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퇴전의 승리를 위하여!”승리자 부처님과 십호(十呼)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4. 19:59

불퇴전의 승리를 위하여!”승리자 부처님과 십호(十呼)

 

 

 

초기경전을 보면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승리자에 대한 용어도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승리는 무엇에 대한 승리이고 승리자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승리에 대한 게송을 보면

 

먼저 승리에 대한 것을 초기경에서 찾아 보았다. 그 중 다음과 같은 게송이 눈에 띄었다.

 

 

Jaya vera pasavati dukkha seti parājito,
Upasanto sukha
seti hitvā jayaparājayanti.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이루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

 

“Victory gives birth to enmity, the defeated sleep unpleasantly,
The appeased, giving up victory and defeat sleep pleasantly.”

 

(Pahamasagāmasutta, 전쟁에 관한 두 이야기, 상윳따니까야 S3.2.4, 전재성님역)

 

 

꼬살라상윳따에 승리에 대한 이야기 등장한다. 그런데 이 게송은 매우 익숙하다. 법구경에서도 비슷한 게송이 있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Jaya vera pasavati     자양 웨랑 빠사와띠

dukkha seti parājito     둑캉 세띠 빠라지또

upasanto sukha seti      우빠산또 수깡 세띠

hitvā jayaparājaya.      히트와 자야빠라자양.

 

승리자는 원수를 얻고

패배자는 고통 속에 살아간다.

승리도 패배도 모두 버리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라.

 

(담마빠다 Dhp201)

 

 

여기서 승리라는 단어가 빠알리어로 자야(Jaya)’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을 보면 비슷한 내용이 중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더 고층의 경전은 어떤 것일까.

 

승리는 원한을 부르고

 

일반적으로 상윳따니까야는 고층의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가 4군을 무장시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을 공격하기 위해서 까씨로 쳐들어왔다.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가 4군을 무장시켜 까씨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4군을 무장시켜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를 까시에서 맞이했다.

 

그리하여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와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싸웠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잣타쌋뚜가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을 이겼다. 싸움에 패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자신의 수도인 싸밧티로 돌아왔다.

 

그때 많은 수행승들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 싸밧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발우를 물리고 나서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얘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아서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잣타쌋뚜가 4군을 무장시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을 공격하기 위해서 까씨로 쳐들어왔습니다.

 

세존이시여,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가 4군을 무장시켜 까씨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4군을 무장시켜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잣타쌋뚜를 까시에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잣타쌋뚜와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자타쌋뚜가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에게 이겼습니다.

 

세존이시여,

싸움에 패한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자신의 수도인 싸밧티로 돌아왔습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마가다 국의 왕이며 베데히 왕비의 아들인 아잣타쌋뚜는 나쁜 벗, 나쁜 친구, 나쁜 동료를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비해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착한 벗, 착한 친구, 착한 동료를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은 오늘 패자로서 괴롭게 잠을 이룰 것이다.

 

 

승리는 원망을 낳고 패한 자는 잠을 못이루네.

이기고 지는 것을 버리면 마음 편히 잠을 이루네."

 

 

(Pahamasagāmasutta, 전쟁에 관한 두 이야기, 상윳따니까야 S3.2.4, 전재성님역)

 

 

전쟁에 관한 두 이야기경 (Pahamasagāmasutta)으로서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와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전쟁에서 아자따삿뚜가 승리하였지만 이는 원망만을 낳게 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게송과 유사한 법구경 201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어떤 내용일까. 5세기 스리랑카 붓다고사가 201번 게송에 대한 주석하였다는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게송 201

꼬살라 국왕의 패배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꼬살라국왕 빠세나디가 전쟁에서 자기 조카 아자따삿뚜에게 참패한 일과 관련하여 게송 201번을 설법하시었다.

 

아자따삿뚜(Ajarasatta)는 마가다 국의 빔비사라 왕과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의 여동생 위데히(Videhi) 왕비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여 자기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감옥에 가두어 굶어 죽이고 왕권을 잡을 정도로 거친 성품이었다.

 

그의 정복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아 후에는 자기의 외숙이 꼬살라의 바세나디 왕과도 전쟁을 벌여 까시까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영토를 확장했다.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은 자기 친 조카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하여 국토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자. 자기의 늙음과 기력의 쇠진함을 통감한 나머지 수치와 좌절의 번민에 빠졌다. 그는 비탄에 잠겨 중얼거렸다.

 

<, 얼마나 못난 일이냐! 젖비린내 나는 어린 것에게 패하다니! 차라리 내가 전쟁터에서 죽었더라면 이런 수치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게 아닌가!>

 

그날부터 왕은 음식을 거절하고 침상에 누워서만 지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마른 풀잎 들판에 불이 번지듯 부처님께도 전해졌다. 왕의 소식을 전해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남을 정복한 자에게는 증오와 원망이 뒤따르고, 남에게 패배한 자에게는 절망과 고통이 뒤따르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승리자는 원수를 얻고

패배자는 고통속에 살아간다.

승리도 패배도 모두 버리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라.

 

(법구경 201게송 인연담, 거해스님)

 

 

법구경 201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상윳따니까야에 전쟁에 관한 두 이야기경 (Pahamasagāmasutta)에 실려 있는 내용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경전이 더 고층에 속할까. 위 게송으로만 판단하였을 때 상윳따니까야가 더 고층으로 보인다.

 

초기경에서 승리에 대한 이야기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맛지마니까야나 숫따니빠따 등 다른 경전에 중복 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초기경에서 승리에 대한 이야기는 전쟁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에서 나타난 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경에서 승리에 대한 내용

No

    

초기경전

1

[고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모든 쾌락은 부서졌고 어두운 구성요소는 파괴되었네.

죽음의 군대에서 승리하여 번뇌 없이 나는 살아가네."

상윳따니까야

수행녀상윳따

고따미경(Gotamīsutta)

2

[방기싸]

"고따마의 제자여, 교만의 마음을 버리고 교만의 길을 결코 걷지 말라.

교만의 길에서 방황하는 자는 오랜 세월을 후회했다네.

위선으로 더럽혀진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니

오랜 세월에 걸쳐 괴로워하니 교만한 사람들은 지옥에 태어나네.

올바른 수행자, 바른 길을 가는 승리자인 수행승은 결코 슬프지 않네.

명예와 지복을 누리니 진실로 법락자(法樂者)라 일컬어지네.

마음의 황폐함이 없이 정진하여 장애를 제거하고 맑게 하며

교만함을 남김없이 없애고 지혜로 멸진하여 적정을 얻네."

상윳따니까야

방기사상윳따

페살라띠만냐나경(Pesalaatimaññanāsutta, 재능 있는 자에 대한 경멸경)

3

청정한 행의 승리자로서 장막을 벗겨버리고,

진리를 체득하고, 피안에 이르러, 동요하지 않고,

형성의 소멸에 대한 앎에 능숙하다면

그는 바르게 세상을 유행할 것입니다.

숫따니빠따 Sn2.13

삼마빠립바자니야경(

Sammāparibbājaniyasutta올바른 유행의 경)

4

[세존]

“사비야여, 모든 들판을 완전히 분별하여

하늘의 들판과 인간의 들판과 하느님들의 들판,

모든 들판의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면,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를 들판의 승리자라고 합니다.

숫따니빠따 Sn2.6

사비야경

(Sabhiya sutta)

 

 

 

승리한 내용을 보면 주로 번뇌와 싸워서 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말한다. 그런 수행자를 승리자라고 하였다.

 

여래십호에서 여래(tathagata)’라는 호칭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

 

한편 초기경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주목되는 것이 부처님과 관련된 ‘승리자’이다. 부처님을 승리자로 부른 것이다. 그런 부처님은 여러가지 호칭으로 불리웠다. 먼저 부처님의 호칭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을 부르는 칭호는 매우 많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여래십호’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 이렇게 한역 호칭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르는 명칭이 약간 다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열가지 호칭중에 여래(tathagata)’가 빠진다.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만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이 부처님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에 불수념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불수념할 때 여래라는 말을 사용하면 이상하게 되어 버린다. 이는 국왕이 짐이~”라고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신하들이 짐이~”라고 사용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부처님을 부르는 여러 명칭 중에 여래가 빠져 있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의 아홉가지 호칭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여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세존을 하나로 보아 세존이라 한다. 그래서 모두 아홉개의 호칭이 있는데 그 명칭은 다음과 같다.

 

 

1. 아라한(Arahan), 응공

2. 삼마삼붓다(Samma-­Sambuddha), 정등각자

3. 윗자짜라나삼판나(Vijja-carana-sampanna), 명행족

4. 수가따(Sugata), 선서

5. 로까위두(Lokavidu), 세간해

6. 아눗따라(Anuttara), 무상사

7.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arathi), 조어장부

8. 삿타데와마눗사남(Sattha devamanussanam), 천인사

9. 바가와(Bhagava), 세존

 

 

 

 

 

 

 

스리랑카 폴론나루와(polonnaruva)

 

 

 

빠알리어 자막버전 구공덕게(Nava Gua Gāthā)

 

 

음성

02-hymn-02.mp3 Nava Guna Gatha(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 6분 27초)

스리랑카출신 챈팅가 위사라드 스리마 라뜨나야까(Visarad Srima Ratnayaka)창송

 

구공덕게(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docx 구공덕게(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pdf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세존에 대하여 불과 세존으로 나누어 열가지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부처님 별칭 근거는

 

그렇다면 이와 같은 명칭은 어디서 근거한 것일까. 초기경을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itipi so

bhagavā

araha,

sammāsambuddho,

vijjācara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

satthā devamanussāna,

 buddho,

bhagavā"

ti.

 

 

[세존]

장자여,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에 대해 경험에 근거를 둔 청정한 믿음을 품고 있다.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1, 전재성님역)

 

 

 “Here householder, the noble disciple has unwavering faith in the Blessed one: That Blessed one is

worthy,

rightfully enlightened,

endowed with knowledge and conduct,

well gone,

knower of the worlds,

is incomparable tamer of those to be tamed,

Teacher of gods and men,

enlightened

and blessed.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docx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pdf

 

 

상윳따니까야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S12.5.1)에서 부처님의 호칭은 모두 열 가지이다.

 

경에 실려 있는 호칭을 보면 열 가지 인점에 있어서 북방대승불교와 같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여래(tathagata)’가 삽입되고 세존이 하나로 합쳐져서 불세존이 되어 모두 10가지 호칭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초기경에서 여래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불(buddho) 과 세존(bhagavā)이 나누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두 10가지 호칭이 있게 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테라와다불교의 준거틀이라 불리우는 10가지 호칭이 북방대승불교의 여래십호 보다 더 정확함을 알 수 있다.

 

호칭번역을 비교해 보니

 

부처님의 열가지 호칭에 대하여 우리말 상윳따의 번역자 전재성박사는 ‘아라한’을 ‘거룩한 님’ 등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은 또 다른 니까야의 번역자인 대림스님과 각묵스님과 비교해 보았을 때 다르다. 이들 호칭중 몇 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 호칭번역 비교표

No

부처님 호칭

한역

전재성박사

대림-각묵스님

1

아라한(Arahan)

應供

거룩한 님

아라한

2

삼마삼붓다(Samma-­Sambuddha)

正遍知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바르게 깨달으신 분

3

윗자짜라나삼판나(Vijja-carana-sampanna)

明行足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

4

수가따(Sugata)

善逝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피안으로 잘 가신 분

5

로까위두(Lokavidu)

世間解

세상을 아는 님

세상을 잘 아는 분

6

아눗따라(Anuttara)

無上士

위없이 높으신 님

가장 높으신 분

7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arathi)

調御丈夫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

8

삿타데와마눗사남(Sattha devamanussanam)

天人師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신과 인간의 스승

9

붓다(Buddha)

깨달은 님

부처님

10

바가와(Bhagava)

世尊

세상에 존귀하신 님

세존

 

 

 

이렇게 비교해 보니 비슷한 것도 있고 약간씩 다른 것도 있지만 똑 같은 것은 없다. 전재성박사는 가급적 우리 말로 풀어 쓸려고 노력하였고,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원어 또는 한역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수행승들이여” vs “비구들이여

 

이러한 차이는 부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도 차이가 난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빠알리어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하였지만,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비구들이여하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번역어 차이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문용어선택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나시까라(manasikara, 作意,attention)’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마음에 잡도리함이라고 순수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정신활동이라고 번역하였다. 또 오온에서 식(識, 윈냐나)에 대하여 대림-각묵스님은 알음알이로 번역하였고, 전재성박사는 의식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번역어들 중에 어느 것은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번역어는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차이점에 대하여 독자들의 호불호가 있다. 그렇다면 한 번 번역된 번역어는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지난 2011 9 17일자에 글(‘맛지마니까야’를 입하고)을 하나 올렸는데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주셨다.

 

 

그래서 일전에 각묵스님을 뵙고 [출재가자를 위한 니까야 단권요약 경전] 출판을 위한 준비위원회 구성에 대해 청을 드릴 때 이 문제를 여쭈었더니 일언지하에 '不可'라하셨고 전재성박사님께 여쭈니 세월이 해결할 문제라시는군요.

결국 공부하는 사람들이 각 번역자의 다른 점을 찾아 일목요연하게 구성해서 표를 만들어 공부하는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D법우님)

 

 

D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번역상의 문제에 대하여 어느 역자는 단호하게 “No!”라고 했는가 하면, 또 어떤 번역자는 세월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승리자 부처님

 

초기경에서 부처님의 호칭에 대하여 열 가지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초기경에서는 이들 열 가지 호칭 외에도 더 있다. 그것은 승리자라는 호칭이다. 부처님을 승리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에서 승리자로 표기한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표로 만들어 보았다.

 

 

부처님을 승리자로 표현한 초기경

No

   

초기경전

1

[하늘사람] "숲 가운데 큰 모임에 하늘사람 무리가 함께 모였네.

무패(無敗)의 승리자를 보고자 우리도 역시 성스러운 모임에 왔네"

상윳따니까야

하늘사람상윳따

싸뚤라빠 무리의 품

모임경

2

[싸함빠띠]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열어라. 청정한 분께서 깨달은 진리를 들어라.

산꼭대기의 바위 위에 서서 주변에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현자여, 모든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자여 진리로 이루어진 전당에 올라

슬픔을 여윈 자께서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시오.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일어서십시오.

허물없는 캐러밴의 지도자여, 세상을 거니십시오.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십시오 알아듣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브라흐마상윳따

청원경(Āyācanasutta)

3

[방기싸] "오늘 보름밤에 청정을 위해 5백 명의 수행승들이 모였네.

결박과 속박을 끊고서 동요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선인(仙人).

마치 전륜성왕이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바다로 이어진 대륙을 둘러보는 것처럼

전쟁에서의 승리자, 대상(隊商)의 지도자, 위없는 분에게

세 가지 학문에 정통하고 죽음을 극복한 제자들이 예배하네.

모두가 세존의 아들이며 거기에 쭉정이는 없네.

나는 태양의 후예로 갈애의 화살을 부수어버린 이에게 예배를 드리네."

상윳따니까야

방기사상윳따

빠바라나경(Pavāraasutta, 自恣)

4

[제석천] "보름달 밤에 떠오르는 달처럼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해탈되었으니

일어나라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짐을 놓아버린 자여, 허물이 없는 자여, 세상을 거닐라."

상윳따니까야

하늘사람상윳따

예경경

(Vandanāsutta)

5

6. 에라바나라고 부르는 코끼리 왕은

당신이 승리자임을 듣고 당신께로 왔었습니다.

그도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을 듣고

‘훌륭하다’라고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숫따니빠따

담미까의 경

(Dhammika sutta)

6

최상의 승리자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가서 선인가운데 으뜸가는 선인을 보고 기뻐하며,

아씨따라고 불리는 선인의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뛰어난 지혜, 최상의 해탈에 대해 물었다.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

(Nalaka sutta)

 

 

 

 

이처럼 초기경에서 특히 고층의 경전이라 볼 수 있는 상윳따니까야와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을 승리자라고 표현 한 예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 패배하며 살아간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자들에게 번뇌에서 승리할 것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번뇌에서 승리한 수행자에 대하여 승리자라는 칭호를 붙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초기경에서는 마라 등이 부처님에 대하여 승리자라고 칭호를 붙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승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전쟁을 치루고 있다. 자기자신과의 써움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게 되면 이는 자신과 싸움에서 패한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함에도 매일 술을 즐기고, 그러다가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여러 잔이 되어 마침내 술이 사람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했노라고.

 

그런데 이런 패배가 부지기 수이고 일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사람들은 매일 패배하며 살아간다.

 

매일 승리하는 방법

 

그렇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매일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 disvā nūppajjanti-1

pāpakā akusalā sarasakappā saññojanīyā.

Veditabbameta

bhikkhave

bhikkhunā abhibhūtameta āyatana-2,

abhibhāyatana heta vutta bhagavatāti.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에게 악하고 불건전하고 기억과 의도가 남고

속박의 조건이 되는 상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것은 감역에서 승리하는 법이다.

세존은 이것을 감역에서 승리하는 법이라 부른다' 라고 알아야 한다.

 

(빠마다위하리경-Pamādavihāri - Negligence – 퇴전 하는 법경, 상윳따니까야 S34.10.4,전재성님역)

 

퇴전과 불퇴전의 경(S34.10.3-4).docx

 

 

부처님은 문단속을 철저히 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대상을 인지함으로 인하여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이 떠 올라 고구마줄기를 끌어 당기듯이 연쇄적으로 해로운 마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의도한 대로 몸과 말과 뜻으로 업을 지어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알아차리게 되면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알아차림은 형상 뿐만 아니라 나머지 소리, 냄새, , 감촉, 사물 등 다섯가지 감각대상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본다.

 

선법과 불선법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그것을 환대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나는 선한 법에서 불퇴전한다.

세존은 이것을 불퇴전의 법이라 부른다' 라고 알아야 한다.

 

(빠마다위하리경-Pamādavihāri - Negligence – 퇴전 하는 법경, 상윳따니까야 S34.10.4,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선법에서 물러서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 그런 선법은 52가지 마음부수 중 믿음(saddha), 마음챙김(sati), 양심(hiri), 수치심(ottappa), 탐욕없음 (alobha), 성냄없음(adosa) 19가지를 말한다. 이런 아름다운 마음(善法)을 지켜내고 불선법 즉, 어리석음(moha), 양심없음(ahirika), 수치심없음(anottappa), 탐욕 (lobha) 14가지 해로운 마음(不善法)’을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오늘도 불퇴전의 승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할 때 도둑질하는 것을 알면서도 훔친다고 한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몰래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담배피우는 것이 나쁜 줄 안다. 하지만 담배를 보는 순간 또는 담배 연기를 맡았을 때 한 대 피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 잡힌다. 이를 참지 못하면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한다. 꽁초를 찾기 위해서이다. 염치불구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행위는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 되는 줄 알면서, 안 좋은 줄 알면서도 하는 행위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없고 수치심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찬불가에 이런 노래가 있다.

 

 

정진하세 정진하세

물러남이 없는 정진

우리도 부처님같이

우리도 부처님같이

 

 

'우리도 부처님같이' 라는 찬불가의 후렴이다. 후렴에서 물러섬이 없는 정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 정진은 불선법은 쳐내고 선법은 증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마치 상윳따니까야의 빠마다위하리경(Pamādavihāri, 불퇴전 하는 법경)에서 발췌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불퇴전의 마음으로 정진한다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본다.

 

 

 

“오늘도 불퇴전의 승리를 위하여!”

 

 

 

2012-03-15

진흙속의연꽃

구공덕게(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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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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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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