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궁극적 실재를 향한 허망한 정열,‘없이 계시는 분’과 빠빤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2. 22:10

 

궁극적 실재를 향한 허망한 정열,‘없이 계시는 분과 빠빤짜

 

 

 

신은 있는가. 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보는 듯한 글을 읽었다. 글쓴이는 종교다원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서강대 길희성교수이다.

 

없이 계시는 분

 

길교수는 최근 휴심정에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라는 글에서  어떻게 하면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하지만 신은 좀처럼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신을 만날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신을 찾을 때만이 신은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가하게 사변하거나 철학적 논쟁을 일삼는 자들은 절대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신은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보일 듯 말 듯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글의 제목이 암시 하듯이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뭐가 이리 복잡하냐고? 신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고 사람과 같은 존재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신에 대한 모든 개념과 언어는 결국 암호이며 상징일 수밖에 없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신의 암호-신이라는 암호.docx

신의 암호-신이라는 암호.pdf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신은 문자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서 유영모의 말을 빌어 없이 계시는 분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없이 계시는 분은 문자적으로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교수는 문자적으로 가장 잘 표현 된 것이라 설명한다.

 

신의 다양한 이름들

 

이외 하이데거나 폴 틸리히등의 예를 들어 신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지만 길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 구절로 요약된다.

 

 

여하튼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사용된 여러 가지 신의 암호들을 알고 있다.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길교수는 알 듯 모를 듯 도무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는 방법중의 하나가 동서양에서 궁극적  그 무엇으로 표현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 무엇들이 바로 중국에서의 ’, 인도의 경우 브라흐만’, 대승불교의 ’, 기독교의 창조주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암호와 상징으로 불리우는 것이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도, 브라흐만, , 창조주 등의 명칭은 하나의 상징이자 암호로서, 이는 신의 다양한 이름들이고 또 문화적 제약속에서 형성된 실재(Reality)’를 가리키는 다양한 개념들이라고 존 힉의 말을 빌어 설명하고 있다.

 

천인합일사상

 

길희성 교수의 글에 따르면 도, 브라흐만, , 창조주는 실재(Reality)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길교수가 언급한 상징과 암호로서의 실재 중에 열반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길교수가 언급한 신의 다양한 이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천인합일사상으로 귀결된다. 이때 은 창조주개념이고 은 피조물개념을 말한다.

 

도교에서 말하는 도 역시 천의 개념이다. 노자 도덕경에 곡신에 대한 설명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곡신은 깊고 깊어서, 온갖 것이 비롯 되는 곡인 듯도 합니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서 창조주개념임을 알 수 있다.

 

브라만교에서 브라만 역시 창조주 개념이다. 대승불교에서의 공 역시 창조주 개념임을 알 수 있는데, 길교수는 이에 대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였다.

 

인간자체가 신의 최고의 암호라고

 

이렇게 도, 브라만, 공이 창주주개념으로 사용된다면 창조주로부터 나온 것이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이다. 그 인간에 대하여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을 우리 인간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당초 암호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본래부터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발생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매개로 하여 자신을 알리며 세계는 인간을 매개로 하여 신을 안다. 인간이 본래부터 영험하고 영명하고 신령스러운 존재이다. 신성을 지닌 존재이고 하느님의 모상이며 신과 교신하면서 초월의 신호를 받을 수 있고 암호를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아니, 인간 자체가, 인간의 마음 혹은 영혼 자체가, 신의 최고의 암호라고 영성의 대가들은 입을 모은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Why Me, God?

 

 

 

창조주가 있으면 피조물이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것의 대표를 인간으로 보았는데, 이런 인간자체가 창조주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영혼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여기서 영혼이란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를 말한다. 이런 실체가 있어야 창조주와 합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 열반을 창조주개념에서 제외하였을까

 

초기불교의 무아처럼 실체가 없다면 천인합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길희성 교수는 도, 브라만, , 하느님 등의 창조주를 언급하였지만 열반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지 않다. 그런 열반에 대하여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이 대답을 거부한 14무기(無記)의 문제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 즉 번뇌를 말끔히 제거한 여래가 사후에 열반에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관점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직접적인 대답을 거부하거나 피한 것은 아무래도 열반(Nirvana)이라는 초월적 경지에 대해서 ‘존재’나 ‘비존재’ 같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음을 의식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길교수가 열반에 대하여 창조주 개념에서 제외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런 직접적인 요인은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무기(無記)’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은 결코 창조주 개념이 될 수 없고 그에 따라 피조물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고정된 실체로서 영혼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적 흐름이 있을 뿐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천인합일 할 수 없어서 제외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요인은 부처님이 부처님당시에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는 사실이다.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불교

 

불교가 발생한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브라만교는 대표적인 신인합일사상으로서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으로 불리운다. 그렇다면 브라만교는 어떤 종교일까.  브라만교를 알려먼 먼저 아뜨만(ātman)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집 주석에서)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주석에서 설명된 것 과 같이 아뜨만은 불변하는 영혼체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 아뜨만과 창조주개념의 브라만과 하나가 됨으로서 최고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은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거나, 원인없는 결과가 생겨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연기법으로서 브라만사상을 논파하였다. 이렇게 브라만사상을 비판하고 성립한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길희성교수는 초기불교의 열반을 창조주개념에서 제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공사상을 창조주 개념으로 집어 넣었을까

 

그렇다면 길교수는 왜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창조주 개념으로 집어 넣었을까. 이는 진공묘유의 영향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비판하여 성립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용수(나가르주나)’를 들수 있다.

 

용수는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파기 하였는데, 이 파기의 논리가 공()이다. 이런 공관을 바탕으로 불교를 새롭게 해석한 것이 공가중() 삼제(三諦)이론이다.  

 

이와 같은 공관을 바탕으로 대승불교논사들은 별도의 경전제작을 착수하였고  새로운 불교를  만들었다. 이후  대승불교는 유식, 여래장사상 등으로 발전하였고, 중국에서는 선불교라는 형태의 매우 독특한 불교로 변형되었다.

 

이런 변형은 초기불교의 가르침 보다 브라만사상에 더 가깝다. 왜 그럴까. 이는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이 신인합일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사상을 연기법으로 비판하였는데,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공사상으로 부처님의 초기불교사상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비판을 비판을 거듭한 결과 천인합일사상과 유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참나를 찾기 위한 것도 일종의 천인합일사상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상은 선사들의 오도송이나 임종게등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길희성 교수는 공에 대하여 창조주 개념으로 집어 넣었을 것이다.

 

 

중세시대가 훨씬 좋았다?

 

길교수는 창조주개념은 실재한다고 본다. 그 명백한 증거로서 피조물인 인간의 영혼을 들고 있다. 그러나 신 자체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다만 문화적 차이, 언어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을 뿐이라 한다. 그래서 길희성 교수는 신을 찾기 위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한다.

 

 

문자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보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종교적 상상력이 훨씬 더 풍부할 수 있으며, 즉물적 사실의 세계만을 ‘현실’로 알고 사는 현대인들보다 말과 문자가 아닌 언어들에 더 많이 접하고 산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 신에 다가가는 통로가 훨씬 다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길교수는 문자나 언어에 매달리면 신, 하느님을 만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하여 바이블이 대량으로 보급 되기 이전 즉, 중세시대의 사람들이 신을 만날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이라 말한다. 마치 선불교에서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면 참나를 볼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창조주도 진화하는가

 

길희성교수는 중세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는 것 같다. 중세천년동안 신을 마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요즘과 같이 말이나 문자로 얽매이지 않은 시대이었기 때문에 좀 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세의 신은 어떤 신일까.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서적 인격신관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같은 사상과 접맥시켜 고차적인 형이상학적 신관을 수립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마도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휴심정 2012—03-09)

 

 

중세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신인 야훼와 다른 신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신은 때로는 극악무도하고 잔인한 야훼라는 인격신에다 이데아라는 날개가 달린 멋진 옷을 입혀 놓은 신인 것이다. 그런 신관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부철학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창조주도 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불교TV사이트에서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유럽에서 중세천년동안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중세신학자들은 왜 신의 실재를 증명하려고 그토록 노력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의 실재성을 증명하려 한 것은 신이 진짜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신이 전능하다면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신의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고 중세 천년동안 끊임 없이 시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것도 유한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상대로 신의 실재를 증명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중세 천년이 끝나고 근대가 시작 되면서 그만 두게 된다. 그 대신 서양철학자들은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 보다 인간의 자아를 탐구 하는데 더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근대말에 이르러 신을 죽여 버리게 된다. 그런 유명한 선언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이다. 니체 이후 현대철학에 있어서 더 이상 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한다.

 

왜 서양 철학자들은 신의 실재를 증명 하다 왜 신을 죽이게 되었을까. 바로 그것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만들었고,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용도폐기를 선언 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신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이기 때문이다

 

(김종욱 교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제10 서양철학의 원류와 불교불교TV 2007-12-24)

 

 

야훼라는 인격신에다 날개를 단 이데아라는 멋진 옷을 입혀 준 것이 중세신학자들이다. 그렇게 날개를 달아준 다음 이런 신이 실재하는지에 대하여 천년동안 끊임없이 증명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난 사항인데

 

그러나 그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신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뿐 실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더 이상 신을 찾이 않게 되었고, 그 자리에 인간자아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말에 이르러 급기야 마음속에 있는 신 마저 죽여 버리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이 사라졌고 현대철학에 있어서 더 이상 신을 찾지 않게 된 요인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여전히 신을 찾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실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허망한 정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이미 결론이 난 사항이기 때문이다.

 

마두삔디까경 (Madhupiṇḑikasutta, 꿀과자의 경, M18)에서

 

그런데 더 오래 전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이 났었다. 그것은 부처님당시 부처님에 의해서이다.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신을 전제로 성립되었다.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고 허전 할 것 같아 보지만 신 없이 성립한 종교가 불교이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종교이다. 이와 같이 신본주의가 아니어도 종교가 성립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신 즉 창조주는 실재 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설령 그런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것으로 본다. 좀 더 심하게 표현 하면 마음장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이 만들어지게 될까. 맛지마니까야 마두삔디까경 (Madhupiṇḑikasutta, 꿀과자의 경, M18)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마두삔디까경 -Madhupiṇḑikasutta-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전재성님역)

 

마두삔디까경(꿀과자의 경-M18).docx

마두삔디까경(꿀과자의 경-M18).pdf

 

 

부처님은 희론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감각접촉에 의하여 식이 일어나고 그 이후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로 갈라진다. 하나는 느낌다음에 갈애가 일어나는 12연기로 설명되고, 또 하나의 과정이 희론으로 발전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마두삔디까경에서는 느낌 다음에 어떻게 희론이 발생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희론은 어떤 것일까.

 

빠빤짜(papañca, 戲論)

 

맛지마니까야 주석에 희론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희론(戲論 : papañca)은 카오스적인 혼돈 암시해서 한역경전에서는 망상(妄想)이라고도 번역된다. 희론을 의미하는 빠빤짜(papañca) 라는 말은 원래 ‘확장, 발산, 다양화’의 의미를 가지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 사유의 개념적 확장이다.

 

(마두삔디까경 -Madhupiṇḑikasutta-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8, 전재성님역)

 

 

희론은 오로지 생각이 확장되어 일어나는 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실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희론에 해당된다.

 

희론이 발생되는 과정

 

이처럼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현상에 대하여 아눌라스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참고로 다음글은 지난 2011 1 21일 블로그에 올렸던 마두삔디까숫따(Madhupindika Sutta, 꿀덩어리경) 빠빤짜(papanca)의 내용으로서 그때 당시 아눌라 스님의 인터넷음성법문을 듣고 녹취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접촉하는데 이 것이 인식과정의 시작이다. 예를 들어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났을 때 접촉이 일어 나는데 이 때 느낌도 함께 일어난다. 이 때의 인식과정은 능동이 아니라 ‘피동’이다. 따라서 비인칭이다. 아직까지 나라는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는데 나라는 비인칭이므로 내 생각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인칭은 ‘느낌’이 일어나는 시점까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인칭이 떨어져 나가고 계획적이고 개인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내가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느낌이후에 벌어진다.

 

대상을 느끼는 순간 대상을 받아 들이게 되는데 이때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라는 세가지 느낌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순간 ‘상()’이 형성되는데 이는 ‘프린트’되어지는 것과 같다. 바로 이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위빠사나 명상을 할 때 바로 그 지점이 멈추어야 할 장소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사띠를 두어야 하는 곳이다.

 

‘사색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보면 ‘봄’, 들으면 ‘들음’등으로 그 내용을 보지 말고, 6기관으로 들어 오는 인지작용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해야할까. 왜냐하면 그 때 부터 번뇌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번뇌망상은 어떤 단계를 거쳐서 일어나게 될까.

 

눈으로 그림을 본다면, 받아들인 그림에 대하여 사색을 하게 된다. 소위 생각하는 단계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인식되어진 그림에 대하여 사색하면서 점차 개념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이렇게 사념이 그 대상으로 부터 확장되는 것을 빠빤짜(papañca)라 한다.

 

이미 대상은 내 눈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이 상으로 남아 인지(프린트)되어진다. 그 프린트 된 상을 가지고서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정보를 연관시키면서 이제부터 생각을 해 나가는 것이다. 시계의 예를 들 수 있다.

 

손목시계를 보았을 때 이것이 시계라고 인식한다. 그런데 이 시계가 “일제인 것 같다”느니 “예쁘게 생겼다”느니 “나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와 같은 생각이 시계를 연하여 계속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나()라는 것이 개입된 것이다. 시계를 보고 좋다는 느낌이 들어 결국 그 시계를 내것으로 끌어 당기고 싶은 현상이 발생된 것이다.

 

이렇게 머리속에서 그것에 대한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망상’이라 하고, 빠알리어로 ‘빠빤짜’라 하는 것이다. 결국 빠빤짜는 사념이 계속 확장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념이 계속 확장되다 보면 어떤 현상이 발생될까.

 

이제 부터는 우발적단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획적인 행위도 아니다.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거부할 수 없는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 단계는 어떤 단계일까. 이제까지 인식의 주체가 되어 행동하던 사람이 이 굴종의 단계에서는 생각이 주체가 되고, 그 사람은 피 할 수 없는 생각의 피동체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원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인간’만 보면 성질이 난다. ‘그 인간’을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그 인간은 나쁜사람이야”라고 판단해 버리고, 그 인간과 관련하여 안 좋았던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구 화를 내게 된다. 그러면서 불쾌감과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불쾌감과 괴로움을 누가 만들었을까.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정체’라는 것이다. 계속 자기 생각속에 빠져 자기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굴종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시계를 보고서 그 시계가 좋아 보여서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꼭 그 시계를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극단적으로 훔칠 수 있다. 그 시계가 좋다라는 생각에 멈추었다면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에서 멈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훔치고, 도둑으로 몰리고, 결국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된다.

 

시계를 훔치지 않고 그 시계를 꼭 사고야 말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시계를 사기 위하여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탐진치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나가 연하여 수 많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것은 느낌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 느낌에서 부터 행위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만들어 놓은 행위로 인하여 자기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의 노예가 되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개념에 의하여 사용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개념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사람이 개념적으로 확장하여 갈 때 바로 자기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개념의 확장, 그 확산적 경향 때문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두 그 사람을 구속하여 버린다. 예를 들어 “나는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하였을 때, 그 세계는 자기가 만든 세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그 세계속에 살면서 그 세계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소위 세계라는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 올 필요가 없다. 소위 말하는 세상은 내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이다. 그런 세상은 모두가 다르다. A라는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이 다르고, B라는 세상이 인식하는 세상이 모두 다르듯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는 자신이 만들었고, 그 세계속에서 계속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라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세계는 ‘개념의 세계’이고, 자기가 투사해 놓은 ‘꿈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를 마술사와 호랑이 비유로 설명 할 수 있다.

 

어느 마술사가 죽은 호랑이의 뼈를 추스려 마술로서 호랑이를 소생시켰다. 그런데 그 소생된 호랑이는 마술사를 잡아 먹어 버렸다. 이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내가 만들어 놓은 호랑이 한테 계속 잡아 먹히면서 사는 삶과 같다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면서 만들어 놓은 허상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 살면서 “아. 나는 이렇게 살아야해” 하며 만들어 놓은 세상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면서 사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호랑이 이야기처럼 개념이나 언어가 그것을 만들어 나가고 그 사람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것이다.

 

(아눌라스님, ([이해법문03_빠빤차] http://cafe.daum.net/kalyanamitta)

 

 

희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남에 따라 자신이 만들어 개념또한 확장되는데, 이는 생각속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기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개념의 확장, 그 확산적 경향 때문에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두 그 사람을 구속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희론에 빠지는 것이다.

 

허망한 정열

 

그렇다면 실재하지도 않은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눌라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가장 먼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속에서만 형성된 복잡한 구조물과 미로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해 보았자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망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망상이나 개념인지도 모르고 거기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 미워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것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 정복당하여 집착하게 된 결과로 본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개념 역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개념으로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에 철저하게 종속당하면서 그 안에서 실재를 찾기 위하여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의 존재를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희론, 망상, 개념, 생각 등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실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망상속의 희론에 지나지 않은 궁극적실재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허망한 정열이라 볼 수 있다.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부처님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등의 14가지 사항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고 무기 하였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희론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지금 여기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것이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이다.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말룽끼야뿟따여,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 말룽끼야뿟따여,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견해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죽음이 있고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있다.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지금 여기서 파괴할 것을 가르친다.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 맛지마니까야 M63, 전재성님역)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docx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pdf

 

 

부처님이 세상은 영원하다등의 14가지 사항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설령 그런 견해에 대하여 답을 얻었을지라도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괴로움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이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야말로 유익하고, 삶과 관계 되는 것이라 하였다.

 

항상 깨어 있을 때

 

희론, 망상, 개념, 생각 등을 ‘부수어’ 버려야 한다. 예를 든다면 안식 등 접촉이 일어났을 때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때 느낌다음에 생각이 연이어 일어나는 생각이 더 이상 사념의 구조물을 짓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를 알아차림이라 한다. 항상 깨어 있을 때 ‘허망한 정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03-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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