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온통 세상이 달라져 보여, 부정과 긍정의 언표로 묘사된 닙바나(열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6. 11:51

 

 

온통 세상이 달라져 보여, 부정과 긍정의 언표로 묘사된 닙바나(열반)

 

 

 

 

 

아지따경

(Ajita sutta-Questions of the young man Ajita-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S5.2)

 

 

1. [존자 아지따]

“세상은 무엇으로 덮여있습니까?

세상은 무엇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까?

세상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커다란 공포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2. [세존]

“아지따여, 세상은 무명에 덮여있습니다.

세상은 탐욕과 방일 때문에 빛나지 않습니다.

갈망이 더럽히는 것이며,

괴로움이 그 커다란 공포라고 나는 말합니다.

 

3. [존자 아지따]

“흐름은(*1)

어느 곳에나 흐르고 있습니다.

흐름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흐름을 제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흐름은 어떻게 그쳐집니까?

 

4. [세존]

“아지따여,

세상에서 어떠한 흐름이든지

마음챙김(sati)을 확립하는 것이 흐름을 막는 것이고,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흐름은 지혜로 인해(*2) 그쳐지는 것입니다.

 

 

주해(*1)

Prj 586에 따르면 ‘모든 형상 등의 감각의 장 가운데 갈애 등의 흐름’을 말한다.

 

주해(*2)

Prj 586에 따르면 ‘물질 등에 대한 무상 등의 통찰을 포함하는 길에 대한 지혜로 ’라는 뜻이다.

 

 

5. [존자 아지따]

“존자여, 지혜, 마음챙김과 더불어 명색은(*1)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와 같이 여쭈니 말씀해 주십시오.

 

6. [세존]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주해(*1)

‘여기서 소멸해야하는 대상이 명색이지

지혜와 마음챙김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에 대하여 유가사지론 19권에서

염혜여명색 금문시일체 하당영멸진 유원위아설

(念慧與名色 今問是一體 何當永滅盡 唯願爲我說)이라고

한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숫타니파타의 이 전승은 올바른 것이다.

 

prj 586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은 이 시의 다음 시에서

‘의식이 소멸할 때 명색이 소멸한다’는 사실만을 말한 것은

지혜와 마음챙김이라는 것은 명색 즉, 정신 신체적인 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7. [존자 아지따]

“ 이 세상에는

진리를 헤아린 자들도 있고,(*1)

여러 학인들도 있습니다.

존자여, 그들의 행동양식에 대하여 여쭈오니

현명한 님으로서 말씀해 주십시오.

 

8. [세존]

“감각적 쾌락을 탐해서는 안 되며,

정신이 혼란되어서도 안 됩니다.

수행승은 모든 가르침에 숙달하여(*2)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유행하여야 합니다.

 

 

주해(*1)

 prj 587에 따르면,

‘무상 등에 대해서 철저히 성찰된 가르침을 지닌 자들’을 의미한다.

 

주해(*2) prj 587에 따르면,

‘무상 등으로 모든 조건 지어진 것 등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이 끝났다. -

 

 

(아지따경-Ajita sutta-Questions of the young man Ajita-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5.2,전재성님역)

 

아지따경(S5.2).docx  아지따경(S5.2).pdf

 

 

 

 

Bodhi Tree

 

 

 

숫따니빠따의 4장과 5

 

일반적으로 숫따니빠따는 고층에 속하는 경전이라 한다. 상윳따니까야 등과 더불어 고층군의 경전으로 분류되는 숫따니빠따는 모두 55개의 경에 1.149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1장 우라가왁가(raga Vagga)의 외뿔소경(Khaggavisāna Sutta)과 마지막 두장 즉, 4(Aṭṭhaka Vagga) 5(Pārāyana Vagga)의 경우 경우 닛데사에 완벽한 주석이 있을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정된 경전이라 한다.

 

이런 숫따니빠따의 원형은 부처님 재세시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데, 경의 내용이 다른 니까야에 그대로 사용되어 있기도 하다.

 

 

숫따니빠따의 문체를 보면 고층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많은 수식이나 설명을 하지 않았어도 단순하고 소박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불교에 매료된 어떤 이는 개인적으로  숫따니빠따의 4장과 5장을 가장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의 직접적인 음성에 가깝고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이 명료하게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학인 아지따가

 

숫따니빠따 5장 빠라야나왁가(Pārāyana Vagga)에 아지따경(Ajita sutta, S5.2)이 있다. 부처님의 제자 아지따와 부처님과의 대화에 관한 것이다.

 

아지따는 학인이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우려는 젊은 수행승이다. 그런 아지따는 부처님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보는 것으로 경이 시작되는데 그 때마다 부처님은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이런 점은 선불교에서 스승과 제자사이의 선문답과 다른 것이고, 으로 표현되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학인 아지따가 부처님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존자여, 지혜, 마음챙김과 더불어 명색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와 같이 여쭈니 말씀해 주십시오.

 

 

학인 아지따가 질문한 것은 열반에 대한 것이다. 열반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빠알리어와 영어를 곁들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Yameta pañha apucchi,     야메땅 빠냥 아뿟치

ajita ta vadāmi te;         아지따 땅 와다미 떼

Yattha nāmañca rūpañca,       얏타 나만짜 루빤짜

asesa uparujjhati;          아세상 우빠룻자띠

Viññāassa nirodhena,         윈냐낫사 니로데나

ettheta uparujjhati         엣테땅 우빠룻자띠

 

 

 “아지따여,

그 질문한다면, 그대에게

명색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 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

 

(아지따경-Ajita sutta-Questions of the young man Ajita-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5.2,전재성님역)

 

 

Ajita, when this question is asked I tell you,

How name-and-matter gets destroyed remainderlessly

When consciousness ceases, it gets destroyed.

 

 

부처님은 아지따에게 의식이 없어지면 명색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의식은 빠알리어 윈냐나(Viññā)’로 표시 되었다. 오온에서 색수상행식 할 때의 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식은 무엇을 말하는가.

 

찟따(citta, ), 마노(mano, ), 윈냐나(vinñāa, )

 

초기불교에서 마음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표현된다. 찟따(citta, )와 마노(mano, )와 윈냐나(vinñāa, )이다. 여기서 찟따()는 마음을 표현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윈냐나()는 감각대상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데 아는 마음이라고 한다.

 

마노()의 경우 감각기관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안이비설신의 할 때 의가 바로 마노를 말하는데, 이때 마노는 마음의 문으로서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보는 것이다.

 

게송에서 윈냐나(의식)가 없어지면 명색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때 윈냐나는 아는 마음을 말한다. 아는 마음이 없어짐에 따라 명색이 없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때 명색은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āma-rūpa)’를 말한다.

 

명색(名色)이란

 

나마-루빠에서 루빠는 물질을 말하는데, 나마(nāma, )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 법문집에 실려 있는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나마(nāma)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을 제외한 느낌(), 표상(), 행(), 식()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이라 하고, 영역은 mind, mentality라고 한다.

 

이렇게 찟따와 마노는 엄밀히 따지면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긴 하지만,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찟따, 마노, 윈냐나를 같은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Dhs.10; Vbh.87 )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찟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주석서, 김한상님 역)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나마는 물질()을 제외한 수상행식을 총칭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정신으로 번역된다. 게송에서 의식(윈냐나)가 없어지면 명색(나마-루빠)가 소멸된다고 하였는데 물질()과 더불어 수상행식()도 함께 소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수상행은 마음부수이다. 게송에서 학인 아지따가 말한 지혜(pañña)와 마음챙김(sati)이 마음부수에 포함된다.

 

여기서 마음부수란 빠알리어로 쩨따시까(cetasika)라 하는데,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쩨따시까(마음부수)는 마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도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열반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은

 

이렇게 부처님은 학인 아지따의 질문에 대하여 ‘아는 마음(식, 윈냐나)’이 사라지면 명색이 사라진다고 하여 열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열반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은 없을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열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아마도 수다원의 도과는 오로지 수다원 도로 성취되는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의 소멸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열반은 불선의 부분적인 소멸도 아니요, 정신과 물질 법의 어느 일부분만의 소멸도 아니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는 아주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실상, 열반은 번뇌(kilesa), (kamma), 과보(vipāka)라는 세 가지 바퀴(vatta)의 완전한 소멸을 말하고, 모든 정신과 물질의 행, 형성된 모든 것이 완전히 소멸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는 무엇을 대상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성스러운 도는 열반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열반이란 방금 설명한 대로 조건 지워진 모든 정신(nāma)과 물질(rūpa)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얻는 순간에는 오직, 감각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의 소멸만이 인지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로 지켜본 것을 사실에 입각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마하시야도의 초전법륜경-꼰단냐 존자.docx  마하시야도의 초전법륜경-꼰단냐 존자.pdf

 

 

 

열반은 부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라 하였다. 수다원의 경우 아직 번뇌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체험하는 것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의 열반과 똑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런 열반에 이르는 길은 아는 마음 즉, 윈냐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 과정은 어떤 것일까.

 

몸과 마음이 없어지면

 

이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하고 있는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다.

 

 

왜 도와 과를 나누어서 말하는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반으로는 들어간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에 들면 의식이 없습니다.

 

열반은 특수한 정신적 상태이기 때문에 들어가도 들어간 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이 상태에서는 몸의 자세가 바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좌선 중에 혹은 좌선이 끝난 후, 몸의 자세를 보라고 하는 이유는 다 열반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이라고 보면 됩니다.

 

집중의 상태에서는 몸의 자세가 바릅니다. 그리고 호흡이 있다가, 마음이 있다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보다가, 마음마저 없어지는 열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 열반이라는 것은 그 과정만으로 볼 때는 그렇게 간단합니다. 몸과 마음이 없어지면 열반입니다.

 

(묘원법사, 도(道) 과(果))

 

  도(道)와_과(果)-묘원법사.doc  도(道)와_과(果)-묘원법사.pdf

 

 

 

묘원법사는 몸과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이 열반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아지따 학인에게 말씀 하신 아는 마음이 사라지면 명색 또한 없어진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열반에는 어떻게 들어가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열반으로 대상으로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라 하였다. 그리고 아는 마음조차 사라졌을 때 열반에 든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묘원법사의 설명에 따르면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사념처 수행에 있어서 심수심법이라 한다.

 

열반에 이른 자는 있어도 들어간 자는 없다

 

열반에 들게 되면 그 상태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기(無記)’하였다. 무기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열반이라는 것이 아는 마음 조차 사라졌다면 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열반에 이른 자는 있어도 들어간 자는 없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열반은  그 순간의 정신적 상태이고 그 당시의 상황일 뿐이라고 묘원법사는 말한다. 그런 열반은 들어가도 또 들어가고 하여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반은 들어 가고 나오지만 그 중간은 의식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스승들은 들어갈 때의 상태와 나왔을 때 상태에 대해 질문합니다. 수행자는 들어가는 것밖에 모르고 나왔을 때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승들은 열반에 들어갔다, 아니다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 아만심이 생길까봐 인정을 안 합니다. 수행은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니까 그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실제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묘원법사, 도(道) 과(果))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선불교 전통과 매우 비교되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음을 인가해 주는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열반에 들었다 나왔음을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은 아만심때문이라 한다. 만일 제자가 수다원임을 인가해 주면 그는 항상 내가 수다원인데!” 하는 아상(我相)’이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득도 하였다고 떠 벌리고 다니는 자들은 실제로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설명된 열반

 

일반적으로 열반이란 탐진치 소멸된 상태라 말한다. 이는 일시적이든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하여 놓았을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하여 표현된 경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상윳따니까야에 표현된 열반

No

   

 

1

[하늘사람]

"무엇이 세상을 얽매고 무엇이 그 걸음걸이입니까?

무엇을 떠남으로써 열반이라고 부릅니까?"

[세존]

"즐거움이 세상을 얽매고 간절이 찾음이 그 걸음걸이네.

갈애를 떠남으로써 열반이라고 부르네."

Tahāya vippahāena nibbāamiti vuccatīti.

 

상윳따니까야

하늘사람 상윳따

얽맴경(Sayojanasutta)

 

2

[세존]

"슬기를 갖춘 영웅은 항상 선정을 즐기면서 참선하네.

목숨에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으로 정진하네.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

고디까경(Godhikasutta)

 

3

[제석천]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이네.

생겨나고 소멸되는 것 그것을 고요히 함이 행복이네."

 

상윳따니까야

브라흐마상윳따

완전한 열반경

( Parinibbāasutta)

 

 

4

[아누룻다]

"확고한 믿음을 지닌 완전한 분에게 들숨도 날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네.

욕망이 없는 고요함을 성취하여 눈 있는 자는 완전한 열반에 드셨네.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그 분의 마음은 참으로 해탈되었네."

Nāhu assāsapassāso hitacittassa tādino,

Anejo santimārabbha cakkhumā parinibbuto

Asallīnena cittena vedana ajjhavāsayi,

Pajjotasseva nibbāa vimokkho cetaso ahūti.

 

상윳따니까야

브라흐마상윳따

완전한 열반경

( Parinibbāasutta)

 

 

 

 

초기경에서 열반에 대한 내용을 보면 갈애의 소멸로 되어 있다. 갈애가 떠나고 뿌리채 뽑힌 상태, 그리고 마치 등불이 꺼진 것처럼 고요한 상태를 열반으로 묘사하고 있다.

 

열반을 더 실감나게 묘사한 경

 

그런데 열반을 더 실감나게 묘사한 경도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열반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띳싸여,

예를 들어 두 사람의 남자가 있는데 한 남자는 길을 잘 알지 못하고 한 남자는 길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저 길을 잘 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면 '여보시오, 그 길은 이와 같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이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두 길이 나타난다.그러면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총림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 라고.

 

띳싸여, 이 비유를 설한 것은 그 의미를 시설하기 위한 것이다.

 

띳싸여,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띳싸여,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띳싸여, 두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의혹을 지칭한 것이다. 왼쪽 길은 여덟가지의 잘못된 길을 지칭한다. 곧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활, 잘못된 정진, 잘못된 새김, 잘못된 집중을 말한다. 오른쪽 길은 성스러운 여덟가지의 길을 지칭한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띳싸여, 커다란 총림이란 무명을 말하는 것이다. 커다란 깊은 늪지대란 감각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험준한 절벽이란 분노와 절망을 말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평원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띳사경-Tissa sutta- Venerable Tissa, 상윳따니까야 S21.2.4.2, 전재성님역)

 

  띳싸경(S21.2.4.2).docx  띳싸경(S21.2.4.2).pdf

 

 

 

부처님은 띳싸라는 경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여행하면서 지나는 무명을 총림(叢林)에 비유하고, 탐욕을 늪지대에 비유하고, 분노와 절망을 절벽에 비유하고, 풍요로운 평원을 ‘열반’에 비유했는데, 탐진치에 대한 이 보다 탁월한 비유는 동서고금을 두고 찾기가 힘든 내용이라고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말했다.

 

아뱌까따상윳따(Abyākata Sayutta, 무위상윳따)

 

이처럼 열반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부처님은 설명하였는데, 그런 열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없다. 몸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고 아는 마음도 사라졌으니 그 경계가 어떤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열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상윳따니까야의 아뱌까따상윳따(Abyākata Sayutta, 무위상윳따)가 그것이다.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무위상윳따는 열반에 관한 44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열반에 이르는 다양한 수행방법과 열반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묘사가 설명되어 있다고 하였다.

 

부정적 묘사가 더 설명하기 쉬운 것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묘사할 때 긍정적 묘사 보다 부정적 묘사가 더 설명하기 쉬운 것이라 한다. 예를 들어 신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는 긍정적 묘사보다는 어떠어떠하지 않다고 말하는 부정적 언사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열반에 대하여 부정적 묘사를 통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긍정적 묘사로도 열반을 설명하였다.

 

부정적 언표와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부정문과 긍정문을 사용하여 열반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표로 만들었다. 해제글을 참고 한 것이다.

 

 

부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No

 

    

1

무위(無爲 asankhata)

이것은 모든 조건지워진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2

무루(無漏 anasavam)

세가지의 번뇌 즉 감각적 쾌락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3

불로(不老 ajaram)

열반은 늙음의 조건이 소멸된 상태이다. 그에게는 자아에 의해 집착되지 않은 존재의 다발의 변화만이 있을 뿐이다.

4

무견(無見 anidassana)

‘볼 수 없는’의 뜻이 아니라 ‘지시하지 않은’의 뜻으로, 나의 소유는 조건적인 세계를 지시하므로 아라한은 그러한 세계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5

무희론(無戱論 nippapanca)

열반은 일체의 희론, 사견희론(邪見戱論)이나 정견희론(正見戱論)을 모두 떠나 있다.

6

무재난(無災 anitika)

열반 속에는 해침을 당할만한 자아의 세계가 없다.

7

무재난의 상태(無災法 anitikadhamma)

열반의 무위법에는 조건지어지는 재앙이 존재할 만한 유위법적인 상태가 없다.

8

무에( avyapajjha)

열반은 분노가 소멸한 상태이다.

9

사라짐(離貪 viraja)

열반은 탐욕이 소멸한 상태이다.

10

불사(不死 amata)

아라한의 일상적인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불사이며 다만 목숨이 다할 때에는 존재의 다발의 짐을 내려놓을 뿐이다.

11

갈애의 소멸(愛盡 tanhakkhaya)

열반에는 모든 종류의 갈애, 즉 감각적 쾌락에의 갈애, 존재, 비존재의 갈애가 소멸되어 있다.

12

무착(無着 analayo)

갈애나 집착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다음은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에 대한 설명이다.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No

 

    

1

(終極 antam)

아라한에게 해야 할 것은 모두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의 상태가 아닌 것을 말한다.

2

진리(眞諦 saccam)

아라한의 인격 속에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최상의 궁극적 진리를 의미한다.

3

피안(彼岸 para)

피안은 윤회의 고통스런 세상을 건넜다는 의미를 지닌다.

4

극묘(極妙 nipuna)

성취된, 세련된의 의미로, 열반은 다듬어지지 않은 개념적 사유로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현자의 지혜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다.

5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極難見 sududdasa)

조건지워진 사유의 근본구조를 초월하여 무지와 갈애가 소멸된 열반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6

견고함(堅固 dhuva)

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조건지워진 세계로의 환원은 있을 수 없다.

7

비추어봄(照見 apalokita)

열반을 체험한 아라한에게는 자아를 위한 세계는 있을 수 없으며 세계를 떠나서 조견한다.

8

적정(寂淨 santa)

조건지어진 것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세계를 주장하는 적정은 있을 수 없다.

9

탁월함(勝妙 panita)

열반의 체험은 조건지워진 삶의 세계를 초월함으로써 성취되는 가장 탁월한 체험이다.

10

지복(至福 siva)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최상의 지복을 체험한다.

11

안온(安穩 khema)

나의 세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상과 변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가 소멸된 열반은 안온한 세계이다.

12

아주 놀라운 것(希有 acchariya)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체험은 윤회하는 존재들 사이에 매우 드문 일이다.

13

예전에 없던 것(未曾有 abbhuta)

열반은 생성과 소멸이 끝없는 윤회의 과정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증유의 체험이다.

14

청정(淸淨 suddhi)

모든 염오의 소멸을 의미한다.

15

해탈(解脫 mutti)

열반은 완전한 해탈을 의미한다.

16

( dipa)

윤회의 바다의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함을 뜻하는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 는 부처님의 유교는 결국 열반을 성취하라는 말로 귀결된다.

17

동굴(洞窟 lena)

열반의 상태는 모든 유해한 숲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와 같다.

18

피난처(避難處 tana)

열반의 체험은 번뇌의 폭류나 마군으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발견한 것과 같다.

19

귀의처(歸依處 sarana)

열반은 곧 윤회의 고통 속에 헤매는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된다.

20

구경(究竟 parayana)

열반의 체험은 열반을 구경으로 하게끔, 아라한을 운명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표를 보면 열반이라는 것이 단지 갈애가 소멸된 상태 또는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열반은 불교의 목표이고 이 생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열반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몸을 가지고 성취해야 한다고 법사들은 말한다.

 

온통 세상이 달라져 보여

 

이렇게 부정적 언표와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 보다 더 쉽게 설명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눌라스님의 음성법문(위빠사나 16단계 도와과, http://cafe.daum.net/kalyanamitta)에 있다. 아눌라 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무엇이 일어 났는지 자기는 잘 모른다. 그런데 뭔가 일어 났는지는 모르는데 거기서 깨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아기가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다.”

 

 

아눌라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마치 새로 태어난 아기와 같은 상태라고 묘사하고 있다. 열반에 들었다 나와 보니 온통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는 것이다. 마치 비갠후에 보는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보는 듯하는 것이다.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이다. 거기에 그 어떤 미움이나 질투 등 해로운마음이 없어서 모두가 정답고 정겨워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번뇌가 소멸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이제까지 보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는 말과 같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열반은 갈애로 인한 탐진치로 불리는 번뇌가 소멸된 상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2012-03-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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