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얽매인 매듭을 풀리라” 자따경(매듭경, S1.3.3)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5. 22:59

 

 

 

이 얽매인 매듭을 풀리라 자따경(매듭경, S1.3.3)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없듯이 깨달음 역시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밭을 매는 사람에게 있어서 저 먼 밭을 단 한 번에 맬 수 없다. 오늘 이만큼 하고 또 내일 저만큼 하다 보면 어느덧 반이 되고 머지 않아 다 맬 수 있는 것처럼 깨달음 역시 벽돌쌓기하듯이 단계를 밟아 간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를  사향사과 (四向四果)’라 한다. , 수다원의 도와 과, 사다함의 도와 과, 아나함의 도와 과, 아라한의 도와 과를 말한다. 이때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하는 말이 있다. 초전법륜경에 표현된 말은 다음과 같다.

 

 

yam kinci samudaya dhammam    양 낀치 사무다야 담망

sabbam tam nirodha dhammam    삽방 땅 니로다 담망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수다원의 오도송이라 한다. 법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봄으로서 첫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첫 번째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본격적으로 출세간적 수행이 시작되어 마침내 깨달음의 완성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단계에 대하여 아라한의 도와 과라 한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더 이상 태어남이 없게 되는데,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khīā jāti,                        키나 자띠

vusita brahmacariya,            위시땅 브라흐마짜리양

kata karaīya nāpara           까땅 까라니양 나빠랑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잇탓따야띠 빠자니띠띠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것을 아라한의 오도송 또는 아라한송이라 한다.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더 이상 태어남은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수다원과 아라한의 깨달음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렇게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두 개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 두 개의 깨달음의 내용은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누군가가 ‘수다원 도가 대상으로 하는 열반과 수다원 도 이상의 도가 대상으로 하는 열반은 같은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만약 수다원 도가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을 그 대상으로 하고, 나머지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도는 이미 제거된 불선한 마음의 소멸7을 대상으로 한다면, 네 가지 도의 대상은 각기 다른 네 가지의 열반일까요? 그러한 차이점은 없기 때문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도는 모두 한 가지 열반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마하시 사야도,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마하시 사야도의 글에 따르면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은 같은 것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사다함이나 아나함의 깨달음 역시 같은 것이다. 이는 네 가지 도가 오로지 한 가지 열반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 한다.

 

차이가 있다면

 

수다원의 깨달음과 아라한의 깨달음의 내용은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번뇌에 대한 것이다. 아라한의 경우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지만 이제 막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의 경우 소멸해야 할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다원의 경우 소멸된 번뇌는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과 법에 대한 의심과 잘못된 수행방법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상태이다. 그러나 탐심과 진심 치심 등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탐진치가 남아 있긴 하되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것인 아니라고 한다. 음욕이 생겨 성폭행을 저지른다든가, 순간적인 분노로 인하여 살인을 저지를 정도의 거친 번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 수행인데, 탐심과 진심은 사다함이 되면 미세하게 나마 남아 있고, 아나함이 되면 완전히 소멸된다고 한다. 또 색계에 대한 집착등 아직 남아 있는 미세한 번뇌 다섯가지가 있는데, 이런 번뇌는 아라한이 되면 완전히 소멸된다고 한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자가 아라한이 되기까지 최대 일곱생으로 보는 것이다.

 

수다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렇게 수다원과 아라한의 차이는 번뇌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깨달았을 때의 상태를 견도(수다원)’라하고,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을 수도(사다함과 아나함)’라 하고, 번뇌가 다 했을 때를 무학도(아라한)’라 한다. 이들 단계를 보면 모두 도()자가 들어가는데, 그 도는 모두 같은 도인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초기불교의 사향사과는  돈오점수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 돈점논쟁이 있었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논쟁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초기불교의 사향사과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맞는 것으로 본다. 왜 그럴까.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을 때 깨달음은 번뇌가 다했을 때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번뇌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의 차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이는 돈오점수로 설명될 수 있다. 궁극적인 길을 본 자가 앞으로 최대 일곱생까지 닦는 과정을 가쳐 마침내 번뇌를 소멸하였을 때 깨달음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돈오점수의 단계에 대하여 UCLA대 교수이자 동국대학술원장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불교TV에서 다음과 같이 강의 하였다.

 

 

이 단계의 수행자는 확고하다. 이미 열반에 대한 통찰을 얻었고, 그 첫 깨달음을 맛 보았기 때문이다. 도가 언젠가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현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인 바바나 마르가의 길이다.

 

이 단계가 완성되면 다음 깨달음의 단계로 오르게 된다. 궁극적 깨달음으로 수행도의 끝이다. 또 다른 깨달음이다. 이 궁극적인 단계에서 수행자는 깨달은 자로서 이해를 넘어 실천도 하게 된다. 즉 초기의 수 즉 닦음의 단계에서는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완성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깨달음 즉 현실이 진정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보고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 수행자는 자기가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여 열반이 진실로 무엇인지 알고, 통찰의 길(견도)에 입문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계속하여 닦음의 수행을 일정기간 동안 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음과 행동이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새로운 이해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행동을 완전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제22 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불교TV 2011 11 08)

 

 

첫 번째 깨달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길 즉, 열반을 체험한 수행자에게 있어서 도는 언젠가 완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길로만 죽 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번뇌가 있기 때문에 더 닦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오점수라 볼 수 있다.

 

아라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다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돈오점수가 맞지만 아라한의 입장에서 보면 돈온돈수가 맞을 수 있다.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오돈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깨달음의 실현 전에 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이, 뒤에 추가적인 닦음이 요구되는 깨달음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닦음이 뒤따라야 하는 깨달음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 깨달음은 이해와 실천이 완전히 통합된 것이어야만 한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제24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불교TV 2011-11-29)

 

 

돈오돈수적 관점에 따르면 깨닫고 난 다음 또 다시 닦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깨달음의 실현지점을 진짜 깨달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의 깨달음이 돈오돈수의 전형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단 한번의 가르침으로

 

하지만 돈오돈수를 이룬 수행자는 이미 그 이전 또는  그 이전 생에 수행을 했고 이미 깨달음의 이해 과정을 전 생에 거쳐 닦음을 계속하다가 이생에서 갑자기 깨달음의 모든 실현을 한순간에 가능하게 하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수행자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깨달음과 닦음이 동시에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생에 걸쳐 이미 깨달음을 증득하고 닦음 수행을 계속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이생에서 급작스럽게 이룬 듯 보이지만 전생의 수행을 바탕으로 돈오돈수를 이룬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예는 초기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단 한번의 가르침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득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생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단 한번으로 아라한이 된 예이다. 이것은 돈오돈수의 전형적인 예로서 깨닫는 그 순간 깨달음의 모든 특질들이 동시에 완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근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태어날 때 이미 선근(kusala mula)을 갖추고 태어 난 사람이 있다. 전생에 이생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만한 잠재력을 갖추게 해준 적절한 수행을 한 것으로 본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에 대한 좋은 예를 청정도론에서 본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1장 계, 1, S.i.13)

 

 

이 게송은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 페이지 집필동기에서 실려 있는 이 게송은 방대한 청정도론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 다시 한번 언급되어 있다.

 

이 게송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생이 전생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것이다. 게송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통찰지를 갖춘 사람이 바로 그것이다.

 

통찰지를 갖추고 태어난 사람은 전생에 수행을 했던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자는 선근을 가지고 태어 났기 때문에 계를 자동으로 지킨다는 뜻으로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 부를까. 청정도론 주석에는 생이지(生而知)’라고 표현하였다.  통찰지를 가지고 태어나려면 세 가지 원인을 가진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 그 생의 재생연결식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의 바왕가(잠재의식)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 되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생이지로서 타고난 통찰지는 전생에 이미 수행한 과보라 볼 수 있다. 이번생에도 수행을 할 수 있는 선근을 가지고 태어 났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 한마디만 들어도 수행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경우를 돈오돈수 무학도의 경지 즉, 아라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얽매인 매듭을 풀리라

 

청정도론에 실려있는 게송에 대한 원문을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매우 짤막한 경이 있다.

 

 

자따경

(Jaāsutta- A Tangle-매듭경, S1.3.3)

 

 

 [하늘사람]

안으로 묶이고 밖으로 묶였네. 사람들은 매듭에 묶여 있네.

고따마께 이와 같이 여쭈어보니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입니까?”

 

[세존]

계율이 바로 서고 슬기롭고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서

부지런하고 사려깊은 수행승이 이 얽매인 매듭을 풀리라.

 

탐욕과 분노하는 것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번뇌가 다한 성자에게 이 얽매인 매듭은 풀리네.

 

정신과 물질과 세속적 장애와 천상계의 지각(色想)마저

남김없이 부서지는 곳에 이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

- 色想 : 천상계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인식.

 

(Jaāsutta- A Tangle-매듭경, 상윳따니까야 S1.3.3, 전재성님역)

 

  자따경(매듭경-S1.3.3).docx  자따경(매듭경-S1.3.3).pdf

 

 

 

 

 

 

 

Tangle

 

 

 

불과 반페이지도 안되는 매우 짧은 길이의 경이다. 데와따상윳따에 실려 있는 이 경의 이름은 자따경(Jaāsutta)이다. 우리말로 매듭으로 번역되었다. 엉킨 매듭을 푸는 자의 경이라는 뜻이다. 그런 매듭은 어떻게 풀어야할까. 그것은 다름아닌 계정혜삼학이다. 그리고 탐진치소멸과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얼키고 설킨 매듭을 풀 것이라 한다.

 

이 게송중에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부분만 보면 다음과 같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실레 빠띳타야 나로 사빤뇨

citta paññañca bhāvaya,         찌땅 빤냔짜 바와양
Ātāpi nipako bhikkhu                아따삐 니빠꼬 빅쿠

so ima vijaaye jaanti.          소 이망 위자따예 자딴띠

계율이 바로 서고

슬기롭고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서

부지런하고 사려깊은 수행승이

이 얽매인 매듭을 풀리라.

(전재성님역)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A wise man established in virtues,

develops his mind and wisdom
And that zealous and clever bhikkhu,

disentangles, the tangle.

 

 

 

돈오점수가 맞다

 

궁극적 길을 보고 이제 막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곱생 이내에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돈오점수가 맞다. 하지만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깨달음과 동시에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돈오돈수가 맞다. 이런 의미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서 한 때 벌어졌던 돈점논쟁은 의미가 없다.

 

돈점논쟁은 번뇌에 따른 닦음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돈오돈수 보다 돈오점수가 더 옳은 것이라 볼 수 있다.

 

 

 

2012-03-15

진흙속의연꽃

자따경(매듭경-S1.3.3).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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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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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따경(매듭경-S1.3.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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