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평온을 유지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2. 25. 15:02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평온(우뻭카)’을 유지해야 하는가

 

 

벼락맞은 대추나무 부적

몇 일전 집들이가 있었다. 법회모임에 참석하는 법우님이 집을 크게 지어 초청한 것이다.

 

법우님들간의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어느 보살님이 부적을 보여 주었다.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부적이라고 하였다. 부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저씨가 암에 걸렸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그 부적값이 만만치 않았다. 무려 400만원이라고 하였다. 기도가 잘 듣는다는 용하는 절에 찾아가 거금을 주고 부적을 산 이유는 한마디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심정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침울하게 흘러가자 어느 법우님이 그래도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하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 하는 것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들이

 

살다보면 절대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영화나 TV의 드라마, 다큐프로, 소설속에서나 있음직한 일들,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실제로 나에게 닥쳤을 때 사람들은 당혹해 하고 때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한시 바삐 그 것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면 돈도 내 뜻대로 많이 벌어야 하고, 배우자나 자식도 내 뜻대로 따라 주어야 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움직여 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몸과 마음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병이 났을 때 내 뜻대로 빨리 낫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잠을 자고 싶다고 해서 잠이 빨리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면 병도 나지 않아야 하고, 늙지도 말아야 하고, 심지어 죽지도 말아야 한다.

 

무아의 특징경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나의 몸과 마음은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감수가 나라면 이 감수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감수에 대하여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라.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감수가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감수에 대하여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라. 나의 감수는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지각이 나라면 이 지각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지각에 대하여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라.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지각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지각에 대하여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라. 나의 지각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형성이 나라면 이 형성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형성에 대하여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라.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형성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형성에 대하여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라. 나의 형성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의식이 나라면 이 의식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의식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낫따락카나경 -무아의 특징경-Anatta-lakkhana Sutta상윳따니까야 S22.59, 전재성박사역)

 

아낫따락카나경(무아의 특징경).docx  아낫따락카나경_무아의 특징경.pdf

 

 

이렇게 부처님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통제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하고 통제력을 행사 할 수 없을 때 더 이상 내 뜻대로되지 않는다. 죽을 병에 걸렸어도 몸과 마음에 장애가 일어 났어도 내 뜻대로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불교적 해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일묵스님은 불교TV사이트에서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그냥 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평온하게 바라보는. 그러니까 이걸 즐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혐오하지도 않고 평온한 상태. 이건 지혜가 더 성숙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데 이거는 쉽게 말 하면은 여러분들이 어떤 경계에 부딪치더라고 마음이 동요가 없는 상태라고 보시면 되요. 끄달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잖아요 우리가 어떤 경계가 와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잘될 때나 못 될 때나 잘나가고 있을 때는 보통 사람은 흥분하고, 못될 때는 이렇게 실망하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남이 칭찬하거나 비방하거나, 거기에도 연연하지 않고. 또 내가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그런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15 내려놓음과 지혜, 불교tv 2011-11-07)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제15회 내려.pdf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제15회 내려.docx

 

 

일묵스님이 이야기 한 것은 평온한 마음 가짐에 대한 것이다.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 불자들은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하여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혜와 자비는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적 수행에 따른 것이라 본다.

 

대승불교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의 경우 재가불자들이 수행하는 경우는 드믈다. 설령 수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절수행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와 같은 주력수행위주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들이나 하는 참선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믈다.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법사는 화두선에 대하여 법문하고 있지만 실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하루 종일 이뭐꼬하며 의심을 해 보라고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된 참나가 고통으로 가득찬 실생활에 어떤 해법을 줄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적 수행방법은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위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인 수행방법이기 때문이다.

 

범부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지혜

 

앞서 일묵스님은 평온한 마음가짐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어떤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지혜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이런 지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카라, 상카라라고 하는 건 유위법이라고 이야기라고 합니다. 물질과 정신, 또는 오온을 상카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상카라에 대해서 평온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이게 우리가 소위말해서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생기는 가장 최고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의 문턱에까지 온 지혜라고 볼 수 있어요.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15 내려놓음과 지혜, 불교tv 2011-11-07)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났을 때 깨달음의 문턱까지 온 것이라 한다. 이는 범부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지혜이고 범부들이 가질 수 있는 지혜의 절정이라고 한다.

 

이런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이 사구게한 게송만 읊어 주어도 곧바로 깨달아 수다원이 되고 아라한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번뇌가 죽 끓듯이 일어나는 범부들에게 아무리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주어도 아무런 인격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지혜가 없거나 아직 지혜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류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

 

그렇다면 지혜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불교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 불교수행은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깨닫는데 있어서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주류불교에서 깨달음의 방법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로 구분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에 대한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

(patipadā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과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

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Wisdom Tree, Bodhi Tree

 

 

 

 

위 표를 보면 평온한 마음가짐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16단계의 지혜 중에 11번째인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상카라우뻭카냐나, sakhārupekkhā ñāna)’임을 알 수 있다. 이 지혜가 도(magga)와 과(phala)의 지혜가 일어나기 전으로서 범부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지혜이고 지혜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카라우뻭카냐나(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앞서 10가지 지혜를 얻어야 한다. 이 때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지혜가 첫 번째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릿쩨다 냐나,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이다. 그리고 이어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빳짜야 빠릭가 냐나, paccaya pariggha ñāna )’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이 두가지 지혜가 중요한가.

 

수행처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

 

불교를 왜 믿는가. 학업, 건강, 사업, 치유 등 소위 소원성취를 위하여 불교를 믿는가. 기복불교화 되고 방편으로만 일과하는 한국불교에서 영혼이나 참나 등과 같은 용어를 서슴없이 쓰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좋은 예로서 불교방송의 인기 있는  음악프로를 들으면 영혼의 치유이니 영혼의 비타민이라는 말이 나오고 ‘~하소서라는 치유의 기도가 나레이션 되기도 한다.

 

이렇게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이다. 그런데 쥬류불교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수행에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주류불교의 수행처에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16단계 지혜에 있어서 첫 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두 번째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이는 경행을 통하여 알게 한다. 발을 들었다가 놓을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단지 정신-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지혜가 일어날 때

 

이렇게 주류불교에서는 창조주나 자아가 없음을 수행을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에 대한 것이 불교TV의 일묵스님의 설명에 잘 나타나 있다. 일묵스님은 첫 번째 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나라고 생각하는 게 결국은 내 몸, 주로 내 몸에 대해서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테고, 내가 생각하는 정신적인 활동, 그거를 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런데 보통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림 수행을 통해서 계속 관찰을 해보면, 결국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물질적인 다시 말하면 몸, 우리 몸과 그 정신적인 현상, 마음이라고 하는 거의 결합이더라. 그렇게 이해를 하기 시작을 하는 거죠.

 

그래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다보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거에 대한 본질은 물질과 정신의 결합이다. 또는 이걸 조금 더 세분화해서 얘기 하면, 오온. 색수상행식이라고 물질은 색온에 해당하구요, 정신은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이 마음에, 정신적인 작용은 마음에 해당하는데. 그 오온의 결합이다. 이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거죠. 이게 첫 번째 수행을 통해서 변화되는 이해입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15 내려놓음과 지혜, 불교tv 2011-11-07)

 

 

불교수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타파되는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다섯가지 무더기의 조합에 지나지 않고, 이들 다섯가지 무더기가 조건에 따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본다.

 

, 저기 오온이 지나간다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정신-물질의 조합인 오온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예쁜여자가 걸어갈 때, 그것도 노출이 심한 패션을 하였을 때 , 저기 오온이 지나간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근육질의 멋진 남자가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역시 오온이 지나간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혜가 개발되지 않으면 대상에 쉽게 끄달려 갈 것이다.

 

이렇게 오온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누군가 창조하였든가 어떤 윤회의 주체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오온의 정신-물질 조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일어나는 지혜로서 이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릿쩨다 냐나,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라 한다.

 

오온이 왜 일어났느냐?

 

이렇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정신-물질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음 단계의 지혜가 개발된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서 첫 번째 우리가 그 수행을 하면서 알아지는 것은 오온자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아~ 이것이 물질과 정신. 나라고 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의 결합이구나.

 

그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요, 이 오온이 왜 일어나는가에 관심이 있겠죠. 그죠? 예를 들면 여러분이 왜 태어났는지. 왜 태어나서 오온이 걸어 다니고 있는지. 오온이 밥을 먹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면 이 오온이 왜 일어났느냐? 왜 일어나는지 그거에 대한 바로 조건.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15 내려놓음과 지혜, 불교tv 2011-11-07)

 

 

정신-물질로 이루어진 오온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두 번째 지혜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혜이다.

 

조건에 대한 지혜

 

이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보통 인과라고 알고 있죠. 인과에 대한 이야기 또는 연기. 연기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림 하다보면 ~ 이것이 나한테 일어나는, 나한테 이런 탐욕이 있구나, 이런 성냄이 있구나. 이런 또 어리석음이 있구나이런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이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도 이해를 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장애요소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마음을 오염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그랬잖아요.

 

그렇게 보다 보면은 바른 정보가 많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런 것은 나라고 하는 오온에 집합이다. 이렇게 보게 되는데, 그리고 나면 각각 오온들 사이에 다시 말하면 우리 몸과 마음의 연관관계. 이런 거에 대한 이해가 되겠죠. 그죠?

 

예를 들면 지금 내가 화가 나요. 이 화가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내가 집착이 일어나면 뭐에 대해서 집착이 일어나고, 뭣 때문에 집착이 일어나고. 내가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예를 들어서 제가 이렇게 손을 들면 이 손이 여러분 눈에 부딪치고, 눈하고 이게 만나면서 여러분 안식이 일어나잖아요. 그죠? 그런 것처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데는 항상 그런 원인이 있다는 거죠.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 원인. 이 모든 것이 조건이나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 주로 나오는 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이런 구절 아시죠? 그래서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거죠. 조건 없이 일어나는 건 없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건 없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이건 연기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 영원한 것도 없고, 그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는다고 모든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걸 상견이라 그러잖아요. 영원히 자아라는 게 있어서 영원히 산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봤기 때문에 그런 것도 없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설사 자살을 한다 해도 죽을 때 이 남아 있으면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안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거는 하나의 열망에 불과한 거지.

 

그렇다고 해서 태어나지지 않는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것도 사견에 해당합니다. 단견이라고 이라고 하는, 죽으면 끝이라고 얘기하는. 그래서 이 연기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사실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연기를 잘 이해를 하게되므로써 우리가 사견을 버리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두 번째 지혜가 물질과 정신을 파악하고 나면 물질과 정신의 연관관계, 어떤 조건과 어떤 관계에 의해서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거에 대한 이해가 되는데 그거를 조건에 대한 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일묵스님 특별법문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 제15 내려놓음과 지혜, 불교tv 2011-11-07)

 

 

수행을 하면 두 번째 지혜가 일어나는데, 이를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빳짜야 빠릭가 냐나, paccaya pariggha ñāna )’라 한다. 그런데 이 지혜는 연기법에 바탕을 둔 지혜이다.

 

일반적으로 연기법은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원인(hetu, 헤뚜)과 조건(paccya, 빳짜야)과 결과(phala, 팔라)에 따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인연과(hetu-paccaya-phala, 헤뚜빳짜야팔라)인 것이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를 다른 말로 조건에 대한 지혜라고 일묵스님은 설명하였다.

 

차례로 일어나는 지혜들

 

이렇게 불교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먼저 개발해야 할 지혜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정신-물질의 오온작용이라는 것과 이런 작용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처에 가면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경행인데, 이 경행을 통하여 정신-물질, 원인-결과의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지혜를 바탕으로 나머지

 

-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가 차례로 개발되는데, 범부들이 갖는 지혜의 절정이라는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에 이른다.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

 

수행이 깊어져 열한번째 단계인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의 단계에 이르면 지극히 평온해진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두렵거나 걱정스런 감각대상을 만나도 흔들림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이라는 재미난 표현을 하였다.

 

부부가 이혼하였을 때 남남이 된다. 이혼한  부부가 남남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 갈 때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마치 소가 닭을 쳐다 보듯이 구경꾼처럼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을 만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구경꾼 처럼 알아차리는 마음이 알아서작용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건에 따라 형성된 법은 언젠가 소멸될 것임을 아는 통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무시하고 넘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번뇌 다한 자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렵거나 무서움 마음이 계속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특히 수행중에 무서운 대상을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111.

여기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딸랑가라에 주하던 담마딘나 장로는 무애해를 증득하였고, 번뇌가 다한 대인이었고, 큰 비구대중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 분은 어느 날 자신이 낮 동안에 머무는 장소에 앉아서 '웃짜왈리까에 주하시는 우리의 스승이신 마하나가 장로께서 사문의 할 일을 해 마치셨을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그가 아직 범부임을 보고 '내가 가지 않으면 범부로서 일생을 마치실 것이다'라고 알고는 신통으로 허공을 날라 낮 동안에 머무는 장소에 앉아계시는 스승의 곁에 내려앉았다.

 

절을 올리고 의무를 행한 뒤 한 옆에 앉았다.

 

'담마닌다여, 어떻게 이렇게 때 아닌 때에 왔는가?'

 

'스승님이시여, 질문을 드리려 왔습니다.'

 

'물어보게. 아는 대로 대답하겠네.'라고 스승이 대답하자 그는 천 가지나 되는 질문을 하였다.

 

112.

장로는 묻는 것마다 걸림 없이 대답했다.

 

'스승님이시여, 스승님의 지혜는 매우 깊습니다. 언제 이 법을 증득하셨습니까?'

 

'60년 전에 증득하였네.'

 

'스승님이시여, 삼매를 닦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네.'

 

'스승님이시여, 그렇다면 한 마리의 코끼리를 만들어 주시길 청합니다.'

 

스승은 흰 코끼리를 만들었다.

 

 '스승님이시여, 이제 이 코끼리가 귀를 치켜세우고, 꼬리를 뻗쳐서, 코를 입에다 박고, 무서운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스승님을 향하여 달려오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청합니다.'

 

스승은 그렇게 만든 뒤 힘껏 달려오는 코끼리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 하였다.

 

번뇌 다한 장로는 손을 펴서 스승의 가사 자락을 붙잡고서 '스승님이시여, 번뇌 다한 자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113.

스승은 그때 자신이 범부임을 알고서 '담마딘나여, 나를 좀 도와주시게.'라고 말하고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이시여, 스승님을 도와드려야지 하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면서 명상주제를 설했다.

 

장로는 명상주제를 들고 경행처에 올라 세 번째 발걸음에 이르러 최상의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스승은 성을 잘 내는 성미였다고 한다. 이러한 비구들은 광명 때문에 흔들린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11-113)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인데, 제자가 스승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스승이 자신이 신통으로 만든 코끼리가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자 이미 아라한이 된 제자가 번뇌 다한 자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번뇌가 다 했다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극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자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이 정말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의 도움을 받아서 아라한이 된 것이다. 그것도 경행중에 세 번째 발걸음을 뗄 때 아라한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수행의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뻭카(upekkhā)란 무엇인가

 

주류불교에서 16단계 지혜에 있어서 11번째 지혜가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의 지혜라 하였다. 이때 평온이라는 말을 빠알리어로  우뻭카(upekkhā)라 한다. 우뻭카는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어원을 찾아 보았다.

 

 

 ‘평온’으로 옮긴 우뻭까(upekkhā)는 upa(위)+ik(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말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다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빨리 삼장에서 우뻭카는 많은 경우에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릴 수 없는 평온이나 공평무사한 고결한 정신적인 특질을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선악(善惡), 호오(好惡), 유무(有無), 고락(苦樂) 등에 흔들리지 않고 이들을 여읜 마음의 평정하고도 평온한 상태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중국에서 버릴 사()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equanimity라고 한다.

 

경에 나타나는 우뻭까의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의 경지에서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의 경지를 설명하는 술어로 나타난다. 특히 사선을 특징짓는 핵심술어로 파악하고 있다. 경에 나타나는 사선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생각(vitaka), 지속적 고찰(vicāra), 희열(pīty), 행복(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생각(vitaka)과 지속적 고찰(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pīty), 행복(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sukha)도 사라지고 평온(upekkhā)이 완성된다.

 

 

(2) 사무량심에서

 

네 가지 고귀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ma-viharā)의 마지막 요소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① 자애(, mettā),

② 연민(, karua),

③ 더불어 기뻐함(, muditā),

④ 평온(, upekkhā)

 

이 있다.

 

이렇게 우뻭까가 중생에게로 향하면 중생에 대한 공평무사한 고결한 평온의 마음가짐으로 나타난다.

 

(3) 칠각지에서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七覺支, bojjhaga)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①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ga) -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각지,

②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ga) - 법을 검토하는 깨달음의 각지,

③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ga) - 정진의 깨달음의 각지,

④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ga) - 희열의 깨달음의 각지,

⑤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ga) - 편안함의 깨달음의 각지,

⑥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ga) - 집중의 깨달음의 각지,

⑦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ga) - 평온의 깨달음의 각지

 

가 있다.

 

(주해 모음-김한상 번역 및 역주,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김한상 번역 및 역주)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평온, 평등, 평정 등으로 번역되는 우뻭카는 초기경에서 사선에서의 평온(upekkhā)’과 사무량심에서의 평온(, upekkhā)’, 그리고 칠각지에서의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ga)’의 의미로 나타난다고 한다.

 

우뻭카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될 때

 

이렇게 경에서 사용되는 우뻭카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때로는 부정적 의미로도 쓰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대부분 결합어로 사용될 경우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좋은 예이다.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 sakhāra-dukkha)이란 덤덤한 느낌(upekkhā-vedanā)과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유위법(有爲法, sakhata-dhammā)을 가리킨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각대상들을 보고, 듣고, 접촉하는 일상의 모든 현상은 즐거운 느낌이나 행복도, 불쾌한 느낌이나 고통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중립적인 평온은 영원히 지속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필요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괴롭고 힘겨운 노력이 따라야 하기 때문에 덤덤한 느낌을 행으로 인한 괴로움[行苦]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유위법(有爲法, sakhata-dhammā)도 끊임없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행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해 모음-김한상 번역 및 역주,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김한상 번역 및 역주)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에 실린 행고(行苦, sakhāra-dukkha)에 대한 주해이다.

 

이 주해를 보면 우뻭카웨다나(upekkhā-vedanā)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우뻭카와 웨다나(, 느낌)의 합성어이다. 이렇게 합성되었을 때 그 의미는 무덤덤한 느낌이 되어 부정적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느낌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뻭카웨다나는 아비담마 분류에 따르면 느낌을 다섯가지로 나눌 때도 사용된다.

 

1) 숙카(sukkha, 육체적 즐거움)

2) 둑카((dukkha, 육체적 고통)

3) 소마나사(somnassa, 정신적 기쁨)

4) 도마나사(domanassa, 정신적 불만족)

5) 우뻭카(upekkhā , 중립적인 평온)

 

여기서 다섯번째인 우뻿카는 중립적인 평온으로 구분 되었지만, 이는 무덤덤한 느낌(우뻭카웨다나)’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느낌은 조건에 따라 언제 즐거운 느낌 또는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 닥쳤을 때

 

세상만사 내 뜻대로되지 않는다. 이는 내 것, 나의 자아라고 이제까지 여기고 있었던 것이 알고 보니 내 것, 나의 자아가 아닌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조차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남에 대해서 까지 통제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더구나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나 보았음직한 일들이 실제로 나와 내 주변에 들이 닥쳤을 때 더욱 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럴때 사람들은 창조주를 찾거나 불보살을 찾는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을 신이나 불보살에게 떠 넘기는 것이다.

 

어떻게 반조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된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평온은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생들에 대해 평정함을 보는 역할을 한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힘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다.

 

‘업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어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미 얻은 영화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여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적의와 찬사를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96절)

 

 

사무량심에서 평온에 대한 내용이다. 평온을 유지하려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라는 것이다. 그런 업은 어떤 것인가. 이는 화가 날 때 화를 내면 반드시 괴로움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반조하라는 것과 같다.

 

 

Kammassako hi tva        깜맛사꼬 히 뜨양

kammadāyādo                깜마다야도

kammayoni                  깜마요니

kammabandhu                깜마반두

kammapaisarao,           깜마빠띠사라노

ya kamma karissasi,     양 깜망까릿사시

tassa dāyādo bhavissasi,   땃사 다야도 바윗사시

idañca te kamma          이단짜 떼 깜망

 

그대의 업이 바로 그대의 주인이고,

그대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대의 권속이고,

업이 그대의 의지처이다.

그대는 그대가 행한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청정도론, 9장 거룩한 마음가짐, 23절)

 

 

 

이렇게 자신과 주변에서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근심, 걱정, 노심초사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고 각자 지은 업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11번째 지혜에서 평온에 대하여 아내와 이혼한 남자처럼이라는 재미난 표현처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온이 실패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이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청정도론의 내용 중에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이 닥쳤을 때

 

따라서 나와 주변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닥쳤을 때 조건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한 번 일어난 현상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평온은 아미담마적 5가지 느낌 중의 하나인 우뻭카웨다나(무덤덤한 느낌)이 아니라 사무량심에서 볼 수 있는 자신이 업의 주인임을 반조함으로 얻어지는 평온함을 말한다.

 

 

 

2012-02-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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