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아마간다의 경(Sn2.2)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9. 13:32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아마간다의 경(Sn2.2)

 

 

 

 

아마간다의 경

(Amagandha sutta- The Smell of raw flesh, 숫따니빠따 Sn2.2)

 

 

[Amagandha sutta](*1)

 

주해(*1)

아마간다는 원래 ‘비린 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인연담이 있다.

 

1)

아마간다는 바라문의 이름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 아마간다는 고행자로서 히말라야 산에서 500명의 바라문 제자와 함께 살았다. 그들은 초목의 뿌리나 과일을 먹고 물고기나 고기를 먹지 않고,또 소금이나 식초를 구할 수 없어 황달에 걸렸다. 그들은 일년에 한 번 소금과 식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에서 내려오면 근처의 마을의 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하여 4개월 동안 모든 대접을 다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은 수행승들과 함께 같은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재가의 신자가 되었다. 그 해에 아마간다와 제자들이 연례행사로 그 마을에 내려왔는데, 마을의 장자들은 예전처럼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간다는 마을이 왕의 처벌을 받았는지 기근이 들었는지 궁금해 하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는데,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비린내 나는 것, 즉 물고기와 고기를 먹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부처님이 비린내 나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자 제따바나를 찾았다.

 

 부처님께서 비린내 나는 것은 물고기나 고기가 아니라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이고 그 비린내를 피하려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삼가야한다고 가르치면서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과 띳사라는 고행자 사이의 예화를 들어 설한 것이 이경이다.

 

이 경의 가르침을 듣고 아마간다와 그의 제자들은 불과 며칠 만에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다.

 

2)

 한편 깟싸빠 부처님과 고행자의 인연담은 다음과 같다.

 

깟싸빠 부처님은 팔만 아승지겁 동안 바라밀을 닦아 베나레스의 바라문 브라흐마닷따의 부인 다나바띠의 모태에 잉태되어 태어났고 그의 제자인 띳사도 같은 날 천계에서 죽어서 같은 날에 부제사장의 집안에 태어났다. 그들은 서로 진흙에서 뒹굴며 친구로서 지냈다.

 

띳사는 아버지의 권유로 출가했고 깟싸빠는 집에 남아 호흡 마음챙김과 네 가지 선정을 닦아 신통력으로 움직이는 궁전을 타고 깨달음의 도량에 접근했으나 궁전은 다시 본래의 자리에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출가하지 않으면 깨달음의 사원에 접근할 수 없음을 알고 출가하여 7일 만에 정각을 이루었다.

 

그 후 깟싸빠는 이시빠따나에서 이만명의 수행승들에게 설법하여 베나레스의 왕인 끼낀에게 네 가지 생필품을 받았다. 한편 베나레스의 한 남자가 전단나무의 심재를 캐러 산으로 갔다가 고행자 띳사를 만났는데 그는 깟싸빠 부처님이 출현한 소식을 전했다.

 

띳사는 그 부처님이 비린 것인 물고기와 고기를 먹는지 궁금했는데 먹는다고 하자 바라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실망했다. 그러나 직접 알아보고자 깟싸빠 부처님이 계신 이시빠따나를 찾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비린 것은 먹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깟싸빠 부처님은 탁발을 나가지 않고 승원에 머무르자 왕 끼낀이 와서 직접 공양을 바쳤는데, 고기요리가 든 죽을 올렸다. 띳사는 고기를 먹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부처님이 고기를 드는 것을 보고는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 놓고는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질문한 것이 이경의 시작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첫 세 시는 띳사가 지은 것이고 아홉 개의 시는 깟싸빠 부처님의 것이고 나머지 두 개는 편집자에 의한 것이다.

 

 

1.[바라문 띳사]

“야생 수수, 풀씨, 야생 고산지대의 콩,

잎의 열매, 넝쿨 열매, 선한 법으로 얻어진 것을 먹으면서

감각적 욕망의 쾌락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2. 잘 준비되고 화려하게 요리된 것,

다른 사람이 주거나 선물한 맛있는 것,

쌀밥과 같은 음식을 즐긴다면,

오 깟싸빠여, 그는 비린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의 친척인(*1) 그대는

새의 고기를 훌륭하게 요리해서 함께 쌀밥을 즐기면서도

‘나는 비린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 깟싸빠여, 그 뜻을 그대에게 묻건대

‘그대가 말한 비린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주해(*1)

바라문은 하느님의 친척이다. 이는 깟싸빠가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4.[붓다 깟싸빠]

“살생하고, 학대하고, 자르고, 묶는 일,

도둑질, 거짓말, 사기와 속이는 일,

가치 없는 공부,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5.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을 자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하고, 부정한 것과 어울리며(*1),

허무하다는 견해를 갖고, 바르지 못하고(*2), 교화하기 어려우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주해(*1)

여러 가지 방식의 잘못된 생활을 조건으로 형성된 부정한 존재와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주해(*2)

‘바르지 못한 신체적 행위들을 갖춘’이란 뜻이다.

 

 

6. 거칠고 잔혹하며,(*1) 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무자비하며,

몹시 오만하고 인색해서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7. 성내고, 교만하고, 완고하고, 적대적이고,(*2)

속이고, 질투하고, 호언장담하고,(*3)

극히 오만하고, 사악한 자들을(*4) 가까이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주해(*1)

‘자신을 학대하는 고행과 관련된’의 뜻이다.

 

주해(*2)

‘반대 입장에 서서’라는 말이다.

 

주해(*3)

‘자신을 칭찬하는 것’을 말한다.

 

주해(*4)

‘참사람이 아닌 자들과 함께’라는 뜻이다.

 

 

8. 악행을 일삼고, 빚을 갚지 않고, 중상하며,

재판에서 위증을 하고, 정의를 가장하며,

이 세상에서 죄과를 범하며 비천하게 행하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9.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하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10. 사람들이 뭇 삶들에게 욕심내고, 적대적이고 공격적이고(*1),

항상 그런 일에 바쁘고, 죽어서는 암흑에 이르며,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지옥에 떨어지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

 

 

주해(*1)

욕심을 낸다는 것은 인색함으로 대한 다는 것이고, 적대한다는 것은 성냄으로 대한다는 것이고, 공격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으로 공격한다는 것이다.

 

 

11.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나, 단식하는 것이나,

벌거벗거나, 삭발하거나, 상투를 틀거나(*1),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거친 사슴 가죽을 걸치는 것도,

불의 신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를 얻기 위해 많은 고행종류의 고행(*2),

진언을 외우거나, 헌공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계절에 따라 행하는 수련도(*3)

모두 의혹을 뛰어넘지 못한 사람을 청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12.욕망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수호하고, 감관을 제어하며 유행하십시오,

진리에 입각해서(*4) 바르고 온화한 것을 즐기고,

집착을 뛰어넘어서 모든 고통을 버려버린 현명한 님은

보여지고 들려진 것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주해(*1)

한역에서는 나계라고 하는데, 머리카락을 묶고 소라의 돌기처럼 만드는 것인데, 아마도 소라처럼 청정한 것을 상징했던 것 같다.

 

주해(*2)

不死 얻기 위해 준수해야하는 쭈그리고 앉기 등과 같은 매우 심한 고행을 말한다.

 

주해(*3)

여름에 뜨거운 곳에서 수련, 우기에 나무 밑에서 수련, 겨울에 찬물에 들기 수련을 말한다.

 

주해(*4)

‘성스러운 길을 통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 에 입각해서’의 뜻이다.

 

 

13.[송출자]

“이처럼 그 뜻을 세존께서는(*1) 거듭 말씀하셨으니,

지혜의 피안에 도달한 사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비린 것을 떠나 걸림이 없이(*2)

우리를 이끄는 해탈하신 님께서는 여러 싯귀로써 설하셨습니다.

 

14. 깨달은 님께서 훌륭하게 가르치신 말씀,

비린 것을 떠나 모든 고통을 제거한 말씀을 듣고,

겸허한 마음으로 이렇게 오신 님께 절하고,

그 자리에서 출가할 것을 청원(*3)했습니다.

 

 

주해(*1)

여기서는 과거불인 깟싸빠 부처님을 말한다.

 

주해(*2)

‘갈애와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의 뜻이다.

 

주해(*3)

깟싸빠 부처님은 바라문 띳사의 청원에 ‘오라, 수행승이여’이라고 그를 받아들였다.

 

 

아마간다의 경이 끝났다.

 

 

(아마간다경-Amagandha sutta- The Smell of raw flesh, 숫따니빠따 Sn2.2, 전재서님역)

 

  아마간다의 경(Sn2.2).docx  아마간다의 경(Sn2.2).pdf

 

 

 

 

 

 

 

offering food

 

 

 

최근 조계종 총무원에서

 

최근 조계종 총무원에서 타종단에서 배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진각종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를 전하는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진각종의 모든 심인당에서 매일 오전과 오후 공식불사(법회)를 빠짐없이 진행한다. 정사와 정수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반드시 매일 3시간 이상 삼밀관행수행을 해야 한다. 음주흡연을 일체 금하고 불공기간 중에는 육식도 금하고, 신도들이 수입 가운데 10%를 보시할 때 스승은 자신의 월급 20%를 반드시 희사(보시)한다.”

 

(스승은 술-담배 안하고 매일 3시간 수행-보시 실천, 불교닷컴 2012-03-15)

 

 

수행자들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육식도 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술과 담배, 육식을 하지 않겟다고 서원하는 것을 보니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 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가불자에게 술과 담배와 고기는

 

술과 담배, 육식은 참으로 끊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세상 모든 것과 인연을 끊고 오로지 수행정진에만 몰두 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술과 담배, 육식은 필요 없는 것일지 몰라도, 끊임없이 세상사람들과 부딪치며 부대끼며 살아야만 하는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 때로 술과 담배, 육식은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공양을 받지 않는 재가불자는 스스로 벌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과 부양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런 노동은 크게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으로 나뉜다.

 

특히 육체적 노동을 함에 있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데 때로 육식을 하게 되고 때로 술을 마시게 된다. 그래서 고기의 힘으로, 술의 힘을 빌어 일을 빨리 끝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먹는 고기와 술은 사치와 향락이라기 보다 음식에 더 가깝다.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해소할 길이 없다. 이럴 때 쉽게 찾게 되는 것이 담배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되어 대책회의를 하게 되었을 때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토론해 보지만 결론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때 담배 한대 물고 폐 끝까지 빨아 드리면 머리끝까지 올라온 스트레스가 스르르 내려가기도 한다. 이렇게 자기자신을 태워가며 하루 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중생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술과 담배와 육식은 필요악이다. 그것이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그런데 살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농업이나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살생대열에 가담하기도 한다. 더구나 도살업과 같은 직종을 가졌을 때 매일 하는 일이 살생업을 짓고 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살생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육식과 살생업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금하고 있다. 특히 살생업은 어떠한 경우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육식과 살생업에 대하여 독특한 논리를 펴는 법문을 들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조계종 원로의원 스님의 법문이다.

 

 

아마 사찰에서 여러분도 이렇게 절에 오셨으니까 계를 받으시라고 많이 할 것입니다. 오계를 받아라 하고, 스님네는 십계를 받고, 비구는 이백여개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첫 번째가 불살생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살생하지 말라. 내가 이것에 대하여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니까 스님네가 고기 좀 먹는 것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 잘못된 것 입니다. 아시겠어요. 인도에서는 그 당시 육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와 가지고 도가에서는 육식을 하게 되면 피가 탁해지니까 수행자로서는 피가 탁해지면 정신적으로 흐려지기 때문에 안먹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해서 금지를 한 것입니다.”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163 OO스님(조계종 원로위원), 불교TV 2009-11-05)

 

 

스님은 육식 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삼지 않아도 좋다는 취지로 법문하였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육식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는데, 다만 중국에서 도교의 영향으로 불가에서 육식을 금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전통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출가자는 육식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는 대로 먹는 탁발

 

스님의 법문은 숫따니빠따 아마간다경에 실려 있는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아마간다경에서 깟사빠 부처님 시대에 부처님은 육식을 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깟사빠 붓다는 육식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주는 대로 먹는것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탁발음식이 채식일 수도 있고 때에 따라 육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려먹을 형편이 못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식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은 바라문을 향하여 진짜 비린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진짜 비린 것은 살생하고, 학대하고, 자르고, 묶는 일, 도둑질, 거짓말, 사기와 속이는 일, 가치 없는 공부,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일 등이 비린 것이지 육식하는 것 자체가 비린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탁발에 의존하는 고대인도의 환경에서 당연한 말이라 생각된다.

 

파리 한마리 죽였다고 난리법석을

 

하지만 불교TV에서 법문한 스님은 아마간다경에서와 같이 진짜 비린 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 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스님은 육식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살생에 대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그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와서도 그렇게 됐는데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살생에 대하여 내가 설명을 해 드리지요.

 

한번 저보다 지식이 많은 분들이 들으시면 잘 아실 겁니다. 파리 한 마리 죽였다면 살생했다고 해서 야단법석이라, 또 배암 한마리 죽였다면 또 살생했다 야단이라. 그게 아닙니다. 축생보를 받고 있으면 그 축생보를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살생이라는 것은 나쁜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163 OO스님(조계종 원로위원), 불교TV 2009-11-05)

 

 

스님은 살생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 한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쁜 생각으로 살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파리한마리, 뱀한마리 죽이는 것에 대하여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오히려 파리한마리, 뱀한마리 죽여 주는 것이 축생과보를 면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축생과보를 면하게 해주는

 

이런 류의 설명에 대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부처님은 오계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살생을 하지말아야 하는데,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약간 다르다. 이어지는 스님의 법문은 다음과 같다.

 

 

이 공기에도 생명체가 무한히 많이 있습니다. 물에도 생명체가 많아요. 내가 공기를 안마실 수 없잖아요. 물을 안마실 수 없잖아요. 또 길을 걸어가는데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많은 거에요.

 

그런데 내가 밝고 댕겨요. 다만 불살생이라는 것은 내가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되면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인연으로서 생명체가 좋은 인연이 되서 그 생명체가 다음에 불가에 인연이 되서 득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체에 대하여 나쁜 생각을 가지면 나쁜 인연이 돼요. 그래서 악순환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163 OO스님(조계종 원로위원), 불교TV 2009-11-05)

 

 

스님은 법문에서 나쁜 생각을 가지고 살생하는 것은 문제 될 수 있지만 좋은 생각으로 살생하는 것은 오히려 생명체가 득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 예로서 일본의 어느 선사의 일화를 들려 주었다.

 

어느 날 일본절의 조실스님이 길을 가다가 뱀을 발견하고 피해갔는데, ‘관조선사는 돌맹이를 들어 뱀을 죽였다고 한다. 그날 관조선사는 꿈을 꾸었는데 뱀이 나타나 죽여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뱀은 지은 업에 따라 뱀의 과보를 받았는데 이제 뱀의 과보에서 벗어나 다음 생에 수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스님이 강조한 것은 살생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나쁜 생각을 가지고 살생하는 것은 안되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살생하는 것은 해도 괜찮다는 뉘앙스이었다.

 

이렇게 살생에 대하여 두 개의 관점을 적용해도 되는 것일까. 죽였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 없는 데 어느 경우는 되고, 어느 경우에는 되지 않는다면 그 기준이나 판단을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장자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1, 전재성님역)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docx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pdf

 

 

 

초기경에서 가려서 죽이라는 말은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현생에서도 괴롭고 내생에서도 괴로울 것이라 한다. 살생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도 괴롭고 그 과보로 인하여 다음생에서도 역시 괴로움에 처할 것이라 한다.

 

모기잡는 잠자리채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살생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수행자들이 절대로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좋은 예를 수행처에서 보았다.

 

어느 여름날 모기가 극성을 부리던 때 어느 수행처에 법당에 잠자리채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이 어느 용도인지 몰랐으나 나중에 안사실은 모기채라는 것이다. 모기를 산채로 잡아 죽이지 않고 잠자리채로 잡아 방면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살생에 대한 예는 미얀마의 수행처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수행처나 숙소에서 도마뱀이 기어 다녀도 결코 죽이는 법이 없다고 한다.

 

고기와 술은 페어(pair, )’

 

가지고 있는 자료중에 비구계와 비구니계에 대한 항목이 있다. 항목을 들여다 보니 고기먹는 것을 금하는계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수행자들에게 육식이 정당화 될 수 없다.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면 필연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 육식이라는 것이 노동을 할 때 힘을 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 본다. 스스로 벌어서 살아가야 하는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 육식은 허용되어도 무방하지만 노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 매진 하는 수행자들이 고기 먹는 것에 대하여 정당하다고 이야기 한다면 재가불자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고기와 술은 페어(pair)’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기가 있는 곳에 술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된 노동 끝에 맛보는 술 한잔은 다음 일을 하는데 있어서 활력소가 되고, 한 점의 고기는 힘든 육체노동을 감내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자에게 있어서 지나치지만 않다면 술과 고기는 음식이고 때에 따라 보약이라고 볼 수 있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출가수행자들이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 육식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생은 정당화될 수 없다

 

살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 축생의 과보를 면해 주기 위해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살생하는 것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보를 면해 주기 위한 타불교 전통의 견해는 어떠할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 테라와다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전통의 불교에서는 축생과보를 면해 준다는 논리로 살생을 정당화 하고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행위이다.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먹고 싶고

 

탁발하였을 때 육식하는 것은 문제 되지 않을 수 있다. 탁발에 의존해야 하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가려서 먹을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곡식을 저장하여 놓고 음식을 조리하여 먹는 수행자라면 당연히 육식은 하지 말아야 한다. 철우스님의 컬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은 “말세에 수행하는 이들이 목숨을 버리더라도 마다하지 않고 추구해야 할 세가지 일이 있다. 바로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먹고 싶은 일이다. 이 모두를 끊어야 한다”고 하셨다.

 

(철우스님, 법보신문, 사찰음식 ‘대박났다’ )

 

 

율사로 잘 알려져 있는 철우스님의 글에 따르면 수행자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다면 수행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고기를 먹는다면 이를 수행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출재가 공통항목은

 

부처님은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부처님 당시에 주는 대로 먹었다. 다만 비린내 나는 육식을 먹는 것에 문제삼기 보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라고 하였다. 즉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행위, 감각적 쾌락을 쫒아 잘못된 음행을 하는 행위, 거짓말, 이간질, 악담, 잡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이런 것을 문제 삼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니라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 등이 더 비린 것이 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노동을 하며 살아 가야 하는 재가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계만 준수한다면 때에 따라 육식은 정당화 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을 하지 않는 출가수행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육식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런데 재가자나 출가자 모두에게 적용 될 수 있는 공통적인 항목은 어떤 이유로서든지 살생은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012-03-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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