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문을 해야 하는 이유, 천장사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11. 12:24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문을 해야 하는 이유, 천장사에서

 

 

 

 

봄의 시작은 삼월이다. 삼월과 함께 개학이 있어서 활기가 넘치는 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새해가 시작 되는 때가 삼월 부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날씨는 아직도 쌀쌀하고 나뭇가지는 여전히 앙상하다. 춘래불이춘(春來不以春)이라는 말이 있듯이 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아닌 것이다.

 

종교로 만난 인연들

 

그 추웠던 겨울에서 깨어나 기지개 라도 펴듯이 순례의 길에 나섰다. 목적지는 서산에 위치한 천장사이다. 천장사에 이어 수덕사 내에 있는 정혜사도 함께 들러 보는 일정으로 출발하였다.

 

이번 순례길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7명이다. 그 중 5명은 불교교양대학 동기생들이다. 이미 8년째 법회`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단골멤버들이다. 나머지 두 명은 친구 따라 온 분들이다.

 

법우님들의 얼굴은 정기적 순례법회와 연등축제 등 각종 법회모임에 참석하다 보니 이제 낯이 익다. 서로 보면 반갑고 친구 같아서 그 분위기는 가족 이상이다. 이런 분위기는 종교로 맺어진 인연때문이라 볼 수 있다.

 

종교로 만난 인연들은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는다. 이해관계로 맺어진 관계는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깨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친구가 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인연으로 만난 법우님들은 이해관계에서 떠나 있다. 그래서 오래도록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인연도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순간 깨지게 되어 있다. 그런 예를 이번에 함께 한 법우님으로부터 들었다.

 

순례길을 떠나기 위해서 봉고차를 렌트하였다. 회비를 모아 렌트한 봉고차 안에서 이야기 꽃이 피었는데, 어느 법우님이 사기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것도 잘 아는 법우로 부터이다.

 

사기친 법우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전에 몇 번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기를 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법회모임에 참석하였던 듯 싶다. 그렇게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키자 피해를 당한 사람도 나오지 않게 되고 사기를 친 사람 역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조직이 와해 되는 요인이 바로 돈문제와 이해관계임을 알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  대하여 알지 못한 법우님은 돈을 주었는데 이는 정보가 공유되지 않아서 이다. 불교인이라면 모두 착하고 믿을만하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사람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한탄한다. 그런데 어느 법우님은 교회는 더 하다고 한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 교회도 다녔다는 법우님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의 상당수는 어떤 목적 때문이라 한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

 

봉고차는 천장사에 정오 바로 전에 도착하였다. 자그마한 암자라고 볼 수 있는 천장사는 인터넷 등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천장사가 유명해진 것은 아마도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통해서 일 것이다. 소설의 첫 장면이 천장사로 올라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부터 시작 되기 때문이다.

 

 

 

 

천장사 법당

천장사는 충남서산시 고북면 장요리에 소재하고 있다.

하늘에 감춰진 절이라는 천장사는 백제시대 담화선사가 수도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며 조선시대 말 경허선사가 이 곳에 기거하며 수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장사 가는 길

 

 

함께 간 법우님은 이번 천장사 순례를 앞두고 길 없는 길을 한 번 더 읽었다고 한다. 전에 두 번 읽었는데 이번에 한 번 더 읽으니 세 번 읽은 것이라 한다.

 

소설속에서 천장사는 잘 묘사 되어 있다. 특히 경허스님이 머물던 작은 방의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천장사에 올라가서 가장 먼저 찾은 것도 경허스님의 작은 방이었다.

 

 

 

 

 

 

경허스님의 작은 방

원성문(園成門)이라 불리우는 현판이 붙어 있다. 경허스님(1849-1912)은 조선말 한국선불교를 중흥한 증흥조로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이곳 한 평도 안되는 작은 방에서 약 1년동안 보임하였다고 한다.

 

 

 

경허스님이 머물던 방은 소설속의 묘사 대로 방은 무척 작았다. 종종 TV에서 보는 ‘고시원처럼 간신히 다리만 뻗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옆방이었다. 바로 옆방은 스님의 제자들이 머물던 방인데 세 명이 자던 방이라 한다. 이 방 역시 군대에 들어가면 수용연대에서의 칼잠을 연상시키듯이 작은 방이었다.

 

점심공양을 하고

 

점심무렵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허기졌다. 주지스님과의 차담이 예정 되어 있었지만 일단 공양부터 하기로 하였다. 공양하는 것 역시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에 공양실에 도착하자 부페식 공양이 준비 되어 있었다. 말이 부페이지 채식위주의 소박한 식단이다. 그 중에 특히 김치가 맛이 깊고 그윽해서 모두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였다.

 

 

 

 

 

 

점심공양

 

 

 

공양실이 있는 곳은 템플스테이용 숙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선정, 지혜등으로 이름 붙여진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는데, 금요일 저녁에 9명이 숙박하였다고 한다.

 

 

 

 

 

템플스테이용 숙소

 

 

 

그들은 오전에 주지스님으로부터 ‘초전법륜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 공양후 다음코스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우리팀 역시 주지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공양을 마친후 법당 왼편에 있는 주지스님 처소로 이동하였다.

 

다실(茶室)에서

 

법우님들을 천장사로 모시고 온 것은 주지스님의 법문을 들려 주기 위해서이었다. 대부분의 법우님들이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적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기도 어려운 환경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스님의 법문을 듣고 배우고자 함이다.

 

스님은 약 1시간 반 가량 재가불자들이 어떻게 신행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물론 차도 대접받으면서 들었다.

 

주지스님이 머무는 처소는 매우 작았다. 서울에서 소임을 보기 때문에 주말에만 들른다는 작은 처소는 일종의 다실이라 볼 수 있다. 다실에는 다기와 다구 등이 놓여 있어서 찾아 오는 사람과 차담을 나누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실

법당을 바라보고 왼편 뒤에 있다.

 

 

 

차를 만들어 주는 것은 부주지스님의 역할이었다. 주지스님이 소임을 맡고 있어서 평일날 자리를 비우기 때문에 부주지스님이 대신 한다고 하였다.

 

부주지스님이 만들어 주는 차는 매우 다양하였다. 색깔도 다양하고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귀한 차도 대접받았다. 그 중에 보이차를 가장 많이 마셨는데 끊임없이 마시다 보니 땀이 나고 오줌보가 가득 차는 듯 하였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재가자를 위한 주지스님의 법문의 요지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법문에 대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펴라.”

 

(두띠야빠사경-Dutiyapāsasutta-올가미경, 상윳따니까야 S4.1.5, 전재성박사역)

 

두띠야빠사경( 전도선언).pdf 두띠야빠사경(전도선언).docx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후 처음으로 담마의 바퀴를 굴리기 시작 하였을 때 다섯명의 제자가 탄생하였고, 그 후 야사의 출가로 이 세상에 아라한은 부처님을 포함하여 모두 일곱명이 되었다.

 

또 얼마 안 있어 야사친구 네 명이 출가하여 아라한은 11명이 되었고, 이어서 야사의 친구이자 양갓집자제들  50명이 한꺼번에 출가하여 이 세상에 아라한은 모두 61명이 되었다.

 

이렇게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린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아 승단으로서 규모를 갖추게 되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것은 처음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가르침을 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처럼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강조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주지스님은 앞서 문제를 제기하였던 기복신앙과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보시(dāna), 지계(sīla), 생천(saga)

 

현재 한국불교에서 대부분의 불자들이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된 가장 근본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부처님은 근기가 다양한 대중들을 위하여 다양한 설법을 폈는데, 그 중 “보시(dāna)하고 지계(sīla)하면 생천(saga)한다”는 가르침도 펼쳤다. 이는 선행을 많이 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가르침도 펼치셨다. 그것이 불교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초심자나 재가자 또는  입문자, 외도 등에게 착하고 바르게 잘 사는 가르침 즉, 윤리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살면 반드시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라는 가르침을 먼저 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보시-지계-생천의 가르침에 대한 것은 지구상에 출현한 고등종교라면 모두 공통되는 사항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

 

그런데 불교의 경우 이런 보편적인 가르침과 함께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듯이 공덕을 쌓을 것을 강조 하였고 이와 함께 반드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가르침을 이야기 하였는데,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전자만 있을 뿐 후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이 오로지 천상에만 나는 것에만 매달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대해서는 거들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전도 선언에서 보듯이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시계생천(施戒生天)’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고도의 철학적 사유와 실천적 수행을 기반으로 하는 다시 태어 나지 않는 열반(nibbāna)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불자들이 기복에만 머무르지 않고 부처님이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하였던 의미를 되새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뜨림 없이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그리고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법문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인터넷불교논객 실론섬

 

부처님은 다양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다양한 법문을 펼쳤다. 이런 법문을 대기설법이라하고, 그렇게 많은 법문을 하다 보니 팔만사천법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인터넷불교논객 실론섬님은 인터넷 토론사이트 카페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철학적/심리학적인 측면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측면 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철학적/심리학적인 측면만(수행적/교리적)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말 했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볼려고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 선불교의 영향으로 계율적인 측면을 무시하다 보니 더더욱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보다는 철학적/심리학적인 면에 너무 치중되어 있습니다.

 

(실론섬, 고타마 붓다는 윤회를 그토록 강조하였을까?|)

 

고타마 붓다는 왜 윤회를 그토록 강조하였.docx 고타마 붓다는 왜 윤회를 그토록 강조하였을.pdf

 

 

실론섬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두 가지면으로 보자고 한다. 하나는 윤리적 가르침이고 또 하느는 철학적 가르침이라 한다. 먼저 윤리적 가르침을 보면 부처님이 초심자, 재가자, 외도 등에 설한 시계생천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가르침은 앞서 언급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불교단멸론자들

 

시계생천만 강조하다 보면 영속론으로 흐르기 쉽다. 부처님 당시의 정통바라문교 는 영속론이었고, 이를 계승한 힌두교 역시 영속론이다.  요즘 한국에서 득세하고 있는 기독교 역시 영속론에 해당된다. 따라서 한국불교에서 오로지 열심히 보시하여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사실상 영속론과 다름 없는 것이다.

 

반면 열반에 대한 가르침에만 치중한다면 철학적으로 될 수 있다. 그런 열반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완전한 열반이 있고, 또 하나는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의 소멸에 대한 열반이 있다. 전자의 경우 윤회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불자들에게 당연히 받아 들여지지만, 후자의 경우 자칫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으로 악용 될 염려가 있다. 실제로 그런 예를 보았다.

 

인터넷 토론사이트에서 벌어지는 소위 불교단멸론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의 특징은 감각적 인지주의과학적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등 자신의 오감으로 인지 가능한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요지를 보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강조한다.

 

불교를 철학으로 격하하려는

 

하지만 이와 주장은  대단히 잘 못된 견해로서 불교의 한 측면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견해에 따른다면 불교는 한낱 철학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 격하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종교성을 빼 버리고 소크라테스나 플로톤 정도의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신본(神本)주의가 아니면 종교가 아니라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논리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부처님의 철학적 측면만을 이야기할 뿐 윤회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명백히 불교를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종교는 오로지 신본주의만이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宗敎(종교) religion(릴리젼)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오로지 일면만 아는 경우에 해당된다. 부처님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의 소멸 뿐만 아니라 윤회에 대해서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윤회에 대하여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언급한 것은 윤리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오로지 탐진치로 대표되는 열반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면 이는 고도의 철학적 가르침으로 밖에 볼 수 없고 법의 바퀴가 오늘날까지 굴러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동급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사성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고도의 철학적 가르침뿐만 아니라 시계생천으로 대표되는 도덕적인 가르침’, 윤회로 대표되는 윤리적인 가르침도 함께 펼쳤기 때문에 불교는 철학적, 도덕적, 윤리적 종교라고 정의 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은 오로지 불교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교를 으뜸가는 가르침이라하여 宗敎(종교, Siddhanta-Desana)’라 부른다. 반면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있지만 철학적 가르침이 부재한 신본주의 가르침을 ‘religion(릴리젼)’이라 부른다. 이렇게 종교와 릴리전은 다른 것이다.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불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고 철학적인 가르침이다. 이들 중 오로지 한 면만을 강조하였을 때 영속론단멸론으로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중도무아를 설하였는데, 이는 중생들이 빠지기 쉬운 상견과 단견을 경계하기 위해서라 볼 수 있다.

 

이는 시계생천만 강조하는 불교라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상견에 빠질 수 있고, 반면에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말하며 철학적 측면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단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내용이 풍부한 가르침을 펴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이와 같은 상견과 단견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리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법문을 할 때는 부처님이 설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놓치지 말고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2-03-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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