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구두 수선방에서 본 부처님말씀, 인생의 거센물결과 헤마와따경(Sn1.9)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23. 14:12

 

구두 수선방에서 본 부처님말씀, 인생의 거센물결과 헤마와따경(Sn1.9)

 

 

헤마와따경

[Hemavata sutta] (*1)

 

(Hemavata sutta- To the Demon Hemavata, 숫따니빠따 Sn1.9)

 

주해(*1)

헤마와따는 야차의 이름, 의미상으로는 설산야차를 뜻한다. 야차는 비인간(非人間)에 속하는 무리로 아귀보다는 약간 높은 단계의 귀신으로 인간과 건달바 사이의 있는 존재이다. 영혼이나 유령, 도깨비, 요정, 괴물이 여기에 속한다.

 

싸따기라의 경(七岳夜叉經)에 따르면 야차 싸따기라는 야차 헤마와따와 친구로서 야차들의 28지도자 가운데 두 야차였다.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 시대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자 높이가 한 요자나 되는 크기에 네 개의 문이 있는 엄청난 크기의 탑묘가 건설되었다.

 

그 무렵 서로 친구인 양가의 아들 두 사람이 장로들 앞에 출가했다. 그들은 장로에게 가르침에 대한 의무에 대해 묻자 장로들은 거주상의 의무와 교법상의 의무가 있다고 했다. 거주상의 의무는 스승에게 5년 동안 계율의 항목과 경전과 명상 수행을 배우는 것이고, 교법상의 의무는 스스로 5부 경전을 스스로 습득하여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총명했으므로 거주상의 의무를 나중에 어른이 되어 수행하기로 작정하고 먼저 교법상의 의무를 완성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경전을 공부하여 교법에 통달했다. 그리고는 젊어서 각각 오백명의 수행승을 거느렸다.

 

당시에 작은 마을에 있던 두 명의 수행승이 정법론자와 비법론자로 갈렸다. 정법론자는 계율론자가 비정법론자의 위범을 알 것이라고 주장했고, 비법론자는 만약에 그렇다면 교단의 입장은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들은 장로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입장이 난처해진 장로들은 누가 옳은가의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자 교단은 양분되어 혼란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것을 수습할 깟싸빠 부처님은 이미 돌아 가셨다. 나중에 그들은 교단의 혼란상 때문에 심하게 후회하다가 죽었다. 죽어서 싸따기라는 싸따빱바따(七岳), 헤마와따는 히말라야에 사는 야차로서 태어났다.

 

그들은 서로 바가바띠빠바따에서의 야차 모임에서 서로 알아보고, 살다가 예전에 없던 일이 있으면 서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부처님이 태어나서 초전법륜을 굴릴 때에 싸따기라는 그 모임에 있었으나 헤마와따가 그곳에 있는지 마음을 쓰느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해가 졌지만 부처님이 아직 설법하고 있을 때에 그는 헤마와따를 불러오기 위해 500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떠났다.

 

라자가하에서 그들은 헤마와따를 만났다. 헤마와따는 결코 예전에는 본 적이 없는 꽃들로 뒤덮힌 히말라야에 싸따기라를 초대하려는 참이었다.

 

싸따기라는 그 기적의 이유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헤마와따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부처님의 위대성을 찬탄한다. 이들의 대화가 기록된 것이 헤마와따경의 서론이다.

 

싸따기라의 설명을 들은 헤마와따는 만족하여 싸따기 라와 함께 부처님을 찾아뵙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은 추종자들과 함께 그날 밤 한 밤중에 이씨빠따나에 도착하였고 헤마와따가 부처님께 질문하였다.

 

헤마와따는 원래 강직하고 현명하고 정의로와서 부처님의 놀라운 설법을 듣고 환희용약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전법하기로 약속한다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1. [야차 싸따기라]

“오늘은 보름이 되는 포살의 날(*1), 신성한 밤이 가까워 졌다.

, 최상의 명성을 지닌 스승이신 님, 고따마를 뵈러 가자.

 

2. [야차 헤마와따]

“그는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마음을 잘 정립하고(*2) 있는 것일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사유를 잘 다스리고(*3) 있는 것일까?

 

3. [야차 싸따기라]

“ 그는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마음을 잘 정립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사유를 잘 다스리고 있다.

 

 

주해(*1)

포살의 날 :

불경에 나타난 고대인도의 역법에 따르면, 인도의 일 년은 삼계절 -겨울, 여름, 우기-로 나뉘며, 각계절은 4개월씩 계속된다. 4개월은 8개의 보름기간으로 나뉘고 세 번째와 일곱 번째는 14일로 구성되고 나머지는 15일로 구성된다.

 

보름달이거나 신월이거나 반달의 날이 특별히 길조인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이런날에 포살을 행한다. 보름날과 신월에는 수행승들이 계본(戒本)을 외우고 일반 신도들은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 승원을 방문한다.

 

주해(*2)

마음을 잘 정립하고 :

‘동요없이 잘 세워진’의 뜻이다.

 

주해(*3)

원하고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탐욕과 분노에 지배되는 사유를 제어하는 것을 말한다.

 

 

4. [야차 헤마와따]

“그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있는가?

살아있는 것에 대해 삼가고 있는 것인가?

그는 방일에서 떠나있는 것인가?(*1)

그는 선정을 버리지 않고 있는가?

 

5. [야차 싸따기라]

“그는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삼가고 있다.

그는 방일에서 떠나있고,

깨달은 님으로 선정을 버리지 않는다.

 

 

주해(*1)

‘청정하지 못한 삶을 떠나 있는가?’ 라는 뜻이다.

 

 

6. [야차 헤마와따]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거친 욕설을 하지 않을까?

남을 중상하지 않을까?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을까?

 

7. [야차 싸따기라]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거친 욕설을 하지 않는다.

남을 중상을 하지 않고,

진실하고 유익한 말을 한다.

 

8. [야차 헤마와따]

“그는 감각적 쾌락에 물들지 않았는가?(*1)

그의 마음은 더럽혀져 있지 않은가?(*2)

어리석음을 벗어났을까?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눈을(*3) 가지고 있을까?

 

9. [야차 싸따기라]

“그는 감각적 쾌락에 물들지 않았고,

그의 마음은 더럽혀져 있지 않고, 어리석음을 벗어났다.

깨달은 님으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눈을 갖고 있다.

 

 

주해(*1)

감각적 쾌락에 물들지 않았는가? :

객관적인 물욕에 기초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주관적인 번뇌에 기초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관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물들어 있지 않은지 묻는 것이다.

 

주해(*2)

‘미움이나 분노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가’ 라는 뜻이다.

 

주해(*3)

부처님이 지닌 다섯가지 눈의 경계가 되는 대상에 대하여, 다섯가지 눈의 힘으로 전지성(全知性)에 관해 묻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는 다섯 가지의 눈이 있다.

 

1)자연의 눈(性眼)

2)하늘의 눈(天眼)

3)지혜의 눈(慧眼)

4)보편의 눈(普眼)

5)부처의 눈(佛眼)이다.

 

대승의 금강경에서는 자연의 눈이 육안(肉眼)으로, 보편의 눈이 법안(法眼)으로 바뀌었다.

 

 

10. [야차 헤마와따]

“그는 명지를(*1) 갖추고 있을까?

그의 행동은 청정할까?(*2)

그는 온갖 번뇌의 때를 소멸해 버렸을까?

이제 그가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까?

 

11. [야차 싸따기라]

“그는 명지를 갖추고 있고,

그의 행동은 청정하고,

그는 온갖 번뇌를 소멸해 버렸고,

이제 다시 그가 태어나는 일은 없다.

 

 

주해(*1)

명지(明智)란 무명(無明)의 반대가 되는 말이다. 무명을 소멸 시키려면 우선 무명을 무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무명이, 무명으로 나타나게 될 무명을 무명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무명이 무명으로 나타나게 될 지식으로서의 무명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러한 무명을 통해서 연기법이나 사성제의 진리를 보았을 때 우리에게 명지가 생겨나서 무명을 비로서 무명으로 보고 알 수 있게 된다.

 

주해(*2)

‘감[]의 청정’을 말하는데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별칭에 대해 묻는 것이다.

 

 

12. [야차 헤마와따]

“그는 행동으로나 언어로 보나 성자의 마음을 갖추었고,

명지와 덕행을 성취하였으니, 그대는 당연히 그를 찬양하리라.

 

13. 그는 행동으로나 언어로 보나 성자의 마음을 온전히 갖추었다.

, 명지와 덕행을 성취하신 님, 고따마를 뵈러 가자.

 

14. 사슴 같은 정강이에 여위었으나 강건하고(*1)

적게 드시고 탐욕 없이 숲 속에서 조용히 선정에 드시는 님,

, 고따마를 뵈러가자.

 

15. 온갖 욕망을 돌아보지 않고, 마치 사자처럼 코끼리처럼,

홀로 가는 그를 찾아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물어 보자.

 

 

주해(*1)

강건하고 :

내부와 외부의 모든 적을 파괴하므로, 영웅적이고 강건한 것을 의미한다.

 

 

16.[두 야차]

“진리를 가르치시고(*1), 설하시는 분(*2),

모든 현상의 피안에 도달하여(*3),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은(*4) 깨달은 님,

고따마에게 물어보자.

 

 

주해(*1)

진리를 가르치시고 :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열어 보인다는 의미이다.

 

주해(*2)

설하시는 분 :

‘청중에게 알맞게 설하는 것’을 말한다.

 

주해(*3)

모든 현상의 피안에 도달하여 :

‘모든 현상’은 ‘네 가지 단계의 현상’을 말하고, ‘피안에 도달하고’는 ‘곧바로 알고, 두루 알고, 버리고, 닦고, 깨닫고, 성취하는’ 여섯가지의 방식으로 도달한다.

 

주해(*4)

원한과 두려움을 뛰어넘은 :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에 따르면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과 그것을 뛰어넘고 극복하는 방법이 잘 설해져 있다.

 

1)

수행승들이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자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훔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애욕에 관해 잘못을 범하는 자는 애욕에 관해 잘못을 범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애욕에 관해 잘못을 범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거짓말을 하는 자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거짓말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5)

수행승들이여,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자는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심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곡주나 과일주 등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17. [야차 헤마와따]

“무엇에 의해서 세상이 생겨납니까?

무엇에 의해 친밀하게 됩니까?

세상은 무엇에 집착해 있으며,

또 무엇 때문에 해를 입고 있습니까?

 

18.[세존]

“헤마와따여,

여섯 가지 것에 의해서(*1) 세상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것에 의해서 친밀하게 되고,

세상은 여섯 가지 것에 집착하고 있고,

그 여섯 가지 때문에 해를 입고 있습니다.

 

 

 

주해(*1)

여섯가지 것에 의해서:

내적 외적 감각 영역을 말한다. 즉 시각과 형상의 장, 청각과 소리의 장, 후각과 냄새의 장, 미각과 맛의 장, 촉감과 감촉의 장, 정신과 사물의 장을 말한다.

 

 

19. [야차 헤마와따]

“그것 때문에 세상이 해를 입는다는 집착(*1)이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2)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20. [세존]

“세상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와

여섯 번째 쾌락인 정신(*3),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21. 이와 같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을 그대들에게 있는 그대로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주해(*1)

집착 :

 괴로움의 진리(dukkhasacca)을 말한다.

 

주해(*2)

벗어나는 길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maggasacca)를 말한다.

 

주해(*3)

여섯 번째 쾌락인 정신 :

다섯 감각적 쾌락은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고 유혹적인,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 청각에 의해 인식되는 소리, 후각에 의해 인식되는 냄새, 미각에 의해 인식되는 맛, 촉각에 의해 인식되는 감촉을 말하고,

 

여기서 여섯 번째로 정신이라고 한 것은 바라고 원하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고 유혹적인,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을 여기서 ‘정신’으로 축약한 것이다.

 

 

22. [야차 헤마와따]

“누가 거센 물결(*1)을 건넙니까?

누가 큰 바다를 (*2)를 건넙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심연에 누가 가라앉지 않습니까?

 

23. [세존]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가 있고, 삼매에 들고,

성찰할 줄 알고, 마음챙김이(*3) 있는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물결을 건넙니다.

 

2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지각에서 떠나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존재에 대한 욕구를 멸해버린 사람(*4),

그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주해(*1)

거센 물결 :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거센 물결(暴流)에 비유한다. 열반은 그러한 거듭되는 윤회가 끝나 파도가 미치지 않는 해안을 뜻한다.

 

또 거센 물결에는 감각적 쾌락의 거센 물결, 견해의 거센 물결, 무지의 거센 물결이 있다. 거센 물결의 경에 따르면, 하늘사람과 세존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 데는 머물고 애쓰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올바른 귀의와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주해(*2)

큰바다 :

쌍윳따니까야에 있는 ‘한 뿌리의 경’에 나오는 ‘열두 소용돌이의 큰바다’를 말한다. 그것은 내적인 여섯 감각기관(內入處)과 외적인 여섯 감각 대상(外入處) 12가지 영역, 즉 열두 가지 감각의 장(十二處)을 말한다. 이것이 현실의 윤회의 큰바다이다.

 

쌍윳따니까야(SN. IV. 157)을 보라 :

 

수행승들이여,

시각(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은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물결은 형상(소리, 냄새, , 감촉, 사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물결을 견디어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자라고 불린다.

 

주해(*3)

마음챙김 :

올바른 마음챙김(正念)을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마음챙김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마음챙김은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싸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 세 소년이 놀이하러 정원에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 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빌려주어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마음챙김을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마음챙김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마음챙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챙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챙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마음챙김이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마음챙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마음챙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니까야에는 네가지 마음챙김의 토대(四念處)가 함께 주어져 있다.

 

‘무엇이 네가지 [마음챙김의 토대]인가?

 

수행승 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며, 분명히 알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사실에 관해 사실의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주해(*4)

존재에 대한 욕구를 멸해버린 사람 :

쌍윳따니까야 쑤닷따의 경을 보면 하늘아들 쑤닷따가 한쪽으로 물러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칼날이 몸에 와 닿은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고,

수행승은 올바른 마음챙김으로 유행하세.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칼날이 몸에 와 닿은 것처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것처럼,

존재의 다발들이 실체라는 견해를 버리고

수행승은 올바른 마음챙김으로 출가하세’

 

 

25. [야차 헤마와따]

“깊은 지혜가 있고 미묘한 뜻을 보며,

아무 것도 없이 감각적 쾌락의 세계라는 존재에(*1)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해탈하여, 신성한 길을(*2) 가는 저 위대한 선인을 보라.

 

26. 위없는 명성을 지니고, 미묘한 궁극을 보며,

지혜를 알려주고,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지(*3) 않으며,

모든 것을 알고 현명하며, 고귀한 길을(*4) 가고 있는 저 위대한 선인을 보라.

 

 

주해(*1)

감각적 쾌락의 세계라는 존재 :

 욕계(欲界)의 존재를 말한다.

 

주해(*2)

신성한 길 :

미세한 물질적 세계의 선정의 성취(色界 四禪)과 비물질적 세계의 선정의 성취(無色界 四禪)八禪 성취를 말하거나, 그러한 세계의 신들의 길을 말한다.

 

주해(*3)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지 않으며 :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와 견해에 의한 두 가지 집착을 말한다.

 

주해(*4)

고귀한 길 :

여덟가지 고귀한 길(八正道)를 말한다.

 

 

27. 오늘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여명이 밝아지고 빛이 떠올랐습니다.

거센 물결을 건너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올바로 깨달은 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8. 천이나 되는 저희 야차 무리들은

신통력이 있고 명예도 가지고 있지만,

모두 그대에게 귀의합니다.

그대는 우리의 위없는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29.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과

잘 설해진 뛰어난 가르침에 예경하면서(*1)

저희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주해(*1)

여기서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귀의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경전은 참모임의 승단이 이루어지기 전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헤마와따의 경이 끝났다. -

 

 

(헤마와따의 경Hemavata sutta- To the Demon Hemavata, 숫따니빠따 Sn1.9, 전재성님역)

 

  헤마와따경(Sn1.9).docx 헤마와따경(Sn1.9).pdf

 

 

 

 

 

 

蓮花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세상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세상이 있었을까. 내가 죽은 다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은 우주론에 대한 것이다.

 

우주론에 대해서 유일신교의 경우 창조주가 만들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며 세상을 만들었다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세상에 대한 의문은 결국 나는 무엇인가?”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는가? 나는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등으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한다. 이는 연기법적인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정신-물질의 조건에 따른 것이다. 이는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고 그 조건으로 인하여 의식이 일어나는 원리와 같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라는 존재는 현재에 이렇듯이 있는 것을 보고,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 역시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였을 때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등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다.

 

무엇에 의해서 세상이 생겨납니까?”

 

이처럼 부처님의 연기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을 때, 경에서와 같이 야차 헤마와따가 무엇에 의해서 세상이 생겨납니까?” 라고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Chassū loko samuppanno         찻수 로꼬 사뭅빤노

Chassu kubbati santhava,     찻수 꿉바띠 산타왕
Channameva up
ādāya             찬나메와 우빠다야
Chassu loko vihaññati.”      
찻수 로꼬 위한냐띠

 

여섯 가지 것에 의해서 세상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것에 의해서 친밀하게 되고,

세상은 여섯 가지 것에 집착하고 있고,

그 여섯 가지 때문에 해를 입고 있습니다.

 

 “Hemavata, the world arises in the six,

and acquaintances are on the six

Supported on these same six,

the world gets destroyed in the six.”

 

 

부처님은 여섯가지 감각기관이 여섯가지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이 생겨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를 가지지 않는 어떤 조물주가 만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인식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온갖 고통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왜 발생할까. 그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정신과 사물을 조건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나는데 정신도 무상하여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고 사물도... 정신의식도... 정신의식이 생겨나는 그 원인과 조건이 되는 그 원인과 조건도 무상하여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조건을 조건으로 생겨난 정신의식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가지 법이 만나고 모여서 화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것을 정신접촉이라고 한다.

 

정신접촉도 무상하여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접촉하면 감수하고 접촉하면 의도하고 접촉하면 지각한다.”

 

(이원성의 경-Dutiyadvayasutta, 상윳따니까야 S34.9.10)

 

 

 세상은 삼사의 화합에 의하여 발생하지만 그 세상은 조건발생하는 연기적 현상이므로 그런 세상에 집착하였을 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렇게 고통으로부터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 야차 헤마와따는 부처님에게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

 

 

Pañca kāmaguā loke            빤짜 까마구나 로께

mano chaṭṭhā pamoditā,         마노 짯타 빠모디따
Ettha chanda
virājetvā       엣타 찬담 위라제뜨와

eva dukkhā pamuccati.        에왕 둑카 빠뭇짜띠

 

“세상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와

여섯 번째 쾌락인 정신,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In the world there are five strands of sense desires,

the mind is the sixth.

Cutting up interest there,

comes the release from unpleasantness.

 

 

이렇게 고통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일만 남았다.

 

누가 거센 물결을 건넙니까?”

 

그래서 헤마와따는 부처님에게 누가 거센 물결을 건넙니까?”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거센물결을 건너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 준다.

 

 

Sabbadā sīlasampanno           샅바다 실라삼빤노

paññavā susamāhito,            빤냐와 수사마히또
Ajjhattacint
ī satimā           앗잣따찐띠 사띠마

ogha tarati duttara.        오감 따라띠 둣따랑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가 있고, 삼매에 들고,

성찰할 줄 알고, 마음챙김이 있는 사람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물결을 건넙니다.”

 

“Always endowed with virtues, wise and concentrated,

With mindfulness turned inwards,

he crosses the flood. difficult to cross.

 

 

 

인생은 거센물결과도 같다. 거센물결에 빠져 허우적 거리면서 떠내려 가는 것과 같다. 알면서도 떠내려 가는 것이다.

 

돼지가 강물에 떠내려 가듯이

 

그런 거센물결을 한자어로 바꾸면 폭류(暴流)’가 된다. 빠알리어로 오가(ogha)’이다. 폭류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네 가지 폭류가 있으니

 

1)감각적 욕망의 폭류

2)존재의 폭류

3)사견의 폭류

4)무명의 폭류

 

이다.

 

(폭류-ogha, 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범주의 길라잡이)

 

 

이와 같은 네 가지 폭류에 휩싸이면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마치 홍수가 났을 때 돼지가 강물에 떠내려 가듯이, 자신도 어찌 할 수 없이 거센물결에 떠 밀려 내려 가는 것과 같다.

 

 

 

Three Little Pigs Stranded during Flood

 

 

 

이런 거센물결을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 부처님은 계정혜 삼학을 닦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알아차림(sati)을 이야기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릴 것인가.

 

구두 수선방 액자에서 본 부처님말씀

 

TV를 보다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하였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생각지도 말자로 시작 되는 글귀이었다. TV에서 다리가 불편한 어느 구두 수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 주면서 수선인의 작은 작업공간의 벽에 걸린 액자를 빠른 속도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화면이 지나갔기 때문에 문구를 다 기억할 수 없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그 문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서 올렸기 때문이다. 그 글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이 구두 수선인의 한 평 남짓한 작업실에 걸려 있다는 것이 신선하였다. 그렇다면 그 수선인은 부처님의 말씀을 알고 걸어 놓은 것일까, 아니면 단지 문구가 좋아서 걸어 놓은 것일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의 거센 물결을 건너는 데 매우 도움이 되는 문구임에 틀림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알아차림에 대한 것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마음을 두면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 문구에 대한 부처님의 게송 전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 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MN131, 전재성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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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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