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는 왜 고통받는가, 마하시 사야도의 오취온과 고성제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2. 15:26

 

 

우리는 왜 고통받는가, 마하시 사야도의 오취온과 고성제 법문

 

 

 

불교수행에 있어서 정견(正見)이 바로 서야 한다고 한다. 정견이 바로 서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 정견은 어떤 것일까.

 

정견이 바로서지 않으면

 

바른 수행과 그릇된 수행이 있다. 바른 수행은 사성제를 알아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수행은 사성제를 몰라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일반적으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라고 한다. 줄여서 계금취견이라 하는데, 개금취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계금취견(戒禁取見)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으로 옮긴 실라바따 빠라마사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도 Wrong belief in the practise, 또는 attachment to mere rules and rites등으로 풀이된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에 들면 유신견, 의심과 같은 족쇄들과 함께 모두 뿌리가 뽑히게 된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계금취견은 성자의 흐름에 들면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 계금취견은 잘못된 수행방식으로서 팔정도를 벗어나면 모두 계금취견으로 볼 수 있다.

 

계금취견에 대한 게송

 

이런 계금취견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를 보지 못하고

도에 벗어나 있으면서,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것이,

바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다.”

 

 

계금취견의 특징은 영원에 대한 집착이라 볼 수 있다. 영원하기를 바라는 영원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영혼과 같은 불멸하는 자아가 있어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모든 종교가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와 같은 영속론에 대하여 사견(邪見)으로 간주하고 사성제를 설하였다. 정신-물질에 대한 명상수행을 하여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고성제와 오취온(五取蘊)

 

그런 사성제에서 첫 출발점은 고를 아는 것이다. 그 첫 단계가 고성제이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서 고성제에 대한 간단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으로 고성제(苦聖諦)입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눈과 귀등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형상과 냄새 등 여섯감각기관이 접촉하여 마음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다섯가지 정신-물질현상에 대한 집착하는 것이 고성제라 하였다.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성제는 정확한 정의는 어떤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성제(苦聖諦)

 

여기서 보듯 고성제(苦聖諦)에서의 괴로움(dukkha)은 단순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의 일부 학자들이나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이 둑카(dukkha) suffering(괴로움), pain(고통)으로 옮기는 대신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로 옮기기도 한다.

 

그리고 고성제의 핵심은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집착은 아나함과<不還果>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으며 그래서 아나함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색계천(色界天)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오취온의 괴로움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주석)

 

 

주석에서 고성제의 핵심은오취온고라 하였다. 이는 오취온이 고성제의 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취온고를 포함하여 고는 어떤 것이 있을까. 법문집을 보면 초전법륜경을 근거로 하여 고성제에서의 고의 종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열하고 있다.

 

 

고성제에서 고의 종류

 

1. 태어남(jāti)

2. 늙음(Jrā)

3. 죽음(maraa)

4. 슬픔(soka)

5. 비탄(parideva)

6. 육체적 고통(dukkha)

7. 정신적 고통(domanassa)

8. 절망(upāyāsa)

9.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1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12. 오취온(upādāna-kkhandha)

 

 

이와 같이 12가지 고의 종류 중의 하나가 오취온고이다. 이런 12가지 고는 는 오온을 나, 나의 것, 나의 자아 등으로 집착하는 것으로 인하여 고통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집착은 물질-정신을 갖는 존재에게 반드시 있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삼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결국 집착으로 인하여 존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오온과 오취촌 그리고 일체유위법은 같은 것이라 본다.

 

다만 아라한이 되면 오온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게 되어 오취온 고를 포함하여 12가지 고는 그 때서야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성제에 대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 http://www.buddhanet.net/dhammapada/d_path.htm

 

 

 

 

 

마하시사야도의 고성제 법문

 

 

 

고성제(苦聖諦) - 괴로움의 진리

 

 

Idām kho pana. Bhikkhave, dukkham ariya-saccām: jātipi dukkhā, Jrāpi dukkhā vyādipi dukkho, maraampi dukkham,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 piccam na labhati tampi dukkham, samkhittena pancupādanakkhandā dukkhā.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질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고, 접촉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자체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나열한 이 빨리어 게송은 현존하는「초전법륜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페이지의 ‘질병도 괴로움이다. vyādipi dukkhā,’라는 구절은 다른 경전에 나오는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빨리어 정의에서는 보이지 않는 외래어인 듯합니다.

 

동시에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soka parideva dukkha domanassu- pāyasā pi, ’라는 구절이, 다른 경전에서는 ‘죽음도 괴로움이다. maraam pi dukkham., ’란 말 다음에 나오는데, 현존하는「초전법륜경」의 판본에는 없습니다.

 

「초전법륜경」과 다른 경전들 사이에,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정의에서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에 대한 고찰

 

율장의 복주석서인「싸라타 디빠니(Sāratthadīpanī)1는 이상 언급한 경전의 차이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리한 지적을 하였습니다.

 

 

1 : 싸라타 디빠니(Sāratthadīpanī)

싸라타 디빠니(Sāratthadīpanī)」는 『율장』의 주석서인「삼만따빠사디까(善見律毘婆沙, Samantapāsādikā)」에 대해 스리랑카의 사리뿌따(Sāriputta)장로가 쓴 복주석서(tīkā)이다.

 

 

“‘질병도 괴로움, vyādipi dukkha, ’이라는 구절은 논장의「분별론(分別論 Vibhanga)2 에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청정도론」에서도 고성제(苦聖諦)에 대해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면서「초전법륜경」에 나오는 이 구절만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구절이 왜「초전법륜경」에만 나오고 다른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지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2 : 분별론(分別論 Vibhanga)

 

상좌부 논장 칠론에는 다음과 같은 논서가 있다. 이들은 동시에 성립한 것이 아니라 BC. 250년 경부터 BC. 50년 경 사이에 순차적으로 성립하였다.

 

(1)「법집론(法集論 Dhammasagai)」

아비담마, 논장의 원천이 되는 책으로 ‘법의 모음(法集)’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논장의 모든 주제를 열거하고 있는 책이다. 「법집론」의 중요성은 특히 논장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어 주는 그 논모(論母 Mātika)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법집론」의 마띠까는 선()·불선(不善)·무기(無記)로 시작하는 삼개 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 개 조(duka)로 된 100개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 법수를 일관성 있게 개괄한 것이다. 이렇게 전체 마띠까를 열거하고 나서「법집론」은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과 무기법(無記法)의 순서로 욕계(欲界)에서부터 시작해서 열거하고 있다.「법집론」은 비록 논장 최초의 책이지만 꼭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오히려 논장에 관계된 다른 중요한 가르침을 결집하면서 이들을 요약하고 총괄하는 형식으로 제일 처음에 둔 책이라고 본다.

 

(2)「분별론(分別論 Vibhanga)

위방가(vibhanga)라는 단어는 vi(분리해서)+√bhaj(나누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분석, 분해, 해체, 분별’로 번역되듯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주요 가르침을 무더기(), 장소(), 요소(), 기능(), 연기(緣起), 염처(念處)의 18가지 장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중부』등의 경에서도 다수 등장하고 있는데 부처님 당시부터의 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교신자들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분별론으로 결집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분별론」의 원형은 칠론 중에서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 간주하며 3차 결집이나 그 이전에 결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계론(界論 Dhātukathā)

‘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계론」은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 장소( ), 요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는가의 여부, 또한 관련이 있는가의 여부를 교리문답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짧은 1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논서는 이런 온()·처()·계()의 분석으로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를 척파하기 위한 것이다.

 

(4)「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러 형태의 인간에 대해서 일부터 열까지의 법수로서 논의하고 있다.

빤냐띠(paññatti)는 논장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개념’이나 ‘명칭’을 뜻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시설(施設)이라고 한역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법수에 따라서 모아져 있다.

 

(5)「논사(論事 Katahātthu)

논장 칠론 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지 않으신 것으로 전승되어온 책이다. 이 논서는 제 3차 결집을 주도한 목갈리뿌따 띠싸 장로가 다른 부파의 견해를 논파하고 상좌부의 견해를 천명하기 위해서 씌여진 책으로 알려졌으며 부파불교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6) 「쌍론(雙論 Yamaka)」

논장의 전문술어에 대한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이름지었다.

 

(7) 「발취론(發趣論 Paṭṭhāna)

미얀마 아비담마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하고 있으며 총 5권, 2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법집론」에 나타나는 삼개 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개 조(duka)로 된 100개의 논모(論母) 전체에 대해서 24가지 조건(paccaya)을 적용시키고 있는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싸라타 디빠니」는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또한, 논장의「분별론(分別論 Vibhanga)」에서는, 고성제(苦聖諦)를 포괄적으로 정의하여,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라는 구절을 ‘죽음도 괴로움’이라는 구절 바로 뒤에 두고 있다. 그런데도 이 구절은「초전법륜경」에서 유실되었다. 왜 그런지 세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복주석서를 쓴 저자는 경전에 이렇게 다양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른 경전에 나타나지도 않고 또 복주석서에서도 침묵하고 있는 이 ‘질병도 괴로움’이란 구절에 대해 어떠한 해설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점에 대해 조사해봐야 한다는 복주석서 저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왜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내놓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주제로 한 모든 법문에서 고성제(苦聖諦)를 일관되게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율장(律藏) 전문가인 장로들이 경장과 논장에 대해 율장만큼 정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장의「대품」에 속하는「초전법륜경」에, ‘질병도 괴로움이다.’란 구절은 삽입하는 과정에서,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란 구절을 삭제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율장에는「초전법륜경」원본이, 경장과 논장의 빨리어 원본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장과 논장의 주석서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 주석서에서는, 고성제(苦聖諦)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있을 뿐, ‘질병도 괴로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란 구절과 그런 주석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복주석서에서는 빨리어 원본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주석서「싸라타 디빠니」의 저자는 A.D 1153년과 A.D 1186년 사이의 스리랑카 빠라까마 바후 왕의 통치기간에 살았던 사리뿟따(Sāriputta)라는 한 장로비구였습니다. 미얀마력 1324(서력 1962)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700년에서 800년 전입니다. 붓다고사(Buddhaghosa) 존자에서 담마빨라(Dhammapāla)존자까지의 주석서와 복주석서 저자들은 대략 1300년에서 1600년 전의 인물들입니다.

 

빨리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 대품(大品)에 있는「초전법륜경」에 대해서 주해를 단 이들 고대의 주석서와 복주석서 저자들은 경전간의 상이점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당시「초전법륜경」에 있는 것들이 빨리 원본의 다른 경전이나 논장에 나오는 것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500년 후, 복주석서「싸라타 디빠니」의 저자가 등장할 무렵에는, 때맞춰 발견된 다양한 빨리어 원본들 간에 상이점이 있다는 사실이 표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원본들이 서로 다른 원인에 대해 예리한 검토와 면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촉구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을 펴실 때,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의미를 다른 원본들과 다르게 설명하셨다고 볼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첫 법문을 하실 때에는 괴로움에 대해서 한 가지로만 정의하셨다가, 나중에 다르게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식의 견해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ñāa)로 모든 것을 아는, 위없는 지혜의 소유자인 부처님께서는 시종일관 똑 같은 정의를 내리셨지만, 나중에 율법 전수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지적능력과 기억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하는 동안, 이러한 차이점이 원본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오늘날 원본의 차이점에 대한 사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석서와 복주석서의 원본들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원래 원본에는 이런 차이점이 없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전돼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상과 같이 주도면밀한 조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다른 원본들이 정확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존하는「초전법륜경」에는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정의를 하면서, ‘질병도 괴로움’이라는 문구는 넣었지만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란 문구는 빠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질병’은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라는 더 큰 의미의 괴로움에 속하지만 ‘슬픔’등에는 ‘질병’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질병도 괴로움’이란 말이 없는,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라는 구절의 원본들이 정확하다는 것. 그리고 부처님의 정전(正典)가르침에 근거한 것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원본들을 자세히 검토하는데 전념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이 법문이 정확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원본을 인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빨리 경전의 정의

 

Idām kho pana, Bhikkhave, dukkham, ariyasaccham. jātipi dukkhā, Jrāpi dukkhā maraampi dukham, soka parideva dukkha domanassupayasapi dukkha,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am na labnati, tampi dukkhami Samkhitte na pancupādānakkhandā dukkhā.

 

“비구들이여,

나는 지금 성자들만이 아는 괴로움,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한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대상, 또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고, 접촉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오취온(五取蘊)자체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대상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얻으려는 것과 얻지 않으려는 것, 그것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마하와경(Mahāvā Sutta)의 주석] 또는 원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분별론(分別論 Vibhanga) 복주석서].

한 마디로, , 나의 것, 항상함, 행복, 자아의 개념에 집착하는 정신과 물질의 집합체인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四聖諦)

 

세상에 현존하는 많은 종교적 믿음은 각기 자기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핵심이라는 견해를 설파합니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진리를 스스로 체험한 것이 아닌 추론적 사고에만 기반을 두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추종자들도 개인적인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믿음에 의지해서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불교를 제외한 이 모든 교설들은, 부처님이 설하신 디가 니까야의「범망경(梵網經)」에서 나열하고 있는 62가지 사견(邪見)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추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는 스스로의 통찰지혜로 몸소 발견하신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가르침을 주신 사성제(四聖諦), 중도(中道)에 의해서 계발된 최상의 통찰지혜를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환언하면이 중도는 팔정도로서, 이미 언급한 통찰지혜를 낳게 하는 더 높은 지혜로 이끌어줍니다. 이러한 사성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성제(苦聖諦 Dukkha-saccā) - 괴로움의 진리

집성제(集聖諦 Samudaya-saccā) -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

멸성제(滅聖諦 Nirodha-saccā) -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도성제(道聖諦 Magga-saccā)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

 

 

사성제를 아는 것은 가장 기본적 요소입니다.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 또한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진정한 소멸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따라야 합니다. 결국, 괴로움의 소멸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지혜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성제3를 아는 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3 : 사성제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되고 종합된다. 그래서 마찌마 니까야,「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ahahatthipadopama Sutta)(M28)에서 사리뿌따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던 그것들은 모두 4성제(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입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SN.558)

 

라고 말씀하셨다.

 

사성제는 괴로움(현실)을 철저하게 알고(pariññā) 그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padhāna)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실현하고(sacchikiriya) 그러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bhāvan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12연기의 순관(유전문)과 동의어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12연기의 역관(환멸문)과 동의어이다. 그러면 사성제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고성제(苦聖諦 dukkha-ariyasacca)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는 먼저 괴로움의 현실을 철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오온(五蘊)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된다. 괴로움에는 다음과 같은 8가지가 있다.

 

태어남(jāti)

늙음(Jrā)

죽음(maraa)

슬픔(soka)

비탄(parideva)

육체적 고통(dukkha)

정신적 고통(domanassa)

절망(upāyāsa)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⑫ 집착의 무더기(upādāna-kkhandha)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성질로 설명된다.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결국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다.

행고성(行苦性 sa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 오온(五蘊)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으로 갈애(tah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갈애는 다음의 3가지로 설명된다.

 

욕애(慾愛 kāma-ta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유애(有愛 bhava-tahā): 상견(常見)과 함께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

무유애(無有愛 vibhava-tahā): 단견(斷見)과 함께하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3. 멸성제(滅聖諦 dukkha-niroda-ariyasacca)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는 이러한 갈애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nibbāna)의 실현을 뜻한다.

 

4.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ī-paipadā-ariyasacca)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는 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고 있다.

 

①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kappa)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바른 행동(正業 sammā-sammānta)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그리고 이러한 팔정도는 계( sīla) ( samādhi) ( paññā)의 세가지 도로 요약될수 있다.

 

① 계()의 도: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정()의 도: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

혜()의 도: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이 필수적인 사성제에 이르자 부처님께서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셨습니다. 앞서 보았던 첫 번째 진리는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1. 태어남(jāti)

2. 늙음(Jrā)

3. 죽음(maraa)

4. 슬픔(soka)

5. 비탄(parideva)

6. 육체적 고통(dukkha)

7. 정신적 고통(domanassa)

8. 절망(upāyāsa)

9.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1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12. 오취온(upādāna-kkhandha)

 

이것이 앞서 인용한 빨리 경전 문구를 번역한 것입니다.

 

태어남(再生)의 괴로움

 

태어남(jāti)이란, 과거생의 마지막 순간에 죽어서 정신과 물질이 사라진 후에, (kamma)의 조건에 따라 새로운 정신과 물질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는 첫 순간을 뜻합니다.

 

과거생과 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첫 생겨남을, 새로운 몸과 마음의 최초의 형태인 재생연결(再生連結, paisandhe)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 형성이 모태에서 일어나면 우리는 이를 태아 입태(胎兒入胎 gabbhaseyaka-paisandhi)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 수태가 모태의 알에서 이루어질 때는 난생 입태(卵生入胎 aṇḍhaJ-paisandhi)라 하고, 태아가 태어나기 전에 자궁에서 성장할 때에는 태생 입태(胎生入胎 JlābuJ-paisandhi)라고 합니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자궁수태는 부모의 정액과 피를 근원으로 합니다. 서양의학에서는 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되어 수태가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피가 수태와 관련이 있다고 보면 일치할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온 정액과 피의 결합으로 새로운 정신과 물질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재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 재생은 각각 과거 불선업(akusala-kamma)이나 선업(kusala-kamma)의 조건으로 4악도에 태어나거나 인간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끼 등과 같은 축축한 매개체에서 재생하는 것이 습생(濕生 sasedaJ)으로 일부 애벌레 등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사람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 정령, 도깨비(아귀), 지옥 중생 등은 완전히 성장한 마음과 육체를 가지고서 화생(化生 opapātika), 즉 자연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네 가지 종류의 수태(四生)4 의 경우, 수태되거나 발생하는 첫 순간이 바로 새로운 존재의 시작인 태어남(jāti)입니다.

 

 

4 :네 가지 종류의 수태(四生)

 

사생(四生)은 생명체가 태어나는 네 가지 방식이다.

 

태생(胎生 JlābuJ): 모체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사람과 포유류가 이에 해당한다.

난생(卵生 aṇḍhaJ): 알에서 태어나는 조류와 어류가 이에 해당한다.

습생(濕生 sasedaJ): 습한 곳이나 오폐물에서 생겨나는 모기, 지렁이, 구더기 등의 일부 애벌레가 이에 해당한다.

④ 화생(化生 opapātika): 완전히 성장한 육체를 가지고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나는 지옥중생, 천신, 아귀, 아수라가 이에 해당한다.

 

 

태어나는 첫 순간의 괴로움이나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 일어남 혹은 생명의 기원은, 일평생 그 존재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태어남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미심쩍은 거래에 보증인 신분으로 자기 서명을 서류에 남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거래문서에 서명을 할 당시에는 성가실 것이 없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런 서류에 서명을 하는 행위는 아주 성가신 일, 즉 ‘괴로움’에 휘말려드는 것이 됩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 위해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 범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1.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苦苦 dukkha-dukkha)

2. 변화로 인한 괴로움(壞苦 viparināma-dukkha)

3.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

이상 세 가지가 한 부류입니다.5

 

 

5 :세 가지가 한 부류입니다

 

고고성(苦苦性), 괴고성(壞苦性), 행고성(行苦性)은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느낌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세 가지 느낌 가운데 고고성(苦苦性)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은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성질(苦性)을 가지고 있다.

 

즐거운 느낌은 변하면 괴로움이기 때문에 고성이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중생들이 이것의 속성을 모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고성이다. 이렇듯 3가지 괴로움(三苦性) 3가지 느낌(三受)으로 설명된다. 『장부』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고성(dukkha-dukkhata)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로운 느낌의 이름이다.

행고성(sakhāra-dukkhata)은 행()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름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형성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생겨남, 늙음, 변함에 의해서 짓눌렸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한다.

 

괴고성(viparināma-dukkhata)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즐거운 느낌의 이름이다. 즐거움이 변할 때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을 괴고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제외한 삼계의 모든 법에 대해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행고성(行苦性)이라고 알아야 한다.(DA.iii.992)

 

 

4. 감춰진 괴로움(paticchanna-dukkha)

5. 드러난 괴로움(apaticchanna-dukkha)

 

이상 두 가지가 또 한 부류입니다.

 

6. 간접적인 괴로움(pariyaya-dukkha)

7. 직접적인 괴로움(nippariyaya-dukkha)

 

이 두 가지는 세 번 째 부류입니다.

 

이 일곱 가지 괴로움 가운데, 슬픔, 비탄, 불행, 정신적 고통이 한 부류가 되고, 육체적 고통, 통증, 불편함은 또 다른 부류가 됩니다. 이 두 가지 괴로움이 합쳐져서 첫 번째 괴로움인,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苦苦)을 이룹니다. 이것의 자연적 성품은 괴로움이며 이 명칭도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이 두려워하는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苦苦)’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돕는 주():

참기 어려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바로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입니다.

 

 

변화로 인한 괴로움(壞苦)

 

감각적 느낌을 좋아해서 일어나는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육체적인 행복(kāya-sukha)이라고 합니다. 즐거운 감각대상에 반응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으로 즐거운 상태를 정신적인 행복(cetasika-sukha)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행복한 상태는 생명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이 두 가지 행복한 상태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추구합니다.

 

이것을 얻고 나면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비할 수 없는 만족감에 기뻐하고 있을 때 그 격렬한 기쁨과 즐거움을 제공한 감각대상이 사라지거나 파괴된다면, 격렬한 비통과 함께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몇 가지의 이유로 금, ,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재산을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인 배우자나 자식들과 사별 혹은 이별할 때에는 격렬한 정신적 고통과 비탄이 뒤따라 심한 경우에는 정신착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형태의 행복인, 육체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동안에는 아주 즐겁게 느껴지지만 사라지면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절망으로 전환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괴로움(dukkha)과 같은 것입니다.

 

 

기억을 돕는 주():

육체적 편안함과 정신적 즐거움에서 일어나는 행복을, 변화로 인한 괴로움(壞苦 viparināma-dukkha)이라고 한다.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대상들을 보고, 듣고, 접촉하는 일상의 모든 현상은, 즐거운 느낌이나 행복한 느낌도, 괴롭거나 불쾌한 느낌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는 것을 특성으로 하고 있는, 중립적이고 중도적인 상태를 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중립적인 평온은 영원히 지속하지 않습니다. 이 중도적인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필요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물론 괴롭게도 힘겨운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 덤덤한 느낌을,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덤덤한 느낌 외에도,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모든 것들 또한 끊임없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행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기억을 돕는 주():

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과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것(有爲法)들을 행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한다.

 

 

즐거운 느낌(樂受)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행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분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석자는, 이 즐거운 느낌을 ‘변화로 인한 괴로움‘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분류해놓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행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상 언급한 세 가지 유형의 괴로움을, 모두 파악하여 잘 이해하면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를 이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추어진 괴로움

 

귀의 통증, 치통, 두통, 헛배 부름과 같은 육체적인 병과, 불만족, 불같은 분노, 실망, 비참, 걱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신적인 고통은, 오직 혼자만 알고 있다가 그것이 심해질 때에만 남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감춰진 괴로움(paticchanna-dukkha)’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괴로움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분명한 괴로움(apataka-dukkha)’이라고도 합니다.

 

드러난 괴로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거나 총상을 입는 것과 같은 육체적 고통은 감춰진 것이 아닌 아주 명백하고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난 괴로움(apaticchanna-dukkha)’ 또는‘분명한 괴로움(pakata-dukha-dukkha)’이라고 합니다.

 

간접적인 괴로움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모든 것들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괴로움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언젠가는 끔찍하게도 이 괴로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간접적인 괴로움(pariyaya-dukkha)’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것과 같이, 나중에 되돌아올 결과가 뻔한 계약서에 서명하여 거래 보증을 서는 것과도 같은 무서운 일입니다.

 

직접적인 괴로움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苦苦 dukkha-dukkha)은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움의 작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직접적인 괴로움(nippariyaya-dukkha)’이라고 합니다.

 

이상 일곱 가지 괴로움 중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jāti)은 위에 언급한 분류에 따라 간접적인 괴로움(pariyaya-dukkha)으로 분류합니다. 수백만 년 동안 지옥불로 태워지고, 지옥 옥졸들에게 고문당하는 그런 온갖 괴로움을 겪는 것은 과거 불선업의 과보로 지옥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극심한 배고픔, 수없이 오랜 세월 불에 볶는 것과 같은 아귀계에서 갖은 괴로움을 겪는 것은, 불선업의 과보로 아귀계에 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 코끼리, , , 돼지, , , 염소, , 벌레등과 같은 동물들이 축생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곤경은, 그들이 어쩌다가 축생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음식, 옷 등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부족이 특징인데 이러한 불행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충분히 갖추고 사는 부유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질병, 불만족, 적으로부터의 위협, 노쇠 등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불행은 인간계에 태어났기 때문에 비롯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 즉 자띠(jāti),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괴로움입니다.

 

모태에서의 괴로움

 

일단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이 되면, 자신의 물질인 몸을 부모의 정액과 피에 의존한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으로 가득 찬 위()와 똥, 오줌을 담은 직장(直腸)사이에 위치한 혐오스러운 자궁에서 인생을 시작합니다.

 

정말 메스꺼운 일입니다. 정액과 피가 더럽게 한데 응어리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그 생각자체가 메스껍고 역겹습니다. 사람의 자궁에 태어날지 혹은 소나 개의 자궁에 태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20~30년 전 법을 가르치던 어느 한 장로스님은, 법문 중에 ‘법의 요람, 에메랄드의 요람’이라는 게송을 늘 독송하곤 했습니다. 그 게송은, 왕족의 아이들을 위한 황금 요람에서 가난한 집안의 잔가지로 엮은 볼품없는 바구니까지, 갖가지 요람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게송의 한 구절에는

 

 

‘늙는다는 것은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요람을 향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늙으면 결국 죽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적절한 질문입니다. 더구나 갈애가 아직 남아있다면 죽어서 새로운 존재로 재생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설령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여러 종류의 요람에서 삶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질문은 ‘어떤 요람을’향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으로 치장된 에메랄드 요람은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을 기다릴 것이고, 반면에 불선업을 지은 사람은 비참한 집안의 잔가지로 엮은 바구니로 직행할 것입니다. 그 게송은 사람들에게, 다음 생에 높은 계층의 요람을 보장받으려면 공덕행을 지으라는 권고였습니다.

 

또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자신이 어떤 자궁으로 들어갈 것 같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태어남으로 인해 겪게 되는 무서운 고통을 알아차려서 윤회를 끝내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합니다. 비록 지금은 완전한 해탈을 위해 매진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낮은 존재로는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궁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얼마나 무서운 재생의 괴로움에 직면하게 되는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9개월에서 10개월 정도 모태에 있는 동안 다른 고통들이 일어납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움직이거나 앉거나 일어서면 뱀 부리는 사람의 손에 떨어진 새끼 뱀처럼, 술주정꾼에게 빙글 빙글 돌려지는 새끼 염소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체력단련을 더 많이 하는 현대적인 모태에 있는 어린 생명은 더 극심한 고통을 받기 쉽습니다. 어머니가 차가운 것을 마시거나, 시거나 뜨거운 것을 삼킬 때 아기의 고통은 실제로 고문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날 때의 괴로움

 

더구나, 출산 시에 겪는 산모의 아픔은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으며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연약한 몸을 거친 손으로 만질 때, 목욕시키며 거친 천으로 문지를 때 일어나는 고통은 상처 난 민감한 부위를 갈갈이 찢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고통은 잉태의 순간에서 태어날 때까지 겪는 괴로움에 대한 것입니다.

 

전 생애를 통해 겪는 괴로움

 

물론 태어난 뒤에도 뻣뻣함, 뜨거움, 차가움, 가려움과 같은 고통과 불편이 있겠지만, 아이는 아직 어려서 움직이거나, 흔들어서 혹은 앉거나 서는 등의 자세로 바꾸어 고통을 덜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문제에 직면할 때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아이는 질병과 병환, 다른 사람들의 학대와 압박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은 이러한 모든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의 온갖 불행의 토대인 태어남(jāti)을 괴로움이라고 정의하신 것입니다. 면밀하게 고찰해보면 이 정의가 얼마나 정확한 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어남은 마치 나중에 분규가 일어날 문서에 서명을 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남은 이렇게 무섭기 때문에 괴로움인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은,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더 이상의 재생이 없을 때만이 이러한 고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이 바로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을 돕는 주():

1. 모든 존재에서 괴로움에 직면한다.

2. 태어남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

3. 그래서 새로운 존재의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어가는 괴로움

 

늙음(Jarā), 머리가 희어지고 이빨이 빠지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구부러지고, 귀가 안 들리고 시력이 저하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한 존재의 정신과 물질의 오온(五蘊)에서 눈에 띄게 진행되는 노쇠입니다.

 

하지만 몸의 정신적 요소가 늙어가는 것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주 늙어버렸을 때 비로소, 기억력 감퇴와 노망과 같은 노쇠의 징후들이 가까운 친지들에 의해서 드러납니다.

 

육체적인 노쇠는 전 생애에 걸쳐 아주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나이를 먹고 더 이상 젊음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열 살이 적은 부류는 열 살이 많은 부류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신체적 외모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20살과 30살의 외모는 어렸을 때의 외모와 비교해 볼 때 아주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변화는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늙음이란 머리가 희어지는 등 눈으로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그런 노쇠를 의미합니다.

 

늙음은 단지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가 정지된 한 순간(hiti)6을 말하는 것일 뿐, 있는 그대로의 고통이나 괴로움의 실체는 아닙니다.

 

 

6: 정지된 한 순간(hiti)

논장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의 현상은 일어남( uppāda), 머뭄( hiti), 무너짐( bhanga)의 세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정신의 변화는 물질보다 16배 빠르다고 한다.

 

 

늙음으로 인해서 몸 전체에서 생명력이 떨어지고, 시력과 청력의 저하, 후각과 미각의 쇠퇴, 신체적 쇠약, 추해지는 용모, 젊음의 상실, 기억력과 지적능력의 상실, (영감, 늙은이, 할머니 등의 호칭으로) 젊은이들로부터 당하는 경멸과 멸시, 사회의 애물단지로 취급당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물론 그러한 무력함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공포의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늙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늙음이 닥쳐오는 것을 막을 온갖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만 허사입니다. 노쇠는 희어진 머리와 빠지는 이빨 등과 같이 냉혹하게 진행됩니다. 늙어가는 괴로움은 이렇게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죽는 괴로움

 

죽음(maraa)이란, 물질과 정신의 생명(jīvita nāma, rūpa)7이 꺼지는 것, 또는 자신의 업을 조건으로 한 존재로 태어나서, 수태의 순간부터 끊임없이 활동해온 생명의 기능이 꺼지는 것을 뜻합니다.

 

 

7: 물질과 정신의 생명(jīvita nāma, rūpa)

생명기능이라 불리는 물질(jīvata nāma, rūpa) 28가지 물질 가운데 하나인 생명의 기능(命根 jīvita-indriya)으로서의 물질을 뜻한다.

 

 

이를 지칭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 sabbe bhayanti maccuno,삽베 바얀띠 맛쭈노)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한 죽음, 폭력으로 인한 죽음, 자연적인 원인으로 인한 죽음, 수명이 다해서 죽는 죽음, 선업의 공덕이 다 해서 죽는 죽음 등은 모두 정신과 물질의 생명 즉, 생명의 기능(life principal)이 소멸하는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죽음이란 정신과 물질의 생명이 해체되는 순간을 의미하고 그 자체는 아픔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이 닥쳐올 때면 육신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과 작별해야 합니다.

 

현생과 작별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겁이 나는 일로 모든 생명체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죽은 뒤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 지 모르는 불확실함도 큰 두려움입니다. 그러한 두렵고 무서운 특성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죽음을 괴로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과거 불선업을 지은 못된 사람은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나 추한 행위의 표상이나 재생하게 될 사악도의 표상을 보는데 이 모든 것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줍니다. 선업을 많이 지은 착한 사람 역시, 가까이 두고 사랑한 사람, 재산 등과 작별하는 것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에 닥쳐오는 죽음에 머뭇거리면서 괴로워합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모든 중생들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르는 병환과 질병의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토대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괴로움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슬픔의 괴로움

 

근심(soka)은 친척 등을 잃은 충격으로 걱정하고, 놀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1. 절도, 강도, 폭동, 유행병, 화재, 홍수, 태풍으로 친척을 잃을 때 그러한 불행을 액운으로 인한 불행(nātivyasana)라고 합니다.

 

2. (정부)의 행동이나 절도 또는 화재로 인해 재산이나 소유물이 파괴될 때 이것을 손실로 인한 불행(bhogavyasano)이라고 합니다.

 

3. 치명적인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목숨이 단축되는 것을 질병으로 인한 불행(rogavyasana)이라고 합니다.

 

4. 자신의 계행이 무너지는 것을 도덕적 의무의 상실로 인한 불행(sīlavyasana)이라고 합니다.

 

5. 바른 견해를 지녔다가 그릇된 견해로 빠지는 것을 잘못된 견해로 인한 불행(diṭṭhivyasana)이라고 합니다.

 

특히 남편, 아내, 아들 딸, 형제, 자매등과 같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재앙으로 경제적 불운이 닥칠 때 극심한 근심, 놀람과 함께 슬픔을 느낍니다.

 

이러한 슬픔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domanassa- vedanā)으로서, 그 자체가(as such) 괴로움(dukkha-dukkha)입니다.

 

슬픔 때문에 일어난 극심한 비탄은 빨리 늙게 하거나, 심하면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가슴알이나 냉가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슬픔은 다른 육체적인 통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슬픔을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을 상업화해서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슬픔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오직 사념처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념처를 계발해서 산따띠(Santati)장관8빠따짜라(Patācārā)장로니9의 예에서 보듯이 슬픔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8: 산따띠(Santati)장관

 

산따띠(Santati)장관의 이야기는「법구경」주석서(DhA.iii.78)등에 나온다.

 

산따띠는 꼬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의 장관으로 어느 날 왕의 명령을 받아 국경지방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돌아온다. 이 공로로 왕에게 7일간의 큰 축제를 하사받는다.

 

7일째 되는 마지막 축제일에 산따띠는 왕실의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부처님과 마주쳤지만 술에 취해 그냥 코끼리를 탄 채로 내려오지도 않고 인사를 드렸다.

 

그것을 보신 부처님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시자 아난다존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오늘 산따띠 장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열반을 얻을 것이고 바로 입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신다.

 

그 뒤 연회장에서 사랑하던 무희가 갑작스럽게 죽자 큰 충격을 받은 산따띠 장관은 울부짓다가 위안을 찾으러 부처님을 찾아왔다. 부처님의 다음 게송을 듣고 그는 무애해(無碍解)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고 곧바로 공중에서 화광정(火光定)을 나투면서 반열반(般涅槃)에 들었다.

 

 

“과거에 속하는 것을 깨끗이 하라.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라.

중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면

고요하게 유행할 것이다.”(Sn.949)

 

 

9: 빠따짜라(Patacara)장로니

 

빠따짜라(Patacara)장로니의 이야기도「법구경」주석서(DhA.ii.260)등에 나온다.

 

그녀는 원래 사와띠의 한 부유한 집의 딸이었는데 집안의 하인과 눈이 맞아서 부모 몰래 도망쳐 나와 가정을 꾸리고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나중에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부모를 만나러 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를 뒤 쫒아 나선 남편은 길에서 독사에 물려죽고, 강변에 먼저 건네 두고 온 아이는 독수리가 와서 낚아채가고, 그 와중에 한 아이는 강물에 휩쓸려가고, 그나마 친정집에 와보니 부모님들은 한밤중에 폭우가 쏟아져 모두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이러한 연속적인 불행에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린 빠따짜라는 옷도 걸치지 않고 울부짖으며 사방을 헤매다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곳으로 우연히 오게 되었고 부처님의 다음 게송을 듣고는 곧바로 수다원과를 얻었다.

 

 

아들도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아버지도 친척들도 또한 그러하다.

죽음의 압박에 시달리는 자에게

혈육은 의지처가 되지 못한다.”(Dhp.81)

 

 

 

오늘날에도 남편을 사별하거나 사업의 실패로 번민하는 사람들이 우리 명상센터를 찾아와서 사념처 수행을 합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슬픔은 점차 사라지고 결국에는 슬픔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찾습니다.

 

비탄의 괴로움

 

비탄(parideva)은 친척을 잃거나 재산을 상실한 충격으로 울부짖으면서 내는 물리적 소리입니다. 넋을 잃고 광분하여 비탄에 빠진 사람은 망자(亡者)의 덕과 일어버린 재산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되풀이하면서 그 재난을 초래한 적이나 혹은 그 매개체를 비난하면서 울부짖습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비탄은 물리적인 소리일 뿐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괴로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울부짖음과 병적인 반복은 육체적인 불쾌함과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탄을 괴로움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부짖는 것은 바로 빨리어로 둑카(dukkha)인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괴로움

 

뻣뻣함, 화끈함, 통증, 피곤, 가려움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고통은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은 누구나 잘 알고 두려워하는 기본적인 고통으로서, 괴로움으로 인한 괴로움, 즉 고고성 괴로움(苦苦 dukkha-dukkha)이라고 합니다.

 

, 돼지, , 오리, 새 같은 동물들도 육체적 고통을 너무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들겨 맞거나 총에 맞을 것 같은 약간의 조짐만 느껴지면 안전을 찾아 도망갑니다. 그러한 육체적인 고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 괴로움의 부류에 질병(vyādhi)이 속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체로 육체적인 고통 뒤에는 정신적인 고민이 생기는데 이 또한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만약 육체적인 고통을,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주의 깊게 알아차리면 정신적인 고통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오직 육체적 고통만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신적 고통을 피하고 오직 육체적인 고통만을 느끼도록 하는 이러한 수행을 칭찬하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신적 고통이 일어나도록 방치 하는 것을 부처님은 비난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해를 입힌 첫 번째 가시를 또 다른 가시로 찔러서 제거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살 속에서 두 번째 가시가 부러져서 박히면 그는 두 가지 고통, 즉 첫 번째 가시가 주는 고통과 두 번째 가시에서 주는 또 다른 고통을 받는다.

 

이 비유는 심사숙고해볼 가치가 있습니다.10

 

 

10: 이 비유는 심사숙고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상윳따 니까야, <수상응(受相應)>(S36:6)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결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느낌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은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화살 하나 맞은 괴로운 느낌만을 겪는다.

 

괴로운 느낌에 접했다 해서 그는 그것에 저항(하고 분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겐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에겐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 잡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이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리고 이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에 대해서도,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가 (이처럼)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을 경험할 때 그는 그 각각의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괴로움, 절망에 매이지 않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그는 결코 괴로움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정신적인 괴로움

 

도마나싸(domanassa)불쾌함, 걱정(불안), 비참, 슬픔, 공포와 같은 정신적인 고뇌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이 정신적인 고뇌도 역시 기본적인 고고성 괴로움(苦苦 dukkha-dukkha)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것을 잘 알고 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마음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몸까지 괴롭힙니다.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은 며칠이고 잠도 못자고 식사도 거른 채 낙심하여 방황하며, 그 결과로 건강을 해치고 심하면 죽기도 합니다. 참으로 이는 오직 아나함과 아라한만이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위협적인 괴로움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정신적 고통이 일어날 때 열심히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경우에는 이 비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자는 고통 또는 정신적 비탄을,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완화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괴로움

 

절망(upāyāsa)은 친척을 잃는 등, 손실로 인한 괴로움(nātivyasana)의 충격으로 극도의 정신적 고뇌에 빠지면서 생겨나는, 불쾌함 또는 분노입니다. 절망은 상실한 것에 대해 마음을 태우고 육체적인 고통을 받으며 되풀이해서 슬퍼하게 합니다. 그래서 절망은, 마음을 태우고 육체적 고뇌가 수반하기 때문에 괴로움, 둑카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인식합니다.

 

「청정도론」(Vis.XVI.53)은 슬픔(soka), 비탄(parideva), 절망(upāyāsa)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서 설명합니다.

 

 

“슬픔은 약한 불 위에 놓여 진 냄비속의 식용유나 염료액과 같고,

비탄은 강한 불 위에서 끓는 것과 같으며,

절망은 냄비 속에서 끓고 난 다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이,

다 마를 때까지 끓이는 것과 같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싫어하는 것과의 만남이란, 원하지 않는 존재와 만나는 것, 원하지 않는 업의 형성체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은 그 자체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나 원하지 않는 대상과 만날 때, 정신적 동요와 육체적 불쾌함의 형태로 즉시 반응합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을 부처님은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세간에서도 이것을 원하지 않는 괴로움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되풀이되는 윤회에서, 싫어하는 사람이나 대상을 만나지 않도록 발원, 혹은 기도를 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즐거움과 즐겁지 않은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에서는 상황에 따라 이 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러한 발원은, 전부는 아니지만, 싫은 사람이나 대상과 접촉할 기회를 적게 만듦으로써 부분적으로 실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마음자세로 싫어하는 상황을 마주 대하려는 노력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행동은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해서, 다시 말하면,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마음의 상태를 그냥 “들음”, “봄” 하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즐겁지 못한 감각이 몸에서 느껴질 때 “느낌” “앎” “통증” 하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란, 원하는 존재와 헤어지는 것, 원하는 업의 형성체(, 쌍카라)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헤어짐은 그 자체로는 고통스러운 느낌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남편, 아내, 자식들)과 사별하거나 살아있는 상황에서 생이별하거나 소중히 여겨온 소유물과 작별할 때에는, 곧바로 정신적 고뇌에 빠집니다. 슬픔과 비탄, 절망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온갖 정신적 고통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대상과 떨어지는 것을 무서운 고통, 둑카라고 하셨습니다.

 

세간에서도 그러한 헤어짐을 고통스러운 괴로움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되풀이되는 윤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항상 같이 하기를 발원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발원은 충분한 선업이 뒷받침될 때만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백만장자인 멘다까(Meṇḍaka)의 가족은 한 때 벽지불께 음식 공양을 하면서 내생에도 자신의 아내와 아들, 사위, 하녀 등 한 가족이 항상 함께 있기를 발원 했습니다11

 

 

11 : 항상 함께 있기를 발원 했습니다

 

멘다까(Meṇḍaka)의 이야기는「법구경」주석서(DhA.iv.203)에 나온다.

 

과거 생에 멘다까는 베나레스의 한 장자였는데 한 때 심한 기근이 닥쳤다. 그때 멘다까의 가족들은 집에 찾아온 벽지불에게 자신들의 밥을 모두 바치며 저마다 세세생생에 가족으로 함께 있기를 서원하였다.

 

그 뒤로 그들의 쌀독에는 쌀과 음식이 떨어지는 때가 없었고 세세생생을 함께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시기에도 앙가국의 아주 부유한 장자의 가족으로 함께 태어났다. 이들은 신통한 공덕을 가진 자의 본보기로서, 「청정도론」(Vis.X.42)에서 그 일화가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이 선업의 공덕으로 그들의 발원은 이루어졌으며 우리의 고따마 부처님시기에 다 같이 태어나 똑 같은 가족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발원은 집착의 족쇄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윤회의 고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진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은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이 괴로움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혹은 얻을 수 없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괴로움입니다. 팔정도를 계발하여 수행하지 않으면 이러한 갈애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 태어남, 늙음, 질병, 죽음이 없었으면.

! 슬픔과 비탄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하는데 물론 이것은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갈애를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서 갈애의 대상은, 태어남, 늙어감 등과 같은 것에서 벗어나는 열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갈애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세간의 일과 재물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 둑카입니다.

 

오취온의 괴로움(五取蘊苦)

 

이상 열 한가지의 괴로움, 즉 태어남의 괴로움(jāti-dukkha)에서 시작하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icchitalabha-dukkha)까지 총 11가지의 괴로움은, 단지 오취온(五取蘊)12 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12 : 오취온(五取蘊)

 

불교는 개인과 중생을 예외 없이 오온(五蘊)으로 해체하고 분석한다. 빨리어로 칸다(kkhanda)는 무더기, 더미, 적집(積集)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을 이루는 5가지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말이다.

 

또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은, 중생들이 이러한 색· 수· 상· 행· 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의 무더기(upādāna-kkhanda)라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과 오취온은 욕계· 색계· 무색계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동의어이다. 하지만 성자의 경우에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① 색온(色蘊 rūpa-kkhandha) - 물질의 무더기

물질로 된 몸뚱어리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안·이·비·설·신/색·성·향·미· 촉의 오내외입처(五內外入處)와 같은 물질일반을 나타내며 논장에서는 이를 더 세분화하여 28가지 물질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역은 material body.

 

② 수온(受蘊 vedanā-kkhandha) - 느낌의 무더기

감각의 육문을 통해 경험되는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논장에서 말하는 마음의 작용(心所)과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느낌()의 영역은 feeling.

 

③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

인식()은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한다. 즉, 지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인식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이름 지어진 형상()에 대한 인식, 소리()에 대한 인식, 냄새()에 대한 인식, ()에 대한 인식, 감촉()에 대한 인식, 마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6가지가 있다. 느낌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육문을 통해 일어난다.

 

논장에 말하는 마음의 작용(心所)과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식()의 영역은 perception.

 

④ 행온(行蘊 sakhārā-kkhandha) - 행의 무더기

여기서의 상카라, 행()은 심리현상을 의미한다.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논장의 52가지 심소법 가운데서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心所法)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心一境 ekaggatā), 의욕, 선심, 불선심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오온에서 느낌()· 생각()· 식()은 항상 단수로 나타나지만 행()항상 복수로 나타난다.(12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만 보아도 행()이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상·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 행위, 즉 심리현상을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행() 역시 논장에서 말하는 마음의 작용(心所)과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⑤ 식온(識蘊 viññāa-kkhandha) - 식의 무더기

식()이란, 감각의 육문을 통해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식은 느낌· 인식· 행과 같은 마음의 작용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은 매순간 일어나고 멸한다. 식()은 논장에서 말하는 마음( citta)과 일치하고 그래서 심법(心法)으로 정리되고 있다. 영역은 consciousness.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고 범부의 경우는, 오온을 집착하는 무더기들을 뜻하는 오취온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이 가운데 식온(識蘊)은 논장의 마음()과 일치하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의 작용과 일치하며, 색온(色蘊)은 물질과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수,,행에는 식이 반드시 함께한다. 아니 한 개체 안에서 색(몸뚱이)수상행식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물론 논장의 의하면 물질()과 정신(수상행식)의 생멸속도는 다르다고 논장은 설명한다. 정신은 물질보다 16배 혹은 17배 빠르다고 한다. 먼저 한 개체에 있어서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그리고 오온과 같은 개념으로써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는 단어가 경전에서는 주로 12연기의 하나의 구성요소로 많이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를 더미나 무더기, 적집의 측면을 강조해서 사용한 언어가 오온이고 나라는 존재를 정신과 물질의 조합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이 괴로움들은 바로 이 오취온을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이 오취온이 바로 고성제(苦聖諦)입니다.

 

대상에 달라붙고 붙잡으려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집착의 무더기(取蘊, upādāna-kkhanda)라고 합니다. 이 오취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색온(色蘊) - 물질의 무더기(rūpa-upādānakkhanda)

2. 수온(受蘊) - 느낌의 무더기(vedanā-upādānakkhanda)

3. 상온(想蘊) - 인식의 무더기(saññā-upādānakkhanda)

4. 행온(行蘊) - 행의 무더기(sakhāra-upādānakkhanda)

5. 식온(識蘊) - 식의 무더기(vinñāa-upādānakkhanda)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실재하는 무더기인 오온(五蘊)을 지닌 채 그렇게 존재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물질의 무더기(色蘊)에 불과한 자신의 몸을 ‘나’, ‘나의 몸’, ‘항상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집착합니다. 그래서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을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所)으로 이루어진 정신(nāma)도 ‘나’, ’나의 마음’,’생각한다는 것은 나라는 것‘, ‘항상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합니다. 그래서 정신도 또한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이상이 정신과 물질, 모두의 무더기에서 어떻게 집착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따로따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자세히 고찰해보면, 대상을 볼 때마다 집착의 무더기가 확연히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상상(생각)하는 순간에도 집착의 무더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보는 순간에는, 보는 눈[], 보는 대상[], 보는 인식[眼識]이 확연히 구별됩니다. 이러한 안식은, 볼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보는 대상에 대한 지각이나 인식, 보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노력 그리고 그 대상을 아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3

 

 

13 :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바로 웨다나( vedanā)이고, 형상에 대한 지각이나 인식은 샨냐( saññā)이고, 보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노력이 곧 행( sakhārā)이다. 여기서 보듯이 식()은 느낌()· 생각()· 업의 형성력인 행()과 같은 마음의 작용의 도움으로 감각의 육문을 통해 감각대상들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똑같이 일어난다.

 

 

통찰수행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혹은 통찰수행은 하고 있지만 아직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바로 보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눈과 눈의 대상 등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명히 보이는 것을 ‘나’, ‘나의 눈’, ‘항상 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몸과 팔다리를 바라 볼 때에는 ‘내 몸을 보고 있다.‘이것이 내 손이다.’ ‘이것은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하는 집착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지속적이고, 존속하는, 사람으로, 한 생명체로 인식합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집착이 증폭되기 때문에 물질인 눈과 보는 대상을 물질의 무더기(色取蘊)라 합니다.

 

대상을 볼 때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이외에도,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따로 상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덤덤한 느낌 중에서 선한 것은 즐거운 느낌에 포함되고, 불선한 것은 괴로운 느낌에 포함됩니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은 모두, ‘이것은 나다.‘이것은 내 느낌이다.’ ‘이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편안한 느낌이다.’ ‘끔찍한 느낌이다.’라는 집착을 일으킵니다. 이런 식의 집착을 원인으로 대상을 보면서 좋다거나 혹은 싫다고 느끼는 것을 느낌의 무더기(受蘊)라고 합니다.

 

대상을 인식할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그것을 인식한다.‘내가 그것을 잊지 않는다.’ 라는 집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것을 집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蘊)라고 합니다.

 

대상을 보려고 하는 의도를 쩨따나(cetanā)14라고 합니다.

 

 

14 : 쩨따나(cetanā)

의도로 옮겨지는 쩨따나(cetanā)는 찌따(citta)나 쩨따시까(cetasika)처럼 √cit(to know)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빨리 경전 앙굿따라 니까야 (A6.63)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cetanā)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하고 업을 짓는다.

 

라고 하는데, 이는 업을 정의하는 인용문으로 많이 알려진 구문이다.

 

빨리어 경전에서, 의도는 이처럼 모든 의도적 행위를 나태 내며 오온 중 행()으로 번역되는 상카라(sakhāra)와 동의어.

 

사실 본문에서 마하시 사야도도 말씀하셨지만 쩨따나는 의도라기 보다는 고무나 격려, 혹은 자극의 뜻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논장에서는 이렇게 고무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는 마음의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영역은 volition.

 

 

 

경전의 어휘집에는 이 쩨따나가 자극, 격려, 또는 고무라고 되어 있지만, 의지나 의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쩨따나에 부수되는 마나시까라(manasikāra)15 , 주의 기울임(作意) 은 대상을 생각하거나 거기에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15 : 마나시까라(manasikāra)

주의 기울임(作意)으로 번역한 마나시까라(manasikāra)는 mansi-karoti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manas( 마음)의 처소격에 √k(, 하다)를 붙여서 ‘마음에 만든다. 마음에 둔다. 마음에 새긴다.’는 뜻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 초보적인 뜻으로 대상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대상이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주의 기울임은 일으킨 생각()과 다르다. 주의 기울임은 마음의 작용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인 반면, 일으킨 생각은 그들을 ‘대상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주의 기울임은 목적지로 향하게 하는 배의 키와 같고 일으킨 생각은 잘 훈련된 말(함께 하는 마음의 작용)을 목적지(대상)로 보내는 마부와 같다고 한다. 영역은 attention. mental advertence.

 

 

그리고 활동에 돌입하기 시작하는 파싸(phassa), 즉 감각접촉()도 있지만 쩨따나와 마나시까라가 주된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나’, ’지속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행동과 관련된 의지와 향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마음의 작용(心所)에 집착하는 행위의 무더기‘인 행온(行蘊 )이라고 합니다.

 

(sakhāra)은 조건입니다. ’본다‘고 하는 경우, 보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보이는 대상을 안다는 것, ‘내가 보아서 내가 안다.’ 혹은 보고 있는 ‘나’는 영원하다고 집착하는 안식(眼識)입니다. 그러한 집착을 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인식을, 집착하는 인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이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1. 보는 순간의 눈과 눈의 대상은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입니다.

2.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3. 대상을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4. 보려는 의도와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5. 보이는 대상을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

대상을 볼 때마다 ‘봄’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이미 언급한,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보면, ‘나’, ‘나의 것’,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좋은 것’등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보는 단계에 있게 됩니다.

 

모든 현상을 알아차려야 하는 목적을 알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금언(金言)을 제시하기로 합니다.

 

위빠사나 명상수행의 기본원리:

 

(1) 무엇을 알아차려서 위빠사나 수행을 계발하는가?

집착의 원인인 오취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계발한다.

 

(2)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하는가?

집착을 끊기 위해서는,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한다.

 

(3)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영원한 것’ ‘즐거운 것’ 또는 ‘자아’라고 집착할 근거를 제공한다.

 

(4) 오취온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은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취온의 무상(無常), 불만족()을 꿰뚫어 아는 통찰지혜가 계발된다.

 

위의 (3)번에서,‘일어나는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보고 듣는 등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위의 (4)번에서, 오취온이 ‘일어날 때마다’는 보고, 듣고, 하는 모든 행위가 일어날 때를 의미합니다.

 

듣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듣는 순간에는 분명히,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또한 아주 잘 들리는 소리()와 듣는 것을 아는, 이식(耳識)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듣는 것을 아는 의식은, 들을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소리에 대한 인식, 소리를 듣기 위해서 노력하고 마음을 소리로 보내려는 의도, 그리고 그 소리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아는 지혜(如實智)가 없기 때문에, 듣는 순간 드러나는 모든 현상(), ‘나’, ‘나의 것’ 등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러한 집착을 만드는 까닭에 귀와 소리를 내는 물체를,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이라고 합니다.

 

들을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집착하는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소리를 인식하는 것은, 집착하는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대상을 보려는 의도와 대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은, 집착하는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아는 것은, 집착하는 인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요약을 하면,

 

1. 듣는 순간에 귀와 소리는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입니다.

2. 들을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입니다.

3. 소리를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입니다.

4. 소리를 들으려는 의도와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입니다.

5. 소리가 들리는 것을 단지 알기만 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식온입니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들리는 것을 ‘들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이미 언급한 다섯 가지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인 오온의, 있는 그대로인 실재를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소리를 들으면, ‘나’, ‘나의 것’,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좋은 것’ 등으로 집착하지 않고 그냥 듣는 단계에 있게 됩니다.

 

냄새 맡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냄새를 맡는 순간에는 코[]라는 분명한 물체가 있으며 또한 냄새[]와 냄새가 나는 것을 아는 비식(鼻識)이 있습니다. 이 냄새를 아는 비식은, 냄새 맡을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냄새에 대한 인식, 냄새를 맡기 위해서 의도를 내고 냄새의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냄새를 아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냄새가 날 때 ‘냄새’라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현상을 실재하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나’, ‘나의 것’ 등과 같이 냄새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한 집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코,, 냄새, 비식을,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1. 냄새 맡는 순간에 코와 냄새는 집착하는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입니다.

2. 냄새에 대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3. 냄새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4. 냄새를 맡으려는 의도를 내고 냄새의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5. 냄새를 단지 알기만 하는 것은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냄새를 맡을 때마다 ‘냄새’라고 알아차리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오취온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고, 그렇게 냄새를 맡으면, 그냥 냄새로만 맡게 되고, ‘나’, ‘나의 것’, ‘즐거운 것’, ‘불쾌한 것’, ‘좋은 것’ 등으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먹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먹는 것을 통해 맛[]을 아는 순간에는 분명히 혀[]가 있으며 또한 맛과 그 맛을 아는 인식(舌識)이 있습니다. 이 맛을 아는 설식(舌識)은 맛을 볼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맛의 인식 또는 기억, 먹는 행위를 하도록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의도를 내는 것, 그리고 그 맛을 아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먹는 순간에 먹는 것을 ‘먹음’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먹는 현상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나’, ‘나의 것’ 등과 같이 맛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한 집착의 가능성 때문에 혀, , 맛을 아는 의식을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1. 먹는 순간 혀와 맛은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입니다.

2. 맛을 보아서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3. 맛을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4. 맛을 보려는 의도와 그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5. 단지 맛을 알기만 하는 것은 의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손위에 한입분량의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그것을 들어서 입으로 가져가고, 그것을 씹는 이러한 모든 행동들이 감촉()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음식을 씹을 때, 혀에서 느껴지는 맛을 아는 것은 맛을 아는 식(舌識)입니다.

그래서 매번 음식을 먹을 때 마다 맛을 알아차려서 그 맛의 실재하는 것, 있는 그대로를, 즉 맛을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오취온(五取蘊)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단지 맛을 보는 상태가 되게 하여 ‘나’, ‘나의 것’,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좋은 것’등의 집착이 일어나지 않게 합니다.

 

닿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촉감(觸感, sense of touch)16은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16 : 촉감(觸感, sense of touch)

촉감이라 번역한 뿌따바(phoṭṭhabba)는 몸의 기능(身根)의 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논장에서는 이 촉감을 지대, 화대, 풍대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지대는 딱딱함이라 설명되는데 이것은 딱딱하고 부드러운 촉감으로 인식되며 화대는 덥거나 차가움으로 느껴진다. 풍대는 팽창이나 압박으로 느껴진다. 한편 수대는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것은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의문(意門)으로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접촉으로 번역되는 파싸(phassa) 12연기중 하나의 각지로 널리 알려진 술어이다. 여기서 닿음이란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이것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것을 뜻하며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감각접촉()은 경에서도 기능( indriya), 대상( visaya), ( viññaa)의 세 가지가 부딪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마음을 대상과 부딪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도 이 phassa의 의미를 좀 더 살려 정확성을 기하고자 할 때에는 sense impression 이나 mental impression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정리를 하면 phoṭṭhabba(감촉)는 물질에 속하고 phassa(감각접촉)은 심소법(心所法) 속한다. 즉 색· 성· 향· 미· 촉의 감촉(photthabba)은 물질이고 12 연기의 촉· 수· 애· 취· 유의 (phassa)은 심리현상이다.

 

감촉(phoṭṭhabba)과 감각접촉(phassa)은 둘 다 √spś(닿다)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중국에서 둘 다 촉()으로 옮겼지만 이 둘은 이처럼 완전히 다른 술어이다.

 

 

근육이나 피의 상태가 양호한 사람의 몸 전체에 두루 퍼져있는 것이 바로 촉감을 느끼게 하는 몸의 감성물질(kāyapasāda-rūpa 身淨, 육근에서의 맨 느낌)인 감각기관(the sentient surface)입니다.

 

이 몸의 안(, , 근육, 뼈등)과 밖(피부)의 감각을 느끼는 감성(感性 pasāda, sensitive principle , )17은 바늘 끝만큼의 면적도 남기지 않고 고루 퍼져 있습니다.

 

 

17 : 감성(感性 pasāda, sensitive principle , )

감성(感性)으로 번역되는 빠사다(pasāda)는 pra+√sad(to si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써 경장에서는 깨끗한 믿음(淨信)을 뜻하지만 논장에서는 이 깨끗함의 의미를 6근(六根)에서의 맨 느낌을 나타내는 전문술어로 쓰인다.

 

그래서 빠사다는 각각의 감각기관에 위치하여 대상을 감지하는 특정한 기능을 가진 물질이다. 그러므로 눈의 감성(cakkhu-pasāda)은 형상이나 색깔을 감지하는 기능을 가진 물질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성을 지탱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감각기관( indriya)이다.

 

 

이 감성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서나 촉감이 느껴집니다. 닿는 순간에는 몸의 감촉물질(material tactile body)을 끌어오는 능력을 가진 감성이 작용합니다. 이것은 모양이나 형태로서가 아니라 부딪치는 장소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 , 혀라는 감각기관은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등 부딪치는 장소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또 부딪치는 순간에는, ( pathavi), ( tejo), 바람( vāyo)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어느 한 감촉물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딱딱함, 거침,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이 땅의 요소입니다. , 따스함, 차가움이 느껴지는 것은 불의 요소입니다. 뻣뻣함, 눌림 또는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입니다. 그러한 촉감은 몸 안에서 각기 다른 요소들이 부딪칠 때, 또는 몸 의 외부에서, 옷을 입고, 구부리고, 앉을 때 혹은, , , 바람, 불 또는 태양의 열로 인한 접촉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러한 부딪침[]은 아주 뚜렷한 촉감을 일으킵니다. 닿는 것을 아는 신식(身識),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부딪침을 인지하는 것, 닿는 행위를 위해 의도를 내고 그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일어난 것을 아는 것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특히 선명합니다. 육체적 고통은 불쾌한 접촉을 통해 생기는 괴로운 느낌( dukkha-vedanā)입니다.

 

닿는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실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닿는 순간에 드러나는 모든 대상을 ‘나’, ‘나의 것’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래서 감각장소, 감성물질(感性), 닿는 느낌, 그리고 접촉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이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기억을 돕는 주():

1. 닿는 순간의, 감성(감각기능)과 감촉은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입니다.

2.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3. 닿은 것을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4. 닿는 행위를 위해 의도를 내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5. 단순히 닿은 것을 알기만 하는 것은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몸의 자세에서 가고, 서고, 앉고, 자고, 구부리고, 뻗고, 움직이고, 일어나고, 꺼지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은 바로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몸의 자세를 알아차릴 때에는, 뻣뻣함, 눌림,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풍대(風大)가 두드러집니다. 이는 어떠한 인식의 힘도 배제된 물질적인 몸(rūpa),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몸의 자세를 알아차리는 마음도 역시, 대상을 아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있을 때마다, 알아차릴 대상인 물질과 그것을 아는 마음인 정신이, 항상 쌍으로 함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고 나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 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가는 자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알아차리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림의 대상인 물질과 그것을 아는 마음인, 정신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새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수행자는 이 현상이 변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며, 제 멋대로 스스로의 성품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확신이 있이 있으면 가고, 서고, 앉고, 할 때 ‘나’,‘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는 집착을 끊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경전에서는

 

“세계(世界), 다시 말해서 물질인 몸 혹은 오온(五蘊)에 대해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계발해야 합니다.

 

뻣뻣함, 뜨거움, 쑤심 가려움등과 같은 괴로운 느낌들은 접촉지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진정한 자연적인 성품을 보지 못하면, ‘내가 뻣뻣함을 느낀다.‘내가 뜨거움을 느낀다.’ ‘내가 통증을 느낀다.’ ‘내가 불쾌함을 느낀다.’ 고 하는 집착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으면 그것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아 이러한 집착을 끊습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지속적으로 면밀히 지켜보면 뻣뻣함, 화끈거림, 쑤심 등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몸 안에서 차례로 연속해서 새로 일어나는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 이들 괴로운 느낌들은, 잠간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이것들은 무상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괴로운 느낌들은 더 이상 나, 나의 것,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순간의 오취온(五取蘊)

 

생각하고 상상하는 등의 정신활동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동안 마음은 거의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주위에 눈길을 끄는 즐거운 대상이 없을 때에도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을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활동에는, 감각적 욕망(kāmāc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 회의적 의심(vicikicchā)과 같은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관련되어있습니다. 갈애(kāmā-vitakka), 악의(vyāpāda-vitakka), 잔혹함(vihisa- vitakka) 등에 대한 생각과 사고(思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정신활동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대로 주의 깊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을 자아(atta), 살아있는 실체로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신활동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심히 분석해보면 정신활동도 오취온(五取蘊)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에는, 즐거운 느낌( somanassa)이나 괴로운 느낌(domanassa),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upekkha- vedanā)이 수반하게 됩니다.

 

이들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가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괜찮게 느낀다. 내가 불행을 느낀다. 내가 나쁘게 느낀다. 내가 덤덤하게 느낀다.’라고 그것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느낌을, 집착하는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마음이 머물고 있는 대상을 인지하는 명백한 표상작용( saññā)이 있습니다. 이 표상작용은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기억을 더듬을 때 또는 돈을 지불하려고 계산할 때에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표상작용에 대하여, ‘내가 기억한다.‘내 기억력이 좋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18 그래서 집착하는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이라고 합니다.

 

 

18 : 이러한 표상작용에 대하여, ‘내가 기억한다.’ ‘내 기억력이 좋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의 논장에서는 기억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존재하지 않고 표상작용, 혹은 지각( saññā)이라는 마음의 작용 안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마하시 사야도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생각하거나 상상을 하고 있을 때에 주목할 만한 행위로서, 감각접촉(현재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 phassa), 일으킨 생각(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vitakka), 작의(作意, 대상에 주의를 기울임, manasikāra), 의도(cetanā)19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렇게 지혜롭게 하자, 저렇게 지혜롭게 하자.’고 부추기고 촉구합니다.

 

 

19 : 의도(cetanā)

앞서 언급한 바대로 파싸(phassa)란 대상이 몸에 물질적으로 부딪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몸을 통해서 나타난 대상을 정신적으로 ‘만지는 것’을 뜻하고 그로 인해 모든 인식과정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쩨따나(cetanā)는 논장에서 이렇게 고무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는 마음의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어 있음을 알면 본문의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의도(cetanā)작용이 특히 뚜렷한데, 예를 들어 한 밤중에 문득 중요한 일이 마음에 떠올랐지만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가서 그에게 말하라.’는 쪽으로 의도를 몰아갈 것입니다. 탐욕(lobha),성냄(dosa) 등과 결부된 불선한 생각들과 무탐(無耽, alobha), 무진(無瞋, adosa), 무치(無恥, amoha), 믿음(saddhā), 알아차림(sati)등을 동반한 선한 생각들이 명확하게 구별됩니다.

 

감각접촉, 의도, 주의 기울임과 같은 마음의 작용(心所)은 연이어 일어나는 생각(관념, 상상, 개념)들을 일으키는 데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말하는 행위나 가고, 서고, 앉고, 자고, 구부리고, 뻗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신체적 동작의 배후 역할을 합니다. 마음(), (), 행동()으로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부추기는 것은 행(), 쌍카라로서, 이것이, 생각나게 하고, 유발하며, 이끌어가게 하는 등의 조건을 만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의 행은, 그 자체를 사람 혹은 살아있는 실체와 동일시하고 ‘나’라고 잘못된 집착을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말한다. 내가 간다. 내가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행을 조건으로 한 잘못된 집착입니다. 그러한 집착을, ’행으로 인한 자아에 대한 집착(kārakatta)‘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감각접촉, 의도, 주의 기울임과 같은 마음의 작용으로 일어난 행을, 집착하는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생각하는 것을 아는 명백한 식()이 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식( vinñāa)과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을 한데 뭉뚱그려 그냥 마음( citta)으로 봅니다20 생각하는 것을 아는 식을 통상적으로 영혼이나 자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이것을, 집착하는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0 : 뭉뚱그려 그냥 마음( citta)으로 봅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 citta)과 식( vinñāa)를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찌따(citta) 마음이나 식 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쓰고, 위냐냐는 본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 6개 감각기관과 6개 대상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청정도론」(XIV.82)에 따르면 ‘()과 마음()과 마노()는 뜻에서는 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과 관련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한글이나 영어로는 그냥 마음이나 mind란 단어하나로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이나 기능들이 다 표현될 수 있지만 논장에서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심리현상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① 마음()으로 옮긴 찌따는cit(to think)에서 온 술어로 경전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지따는 마노(mano)와 위냐나(vinñā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영역도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로 다양하다.

 

()로 번역한 마노(mano)man(to think)에서 온 술어로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 a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영역은 보통 mind이다.

 

()으로 옮긴 위냐냐(vinñāa) vi(분리하여)+āa(to know)로 분해되는 술어로 여섯 감각기능(六根) 혹은 여섯 감각장소(六處)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과 부딪칠 때 일어난, 아는 마음이다. 그래서 위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6가지가 있다. 영역은 보통 consciousness이다.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정신현상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도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영역은 mental concomitants이다.

 

정신()으로 옮긴 나마(nāma) 오온에서 물질()을 제외한 느낌(), 표상(), (), () 4가지를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식()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아비담마에서는 정의한다. 영역은 mind, mentality이다.

 

그리고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찌따, 마노, 위냐냐를 같은 것이라 정의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지따와 마노는 위에서 보듯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 찌따는 마노와 위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어 원어에 대한 이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마음(mind)하나로 뭉뚱그려서 이해하거나 한문이나 영어 해석에만 따라 가다보면 왜곡되게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 심지어 부처님 당시에도 사띠(Sati)비구는( vinñāa)을 자아 또는 영혼으로 잘못 이해하고 이 식을 윤회의 주체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은 그를 크게 꾸짖으면서,

 

“ 참으로 나는 많은 방법으로 식은 조건 지어져서 일어난다고 설명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M18/i.111)

 

라고 강조하신 유명한 일화가 있다.

 

 

더구나, 생각하는 순간에는, 생각의 토대가 되는 물질인 몸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물질인 몸이 생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생각의 토대가 되는 몸에 집착하는,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21이라고 합니다.

 

 

21 : 몸에 집착하는,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

여기서의 토대란 식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적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은 눈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하고, 이식(耳識)은 귀를, 비식(鼻識)은 코를, 설식(舌識)은 혀를, 신식(身識)은 몸이라는 감성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를 근거로 한다. 여기서 요점을 간추리면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은 모두 문과 토대가 같다. 즉 안식(眼識)은 눈이라는 감성을 그 문으로 하고 눈이라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리고 모든 의식(意識)은 반드시 의를 문으로 한다. 즉 모든 의식은 반드시 심장토대를 근거로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의식은 그 문이 다르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눈을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토대를 근거로 한다. 귀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귀를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토대를 근거로 한다. 의문(意門)인식과정에서는 모든 의식은 의()를 문으로 하고 심장토대를 근거로 한다.

 

 

생각은, 물질과 정신 또는 명칭, 사상, 관념, 개념(paññātti) 등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것들은 또한 집착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대상은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에 속합니다. 마음의 대상은 정신의 무더기인 명온(名蘊)의 네 가지 범주22로 분류됩니다.

 

 

22 : 명온(名蘊)의 네 가지 범주

명온(名蘊)의 네 범주란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이다.

 

 

개념(paññāti), 물질적 집착의 무더기에도 있고, 정신적 집착의 무더기에도 있습니다. 그에 대응하는 것은 다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며...yam piccha na labhati, tapi dukkha, ’라는 경전 말씀이 있는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질도 정신도 아닌 그냥 개념입니다.

 

이점에 대해「근본 복주석서(Mūla-Tika)」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애는 괴로움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순간에 드러나는 오취온(五取蘊)에 대해서 모두 분석하였습니다.

 

요약하면,

 

1. 생각을 토대로 하는 물질적인 몸은, 몸의 무더기인 색온(色蘊)입니다.

2. 생각할 때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입니다.

3. 생각의 대상을 인식하거나 기억하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입니다.

4.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기 위해서 마음을 자극하고 기울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입니다.

5. 생각하는 것을 그냥 아는 것은,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서, 생각에 대한 진정한 성품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자연적인 성품을 알지 못하면 ‘나’, ‘나의 것’,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좋은 것’ 등으로 집착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의 대상에 끊임없이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집착은, 12연기의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일어난다. upādānapaccayo bhavo,라는 법칙에 따라서, 존재()가 생기는 과정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날 때마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따르는 늙음, 질병,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그것들의 자연적인 성품인,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납니다. 이렇게 해서 생각의 자연적인 성품을 알면 더 이상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태어남(再生)의 과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 질병, 죽음, 슬픔, 비탄 등 괴로움의 무더기가 완전히 소멸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려서 얻어지는 괴로움의 소멸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에 대한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매 순간 알아차릴 때만 일시적으로 소멸하였던 것이, 성스러운 도가 완성되면서, 괴로움의 무더기가 완전히 소멸합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을 알아차리는 동안에도, 어떤 생각이나 망상이 끼어들면, ‘생각’, ‘망상’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자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등 여섯 가지의 순간들이 결국은 오취온(五取蘊)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보는 순간에, 보는 주체가, 분명히 어떤 물질적인 실체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여 지는 외부의 대상 역시, 분명 물질적 실체인 여자, 남자로 보입니다. 듣는 등의 현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육체적 형태를 이루는 실체나 덩어리는 없고 단지 오취온만 있을 뿐입니다. 보고, 듣는 등의 여섯 순간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직 여섯 순간이 이 있을 때만 분명해질 뿐이고 그때 드러나는 것이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과 같은 무서운 괴로움은, 오취온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이러한 오취온이 존재하는 한 태어남, 늙음, 죽음과 같은 무서운 괴로움은 계속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취온 자체가 무서운 괴로움입니다.

 

요컨대, 육체인 (rūpa)이 있기 때문에 그 몸에 의존하여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아는 마음(nāma)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의존하여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취온을 이루고 있는 정신과 물질은 무서운 괴로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기 어려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무서운 고통으로서,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苦苦 dukkha-dukkha)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인 집착하는 무더기(取蘊)는 진정한 고성제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樂受),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유쾌하고, 즐겁고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면, 그 대신 불쾌함과 불만족이 들어오기 때문에 당연히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변화로 인한 괴로움(壞苦 viparināma-dukkha)입니다.

 

이 괴로움은, 즐거운 상태나 조건에서 다른 상태나 조건으로 변하거나 전환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성자에게 있어서 즐거운 느낌이란 마치 야차녀(夜叉女)23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홀려서 미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23 : 야차녀(夜叉女)

야차녀(夜叉女)는 yakkhinī의 음역으로 약차녀(藥叉女), 나찰녀(羅刹女)라고도 한다. 특히「본생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하늘을 날아다니고 벽을 관통해 지나가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매력으로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식인귀(食人鬼)나 악귀(惡鬼)로 묘사된다. 그리고 yakkha는 야차녀의 배우자인 남자 야차이다. 이들을 다스리는 신이 사대왕천(四大王天)중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이다.

 

 

성자들에게는 즐거운 느낌도 똑 같이 무서운 오취온으로서, 진정한 고성제(苦聖諦)입니다.

 

동시에 즐거운 감각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러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조건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이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성자에게는 이 또한 진정한 괴로움입니다.

 

마지막 남은 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 upekkha-vedanā)과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 항상 변하고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성자들에게는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은 변함없이 다가오고 있는데, 육체적 실체(무더기 혹은 지탱력)를 위해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는 집착의 무더기(取蘊)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사는 것처럼 무서운 일입니다.

 

집착의 무더기는 일시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행으로 인한 괴로움인 행온(行苦 sakhāra-dukkha), 조건을 만들기가 번거롭기 때문에 이 또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에겐 덤덤한 느낌뿐만 아니라 나머지 집착의 무더기 또한 고성제(苦聖諦)입니다.

 

성자들에게는 이 오취온(五取蘊)이 참으로 끔찍한 괴로움으로 보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고성제(苦聖諦)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오온, 즉 물질과 정신은,

‘나’, ‘나의 것’, ‘영원한 것’ ‘좋은 것’ ‘자아’ ‘에고’라고 집착하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서운 고성제일 뿐이다.”

 

 

집착()과 집착의 무더기(取蘊)

 

우리는 이제 집착과 집착의 무더기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착24이란 다음 네 가지에 집요하게 매달리거나 거머쥐는 것을 뜻합니다.

 

 

24 : 집착

집착()으로 옮긴 우빠다나(upādāna) upā(위로)+ā(향하여)+dā(주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받아들임, 받아들인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거머쥠, 집착’의 뜻으로 정착되었다. 이것은 12연기에서 갈애(tahā)에 조건지워진 것으로 나타난다. 영역은 grasping, clinging.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에서 나온 집착입니다.

 

(2) 사견(邪見)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업과 업의 과보는 없으며 내생도 없다. 정등각자인 부처도 없고, 아라한도 없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사견(atta-diṭṭhi,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견해),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사견, 기타 모든 잘못된 견해를 사견에 대한 집착이라고 합니다.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단순한 예식과 의례, 의식주의(儀式主義)에 집착하는 것으로, 사성제에 대한 이해와 팔정도의 계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 길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는 길이고 늙음과 질병,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도 없습니다. 이는 그릇된 것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견(miccha-diṭṭhi)의 일종입니다.

 

(4) 자아 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영혼, 자아,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유신견(sakkāya-diṭṭhi)과 자아에 대한 사견(atta-diṭṭhi)과 같은 것입니다.

 

네 가지 집착 가운데 (1) 번의 집착은,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2), (3), (4)의 집착들은 다른 모든 사견을 망라한 것입니다.

 

(a) 그래서 우리는 이상 두 가지의 집착을, ‘사견’과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집착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 대한 집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집착의 대상으로는 정신의 무더기와 물질의 무더기가 있으며 이것을 집착의 무더기(取蘊)라고 합니다.

 

(b) 요약 하면, 우리에게는, 집착의 원인이 되는 두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나’, ‘나의 것’이라는 집착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에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사견‘으로서, 나머지 두 개의 사견에 문을 열어놓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욕망으로 인해서 집착이 일어날 때,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욕망의 대상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집착하게 됩니다.

 

(c) 빨리)어 경전에서는, ‘이것이 나의 것이다. eta mama,25 라는 문구를 통해서, 이 욕망이 어떻게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하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25 : ‘이것이 나의 것이다. eta mama

앙굿따라 니까야와 주석서(M22/i135)는 ‘이것이 나의 것이다. etam mama, ‘이것이 나다. eso'ham sami,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eso me attā, (M22/i135)’라는 구문을 각각 탐욕 혹은 갈애(tahā)와 사견(diṭṭhi), 자만(māna) 3가지에 배대해서 설명한다.

 

중생은 나라는 존재, 즉 오온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하여 갈애를 일으킨다. 중생은 나라는 존재 혹은 오온을 두고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자만을 일으킨다.

 

(주석서는

 

내가 더 뛰어나다,

나와 동등하다 ,

나보다 못하다.’

 

는 세 가지 자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중생들은 이런 오온이야말로 나의 자아라는 사견(diṭṭhi)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상 빨리어 경전의 문구를 기억하는 것으로 소유에 대한 집착을 요약하였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는, 자아, 살아있는 실체 혹은 ‘나의 것’으로 하려는, 집착의 원인이 되는데 이것을 집착의 무더기라고 합니다. 정신적인 무더기는 욕망과 사견으로 인한 집착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무더기( khandha)라고 합니다. 집착의 무더기(取蘊 upādānakkhanda)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무더기는, 출세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네 가지 도과의 수, , 행 식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단지 느낌의 무더기, 생각의 무더기, 행의 무더기, 식의 무더기일 뿐 집착하는 무더기로는 분류되지 않습니다26

 

 

: 16  : 분류되지 않습니다

성자, 특히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있는 범부는 5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뜻하는 오취온(五取蘊)이라 함을 가리킨다.

 

 

세간의 형태로 나타나는 물질적인 몸의 수, , , 식은, 앞에서도 누누이 말했던 바와 같이, 집착을 일으키는 무더기입니다.

 

(d) 그래서 이것을 집착의 무더기인 색, , , , 식이라고 말합니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세간적인 무더기에는, 물질적인 몸, 그리고 색계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있는데, 이는 선정을 얻지 못한 사람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 하는 매 순간마다 감각의 육문(六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정을 얻은 사람에게는, 앞 서 언급한 무더기 외에도,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의 마음27이 마음의 문(意門)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27 : 색계선정과 무색계선정의 마음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크게 욕계마음, 색계마음, 무색계마음, 출세간마음의 넷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색계마음은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근본집중(appanā-samādhi)에 든 심리상태를 뜻하고, 무색계 마음은 무색계선에 든 상태를 뜻하며, 선정(근본집중)의 경지에 들지 않은 나머지 모든 심리상태를 욕계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열반에 든 심리상태를 출세간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욕계에 있는 인간이 초선에 들어있으면 그때 그는 욕계에 머물지만 색계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욕계에 있는 인간이 열반을 실현하면 그는 욕계에 머물지만 그의 마음은 삼계를 벗어난 출세간의 경지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의 이 말씀은 욕계에 있는 사람이 집중을 계발해서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색계선에 들면 그것이 색계선의 마음(rūpavacara-jhāna-citta)이고 같은 방법으로 집중을 계발해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색계선의 마음(arūpavacara-jhāna-citta)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취온은 모두 고성제(苦聖諦)로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되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dhamma)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빠사나 통찰지혜와 도의 지혜를 통하여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문 제3장에서 우리는, 고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正見)의 길은 바로 이 오취온을 알아차려서 생기는 지혜라고 정의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물질적 집착의 무더기(色取蘊)와 정신적 집착의 무더기(名取蘊), 진정한 괴로움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적 집착의 무더기(눈과 눈의 대상, 귀와 소리 등)와 정신적 집착의 무더기(보는 것을 아는 의식, 듣는 것을 아는 의식 등)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에 감각의 육문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것들을 잘 지켜보면 그 자연적 성품인, 일어남, 사라짐, 무상, , 무아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명상 센터의 수행자 몇 사람이, 감각의 육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방법에 따라 수행을 한 결과, 있는 그대로의 실재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 사람들 스스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 한 마디로, ‘오취온 자체가 괴로움이다.’라는 진리(Dhamma)를 알게 된 것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완전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더욱더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12가지 괴로움의 진리를 기억을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보겠습니다.

 

1. 태어남(再生)도 괴로움이다

2. 늙음도 괴로움이다.

3. 죽음도 괴로움이다.

4. 슬픔도 괴로움이다.

5. 비탄도 괴로움이다.

6. 육체적 고통도 괴로움이다.

7. 정신적 고통도 괴로움이다.

8. 절망도 괴로움이다.

9.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11. 팔정도를 닦지 않고서 늙음, 질병, 죽음과 갖가지 괴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바람도 또한 괴로움이다. 세간에서 얻지 못하는 것을 갈구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12. 요약을 하면, 위에서 언급한 11가지 괴로움, 즉, ‘나’, ‘나의 것’ 으로 집착하게 하는 오취온(五取蘊)은 참으로 괴로움의 진리(苦聖諦)다.

 

우리는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정의와 그 종류를 충분하고 완전하게 다루면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까지 법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 모두가, 중도인 팔정도를 계발하고,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림으로써 고성제(苦聖諦)를 명확하고 철저하게 이해하며, 여러분이 바라는 바 도과를 얻어서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신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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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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