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아라한의 인생관과 오취온 논쟁의 종결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21. 22:53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아라한의 인생관과 오취온 논쟁의 종결

 

 

주눅들게 하는 것

오취온이란 무엇일까. 오온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어도 오취온이라는 말은 생소하다. 그렇다면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아는 사람들은 오온과 오온취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구분해 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제 막 불교공부를 시작한 불자들에게 있어서 오온과 오취온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알아 듣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주눅까지 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보니 불교가 한 없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오온과 오취온에 대한 논란

오취온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취한다는 의미이다. 오온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오취온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자아 없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로 분해하였다. ,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을 말한다. 이렇게 나누어 무더기로 설명한 이유는 그 어는 것도 나의  ,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존재의 무더기가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님을 연기법적으로 설명하였는데, 오온과 오취온에 대한 논란은 항상 뜨겁다. 그런 오온과 오취온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하여 경전을 찾아 보았다.

존재의 무리(sakkaya)와 오취온

먼저 상윳따 니까야에서 오취온에 대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시호빠마경

(Sīhopama sutta- The Lion- 사자경, 상윳따니까야 S21.1.2.3.6,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짐승의 왕인 사자가 저녁 무렵 소굴을 나왔다. 소굴을 나와서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켜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둘러보고 세번 사자후를 했다. 세번 사자후를 하고 음식을 구하러 나왔다.

 

수행승들이여,

모든 짐승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의 표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공포와 전율에 빠진다. 동굴에 사는 자는 동굴에 들어가고 물에 사는 자는 물에 들어가고 숲에 사는 자는 숲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나른다.

 

수행승들이여,

마을이나 도시나 수도에서 견고한 포승에 묶인 왕의 코끼리라도 또한 그 포승을 자르거나 찢어발기고 두려워하여 대소변을 놓고는 그곳을 도망 나온다.

수행승들이여, 짐승의 왕인 사자는 이와 같이 축생 가운데 커다란 능력이 있고 이와 같이 커다란 위세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이신 세존이 세상에 출현할 때는 이와 같이 '물질은 이러하고 물질의 생성은 이러하고 물질의 소멸은 이러하다. 감수는 이러하고 감수의 생성은 이러하고 감수의 소멸은 이러하다. 지각은 이러하고 지각의 생성은 이러하고 지각의 소멸은 이러하다. 형성은 이러하고 형성의 생성은 이러하고 형성의 소멸은 이러하다. 의식은 이러하고 의식의 생성은 이러하고 의식의 소멸은 이러하다' 라고 가르침을 설한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공포와 전율에 빠진다.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존재의 무리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신들과 인간 가운데 커다란 능력이 있고 이와 같이 커다란 위력이 있고 이와 같이 커다란 위세가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세존]

 "초월적인 능력을 깨달아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니

신들과 인간의 세계에서 스승과 비교할 사람 없어라

존재의 무리가 소멸하고 존재의 무리가 생성된다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이야말로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이네

장수하는 신들은 아름답고 찬양받지만

사자 앞의 짐승처럼 두려워하고 전율했네

이미 해탈하신 그와 같은 거룩한 이의 말을 경청하니

존재의 무리를 극복하지 못하여 무상한 것은 실로 우리네.

 

 

.

- 존재의 무리 : sakkaya. 영원한 본질이 있다고 하는 생각과 결합된 집착된 존재의 다발 즉, 오취온(五取溫)을 말한다.

 

 

(시호빠마경-Sīhopama sutta- The Lion- 사자경, 상윳따니까야 S21.1.2.3.6, 전재성님역)

 

시호빠마경(사자경-S21.1.2.3.6).docx

 

시호빠마경(사자경-S21.1.2.3.6).pdf

 

 

초기경에서 오취온(panca upadana khanda)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경에서 단지 sakkāyapariyāpannāt’i라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전재성님은 삭까야(sakkaya)’에 대하여 존재의 무리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주석에서  영원한 본질이 있다고 하는 생각과 결합된 집착된 존재의 다발 즉, 오취온(五取溫)을 말한다라고 표현하여  오취온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영어에서 삭까야(sakkaya)에 대한 부분을 보면 a self view’라 하였다. 이는 견해를 말한다. 이런 견해는 일반적으로 사견(邪見)’이라 칭한다.  

 

따라서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리가 아니라 삿된견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취온은 사견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경에서 존재의 무리는 일반적으로 범부중생으로 보았을 때 오온과 오취온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때 오온과 오취온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 오취온의 의미는

 

다음으로 오취온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찾아 보았다. 청정도론에서는 오취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취착하는 무더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취착하는 무더기를 키워드로 오취온에 관한 내용을 찾으면 다음과 같다.

 

 

214.

② 차이점에 따라: 무더기와 취착하는 무더기의 차이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무더기는 일반적으로 설하셨다. 취착하는 무더기는 번뇌가 있고 취착하기 쉬운 것으로 한정하여 설하셨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무더기들과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을 설하리라. 그것을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러면 무엇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인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그 어떠한 것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을 물질의 무더기라 한다.

 

어떠한 느낌이건 … 어떠한 인식이건 … 어떠한 상카라들이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이것을 알음알이의 무더기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인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그 어떠한 것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무엇이든 번뇌가 함께하고 취착하기 마련인 것, 이것을 취착하는 물질의 무더기라 한다.

 

어떠한 느낌이건 … 어떠한 인식이건 … 어떠한 상카라들이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그 무엇이건 번뇌가 함께하고 취착하기 마련인 것, 이것을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들이라 한다.

 

 

215.

여기서 느낌 등은 번뇌가 다한 것도 있고 [번뇌가 함께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물질은 그렇지 않다. 물질은 더미라는 뜻에서 무더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무더기들 가운데서 언급된다. 또한 이것은 무더기라는 뜻과 번뇌가 함께 한다는 뜻에서 취착하는 무더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취착하는 무더기들 가운데서도 언급된다.

 

그러나 느낌 등은 번뇌가 다한 것은 오직 무더기들 가운데서만 언급되고 번뇌의 대상이 될 때는 취착하는 무더기들 가운데서 언급된다. 여기서 취착하는 무더기란 ‘취착의 대상인 무더기들이 취착하는 무더기들이다’라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무더기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14장 무더기, 214-215)

 

 

 

청정도론에서 오취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먼저 초기경을 근거로 하여 오취온의 정의를 내린다. ‘번뇌가 함께 하고 취착하기 마련인 것취착의 무더기(취온)’라 하였다. 이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있어서 오온과 오취온의 의미는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뇌가 다한 자는

 

하지만 번뇌가 다한 자, 즉 아라한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215절을 보면 아라한에게 있어서 ()’만은 예외라고 하였다. 이는 번뇌다한 자의 경우 작용만 하는 마음만 남았기 때문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을 아비담마에서 끼리야찟따(kiriya-citta, 作用心)’라 한다. 이 마음은 그 어떤 업도 짓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아라한의 마음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나는 새  그믈에 걸리지 않는 바람에 비유 된다. 

 

축복과 같은 아라한의 죽음

 

이처럼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마음의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다만 몸은 그대로이다. 그런 아라한은 어떤 상태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 12연기)에 따르면 아라한의 인생관과 소멸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다.

 

 

-아라한의 인생관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210’이 있는 것입니다.

 

 

 

210.

「장로게(長老偈)」(Thag.654)에는 레와따(Revata) 존자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나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삶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 날만을 기다린다.”

 

(테리가타, Thag.654)

 

 

삶이란 크게 보아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을 뜻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오취온의 부담은 끊임없이 보살핌과 돌봄을 요구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정신-물질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나면 아라한의 삶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211이라고 합니다.

 

 

 

211.

열반(涅槃)으로 음역한 nibbāna는 ‘불어서 꺼진’의 뜻이다. 경전에서는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교신자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①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②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

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게 되면 이러한 오온(五蘊)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완전한 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단멸이 아닌 괴로움의 소멸

 

 

자아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열반을 중생의 영원한 죽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사실 열반은 정신-물질 현상과 그 원인인 업과 번뇌가 회전하지 않음으로써 비롯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가 완전한 소멸되면 집착이 소멸되고, 집착이 소멸되면 존재[]가 소멸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재생이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늙음, 죽음, 다른 괴로움도 완전히 소멸합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이 중생을 핍박하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물질 과정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지는 것으로 살아있는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아나 영혼은 없기 때문에 재생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지고 중생의 단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을 단멸(斷滅)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불교신도에게 열반은 그저 괴로움의 소멸을 뜻할 뿐입니다. 이는 『상응부』「야마까경(Yamaka Sutta)(SN.22.85)에 나오는 부처님 당시의 야마까(Yamaka) 비구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야마까 비구 이야기

 

야마까 비구는 아라한은 죽고 나면 단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그러한 견해의 잘못됨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는 여전히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그를 불러서 묻자, 야마까는 오온(五蘊)은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그러한 오온을 자신의 소유나 자아로 여기는 것은 잘못임을 인정했습니다.

 

사리뿟따는 장로에게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명에서 벗어나 집착을 여의고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는 동안 야마까는 예류과를 얻고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야마까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리뿟따의 질문에 대해 야마까는 아라한을 육체적인 몸[], 느낌[], 인식[], 상카라[], ()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아라한이 색온(色蘊), 수온(受蘊)이나 다른 오온들 없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 살아있는 실재는 죽기 전에도 오온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에,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든 뒤에 다음에 아라한의 단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야마까는 자신이 그릇된 견해를 가졌음을 시인했습니다. 이제 야마까는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났으며 아라한의 사후운명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아라한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면 야마까는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합니다.”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사리뿟따가 확인해주었습니다. 장로는 오온을 친구로 가장한 살인자에 비유하고, 오온을 자아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살인자를 환영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야마까는 맨 처음 아라한은 죽으면 단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자아의 실재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전제로 하고, 이러한 단멸론적인 시각으로 열반을 보는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합니다.

 

단견은 열반이란 죽은 뒤의 자아(atta)를 부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야마까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예류과를 얻었으며, 아라한의 죽음은 무상한 오온에 내재하는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요약합니다. 보고, 듣는 정신-물질의 현상을 주시하지 못하면 무명(無明), 갈애[], 집착[], (), 상카라[]가 일어나며, 이로써 미래에 태어남[], 늙음· 죽음[老死]이 있습니다.

 

모든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은 무명 등과 같은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과 괴로움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과보가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합니다.

 

  야마까경(S21.2.4.3).docx 야마까경(S21.2.4.3).pdf

 

 

-오온의 성질에 대한 와지라 비구니의 말

 

게다가, 『상응부』「와지라경(Vajirā Sutta)(SN.5.10)에 나오는 와지라(Vajirā) 비구니의 유명한 말에서도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임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와지라 비구니가 기원정사 근처의 나무아래에 좌정하고 있을 때 마라가 나타나서 그녀를 겁을 주고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봐, 비구니!

누가 중생을 창조했느냐?

그 창조자는 어디에 있느냐?

중생은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떻게 끝나는가?

 

와지라 비구니는 대답했습니다.

 

“오, 마라여!

너는 중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중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전도된 인식이 아니냐?

네가 중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상카라[]의 무더기일 뿐이다.

이 무더기에서는 어떠한 중생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생이 색온(色蘊), 수온(受蘊) 따위의 오온(五蘊)의 집합을 가리키는 단순한 용어에 불과한 것은, 마치‘마차’가 바퀴와 차축과 멍에 등의 결합을 가리키는 용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생은 없고 단지 오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로움을 일으킨다. 사실, 일어나고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괴로움일 뿐이다. 괴로움 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러므로 중생이란 다만 개념적인 낱말입니다. 중생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무명(無明), 갈애[], 집착[], ,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 정신-물질[名色],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 느낌[]을 그 결과로 하여 이루어진 정신-물질 과정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다시 재생과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에서)

 

 

 

교학과 수행에 달통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에 따르면 아라한의 인생관을 볼 수 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 대하여 마치 월급을 기다리는 노동자에 비유하였다. 번뇌가 다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생사윤회할 일이 없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과 같은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아라한의 단멸

 

그런데 아라한의 열반에 대하여 단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사야도는 야마까경(S21.2.4.3)’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야마까경에서 야마까비구는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몸이 죽음으로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는 단멸론이라는 것이다. 이런 삿된 견해가 생겨나게 된 것은 철저하게 자아론에 근거한다. 자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영속한다거나 단멸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오온은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연기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오온은 살아서나 죽은 뒤나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라한의 단멸에 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와지라경의 예를 들었다.

 

와지라비구니가 마라와의 대화에서 중생이라는 것이 상카라들의 무더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중생이라는 것은 없고 오온만 있을 뿐이라 한다.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표기된 와지라경을 보면 오온의 집합이라는 말이 보인다. 이는 의역된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직역된 내용은 어떤 것일까.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와지라경

(Vajirāsutta. S5.1.1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수행녀 바지라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

 

싸밧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발우를 물리고 나서 대낮을 보내려고 안다 숲으로 갔다. 그녀는 안다 숲속 깊숙이 들어가 한 나무 밑에 앉았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 바지라에게 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운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수행녀 바지라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수행녀 바지라에게 시로써 이야기했다.

 

[빠삐만]

"누가 이 뭇삶을 만들었는가? 뭇삶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뭇삶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뭇삶은 어디에서 사라지는가?"

 

그때 수행녀 바지라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누가 이 시를 읊조리는가?'

 

그리고 수행녀 바지라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은 악마 빠삐만이 나에게 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고 시를 읊조리는 것이다.'

 

그때 수행녀 바지라는 '이것이 악마이다'라고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써 대답했다.

 

[바지라]

 "그대는 왜 뭇삶이라고 집착하는가? 악마여, 그것은 그대의 사견일 뿐.

단순한 행위()의 집적인데 여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바지라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

- 이 시는 밀란다왕문경(milindapanha)에도 등장하는 아주 잘 알려진 가르침이다.

 

 

(와지라경-Vajirāsutta.상윳따니까야 S5.1.10, 전재성님역)

 

  와지라경(S5.1.10).docx 와지라경(S5.1.10).pdf

 

 

악마 빠삐만이 누가 이 삶을 만들고 이 삶을 만든자가 누구인지 등을 묻는다. 이에 대하여 와지라 비구니는 마라의 질문이 사견에 바탕을 둔 것임을 지적하고 삶의 주체가 단순한 행위의 집적이라고 말한다. 이 때 행위의 집적이 오온과 같은 의미로 본다. 

 

오온과 오취온은 어떻게 다른가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표현된 와지라경에 대한 이야기와 초기경의 원문에서 표현된 존재의 다발(khandhesu)에 오온과 오취온의 구별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런 오취온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오온과 오취온이 설명되어 있다.

 

 

오온(五蘊)

 

불교는 개인과 중생을 예외 없이 오온(五蘊)으로 해체하고 분석한다. 빨리어 깐다(kkhanda)는 무더기, 더미, 적집(積集)이란 뜻으로 정신-물질(名色 nāma-rūpa)을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이다.

 

또 오취온(五取蘊)이라는 말은 중생들은 이러한 색()· 수()· 상()· 행()· 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집착(upādāna)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a)라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과 오취온은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동의어이다.

 

하지만 성자의 경우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① 색온(色蘊 rūpa-kkhandha) - 물질의 무더기

물질로 된 몸뚱아리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안· 이· 비··설· 신/색·성· 향· 미· 촉의 오내외입처(五內外入處)와 같은 물질일반을 나타내며,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더 세분화하여 28가지 물질들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역은 material body.

 

② 수온(受蘊 vedanā-kkhandha) - 느낌의 무더기

감각의 육문을 통해 경험되는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느낌[]의 영역은 feeling.

 

③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

인식[]은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한다. 즉, 지적인 단초가 되는 심리현상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인식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이름 지어진 형상[]에 대한 인식, 소리[]에 대한 인식, 냄새[]에 대한 인식, 맛[]에 대한 인식, 감촉[]에 대한 인식, 마음대상[]에 대한 인식의 여섯 가지가 있다. 느낌[]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육문을 통해 일어난다.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인식[]의 영역은 perception.

 

④ 행온(行蘊 sakhārā-kkhandha) - 상카라의 무더기

여기서의 상카라[]는 심리현상을 의미한다. 오온에서의 상카라[]는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부수법[心所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心一境 ekaggatā), 의욕, 선한 심리현상들, 불선한 심리현상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오온에서 느낌[]· 인식[]· 식[]은 항상 단수로 나타나지만 상카라[]는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12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만 보아도 상카라[]가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적 행위, 즉 심리현상을 포괄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상카라[] 역시 아비담마에서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52가지 심소법(心所法)들로 설명하고 있다. 영역은 mental formations.

 

⑤ 식온(識蘊 viññāa-kkhandha) - 식의 무더기

식()란 감각의 육문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감각대상들을‘아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식은 느낌[]· 인식[]· 상카라[]와 같은 마음부수[心所]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은 매순간 일어나고 멸한다. 식()은 아비담마에서 마음( citta)과 일치하고 그래서 심법(心法)으로 정리되고 있다. 영역은 consciousness.

 

이 가운데 식온(識蘊)은 아비담마의 마음[]과 일치하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부수[心所]와 일치하며, 색온(色蘊)은 물질과 일치한다. 한 개체안에서 이들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물론 아비담마에 따르면 물질인 색온(色蘊)과 정신인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생멸속도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즉 정신은 물질보다 16배 혹은 17배 빠르다고 한다.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고 범부중생의 경우는 오온을 집착하는 무더기들을 뜻하는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a)이라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온과 같은 개념으로써 명색(名色 nāma-rūpa)라는 단어가 경에서는 주로 12연기의 하나의 구성요소로 많이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를 더미나 무더기나 적집의 측면을 강조해서 사용한 언어가 오온(五蘊)이고 나라는 존재를 정신-물질의 조합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에서)

 

  12연기법문-마하시사야도.hwp

 

 

법문집의 설명에 따르면 오온과 오취온은 중생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같은 것이고, 성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다른 것이다. 그래서 번뇌 다한 자인 아라한의 경우 오취온이 멸하여 단지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끼리야찟따(jiriya-catta)로 이해한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한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진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삼계가 존재하는 이유

 

삼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집착으로 인한 것이다. 이는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존재에게 집착은 따라 다닐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 끊어야 할 것으로 색계에 대한 집착무색계에 대한 집착이 포함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범부중생들은 윤회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오온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범부중생에게 있어서 오온과 오취온은 동의어라고 본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윤회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고통과 윤회를 종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집착(upādana)이란

 

그것은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집착은 놓아 버릴 수 없다. 이미 들러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집착은 어떤 것일까.

 

십이연기에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난다로 되어 있다. 이 때 취를 빠알리어로 우빠다나(upādana)’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 주석에 따르면 우빠다나는 ‘강렬한, 극심한’이란 뜻의 ‘upa’와 ‘움켜쥐다, 잡다’라는 뜻을 가진 ‘ādāna’의 합성라 한다.

 

따라서 우빠다나는  ‘꽉 움켜쥠’의 뜻으로서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지나친 갈애를 뜻한다고 한다. 이는 12연기에 있어서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을 말한다.

 

이런 집착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ā-upādāna)

(2) 사견에 대한 집착(diṭṭhi-upādāna)

(3)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4)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atta-vāda-upādāna)

 

 

한 번 집착이 형성되면 집착을 조건으로한 존재가 생겨남을 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집착이 형성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느낌의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착이 발생될 수 밖에 없다.

 

고통과 윤회의 탈출구

 

그래서 삼세양중인과에서 고통과 윤회의 탈출구는 느낌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 도표에서 잘 설명된다.

 

 

 

 

 

 

십이연기 도표

 

 

 

12연기 도표를 보면 하단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사성제)’이 커다란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일 알아차림이 없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났다면 루비콘강을 건넌 것과 다름 없다. 강을 건넜으면 그대로 나아 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아나게 되고 그 결과 생노병사우비고뇌가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과 윤회를 멈추려면 연기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느낌에서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 까진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 까진다. 주식으로 돈을 벌 욕심을 내어 하루에도 수십번 단타매매를 하여 보지만 더욱 더 까지는 것은 집착 때문이다. 또 예뻐지기 위하여 자주 성형을 하여 보지만 더 망가지는 것 역시 집착때문이다.

 

좋아하는 이성이 있어서 집착해 보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더 멀리 도망간다. 이처럼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욱 더 까지고 멀어지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와 같은 집착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적 존재에 불과한 몸과 마음에 대하여 집착하면 고통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대하여 와지라비구니는 마라에게 다음과 같은 멋진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Kinnu sattoti paccesi           낀누 삿또띠 빳쩨시

māradiṭṭhigatannu te,           마라딧띠 가딴누 떼
Suddhasa
khārapuñjoya         숟다상카라뿐조이얌

nayidha sattūpalabbhati.        나이다 삿뚜빠랍바띠

Yathā hi agasambhārā           야타 히 앙가삼바라

hoti saddo rato iti,            호띠 삿도 라또 이띠
Eva
khandhesu santesu         에왕 깐데수 산떼수

hoti sattoti sammuti3.          호띠 삿또띠 삼무띠

Dukkhameva hi sambhoti          둑카메와 히 삼보띠

dukkha tiṭṭhati veti ca,       둑캄 띳타띠 웨띠 짜
N
āññatra dukkhā sambhoti        난냐뜨라 둑카 삼보띠

nāññatra dukkhā nirujjhatīti.   난냐뜨라 둑카 니룻자띠띠

 

 

"그대는 왜 뭇삶이라고 집착하는가? 악마여, 그것은 그대의 사견일 뿐.

단순한 행위()의 집적인데 여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괴로움만이 생겨나고 괴로움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괴로움밖에 생겨나지 않으며 괴로움밖에 사라지지 않는다."

 

(전재성님)

 

 

“오, 마라여!

너는 중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중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전도된 인식이 아니냐?

네가 중생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상카라[]의 무더기일 뿐이다.

이 무더기에서는 어떠한 중생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생이 색온(色蘊), 수온(受蘊) 따위의

오온(五蘊)의 집합을 가리키는 단순한 용어에 불과한 것은,

마치‘마차’가 바퀴와 차축과 멍에 등의

결합을 가리키는 용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생은 없고 단지 오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괴로움을 일으킨다.

사실, 일어나고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괴로움일 뿐이다.

괴로움 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마하시 사야도 12연기법문집)

 

 

“Māra, you are with a view, what do you take for granted as a being?
Here you do not gain a self, it's completely a mass of determinations
Just as all parts put together is called a chariot.
Even so when the masses are present, it is accepted as a being.
The produced unpleasantness stays and fades
Nothing other than unpleasantness is produced and ceases”

 

 

 

2012-02-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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