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atthita) 와 무(natthita) 를 떠난 중도의 가르침 , 깟짜나곳따경(S12.1.2.5)
찌라시에서 본 박아무개스님
종종 찌라시가 배달되곤 한다. 그런 찌라시 중에 눈의 띄는 것이 하나 있다. 한 때 사형수들을 돌보았다고 하여 TV에도 출연한 바 있고, 다수의 책도 쓴 바 있는 박아무개 스님의 것이다.
찌라시에서 본 박아무개스님은 더 이상 사형수들의 대부가 아니었다. 사주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내용과 함께 예식장에서 강연회를 하는 스님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찌라시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받았는데, 예전 찌라시를 보면 지역의 체육관에서 법회를 할 정도로 큰 규모이었던 같은데, 이번 찌라시에서는 예식장으로 바뀐 것을 보니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이처럼 수도권 도시에서 자주 찌라시를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박아무개스님의 강연은 전국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찌라시에서 운명감정과 더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부적’이다.
지난 2월 대추나무 부적에 대한 ‘글(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평온(우뻭카)’을 유지해야 하는가)’을 쓴 적이 있다. 글에서 어느 법우님이 암에 걸린 남편을 위하여 벼락맞은 대추나무부적을 400만원에 구입하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 후 들린 이야기가 있었다. 그 부적을 사고 난 후 일주일후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모두 아쉬워 하였다. 그래도 몇 년은 못되더라도 몇 개월은 더 살지 않을까 하였는데 너무 일찍 급작스럽게 사망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 숙작인설(宿作因說), 우연인설(偶然因說)
사람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무언가 붙잡으려 한다. 특히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의 경우 더욱 더 그렇다. 그러다 보니 쉽게 찾는 곳이 점집이나 무당집이라 한다. 그런 곳은 많이 가진 자들이나 상대 할 것 같은 절이나 교회, 성당과 달리 부담 없이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고, 더구나 처방까지 쉽게 내려 준다고 하니 돈 없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한다.
자신의 힘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의지할 곳을 찾는다. 절이나 교회, 성당 같은 제도권 종교단체가 있고, 운명감정소 같은 비제도권 단체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 곳은 어떤 이론을 배경으로 할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거론 되는 이론이 다음과 같은 세가지이다. 마성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첫째가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이다. 자재화작인설은 신의설(神意說)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통 바라문의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모두 범천(梵天)이나 자재천(自在天) 등의 최고신이 화작창조(化作創造)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신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된다. 세상의 일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숙작인설이다. 숙작인설(宿作因說)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행복과 불행의 운명은 모두 우리가 과거세에서 행한 선(善), 악업(惡業)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운명은 전세(前世)의 업의 결과로서 우리가 태어난 때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위를 하고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은 내세의 운명을 규정하는 원인을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다.
셋째로 무인무연론이다. 우연인설(偶然因說)은 무인무연(無因無緣)설이라고도 하는데, 이 설에 의하면 사회, 인생의 운명은 인과업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길흉화복은 일정한 원인이나 이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일어나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마성스님)
마성스님이 말한 것은 세가지이다. 즉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 숙작인설(宿作因說), 우연인설(偶然因說)이다. 이를 달리말하면 창조론, 운명론, 단멸론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런 현상은 현재 지금 여기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론의 경우 ‘제도권’에서 믿고 있다. 주로 기득권 세력이 이에 해당된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를 기정 사실화 하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보호 받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일신교가 이에 해당되는데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속론을 채택하고 있다.
운명론의 경우 비제도권에서 주로 믿는다. 점이나 사주관상, 운명감정 등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약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론과 관련된 곳을 찾는 사람들이 전국민의 ‘삼분의 일’에 달한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운명론을 믿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연론의 경우 모든 것이 우연발생으로 보기 때문에 인과를 부정한다. 그러다 보니 허무적 쾌락주의에 빠지기 쉽다. 그런 예를 ‘밤문화’로 알 수 있다. 도시가 밤만 되면 불야성을 이루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전국민의 약 ‘10%’정도로 본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또 옛날에도 이런 현상이 있었다. 부처님당시에도 물론 있었다.
외도(外道)란
2600년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도 현재 한국에서 보는 것과 같은 사상의 조류가 있었다. 그 때 당시 정통브라만교는 창조론과 영속론을 믿고 있어서 오늘날 유일신교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 육사외도라 하여 여섯가지 삿된견해를 가진 사상이 난무 하였는데 이런 사상들 중에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이 운명론과 우연론 같은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부처님은 부처님당시 ‘상견’으로 대표되는 정통브라만교와 ‘단견’표현되는 육사외도에 모두 ‘삿된견해’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연기법으로 논파하여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밝혀 내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을 ‘외도’라 한다. 외도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일까.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해서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외도(外道)’로 번역된 아냐티띠야(aññatitthiya)는 ‘다른 쪽 여울에 있는 자’라는 뜻이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길을 가는 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중국에서 외도(外道)로 옮겼고 영역은 heretic이다.
부처님 당시의 이런 외도 수행자로는 주로 편력수행자(paribbājaka)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 외 사문(沙門, samaṇa), 바라문(bramaṇa), 나체 수행자(acela)들이 언급되고 있다. 아울러 경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바라문들은 주로 결혼한 자들이었으며 다른 자들은 대부분 독신 수행자로 이들은 모두 각 파에서 설정한 해탈을 추구하며 수행을 하던 자들이었다. 한편 주석서와 복주석서에는 bāhiraka(밖에 있는 사람)란 표현도 많이 사용하며 경에서도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사야도의 십이연기,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주해서, 김한상(수마나)님역)
부처님 당시의 외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견을 따르지 않는 자들 모두를 말한다. 그런 외도는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여섯가지 사상가들의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
고대인도의 외도사상
부처님 당시 여섯사상가의 의하여 형성된 사상을 ‘육사외도 (六師外道)’ 라 부른다. 육사외도의 특징은 일종의 ‘반문화적’성격이라 한다. 이는 BC 5-3세기 고대인도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유파를 말하는데, 현재 힌두교의 기본성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배치 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사외도의 사상은 기존의 주류 제도권 기득권 세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일종의 ‘반브라만주의’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하여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고대인도의 외도사상
No |
외도사상 |
사상가 |
비고 |
1 |
브라만교 |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 창조론, 영속론, 상견 |
2 |
도덕 부정론 푸라나 까싸빠(Pūrana Kassa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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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원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멸론 |
3 |
숙명론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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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소까(Asoka)왕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命)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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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작인설 (宿作因說), 운명론 단멸론 |
4 |
유물론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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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따는 모든 것이 지·수·화·풍의 4요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현세만이 있을 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4요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로까야따(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는 쨔르바카(Cārvāka)라고도 한다. |
우연인설 (偶然因說), 단멸론 |
5 |
7 요소설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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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쿠다는 지·수·화·풍의 4요소 외에 괴로움, 즐거움, 영혼을 더해 7요소를 인정했는데,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이 7요소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았으며, 칼로 사람을 베어도 칼이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한 것뿐이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승론학파(勝論學派, Vaiśeṣika)로 계승 발전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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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회의론 산자야 벨라띠뿟따(Sañjaya Belaṭṭip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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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야는 ‘내세, 선악의 과보, 윤회’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회의론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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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자이나교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ap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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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의 생애는 부처님과 유사하며 비슷한 시대에 왓지국(Vajji)의 웨살리(Vesāli)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한 지혜를 성취하여 30년간 교화를 펼치다가 72세에 사망하였다.
모든 존재를 Jīva(영혼)과 Ajīva(비영혼)로 나누고, 비영혼을 다시 Dharma(운동의 조건), Adharma(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업(karma)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부터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함으로써 윤회에 속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나체로 수행했기 때문에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불리었다.
그 뒤에 자이나교는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3대 종교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인도에는 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다.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농업을 버리고 상업을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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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당시 고대인도의 사상의 특징을 보면 크게 영속론과 단멸론으로 나뉘어 진다. 영속론의 경우 정통브라만교가 이에 해당되고, 이에 저항하는 육사외도의 경우 주로 단멸론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삿된 견해는
이들 사상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 입장에서 보면 삿된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삿된 견해라 볼 수 있는데, 이중 가장 삿된 견해는 어떤 것일까.
일반적으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속론의 경우 계율을 지키고 공덕을 쌓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비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육사외도의 경우는 다르다. 육사외도 중에서도 가장 많이 비판 받는 사상이 단멸론이다.
단멸론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더 이상 내세는 없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부정되고, 인과도 부정된다. 이런 가치관에 따르면 도를 닦거나 공덕을 쌓을 이유도 없다. “어차피 단 한번 뿐인 인생인데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유도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견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런 단멸론은 육사외도중에서 뿌라나 까사빠(Pūrana Kassapa)와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와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사상이 대표적이다.
양극단을 떠나서
이처럼 상견(영속론)과 단견(단멸론)에 사로 잡혀 있는 사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중도연기를 설하였다. 이는 상견이나 단견라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연기법을 말한다. 이런 중도연기에 대하여 잘 표현한 것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Sabbam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2.5, 전재성님역)
깟짜나곳따경(S12.1.2.5).docx 깟짜나곳따경(S12.1.2.5).pdf
상윳따니까야 주석에 따르면 “모든 것은 존재한다” 와 “모든 것은 하나이다” 는 영원주의(常見)에 해당하고,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와 “모든 것은 다양하다” 는 허무주의(斷見)에 해당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양극단이라 볼 수 있다.
중도의 가르침이란
‘전부’에 해당되는 것이 브라만사상이고, ‘전무’에 해당돠는 것이 육사외도 중에서 볼 수 있는 유물론적 사상이다.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친 사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고 경에서 말씀 하셨다. 그 중도란 어떤 것일까. 경에서 이어지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2.5,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중도의 가르침이다. 이는 연기법을 말한다. 이는 연기의 일반적인 원리인 ‘차유고피유 차생고피생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과 ‘12연기’ 등으로 표현된다. 이런 중도사상에 입각하면 양극단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앗티따(atthita, 有)와 낫티따( natthita, 無)
양극단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런 존재와 비존재를 빠알리어로 ‘앗티따(atthita)’와 ‘낫티따( natthita)’ 라 하고, 한자어로 유(有)와 무(無)라 한다.
이때 유는 ‘존재의 영원성’을 말하고, 절대적으로 소멸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를 상견이라 한다. 반면 무는 ‘존재의 허무성’을 말하고 소멸 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견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견해가 왜 모순일까.
유일신교 신학에서는 창조주에 대하여 ‘절대유(絶對有)’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절대유는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무(無)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항상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창조주는 존재 자체가 보장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신은 완전 그 자체이어서 항상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동시에 미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진선미 그 자체의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런 신은 있을 수 없다. 특히 그리스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질료와 형상이 있어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있는 것에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스로 원인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교에서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의 최초의 사실을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주의 시작이나 윤회의 시작은 알려질 수 없고 무시 이래로 윤회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최초의 사실을 설정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와 같은 절대자를 가정해야 하는 논리적 허구이며, 무한소급은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허구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므로 인식론적으로 효력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며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은 시설되지 않는다'
고 하셨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글)
스스로 원인없이 존재하는 자재천이나 창조주는 논리적 허구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최초의 사실을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부동자’라 한다.
또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사건에 대하여 무한소급하는 것도 존재론적 허구라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무한 소급하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다고 하였고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윤회하기 때문에 우주의 시초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은 것이다.
잘 되도 못 되도 ‘신의 뜻’
따라서 불교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하나의 원인에 의하여 나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절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 대신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해제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상대적인 시작으로서의 원인이 있고,
상대적인 귀결로서의 결과가 있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글)
절대적 유, 즉 절대유에서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전형적인 유일신교적 발상이다. 고대 인도에서 우파니샤드 사상 역시 이와 다름없다.
이처럼 절대유에서 만들어진 세계는 ‘인과동일적’이라 한다. 이는 인과를 무시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문구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한다.
“진아(眞我)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 자신의 어떠한 행위에 의해서도, 어머니나 아버지를 죽이고 도둑질이나 영아를 살해하더라도... 그것으로 세상이 해를 입지 않는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글)
이것은 신과 나 사이에 대한 절대성을 부여하는 과도한 진아사상이라 한다. 이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원인을 절대유의 신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잘 되도 ‘신의 뜻’이고, 못 되도 ‘신의 뜻’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렇게 매사 ‘신의 뜻’ 또는 ‘신의 탓’으로 돌려 버렸을 때 인과가 무력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유의 이론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또한 ‘신의론(神意論)’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상견으로 대표되는 신의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철학으로 보는 사람들
또 하나의 극단이 있다. 그것은 육사외도 중에서 유물론이 대표적이다. 이런 유물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고, 또 하나는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의 ‘7요소설’이다.
이 들 사상가의 주장은 현세에 바탕을 둔 도덕부정론들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잘 사는 것에 대하여만 관심을 둔다. 이렇게 현세만 강조하고 내세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보니 자연스럽게 ‘허무주의’로 흐른다.
그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감각적으로 인지가능한 것만 믿는다. 이런 점은 오늘날 과학적 실증주의와 유사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후세계나 사후 윤회하는 것 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과학적 실증주의는 현대판 유물론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를 믿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인정하다 보니 불교가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유물론자의 특징은
이런 유물론자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차별이] 없다.
2. 모두 물질로 구성되었으므로 선악업의 과보가 없다.
3. 선악업의 과보가 없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의무] 아버지[에 대한 의무]와 같은 윤리적인 책임감도 없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5권 해제글)
유물론자들의 주장은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물질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감각적 유물론에 토대를 둔 쾌락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유물론자에 대하여 인간의 사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허무론’이라고 부르고 또한 ‘단멸론(斷滅論 ucchedavada)’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허무론과 단멸론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은 유물론 뿐만 아니라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의 ‘숙명론’, 푸라나 까싸빠(Pūrana Kassapa)의 ‘도덕부정’론도 이 범주에 해당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육사외도 대부분이 허무론과 유물론으로 특징지워지는 ‘단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였을 때
단멸론(단견)은 영속론(상견)과 더불어 매우 극단적이다. 이처럼 양 극단에 치우쳐 있는 것이 부처님당시의 사상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이런 극단이 지금도 면면히 흘러 왔다는 것이다.
이런 양극단의 사상의 특징은 인과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신의론자나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유물론자가 인과에 대하여 무한소급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선형적인 인과의 작용을 무력화 시킨다.
이처럼 절대적 유와 무의 상정은 있는 그대로의 경험세계의 실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Dvayaṃnissito kho'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 atthitañceva natthitañca.
Lokasamudayañca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ṃ kho kaccāna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Kacchāna,
the worldling for most of the time is settled in either `there is' or `there isn't.'
Kacchāna,
to him who sees, the arising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with right wisdom, `the world is not' does not occur. To him who sees, the cess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with right wisdom, `the world is' does not occur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였을 때 극단적인 견해는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연기의 본질이다.
유와 무를 떠난 중도의 가르침
종교적 제도권에 속하는 약 30%의 영속론자들과 종교적 비제도권에 속하는 약 30%의 운명론자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약 10%의 단멸론자들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는 사상의 흐름이다. 이런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이와 같은 영속론와 단멸론, 그리고 운명론 등에 대하여 삿된견해로 간주하였다. 부처님의 정견을 모르는 어리석은 견해로 보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정견은 사성제로 대표된다.
사성제는 연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 연기는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有, atthita)의 세계는 성립하지 않고, 또한 절대적 무(無, natthita)의 세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유와 무를 떠난 중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2012-04-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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