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벚꽃’구름터널을 달리며, 육조혜능 ‘정상(頂相)’의 진실
삼사(三寺)순례
불자들이 각종 신행단체모임에서 빠짐없이 참가 하는 것은 순례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사찰이 전국에 800여군데 되다보니 이들 사찰을 순례하는 것도 주요한 신행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사찰이나 법회모임 등 각종신행단체에서 정기적으로 사찰순례나 순례법회를 가는데, 이왕 가는 김에 한 곳의 사찰 뿐만 아니라 두곳 또는 세곳의 사찰을 둘러 보는 것이 보통이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떠나는 여행에서 한곳만 보기에는 너무 아쉬워서일까 바로 이웃에 있는 또 다른 전통사찰을 찾는 것이 일반화 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출발하여 세곳을 참배하는 것에 대하여 ‘삼사순례’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삼사순례는 국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인터넷카페에 본 글에 따르면 미국불자들도 삼사순례를 정기적으로 떠난다고 한다.
뉴욕에 있는 불자라면 버스 한대를 대절하여 먼곳에 있는 한국절을 찾아 떠나는데 가는 김에 이웃 절도 찾는 다고 한다. 그런 절은 반드시 한국절이 아니어도 되는데 예를 들어 티벳절이라든가 태국절 같은 것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삼사순례는 한국절을 포함하여 타 불교국가 절을 찾아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된 듯 하다.
쌍계사 벚꽃구름터널을 달리며
화창한 봄날 순례법회를 떠났다. 늘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멀리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활력소가 된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 모두가 마치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들떠 있는 듯 하다.
이번 순례법회는 경남 하동에 있는 ‘쌍계사’이다. 거리가 멀다보니 삼사순례는 되지 못하였다. 쌍계사와 부근에 있는 ‘칠불사’, 이렇게 두 군데를 둘러보는 이사(二寺)순례가 되었다.
버스는 41인승이었다. 45인승에 비교하여 한 줄이 빠져 있기 때문에 의자간 간격이 넓어 편안하였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한 전세버스는 막힘 없이 달렸다.
하지만 목적지에 다다르기 수 키로 미터 전부터 밀렸다. 하동 쌍계사 벚꽃구경을 하기 위하여 차들이 너무 몰린 것이다. 특히 화개장터 가까이에서 매우 정체가 심하였는데 거의 한시간 이상 거북이 걸음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풍광이 너무 좋아서 견딜만 하였다.
중부권과 달리 남쪽지방에서는 이제 신록이 막 시작 되고 있었다. 더구나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도로 양옆으로 벚꽃이 수키로미터에 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다섯시간에 걸쳐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수키로미터의 구간은 벚꽃길이었다. 특히 일부구간은 벚꽃의 터널을 보는 듯 하였다. 이런 벚꽃길은 쌍계사에 이르는 길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목적지는 쌍계사이다. 주로 관광을 목적으로 벚꽃 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쌍계사만 둘러 보고 간다. 그래서 벚꽃길이 쌍계사길만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쌍계사에서 지리산 안쪽으로 10여키로 더 들어가면 칠불사가 있는데, 칠불사 가는 길 역시 쌍계사 벚꽃길 못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인지 차량은 한산하다. 그런 벚꽃길 역시 터널을 이루었다.
벚꽃 구름터널
쌍계사에서 칠불사 가는 길
육조혜능선사의 두상이야기
순례법회를 다닌지 8년이 되었다. 전세버스를 대절한 순례법회를 일년에 대여섯차례 다니며 갈 때 마다 이사(二寺) 또는 삼사(三寺)순례를 하다보니 100여군데가 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볼 수 있는 서울과 수도권의 사찰과 해인사등과 같은 대찰을 제외하고 전국의 이름 있는 전통사찰은 대부분 순례하였다. 그러나 1700년 불교역사에 있어서 전통사찰로만 800여군데가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다 둘러 본다면 평생가도 다 보기 힘들 것이다.
이번 쌍계사순례에서 기대한 것은 육조혜능선사의 ‘두상’에 대한 것이었다. 불교방송 경전공부시간에 쌍계사 강원의 강주인 ‘월호스님’의 이야기에서 두상에 대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조혜능의 머리가 어떻게 이곳 쌍계사 금당에 모셔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 쌍계사 ‘육조혜능정상’의 진실
722년 11월, 당나라의 절강성 항주를 떠난 신라의 두 스님이 서해안의 당포(唐浦)항을 통해 귀국했다. 그들은 매우 긴장한 표정으로 배에서 내렸다. 두 스님의 행낭 속에는 놀랍게도 사람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그 머리의 주인공은 바로 제6조 혜능(638~713). 그리고 1,200년이 지난 지금,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은 하동 쌍계사의 금당‘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사진> 에 봉안되어 있다고 전해지며 이를‘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라고 부른다.
혜능은 누구인가. 혜능의 존재는 그 이름 자체가 선의 새로운 자기발견을 의미한다. 선종은 혜능에서 시작되고 혜능의 가르침으로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종 조사로 받들어지는 6조 정상(六祖頂相)이 이 땅에 오게 된 것일까.
신라 성덕왕 때 지금의 영광군 운암사에 혜능의 선법을 추앙하는 삼법 스님이 있었다. 삼법은 진불(眞佛)로 알려진 혜능과 그의 법어집 <육조단경>을 깊이 흠모했다. 스님은 마침 당나라에서 돌아온 익산 미륵사의 규정 스님으로부터 <육조단경>을 얻고 부처님을 만난 것처럼 향을 사루어 예배한다. 희비가 교차하는 심정으로 <육조단경>을 읽다가 “내가 입적한 뒤 5~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혜능의 예언(懺)에 눈이 번쩍 뜨였다. 삼법은 “선사의 정상이 다른 사람의 손에 탈취되기 전에 선사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이 되도록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법은 “선사의 정상을 모시고 온다면 첫째는 도둑질을 하게 되고, 둘째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오역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지옥의 고통을 감내하리라”고 갈등한다. 마침내 정상을 모시고 오기로 결심한 삼법은 경주 영묘사의 비구니 법정 스님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과 자신의 결심을 전한다. 법정은 바로 김유신 장군의 미망인이었다. 법정은 즉시 2만금을 삼법의 손에 전하면서 “이것으로 큰일을 이룬다면 다행이겠습니다”고 말한다.
721년 5월,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출발한 삼법은 3개월 만에 관동성 소주 보림사에 도착한다. 삼법이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신 탑 앞에서 자신의 뜻을 전하는 기도를 올리자 감응이 있었다. 그러나 보림사의 경비는 삼엄하기 이를데 없었다. 삼법은 당시 강서성 홍주 개원사에 머무는 신라의 선승, 대비 스님의 동조를 구했다. 두 스님은 의논 끝에 1만금을 주어 중국인 장정만을 매수한 뒤 경비가 소홀한 한밤중에 탑문을 열고 머리를 모셔 내오게 한다. 개원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스님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항주에 도착, 신라로 돌아온다.
귀국 후 삼법은 꿈속에 나타난 혜능의 지시에 의해 쌍계사, 지금의 금당자리에 터를 잡고 석함을 만들어 혜능의 정상을 모신 뒤, 17년 동안 선정을 닦았으며 입적하는 순간까지 <육조단경>을 독송했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신라 때부터 우리나라 선승들은 6조 혜능을 깊이 숭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고려의 보조 지눌 역시 <육조단경>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중국 광동성 소관시의 남화사에는 혜능의 불괴법신(不壞法身)이 봉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측의 고문헌들은 송ㆍ명ㆍ청대에 걸쳐서 봉안되었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고, 1981년 10월에 보수되어 지금도 신도들의 경배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쌍계사 금당의 6조 혜능 정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러나 ‘어느 쪽이 진정한 혜능의 정상을 봉안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조사 신앙의 순수성과 혜능선의 진정한 가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혜능은 혜능일 뿐이다.
(부다피아, 일지스님의 감춰진 불교이야기)
쌍계사 육조정상탑전
이 전각에는 쌍계사의 창건설화와 관계가 있으며
중국 불교 선종의 제6대조인 혜능선사의 머리(頂相)을 모셨다는 육조정상탑이 있다.
현대불교신문 부다피아에 따르면 쌍계사 금당에 모셔진 육조혜능선사의 두상은 722년 통일신라시대 ‘삼법스님’에 의해서라고 한다. 육조스님을 흠모한 삼법스님이 중국으로 건너가 육조스님의 등신불을 모셔 놓은 사당에 들어가 “1만금을 주어 중국인 장정만을 매수한 뒤 경비가 소홀한 한밤중에 탑문을 열고 머리를 모셔 내오게”하였다는 것이 쌍계사 측의 주장이다. 그래서 현재의 위치에 금당을 만들어 놓고 탑속에 육조스님의 두상을 모셔 놓았다고 한다. 그런 육조스님의 두상을 ‘정상(頂相)’이라 부른다.
혜능선사의 등신불
육조스님의 두상과 관련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중국측의 주장과 엇갈린다. 부다피아 자료에 따르면 육조혜응대사의 법신은 손상없이 중국 광동성 소관시의 남화사에 봉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육조혜능대사의 등신불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연합뉴스에 다음과 같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육조혜능대사의 등신불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에 봉안되어 있다.
(<중국 선종사찰 탐방>-④남화선사ㆍ국은사(종합), 연합뉴스 2007-03-13)
기사에서 본 사진은 육조스님의 등신불에 대한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신상은 옻칠 때문에 얼굴이 새까만 점을 제외하고는 1천300년 동안 변치않은 모습을 유지한다. 납작한 코에 홀쪽한 볼, 쇠약해 보이는 몸을 약간 구부린 채 앉은 혜능스님이 왜소하고 못생겼다는 속설이 크게 틀리지 않은 듯하다.
(<중국 선종사찰 탐방>-④남화선사ㆍ국은사(종합), 연합뉴스 2007-03-13)
중국사찰에 가면 등신불이 많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과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육조스님의 등신불에 대한 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선불교의 종가
기사에 따르면 중국선종사찰탐방을 위하여 고우스님 등의 일행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육조스님의 등신불은 중국 남화사에 모셔져 있는데, 그곳은 육조스님이 30년간 법을 펴던 곳이라 한다.
이렇게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그 동안 전설적으로만 알려져 왔던 것이 모두 밝혀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중국에 혜능대사의 등신불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라인이 목을 베어 와 쌍계사에 모셨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과 같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불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선불교의 종가임을 자부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쌍계사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듯
화창한 봄날 벚꽃이 절정인 쌍계사에는 수 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으로 북적이었다. 더구나 벚꽃이 바람에 휘날리어 떨어지는 꽃비까지 내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같다.
쌍계사길 벚꽃
남쪽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동백꽃과 시푸른 대나무, 그리고 아름다운 전각으로 이루어진 쌍계사의 모습을 음악동영상으로 만들었다. 음악은 경쾌한 행진곡풍의 ‘Mantras of the Sanskrit (불정존승다라니)’로서 Imee Ooi( 黃慧音) 창송이다.
쌍계사 순례
음악: Mantras of the Sanskrit (불정존승다라니), Imee Ooi( 黃慧音) 창송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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