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원이 된다는 것, 보통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불교
불교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렇게 물어 본다면 우리나라 불자들은 대부분 ‘성불’하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해탈과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불교라고 볼 수 없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좀처럼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 불교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어느 인터넷법우님의 글의 따르면 “남방불교에서는 북방불교를 외도(이교도)취급한다(남방불교 스리랑카 사찰의 모습들)”라고 하였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외 그 어떤 다른 부처나 보살을 인정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수다원이 되어야 하는가
해탈과 열반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윤회의 종식이다. 윤회를 종식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일곱생 이내에 윤회가 종식되기 때문이다.
수다원이 되지 않을 경우 다음 번에 태어 날 때 어느 별, 어느 국토에 태어 날지 알 수 없다. 정법이 살아 있는 국토에 태어 난다면 다행이지만, 정법이 없는 곳에 태어나게 된다면 이번 생에서 불도를 닦은 것이 연장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태어나자 마자 전생의 일은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다시 시작 하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수다원만 되면 안심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곱생이내에 윤회의 종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에서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가장 고층의 경전이라 불리우는 숫따니빠따의 라따나경(보배경, 보석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9.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니
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ṃ aṭṭhamaṃ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와 쿳다까빠타 (Khp 7), 전재성님역)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 즉, 열반을 성취한 성자(수다원)는 설령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번 째의 생은 결코 없을 것이라 한다.
수다원이 된다는 것
이런 수다원의 윤회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불교TV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아라한이 되는 그게 확정된 존재다. 이거는 자동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우리가 수행을 처음 할 때는 수행하는 게 꼭 뭐 같겠어요? 오르막길을 열심히 오르는 거와 같아요. 그러면 번뇌가 또 막아서서 그냥 또 헤이하게 만들고. 그죠?
그런데 어느 정도 수행이 깊어진 사람은 평지 가까이 가는 거라고 할 수 있고. 이 수다원이 되면 내리막길입니다. 돌이킬 수가 없어요. 수다원이 된 존재는. 자기가 다시 중생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가지지도 않아요.
물론 뭐 수다원이 중생으로 가고 싶어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동으로 아라한이 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확정된 길을 가는 존재다. 이렇게 설명이 돼 있습니다.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불교TV 2011-11-14)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docx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pdf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일곱생이내에 윤회가 종식되기 때문에 이 대로 죽 가면 아라한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리막길로 표현하였다. 아라한이 되고 싶지 않아도 자동으로 되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열반이 약속되었고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원만 되면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수다원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수다원이 되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
수다원이 되면 세 가지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한다. 첫째로 유신견, 둘째로 의심, 셋째로 계금취이다. 그런데 세번째 항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좀 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수다원이 되면은 사라지는 번뇌가 있는데요, 그 제일 먼저 사라지는 번뇌가 수다원에서 좀 거친 형태의 번뇌들이 사라지는데. 그 수다원에서 사라지는 번뇌가 크게 나누면 첫 번째 사라지는게 뭐냐 하면, 삿된 견해가 사라집니다.
사견이라고 하는 삿된 견해가 영원히, 일시적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법에 대한 의심이 영원히 사라집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보살님들 잘 아시는 거. 질투, 질투가 없어집니다. 질투가 영원히 사라지고 인색함.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남에게 나누기 싫어하는 인색함. 이 네 가지가 완전히 사라지고요.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불교TV 2011-11-14)
일묵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유신견(삿된견해)와 법에 대한 의심, 그리고 질투와 인색 이렇게 네 가지가 영원히 사라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미 열반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열반을 맛 보았다면 ‘나가 있다’는 유신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 ‘시기’ 하고 ‘질투’ 하는 마음, ‘인색’한 마음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도 남아 있는 것
그러나 수다원이 되어서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런 것 중에 ‘감각적욕망’과 ‘성냄’이다. 이 두가지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인데, 수다원이 되면 다만 옅어질 뿐이라 한다. 설령 탐심이나 성냄이 일어나도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면 거친 번뇌는 모두 가라 앉았기 때문에 ‘성폭행’을 한다든가 사람을 죽일 정도로 성내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처럼 수다원만 되어도 어지간한 번뇌는 다 제거 되거나 약화 되었기 때문에 죽어서 절대로 악처에 태어날 일 없다고 한다.
수다원의 번뇌-손톱 끝 흙의 비유
수다원은 죽어서 태어나도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수다원은 번뇌가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절대로 그러니까 악처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게 수다원이 되는 거의 차이점인데요. 이거를 지금 여러분들이 실감이 잘 안날 수가 있는데. 이걸 비유로서 설명을 드리면, 부처님께서 이걸 비유를 어떻게 하셨냐하면, 이 지구상에 있는 흙을 손톱으로 이렇게 긁으면 어떤 게 더 많아요?
이 지구상에 있는 흙하고, 이 손톱위에 있는 흙하고? 비교가 안 되겠죠. 수다원이 된 존재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손톱 위의 흙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 이 지구에 있는 흙이라고 비유를 한다면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손톱위의 흙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손톱경이라는 경에 나옵니다.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불교TV 2011-11-14)
일묵스님은 손톱경을 예로 들어 수다원의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중생들의 번뇌가 지구의 흙만 하다면 수다원에 남아 있는 번뇌는 단지 손톱에 묻어 있는 흙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 S12.1.10.1)
그런 손톱경은 어떤 것일까. 검색하여 찾아 보았다.
나카시카경
(Nakhasikhāsuttaṃ- on the Nail- 손톱 끝 경, S12.1.10.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손톱 끝으로 티끌을 집어들어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티끌과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드신 티끌은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신 티끌을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한 현관은 매우 유익하다. 이와 같이 진리의 눈을 얻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註.
- 현관 : abhisamaya.
現觀. 현관이라는 말은 '분명한 이해' 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는 것이 현관의 전제조건이 된다. 고립된 현재는 현관을 통해서 연기의 그물망 속으로 사라진다. 올바른 현관을 성취한 자에게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사라지고 남은 괴로움은 아주 적다.
- 일곱 번의 환생 : 열반에 들기까지 가장 많이 태어나는 횟수가 일곱 번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진리의 흐름에 든 이(豫流果,sotapanna)' 를 의미한다.
(나카시카경(Nakhasikhāsuttaṃ- on the Nail- 손톱 끝 경, 상윳따니까야 S13.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에서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의 번뇌에 대하여 그 번뇌가 손톱 끝의 ‘띠끌’ 정도라 하였다. 그렇기에 이미 파괴되어 버린 번뇌는 매우 많고 아직 남아 있는 번뇌는 미미하다고 하였다. 그런 흐름에 든 성자는 죽어서 일곱생이내에 윤회가 완전히 종식될 것이라 하였다.
수다원의 번뇌-바다와 물방울의 비유
이처럼 수다원이 되면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번뇌가 소멸된 상태라 하는데, 일묵스님은 또 다시 경에 실려 있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또 바다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거기도 뭐라고 비유가 돼 있느냐 하면. 바다가 있어요. 그 바다에 있는 물하고 바다에 있는 물을 두세 방울 끄집어내면 이 바다에 있는 물하고 어느 게 많겠어요? 그러니까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두세 방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수다원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게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깨달음이라는 걸 쉽게 생각하지만, 이 수다원만 되기만 해도 벌써 괴로움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존재라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부처님께서는 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열반이 확정된 사람이라 그랬어요.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불교TV 2011-11-14)
이 번에는 바다경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수다원에 남아 있는 번뇌는 몇 물 몇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뭇다경(바다경, S12.1.10.7)
그래서 역시 바다경을 키워드로 검색하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사뭇다경
(Samuddasuttaṃ- The Ocean I, 바다경, S13.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서 두세 방울의 퍼올렸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퍼올린 두세 방울의 물과 큰 바다의 물과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큰 바다의 물이 훨씬 많고 퍼올린 두세 방울의 물은 아주 적습니다. 퍼올린 두세 방울의 물을 큰 바다의 물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세계관을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현관에 도달한 거룩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는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진리에 대한 현관은 매우 유익하다. 이와 같이 진리의 눈을 얻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바다경- Samuddasuttaṃ- The Ocean I, 상윳따니까야 S13.7 전재성님역)
사뭇다경(바다경-S12.10.1).docx 사뭇다경(바다경-S12.10.1).pdf
바다경은 역시 손톱 끝 경과 마찬가지로 아비사마야상윳따(Abhisamaya Saṃyutta, 현과상윳따)에 실려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든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불과 물 몇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중생들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바다와 같다는 것이다.
보통사람들과 다른 두 가지
이와 같이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있고, 빛을 보았든지 하는 어떤 정신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번뇌는 사라지고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무여열반이 약속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수다원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무언가 틀림없이 있다. 그런 것 중에 두가지를 들라면 ‘삼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심’과 ‘계행’에 대한 것이다.먼저 삼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심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삼보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심
불교TV 강좌에서 일묵스님은 수다원의 신심에 대화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달라지는 게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삼보에 대한 신심이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아난존자가 물어봤을 때 부처님께서 법의 거울이라고 말한 경전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이 사람은 확실하게 예류과에 들어간 존재라고 말씀하신 게
첫 번째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법에 대한 신심.
그리고 승가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그러니까 세 가지죠. 불법승삼보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이게 첫 번째고요. 법구경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수빠부따라는 재가자가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부처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수다원이 됐어요.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불교TV 2011-11-14)
강좌에서 ‘수빠뿌따’라는 말이 나왔다. 법구경에 있는 인연담이라 한다. 수빠부따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일묵스님의 강좌를 녹취한 어느 법우님이 들리는 대로 썻기 때문이다. 일묵스님의 강좌는 들을만 하기 때문에 키워드 검색을 하면 전 강좌가 모두 녹취된 것 (http://blog.daum.net/sunbreez/524 )을 볼 수 있는데, 그 녹취문을 활용 하여 글을 쓴 것이다.
나병 환자 ‘숩빠붓다’ 이야기
수빠부따라는 말로 검색이 되지 않아 여러 경로로 알아 본 결과 수빠부따는 ‘숩빠붓다( Suppabuddha)’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숩빠붓다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게송 66 나병 환자 숩빠붓다 이야기
(The Story of Suppabuddha, the Leper)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나병 환자 숩빠붓다와 관련하여 게송 66번을 설법하시었다.
어느 때 나병 환자 숩빠붓다는 대중의 맨 뒤에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다가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하였다.
설법이 끝나 대중들이 모두 흩어 졌을 때 그는 부처님께 나아가 자기가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한 사실을 말씀 드리려고 했다.
이때 삭까 천왕은 숩빠붓다의 신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 보기 위해 그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 보았다.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오. 당신은 구걸로 생활을 해오고 있고, 아무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소. 나는 당신에게 막대한 돈을 주어 앞으로도 당신이 편안하게 살아가게 해줄 테니 삼보에 대한 당신의 신심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소? 당신이 삼보라는 것이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나는 당신에게 이 같은 행운의 기회를 줄 거요.」
그러자 숩빠붓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나를 가난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리야(성자)들이 지니게 되는 일곱 가지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곱 가지란 ① 신심(信心) ② 계행 ③ 악행을 부끄러워함 ④ 악행을 두려워함 ⑤ 경전을 배우거나 설법을 즐겨 들음 ⑥ 널리 베품 ⑦ 지혜(빤냐 : 般若 : 반야) 등입니다. 이런 보물을 가지고 있는 나를 어째서 가난하다고 하는 겁니까 ?」
그래서 삭까 천왕은 그의 신심을 확인케 되어 그보다 먼저 부처님께 나아가 숩빠붓다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전해 올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삭까 천왕에게 말씀하시기를, 설사 수천 수만의 천왕들이 숩빠붓다에게 삼보에 대한 신심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될 수 없으리라고 하시었다.
부처님과 삭까 천왕 사이에 그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숩빠붓다는 부처님 앞에 이르러 자기가 성취한 소따빳띠 팔라에 대해 보고드렸다.
그런데 숩빠붓다는 그렇게 소따빳띠를 성취한 뒤 수도원에서 돌아가던 중 원한을 품은 귀신이 소 떼를 몰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만 죽고 말았다. 그 귀신은 다름 아닌 과거 전생에 숩빠붓다에게 죽음을 당한 창녀였다. 그녀는 원한을 갚겠다고 굳게 맹세한 뒤 귀신이 되어 그를 죽인 것이었다.
숩빠붓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수도원에도 알려져 빅쿠들은 부처님께 숩빠붓다가 죽은 다음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천상에 태어났다고 대답하시면서, 그가 이생에 나병 환자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빳쩨까붓다께 침을 뱉은 악행 때문이었다고 말씀해 주시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Caranti bālā dummedhā 짜란띠 발라 둠메다
amitteneva attanā 아밋떼네와 앗따나
karonta pāpakaṃ kammaṃ 까론따 빠빠깡 깜망
yaṃ hoti kātukapphalaṃ 양 호띠 까뚜깝팔랑
자기야말로 자기의 원수.
어리석은 이는 지혜가 모자라
함부로 움직이며 악행을 저지르나니
마침내 가혹한 벌을 받는다.
Fools of feeble wisdom fare
enemies to themselves,
making evil kamma
which is of bitter fruit.
(Buddhanet)
(법구경인연담, Dhp66, 거해스님)
이 게송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기 하지 않겠다는 신심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신심이 생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의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다원이 되면 사라지는 번뇌중의 하나가 ‘법에 대한 회의적 의심’인데, 이런 의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소따빳띠팔라(수다원과)를 성취한 나병환자 숩빠붓다가 삭카천왕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계를 파하지 않는다
또 하나 수다원이 되면 보통사람들과 다른 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심과 더불어 ‘계를 지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가 된 존재는 의도적으로 계를 파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의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인다든가, 고의적으로 도둑질을 한다든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든가, 고의적으로 삿된음행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좋은 예가 법구경 인연담에 등장하는 ‘쿠주따라( Khujjuttara)’ 재가여신도 이야기이다.
삥땅친 ‘쿠주따라’ 시녀 이야기
쿠주따라 이야기는 법구경 21번, 22번, 23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 ‘사마와띠 (Samavati )왕비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인연담에서 꾸주따라 시녀에 대한 이야기는 일묵스님이 이야기한 것과 다르다. 자료를 찾아 보니 미얀마 파욱사야도의 법문집 붓다의 정통수행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하녀 쿠주따라에 대한 이야기가 담마빠다(법구경) 주석서에 나온다.
그녀는 우데나 왕의 왕비인 싸마와띠의 하녀였다. 매일 우데나 왕은 왕비에게 줄 꽃을 사기 위해, 그녀에게 동전 8개를 주었다. 매일 쿠주따라는 동전 4개는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4개의 동전으로 꽃을 샀다.
어느 날 붓다께서 상가와 함께 꽃집에 탁발을 나왔다. 쿠주따라는 공양을 올리는 꽃집주인을 도왔다. 공양 후에 붓다께서는 법문을 하셨고, 쿠주따라는 자기가 돈을 훔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돈을 훔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결심이 담마를 듣는 동안 계를 정화시킨 예이다. 그녀는 명상을 해서 수다원이 되었다. 그날 그녀는 4개의 동전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지 않고, 8개의 동전으로 꽃을 샀다. 그녀가 왕비 싸마와띠에게 꽃을 주었을 때, 왕비는 꽃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때에 쿠주따라는 죄를 고백했다.
또한 앙굴리마라 존자의 경우도 생각해보라. 비구가 되기 전에 그는 흉악한 살인자였다. 그러나 그가 비구로써 명상하는 동안, 계를 정화했고 열심히 명상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이 되었다.
([파욱사야도법문7] 붓다의 정통수행법- 사마타와 위빠사나)
이 이야기는 꾸주따라 시녀가 꽃을 공양한다는 핑계로 ‘삥땅’친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소따빳띠팔라(수다원과)를 성취한 꾸주따라시녀는 더 이상 삥땅을 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고 나니까 절대 거짓말을 못하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설사 죽음이 오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죽음이 오더라도 살생을 하지 못하고, 도둑질을 못하고, 음행을 못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수다원이 된 존재는 자기 목숨이 위협을 받더라도 절대 계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다원과 보통사람의 구별은 어떻게
수다원이 되면 번뇌가 어떤 번뇌가 사라지고 남아 있는 번뇌의 양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에 대하여 일묵스님의 강좌와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 보았다. 또 수다원이 되면 보통사람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법구경의 인연담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수다원과 보통사람의 구별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수다원이 되면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불교TV 강좌에서 ‘벽돌집경’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벽돌집경은 부처님이 벽돌집에서 법문하였다고 하여 ‘벽돌집경’이라 하고, 또 다른 말로 ‘법의 거울 경’이라 한다. 이는 법의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가 수다원인지 아닌지 판별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벽돌집 경 (SN55:8)
그래서 원문을 찾아 보기 위하여 검색하였다. 좀처럼 찾아 지지 않았는데 어렵게 찾았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벽돌집 경 (SN55:8)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냐띠까에서 벽돌집에 머무셨다.
2.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살하라는 비구, 난다라는 비구니, 수닷따라는 청신사, 수자따라는 청신녀가 냐띠까에서 임종을 했습니다. 그들의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들은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4. “아난다여, 살하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阿羅漢]”
5. “아난다여, 난다 비구니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도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 [不還者]”
6. “아난다여, 수닷따 청신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가 되어, 한 번만 이 세상[欲界]에 와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 [一來者]
7. “아난다여, 수자따 청신녀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흐름에 든 자여서 악취[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여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預流者]”
8. “아난다여,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죽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람이 죽을 때마다 여래에게 다가와서 이러한 뜻을 묻는다면 이것은 여래에게 성가신 일이다.
8.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법의 거울[法鏡]이라는 법문을 하리니, 이것을 구족한 성스러운 제자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지옥을 부수었다. 나는 축생의 모태를 부수었고, 아귀계를 부수었으며, 나는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를 부수어서 흐름에 든 자[預流者]가 되어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지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9.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의 거울[法鏡]이라는 법문인가?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부처님과 법과 승가[四雙八輩]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지자들이 찬탄하고 들러붙지 않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지닌다.”
벽돌집경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소따빳띠상윳따(Sotapatti-samyutta, S55)의 8번 경이다.
이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에게 이 사람이 죽었는데 어디에 태어나는지 묻는다. 그 때 마다 부처님은 가르쳐 주었으나 자주 물어보자 성가신 일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존자에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조건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런 성자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
깨달음도 허가한다
북방대승불교 전통에서는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하여 스승이 결정한다. 이런 좋은 예가 있다. 불교TV에서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다음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주의 대답이 나오게 된 조주의 마음상태를 제자가 이해한다면, 그 제자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조주선사와 동일한 마음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와 같은 마음상태라면 조주가 왜 ‘아니오’라고 대답했는지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라면 언제든지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주의 대답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대답은 상관없습니다.
이 선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듣는 사람의 마음이 조주의 마음상태와 같아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의 마음에 조주선사의 마음이 그대로 도장 찍혀지는 것이지요.
이 도장을 찍는 것을 인가(印可)라고 합니다. 인가의 뜻은 마음 위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제25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25, 불교TV 2011-12-06)
버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선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철저하게 스승과 제자사이에 이루어지는 선문답을 통해서 인가 되는 것이라 한다.
주류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하지만 주류불교(초기불교,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을 인가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벽돌집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아난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의 거울[法鏡]이라는 법문인가?
아난다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부처님과 법과 승가[四雙八輩]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성자들이 좋아하며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이 없고, 벗어나게 하고, 지자들이 찬탄하고, 들러붙지 않고,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를 지닌다.”
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성자가 된 존재들은 붓다와 담마와 상가 즉,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성자로 인정한다. 또 계를 지키면 성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행은 위에서 나병환자 숩빠붓다와 꾸주따라시녀의 인연담에서 설명된 바 있다.
따라서 성자가 된 존재들은 계를 함부로 어기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자가 될수록 오히려 계를 지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빛을 보았다든가 스승이 인가를 해주어서가 아니라, 번뇌가 얼마나 소멸되었는지로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류불교에서의 깨달음은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로 보는 것이다.
성자들에 대한 찬탄의 노래, 라따나경(보배경, 보석경)
불교에 대하여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런 깨달음은 북방 불교전통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불교의 깨달음이란 탐진치의 소멸을 뜻한다.
그 깨달음의 첫 단계가 수다원이 되는 것인데, 수다원이 된다는 것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번뇌가 소멸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카시카경(손톱 끝 경, S12.1.10.1)과 사뭇다경(바다경, S12.1.10.7)에서 띠끌과 물방울의 예를 들어서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설명하였다.
이렇게 수다원이 되면 설령 목이 칼에 들어 와도 삼보에 대한 신심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나병 환자 ‘숩빠붓다’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 있고, 또한 수다원이 되면 계는 자동으로 지켜진다는 것을 삥땅친 ‘쿠주따라’ 시녀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수다원이 된 존재는 누군가 깨달았다고 허가 하지 않아도 삼보에 대한 신심과 계행을 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그런 성자들에 대한 찬탄하는 노래가 있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는 라따나경( 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Sn 2.1) 이다. 그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라따나경의 내용
게송 |
내 용 |
찬탄대상 |
1 |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바람 |
|
2 |
인간의 자손에게 자비를 베풀기바람 |
|
3 |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
붓다(Buddha) |
4 |
열반 |
담마(Dhamma) |
5 |
열반으로 이끄는 비교할 수 없는 집중 |
담마(Dhamma) |
6 |
사쌍팔배의 성자 |
상가(Sangha) |
7 |
열반의 성취 |
상가(Sangha) |
8 |
사성제의 실현 |
상가(Sangha) |
9 |
사성제의 실현 |
상가(Sangha) |
10 |
윤회케 하는 세가지 족쇄를 풀음 |
상가(Sangha) |
11 |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 |
상가(Sangha) |
12 |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묘법을 펴신분 |
붓다(Buddha) |
13 |
최상의 위없는 가르침을 설하신 분 |
붓다(Buddha) |
14 |
번뇌의 소멸 |
상가(Sangha) |
15 |
부처님께 예경 |
붓다(Buddha) |
16 |
가르침에 예경 |
담마(Dhamma) |
17 |
상가에 예경 |
상가(Sangha) |
이중 성스런 상가에 대한 찬탄에 대한 게송은 모두 8개로서 가장 많다. 게송중에 상가에 대한 것만 보면 다음과 같다.
6.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는다.
바른길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참모임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7.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8.
마치 단단한 기둥이 땅위에 서 있으면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보는 참사람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9.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0.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4.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7.
신과 인간들에게 섬김을 받는 이렇게 오신님,
상가에 예경하오니, 여기에 모인 존재들이여,
땅에 있는 존재이건 공중에 있는 존재이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와 쿳다까빠타 (Khp 7), 전재성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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