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불국사 주인은 누구? 사유화된 문화재관람사찰과 출재가역할분담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18. 20:10

 

 

불국사 주인은 누구? 사유화된 문화재관람사찰과 출재가역할분담론

 

 

 

당일치기 순례법회

 

두 세시간의 참배를 위하여 길바닥에 버린 시간이 무려 10시간이 넘었다. 지난 4월 중순 벗꽃이 절정일 무렵 하동 쌍계사에 순례법회 갔었을 때 아침 일찍 출발한 버스가 점심 무렵 간신히 다다랗다.

 

사찰에서 준비한 공양을 하고 참배를 하고 부근의 칠불사한 곳을 더 들러 2사 순례가 되었는데, 오후 3시가 넘어서자 법우님들은 다급해지지기 시작 하였다.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버스가 서울에 도착 하였을 때 저녁 9시 가까이 되었다. 행락철을 맞이 하여 버스 속에서만 보낸 시간이 10시간이 넘었다. 고작 두 세시간을 위하여 10시 간 이상 꼼짝 없이 버스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제까지 주로 당일치기 순례법회를 하여 왔다. 그 동안 다닌 순례법회 행사가 수 십번 달하고 2사 또는 3사 순례 하면서 참배한 전통사찰이 100군데 넘지만, 당일치기 순례법회의 문제는 항상 시간에 쫒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보지 못할 뿐더러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일상화된 귀경길의 교통체증에 따라 즐겁고 유쾌 하였던 순례법회의 좋았던 기억이 모두 반납 한 듯한 느낌 이었다.

 

12일 순례법회

 

그래서 대책을 세운 것이 ‘12일 순례법회이었다.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자는 것이다. 동시에 법우님들간의 유대관계도 더욱 더 강화하기 위한 12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12일 순례법회 그런 계획을 세운 분은 총무 법우님이다. 순수하게 법우님들만으로 이루어진 순례법회 행사가 이렇게 8년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총무법우님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 본다.

 

이제까지 순례를 떠나면 항상 45인승 버스 한대 정도 떠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12일 순례로 정하자 인원이 반으로 줄어 들어 22명이 떠나게 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렇게 양일간 떠나는 순례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일을 한다든가, 일요일 행사가 있는 법우님들은 참석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 본다.

 

그 동안 1 2일로 떠난 순례가 몇 차례 있었다. 모두 기억에 남을 만한 즐겁고 유쾌한 순례 이었다. 이번 순례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이번 12일 순례목표지는 경주이다. 경주의 남산과 불국사, 포항의 오어사를 참배 하는 코스로 잡았다.

 

경주 남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순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제까지 전통사찰 위주의 순례에서 그 동안 가 보지 못하였던 곳만 찾아 다니다 보니 정작 보아야 할 곳을 보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런 곳이 경주와 불국사이다.

 

경주와 불국사는 수학여행 코스이다. 그래서 누구나 한 번쯤 다녀 왔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추억만 간직하고 있을 뿐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단지 보고 지나친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경주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 1 2일 순례코스로 잡은 것이다.

 

1 2일 순례 코스로 경주를 선정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남산에 있다. 경주에 불국사와 석굴암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난해 방영된 TV프로의 영향이 크다.

 

작년 10 KBS 2TV 주말버라이티쇼 해피선데이- 12에서 100번째 여행을 맞아 경주로 문화유산답사를 떠나는 프로를 방영하였다. 그 프로에서 전문화재청장이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교수가 출연하여 남산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장면이 있었다.

 

 

 

KBS 2TV 주말 버라이어티 '해피선데이-12일 경주남산답사

('1박2일' 유홍준 교수와 경주 답사..'교과서 필요없네' 호평, OSEN 2011-10-17)

 

 

 

그 프로의 영향에서 인지 그 후 남산을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 졌다고 남산 관리인은 말한다.

 

이렇게 경주 남산이 매스컴을 타면서 크게 부각이 되자 이번 12일 경주 순례코스에 당연하게 남산이 추가 되었다. 더구나 남산은 능선이나 계곡 등 산 전체가 불상과 불교관련 유적이 남아 있어서 불국토라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첫 날 가장 먼저 남산을 찾았다. 그런 경주 남산은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경주순례 첫 날 오전에 이동하여 오후에 남산을 둘러 보았다. 남산 전체를 보려면 23일 정도는 보아야 된다고 하지만 시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한 코스만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 경주 남산은 면적이 매우 넓다. 동서로 4Km, 남북으로 10Km라고 하니 왠만한 작은 도시 하나 정도의 면적이 된다.

 

 

 

 

 

 

남산에 수 많은 등반코스가 있지만 그 중 서남산 방향코스가 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문화유산이 있고 올라가다 보면 금오산 정상(468m)에 도달하게 된다.  그 서남산 코스를 오후 130분에 출발하여 5시에 내려 왔다.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남산에는 수 많은 불상과 문화재가 이곳 저곳에 널려 있다고 한다. 발견된 절터가 112곳이고, 탑은 61, 불상은 80여개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면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산이어서일까 남산을 방문한 관람객들에게 전문문화재 해설사가 함께 해 주었다.

 

 

 

 

 

 

경주가 고향이고 경주에서만 살았다는 문화재해설사는 투박한 경상도 말씨이지만 친근감있게 불상과 탑등 문화재에 등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 설명은 매스컴이나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도 있었는데, 자신의 경험을 곁들인 이야기가 많았다.

 

서남산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다 보면 공동묘지가 나온다. 그런데 원래 공동묘지터가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래 매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 대하여 자신도 잘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남산이 불국토로 알려졌기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책이나 매스컴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를 경주 토박이 해설사로부터 들을 수 있었는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삼릉이라는 곳이다.

 

소나무와 신라의 영혼

 

서남산 코스 입구에 커다란 능이 3기가 있다. 그 규모로 보아 왕릉이다. 아직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등재되어 않은 삼릉은 해설사 설명에 따르면 서기 200년경의 8대 아달라왕, 900년대의 53대 신덕왕과 54대 경명왕 능이라 한다. 그런데 삼릉에 대한 설명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삼릉 주변의 소나무에 대한 것이다.

 

삼릉 바로 옆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마치 소나무가 능을 향하여 절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소나무가 능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양지를 찾아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특성으로 보인다. 그런 소나무의 모습은 한결 같이 구불구불 하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소나무 언젠가부터 갑자기 유명해 졌다고 한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배병우이라는 사진작가가 삼릉옆의 소나무군락에 대하여 사진을 찍어 발표를 하였는데, 소나무의 곡선과 굴곡미에 대하여 극찬 하였다고 한다. 그런 소나무에 대하여 신라의 영혼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전문 사진작가 배병우

 

 

인터넷에서 배병우 사진작가를 검색해 보았다. 한겨레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배병우(58)는 세계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의 사진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주제는 소나무, 바위, 오름, 바다지만, ‘소나무 사진가’로 가장 이름이 높다. 가수 엘튼 존이 그의 작품을 사면서 화제에 올랐고, 지금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미술품 경매장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다.

 

 

(앨튼 존에게 ‘소나무’ 팔다, 한겨레신문 2008-04-16)

 

 

배병우는 소나무 사진 전문작가라 한다. 작가가 찍은 사진 중에 경주 남산의 삼릉 소나무 군락이 있는데, 전문사진 작가의 작품은 어떤 것일까. 인터넷에서 검색한 작가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민중들이 찾던 곳

 

경주남산 자체가 하나의 불국토라 한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불상을 만날 수 있는데, 그런 불상은 하나 같이 투박한모습이다.

 

화강에 조성된 불상은 크게 선각불, 마애불, 석조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거친 바위에 새겨진 불상은 절에서 보는 부처님상과 달리 가까이서 보면 형태가 잘 드러나 보지 않을 정도로 투박하고, 어느 것은 짝눈에 입술도 두툼해 보인다.

 

그렇다면 왜 남산에는 이처럼 많은 불상들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해설사는 남산에 모셔진 불상은 민중용이라 한다. 신라시대 당시 경주에서 민중들이 주로 찾는 곳이 남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능선마다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런 불상을 찾아 갈려면 꽤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 가야 한다.

 

이렇게 민중들은 부처님을 만나 뵈로 가기 위해서 가파른 길을 올라 가야 했다. 하지만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경주시내에 조성된 대형사찰은 험한 길을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드넓은 평지에 세워진 왕실과 귀족을 위한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찰의 대표격이 황룡사라 볼 수 있다.

 

작은 절 분황사

 

오후 5시 남산순례를 마친 순례팀은 분황사와 황룡사터로 향하였다. 분황사와 황룡사터는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분황사 순례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황룡사터를 보게 되어 있다.

 

분황사는 매우 작은 절이다. 모전석탑으로 유명한 분황사는 고교시절 수학여행 당시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너른 벌판의 황룡사터

 

분황사는 30여분 보면 더 이상 볼 것 없을 정도로 자그마한 절이다. 그런데 분황사 바로 옆 벌판에 있는 황룡사터가 마음을 끌었다.

 

 

 

 

 

 

 

황룡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TV에서 다큐 프로 형식으로 여러 차례 방영되었고, 특히 황룡사 9층탑에 대한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그 규모가 얼마나 클 것인지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황룡사터는 매우 넓었다. 너른 벌판 전체가 황용사터이었는데 조감도를 보면 실감이 날 정도이다.

 

 

 

 

 

 

 

 

 

 

 

 

 

현재 보는 황룡사터에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목조건물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주춧돌이 발견된 곳에 금당, 강당, 9층탑 등의 팻말이 있어서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회랑

 

황룡사터를 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른 절과 달리 회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회랑은 금당(대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자 또는 자 형태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회랑은 궁궐에서 볼 수 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 등 서울의 고궁을 보면 모두 회랑으로 된 통로가 있어서 비와 바람, 햇볕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

 

 

 

이처럼 회랑을 둔 건축물의 특징은 좌우대칭이 분명하다. 궁궐이든 사찰이든 회랑이 있는 경우 남쪽에 반드시 중문이 있다. 보통 남문을 지나 걸어 들어가면 중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중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회랑이 펼쳐져 있다.

 

중문 바로 앞에는 마당이 있고 마당 한 가운데  궁궐의 경우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이 있다. 사찰의 경우 금당이라고 부르는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  있다. 이처럼 회랑이 있는 사찰의 경우 궁궐의 구조와 똑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당이라는 용어

 

 그렇다면 모든 사찰마다 회랑이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로지 황실 또는 왕실의 사찰의 경우만 회랑을 갖출 수 있다. 황룡사도 그런 케이스이다.

 

신라의 사찰에서 ()’자가 붙은 사찰이 9개나 된다고 한다. 황자가 붙은 사찰은 모두 황실 또는 왕실사찰이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한다. 그런 뜻으로 보아 황룡사도 왕실사찰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왕실에서 지었기 때문에 황룡사의 경우 회랑 주춧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황룡사터를 보면서 안내판에 씌여 있는 문구가 매우 낯익어 보였다. 그것은 금당’ ‘중문’ ‘남문’ ‘대강당과 같은 용어 때문이다. 그런 용어는 지난 6 5월부터 8일까지 일본성지 순례에서 보던 일본절 호류지(법륭사)와 도다이지(동대사), 야쿠시지(약사지)에서 본 용어와 똑 같았기 때문이다.

 

일본절에서 본존불을 모셔 놓은 곳을 금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남문이 있고 반드시 회랑이 있었다. 그리고 금당 앞에는 오중으로 된 목조 탑이 서 있었다. 호류지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목조5중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도다이지(동대사) 회랑

 

 

 

  

 

 

 

 

 

 

호류지(법륭사) 금당과 탑

좌측이 금당이고 우축이 5중목조탑이다.

 

 

 

이처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에서도 회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본천왕이 세운 황실사찰이라는 표시라 한다. 그런 황실사찰이 호류지(법륭사)와 도다이지(동대사), 야쿠시지(약사지)를 포함하여 7곳이라 하여 남도칠대사(南都七大寺)라 한다.

 

마찬가지로 신라시대 세운 황자가 붙은 사찰은 모두 신라 왕실 사찰로서 성골, 진골과 같은 왕족과 각간등으로 불리우는 귀족들이 출입하였던 사찰이라 한다.

 

백제 장인들에 의하여

 

이처럼 나라에서 국력을 기울여 지은 왕실사찰의 특징은 철저하게 궁궐을 모델로 하여 지었는데, 현재 일본에 그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 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대표적으로 아스카시대 호류지(법륭사)가 그것이다.

 

일본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 호류지는 일본 천왕 아들 성덕태자 607년에 지었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아스카시대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 기술자가 지은 사찰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의 황룡사 역시 백제의 기술자의 도움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기록을 황룡사터 아비지기념비에서 볼 수 있다.

 

 

 

 

아비지 기념비

 

 

 

 

 

 

 

황룡사 구층탑 예상도

 

 

 

 

 

 

 

 

황룡사 구층 목탑지 주춧돌

 

 

 

 

아비지 기념비의 설명에 따르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덕여왕14(645) 백제의 대장인인 아비지와 200명의 장인들에 의하여 3년 동안 공사를 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 아스카 시대의 호류지의 오중탑(607)  황룡사 구층탑(645)은 모두 백제 기술자들의 손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백제 기술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어서 일까 아스카와 나라시대의 남도 칠대사와 신라의 황룡사와 불국사의 가람 배치를 보면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장 큰 유사점은 한결같이 회랑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춧돌만 있는 황룡사터

 

황룡사 구층탑은 폐허로 변했다. 몽고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전각의 나무 기둥을 떠 받들고 있었던 주춧돌 밖에 없다.

 

하지만 비숫한 시기에 세워진 일본 호류지의 경우 5중탑은 목탑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때 당시 불상등 각종 문화재가 고스란히 보존 되어 있다. 또한 그 때 당시 그 모습대로 모두 복원 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400년의 세월이 흐른뒤에 같은 왕실사찰임에도 불구하고 황룡사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룡사터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지만 주춧돌 이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단지 황룡사 규모가 얼마나 컷는지는 주춧돌이 놓여진 자리로 판별 할 수 있는데, 또 다른 곳에 이르니 주춧돌만 모아 놓은 곳이 있었다.

 

 

 

주춧돌만 모아 놓은 곳

 

 

 

주춧돌만 모아 놓은 곳을 보니 다양한 형태의 용도를 알 수 없는 주춧돌들이 있었다.

 

 

 

 

 

 

 

 

 

 

 

 

 

 

 

 

 

 

 

 

 

 

 

왜 복원하지 않는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제행은 무상한 것이라 하였다. 14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라의 국력을 기울여 만든 왕실사찰 황룡사는 폐허로 변하고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복원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모두 복원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하여 놓았는데, 비록 주춧돌만 남은 상태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황룡사를 복원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법우님은 MB정부가 사대강에 처 박았던 돈의 단 1%만 투자 하였어도 복원하였을 것이라 말한다. 또 어떤 법우님은 MB한테 감사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드 넓은 부지를 밀어 버리고 아파트나 공단을 짓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둔 것만 해도 감사히 생각해야 될 일이라는 것이다.

 

보문단지 리조트에서

 

해질녘 주춧돌만 남은 황룡사터를 둘러 보고 난 12일 순례팀은 첫날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향하였다. 모두 불자들로 이루어진 순례팀이기 때문에 절에서 자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다음날 참배하기로 되어 있는 불국사의 경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기 때문에 오후 6시가 되면 문을 닫는 다고 한다. 그래서 템플스테이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보문단지 리조트에서 일박하게 되었다.

 

 

 

 

 

 

불국사에 도착하여

 

리조트에서 아침밥을 해 먹고 불국사를 향하여 일찍 출발하였다. 일요일이기 때문에 관람객들로 인하여 무척 붐비기 때문에 8시에 도착하여 여유롭게 가람을 둘러 보았다.

 

 

 

 

 

 

 

 

 

 

 

 

불국사는 오랜 만에 와 보았다. 고교시절 수학여행 때 보고 이번이 두번 째이다. 대부분의 법우님들이 마찬가지이었다. 그런데 나이 드신 어느 법우님은 불국사가 처음이라 한다. 수학여행갈 때 사정이 있어서 불국사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불국사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절이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사정 없이 내려 쪼이는 초여름 날씨이다. 그러나 습도는 높지 않아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한 느낌이다. 일요일이어서 인지 수 많은 관광객들이 밀려 들고 있다.

 

 

 

 

 

 

 

 

 

한국관광객도 많지만 일본, 중국, 태국, 구미 관광객들도 많았다. 여행 가이드가 든 깃발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곳 관광지화 된 불국사에서 자연스런 장면이다.

 

 

 

 

 

 

 

 

 

 

 

 

 

 

 

마치 고궁관람하듯이 가이드의 설명에 경청하고 사진을 열심히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에서 이곳 불국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불국사 경내의 회랑을 보고

 

불국사 경내에 들어섰을 때 매우 낯 익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회랑이었다. 전일 황룡사터에서도 회랑이 있었는데, 이곳 불국사에서는 회랑이 완벽하게 복원 되어 있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자 회랑을 볼 수 있었고, 이런 회랑은 바로 옆의 극락전에도 역시 똑같이 자 이었다. 절 전체가 마치 담을 두르듯이 회랑으로 둘러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랑이 있는 사찰은 왕실사찰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불국사도 왕실사찰임에 틀림없다.

 

황룡사가 드 넓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불국사는 토함산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10(751)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지었다고 한다. 이루 미루어 보아 왕실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왕실사찰임의 표시 중의 하나가 청운교-백운교라 한다.

 

 

 

 

 

 

 

 

청운교-백운교

왕족만 오를 수 있는 곳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청운교-백운교는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 한다. 오로지 왕족만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왕족외의 사람들은 바로 옆의 연화교-칠보교로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연화교-칠보교

 

 

 

이처럼 왕족사찰로서 불국사는 왕족이나 귀족 외 들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민중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사찰이었는데, 그렇다면 민중들은 어디로 부처님을 뵈로 가야 했을까.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민중들은 남산에 가서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다고 한다. 남산 곳곳에 산재 되어 있는 절과 능선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불상이 민중들의 신앙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신라시대 당시 절이라고 해서 같은 절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실과 귀족용 절이 따로 있고  서민들이 갈 수 있는 절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황룡사나 불국사가 왕실전용 절로서 민중들은 이용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왕실 전용 절의 흔적을 불국사와 황룡사에서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회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회랑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왕실용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국사는 왕실전용 사찰이다. 민간인들은 들어갈 엄두고 못 내는 사찰로서 불국사는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 되었다. 그래서 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그런 불국사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안방마님을 보는 듯

 

오랜만에 와 본 불국사에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 촬영을 하였다. 블로그에 순례기를 올리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을 때 반드시 빠뜨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상호이다.

 

순례를 다니며 순례기를 작성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 해당 사찰의 부처님의 상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찰의 불상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번 보고 난 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반드시 부처님의 상호를 카메라 담았다. 나중에 열어 보았을 때 그 절에 그 부처님의 상호가 이러 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에서 석가탑, 다보탑, 대웅전 등의 사진을 찍고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을 찍으려고 포즈를 취하였다. 그때 대웅전 안에서 기도비를 접수하기 위하여 앉아 있는 법당보살이 제지를 하는 것이었다. 실내 촬영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고를 무시하였다. 대웅전 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로 대웅전 코앞도 아닌 석등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 석등

 

 

 

대웅전 앞 석등은 대웅전으로부터 거리가 꽤 떨어져 있다. 그곳 앞에 서면 대웅전의 커다란 불상이 보인다. 그 불상을 찍기 위해 약간 구부리는 포즈를 취하였는데, 기도비를 접수하는 법당보살은 역정을 내었다. 실내촬영금지라는 팻말이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실내도 아니고 계단 위도 아닌 계단 아래 석등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까지 문제를 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말을 주고 받다 보니 톤이 점차 높아졌다. 마침내 맞은 편에서 기도비 접수 역할을 맡은 또 다른 법당보살이 합세 하여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는 것이었다.

 

 

 

 

 

 

대웅전에서 기도비를 접수하는 양 법당보살의 위세는 매우 당당 하였다. 아마도 수십년간 불국사에 지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것도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웅전에서 마치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처럼 손으로 지시하고 나무라는 모습이 불국사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

 

안방마님을 보는 듯

 

이렇게 양 법당보살과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고 나자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탐진치 삼독을 멀리하라고 하였는데, 노보살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자세에 항의하다 그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라 인하여 사시예불에 참여 하지 않았다. 사시예불에 참가한 법우님에 따르면 법당 내부에서 양 노보살의 위세는 마치 안방마님을 보는 듯 하다 하였다.

 

그런 사시예불은 11시 까지 1시간 여 진행되었는데 주지스님이 주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스님이었고, 정해진 의식에 따라 진행 되었을 뿐 법문 같은 것은 없었다고한다. 그렇다면 불국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주지스님은 어디에

 

순례법회를 다니다 보면 스님들을 좀처럼 볼 수 없다. 이제까지 100여곳을 다녀 보았지만 주지스님이 나와서 반겨 준다든가 설명해주는 경우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특히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간 사찰 역시 스님들 보기가 힘든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였던 혜문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찰에는 안내자도 없고 스님을 한 번 만나려고 하면 하늘의 별따기요 또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대화는 커녕 소위 무뚝뚝하게 폼만 잡고 무엇을 묻고 싶어도 물어보면 대꾸가 없다고 말합니다.

 

언제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명산대찰을 찾으면 법당에서 일명 ‘법당보살’이 화주를 하면서 시주하라고만 하지 도대체 스님 한분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니 과연 우리승가는 어찌 된 일입니까?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던 먼저 말을 걸어서 교회에 나오도록 열과 성을 다 하고 있는데, 불교집안에서는 찾아 오는 사람도 붙들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워들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스님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가고 있는 수행의 길에 자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피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해야 하는 수행과 공부를 하지 않고 무위도식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도 유니폼만 입고 있는 무뉘만 승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아니면 순전히 개인주의로 흘러서 겉으로는 대승을 표방하면서도 지독한 소승적 생각으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출가생활은 정말 곤란합니다. 스님들은 불자들의 시주에 의해서 생활합니다. 때문에 언제든지 나서서 불자와 민중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며 불교의 정신에 입각한 삶의 조언자 즉, 멘토가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출가자의 본분입니다.

 

그렇지 않고 혼자만 산속과 뒷방에 박혀 앉아서 세월만 보낸다면 승려로서는 양가득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좋은 명당터에 앉아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산속에 숨어서 좋은 경치 벗삼아 허송세월 하라고 삼보의 일원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혜문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11-17일자)

 

 

혜문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사찰에 가면 안내자도 없을 뿐 더러 스님 뵙기도 무척 힘들다고 한다. 일부로 산사를 찾아 온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비판이다.

 

이렇게 스스로 제발로 절에 온 사람을 맞이 하는 것은 주지 스님이 아니라 법당보살이라 한다. 실제로 법당 보살이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당보살의 권위는 높아 보이고 때에 따라 위세를 부리는 듯이 보인다. 불국사의 법당보살도 같은 케이스라 보여진다.

 

수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로 발길이 분주한 불국사에서 주지스님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시예불에서도 볼 수 없다. 그런 불국사에서 주지스님을 대신하여 법당보살들이 절을 관리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주지스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 것일까.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사찰

 

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11교구본사이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사찰이다. 이처럼 조상들이 물려준 문화유산과 정부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불국사는 소위 수입이 좋은 사찰이다. 이렇게 수입이 좋은 사찰에 대하여 조계종에서는 특별분담금 사찰이라 하여 특별관리 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계종 특별분담금 사찰은 몇 곳이나 될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조계종의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사찰

  

소 속

   

해당사찰

직영사찰

총무원

총무원장이 관할하는 사찰로서, 재정ㆍ포교 등 종단 정책사업을 직접 집행하는 사찰

조계사, 선본사, 보문사, 봉은사 등 4

특별분담금 사찰

교구본사

지역 교구에 속하면서 종단의 재정안정화를 위해 기여하는 사찰

도선사, 봉은사, 연주암, 석굴암, 낙산사, 봉정암, 내장사, 보리암 등 8

(한국불교의 시주 현황과 용도 / 이학종 , 불교평론 2009-03-10)

 

 

 

크게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영사찰의 경우 총무원장이 주지이고 재산관리인스님을 파견하여 관리 하고 있다. 모든 수입은 총무원으로 들어간다.

 

분담금을 상습체납한 불국사

 

한편 특별분담금사찰은 유명관광 사찰이나 유명기도처가 대부분이다. 불국사 석굴암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특별분담금 사찰은 소속이 교구본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수입의 일정액을 총무원에 특별분담금이라는 명목으로 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불교관련 신문에 따르면 제대로 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법보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조계종 특별분담금 사찰인 불국사 석굴암이 2007년부터 현재까지 총무원에 납부하기로 돼 있는 분담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빈축을 사고 있다. 특히 재정적으로 열악한 교구본사조차 분담금을 의무적으로 납부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나라 최대 관광 사찰인 석굴암이 분담금을 몇 년째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은 ‘특혜시비’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앙종회 중앙종무기관 종정감사 지적사항결과보고서 등에 따르면 석굴암은 지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책정된 분담금 1 9300여만 원을 체납해 총 5 7900여만 원을 미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올해 책정된 분담금까지 납부하지 않고 있어 석굴암이 납부해야 할 체납분담금은 7 7300만원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석굴암은 과거에도 수년 째 분담금을 내지 않다가 일시에 내는 조건으로 분담금 일부를 탕감 받거나 어떤 경우 전액 탕감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석굴암은 2000년 당시 배정된 분담금 3 6000만원을 체납하다가 2001년부터 분담금을 2 1758만원으로 감액하는 조건과 함께 1억 원을 탕감 받아 2001 11월 경 2 6000만원을 납부했다.

 

그런가 하면 석굴암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조정된 분담금 2 1700여만 원을 다시 체납하다가 2005 11월 분담금을 납부하면서 2003년 분담금 2 1700여만 원을 전액 탕감 받았으며 2004년 분담금 가운데서도 2 1200여만 원을 탕감 받아 500여만 원만 납부했다. 사실상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면 의무적으로 내야 할 분담금을 석굴암은 상습적으로 체납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석굴암이 2007년부터 현재까지 분담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도 또다시 분담금 일부를 탕감 받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불국사 석굴암, 분담금 상습 체납, 법보신문 2010-08-25)

 

 

수 많은 내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곳이 불국사이다. 휴일날 불국사는 그야말로 관광객들로 들 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입장료 수입도 꽤 될 것이다. 더구나 문화재와 관련된 국고 보조까지 감안 한다면 불국사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 측에서는 당연히 내야 할 분담금도 내지 않고 매년 상습적으로 체납 해 왔다는 것이다.

 

영빈관을 건립하겠다고

 

이렇게 내야 할 것도 내지 않는 불국사의 주지는 성타스님이다. 연임에 연임을 하고 있는 성타스님은 교구본사 주지회의에서도 소신발언을 잘 하는데 주로 보수적 입장의 발언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지난해 종교평화선언 초안이 발표 되었을 때 한국불교가 이끌어 낸 쾌거라고 극찬한 바도 있다. 그런 성타스님은 종종 교계 신문사이트에 등장하는데 2010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지난 2005년 골프연습장을 불법으로 건립해 논란을 빚었던 불국사가 이번에는 정부 고위관료 등 주요 귀빈을 위한 영빈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혀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불국사를 올곧게 관리해야 할 주지 스님이영빈관 건립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불국사 주지 성타 스님은 10 5일 총무원장 자승 스님으로부터 주지 임명장을 받은 직후  기자간담회를 열고며칠 전 경상북도의 주요 귀빈들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과 공양을 한 자리에서 불국사의 현안 문제에 대해 건의를 했다그 내용은민간차원의 외교를 위해서 불국사에 영빈관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성타 스님은외교통상부 고위 관료 등을 비롯해 외국 주요 귀빈 등 불국사를 찾은 많은 귀빈들이 주지실에서 차담을 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한다면서그러나 주지실 등은 매우 협소해 많은 귀빈들이 쉬었다 가기에 문제가 있다고 제안 배경을 설명했다.

스님은 이어 “(주지실 뒤편) 터가 좋은 곳에 영빈관을 지어서 국내외 고위관료 등이 편히 쉬면서 불국사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이를 통해 불국사가 민간차원의 외교를 담당하는 곳이 되도록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국사, 이번엔 ‘영빈관 건립’ 논란 , 법보신문 2010-10-05)

  

 

특별분담금을 상습적으로 체납하는 불국사에서 영빈관을 짓겠다고 발표 하여 한 때 논란이 된 바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2005년에는 골프연습장을 불법으로 건립하여 논란을 빚은 바 있었다고 한다.

 

종상스님을 정점으로 하여

 

성타스님은 1998년이래 불국사 주지를 맡고 있다. 특히 지난 2010년 주지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또 다시 주지를 맡게 되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뉴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동안 불국사는 종상스님과 성타스님, 종광스님, 법달스님, 장주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참여한 문중 확대회의를 통해 본사 주지와 종회의원 등을 추대해왔다. 이런 구도가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종상스님을 위시한 성타스님과 장주스님 등이 불국사 주지와 종회의원, 11교구 중심 수말사 등을 독식해 불국사는 종상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구도가 굳건하게 짜여 수십년동안 변하지 않았다.

 

(불국사 주지 선거, 이번에는 개혁의 신호탄 될지?, 불교뉴스 2010-08-31)

 

 

인터넷 뉴스에 따르면 불국사의 경우 특정 문중이 좌지우지 하고 있다고 한다. 종상스님을 정점으로 하여 성타스님, 종광스님, 법달스님, 장주스님 등 몇몇이 독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구도에 대하여 종상스님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도가 굳건하게 짜여 있다고 한다.

 

사설사암으로 전락한 도심포교당

 

그런 종상스님은 경기 의왕에 있는 청계사회주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경북의 불국사와 경기의 청계사가 거리가 멀리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청계사 주지스님은 성타스님과 같은 항렬인 자 항열이다.

 

또 인터넷신문에 따르면 불국사와 청계사가 교류를 강화 한다는 기사가 뜨기도 하였다. 이처럼 불국사와 청계사의 정점에 종상스님이 있는데, 종상스님과 관련하여 하나의 스캔들이 인터넷신문에 났었다.

 

 

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주지 성타)가 수도권 포교의 중심지로 삼겠다며 건립한 분당 석가사를 불국사 관장인 종상 스님의 사설사암으로 종단에 등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커지고 있다. 특히 종상 스님은 불국사 전 주지를 역임한 데다 오랜 기간 불국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스님이라는 점에서특혜시비가 일고 있다.

 

더구나 교구본사 주지 스님이 재임기간 동안 도심포교당을 짓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 문제가 선례가 될 경우 공찰이 사설사암으로 전락하는 사례들이 늘어날 뿐 아니라 삼보정재가 사유화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불국사는 지난 2월 교구 종무회의를 열고, “석가사 창건에 종상 스님이 기여한 바가 크다며 석가사를 불국사 포교당이 아닌 종상 스님을 창건주로 하는 사설사암으로 등록하기로 결의하고 총무원에 신규 사찰 주지 품신과 함께 사찰등록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국사 분당포교당 사설사암 전락, 법보신문 2010-08-17)

 

 

수도권에서 중산층이 가장 많이 몰려 산다는 분당에다 불국사 포교원 석가사를 건립하였는데, 이를 종상스님이 사설사암으로 종단에 등록하였다는 것이다. 불국사에서 주지를 오랫동안 역임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종상스님이 교구본사에서 지은 공찰개념의 분당포교당 석가사를 개인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종상스님은 지난 2000년 경기 의왕 소재의 청계사 주지를 맡을 때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하여 대규모 불사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 우담바라 청계사)를 일으킨 바도 있다.

 

힘 있고 영악한 승려들의 각축장이 된 문화재관람사찰

 

이처럼 종상스님을 정점으로 하여 성타스님 등 일부 스님이 좌지우지 하는 것이 현재의 불국사의 현주소이다. 그런 불국사는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를 조상이 물려 준 문화재를 가지고 있어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수 많은 내외국인들이  스스로 찾아 오는 곳이다. 그 결과 문화재 관람료 징수가 이루어지고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사찰이다.

 

이렇게 고정수입이 발생하는 관광지 성격으로서 불국사는 조계종 특별분담금 사찰로 지정되어 있어서 마치 세금 형식으로 분담금을 납부 해야 하지만 단 한푼도 내지 않는 해가 있었고, 더구나 골프장을 건립하였고 영빈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특정 스님에 의하여 죄지우지 되는 불국사와 같은 사찰은 한국불교를 위해서도 바람직 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 이학종 기자는 눈문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문화재 관람료 징수 이후 관람료 사찰들은 이른바 힘 있고 영악한 승려들의 각축장이 되어 종단 분규의 원인이 되었다. 물 좋은 사찰을 차지하기 위해 종단정치가 생겨났고, 정치승 권력승 따위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는 시주를 무섭게 여기던 과거 절집의 시주 정신을 희미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왜곡된 교단 운영을 하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한국불교의 시주 현황과 용도 / 이학종 , 불교평론 2009-03-10)

 

 

불국사와 같은 문화재관람료 징수사찰의 경우 일부 힘있고 영악한 스님들의 각축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왜곡된 종단 운영을 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누가 주인인가

 

불국사의 주인은 누구일까. 불국사에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스님은 볼 수 없다. 단지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등 법당에 기도비를 접수하는 이른바 법당보살들만 앉아 있을 뿐이다. 특히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웅전에 있는 두 명의 법당 보살의 권위와 위세는 대단하다.

 

스님들이 보이지 않는 불국사에서 불국사의 주인은 겉으로 보기에  법당보살들로 보여진다. 하지만 불국사의 실질적 주인인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따르면 종상스님을 정점으로 한 성타스님 등 몇몇 스님이 움켜 쥐고 있는 모습으로 비친다. 이른바 공찰의 사유화이다.

 

이처럼 겉 보기에 불국사의 주인은 법당보살이고, 실제로 종상스님을 정점으로 한 몇몇 스님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국사가 창건된 751년에는 신라시대의 불국사는  왕실의 것 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자형 회랑이 있고 청운교-백운교, 다보탑 등 정교하기 그지 없는 석조물을 볼 수 있다. 왕실 사찰로서 불국사는 민중들이 접근할 수 없는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불국사는 조상이 물려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더구나 국민의 세금으로 복원되었기 때문에 국민의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주인은 마치 따로 있는 듯 하다.

 

민중과 함께 천년을

 

 

불국사에서 보는 목조 건축물은 모두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모두 1765년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단지 주춧돌과 청운교와 백운교, 극락전의 아미타여래좌상 등 일부만 신라시대의 것이다.

 

왕실사찰 불국사의 경우 정부의 복원 정책에 따라 가람으로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또 하나의 왕실사찰인 황룡사의 경우 그야말로 주춧돌만 남았다. 목조로 지어진 모든 것은 전란으로 인하여 모두 다 타버리고, 금당에 안치 되었다는 장륙존상(높이 4.8m) 또한 흔적도 없다. 이처럼 너른 벌판에 주춧돌만 남아 있는 것이 현재 황룡사의 모습이다.

 

반면 터만 남아 있는 황룡사와 달리 민중들이 찾았다는 남산의 경우 비록 투박하긴 하지만 불상들이 남아 있다. 바위에 선각으로 또는 부조로 또는 석조로 조성된 불상은 두상이 잘린 것도 있고 눈이 짝눈 인 것도 있지만 어쨌든 천년 이상 버텨 왔다.

 

 

 

 

 

 

 

 

 

 

 

 

 

 

 

 

 

 

 

 

 

 

 

 

특히 해설자의 설명에 따르면 미스 남산이라는 불상이 있다. 해설자가 별칭을 붙였다는 미스남산은 관세음보살상이다.

 

 

 

 

 

 

 

 

 

미스남산이라 불리우는 불상의 정식명칭은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이다. 암벽에 돋을 새김으로 되어 있다. 입술에는 마치 루즈를 바른 것처럼 붉은 색이 남아 있다.

 

 

이렇게 민중과 함께 한 불상들은 소박하기 그지 없다. 드넓은 평지에 세워진 왕실사찰에 세워진 부처님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투박하고 못 생긴 부처님은 이렇게 민중과 함께 천년의 세월동안 함께 하여 왔다.

 

구부러지고 쓸모 없을 듯이 보이는 나무가 살아남아 동구 밖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남산에 있는 투박하기 그지 없는 부처님들이 천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 천년도 그 자리에 있을 것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황룡사처럼 복원된 불국사가 천년을 가리란 보장이 있을까. 목조로 된 건축물이 천년을 버틴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렇게 천년 후에도 남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목조 건물이자 왕실사찰이었던 불국사에서 주인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역 기반을 상실한 한국불교

 

한국불교가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그저 명맥만 유지해 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불자인구가 전국민 대비 22.8%로서 현재 1위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체감하는 불교는 기독교의 1/10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가장 먼저 거론 되는 것이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는 것이다.

 

절에 가려면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관광지 같은 절에 가거나 깊은 산중에 가야만 불교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산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타종교에 비교하여 사회적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 그런 한국불교는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성격이 매우 짙다.

 

이처럼 지역 기반을 상실한 한국불교가 그마나 유지 되는 것은 노보살들의 신심쌈짓돈이라 한다. 또 하나 들라면 문화재관람명목의 입장료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런데 입장료징수에 따른 수입이 좋은 사찰은 사유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불국사를 들 수 있다.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따르면 불국사는 특정스님들에 의하여 사유화 되어 있어서 장기집권하는 주지스님이 있는가 하면 다음 주지는 누구라는 식으로 돌려 가며 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서로 주지가 되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돈줄을 거머 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재가역할분담론

 

현재 한국불교는 도박추문등 일련의 승풍실추 사건으로 인하여 개망신을 당하고 있다. 도박을 하고, 도촬을 하고, 검찰에 고발한 이들이 모두 스님들이다. 왜 스님들은 이렇게 진흙탕에 싸우는 개처럼 이전투구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권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주지가 되면 돈줄을 쥐기 때문에 서로 주지가 되려 한다. 대표적으로 범어사를 들 수 있다.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된 범어사 주지 선거 역시 낯부끄러운 한국불교의 자화상이다. 선거에 입후보한 스님들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을 뿌렸다고 보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십억, 수백억을 쓰면서 까지 주지가 되려 하는 것은 그만큼 이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박파문 등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은 조계종 총무원 집행부에서 쇄신안을 내 놓았다. ‘출재가역할분담이라는 획기적인 안이다.

 

 

출재가역할분담의 골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을 서로 나누자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자는 오로지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고, 사찰운영과 돈과 관련된 모든 것은 전문재가자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흐지브지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재가 역할 분담이 성공한다면 한국불교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한겨레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다.

 

 

조계종이 승려는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하고 사찰재정은 재가의 전문종무원이 맡기는 등 운영체계를 전면 쇄신하기로 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7일 최근 ‘승려 도박 파문’ 이후 약속한 대로 획기적인 종단 쇄신안을 발표했다.

 

자승 스님은 “지난 수십 년간 사찰과 종단 운영 과정에서 빚어진 각종 부작용과 분규, 갈등의 본질은 사찰과 종단 운영 시스템이 체계적이지도 전문적이지도 못한 데서 비롯됐다”며 “최근 불거진 종단 일각의 불미스러운 일들도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찰운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큼 이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혁신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1차 종단쇄신 계획으로 불전수입이 많아 갈등의 빌미가 된 조계사·봉은사·갓바위·보문사 등 직영사찰과 특별 분담금 사찰들에서 영수증 발급을 의무화하고 불국사·석굴암과 같은 문화재구역 입장료 사찰 등에 대해 전자발권 시스템을 도입하고, 회계 전문가의 감사 등 투명화 방안이 발표됐다.

 

(조계종 사찰 재정, 승려 아닌 전문가에 맡긴다, 한겨레신문 2012-06-07)

 

 

출재가 역할 분담 1차 대상은 조계사·봉은사·갓바위·보문사 등 직영사찰과 불국사와 같이 문화재입장료 수입이 많은 사찰이라 한다.

 

서로 주지를 맡지 않겠다고 한다면

 

만일 출재가역할분담이 성공하여 주지가 돈줄을 만지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현상이 서로 주지를 맡지 않겠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로 주지가 되려 하였으나 서로 주지를 맡지 않겠다고 한다면 출재가 역할 분담은 성공한 것으로 본다. 다음으로 예견되는 사항은 스스로 산문을 떠나는 스님들이 많아 질 것이다.

 

사찰운영과 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재가자가 맡았을 때 스님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수행포교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까지 돈줄을 쥐고 있었던 주지스님들이 돈줄을 놓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수행과 포교를 힘들게 할 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제발로 걸어 나 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찰의 주인은 누구일까

 

 

사찰의 주인은 누구일까. 법당에서 기도비를 접수 받는 법당보살일까. 아니면 공찰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사찰을 사유화 하고 있는 몇몇 스님들일까. 사찰의 주인은 불자들의 것이다. 그리고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다면 국민들 모두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관광지화 된 목 좋은 사찰은 겉으로 보기에 법당보살이 주인이고, 실제적으로는 몇 몇 스님들이 주인 것처럼 보이는데 나만 그런 것 일까.

 

 

 

2012-05-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