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깨달음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18. 11:08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깨달음은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말

 

미디어붓다 사이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였다. 염불수행으로 유명한 정목스님이 자신의 카페에서 이제열법사의 글 (“‘ 나’ 찾으라는 종정의 법문부처님의 연기·무아 가르침에 위배”) 을 반박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목스님의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나는 감히 말하지만, 만약 종정스님께서 연기, 공,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 이 승단에 몸담은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정도의 법문으로 깨달은 척 하는 사람은 선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연기, 공, 중도는 차원 높은 상식일 뿐입니다.

 

(정목스님, “종정스님께서 연기를 깨달으라고 했다면나는 이 승단에 몸담은 것이 부끄러웠을 것”, 미디어붓다 2012-04-17)

 

 

위의 문단을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연기와 중도 사상이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될 수 없다는 놀라운 내용이다. 선사들이 깨달은 경지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너머선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상식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이런 글을 접할 때마다 불자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느냐는 것이다. 선사들의 주장을 보면 한결같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말이나 언어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단지 방편법이고 소승법일 뿐이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뜻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가르침이야말로 진실된 것인데, 바로 그것이 ‘참나’라고 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계종 종정에 추대된 진제선사는 추대식에서 ‘참나’를 찾으라고 법문하였다. 그런 참나는 여러명칭으로 불리운다. 본마음, 불성, 진여, 본각, 주인공 등 수 없이 많다. 분명한 사실은 그런 명칭으로 불리우는 것을 찾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성품(nature)’을 보는 것이다. 또 이미 부처될 성품인 불성(Buddha nature)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성품만 보면 바로 깨닫고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견성성불’이라 한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성품만 보면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정견이고 불교수행의 목적이다. 이처럼 불성을 보기 위하여 10, 20, 30, 평생 동안 수행정진한다. 하지만 불성을 보아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종만의 독특한 인가 방식때문이라 보여진다.

 

문자와 언어로 이루어진 경전적 전승과는 달리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법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결코 문자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기 위해서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선지식’을 만나야 한디고 강조 한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법문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깨달음의 관건이라 말한다.

 

마음의 도장

 

오로지 마음과 마음에서 이심전심으로 전승되는 법은 또한 스승과 제자라는 사자상승에 의하여 전승된다. 따라서 선종에 있어서 스승 없이 깨달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선종에서 부처님 이래 마음과 마음에서 전승된 법이 현재 까지 내려 왔다고 보는데,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하여 파악 하는 것 역시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확인 된다. 스승이 질문하여 제자가 대답하는 선문답 형식으로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하여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주의 대답이 나오게 된 조주의 마음상태를 제자가 이해한다면, 그 제자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조주선사와 동일한 마음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조주와 같은 마음상태라면 조주가 왜 ‘아니오’라고 대답했는지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우라면 언제든지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주의 대답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대답은 상관없습니다.

 

이 선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듣는 사람의 마음이 조주의 마음상태와 같아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의 마음에 조주선사의 마음이 그대로 도장 찍혀지는 것이지요.

 

이 도장을 찍는 것을 인가(印可)라고 합니다. 인가의 뜻은 ‘마음 위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제25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25, 불교TV 2011-12-06)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문답에서 스승의 마음과 제자의 마음이 일치하면 깨달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마음의 도장’이 찍어 지는 데 선종에서는 이를 인가라고 한다.

 

공문서에서 도장이 찍히면 결재가 이루어져 효력이 발생되듯이 스승으로부터 마음의 도장을 받은 제자는 깨달은 자로서 인정이 되는 것이다. 부처의 성품을 보았으니 성불한 것이다.

 

깨달음 인증 확인서

 

버스웰 교수는 스승과 제자사이에서 깨달음의 인정에 대하여 스승의 마음의 도장이 찍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깨달음의 인가에 있어서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을 알았다. 불교tv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결됨으로 해서 향곡선사께서 뜻이 통해가지고 법을 주고 받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향곡선사가 인증서, 부처님부터 오늘날 까지 법을 통하는 인증서, 박사학위같이.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나니 그것이 무한진리야. 이제 그대에게 산 진리를 전하노니, 만인 앞에 진리를  (펴거나 거둘거나?-잘 들리지 않음) 그대에게 맡긴다 이게 인증서입니다. 이게 있어야 많은 사람의 (잘 들리지 않음)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깨달았다는 인증을 확인서입니다. 이게 있어서 인자 진짜 선지식이고 바른 지도를 할 수 있습니다.

 

(진제스님, <특집>조계종 13대 종정 진제 법원 대종사에게 듣는다, 불교TV 2012-03-09)

 

 

진제선사가 불교TV에서 대담한 내용이다. 발음이 불분명하여 일부 잘 들리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요지는 인증서에 대한 것이다. 선사는 마치 박사학위를 받듯이 깨달음에 대한 인증확인서를 스승인 향곡선사로부터 받았다고 하였다.

 

인증확인서라면 종이로 된 문서를 말한다. 버스웰교수에 따르면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일치하여 스승이 마음의 도장을 찍으면 깨달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는데, 진제선사는 스승으로부터 문서로 된 깨달음에 대한 인증확인서를 받았다고 하였다.

 

깨달음에 대하여 문서로 확인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검색을 통하여 더 알아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르러야 견성(見性)해서 참으로 진리의 도를 깨달았다 하며 인증서(印證書)를 주고 제자로 봉합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만 사람의 눈을 안 멀게 하고, 만 사람을 바른 진리의 문에 이르게 해서 진리의 전()을 주고, 받고, 펴고, 거두고 마음대로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내려오는 법칙입니다.

(석인은 물을 긷고 목녀는 꽃을 따네1, 해운정사 2011-02-11)

 

 

진제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해운정사 홈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도 역시 종이로 된 인증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하여 종이에 글을 써서 도장을 찍는 인증서 형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문서로 인정하는 것은 선종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스승들은 들어갈 때의 상태와 나왔을 때 상태에 대해 질문합니다. 수행자는 들어가는 것밖에 모르고 나왔을 때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승들은 열반에 들어갔다, 아니다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 아만심이 생길까봐 인정을 안 합니다. 수행은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니까 그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실제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묘원법사, 도() 과())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깨달았다고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인증서 같은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종의 경우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깨달음 도표

 

선종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서로 다르다. 선종의 깨달음은 부처의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문자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오직 뜻과 마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사이의 선문답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스승의 마음과 제자의 마음이 일치하였을 때 스승은 제자가 깨달았음을 인가 하는데 이를 마음의 도장을 찍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문서화 한 것이다.

 

그렇다면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왜 인가의 전통이 없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한 법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인가증명서 같은 것이 필요없음을 말한다. 깨달음의 단계에 대한 것이 문자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를 들 수 있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장애)

구분

수다원

sotāpanna

사다함

sakadāgāmi

아나함

anāgāmi

아라한

arahatta

10분결

 

 

 

 

 

 

10

가지

 

 

1.유신견

sakkāya-diṭṭ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오하분결 (거친마음의 족쇄)

 

-욕계에 속박

 

이 세상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계금취견

Sīlabbata-parāmāsa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욕망(탐심)

kāma-rāga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5. 적의(진심)

paigha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 집착

rūpa-rāg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오상분결

(미세한 마음의 족쇄)

 

-색계와 무색계에 속박

 

저 세상

7. 무색계 집착

arūpa-rāg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8. 자만

mān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9. 들뜸

uddhacc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10. 무명(치심)

avijjā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탐진치(번뇌)

소멸안됨

소멸과정

소멸

 

삼분도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수행의 시작

수행의 과정

수행의 완성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는 번뇌를 말한다. 위 깨달음에 대한 도표를 보면 단계적으로 번뇌가 소멸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중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수다원에 대한 조건이 있는데,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
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
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차 짜-비타--니 아밥보 까-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 sutta) 전문.docx

라따나경_ratana sutta_ 전문.pdf

 

 

 

라따나경(보배경, 寶石經) 10번 게송 Imee Ooi(黃慧音)창송

 

 

 

 

라따나경 10번 게송에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가지 족쇄 중 1번부터 3번까지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여 도력이 높아도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결코 깨달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 유신견)’이다. 자아나 영혼 등 어떤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가 되는 조건, 깨닫는 조건의 1순위는 유신견의 타파에 있다. 유신견이 타파 되지 않는다면 성자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의 단계도 4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마지막 단계가 아라한으로서 탐진치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바로 이런 점이 선종에서 말하는 부처의 성품을 보는 깨달음과 다른 것이다.

 

선종의 깨달음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라면,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객관적인 것이다. 선종의 깨달음에 대한 인정은 스승이 인가하지만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번뇌의 소멸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인가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의 깨달음

 

임제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재가불자들이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문자와 언어를 떠나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 법이 전승된다는 사자상승에 따라 법맥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 밝은 선지식이나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사실상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설령 선지식을 만나 수십년 수행정진 하였다고 하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재가불자들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볼 수 있다. 경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중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게송 142 산따띠 장관 이야기

 

부처님게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의 장관인 산따디와 관련하여 게송 142번을 설법하시었다.

 

어느 때 산따띠 장관은 국경의 반란을 평정하고 사왓티에 개선했다. 그러자 국왕 빠세나디는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많은 하사품을 내리는 한편, 그의 명예를 높여 주려고 화려한 연회를 베풀어 어여쁜 기생들로 하여금 그를 이레 동안 모시도록 해주었다.

 

왕이 베풀어 주시는 이레 동안의 향연에 산따띠 장관은 매우 만족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겼다. 그러다 보니 술에 취한 데다가 어여쁜 여인들에게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산따띠가 그처럼 향연을 즐기던 마지막 날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왕실의 코끼리를 타고 강변으로 목욕을 나갔다. 그는 그때 마침 탁발을 나오시던 부처님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평소 같으면 내려와서 부처님께 머리를 숙어 인사를 올리던 그가 이 날은 만취하여 부처님을 무시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서 어디 가시느냐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같은 그의 태도에 대해 미소를 지으실 뿐 다른 말씀이 없으시었다. 이에 아난다 테라는 부처님께서 왜 미소를 지으시는지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아난다여, 저 장관은 지금 저 모습 그대로 머지 않아 여래를 찾아올 것이니라. 그때 그는 여래의 짧은 법문을 듣고 나서 아라한을 성취할 것이며 아라한이 된 뒤 바로 빠리닙바나를 실현할 것이니라.

 

산따띠 장관 일행은 이날 하루를 강변에서 목욕을 한 뒤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하며 아주 즐겁게 보냈다. 그런 뒤 저녁 때가 되자 마지막 밤을 어여쁜 기생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즐기려고 아늑하고 조용한 정원으로 갔다.

 

그날 춤을 출 여인은 산따띠가 사랑하는 기생이었는데, 그녀는 장관의 마음에 들려고 이레 동안 금식에 가까운 정도의 음식만 먹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 기생은 즈날 저녁 열심히 춤을 추다가 그만 위장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치뜬 상태로 급사해 버리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사태는 산따띠 장관의 술기운을 확 걷어가 버렸다. 그는 어여쁜 여인을 잃어 버린 데 대한 큰 충격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망연자실했다.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커서 그는 어디든지 가서 마음의 의지처를 찾고 싶은 생각만 강렬했다. 그래서 그는 동행자들에게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가자고 독촉했다.

 

그는 수도원에 도착하여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채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래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있었던 일을 부처님께 세세하게 말씀드렸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장관도 말문이 열려서 부처님께 이렇게 애원했다.

 

「부처님이시여, 제발 저로 하여금 이 슬픔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하여 제가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선 말씀하시었다.

 

「여래의 아들이여, 안심하라. 너는 너를 도와줄 스승을 바르게 찾아왔나니, 여래는 너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스승이며, 너의 참다운 의지처가 되어 주겠노라. 장관이여, 네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 동안 나고 죽는 윤회를 거치면서 그 여인이 죽게 되어 흘린 탄식의 눈물은 이 세상의 모든 바닷물보다도 오히려 많으니라.

 

부처님께서는 산따띠 장관을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신 다음 게송을 읊어 주시는 한편 설법도 해주시었다. 그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두고 너는 여인에 대해 집착해 왔으나 이제 너는 마땅히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너는 미래에 다시는 그런 집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집착하려는 마음조차도 먹지 말라. 네가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욕망과 색욕은 조용히 가라앉게 되고, 그러면 너는 가만히 네 마음을 관찰하여 마침내 닙바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설법을 들은 산따띠 장관은 즉시 아라한을 이루었다. 아라한이 된 그는 자기를 관찰해 보고 자기 수명이 다했음을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게 이렇게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빠리닙바나를 실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저의 시간은 다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써 응락하시었고, 산따띠는 하늘 높이 자란 야자나무높이만큼의 높이로 허공에 솟아오르더니 결가부좌를 한 채 불()의 삼매에 들어 그 자리에서 빠리닙바나를 실현했다. 그렇게 열반에 든 그의 몸은 자기 몸에서 나온 불의 기운에 의해 허공에서 스스로 불꽃에 휩씨여 화장되었고, 벼는 사리가 되어 떨어졌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깨끗한 천을 펴서 그 사리를 모두 모으라고 하시었다.

 

많은 대중이 모인 어느 때 빅쿠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산따띠는 장엄스런 장식이 달린 장관의 관복을 입을 채 빠리닙바나에 들었습니다. 그를 수행자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 아니면 브라흐민(속인)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그는 그 둘 모두로 불러도 좋으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비록 그가 화려한 장관의 옷을 입었어도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감정을 다스려 도의 관찰을 이루었고

청정한 마음을 일체 중생들에 대한 원한심을 버렸다면

그는 브라흐마나이자 사마나이자 빅쿠이다.

 

(법구경, Dhp 142, 거해스님)

 

 

 

 

 

 

 

 

 

일반적으로 재가자는 사다함까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나함이 되면 모든 감각적 욕망이 소멸되기 때문에 가정생활을 유지 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담마딘나 비구니이야기에서 전남편 위사카가 아나함이 되어 부부관계를 끝내자는 이야기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따라서 아나함이 되면 상가에 들어가 계속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불교의 평등사상

 

그런데 법구경 인연담 142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매우 드믈게 재가자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된 케이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출가수행자에게만 인정되던 아라한과의 성취가 위와 같이 재가신자에게도 인정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라한의 개념이 좀더 인간적인 성격으로 변하는(大天 五事說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것도 그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교의 평등사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박경준 교수, 재가자는 출가자에 비해 하열한가, 불교평론)

 

 

재가자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법구경의 게송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한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남녀노소,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반을 실현한 재가자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Alankaro cepi sama cateyya          알랑까또 쩨삐 사망 짜레이야

santo danto niyato brahmacāri         산또 단또 니야또 브라흐마짜리

sabbesu bhūtesu nidhāya dāṇḍa       삽베수 부떼수 니다야 단당

so brāhmao so samao sa bhikkhu.     소 브라흐마노 소 사마노 사 빅쿠

 

비록 그가 화려한 장관의 옷을 입었어도

그의 마음이 고요하고 번뇌로부터 벗어났고

감정을 다스려 도의 관찰을 이루었고

청정한 마음을 일체 중생들에 대한 원한심을 버렸다면

그는 브라흐마나이자 사마나이자 빅쿠이다.

 

(법구경, Dhp142, , 거해스님)

 

담마빠다전문(빠알리-영어-한글).hwp

 

 

여기서 마지막 구절 소 브라흐마노 소 사마노 사 빅쿠(so brāhmao so samao sa bhikkhu)을 보면, 이는 산따띠 장관은 형식상으로는 속인이지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브라흐마나(아라한)이면서 사마나(출가수행자)이자  빅쿠(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한 남자 수행자) 라는 뜻이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들은 부처님이 경계에 올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스승과 제자사이의 사장상승으로만 비밀리에 법이 전승된다는 것과 다른 것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번뇌의 소멸에 대한 것을 보면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2012-04-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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