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무아는 실제로 무아, 아라한따경( S1.3.5)에서의 자아의 의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26. 13:01

 

무아는 실제로 무아, 아라한따경( S1.3.5)에서의 자아의 의미

 

 

 

 

아라한따경

(Arahantasutta-거룩한 님 경, S1.3.5)

 

 [하늘사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성자인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성자인 수행승은

오로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하늘사람]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성자인 수행승이

참으로 망상에 사로잡혀 '나는 말한다'라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존]

"망상을 버린 자에게는 속박이 없으니 망상의 모든 속박은 남김없이 부서졌네.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라고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

- 이 시는 하늘사람이 숲속에 사는 깨달은 중생들이 ', 나의, 나에게'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 불교적인 가르침이 자아가 없는 무아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사용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 시에서

그러한 사용은 다만 관습적인 표현방법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 자아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오온)의 복합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아라한따경-Arahantasutta-거룩한 님 경, 상윳따니까야 S1.3.5, 전재성님역)

 

  아라한따경(거룩한 님 경-S1.3.5).docx 아라한따경(거룩한 님 경-S1.3.5).pdf

 

 

 

 

 

 

Bo Tree

 

 

하늘사람이란

 

경에서 하늘사람이 등장한다. 그래서 하늘사람과 부처님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하늘사람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데와따상윳따 (Devatā Sayutta)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사람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나무나 샘의 님프, 숲과 밭과 들과 가축과 가옥의 수호신뿐만 아니라 도리천을 비롯한 천상계의 여러 신들과 부처님 또는 부처님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제1쌍윳따 하늘사람 쌍윳따 나무나 샘의 님프, 숲과 밭과 들과 가축과 가옥의 수호신뿐만 아니라 도리천을 비롯한 천상계의 여러 신들과 부처님 또는 부처님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이 경들은 최고층의 경전 가운데 하나로 빤데가 이야기하듯이 이를테면 그 첫번째 경에서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열반에 도달한다’는 중도적인 교설을 하늘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

(전재성님, 데와따상윳따 해제글에서)

 

 

경에서 말하는 하늘사람이란 인간을 제외한 존재들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주변의 나무나 숲등과 수호신, 천상계의 여러신들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정령이나 천상의 신들 역시 삼계를 윤회하는 연기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나

 

경에서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왜 ‘나’라는 말을 쓰냐고 묻는다. 무아를 주장하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존재론적인 ‘나’를 쓰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명쾌하게 나라고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명쾌하게 말한다.

 

 

Pahīamānassa na santi ganthā

Vidhūpitā mānaganthassa sabbe,

So vītivatto maññana1 sumedho

Aha vadāmītipi so vadeyya

Mama vadantītipi so vadeyya,

Loke samañña kusalo viditvā

Vohāramattena so vohareyyā'ti.

 

망상을 버린 자에게는 속박이 없으니

망상의 모든 속박은 남김없이 부서졌네.

개념지어진 것을 넘어서는 현자는

'나는 말한다'라고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라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There are no bonds to one, who has dispelled measuring,
He has dispelled all signs of measuring
The wise one has overcome all thinking what so ever.
He may say, `I say' or others `say it's to me'
Clever in the ways of expression in the world,
He would say it, wanting to convey the meaning.

 

 

불교에서  나는 말한다( I say)” 또는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 say it's to me)”라고 말할 때 그 나의 의미는 개념지어진 것이라 한다. ,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나를 말한다. 따라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아난다존자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Eva me suta, 에왕 메 수땅)” 할 때의 나도 역시 관습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세상의 표현, 세상의 언어, 세상의 개념으로 활용하는 것이지 영원불변의 실체를 인정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념과 실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왜 세상의 관습이나 개념안에서 나라고 표현하는 용어를 써야만 했을까. 이에 대하여 정준영교수는 불교TV 특집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감에 있어서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경전이 맛지마니까야의 마두삔디까 숫따(꿀과자의 경)’입니다,

 

이 경전을 보면 눈과 그 대상과 안식이 접촉해서 촉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고 그 촉 다음에 느낌이 일어나고 느낌 다음에 지각, 생각, 망상을 거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자아 관념을 만들어 냅니다.

 

이 망상으로 인해서 인간은 나는 존재한다라거나 이것은 나이다라는 자아관념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프로세스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자아 관념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긴 희론은 인식과정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과정에서 생긴 자아관념으로 인해서 계속 내가 있다라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제거 할 수 있는 단계는 일반적인 단계는 아니고 대상과의 접촉영역을 중지하거나 아니면 아라한이 되어야만 망상을 제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나 숫따니빠따에서도 망상을 제거하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일반범부가 자아관념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정준영 교수, 특집세미나 <,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1 초기불교의 이해 - 나라고 만한 것이 있는가?, 불교TV 2009-01-13)

 

 

정준영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이 개념안에서 개념으로 빚어진 자아를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한다. 하지만 개념에서 벗어나서 실재안에서 자아를 벗어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과 실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아는 실제(實際)로 무아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이와 같이 들었다식의 자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런 용어는 개념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법한 무아라는 것은 언어적, 개념적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실제(實際)로 무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경을 읽을 때 나라는 말에 대하여 개념과 실제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2-02-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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