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니경 (성자의 경, Sn1.12)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9. 22:34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니경 (성자의 경, Sn1.12)

 

 

 

무니경

(Muni sutta- The Sage- 성자의 경, 숫따니빠따 Sn1.12,전재성님역)

 

 

성자의 경

[Muni sutta] (*1)

 

 

주해(*1)

이경은 성자 즉 무니(Muni)에 대한 경전이다.

원래 무니란, 베다시대에는 종교적 황홀경에 도달한 침묵의 해탈자를 의미했다.

그런데 부처님 당대에 와서는 성자는, 이 경전에 언급되어 있듯이

집 없이 생활하는 자로서 장애가 없고 분쟁이 없고 탐욕이 없고,

확고하고 자제하고 사려 깊고 명상을 즐기는 자를 말한다.

이 경은 아쇼카 왕이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서 언급한 ‘성자의 노래’이다.

 

 

1. [세존]

“친밀한데서(*1) 두려움이(*2) 생기고,

거처에서(*3) 더러운 먼지(*4)가 생겨난다.

거처도 두지 않고 친밀한 것도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성자의 통찰이다.

 

2. 이미 생겨난 것을 버리고, 새로 심지 않고,

지금 생겨나는 것에 들지 않는다면,

이 홀로 가는 사람을 성자라 부른다.

저 위대한 선인은 적멸의 경지를 본 것이다.

 

 

주해(*1)

갈애와 견해에 대한 친밀을 말한다. 이 경의 첫 번째 네 개의 시들은 세존께서 사왓티 시의 한 마을에 계실 때에 불행한 한 여인이 지아비를 잃고 자식을 출가시키고 자신도 비구니 교단에 들어왔다.

 

모자는 사왓티시에서 우기를 보내면서 비구니와 비구로서 자주 만났는데, 서로 무엇인가 손안에 얻으면 찾아가서 갖다주곤 했다. 서로 자주 만나고 보는 사이에 욕정이 생겨나 출가신분이라는 생각이나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한계를 넘어서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난을 받고는 속퇴하였다.

 

이 이야기를 수행승에게 들은 세존께서는 이것과 관련해서 ‘맹독이나 끓는 기름이나 작열하는 청동처럼 여성을 피하라’라고 하면서 이 네 편의 시를 읊은 것이다.

 

주해(*2)

막강한 번뇌의 두려움을 말한다.

 

주해(*3)

번뇌들의 주처로 번뇌를 수반하는 대상을 말한다.

 

주해(*4)

탐진치의 먼지를 말한다.

 

 

3. 근본을 살피어(*1) 그 씨앗을 부수고(*2),

그것에 물기를(*3) 공급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생멸의 끝을 본 성자,

사려를 버리고 헤아려지지 않는 자이다.

 

4. 모든 존재의 처소에(*4) 대하여 잘 알아,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그는 탐욕을 떠난 무욕의 성자이다.

피안에 도달해 다툼이 없기(*5) 때문이다.

 

 

주해(*1)

‘존재의 다발과 인식의 감역과 요소의 세계로 나누어지는 번뇌의 처소가 괴롭다는 사실을 두루 알고 나서’의 뜻이다.

 

주해(*2)

씨앗은 유위적인 조작의식 이다. 유위적 조작이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자아관념에 의한 조작을 말한다.

 

주해(*3)

갈애와 견해의 물기를 말한다.

 

주해(*4)

감각적 쾌락의 세계의 존재, 미세한 물질적 세계의 존재, 비 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말한다.

 

주해(*5)

선이든 악이든 짓지 않는다.

 

 

5. 온갖 것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알고, 슬기롭고,(*1)

여러 사물에 의해 더럽혀지지않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갈애를 끊어 해탈한 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다섯 번째의 시는 우빠까가 돌아오지 않는 님의 지위를 얻은 것과 관련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을 전하기 위해 베나레스로 가면서 보리수가 있는 곳에서 가야의 사이를 지나다 우빠까라는 사명외도를 만났다.

 

우빠까는 부처님에게 성취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는 ‘일체를 극복한 자’라고 대답하자 그것이 ‘무한 승리자’를 의미하는 지를 물었다.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그는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머리를 흔들며 다른 길로 떠났다.

 

그후 우빠까는 방가국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사냥꾼을 만났는데, 사냥꾼은 수행자가 옷도 입지 않은 것을 보고는 ‘욕심없는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처소에 머물게 하고는 극진히 대접하였다.

 

여름에 그는 사슴이 시원한 지방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사냥하러 멀리 떠나면서 짜바라는 딸에게 아라한을 잘 섬길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우빠까는 아름답고 허리가 멋지게 빠진 사냥꾼의 딸에 빠졌다. 사냥꾼의 딸을 사모한 나머지 죽겠다고 소동을 부리며 7일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는 바람에 사냥꾼은 결국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기를 운반하고 팔아야했다. 그러다 짜바는 쑤밧다라는 아들을 낳았다. 어린아이가 울면 그녀는 ‘우빠까의 아들. 도박군의 자식, 울지마라’라고 우빠까를 조롱했다.

 

그는 어느날 참을 수가 없어서 무한 승리자에게 간다고 그녀를 떠나 세존께서 계신 사왓티의 제따바나를 찾았다.

 

세존은 자초지종을 듣고 승단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고 가르침을 받고 명상한 결과 돌아오지 않는 님(不還者)의 경지에 들었다. 부처님은 그것을 인가하면서 이 시를 읊은 것이다.

 

 

6. 힘이 지혜에 있고, 계행과 덕행을 지키고, (*1)

삼매에 들고, 선정을 즐기며, 마음챙김이 있고,

집착에서 벗어나 황무지(*2)가 없고,

번뇌 없는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이 시는 카디라바니야(아카시아 숲의)레바따 장로와 관계된 것이다.

 

레바따는 ‘숲 속에 사는 자 가운데 제일’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사리뿟따의 가장 나이 어린 동생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여, 레바따만은 집에 두려고 일곱 살 때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날 레바따는 신부에게 ‘당신의 할머니처럼 오래 살기를 바란다’라고 축복하는 말을 하는데, 그러자 120살 먹은 노인의 영상이 떠올라 자신의 아내도 그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결혼식 도중에 그곳을 떠나 어떤 수행승들이 사는 곳으로 도피했다.

 

사리뿟따는 미리 알고 수행승들에게 부모의 허락 없이 출가를 승인 해 줄 것을 요청해 놓았기 때문에 승단에 들어올 수 있었다. 사리뿟따는 이 소식을 듣고 레바따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부처님은 기다리라고 했다.

 

레바따는 오랜 세월 기다리다 못해 스승들로부터 명상 수행의 가르침을 받고 홀로 부처님을 찾아 나섰다. 도중에 아카시아 숲에서 우기를 맞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다.

 

우기가 끝나자 사리뿟따와 부처님은 오백명의 수행승과 함께 아카시아 숲의 레바따를 방문하기로 했다. 레바따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미리 알고 신통력으로 훌륭한 처소를 만들었다. 그런데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연로한 수행승이 신발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아카시아 나무 위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사왓티에 도착해서 재가의 여신도인 비사카에게 초대받아 식사를 하고 나서 수행승들에게 레바따 장로의 처소가 있을 만한 곳이 못된다고 불평을 털어놓자, 부처님은 향실에서 나와 ‘레바따는 새내기 수행승이 아니라 번뇌를 부순 아라한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시를 가르친 것이다.

 

주해(*2)

 - 황무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황무지가 있다. 어떠한 것이 세 가지 인가?

 

탐욕의 황무지,

성냄의 황무지,

어리석음의 황무지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 가지 황무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황무지를 잘 알고

두루 알고 소멸시키고 버리기 위해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닦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경에서는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삼보에 대한 의심과 학문에 대한 의심, 동료 수행자에 대한 의심을 뜻한다.

 

 

7. 홀로 살면서 방일하지 않은 성자,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자,

현명한 님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1)

 

 

주해(*1)

이 시는 쑷도다나 왕과 관계된 것이다.

세존께서 까삘라밧투에 가서 아버지인 쑷도다나 왕을 만나 뵙자 왕이 ‘존자여, 그대는 집에 있을 때에는 방향의 향기가 나는 베나레스의 옷을 입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낡아빠진 분소의를 입었는가?’라고 묻자 ‘새털이나 양모나 목면이나 비단으로 만든 옷보다도 이 분소의가 좋습니다’라고 세간의 법에 흔들리지 않고 이 시를 읊은 것이다.

 

 

8. 남들이 극단적인 말을 하더라도(*1)

목욕장에 서 있는 기둥처럼(*2) 태연하고,

탐욕을 떠나 모든 감관을 잘 다스리는 자,

현명한 님 들은 그를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이 시는 찐짜 마나비까와 관련된 것이다.

 

찐짜는 어떤 고행주의자들의 교단의 유행녀였다. 그녀가 속한 이교도의 교단은 부처님의 명망이 커짐에 따라 자신의 교단의 이익을 챙길 수 없게 되자 찐짜의 도움으로 부처님을 헐뜯어 반사이익을 노리고자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매우 미인이었으나 간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설득하여 제따 숲에 계신 부처님을 방문하는 척하도록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제따 숲을 향해가서는 그날 밤을 근처의 이교도가 묶는 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그녀가 제따 숲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질문하자 부처님과 동침했다고 말했다.

 

그 후 몇 달 뒤에 몸에 통나무 조각을 묶고는 임신한 척하며, 부처님께서 설법하는 대중 앞에 나타나 자신의 임신에 대하여 무책임하고 냉담하다고 부처님을 모욕했다. 부처님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제석천은 자신의 보좌가 뜨거워져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쥐로 하여금 뱃속의 통나무를 감은 줄을 끊게 만들자, 그 통나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찐짜의 발을 찍었다.

 

제따 숲에서 쫓겨나자마자 지옥의 불길이 그녀를 삼켜버렸다. 수행승들이 이 사건에 관하여 언급하자 세존께서 이 시를 읊은 것이다.

 

주해(*2)

연못이나 강변의 목욕하는 장소에 사각 또는 팔각의 기둥을 세워 고귀한 가문의 사람이건 비천한 가문의 사람이건 모든 사람이 거기에 몸을 밀어 때를 벗겨내며 목욕하는 기둥을 말한다. 기둥은 결코 오만하거나 비굴하지 않다.

 

 

9. 베틀의 북처럼 바르게 자신을 확립하여

모든 악한 행위를 싫어하고,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잘 아는 자,

현명한 님 들은 그들을 또한 성자로 안다.(*1)

 

 

주해(*1)

이 시는 사왓티의 부호의 딸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녀는 누각에서 내려와 누각아래 직조실의 베틀을 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중생의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굽어진 중생의 성품을 버리고 베틀처럼 곧은 성품을 갖기를 바랐다. 그녀는 누각에 올라와서 홀로 명상에 잠겼다.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삼법인의 진리가 나타나고 삼계가 불타는 현상이 나타났다. 부처님은 향실에 계시다가 그녀의 생각을 읽고 빛을 놓아 신통력으로 그녀 앞에 나타나 이 시를 설했다.

 

 

10. 젊을 때나 중년이나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1)

자제하여 자신을 다스리며(*2) 악을 행하지 않아(*3)

괴롭혀질 수 없고 누구를 괴롭히지도(*4) 않는다.

현명한 님 들은 그들을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이 시는 세존께서 알라비 시에 사는 길쌈하는 일곱 살 소녀와 관련된 가르침이다.

 

어느 날 직조공이 일곱 살 된 딸에게 길쌈을 시키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대자비의 삼매에 들어 세상을 살피다가 그 소녀가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될 것을 알고 알라비 시를 방문하였다. 소녀는 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부처님을 보자 다섯 번 절을 올렸다.

 

세존께서는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여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세존이시여, 모릅니다.’ ‘소녀여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가?’ ‘세존이시여, 압니다.’ ‘아는가?’ ‘세존이시여, 알지 못합니다.’ 이것을 듣고 사람들은 화를 내었다. 부처님께 당돌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묻자 소녀는 대답했다. 소녀는 부처님이 ‘어디서 왔느냐’는 집에서 온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결생(結生)에 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어디로 갈 것이냐’는 죽음에 대해 물은 것이라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알지 못하는 가’라는 것은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가라고 물은 것인데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라고 대답한 것이며, ‘아는가.’라고 물은 것은 죽음에 대하여 언제 죽는 가를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존께서는 그 소녀를 칭찬하고 때가 되었음을 알고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 때에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그녀를 보자 ‘너무 시간이 지났다’고 화를 내면서 엉겁결에 북을 던졌는데 딸의 배에 맞아 딸이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딸을 죽였다’생각했고 아버지는 왕의 처벌이 두려워 출가해서 수행승이 되었다.

 

그러자 수행승들 사이에서도 딸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되자 세존께서는 ‘이 수행승이 딸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업에 의해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수행승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번뇌를 부순 성자의 상태에 관하여 밝히면서 이 시를 설한 것이다.

 

주해(*2)

자신을 다스리며- 마음을 고요히 하고의 뜻이다.

 

주해(*3)

 악을 행하지 않아

-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해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해(*4)

 역자가 괴롭힌다라고 번역한 것은 원래 ‘근거 없는 비난으로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11. 윗부분이건 중간 부분이건 남은 것이건, (*1)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생활하고,

칭찬하지도 않고 욕을 하지도 않는다면,(*2)

현명한 님 들은 그들을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이 시는 바라문 빤짜가다야까와 관련된 시이다.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린 이유는 수확물을 다섯 가지 단계로 나누어 그 최초의 것을 보시했기 때문이다.

 

1) 수확단계의 첫 번째 것,

2) 탈곡단계의 첫 번째 것,

3)보관단계의 첫 번째 것,

4)요리단계의 첫 번째 것,

5)시식단계의 첫 번째 것,

 

어느 날 부처님이 바라문 집으로 가서 그의 집 문 앞에 섰다. 바라문은 식사를 하고 그의 아내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아내가 부처님을 보고, 남편이 자신의 음식을 모두 보시하게 되면 다시 요리를 해야 할 것을 염려하여, 남편에게 부처님이 보이지 않도록 종려나무 줄기로 가렸다.

 

부처님은 그것을 눈치 채고 몸에서 광명을 놓았다. 그 바라문이 광명을 알아채고 비추는 곳을 보니 부처님이 문 밖에 서 있었다. 바라문의 아내도 남편이 이미 알아차린 것을 알고는 종려나무 줄기를 치워버렸다.

 

바라문의 아내도 그것을 알고는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자 부처님은 ‘일체의 정신적 신체적인 현상 속에 나의 것이 없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는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집안으로 들이고 상석에 앉히며, 자신의 공양을 부처님께 드렸다. 부처님께서는 식후에 이 시를 그 바라문에게 가르쳤다.

 

여기서 윗부분의 음식은 옹기에서 최초로 꺼내 놓은 음식을 말하고, 가운데 부분은 중간까지 꺼낸 옹기에서 퍼낸 음식을 말하고 남은 부분은 옹기 가운데 한두 숟갈 정도 남아있던 것을 퍼낸 음식을 말한다.

 

주해(*2)

자비를 버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12. 젊어서(*1) 누구에게도(*2) 묶이지 않고(*3),

성적 방종을 끊고 유행하는 성자.

취하고 방일하지 않아 해탈한자,

현명한 님 들은 그들을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사왓티의 어떤 부호의 아들로서 계절에 따라 세 저택에서 즐기면서 지내는 소년이 부모에게 요청해서 출가를 하고자 했다.

 

그는 Stn 50에 나오는 ‘쾌락의 종류는 다양하고 달콤하고 즐거우니, 여러 가지 형상으로 마음을 혼란시킨다. 욕망의 가닥들에서 이러한 위험을 보고,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는 가르침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이끌려 세 번 출가하고 환속하면서 네 번째에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다.

 

그는 수행승들에게 ‘벗이여, 나는 방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세존께서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며 이 시를 읊었다.

 

주해(*2)

어떤 아름다운 연인에게라도의 뜻이다.

 

주해(*3)

‘성적 교섭의 탐욕 또는 감각적인 쾌락을 즐기거나 욕망에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13. 세상을 잘 알고(*1) 궁극의 진리를 보고,

거센 물결과 바다를 건넌 사람,

속박을 끊고(*2) 의존하지 않으며(*3), 번뇌 없는 사람,

현명한 님 들은 그들을 또한 성자로 안다.

 

 

주해(*1)

이 시는 난다와 관계된 것이다. 난다는 숫도다나와 마하빠자빠띠의 아들로 부처님의 이복동생이다.

 

세존께서 정각을 이룬 후에 까삘라밧투에 왔을 때 난다의 집을 방문했었다.

 

난다에게는 세 가지 축복, 장신(莊身)의 축복과 관정(灌頂)의 축복과 결혼(結婚)의 축복의 세 가지 의례가 있는 날이었다. 난다는 자나빠다깔리야니 난다와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난다에게 행운을 빌고 자신의 발우를 건네주었다. 난다는 그 발우 때문에 그것을 들고 궁궐 밖으로 부처님을 따라 나섰다. 자나빠다깔리야니 난다는 그가 가는 것을 보고 빨리 돌아오길 부탁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난다에게 출가하길 종용했고 거절하기 곤란했던 난다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사랑하는 여인 때문에 고민했고 마침내 낙담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를 데리고 천녀들이 사는 도리천으로 올라가 베자얀따 궁전 문 앞에 섰다.

 

세존께서 오신 것을 알고 제석천은 요정의 무리에 둘러싸여 궁전을 내려왔다. 그녀들은 모두 깟싸빠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발에 바르는 기름을 보시하여 구족천녀(鳩足天女)가 된 천녀들이었다.

 

부처님은 난다에게 ‘이 아름다운 오백 명의 구족 천녀들을 보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여인이 이러한 상호를 구족해야한다’는 가르침은 없지만 부처님은 방편 선교로서 난다의 고통스런 불만을 제거하고 탐욕을 없애기 위해 난다에게 구족천녀를 보여준 것이다.

 

그 후 세존께서는 난다가 천녀를 보고나서 청정한 삶을 즐기는 것을 보고 수행승들에게 ‘치욕스런 말로 난다에게 자극을 주어라’고 말했다. 난다는 자신이 추구했던 감각적 쾌락에 대해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근본적으로 숙고하여 머지않아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다.

 

그 후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이제 난다는 비난 받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 시를 수행승들에게 가르치셨다. 그 후 부처님은 난다를 ‘감관의 문을 지키는 자 가운데 제일’이라고 불렀다.

 

주해(*2)

 네 가지 속박이 있다.

 

탐욕에 의한 존재무리의 속박,

분노에 의한 존재무리의 속박,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에 의한 존재무리의 속박,

독단 의한 존재무리의 속박을 뜻한다.

 

독단 의한 존재무리의 속박은 ‘이것이야말로 진리이다’는 독단에 대한 집착을 뜻하는 것으로 정신 신체적 속박을 말한다.

 

주해(*3)

갈애와 견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4. 재가자는 아내를 부양하고 덕행자에게는 내 것이 없어,

둘은 처소와 생활양식이 같지 않다.

재가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기 어렵지만

성자는 항상 삼가며 남의 목숨을 보호한다. (*1)

 

 

주해(*1)

 어떤 수행승이 꼬쌀라국의 국경지대에서 마을에 의존하며 숲 속에서 살았다. 그때에 마을의 한 사냥꾼이 수행승이 사는 처소로 들어가 동물을 사냥했다. 그는 숲 속에 들어갈 때면 장로가 마을로 탁발하기 위해 숲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자주 보고나니까 장로에 대한 애착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는 많은 고기를 구할 때마다 장로에게 맛있는 탁발 음식을 대접했다.

 

사람들은 “이 수행승은 ‘이 장소에 동물들이 살고 있고, 돌아다니고 있고, 물을 마시고 있다.’고 사냥꾼에게 알려서 사냥꾼으로 하여금 동물들을 죽이게 해서 그것으로 둘이 사이좋게 생계를 꾸려간다.”라고 불평했다.

 

마침 세존께서 여러 지방을 유행하다가 이 지방에 들렸다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존께서는 그 사냥꾼과 함께 생계를 같이하는 그 수행승에게 번뇌를 부순 성자의 삶을 깨우치게 하고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 시를 읊었다.

 

 

15.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 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게 미치지 못한다.(*1)

 

 

주해(*1)

세존께서 까삘라밧투에 계실 때에 싸끼야 족들 사이에 논쟁이 ‘먼저 진리의 흐름에 든 자는 나중에 든 자 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먼저 흐름에 든 자가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을 받아야 한다.’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탁발하던 어떤 수행승이 듣고 부처님에게 전했는데, 부처님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라도 재가에 있다면,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면서 재가자가 먼저 흐름에 들었더라도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할 것을 가르치고, 수행승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를 읊었다.

 

 

- 성자의 경이 끝났다.-

 

 

(Muni sutta- The Sage- 성자의 경, 숫따니빠따 Sn1.12,전재성님역)

 

  무니경(성자의 경-Sn1.12).docx  무니경(성자의 경-Sn1.12).pdf

 

 

 

 

아소까대왕은

 

무니경의 주석에 따르면 무니경은 아소까대왕의 바위 각문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런 아소까대왕은 어떤 인물일까.

 

아소까대왕은 기원전 250년경에 인도를 통치하였던 왕이다. 그는 인도전역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전역에 바위와 돌기둥에 글을 남겼다. 이에 대하여 아소까의 저자 일아스님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 역사에서 유일한, 전쟁을 포기한 왕이다. 그 대신 그는 사람들의 행복을 최상의 목표로 두고 복지활동과 자선활동을 실천한 빼어난 성인군자와 같은 왕이었다.

 

(일아스님, ‘아소까에서)

 

 

성인과 같은 아소까왕을 일반적으로 전륜성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륜성왕의 칭호를 받는 아소까는 인도 전역의 바위와 돌기둥 등에 글을 새겨 두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담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무니경(Muni sutta)’이라 한다.

 

무니경이 들어가 있는 것이 여러개의 각문중에 바이라트 바위칙령각문이라 한다. 바이라트 칙령에는 어떤 문구가 새겨져 있을까. 일아스님의 아소까를 보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한다.

 

 

바이라트 바위 담마칙령(작은바위 담마칙령 3)

 

마가다의 왕 삐야다시는 승가에 존경스런 인사를 드리며, 건강하심과 평안하심을 문안드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내가 얼마나 붓다, 담마, 상가에 존경과 믿음을 드리는지 존자님들은 잘 아십니다. 붓다,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무엇이든지 훌륭히 말씀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참된 담마기 오랫동안 가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내가 믿는 것을 그대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존자님들, 이 담마 경전들

 

계율의 찬탄(Vinaya-samukase: 위나야-사무까세)

거룩한 삶의 길(Aliya-vasani: 알리야-와사니)

미래의 두려움(Anagata-bhayani: 아나가따-바야니)

성자의 게송(Muni-gatha: 무니-가타)

성자의 길이에 대한 말씀(Moneya-sute: 모네야-수떼)

우빠시따의 질문(Upatisa-pasine: 우빠시따-빠시네)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말씀하신 거짓말하는 것에 대한 교훈(Lahhulovade musavadam adhigicya bhagavata Budhena bhasite: 라굴로-와떼 무사와당 아디기짜 바가와따 부떼나 바시떼)

 

존자님들이여, 이 담마의 경전을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끊임없이 듣고 되새기를 나는 열망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따르는 재가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런 담마의 경전을 끊임없이 듣고 되새기를 나는 열망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 이 칙령을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바이라뜨 바위 담마칙령,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소까

 

 

 

각문에서 삐야다시라는 명칭은 아소까 대왕의 개인이름이다. 아소까라는 이름은 즉위시의 이름 또는 두 번째의 이름이라 한다.

 

아소까의 바이라뜨 바위에 새겨진 아소까의 당부사항을 보면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우바새와 우바이 등의 사부대중이 위의 경을 끊임없이 듣고 마음에 새길것을 주문하고 있다

 

바이라트 바위 담마칙령에 언급된 경이름과 소속경전

 

그렇다면 이들 경들은 어느 경전에 속해 있을까. 표를 만들어 보았다.

 

 

바이라트 바위 담마칙령에 언급된 경이름과 소속경전

No

바이라트 바위 담마칙령에 언급된 경이름

소속경전

1

계율의 찬탄(Vinaya-samukase: 위나야-사무까세)

디가니까야의 사갈로와다경(D31) 또는 맛지마니까야 의 아누마나경(M15)

2

거룩한 삶의 길(Aliya-vasani: 알리야-와사니)

앙굿따라니까야의 아리야왕사경(428) 또는 디가니까야의 상기띠경(D33)

3

미래의 두려움(Anagata-bhayani: 아나가따-바야니)

앙굿따라니까야의 아나가따경(578)

4

성자의 게송(Muni-gatha: 무니-가타)

숫따니빠따의  무니경(207-221)

5

성자의 길이에 대한 말씀(Moneya-sute: 모네야-수떼)

숫따니빠따의 날라까경(679-723)

6

우빠시따의 질문(Upatisa-pasine: 우빠시따-빠시네)

숫따니빠따의 사리뿟따경(955-975)

7

부처님이 라훌라에게 말씀하신 거짓말하는 것에 대한 교훈(Lahhulovade musavadam adhigicya bhagavata Budhena bhasite: 라굴로-와데 무사와당 아디기짜 바가와따 부떼나 바시떼)

맛지마니까야의 암발랏타까라훌로와다경

 

 

모두 일곱개의 경중에 숫따니빠따에서 인용된 것이 세 개로서 가장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무니가타 즉, 무니경이다.

 

원본 훼손없이 지금까지

 

아소까대왕이 활동하던 시기는 부처님이 입멸에 들고 난 후 약 250년 정도 후 시점이다. 그런데 각문의 내용을 보면 현재 보는 니까야의 경이름이 기록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이는 아소까대왕 당시 기원전 250년 경에 이미 빠알리 삼장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경전이 원본 훼손없이 지금까지 전해져서 전세계인이 읽고 있다는 것은 담마의 수레바퀴가 지금까지 쉬임없이 굴러 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2012-03-09

진흙속의연꽃

 

무니경(성자의 경-Sn1.1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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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경(성자의 경-Sn1.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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