

 

4.

육욕천六欲天은 삼계三界 가운데 하나인 욕계欲界에서 가장 높은 세계이다. 욕계천상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욕탐을 즐기는 천상세상이다. 보통 보시와 지계를 닦아서 태어난다고 한다. 여기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삼십삼천三十三天, 야마천夜摩天, 도솔천兜率天, 화락천化樂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여섯 하늘이 있다.

 

 

하지만 내가 용왕의 즐거움을 바랐기 때문에 이 파충류의 세계에 재생하였다. ! 뱀으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리라.”보살은 심지어 자살할 궁리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수마나라는 젊은 용녀龍女가 다른 젊은 용녀들에게 새 왕을 환대하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젊은 용녀들은 아름다운 천녀와 여신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래, , 음악으로 자신을 환대하는 아름다운 여신들을 보고 짬뻬야 용왕은 자신의 용궁이 마치 천인의 궁전인 것처럼 생각되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천인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용녀들과 함께 환락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살이었기 때문에, 현실감각을 쉽게 되찾아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바라밀, 즉 보시와 지계 같은 덕성을 더 닦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을 잘 실천하여 짬뻬야 용왕은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서 숲의 은둔처를 찾아가 계율을 잘 지켰습니다.

 

이 짬뻬야 용왕이야기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파충류의 몸은 끔찍하고 혐오스럽다는 것입니다. 처음 용의 생을 받았을 때 보살도 자기의 새로운 생을 끔찍하고 혐오스럽게 보았지만 매력적인 용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게 되어 마치 신들의 거처에 사는 것처럼 용왕의 삶을 즐기고 기뻐하였습니다.

 

보살이 처음에는 용의 삶을 혐오하다가 나중에 그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재생이 일어난 곳이면 어디에서나 여기저기 즐길 것을 찾는 갈애 때문입니다.

 

보살이 인간계에서 가난뱅이였을 때 용왕이 누리는 즐거운 삶을 바라며 세운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소원, 또는 갈망 역시 갈애였습니다. 이 갈애는 부처님께서 ‘다시 태어남(再生, 뽀노바위까. ponobhavikā)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용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모에 대한 자만심이 강한 결과

 

우빨리 왕비 이야기5

 

 

5.

우빨리 왕비 이야기는 본생경, 앗사까 자따까(Assaka-Jātaka)(J.207)에 나온다.

 

 

우빨리 왕비는 빠딸리를 수도로 둔 까시국 아싸카왕의 정실왕비였고 빼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고대의 왕들은 왕국에서 제일 매력적인 처녀들을 골라서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왕비들은 매력과 아름다움을 자랑하였습니다.

 

우빨리 왕비는 그 미모와 매력으로는 여러 다른 왕비들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아싸카 왕은 왕비의 매혹적인 미모에 반하여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아름다움과 매력이 아직 절정기에 있을 때 우빨리 왕비는 천상 세계로 갔습니다. ‘천상 세계로 가다’라는 말은 왕족의 죽음을 나타내는 미얀마의 문화적인 관례어 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상으로 돌아가다’6 라는 말도 불교승려의 죽음을 뜻하는 단순한 문화적인 관례어 입니다.

 

 

6.

미얀마에서는 비구가 죽었을 때 이렇게 천상, 구체적으로는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되돌아간다고 관습적으로 말한다.

 

 

죽은 사람은 과거 업의 행위(kamma)가 조건 지은 대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보통 그렇듯이, 우빨리 왕비는 ‘왕비는 천상 세계로 갔다’라는 문화적 용례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낮은 딱정벌레의 세계에 재생하였습니다.

 

시신을 방부처리 하고

 

총애하는 왕비가 죽자, 아싸카왕은 맹렬히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사로잡혀 왕비의 시신을 기름으로 방부처리하고 유리관 속에 넣어 자신의 침대 밑에 두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왕은 음식을 들거나 자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서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왕실친척들과 현명한 대신들이 존재의 무상함과 조건 지어짐의 본성을 일깨워주면서 왕을 위로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관속의 시신은 기름으로 방부 처리되어 현대의 화학 방부제로 처리한 것처럼 잘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는 왕비가 마치 관속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한 시신의 모습은 왕의 타오르는 슬픔과 비탄에 기름을 끼얹는 것 같았고, 그 슬픔은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신통지를 지닌 선인이

 

그때 보살은 히말라야의 숲속에 사는 신통지(神通智, 아빈냐. abhiññā)7를 지닌 선인仙人이었습니다.

 

 

7.

여기서의 아빈냐(abhiññā)는 신통지神通智로서 ① 신족통神足通 ② 천이통天耳通 ③ 타심통他心通 ④ 숙명통宿命通 ⑤ 천안통天眼通의 오신통五神通을 가리킨다.

 

여기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얻는 번뇌가 다한 경지인 ⑥ 누진통漏盡通을 합치면 육신통六神通이 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⑥ 누진통을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오신통五神通을 나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선四禪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선을 신통의 토대가 되는 선(padaka-jhāna)이라고 한다.

 

 

신통지로 세상을 두루 둘러보던 보살은 극도의 슬픔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아싸카왕을 보았습니다. 또한 왕을 불행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보살은 선정의 힘으로 아싸카왕 궁전의 정원으로 갔습니다.

 

한 젊은 바라문이 보살을 만나러 오자 보살은 그에게 아싸카왕에 대해 물었습니다. 젊은 바라문은 왕이 얼마나 비탄에 잠겨 있는지를 설명하고 왕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보살은,

 

“나는 왕을 모르지만 만약 왕이 와서 요청한다면 왕에게 왕비의 현생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바라문은 왕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대왕님,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을 가진 선인이 지금 왕궁정원에 와 있습니다. 선인은 돌아가신 왕비님의 현생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시는데, 가서 그 선인을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즉시 마차를 타고 왕궁정원으로 떠났습니다. 도착한 후 왕은 선인에게 정중한 예를 표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님, 존자님께서 우빨리 왕비의 현생을 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선인이 그렇다고 하자 왕은 왕비가 지금 어디에 재생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대왕님, 우빨리 왕비는 자신의 아름다운 용모를 좋아하였고 또 미모에 대한 자만심이 강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에만 몰두하였고, 보시와 지계 같은 공덕행을 쌓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왕비는 낮은 생으로 떨어졌습니다. 왕비는 지금 바로 이 정원의 딱정벌레로 재생하였습니다.

 

선인은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이야기 하였습니다.

 

거만한 사람은 악처에

 

, 가문, 교육, 지위, 신체적 아름다움 따위의 특권을 누리는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오만함을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스스로의 자만과 자존심에 둘러싸여 공덕행을 짓는데 소홀해집니다. 그들의 사람 됨됨이에서 겸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찌마니까야(中部), 소업분별경小業分別經에서, 그렇게 오만하고 이름 높고 거만한 사람은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공경할 만한 분들께 공경을 표하고 겸손함을 보이는 겸허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통치 국왕의 정실왕비로써 아주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매우 아름다웠던 우빨리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왕비는 자신의 빼어난 자질에 우쭐해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 분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깔보았습니다. 그러한 불선한 태도와 행동으로 그녀는 소똥이 사는 암 딱정벌레로 재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왕비의 이러한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싸카왕은 곧바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며 이를 부인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그럼 제가 암딱정벌레를 대왕님께 보여드리고 그녀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또 그녀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인은 신통지의 초능력으로 서원을 한 후 숫딱정벌레와 암딱정벌레가 왕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습니다. 소똥더미에서 숫딱정벌레가 왕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선인은 말했습니다.

 

“오, 대왕님. 뒤따라오는 암딱정벌레가 대왕님의 정실왕비였던 우빨리 입니다. 대왕님을 저버리고 지금은 숫딱정벌레가 어딜 가든 그 녀석만 쫒따라 다니는군요. 대왕님, 바로 얼마 전까지 대왕님의 정실왕비 우빨리였던 암 딱정벌레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왕은 선인의 말을 믿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내 왕비 우빨리 같이 그런 지적인 존재가 이런 암딱정벌레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업과 그 과보의 법칙을 완전히 믿지 않고 연기법에 설명된 대로 조건성, 즉 인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이란 존재가 한갓 딱정벌레에 불과한 낮은 존재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직도 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있는 이 정법시대正法時代에도 ‘사람이 죽으면 그보다 더 낮은 존재로는 재생할 수는 없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교법을 아직 듣지 못하던 암흑시기에, 그러한 재생의 이야기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의 지위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인간세계나 천상계에 갈 수도 있고 사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악업의 조건과 죽음 직전의 정신적 반응상태를 조건으로 해서, 낮은 존재로 재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선업의 조건과 죽음의 문턱에서 가졌던 선한 정신적 상태를 조건으로 낮은 중생계에 날 수도 있고 더 높은 인간과 천신의 세계에 재생할 수도 있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 자신의 주황색 가사에 집착을 했던 띠싸 비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결과 바로 그 가사에 집을 짓고 사는 이로 재생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을 때 죽은 개구리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는 죽어서 삼십삼천의 천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죽음의 순간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어 나게 된 증거로 제시되는 것들입니다.

 

전남편 보다 새로운 남편을 더 사랑한다

 

하지만 아싸카왕은 그러한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가 암딱정벌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왕은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암딱정벌레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왕은 그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선인은 서원을 한 후 신통력으로 왕과 암딱정벌레가 대화를 하고 왕과 시종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선인은 암 딱정벌레에게, “너는 전생에 누구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암딱정벌레는, “저는 아싸카왕의 왕비 우빨리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암딱정벌레야, 그럼 이제 너는 아싸카왕을 여전히 사랑하느냐? 아니면 이 숫딱정벌레만을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암 딱정벌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아싸카왕은 전생에 저의 남편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아싸카왕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즐기면서 자주 이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새로운 생을 살고 있고 아싸카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본생경 주석서에 나온 암 딱정벌레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나는 현생에서 아싸카왕을 죽여서 그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사랑하는 현 남편인 숫딱정벌레의 발을 씻어주면 좋겠습니다.

 

이 주석서의 설명으로는 암 딱정벌레의 대답이 매우 모질고 매정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인 숫 딱정벌레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 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통해서, 사별이 아니라 성격의 차이로 헤어진 전 남편과 아내간의 불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새로운 삶의 반려자를 만나 사랑하면서 사는 수많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말하고 있는 소견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빨리경전인 본생경本生經, 아싸카 자따까Assaka-Jātaka에서는 암딱정벌레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존자님, 저는 아싸카왕을 사랑했고, 저를 총애하던 사랑하는 남편 아싸카왕과 함께 한 쌍이 된 것을 즐기며 자주 이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지난 생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희미하게 덮어졌습니다. 저는 지금의 남편인 숫딱정벌레를 아싸카왕을 사랑했던 것 이상으로 사랑합니다.

 

‘더 사랑한다’라는 말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흥미롭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더 사랑한다’는 말은 새로운 남편을 위한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는 ‘백 번, 천번 더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abhinandini, 여기저기서 즐기는)

 

아싸카왕은 암딱정벌레의 그러한 모질고 매정한 말을 듣고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나는 왕비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차마 그 시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비는 너무나도 혐오스럽고 불쾌한 존재로 변해 버렸다.

 

왕은 옛 왕비 우빨리가 너무 싫어져서, 앉은 자리에서 이렇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가서 그 여자의 시신을 치워버려라.” 그리고는 목욕을 하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은 다른 궁녀를 왕비로 삼고 어질게 나라를 다스려 나갔습니다. 보살인 선인은 왕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는 히말라야의 거처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우빨리 왕비가 인간세계에 있을 때 인간의 삶과 왕비로서의 삶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왕비는 자신이 암딱정벌레로 재생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 업의 행위에 따라 암 딱정벌레로 재생하게 되자 곧바로 그 삶을 좋아하고 딱정벌레의 몸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왕비는 딱정벌레의 몸을 아싸카왕의 몸보다 백 배, 천 배 더 중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녀가 딱정벌레와 같은 낮은 존재에서 아주 마음 편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여기저기서 즐길 것을 찾는 갈애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기저기서 즐기는, Tatra tatrā-abhinandini(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로 재생하면 갈애로 인해 개의 삶을 즐깁니다. 돼지, , 오리로 재생해도 그 각각의 삶을 항상 즐깁니다. 사회 상류층의 부유한 부모를 가진 자녀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몹시 가난한 삶으로 전락하여 재생하지만 거기서의 삶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삶이 너무 좋아서, 가족의 품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려는 부모의 노력에 반항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이것을 좋아하고, 나타난 모든 감각 대상을 즐기는 것, 이것이 갈애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재생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새로운 재생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이제, 일찍이 다음으로 미루어 놓았던, 뽀노바위까(ponobhavikā, 다시 태어나려는 성향)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갈애는 좋아하고 집착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이를 좋아하고(태어나게 된 모든 존재를 좋아하는 것) 나타난 모든 감각대상을 즐깁니다.

 

갈애로 인해 자신의 삶이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여기고 이 삶이 영원히 지속되고 변하지 않으며 즐거운 대상들이 지속되고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운 대상들을 바라는 대로 유지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의도적 행위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선하거나 혹은 불선한 업의 생성(깜마, kamma) 또는 의도적 행위는, 새로운 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 가고 있을 때 이런 저런 선하거나 불선한 업이 그의 의문意門 나타날 것입니다. 또는 그 업을 행할 당시 얻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육처六處로 이루어진 ‘업의 표상(깜마 니미따, kamma nimitta)’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앞에서 말한 업의 결과로 받게 될 ‘태어날 곳의 표상(가띠 니미따, gatti nimitta)’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은 갈애 때문에 집요하게 붙어있어서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떠나지 못합니다. 마치 해질녘 산의 그림자가 지표면을 드리우고 감싸는 것처럼, 감각의 문에 나타나는 업의 감각대상,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은 죽어가는 이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평화로운 임종을 위하여

 

이러한 감각대상은 임종에 다다른 속행8, 즉 다른 말로는 ‘업을 결정하는 식(아비상카라 윈냐나, abhisankha-ra vin~n~a-n.a)’이라는 것에 의해서 집요하게 붙어있습니다.

 

 

8.

평화로운 임종을 맞기 위해서는 평소에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즉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야한다. 경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께서는 보시, 지계, 천상에 태어남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종 시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을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 특히 상좌부 전통에 의하면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을 중시하는데 임종 시에 부처님 가르침을 사유하거나 집중을 계발하거나 보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직접 이렇게 할 수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경을 읽어주거나 스님들을 초청해서 법문을 들려주거나 병자의 이름으로 보시를 하고 이를 당사자에게 일러주어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임종을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들에 따르면 임종직전, 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나는 대상은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중의 어느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①업(kamma): 그 생에서 지은 선업이나 불선업이 나타나기도 한다.

② 업의 표상(kamma-nimitta): 혹은 다음 생을 결정할 선업이나 불선업을 상지하는 표상이나 도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스님이나 절의 표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의사의 경우 환자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백정은 도살한 가축들의 신음소리를 듣거나 소 잡는 칼을 보기도 한다.

 

③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 죽어가는 사람이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의 표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천상에 태어날 사람은 천궁을 보기도 하고, 축생에 태어날 사람은 숲이나 들판을 보기도 하며,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지옥의 불을 보기도 한다.

 

임종직전에 속행(速行, 자와나)과정(이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때 이러한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며 이러한 것을 대상으로 하여서 다음생의 최초의 식識이 육도六道 가운데 하나에 생겨나서 그 생의 식識이 물 흐르듯 상속(찰나생멸)하면서 지속된다.

 

중생은 갈애가 있는 한 끊임없이 끝없이 윤회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 때 윤회도 끝이 나며, 윤회가 끝난 경지를 우리는 열반(nibbāna)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윤회는 갈애가 소멸될 때 다하게 되며, 이러한 갈애는 팔정도를 실천함으로 해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

 

 

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 삼집(三集), 존재경(Bhava-sutta)에는, ‘업은 들판9이고 식은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9.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 주석서(AA.ii.335)는 이를 “선업과 불선업이 자라는 장소(hāna)라는 뜻에서

 

업은 ‘들판(khetta)’이다.

(업과) 함께 생긴 업을 형성하는 식은 자란다는 뜻에서 ‘씨앗(biJ)’이다.

(씨앗을) 돌보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물과 같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kammam khettan, vinñāam biJn, tahā sincho’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선하거나 불선한 행은 재생연결식이 나타나서 성장할 장소의 역할을 합니다.

 

'업을 결정하는 식'은 재생연결식이 성장할 씨앗 노릇을 하며, 매 삶의 모든 감각대상을 즐기는 갈애는 그 씨앗을 성장하게 하는 습기나 물의 요소로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날 곳을 결정하는 마지막 마음

 

주석서에 따르면 여기서 재생의 조건을 만드는 '업 지음의 식', 의도적 업인 쩨따나(cetanā)를 수반하는 식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첫 번째 ‘의도적 행’과 함께 식이 일어나면 역시 다음의 ‘업의 행위’와 함께 식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나중에 일어난 의식도 ‘업을 결정하는 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임종이 임박한 속행10 , ‘업을 결정하는 식’이라고 해야 합니다.

 

 

10.

속행速行으로 옮긴 자와나(Jvana)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재빠름, 신속함'의 뜻을 가졌다. 인식과정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아비담마의 전문술어로, 일단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면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을 모두 자와나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정에서 자와나는 모두 7번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결정된 대상에 마치 벼락 치듯 재빠르게 그것을 이해하는 작용을 한다.

 

이 자와나의 단계야말로 의도적인 행위가 개입되는 곳으로서 선하고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들이다. 물론 아라한의 경우, 이 자와나는 선, 불선이 아니고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이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자와나는 인식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술어이고 개념이다. 아라한의 경우를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 속행은 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불선한 마음으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업을 초래하는 마음이, 업을 짓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인식과정과 인식을 벗어난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들 가운데서, 이 자와나 이외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개념이 개입되는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자와나 과정에서 지혜롭게 주의 기울임(如理作意 yoniso-manasikāra)의 마음부수를 극대화하여 이 마음이 불선이 되지 않고 선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임종에 다다른 속행 식에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씨앗이 물의 요소인 습기와 접촉할 때에만 비로소 싹이 트는 것과 같이, 이라는 씨앗은, 갈애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습니다.

 

한번 짓고 두 번 짓고 자꾸만 짓다 보면

 

이 갈애는 함께 있거나 아니면, 가까이에서 그것을 선도하면서, ,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다가 재생연결식을 일으킵니다.

 

죽음의 순간이 사라지면 곧바로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 다시 태어나는 마음(結生心), 재생연결식,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달라붙어있던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장소에서, 이에 따른 육체적 기반과 함께 새로 생겨납니다.

 

이에 따른 각각의 식과 함께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도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 뒤에는, 자신의 업력業力11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전 생애 동안 끊임없이 진행되는 생명의 연속체인 바왕가의 마음12, 즉 잠재의식(有分心)이 뒤이어 옵니다.

 

 

11.

업력業力으로 옮긴 깜마웨가(kamma-vega)는 인간의 의도적 행위, 즉 업을 가속화한다는 뜻이다. 동일한 업은 한번 짓고 두 번 짓고 하면 계속 그러한 업을 짓게 되는 가속도가 되어 점점 그러한 업의 방향으로 가게 되고, 비슷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업을 지속적으로 짓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업은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kamma-vega를 업력業力으로, 서양에서는 Kammic energy로 옮겼다.

 

 

12.

바왕가(bhavaga) bhava(有 존재)+aga(分 요소, 부분)의 합성어로, 한 존재의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life-continuum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에서 유분有分, 유분심有分心, 유분식有分識으로 한역하였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알기 어려운 마음이므로 굳이 서양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잠재의식적 생명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모든 마음은 대상없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또한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진다.

 

 

업과 갈애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새로운 생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갈애 없이 업만으로는 새로운 생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과거의 공덕행으로 인하여

 

아라한의 경우에는 과거의 공덕행으로 인하여 죽기 직전, 즉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기 직전에 선한과보가 올 것입니다. 실례로 씨왈리 존자13 는 엄청나게 많은 공양을 받았고 바꿀라 존자14는 완벽하게 건강하였다고 합니다.

 

 

13.

시왈리(Sīvalī)존자는 꼴리야(Koliya)왕의 딸인 숩빠와사(suppavāsā)의 아들이다. 그는 전생에 한 성을 7일 동안 물샐틈없이 포위한 악업 때문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7 7일을 있었다.

 

낳자마자 바로 말을 하였고 태어나는 날 바로 사리뿟따 존자가 데리고 가서 출가를 시켰는데 머리를 깎으면서 첫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수다원과를, 두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사다함과를, 세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아나함과를, 머리를 다 깍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들의 공양을 많이 받는 등 세존을 제외하고는 비구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공양을 받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공양을 얻는 자(lābhi)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셨다. 시왈리 존자가 전생에 지은 공덕이야기가 법구경, 주석서(DhA.iv.192f)에 나온다.

 

옛날 위빠시 부처님 당시 시민들과 왕 사이에 누가 부처님과 승가에 가장 큰 보시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시민들은 공양 올릴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추었지만 거기에 꿀이 빠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러 여러 심부름꾼들에게 각기 충분한 돈을 주어 내보냈다.

 

심부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때 마침 방금 딴 벌집을 팔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심부름꾼은 그에게 벌집 한 개 값으로는 너무나 많은 자기 돈 모두를 주고라도 그 벌집을 사겠다고 제의하자 농부는 의아해 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꿀은 시민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의 마지막 품목인 만큼 그만한 값이 있노라 는 심부름꾼의 설명에 농부는 그 보시의 공덕을 자신이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받지 않고 거저 주겠다고 하였다.

 

시민들은 그만한 횡재를 쉽게 마다하는 농부의 신심에 감동하여, 보시의 공덕을 그에게 돌리기로 기꺼이 동의했다.

 

이 때 올린이 작은 공양 덕분에 그 농부는 그 후 거듭해서 천상에 태어났고 바라나시 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시왈리 존자가 되어 부처님 제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 후에도 그 벌집 보시는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다. 천신들은 부처님과 시왈리 존자를 포함한 오백 명의 스님들이 여러 날 인적 없는 지역을 지나는 동안 쉴 곳과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14.

바꿀라(Bākula) 존자는 꼬삼비(Kosambī)의 부유한 상인의 집에 태어났다. 그가 갓난 아이였을 때 보모가 야무나 강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떨어뜨려 큰 고기가 삼켰다고 한다. 그 고기는 잡혀서 바나라시의 상인 집에 팔려갔는데 아이는 다치지 않고 산채로 뱃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로 삼고 키우겠다고 우겼고 왕은 두 가문에서 공동으로 그를 자식으로 삼으라고 판정을 하였다. 그래서 그는 두 가문에 속하는 자(ba-kkula)라는 뜻인 바꿀라(Bākula)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80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출가한지 8일째 되던 새벽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그를 병 없이 장수하는 자들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하셨다.(AA.ii.596)

 

 

 

항상 공양물이 부족하였던 로사까띠사(Losakatissa)장로

 

하지만 아라한도 불선행이 있으면 불선과보를 받게 되는데, 예를 들어, 로사까띳사 장로15 는 항상 공양물이 부족하였고 목갈라나 존자16는 흉악범들에게 몰매 맞아죽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15.

로사까띠사(Losakatissa)장로의 이야기는 본생경(J.41)에 나온다.

 

그는 까사파 부처님(迦葉佛)때 비구였는데 한 신자의 후원을 받으며 사원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라한 인 한 비구가 찾아왔는데 그가 계속해서 머물면 자신에게 오는 공양과 보시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내쫓을 궁리를 하였다.

 

하루는 신자가 둘을 공양에 초청했지만 그는 혼자만 갔다. 그리고 오지 않은 아라한 비구에게 전해달라고 건네 준 시주음식을 전달하지 않고 오는 도중에 길가에 내다 버렸다. 나중에 그의 의중을 알게 된 아라한 비구는 스스로 그 사원을 떠났다.

 

그 뒤에 그는 죽어 아귀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지옥에 태어났다. 수많은 세월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업력이 아직 남아서 각각 5백생 동안 야차(Yakkha)와 개로 태어나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꼬살라의 어부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어부마을과 부모에게 불운이 계속해서 닥쳐왔다. , 마을전체가 왕의 형벌을 여러 번 받는 등 멸문직전에 이르게 되자 그것이 로사까띠싸로 인한 것임을 안 마을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몰아내었다. 나중에는 배고픔을 참다못한 어머니도 그를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하루는 사리뿌따 존자가 길가의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7살 된 그를 우연히 보고 크게 불쌍히 여겨 사원으로 데리고 가서 말끔이 씻기고는 출가시켰다. 나중에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그의 불운은 여전하여 탁발을 나가도 항상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만을 받았다.

 

그가 입멸하는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안 사리뿌따 존자는 이 날 만큼은 그를 충분히 공양하게 하려고 함께 사왓띠로 갔다. 하지만 아무도 로사까띠싸에게 시주음식을 주지 않았고 사리뿌따 존자가 그를 일단 사원으로 돌려보낸 후 사람을 시켜 음식을 그에게 보냈지만 심부름꾼이 중간에 그것을 먹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사리뿌따 존자가 직접 발우에 음식을 담아가서 그 발우를 손으로 받치고 있으면서 로사까띠싸로 하여금 공양을 충분히 다 마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마지막 공양만은 충분히 들고는 바로 그날 저녁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었다.

 

 

과거의 숙업(宿業)임을 알고서

 

 

16.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의 이야기는 법구경 주석서(DhA.iii.65)와 본생경(Jā.125) 나온다.

 

부처님의 상수제자로 신통제일이었던 존자는 신통력으로, 지옥과 천상계를 드나들면서 외도의 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고 부처님의 신자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본 바를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점점 외도를 멀리하고 부처님에게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원한을 품은 나형외도裸形外道들의 사주를 받은 흉악범들의 공격을 받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은 신통력으로 자리를 피해 용케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세 번째 공격 때는 스스로 반조해 보고는 과거의 숙업宿業)문임을 알고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흉악범들의 몰매를 맞고 그날로 입멸하게 되었다.

 

그 과거의 숙업이란 목갈라나 존자가 과거전생의 어느 때 눈먼 부모를 산으로 데려가 도둑으로 위장하고 때려죽인 악업인데, 이러한 업으로 그는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고통을 받았고 마지막 생에 아라한이 된 뒤에도 그 악업은 타다 남은 불속의 불씨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가 존자의 최후 몸을 붙잡았던 것이다.

 

불종성경(B.i.58)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의 몸은 푸른 연꽃이나 비구름의 색깔을 띠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에서는, 존자가 가까운 과거에 지옥에서 고통 받은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라한은 갈애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업들은 새로운 재생을 일으킬 잠재력이 더 이상 없습니다. 임종이 다가올 때 갈애의 지원과 부추김이 없기 때문에 ‘업을 결정하는 식’이 일어나지 않고 재생하지 않게 됩니다.17

 

 

17.

아라한의 경우는, 마지막의 임종 시에 과거에 지은 모든 업이 효력이 없어진다. 만일 아라한이 임종했는데도 모든 업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되지 않으면 아라한도 또 태어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업에 관한 한 아라한은 금생이 마지막 몸이 된다. 아라한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는 세간적인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이다.

 

 

그런 이유로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원인은 오로지 갈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애는 태어남(再生)의 근본 원인을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갈애를 지목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내생의 삶을 말씀하신 처음 법문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현대판 단멸론자들은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斷滅論, 웃체다 와다, uccheda-vāda)18과 결부시키려 하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튼 대단히 잘못된 시도라고 해야겠습니다.

 

 

18.

단멸론斷滅論의 단멸은 ‘끊어짐, 멸절滅絶’을 뜻한다. 사람은 일단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으며, 선악이라든가 과보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견해로 단견斷見이라고도 한다. 육사외도六師外都 중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 대표적이다.

 

 

사실 팔정도를 계발하지 못하거나, 했더라도 완전하지 않아서 갈애가 있는 한, 갈애는 새로운 생의 원인을 계속해서 만들 것입니다.

 

팔정도를 완벽히 계발해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면,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여 더 이상 재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은 깨달음을 얻은 후 이것을 반조返照하실,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

(Ayam antima jāti,

natthi dani ponabhavoti.)

 

 

이러한 반조에 대해서는 초전법륜경의 뒷부분에도 나옵니다. 그러한 반조를 통해서, 갈애가 완전히 근절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재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애가, 어떻게 하여 끊임없는 윤회를 되풀이하게 하는지 다음의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규명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빨리 주석서에서 추려낸 세 가지 이야기와 가까운 시기의 네 다섯 가지 이야기를 인용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범천계에서 밝게 빛나더니, 돼지우리에서도 즐거워한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王舍城)로 탁발을 나가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 어린 암퇘지를 보시고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치아에서 하얀 빛이 반짝하는 것을 본 아난다존자는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으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어린 암퇘지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저 어린 암퇘지가 보이느냐? 저 암퇘지는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19의 가르침이 행해지고 있을 때 인간계의 한 젊은 여인이었다.

 

 

19.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a Buddha)은 현겁賢劫에 출현한 과거칠불過去七佛가운데 한분이다. 과거칠불은

 

위빠시 붓다(毘婆尸佛 Vipassi Buddha)

시키 붓다(尸棄佛 Sikhi Buddha)

웨싸부 붓다(毘舍浮佛 Vessabhu Buddha)

④ 까꾸산다 붓다(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

⑤ 코나가마나 붓다(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

⑥ 까사파 붓다(迦葉佛 Kasapa Buddha)

⑦ 고따마 붓다(瞿曇佛 Gotama Buddha)

 

이다.

 

고따마 부처님 다음에 오실 미래의 부처님은 현재 도솔천에 계신 미륵불(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그녀는 죽어서 한 사원의 부엌 근처에 사는 암탉으로 재생했다. 그 후 그 작은 암탉은 독수리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암탉은 바로 그 직전 명상주제를 가지고 수행을 한 비구가 읊조린 게송을 우연히 들었고 거기서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 이러한 공덕의 과보로 그 작은 암탉은 왕가의 웁바리라는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다.

 

웁바리 왕녀는 나중에 가정을 떠나 떠돌이 수행자(流行者)20가 되었다.

 

 

20.

떠돌이 수행자(流行者), 부처님 제자를 제외하고 집을 떠나 수행하는 출가사문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마찌마 니까야(中部) 주석서(MA.ii.7)에서는 “재가의 속박을 버리고 출가한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 니간타(Nigantha), 나체 수행자의 무리 등은 paribbāJka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에 해당하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이나 큰 집단을 이루지 않은 일반 출가자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한편 경에서 비구의 출가를 빱빳자(pabbajjā) 표현하여 일반 유행자에 해당하는 빠리바자까(paribbāJka)라는 용어와는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떠돌이 수행자들의 거처에 머물던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변소의 구더기들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 벌레들은 벌레가 들끓는 시체의 혐오스러움에 대한 관찰이나 흰 대상에 대한 관찰이라는 명상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힘입어 초선初禪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서 초선천初禪天의 범천으로 재생하였다.

 

범천계에서 목숨이 다하고서 인간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이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지금의 돼지로 태어났다. 나는 이 모든 사실들을 보았기 때문에 미소 지은 것이다.

 

갈애의 잠재성향이 뿌리 뽑히지 않는 한

 

이 다양한 존재로 반복되는 재생의 이야기를 들은 아난다 존자와 다른 비구들은 크게 놀랐고 종교적인 감동에 몸을 떨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잠시 멈추시고 길에 서신 채 여섯 개의 게송으로 된 법을 설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첫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Yatha-pi mu-le anupaddove dalhe,              야타삐 물레 아누빳도에 달헤

chinnopi rukho punareva rūhati          친노삐 루코 뿌나레와 루하띠

evapi tahānusaye anuhate             에왕삐 딴하누사예 아누하떼

nibbattati dukkhamidam. punappuna     닙밧땃띠 두카미담 뿌납뿐낭

 

그 뿌리가 손상되지 않고 굳건하면

잘린 나무라도 다시 자라나듯

갈애의 잠재성향이 뽑히지 않는 한

이 괴로움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이 게송이 전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웁바리 왕녀였을 때 그녀는 세상을 버리고 떠돌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명상수행을 해서 그녀는 억압에 의한 버림21을 통해 ‘중간 단계 번뇌’22를 제거하는 초선初禪을 얻었습니다.

 

 

21.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이란 집중(samādhi)의 힘으로 번뇌(kilesa)를 일시적으로 몰아내거나 제압하는 것이다. 청정도론(Vis.XXII.108)에 따르면 이 버림(pahāna)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tadanga-pahāna)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ahāna)

 

이 그것이다.

 

 

22.

번뇌(kilesa), 즉 불선법(akusala)은 그 정도와 강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거친 단계의 번뇌(vītakkama-kilesa)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매우 거친 번뇌로 계율( sīla)을 지켜서 제거할 수 있다.

 

(2) 중간 단계의 번뇌 (pariyutthāna-kilesa)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적 욕망, 성냄, 악의 등과 같은 중간 번뇌로 집중( samādhi)으로 제거할 수 있다.

 

(3) 잠재 성향의 번뇌 (anusaya-kilesa)

내면에 잠복해 있는 매우 미세한 번뇌로 성스러운 도의 지혜인 통찰지( paññā)를 계발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초선에서는 오직 의문意門에 나타나는 감각적 사고思考,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제거합니다. 억압으로 번뇌를 끊는 선정禪定은 일정시기에 일정한 한도까지만 번뇌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선을 얻었을 때 그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몰아낼 수 있었고 나중에 범천계로 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세계의 부유한 사람의 딸로 다시 태어났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성스러운 도로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녀가 초선을 얻었을 때에도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가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가 돼지가 된 것입니다. 갈애가 남아있는 한 이렇게 다양한 존재로 윤회를 되풀이 합니다.23

 

 

23.

여기서도 보듯 선정(jhāna), 즉 집중(samādhi)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을 통해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그리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깊은 집중(appanā-samādhi)을 증득할 수 있지만 이러한 깊은 집중의 경지가 곧 모든 번뇌의 소멸인 궁극적 깨달음은 아니다.

 

깨달음의 경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와 과의 경지는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 무더기), (), ()의 무상· 고· 무아, 12연기十二緣起의 역관逆觀 등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경에서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몇 가지 족쇄가 풀렸는가에 따라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경지를 배대해서 설명한다.

 

 

범천계에서 인간으로, 그리고 돼지로

 

범천계에서 돼지의 존재로 떨어진 이 이야기와 관련하여 옛 사야도들은 이러한 금언을 남겼습니다.

 

 

“범천계에서 그녀는 밝게 빛났고

돼지우리에서도 그녀는 즐거워했다.

 

 

그러나 범천계에서 직접 돼지나 다른 동물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아귀계나 지옥으로 직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전에 근접집중 수행(우빠짜라 바와나, upacāra-bhāvanā)을 해서 이미 선정을 얻은 사람만이 사람이나 천상계에 재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의 어린 암퇘지는 부유한 사람의 딸로 태어나 사람의 삶을 거쳤습니다.

 

그녀가 부유한 사람의 딸로 살다가 나중에 돼지의 존재로 떨어진 것은, 사람으로 있을 때 마땅히 존경할 만한 분을 오만방자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얻은 악업이 원인이었습니다.

 

황금의 땅, 수완나부미(Suvaṇṇabhumi, 金地國)

 

어린 암퇘지는 죽어서 대강 미얀마의 타똔지방으로 추정되는 수완나부미(金地國)24의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24.

수완나부미(金地國 Suvaṇṇabhumi)suvaṇṇa(황금)+bhūmi()의 합성어로 ‘황금의 땅’이란 뜻이다. 본생경 등을 보면 일찍부터 인도대륙과 무역로가 개통되어 물적,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 수완나부미는 대략 지금의 양곤, 따톤, 바간이 위치한 하부 미얀마에서 태국의 니콘파톰과 말레이반도 서해안을 아우르는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3차 결집 후 인도의 아쇼카왕이 이 지역에 소나(Sona)와 우따라(Uttara)장로를 보내 범망경(梵網經)(D1)을 설하여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황금의 땅(金地國)이란 의미 때문에 수완나부미가 위치했던 미얀마를 영어로 Golden land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불기 1500년경의 데와빨라 왕에 의해 만들어진 청동비문을 근거로 수완나부미가 인도네시아의 수마뜨라 섬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두려움에 몸을 떤 수마나 아가씨

 

수완나부미의 왕녀에서 다시 인도 바라나시의 한 여자로 태어나고 그후 뭄바이 남동쪽의 와나와시의 한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죽어서 뭄바이 북서쪽의 숫빠라까라는 항구도시의 말 상인 딸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엔 인도반도 최남동부의 까위라 항구의 선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다밀라라고 하던 타밀 사람들이 거주하는 해안지방입니다.

 

그 삶을 다하고 그녀는 지금의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정부관리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다음은 아누라다푸라의 남쪽마을 복깐따의 수마나라고 하는 한 부유한 사람의 딸로 재생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수마나라고 불렸습니다. 나중에 수마나의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 디가와삐 지방의 마하무니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하루는 우연히 두타까미니 왕의 장관인 라꾼다까 아띰바라가 어떤 볼일이 있어 마하무니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묘령의 수마나 아가씨를 보고는 그만 한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장관은 그녀와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는 자기 마을 마하뿐나로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따웅손 사원에 머물던 마하 아누루따 존자가 우연히 탁발을 하기 위해 수마나가 사는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존자가 수마나의 저택 문 앞에서 시주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녀를 보고는 비구도반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입니까?! 세존 당시의 그 어린 암퇘지가 이제는 라꾼다까 아띰바라 장관의 부인이 되어 있군요.

 

이 감탄의 말을 들은 장관의 부인 수마나에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25가 생겼습니다.

 

 

25.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智 pubbenivasaanussati-ñāa)는 여섯 가지 신통지(六神通)가운데 네 번째 지혜로써 사선四禪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지혜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수십만 생 이전 등도 기억할 수 있지만 이 경우의 숙명지는 이러한 사선四禪을 토대로 한 신통지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선정의 체험이 없이도 갑자기 생길 수도 있고 주석서에서는 추론(takka)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숙명지는 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이 지혜로 수마나는 자신이 살아온 전생들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윤회의 바퀴에서 계속해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장관인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그녀는 비구니 사원으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수계식후 수마나는 띠싸 대사원26에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염처경念處經 법문을 들었습니다.

 

 

26.

띠싸 대사원(Tissa-Mahāvihāra)은 상좌부 불교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상좌부 불교역사의 산실이었다. 지금도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남아있다.

 

 

그 경의 말씀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도과의 첫 단계인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두타가미니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고향마을 복깐따로 되돌아 왔습니다. 거기서 수마나는 깔라 대사원에서 독사경(毒蛇經 Āsīvisopama Sutta)27을 듣고는 넷째 과를 얻어 번뇌(아사와, āsava)와 애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27.

독사경(毒蛇經 Āsīvisopama Sutta)은 쌍윳따 니까야(相應部) 육처상응(六處相應)(S.197)에 나오는 경이다. 이 경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지, , , , 사대四大를 네 마리 독사에 비유하고 그러한 네 마리 독사를 매일 씻기고 돌봐줘야 하며 자칫 잘못하면 독사에게 물려 죽을 수 있다는데서 큰 두려움을 느낀 사람이 도망쳐 나와 팔정도라는 뗏목을 타고 강 반대편의 피안彼岸, 즉 열반에 도달하는 과정을 설한 경이다.

 

 

 

수마나가 살아온 열두 생

 

수마나가 살아온 열두 생을 사려 깊고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종교적인 감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까꾸산다 부처님 때의 이 젊은 여인은 죽어서 가족과 재산과 자기 몸뚱이를 남겨둔 채 떠났습니다. 유족과 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암탉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암탉으로 재생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암탉도 가족과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암탉은 독수리에게 붙잡혀 부리로 맹렬하게 쪼여져서 목이 잘리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상에 대한 게송을 들은 공덕으로 그녀가 왕녀로 태어나났다는 것은 참으로 위안이 되는 일입니다. 암탉은 물론 법(Dhamma)을 알지는 못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게송을 경청하였고 그 공덕으로 인해 왕녀로 재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법문을 듣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얻는 것도 많습니다.

 

왕녀의 삶을 살고 난 뒤에 선정을 성취하여 범천에 태어났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 범천계에서 내려와 인간세계의 부유한 가정에 재생한 것도 만족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친구, 재산을 뒤로 한 채 아쉬워하며 암퇘지로 재생했다는 것을 알면 너무나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범천계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와서 다시 더 낮은 돼지의 축생계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끔찍합니다. 성스러운 도를 확립하지 않은 한 어느 누구도 악처(apāya)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놀라움과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법을 닦으라는 의미에서 암탉의 연속적인 윤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암퇘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경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날처럼 사육자에 의해 도살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암퇘지는 틀림없이 자신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나중에 수완나부미에서 아누라다푸라까지 줄곧 여섯 생을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그래도 위안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 각각의 생애를 마감할 때마다 그녀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슬픔, 비탄, 정신적 고통에서 오는 크나큰 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마지막에 비구니인 수마나 장로니가 된 것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고무적인 부분입니다.

 

그녀가 한 생에서 또 다른 생으로 연속해서 재생한 원인은 갈애 또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集諦 때문이었습니다. 갈애를 아직 제거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한 생에서 죽어 또 다른 생으로 재생하는 윤회를 거칩니다. 그래서 갈애, 즉 집제를 제거하기 위해 성스러운 도의 수행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마나 장로니는 처음에 염처경念處經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알아차림 수행을 하여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독사경毒蛇經을 들은 후, 수행에 더욱더 열심히 매진하여 아라한과를 얻은 여성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갈애, 다른 말로 해서 일어남(, 사무다야. samudaya)이 완전히 제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더 이상의 재생이 없고 지고의 행복인 완전한 열반에 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마나 장로니는 도반들에게, 현생의 생명력인 수명의 업(壽行)28이 다하고 나면 반열반에 들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28.

수명의 업(āyu-sakhāra)은 수명을 유지시키는 힘, 생명현상, 또는 살려는 의지를 뜻하고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생명의 기능(命根)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생존의욕生存意欲으로, 영역은 will to live, life principle등으로 번역된다.

 

 

그러자 비구와 비구니 도반들은 그녀에게 전생이야기를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윤회에 염증을 느껴 비구니가 되었고

 

“나는 까꾸산다 부처님 당시에 한 여인이었습니다. 거기서 죽어 암탉이 되었습니다. 독수리에게 목이 잘리고 잡아먹혔습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 왕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복깐따 마을의 마지막 생까지 자신의 전생을 계속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각각의 생에서 삶의 오르내림과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열두 생을 살아왔습니다. 이 마지막 생에서 나는 윤회에 염증을 느껴 비구니가 되었고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같은 고결한 비구와 비구니 모두에게 알아차림으로 정진해서 계· 정· 혜를 완성하여 확립할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로 이루어진 사부대중29의 마음속에 종교적인 감격을 불러일으키며 입멸入滅하였습니다.

 

 

29.

부처님의 제자에는 재가자와 출가자라는 두 종류가 있다. 재가의 남자신자는 우바새(優婆塞 upāsaka), 또는 청신남淸信男이라 하고, 여성신자를 우바이(優婆夷 upāsika), 또는 청신녀淸信女라고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받들어 생활에 필요한 물품 등을 보시하고 그 지도를 받아 재가생활을 영위하면서 수행한다.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음으로써 재가신자가 된다.

 

그리고 출가한 남성 수행자를 비구(bikkhu)라고 부르며, 여성 수행자를 비구니(bikkhuni)라고 부른다.

 

비구란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신자의 보시물에 의해 생활하면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을 가리킨다.

 

비구와 비구니가 될 때는 구족계(upasampadā)를 받는데 비구는 227계이고 비구니는 311계이다. (다만 상좌부 불교의 비구니는 오래전에 그 법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 하며 불제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 어린 암퇘지 이야기는 법구경」주석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수마나 천인 이야기

 

수행자가 집제集諦인 갈애를 없애기 위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어도, 도의 지혜(막가 냐나, magga-ñāa)를 완벽하게 계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갈애가 남아서 재생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마나 천인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젊은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심이 나서 출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섯 안거동안 스승을 모시고 지냈습니다.

 

수마나는 스승님에 대한 크고 작은 모든 의무를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였고 비구가 지켜야 할 계목(戒目, 빠띠목카. Pa-timokkha) 중에서 두 가지(dve matika-)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계율에 이르기까지, 계율로 자신을 지키고 청정하게 하는 과정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주제를 선택한 후, 숲속의 외진 곳으로 가서 부단히 명상수행에 매진하였습니다.

 

의무를 다하다 죽었다는 의미

 

수마나는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한밤중에는 휴식하고 잠을 자도 된다고 하셨지만 자지 않고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매진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자 몸이 쇠진해져서, 갑자기 칼로 베는 듯한 고통과 함께 마비성 일격으로 척추신경이 끊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경행을 하는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비구의 의무를 지키면서 죽은 것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비구가 경행대經行臺를 오가며 경행하는 중이거나, 기둥에 기대어 서있거나 혹은 경행 복도의 앞부분에서, 머리에 가사를 두 겹으로 두르고 앉거나 누워있을 때 사망하는 경우, ‘의무를 다하다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비구가 설법, 특히 윤회에서 벗어남을 주제로 설법을 하던 중 사망한다면 이 또한 ‘의무를 다하다 죽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비구는 경행대를 오가며 경행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염처경念處經의 가르침에 따라 몸의 자세 중에서 정신과 물질을 지켜보는 동안에 사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명상수행에 대단한 공을 들였지만, 아라한의 도를 얻는데 필요한 바라밀 공덕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아라한 도를 얻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입니다.

 

천인으로 태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아라한의 도를 얻기 못하면 갈애를 완전하게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 비구는 수다원의 과도 아직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중에는 밝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수마나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갈애 때문에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재생하였습니다.

 

명상수행을 해서 얻은 공덕의 과보로 웅장한 하늘의 궁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난 것처럼 완전히 성장盛裝한 천인의 모습으로 궁전 문 앞에 화생化生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궁정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천 여명의 천녀들이 소리쳤습니다.

 

“우리들의 주인님이 오셨다! 그 분을 환영하도록 하자!

 

천녀들은 수마나를 에워싸고 손에 악기를 들고서 기쁘게 환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궁전의 주인인 천인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수마나는 자신이 아직도 인간세계의 비구라는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천녀들을 보고는 자기 사원을 찾아온 여성방문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맨 왼쪽 어깨를 상의로 가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아주 근엄하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며 앉아있었습니다.

 

“천상계에 재생하려고 수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 온 천인이 전생에 비구였음이 틀림없다고 곧바로 알아차린 천녀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이곳은 천인의 세계입니다. 비구의 계율을 지키실 때가 아니고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실 때입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근엄한 침묵과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천인은 천상의 천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환락을 베풀어 환영하여 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도록 해주자.

 

천녀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천인은 여성 방문객들이 자신의 숲속 거처까지 와서 실없는 환락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더 조용히 성품을 추스르고 위엄을 갖추고 품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자 천녀들은 몸 크기의 거울을 갖다가 천인 앞에 놓았습니다. 거울에 비춘 자기의 모습을 보고는 비구의 생을 마감하고 천상계에 재생했음을 알았습니다. 수마나 천인은 크게 당황하여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천상계에 재생하려고 수행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목표는 가장 유익한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금메달 우승컵을 노리고 권투경기장에 들어섰지만 오직 무 다발만을 받은 권투선수와도 같다.

 

극도로 마음이 어지러워진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천상의 즐거움 따위는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정등각자正等覺者께서 세상에 계시는 시기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천상의 즐거움 속에 빠져있으면 부처님을 만날 기회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천인은 천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구였을 때 지켰던 절제의 계를 고스란히 지키며 서둘러 부처님께로 갔습니다. 천녀들도 천인을 보지 못할까봐 그를 쫓아갔습니다.

 

어떻게 비껴갈 수 있는지요?”

 

부처님 앞에 이르자 천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면 이 낙원樂園을 피하고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이 정원은, 이곳을 찾아오는 천인들에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정원이라고도 부르며, 수많은 천녀들이 노래와 합창에 빠져있고, 무수한 야차와 도깨비, 귀신들이 출몰합니다.

 

천인이 여기서 천녀들을 야차와 도깨비라 하고, 기쁨의 동산을 어리석음의 정원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위빠사나 수행에 쏟은 강한 정진으로 감각적 욕망에 대해 혐오하는 마음상태를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비껴갈 수 있는지요?’라는 천인의 질문에 대한 주석서의 해석은, 이 천인이 부처님에게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는 위빠사나의 지침을 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천인과 관계된 모든 상황을 헤아려보고는 다음의 세 가지 게송으로 팔정도를 가르치셨습니다.

 

 

1.

 Ujuko nāma so magga, abhayā nāma sā disā,

ratho akuJano nāma, dhammacakkehi sam.yuto.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천인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바로 그대가 비구였을 때

이미 계발한 위빠사나의 팔정도이다.

 

 

오직 ‘도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한 게송의 첫 구절은 여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청중들을 위해 해설을 덧붙인 것입니다. 원래 그대로의 번역은 청중들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수행에 매진하던 사원에서 곧바로 나온 것과 같은 천인에게는 그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직 계율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에게 명상수행을 시킬 때 세존께서는 항상 이렇게 충고하셨다.

 

 

‘계를 청정히 하고,

알아차림과 집중을 계발할 것이며,

업과 그 과보에 대한 견해(業自性正見)를 바르게 하라.

 

 

그렇게 먼저 기초적인 수행을 굳건히 확립하도록 지도하셨다.

 

이미 명상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라한의 도와 아주 근접한 위빠사나만을 하도록 가르치셨다. 그 천인은 이미 명상수련을 하였고 아직도 계율이 청정하였다.

 

그는 이미 성스러운 도를 선도하는 선구자가 되는 위빠사나 도를 닦았기 때문에 이제 닦아야할 것은 오직 성스러운 도뿐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위빠사나를 지도하기 위해 세 가지 게송을 가르치신 것이다.

 

두 개의 위빠사나 수레바퀴

 

이 주석서 해설을 통해서, 그의 계는 비구의 생에서 천인의 생으로 넘어가서도 여전히 청정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살생, 도둑질, 성관계 등과 같은 어떠한 계율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계를 청정히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겠다는 공식적인 서약 없이도 범해서는 안 될 악행을 삼간다면 그 계는 청정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게송은 또 위빠사나를 가르쳤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대로 ‘천녀들로 가득한 천상계의 기쁨의 동산30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름길은 비구였을 때 하던 위빠사나의 도’입니다.

 

 

30.

기쁨의 정원(nandavana)이란 천인들의 왕 제석천이 사는 삽십삼천(Tāvatisa)의 도시에 있는 정원이름이다. 환희원歡喜園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제석천(Sakka)이 사는 에까뿐다리까 천궁(Ekapuṇḍarīkā-vimā)이 있다고 한다.

 

 

위험 없는 피난처를 묻는 다음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험 없는 피난처란

네가 비구로 있을 때 얻고자 했던 열반이다.

 

 

이는 그가 열반을 얻을 때까지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떠한 탈것을 타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하게 피난하려면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이라고 하는

위빠사나의 두 바퀴가 달린 조용한 수레가 필요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인 모든 동작들을 알아차리는 것과 관련한 정신적 노력을, 마음의 노력(마음의 작용에 한 노력, 쩨따시카 위리야. cetasika-viriya)’이라고 합니다.

 

가고, 서고, 앉는 것과 같은 몸의 동작을 알아차릴 때 이러한 각각의 자세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몸의 노력을, 육체적 노력(kāyika-vīriya)‘이라고 합니다.

 

누워서 하는 수행인 와선臥禪은 육체적 노력이 아니라 정신적인 노력에 속합니다.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의 바퀴로 된 이륜차를 탈것을 권하셨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걷고, 서고, 앉는 모든 동작에 대한 주위 깊은 알아차림을 요구하는 위빠사나 명상을 뜻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괴로움

 

그래서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된 위빠사나 도의 웅장한 수레를 타기 위해서는 오며 가며 경행을 할 때 주의 깊은 알아차림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걸을 때 걷고 있는 것을 꿰뚫어 안다,

(gacchanto vā gacchāmiti pajānāti)

 

 

고 하는 염처경의 가르침대로 ‘걸음’, ‘일어남’, ‘앞으로’ ‘놓음’ 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정진하는 동안 집중이 강해지면서, 수행자는 알아차릴 때마다 단단함과 움직임을 일으키는 물질(rūpa)이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nāma)이 있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집중이 증장함에 따라 수행자는 원인과 결과도 구별합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됩니다.

 

 

“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간다고 하는 육체적 현상이 일어난다.

아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알게 된다.

 

 

수행이 더 향상되면, 그러한 현상의 일어남은 잠시이며...가고자 하는 의도, 간다고 하는 육체적 현상, 알아차리는 마음...뒤에 오는 그 사라짐을 마치 자기 손바닥 안에 쥔 것처럼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잠시 일어났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은 항상 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괴로움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수행자는 또한 이런 현상들이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 누구의 의지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어느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아(anatta)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서있거나 앉아있을 때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조용한 수레는 고대의 말이 끄는 마차를 언급한 것입니다. 수레는 그 자체로는 소리가 안 나지만 많은 승객이나 무거운 짐을 실으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 수레’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무한정으로 승객들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팔만사천명의 승객이 이 ‘도의 수레’를 타고, ‘위빠사나의 도’를 기수騎手로 하여, 소리 없이 최종 목적지인, 열반으로 이끌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수레는 소음 없는 수레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수레를 타고, 천녀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를 주셨습니다.

 

위빠사나 도의 등받이, 양심과 수치심

 

2.

 Hīri tassa apālambo, satyassa parivārana,

dhammaha sārathi byuhi, sammādiṭṭhi pure java.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인 수치심(히리, hiri)은 수레가 움직일 때

승객들이 뒤로 넘어지지 않게 하는 의자의 등받이 역할을 한다.

'(막가, magga)의 수레바퀴'

수치심과 양심(오따빠, ottappa)이라는 훌륭한 등받이를 가지고 있다.

 

 

명상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어떤 대상에 대한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행여나 불선한 생각이 일어날까봐 이것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마치 상쾌하고 깔끔한 목욕을 하고 나서 똥을 만졌을 때 느끼는 혐오와도 같은 것입니다.

 

불선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양심적인 배려(걱정)와 이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수치심 혹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양심良心이라고 합니다.

 

또 이 불선한 생각이 악행을 저지르게 하고 그 결과 불선과보를 가져오며, 그래서 윤회로부터의 탈출을 방해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악행과 그 불선과보에 대한 두려움을 오따빠, 즉 양심이라고 합니다.

 

이 수치심과 양심 때문에 수행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어떠한 것도 놓치지 않고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현상을 알아차리는 일에 매진합니다.

 

이러한 식으로 도는 사라지는 매 순간마다 연속적으로 계발됩니다. 이는 수레의 등받이가 승객들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자세를 유지하게 하는 방법과 같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수치심과 양심을 위빠사나 도의 등받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념처수행은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리는 것이 어떻게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와 차양과 같은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방어하는 차양을 갖춘 수레는, 날아오는 돌이나 막대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현상을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불선행을 범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됩니다. 그래서 몸 등을 주시하는 것과 같은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도의 수레를 보호하는 덮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정견正見을 성스러운 도(성스러운 도의 정견)와 항상 붙어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수레를 이끄는 마부와 같이 위빠사나 정견이 선도한다.

 

정견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

 

업이 나의 것 이라는 바른 견해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

⑥ 반조返照에 대한 바른 견해가 있는데,

 

이 중에서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는 도에 이른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⑥ 반조에 대한 바른 견해는 도와 과를 얻은 뒤에 일어나는 반조의 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⑥을 개발하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인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은 명상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확고히 다져져 있어야 합니다.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는, 위빠사나의 기초인 심청정心淸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와 관련된 바른 견해의 증장을 위해 계발되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지혜는,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입니다.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완전히 계발되면 성스러운 도의 지혜 즉,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가 자연히 일어납니다. 이는 마치 군경의 호위대에 의해 도로가 깔끔이 정리되고 나서 왕의 행렬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정견이 선행하고, 그 뒤에 성스러운 도의 정견이 뒤따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동안 위빠사나의 지혜가 다른 도를 닦기 위한 길로 이끕니다. 성스러운 도를 얻는 순간 도의 지혜가 다른 도로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은 위빠사나 정견과 성스러운 도의 정견을 수레의 마부라고 하셨습니다.

 

팔정도의 수레를 타야만 열반에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3.

Yassa etādisanyānam, Itthiyā purisassa vā,

sa ve etena, yanena nibbānasseva santike.

 

“이 팔정도의 수레를 가진 남녀男女는

수레의 힘으로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게송에 따르면 팔정도라는 도의 수레를 가진 사람은 성별과는 관계없이 열반에 ‘도달’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위빠사나 도에 기초를 둔 성스러운 도를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이 세계에서 어떤 형태의 교통수단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교통수단을 갖지 못하고, 그 교통수단의 기계구조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의 정신과 물질, 그리고 각기 다른 도(magga)에 대하여 줄줄이 열거하고 알고 있기만 한다면 절대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실제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서 위빠사나 도의 수레를 갖고, 팔정도의 수레를 타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세 가지 게송을 요약하면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게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도에 이르는 지름길, 그 목적지는 위험이 없는 열반이다.

2. 육체적 노력과 정신적 노력의 두 바퀴를 갖춘, 도의 수레는 조용하다.

3. 수치심과 양심은 수레의 등받이가 되어주고 알아차림은 수레의 덮개 와 차양의 역할을 한다.

4. 위빠사나의 지혜는 도의 지혜를 이끌어주는, 수레의 마부역할을 한다.

5. 그러한 수레를 가진 사람은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다.

6. 누구나 수레에 편안하게 타고 열반에 이른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게송을 가르치고 나서 우리가 도제道諦 장에서 다시 논하게 될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수마나 천인은 법문을 듣는 동안 전생에 닦았던 명상수련에 대하여 숙고하였습니다. 비록 불퇴전의 노력으로 명상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구로써 높은 지혜를 얻지 못하였고, 더러움이 없는(不淨) 천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의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그는 위빠사나의 지혜를 계발하여 첫 번째 단계의 도과에 이르는 길을 단계적으로 올라가 결국은 열반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인의 대열인,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이 수마나 천인 이야기가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비록 비구가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열심히 했더라도 갈애를 제거할 수 있는 성스러운 도를 아직 얻지 못했다면 집제인 갈애 때문에 죽은 뒤에는 천인의 삶으로 재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어떻게 하면 성스러운 도를 계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천인의 몸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지혜를 쉽게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으면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한 개인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으면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바와 딴하. bhava-tahā)로 인하여, 그 사람 또는 대상 가까운 곳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해서 대상과 가까운 곳에 재생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가사에 강하게 집착하면서 죽은 결과 그 가사에 붙어사는 이로 재생한, 띠싸 비구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어떻게 뱀, , 소로 다시 태어났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 뱀, , 소로 다시 태어나다

 

 

스리랑카의 한 마을에 자기 형수와 불륜을 맺은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법적인 남편보다는 정부情夫에게 더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부에게 자기 형을 죽여 달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이렇게 반대하였습니다. “이 여자야, 그 따위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마.

 

하지만 여자가 세 번씩이나 계속해서 그런 나쁜 제안을 반복하자 정부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지?

 

여자는 대답했습니다. “도끼를 가지고 가서 큰 백화채 나무 근처의 강가에서 형을 기다리세요. 내가 남편을 그리로 보낼게요.

 

그러자 곧 남자는 그곳으로 가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자기 형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숲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내는 애정을 보이는 척하면서 다정하게 남편의 머리를 빗어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머리 좀 감으셔야 갰네요. 너무 더러워요. 큰 백화채 나무근처의 강가에 가서 머리를 감고 오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러자 사내는 ‘내 아내는 매우 친절하고 애정도 많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행복감에 젖어 강가의 멱 감는 곳으로 갔습니다.

 

막 머리를 감으려고 머리를 낮추고 있을 때 동생이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도끼로 잔인하게 목을 베었습니다.

 

죽은 사내는 아내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집착으로 푸른 뱀으로 재생하였습니다. 여전히 아내에 대한 집착이 있었기 때문에 뱀은 집 천정에서 그녀에게로 떨어지곤 했습니다. 뱀은 전남편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하고는 남을 시켜서 죽여 없앴습니다.

 

뱀으로 죽은 뒤에도 전 아내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었었기 때문에 옛날 집의 개로 재생하였습니다.

 

개로 태어나서도 여전히 전 아내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가 어디를 가든, 심지어 숲에 갈 때에도 따라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조롱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개를 데리고 사냥꾼 여자가 외출하는군. 대체 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여자는 정부에게 말해 그 개를 죽였습니다.

 

그의 애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같은 집의 송아지로 재생하였습니다. 어린 송아지 또한 여자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다녀서 또다시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샀습니다.

 

‘저것 좀 봐. 소치기가 나왔다, 대체 저 여자의 소는 어느 목초지로 가서 풀을 먹을까?’ 여자는 또다시 남자를 시켜 어린 송아지를 죽였습니다.

 

원수의 태안에서 다시 몸을 받게 됨

 

하지만 전 아내에 대한 집요한 애착 때문에 이번에는 그 여자의 태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시 얻은 인간세계에서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자띠사라 냐나, jātissara-ñāa)를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이 지혜를 통하여 지나온 네 번의 생을 돌아본 그는, 네 번 생이 모두 전 아내의 사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괴로워했습니다.

 

‘내가 그런 원수의 태안에서 다시 몸을 받게 된 것은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그는 이렇게 비탄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수인 엄마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엄마가 안으려 할 때마다 아이는 목청껏 울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아이를 키우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아이가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어째서 너의 어머니가 안으려 할 때마다 우는 거냐?

 

“그 여자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그 여자는 전생에 네 번이나 연속해서 나를 죽인 원수에요.”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할아버지에게 자기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러한 슬픈 이야기를 들은 늙은이는 아이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래, 내 불쌍한 손자야. 우리 여기를 떠나자구나. 여기서 머물러서는 아무 이득이 없겠다.

 

그들 둘은 사원으로 가서 계를 받고 명상수행을 계발하여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집착하는 바로 그 장소에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집착으로 인하여 집착하는 바로 그 장소에 새로운 존재로 반복해서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는 ‘집착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는 뽀노바위까(ponobhavikā)의 가르침의 진리를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 , 송아지로 태어나 각각 비명으로 죽은 다음 사람의 마지막 생에서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갈애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재생은 없으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서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통하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빨리경전과 주석서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인용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가까운 근현대에서 있었던 경험과 일화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법문을 설하는 사야도

 

미얀마력 1291년에서 1301(서력 1929~1939), 우리는 몰민의 따익와인 사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법문을 하시는 스승으로 유명한 사야도 한분이 계셨습니다.

 

시주자인 변호사가 사망하고 일주일이 되자 전통의 공양의식에 따라, 사야도는 망자亡者를 위해 공덕을 회향하는 의식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나의 이번 생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죽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변함없는 일이다. 나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나의 삶은 오직 죽음으로 끝난다. 삶 자체는 영원하지 않지만, 죽는다는 사실은 확고 불변하고, 영원하다.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anussati)31가 법문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31.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anussati), 청정도론(V)에서 열 가지 숙고(十隨念)의 하나로 나온다.

 

이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이란 ① 부처님에 대한 숙고 ② 법에 대한 숙고 ③ 승가에 대한 숙고 ④ 계에 대한 숙고 ⑤ 보시에 대한 숙고 ⑥ 천인에 대한 숙고 ⑦ 죽음에 대한 숙고 ⑧ 몸에 대한 알아차림 ⑨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⑩ 고요에 대한 숙고를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불수념死隨念은 죽음의 위험이 언제나 우리를 넘보고 있음을 상기하거나, 그 죽음의 공포에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숙고하며, 혹은 남들의 죽음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되돌아보는 등의 공부를 통해 죽음을 맞아서도 당황하지 않고 공포에 떨지 않으며, 살아서 불사의 경지를 못 이루면, 죽어서 좋은 내생을 맞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거기에 참석하여 직접 그 사야도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며칠 내에 우리는 법문을 설하신 사야도가 사망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사야도께서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법문을 하셨기 때문에 그분도 그렇게 하시며 임종을 맞이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자객들의 손에 의해 비수에 찔려 비명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년 후에 메르귀로부터 어떤 어린 소년이 부모와 함께 몰민으로 왔습니다. 소년은 자기를 몰민까지 데려가 달라고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이전에 사야도가 계시던 사원에 도착하자 소년은 부모에게, 전생에 자기가 이 사원의 주지였다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사원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는데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소년은 또 이웃 사원의 지도급 승려들을 모두 기억하였고 과거 생에 그들을 불렀던 대로 그들을 호명하였습니다.

 

작고한 사야도의 가까운 제자였던 어떤 남자의 이름을 거명하자 소년은, “무서워, 무서워!” 하였습니다.

 

도대체 뭐가 무섭다는 것인지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자 소년은, 그 사내는 사야도를 찔러 죽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강기슭에서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타고 도망치게 되었는가 하는,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중에 배가 메르귀 해안가에 있는 한 마을에 도착하자 그는 현재의 부모가 사는 집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자객들로부터 도망쳐 나왔는지, 어떻게 강기슭에서 배를 발견하고, 어떻게 그 배를 타고 현재의 부모가 사는 집까지 왔는지 하는 광경들은 모두 죽음이 임박해오면서 그에게 나타난 태어날 곳의 표상입니다. 이는 또 집착이 새로운 생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40짜트 때문에 물소로 태어나다

 

영국 식민지 시절 몬와 지역의 한 마을에, 고리대금업을 하는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 남자는 한 농부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였지만 농부는 그 돈을 이미 다 갚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고리대금업자는 계속해서 농부가 아직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았다고 우겼습니다.

 

마침내 그는 “당신이 이미 40짜트를 갚았는데 내가 또 내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당신집의 물소가 될 것이요.”라고 맹세했습니다. 이 맹세를 하면서 그는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다시 압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농부는 뻔히 알면서도 빌려간 돈을 두 번 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고리대금업자는 죽었고 빌려간 돈을 두 번이나 갚았던 농부의 집에 새끼 물소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부는 그 고리대금업자가 아마도 자기 집에 물소로 재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전에 고리대금업자를 불렀던 것과 똑 같이 새끼 물소를 향해 “사야, 사야32,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소리쳐 불렀습니다.

 

 

32.

사야(sayā)는 미얀마어로 남자 스승을 뜻하는 존칭어이다.

 

 

새끼 물소는 부름에 응하여 농부에게로 왔습니다. 옛날 고리대금업자가 정말로 자기 집에 물소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게 된 농부는 이 사건을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죽은 고리대금업자의 딸이 법원에 가서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그 가난한 농부를 고소하였습니다.

 

이 소송을 접한 판사는 원고인, 피고인, 새끼 물소, 그리고 원고인과 피고인 양쪽의 목격자들을 부르러 보냈습니다.

 

법정에서 농부는 예전에 고리대금업자를 불렀던 똑 같은 방식으로 ‘사야, 사야, 이리로 오세요’ 라고 불렀습니다.

 

물소는 그의 부름에 응하여 그에게로 왔습니다. 고리대금업자의 딸은 예전에 자기 아버지를 “츠, !33하고 불렀습니다.

 

 

33.

이는 의성어로 지금도 미얀마에 가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웨이터를 부를 때 이렇게 혓바닥과 입술을 이용하여 ‘칫칫’ 또는 ‘츠츠’소리를 내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는 영국 식민시대의 잔재로서 하인을 부를 때 쓰던 나쁜 습관이다.

 

 

법정에서 그녀가 ‘츠, !’하고 부르자 물소가 그녀 앞으로 왔습니다. 판사는 그 가난한 농부가 (명예훼손의 의도가 없이)정직한 말을 하고 있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이 물소로 재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거짓된 맹세를 하면 참담한 재앙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느가뇨의 쌀 한줌

 

따웅뜨윈지 북서쪽 10마일에, 4백여 가구가 들어선 짜웅요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서로 친구사이인 느가뇨와 빠싸잉이라는 마을의 두 젊은이들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빈랑나무 잎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빠싸잉은 도중에 쌀이 떨어졌습니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느가뇨에게 쌀 한줌을 꾸었습니다. 저녁을 해먹고는 달 밝은 밤에 둘이서 느긋하게 마을로 되돌아오는 도중 불쌍한 빠싸잉은 독사에게 물려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두 친구들이 스무살 정도 되던 미얀마력 1270년과 1280년 사이(서력 1908~1918) 어느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을 당시 쌀 한줌을 빚졌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었는지 그는 느가뇨의 집에 어린 수탉으로 태어났습니다.

 

느가뇨는 어린 수탉을 훈련시켜 싸움닭으로 만들고는 투계대회에 출전시켰습니다. 처음 세 시합에선 느가뇨의 수탉이 이겼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 싸움에서는 상대가 더 나이가 많고 힘이 세었기 때문에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느가뇨는 실망하여 수탉의 다리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화를 냈습니다. 반죽은 수탉을 집으로 데려와서는 물항아리 근처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때 느가뇨의 암소가 다가 와서 (마치 동정을 표시하는 것처럼)그 수탉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불쌍한 수탉은 나중에 죽어서 암소의 태에 들었습니다. 송아지가 어지간히 크자 이 송아지는 주인의 친구에게 축제용으로 4짜트에 팔렸습니다.

 

친구들 속에는 느가뇨도 있었습니다. 축제를 위해 송아지를 도살해서 그 고기를 썰고 있을 때 우연히 따웅뜨윈지에서 한 서기書記와 그 아내가 현장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 송아지를 동정하면서 서기의 아내는 말했습니다.

 

“이 송아지가 나의 것이라면, 나는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설령 자연사했다하더라도 나는 그 고기를 먹을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고 그냥 땅에 묻어 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서기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이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아, 무슨 말이든 꺼내보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 보거라. 오늘은 봉급날이다. 너를 위해 좋은 옷 몇 벌을 사다 주마.”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몇 가지 예쁜 옷가지를 사가지고 저녁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말했습니다.“여기 있다. 아들아 이 예쁜 옷들은 너를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말을 한번 해보렴.” 그러자 소년은 “느가뇨의 쌀 한줌”이라고 입을 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말을 해 보거라. 너를 위해서라면 쌀 한줌이 아니라 한 포대의 쌀이라도 그 빚을 갚아주겠다.

 

그러자 소년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수레에 쌀 포대를 실어줘요. 우리 이제 내 빚을 갚으러 가요.

 

쌀 포대를 수레에 싣고 그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이제 어디로 가느냐?” 아이는 따웅뜨윈지의 북쪽으로 수레를 몰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짜웅 요마을에 도착하자 아들은, “바로 여기에요, 바로 이 마을이에요.”라고 말하고는 아버지에게 길을 안내하여 마을의 샛길을 지나 느가뇨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가 정말 뇨씨의 집이 맞는지 물어보자, 뇨 본인이 집에서 나옴으로써 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느가뇨가 수레에 접근하자 아기가 그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이봐. 느가뇨야! 아직 나를 기억하니?” 그 어른은 자기 아들 뻘인 어린 꼬마가 자기를 무례하게 느가뇨라고 불러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하지만 서기가, “우 뇨 양반,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약간 이상한 상태에 있답니다.”라고 해명을 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소년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느가뇨!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한때 우리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빈랑나무 잎을 팔려고 함께 다녔지. 그때 난 너에게 쌀 한줌을 꾸었어. 그리고 미처 빚을 갚기도 전에 독사에 물려서 죽었지. 그러고 나서 나는 너의 집에 어린 수탉이 되었어. 너를 위해 세 번의 경기를 이겨주고는 네 번째 싸움에서는 상대가 나보다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그만 지고 말았어. 그 싸움에서 지자 너는 분에 겨워 나를 두들겨 패 죽게 했어. 내가 반 죽자 너는 물 항아리 근처로 날 집어 던졌고 한 마리 암소가 와서 나에게 입맞춤을 하였어. 나는 그 암소의 태내에 들어가서 송아지로 태어났지. 내가 어느 정도 크자 너희들이 날 잡아서 먹었어. 바로 그때 지금 내 아빠와 엄마인 서기부부가 그 근처에 와서 나를 동정해주었어. 소로 죽은 다음 나는 지금의 아빠와 엄마의 아들로 태어났어. 이제 나는 그때 꾼 쌀 한줌을 갚으러 여기에 온 거야.

 

꼬마가 이야기한 것은 자기 옛 친구에게 가했던 그 모든 잔학행위에 대해 후회하며 흐느껴 우는 느가뇨 씨에 의해 모두가 다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로 갈애가 근절되지 않으면 새로운 생으로 되풀이 되는 재생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귀와 소의 끔찍한 삶

 

미얀마력 1300(서력 1948)경 만달레이의 빠야지 사원에 안 쎄인나라는 학승이 살았습니다.

 

안 쎄인나는 좋은 체격과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법에 대한 신심으로 충만한 비구였고 열과 성을 다해 삼장三藏 배우는데 전념하는 성실한 학승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자기 발우를 닦으면서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시주자의 공양음식으로 먹고 사는 동안 선한 행동에 유념할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나는 세 가지 생을 살아온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주의 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도반들 가운데 한명이 호기심을 느끼고 안 쎄인나의 전생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인간세계에서 죽어서 여자 아귀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생에서 거의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고, 살만한 적당한 장소도 없이 쉴 곳을 찾아 여기 저기 헤매고 다니면서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여자 아귀에서 다시 수레를 끄는 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소떼와 함께 같은 우리 안에 가두어졌는데 이 소들은 콧구멍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콧물을 줄줄 흘렀습니다.

 

점차 소의 코에서 나는 냄새가 참을 수 없게 된 저는 소들이 내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몰아냈고 주인은 내가 다른 소들을 괴롭히고 그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고는 날 때렸습니다.

 

그 생에서 죽은 다음에 나는 다시 사람의 삶을 얻었고 종교적인 감동으로 몸을 떨게 되어 지금 비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또한 갈애가 지속되는 한 재생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아귀의 삶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그리고 의사소통 능력이 모자라 불리한 입장에 있는 소가 사람의 오해를 사고 그 때문에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려움과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소와 개로 살다가 다시 사람의 생을 받다

 

미얀마력 1310(서력 1948)경 몬와 지역의 마을 사원에서 주지로 있던 한 사야도가 자기 부하를 홀대한 죄를 물었다가 반군지도자에 의해 사살 당했습니다.

 

그 사야도는 지금은 다시 인간계의 비구입니다. 우리는 그 사야도가 몇 가지의 경전시험까지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비구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총에 맞아 죽은 뒤 나는 소가 되었고 개가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계의 비구라는 신분에서 소와 개의 축생계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굴욕적인 일입니다. 갈애가 제거되지 않으면 존재의 사다리를 타고 더 낮게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 재세 시에 몸의 이로 태어난 띠싸 비구의 예가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갈애와 삿된 견해(딧티, diṭṭhi), 회의적 의심(위찌낏차, vicikicchā)이 남아 있는 한, 재생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갈애를 완전히 제거하거나 적어도 삿된 견해와 회의적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힘써 노력합니다.

 

도마뱀으로 재생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얀마력 1323(서력 1961)경 따이꾸 부근의 파 아웅웨 마을에 이상한 소년이 나타나서 자신은 이전에 2마일 떨어진 이와웨잉 마을의 주지스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년은 좋은 기억력을 가진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자기가 살았다고 주장하는 그 사원으로 데리고 가자 소년은 건물의 모든 물건들을 잘 아는 것 같았고 시주자의 이름을 기억해내어 각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소년은 주지로 죽었을 때 사원의 도마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도마뱀이 되어 사원에서 근처의 야자나무로 건너뛰다가 죽었습니다.

 

도마뱀은 나무를 헛디뎌서 땅에 떨어져 넓적다리가 부려졌습니다. 이 부상으로 도마뱀은 죽었습니다. 죽을 때 그는 그 사원 근방에 밭을 가지고 있던 파 아웅웨 마을의 한 농부의 우마차에 올라타서 그 농부의 집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소년이 말했던 우마차에 올라탄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따라 일어나는 태어날 곳의 표상(가띠 니미타, gati-nimitta)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갈애가 남아있으면 새로운 생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이런 놀라운 일을 통해 우리는 성스러운 도를 계발하여 갈애를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생따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우리가 현대의 이러한 증거사례가 되는 이야기들을 끄집어 낸 이유는 내생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내생이 있는지 없는지 단정 짓지 못하고 반신반의한 채 혼돈에 빠져있습니다.

 

재생의 이야기들이 경전에 명확하게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랜 옛날에 쓰인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깜마, kamma)과 그 과보(위빠까, vipāka), 내생에 대한 믿음을 북돋고 그러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들을 꺼낸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더 있지만 이만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갈애 때문에 재생이 일어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은 배고픔, 목마름,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과 욕망에 얽혀서,

늘 여기저기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다.

 

 

부처님께서는 또 이 갈애에 대해 명확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럼 이 갈애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까마 딴하. kāmā-tahā),

둘째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바와 딴하. bhava-tahā), 셋째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위바와 딴하. vibhava-tahā)입니다.

 

이들 세 가지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인 집제集諦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이들 세 가지 갈애 중에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즐거운 감각대상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속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형상()을 볼 때 일어나는 갈애가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겉모습, 색깔 등만이 아니라, 형상의 토대가 되는 남자나 여자의 전체모습, , 입고 있는 옷,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와 관련된 대상도 포함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소리()와 소리대상, 향기로운 냄새()와 그 향기의 근원, 감미로운 맛()과 그 맛을 주는 음식,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제공하는 남자와 여자, 황홀한 촉감()과 그러한 촉감을 일으킨 대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 즐거움의 대상이 되며 그런 즐거움의 대상을 갈망하는 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고 합니다.

 

요약을 하면, 즐거움을 주는 감각대상에 대한 욕망이 바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사람이나 천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사람으로서, 천인으로서, 혹은 남자나 여자의 몸으로 감각적 욕망을 즐기기를 갈망하는 것, 이 모든 갈애 또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생각이나 대상을 좋아하는 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고 말합니다.

 

감각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때, 즐겁다고 생각하면 즉시 거기서 좋아함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즐겁다고 하면 무명(無明,아위자 avijjā)에 이르고, 이 무명은 감각대상의 자연적인 성품을 가려서 대상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일으킵니다.

 

무명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끊임없이 생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인 것을 즐겁다고 보며,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아니라 단순히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불과한 것을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로 보고,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몸을 아름답고 즐길 만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게 즐겁지 못한 것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좋아함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면, 그 갈애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갈애로 넘어갑니다.

 

그러한 의도적 행위들이 바로 새로운 생의 새로운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을 형성하는 원인인 업(kamma)과 행(상카라, sakhāra)입니다.

 

그렇게 감각대상을 좋아하고 원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존재로의 윤회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갈애의 영향을 받아, 업 지음의 식인 죽는 마음의 속행이, 죽음이 가까워 오면서 나타나는 세 가지 표상인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죽음의 문 앞에서 보이는 대상에 집요하게 매달리기 때문에, 죽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마지막 본 대상을 거머쥐고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서 새로운 생을 생기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애를,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

 

주석서에 따르면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hā)는 상견常見과 결부된 갈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와(bhava)34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34.

존재()로 번역되는 바와(bhava) 서양에서 becoming으로 옮기고 있듯이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tahā)와 집착(upādāna)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즉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뜻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존재가 항상하고 변함없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상견이란,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는 죽거나 해체되지 않는다는 삿된 견해(邪見)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즉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몸으로 들어가서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되더라도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이외의 다른 종교 신앙들은 대부분 이러한 영원주의의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죽은 다음에 유일신의 의지에 따라 천국에서 영원히 살거나 지옥에서 영원한 파멸의 고통을 당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중생은 업에 따라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옮겨가며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중생은 지정된 진로대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변이하면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컨데,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소멸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모든 믿음들은 다 영원주의에 대한 삿된 견해인 상견常見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위에 앉아있던 새가 그 첫째 나무가 넘어지면 다른 나무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 둘째 나무가 떨어지면 새는 셋째 나무로 날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그것이 의지하는 거친 몸이나 형체가 소멸할 때 또 다른 거친 몸으로 이주해 가서 파괴되지 않고 그 자체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갈애는,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를 수반하고 있어서 존재에 대한 갈애라고 합니다. 이 갈애는 영혼이나 살아있는 실체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하는 견해를 좋아합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은, 무시無始이래로 영원한 존재로 지속되어왔고, 여전히 감각을 느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보고, 듣고, 감촉하고, 아는 모든 대상을 좋아하고 또 미래 희망사항인 대상을 좋아합니다.

 

갈애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번영하는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고, 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생에는 부유한 사람이나 천인으로 태어나 즐기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남자로 태어나길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여자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바람이 바로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갈애는 지금 현재 감각대상에 대해서도 일어나고, 지금 현재 일어나기도 하며, 또는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하는 갈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갈애로 인하여, 그것이 조건이 되어, 그 잠재적 힘으로 새로운 생을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존재는 영원하다는 신념으로 존재를 갈망하는 것을 존재에 대한 갈애 라고 합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

 

위바와 딴하(vibhava-tahā)라는 용어에서, 위바와(vibhava) 존재하지 않음(無有), 비존재, 존재의 소멸을 뜻합니다.

 

‘살아있을 때만 존재하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와 결부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과 결부된 갈애입니다.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과 단멸주의자들

 

이 단견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35의 한 지도자인 아지따가 주장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35.

육사외도六師外道는 BC 5~3 세기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가운데 세력이 컸던 여섯 유파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힌두교의 기본 경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배치되는 점이 많았고, 당시 전통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 운동을 전개했었던 새로운 사상가들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푸라나 까싸빠(Pūrana Kassapa) - 도덕 부정론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 숙명론

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③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 유물론

아지따는 일체가 지·수·화·풍의 네 원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현세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네 원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④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 - 7 요소설

빠쿠다는 지·수·화·풍 네 요소 외에 고苦. 낙樂· 영혼을 더해 7요소를 인정했는데,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았으며, 칼로 사람을 베어도 칼이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한 것 뿐이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⑤ 산자야 벨라띠뿌따(SañJya Belaṭṭiputta) - 회의론

산자야는 ‘내세, 선악의 과보, 윤회’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회의론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뿌따와 목갈라나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었다.

 

⑥ 니간타 나타뿌따(Nigantha Nātaputta) - 자이나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의 생애는 부처님과 유사하며 비슷한 시대에 밧지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30년간 교화를 펼치다가 72세에 사망하였다.

 

모든 존재를 영혼(jīva)과 비영혼(ajīva)으로 나누고, 비영혼을 다시 Dharma(운동의 조건), Adharma(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karma)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부터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함으로써 윤회에 속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나체로 수행했기 때문에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불리었다.

 

그 뒤에 자이나교는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3대 종교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인도에는 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다.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농업을 버리고 상업을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다.

 

 

“사람은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으면, 몸을 이루는 땅의 요소(地大), 몸 밖의 생명이 없는 땅의 본체(덩어리)로 돌아간다. 이 말의 의미는, 살아있는 몸에 있을 때에는 딱딱함, 거친 것으로 나타나는 땅의 요소(地大)가 죽고 나서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땅의 요소와 융합하고 이어서 땅의 물질로 변했다가 다시 나무와 식물 따위의 땅의 요소로 변환된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물의 요소(水大)는 생명 없는 물의 본체(덩어리)로 흘러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축축함, 유동성은 물의 본체의 축축함과 유동성으로 변한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불의 요소(火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불의 본체와 합쳐지고, 살아있는 몸에 있던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바람의 본체로 흘러 들어간다. 모든 인지기능(, , , 혀 등의 감각기관들)은 우주로 이동한다.

 

허무주의자들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등을 개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단견斷見36을 지니고 있습니다.

 

 

36.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는 기성의 정치적·종교적·도덕적 권위며 사회질서·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사상적 입장이다. 엄밀한 의미로 어떠한 실재實在나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는 사상적 개념이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無의 사상이다.

 

 

그들은 눈, 귀와 같은 물질적 형태가 스스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한다고 주장합니다. 감각기능에 속하는 의식(, mana)도 스스로 생각한다 것입니다. 그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하나로 표현되는 의식의 소멸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우주와 융합되거나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보이든 현명한 이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보는 내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도 내생에서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과보를 누리지 않는다.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허무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아지따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결국 악처에 태어나게 될 것

 

이러한 사상은 악행을 피하거나 선행을 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과 같이 정말로 죽은 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自認하는 됩니다.

 

그러면 죽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주장하던 바대로라면 살아있는 자아(앗따, atta)나 유정(有情, 삿따. satta)37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37.

유정有情으로 번역한 싸따(satta)는 중국 역경사로 볼 때, 구역에선 중생衆生으로, 신역에선 유정有情으로 옮겨졌다. 본서에서는 satta가 일반적 용도로 쓰일 때는 중생으로, 감각과 지각력을 지닌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일 때는 유정으로 옮겼다. 그리고 존재()로 번역되는 바와(bhāva)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satta는 문맥에 따라 중생과 유정의 두 가지로만 옮기고 있다.

 

 

그래서 아지따가, 사람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도 자아와 유정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쾌락을 누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hā)라고 합니다.

 

요약을 하면,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갈애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와 같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죽은 뒤에는 어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존재가 소멸한다고 하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공덕행 짓기를 게을리 하고 악행을 삼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짓는 악행은 또한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죽은 뒤에 내생이 있다면, 이들 악업은 당연히 좋지 못한 불선과보를 맺을 것이지만, 죽은 뒤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죄업은 소멸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런 죄업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따른 모든 과보로부터 자유로이 탈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같은 허무주의적 사상이 크게 와 닿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죽기 전의 바로 현생에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쾌락의 대상을 갈구합니다. 그 때문에 즐겁게 사는데 전념합니다. 이와 같이 맹렬하게 즐거움을 추구하면 그에 따른 업과 행을 낳고, 매 번 행위를 할 때마다 새로운 생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즐거움이 있고, 현생의 쾌락을 향유하게 되며, 이 갈애의 충격파는 식의 흐름인 삶의 연속체(바왕가)에 전해집니다. 그 결과 죽음과 가장 가까운 속행의 식, 또는 ‘업을 결정짓는 의식’이, 죽을 때 나타나는 표상인, ,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붙들고 있는 동안 죽음의 마음(쭈띠 찌따, cuti-citta)과 함께 죽음에 임하면, 세 가지 표상 중 어느 하나로 조건 지어진 새로운 생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단견斷見에 사로잡힌 사람은, 즐거운 대상에 대한 갈애 때문에,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악행 외에는 지은 게 없기 때문에 그가 받을 새로운 생은 낮고 비참한 세계인 악처일 가망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도 다시 태어남을 가져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끊임없는 알아차림으로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요약 합니다.

 

괴로움의 진정한 원인은 이 세 가지 갈애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갈애는 ‘태어남’에서부터 오취온五取蘊까지의,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인 집제集諦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고 또 어디에 자리 잡는가에 대해 대념처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어디나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며,

갈애는 거기서 일어나서 거기에 자리 잡는다.

 

 

여기서 ‘갈애가 일어난다’는 말은, 즐겁고 기분 좋은 대상들이 있어서 실제로 갈애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가벼운 수준의 번뇌(빠리윳타나 낄레사, pariyutthana- kilesa)라고 합니다.

 

‘자리 잡는다’는 말은, 기분 좋은 것의 무상한 성질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그것에 대한 갈애가 잠재하여 자리 잡고 있다가, 조건이 형성될 때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알아차림을 하지 못해서 감각대상에 잠재한 이 갈애를 ‘대상에 대한 잠재적 번뇌(아람마냐누사야 ārammaanusaya)’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명상수행은 이 번뇌를 제거해줍니다.

 

즐겁고 기분 좋은 것에서 일어나는 갈애는「대념처경」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며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1. , , , , , 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의 문(六門, 혹은 六根)

2.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마음의 대상()이라는 육처(六處, 혹은 六境)

3. 안식眼識, 이식耳識, 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라는 여섯 가지 식(六識)

4. 여섯 가지 감각접촉(六觸)

5. 여섯 가지 감각접촉에서 생기는 여섯 가지 느낌(六受)

 

이러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은 명상수련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통해서 이것들을 무상· 고· 무아로 인식하지 못하면, 갈애가 자라는 온상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두 가지 갈애, 즉 보고, 들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즐거운 대상에 대한 잠재적 갈애’와 기분 좋은 것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수준의 갈애’가, 태어남과 같은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集聖諦를 구성합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이해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인 집제를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 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들 모두가 끊임없는 알아차림으로, 집제集諦인 갈애를 일시적으로 없애거나 완전히 제거하게 되고, 여러분들이 선택한 도와 과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출처 :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docx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pdf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2012-03-05

진흙속의연꽃

 

사성제(짯따리 아리야삿짜니).docx
0.02MB
초전법륜경(상).hwp
0.59MB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docx
0.12MB
사성제(짯따리 아리야삿짜니).pdf
0.04MB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0.59MB
초전법륜경(하).hwp
0.52MB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pdf
0.6MB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docx
0.12MB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0.52MB
마하시사야도의 집성제(集聖諦)법문.pdf
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