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반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해탈의 기쁨과 멸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3. 12:28

 

 

“열반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해탈의 기쁨과 멸성제

 

 

 

 

 

 

 

 

 

멸성제 (滅聖諦)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 ariyasacca        둑카니로담 아리야삿짬

yo tassāyeva tahāya                요 땃사-예와 딴하-

asesavirāganirodho cāgo             아세사위라-가니로도 짜-

painissaggo                        빠띠닛삭고

mutti anālayo.                      뭇띠 아나-라요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멸성제(滅聖諦)인가?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햇볕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듯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 멸제(滅諦), 갈애 즉 집제(集諦)의 소멸입니다. 위빠사나의 지혜와 성스러운 도의 지혜의 힘으로 더 이상 갈애가 일어나고 사라질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햇볕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라한 도 지혜가 생기면 갈애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갈애의 소멸로 새로운 생의 정신과 물질로 인한 오취온五取蘊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이렇듯이 갈애가 일어나지 않거나 소멸하는 것을 멸제라고 합니다.

 

아라한 도의 지혜로 갈애를 없애는 것은 갈애의 남김 없는 완전한 소멸로 가장 성스럽고 높은 형태의 소멸입니다.

 

낮은 형태의 소멸은 예를 들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아나함의 도에 의한 소멸,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는 사다함의 도에 의한 소멸,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는 수다원의 도에 의한 소멸과 같은 소멸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멸은 오직 갈애의 부분적인 소멸과 관련되기 때문에 낮은 형태의 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소멸

 

그리고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림으로써 일어나는 또 다른 형태의 소멸이 있습니다. 삼법인을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갈애가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갈애의 일시적 소멸이 일어납니다.

 

이는 위빠사나 지혜를 부분적으로 계발하여 갈애를 반 쯤 소멸시킨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매순간, 수행자는 갈애의 일시적 소멸을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애를 포기하면

 

빨리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 갈애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 멸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하는가?

 

“세상에는 어디나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며,

그 자리에서 이에 대한 갈애를 포기하면,

그 자리에서 갈애가 소멸한다.

 

 

여기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 , , , , 마음의 육문六門과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마음의 대상[], 안식眼識, 이식耳識, 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여섯 가지 식(六識)을 뜻합니다. 더 자세한 것은 대념처경의 경문과 번역본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버림과 소멸은 의미상으로 유사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cāga(벗어남, 포기), patinissagga(포기, 버림, 폐기), mutti(해탈, 자유, 해방), analayo(혐오, 제거)...등이 있고, 이 모두가 다 nirodha(소멸, 멸진)과 같은 뜻입니다.

 

갈애는 어떻게 소멸하는가

 

수행자가 보는 순간 ‘봄’이라고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자연적 성품을 확신하면, 그는 눈, 형상, 눈의 의식(眼識) 등과 같은 감각의 육문六門과 감각대상이 영원하고, 행복한 것이며, 자아가 있다는 잘못 된 생각으로 눈이 멀지 않게 됩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무명(avijja-)에서 벗어납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아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 감각대상에 대해 아무런 즐거운 느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할 때가 바로 갈애의 일시적 소멸, 사라짐입니다.

 

갈애의 일시적 소멸

 

갈애가 사라짐으로써 그 갈애 뒤에 이어지는 집착, 감각적 욕망, 행위도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식, 정신과 물질, 육경六境, 감각접촉, 느낌, 업의 불선과보, 업의 형성력()도 역시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갈애와 괴로움을 동시에 일시적으로 소멸시키는 방법이고, 이를 일러 일시적 소멸 혹은 일시적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수행자는 듣고, 냄새 맡고, 하는 등의 순간에 ‘들음’ ‘냄새 맡음’ ‘이식耳識’ ‘후식鼻識’이라고 알아차림으로써 귀, 소리, , 맛 등에 대한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확신하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들 대상과 관련하여 영원하고, 행복한 것이며,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갈애와 괴로움의 일시적 소멸, 또는 일시적 열반이 있게 됩니다.

 

일시적 소멸을 촉발하는 위빠사나를 통해서 높은 지혜가 계발되고, 수다원의 지혜를 얻어 열반이 실현됩니다.

 

수다원의 지혜는

 

수다원의 지혜는 사악도에 재생하게 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소멸시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낮은 곳인 사악도에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 욕계 선처에 태어나는 고통도 일곱 생이 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갈애를 소멸시킨 결과로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이지만, 수다원의 도과를 얻었다고 해서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갈애가 소멸하였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는 정신과 물질, 오취온五取蘊에서 비롯한 괴로움이 완전히 꺼진 결과인 그 소멸상태에 머무는 것일 뿐입니다.

 

사다함과 아나함

 

사다함의 지혜를 얻어 열반이 실현되면, 거친 형태의 감각적 갈애가 사라지고, 욕계欲界에 태어나는 괴로움을 두 번 이상 받지 않습니다. 아나함의 지혜로 열반을 실현하면 미세한 형태의 감각적 갈애가 사라지고,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는 괴로움을 한 번만 겪으면 됩니다.

 

 이러한 것들 또한 갈애의 소멸로 인해 생겨난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이러한 지혜의 도, 정신과 물질, 오취온五取蘊에서 비롯한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결과인, 그 소멸에 마음이 머무는 것일 뿐입니다.

 

아라한도가 실현되어야

 

아라한 도의 지혜로 열반이 실현이 되어야, 모든 형태의 갈애와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이것도 갈애의 소멸로 인해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갈애가 소멸하면, 괴로움도 소멸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 때만 괴로움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면 오래지 않아 다시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참된 해탈이 아닌 일시적인 경감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구부림으로 인한 뻣뻣함을 해소하기 위해 팔다리를 뻗습니다. 통증은 팔다리를 뻗음으로써 일시적으로 없어지지만 나중에 또 피곤함으로 되돌아 뿐입니다.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고파 지듯이

 

마찬가지로, 장시간 앉아있어서 생기는 뻣뻣함도 일어서거나 이리저리 거닐어서 해소되겠지만 결국은 피로로 곧 대체될 뿐입니다. 배고픔에 시달릴 때는 약간의 음식을 먹어서 그 고통이 해소되겠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다른 고통이 시작될 것입니다. 병은 적절한 의학적 치료로 치유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병이 조만간 생겨나서 다시 고통을 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려운 생활 형편은 적절한 직업이나 사업에 종사해서 성공하고 번영하게 되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직종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하거나 아주 부유하게 되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부침浮沈으로 높은 지위에서 추락하거나 빈털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령 일생동안 순조롭고 평탄한 항해를 한다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보시, 지계와 같은 공덕행의 과보로 유복하고 번영하는 환경에 둘러싸여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혹은 막강한 천인의 왕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선행의 공덕이 다하면 비참한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선정수행의 색계선이나 무색계선을 얻어 긴 수명을 가진 행복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면 정말로 수많은 겁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색계 범천계와 무색계범천계에 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정의 공덕이 다하는 때가 오면 제5장 집제集諦에서 언급한 어린 암퇘지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범천계에서 또 다시 악처로 추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였을 때에만

 

그래서 갈애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으면 어떠한 형태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 완전하고 영원한 자유를 얻으려면 오직 갈애가 완전히 소멸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 tassayeva tahāya asesa viraga nirodha’이 멸제滅諦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12연기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무명 등 원인으로서의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행과 같은 결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멸성제滅聖諦란 무엇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함으로써 업의 형성력()이 소멸한다. 업의 형성력이 소멸함으로써 그 결과인 식(, 윈냐냐. vinñāa)2이 소멸한다. 식이 소멸함으로써 정신과 물질(名色)이 소멸한다. 정신과 물질이 소멸함으로써 육입(六入)이 소멸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소멸함으로써 감각접촉()이 소멸한다. 감각접촉이 소멸함으로써, 느낌()이 소멸한다. 느낌이 소멸함으로써 갈애가 소멸한다. 갈애가 소멸함으로써 집착()이 소멸한다. 집착이 소멸함으로써 존재()가 소멸한다. 존재가 소멸함으로써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이 소멸함으로써 죽음, 늙음,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소멸한다.

 

그리하여 영혼이라는 실체도 없고, 행복(수카, sukha)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두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멸성제滅聖諦라 한다.

 

 

위의 경문에서 보면, 각각의 원인과 그 결과가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예를 들어, 무명(아윗자, avijjā)이 소멸하면 행(깜마, kamma)이 소멸하고 하는 식으로 소멸이 순서대로 이어지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은, 일단 무명이 사라지면 업의 형성력(상카라, sakhāra)과 같은 무명에서 비롯한 모든 결과가 다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

 

빨리 경전에 나오는 ‘니로다nirodha’ 또는 ‘니로도nirodho’는 소멸의 장소나 조건이 아닌 그냥 소멸만을 뜻합니다. 주석서에서는 니로다를, 소멸의 장소나 소멸의 조건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니로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명, , 과 같은 원인과 결과, 상호 조건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완전한 소멸, 멸진, 단절이라는 것에 유념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인 열반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멸성제滅聖諦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더 상세한 것은「열반에 관하여(Concerning Nibbana)」라는 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의 해설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멸성제 법문)

 

 

 

佛像 Faces of the Buddha Music Elegy by Lisa Gerrard (英文)

 

 

 

 

http://www.youtube.com/watch?v=B80DdU-qsKA

 

  

 

 

삶의 완성은 살아 있을 때

 

지구상 대부분 많은 종교에서 종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죽은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삶의 완성은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불교는 다르다.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불교TV강의(근본불교의 가르침, 제4강 사성제의 가르침 (2))에 따르면 삶의 완성은 ‘살아 있을 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열반은 바로 이 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실제로 일어난 모든 번뇌를 소멸하였다. 그것을 일러 일반적으로 부처를 이루었다, 성불(成佛)하였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를 닙바나(열반)’ 또는 빠리닙바나(반열반)’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열반과 반열반은 우리가 바로 이 생에서 이루어야 할 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가 있다. 초기불교경전 중에 테라가타와 테리가타가 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테라가타는 비구들이 열반을 이룬 체험을 담았고, 테리가타는 비구니들의 열반체험을 담은 것이다. 이들 경전속에 등장하는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명에 달한다. 그리고 열반체험에 대하여 알려 준다. 이들 경전에 실려있는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게송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의 봄 축제에 온 것은

내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으신 분께서

최상의 가르침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

 

환히 빛을 발하는 무리의 스승,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

견줄 바 없는 통찰력을 갖추신 인도자.

신과 인간의 승리자, 그 분을 보았다.

 

그분은 위대한 코끼리, 위대한 영웅,

번뇌를 여윈 위대한 광채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신 분

어디에도 두려움은 없다.

 

진정 오랜 세월 그른 길로 갔고

잘못된 견해의 사슬에 묶여 있던

나, 세나까를 부처님은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테라가타 287-290, 세나까비구)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

 

(테리가타 11, 뭇따비구니)

 

 

 

출가한지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마음의 평화, 마음을 다스림,

오랜 세월 찾아 헤맸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언뜻 승리자(부처님)의 말씀

떠올리고는 전율하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분투노력하였다.

 

그리고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취되었다.

오늘은 갈애를 끊은 지 7일째 날.

 

(테리가타 39-41, 다른 사마 비구니)

 

(이상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들 게송들을 보면 죽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선사들이 죽음 직전에 남긴다는 임종게가 아니다. 다만 열반을 성취한 데서 오는 청정, 해탈, 성과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반을 성취한 후에 비구와 비구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깨달음이후의 삶은

 

아상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 비구와 비구니들은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을 돕는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열반을 성취하였다고 하여 그들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다거나 사업을 하여 돈을 크게 벌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비심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간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삶을 살아 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탐진치가 소멸한 사람에게 남는 것은 탐욕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관용이 들어서고, 성냄이 소멸한 자리에 자애가, 어리석음 대신 지혜가 들어차서 열반을 성취한 자들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이렇게 열반을 성취한 자들은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았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부처님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은 35세에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리고 이후 80세까지 사셨다. 그 기간 동안 부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열반 또는 반열반에 들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 45년간 부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사셨다. 이것이 정등각자 부처님이 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된 자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같다고 본다.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아라한 역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삶을 살아 간 것이다.

 

깨달음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한다. 열반을 성취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열반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깨달은 자들의 역할이라 한다.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을 때 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12-03-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