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문의 진수를 보는 듯, 마하시사야도의 도성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4. 11:46

 

법문의 진수를 보는 듯, 마하시사야도의 도성제

 

 

 

 

 

도제道諦 - 도의 성스러운 진리

 

 

Ida kho pana, bhikkhave,        이담 코 빠나 빅카웨

dukkhanirodhagāminī               둑카니로다가-미니-

paipadā ariyasacca—            빠띠빠다- 아리야삿짬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아야메와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

seyyathida—                     세이야티담

sammādiṭṭhi                        삼마- 딧티

sammāsakappa                     삼마-상깝빠

sammāvācā                         삼마---

sammākammanta                     삼마-깜만따

sammāājīva                        삼마아--

sammāvāyāma                       삼마---

sammāsati                         삼마-사띠

sammāsamādhi                      삼마-사마-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우리는 이미 아주 상세하게 도제道諦에 대하여 언급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 중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는 몇 가지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도의 여덟 가지 중에서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는 혜에 속하고, 정어正語와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에 속하며, 그리고 정정진正精進과 정념正念, 정정正定은 정에 속합니다.

 

우리는 계와 정의 도를 다시 상세히 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혜에 속하는 정견正見도 더 이상 상세하게 해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정견正見에 대한 해설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바른 견해正見에 대한 해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정견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지혜,

이를 일러 정견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정견에 대하여 내리신 정의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성제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아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나오는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명상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한 명상수행을 말씀하시기 위해,

서두에 네 가지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셨다.

 

 

네 가지 진리 가운데 처음 두 가지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윤회(와따, vaṭṭa)와 관련이 있습니다. 뒤의 두 가지 진리인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전환, 파괴(위와따, vivaṭṭa, 還滅)와 관련이 있습니다.

 

비구 수행자는 오직 고제와 집제인 윤회의 진리(와따 삿짜, vaṭṭa-saccā)만을 주제로 하고, 멸제와 도제인 파괴의 진리(위왓따 삿짜, vivaṭṭa-saccā)는 명상주제로 삼지 않습니다.3

 

 

3.

이는 비구 수행자는 위빠사나 명상을 닦을 때 세간의 진리인 고제와 집제만 알아차리고 명상의 적합한 대상이 아닌 출세간의 진리인 멸제 와 도제는 알아차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출세간의 진리인 멸제와 도제를 명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주석서는 이러한 출세 간의 진리는 범부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 또는 열반으로 전향하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실제로 일반 범부들은 도와 과를 수행의 대상으로 할 수도 없고, 수행을 통해서 성자의 대열인 종성(種姓, 고뜨라부. gotrabhū)4에 이르기 전까지는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혜안을 갖지 못한다.

 

4.

종성(種姓 gotrabhū), 성인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 또는 열반으 로 전향하는 첫 번째 마음이다. 즉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수다원도 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종성(種姓 gotrabhū)이라고 부른다.

 

선禪의 증득의 경우, 이것은 욕계의 '범부 혈통'에 속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드디어 고귀한 마음의 혈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종성이라는 이름을 얻고, 첫 번째 도인 수다원의 도의 경우, 이 순간에 범부의 혈통에서 성자의 혈통으 로 바뀌기 때문에 고뜨라부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이 순간의 마 음을 종성의 지혜(gotrabhū-ñāa)라 한다. 또 이 종성의 지혜는 수행자 의 지혜가 도(magga)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뜻에서 성숙 의 지혜라고도 한다.

 

 

‘종성種姓의 마음’은 위빠사나 지혜가 완전히 계발되고 ‘적응의 지혜(아눌로마 냐나, anuloma n~a-na)’가 일어난 다음에 일어납니다.

 

종성種姓이 오면 곧바로 도과를 성취합니다. 그래서 범부는 진정한 열반, 또는 도과를 명상의 대상으로 삼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대상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가르침이나 지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고요함을 수행의 대상으로 하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탐욕을 버리는 것(離慾, 위라고. virago)과 같은 열반의 속성을 알아차리는 것은, 집중이나 고요함을 얻기 위한 수행으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수련은 오로지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을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바로 성스러운 도과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은 아닙니다. 어떠하든지 간에 이 명상수련은 범부가 아닌 이미 열반을 체험한 성자에게나 적합한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시작부터 열반에 머물면서 도과를 얻고자 노력한다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수행입니다.

 

비구는 스승으로부터, 간단히 오온은 고제苦諦이고, 갈애는 집제集諦라고 배웁니다. 또 물질의 무더기인 색온色蘊, 느낌의 무더기인 수온受蘊, 인식의 무더기인 상온想蘊, 행의 무더기인 행온行蘊, 식의 무더기인 식온識蘊으로 이루어진 오온을 더 포괄적으로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색온色蘊이란 네 가지 근본요소(四大)와 거기서 파생된 물질을 의미한다는 것 등을 배웁니다.

 

그래서 비구 수행자는 스승으로부터 앞의 두 가지 진리인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를 간단히 배우기도 하고, 혹은 포괄적으로 배우고 난후 그것들을 반복해서 암송하고 이를 수행의 대상으로 지켜봅니다.

 

나머지 두 가지 진리에 대해서는 스승으로부터, 이것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이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로 인도하는 진리라는 것, 그래서 이 길이 지향해야 할 길이고 좋은 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두 가지 출세간의 진리에 대하여 듣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비구는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행동하면, 사성제를 한 번에 꿰뚫어 알고 이해합니다. 그는 통찰지혜를 통하여 사성제를 한 번에 모두 관통합니다. 비구는 괴로움을 바르게 잘 이해였음을, 갈애를 버리고 소멸시켰음을, 소멸을 실현했음을, 도가 계발되었음을 통찰지혜(pat.ivedha)로 알게 됩니다. 비구는, 괴로움을 바르게 잘 이해하였음을, 갈애를 버리고 소멸시켰음을, 소멸을 실현했음을, 도가 계발되었음을, 모두 통달하여 꿰뚫는 지혜인 관통5으로 알게 됩니다.

 

 

5.

청정도론(Vis.XXX.92)과 같은 주석서에서는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을 이렇게 관통(abhisamaya)이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통달지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관통한다.

버림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관통한다.

도 닦음을 관통하여 도를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

무엇을 말했는가?

소멸을 대상으로 삼아 네 가지 진리에 이르고, 보고, 통찰한다.

 

<참고> 청정도론(Vis.XVI.84)에 따르면 진리에 대한 지혜(sacca-ñāa)는 두 가지로, ① 수각지(隨覺智 anubodha-ñāa)와 ② 관통지(貫通智 paivedha-ñāa)가 있다.

 

"수각지는 세간적인 것으로, 남으로부터 들어서 소멸과 도가 일어난다. 관통지는 출세간적인 것으로, 소멸을 대상으로 삼고, 역할에 따라 네 가지 진리를 통찰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도 본다.(S.v.437)' "

 

 

앞서 말한 대로 비구가 도를 실현하기 전에,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워서 질문하고 ,반복해서 외우고 그리고 이것을 꿰뚫어보는 숙고로 통달하면 두 가지 진리인 고제와 집제를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 지혜를 얻는 과정에서,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우고, 묻고, 외우는 4 가지는 단순히 경전을 공부하는 것일 뿐이고, 통찰로 숙고하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한 통잘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멸제와 도제에 대해서 아는 지혜는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얻어집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해서 성스러운 도를 실현하면, 괴로움인 고제에 대하여 바르게, 잘 이해하게 되고, 고의 원인인 집제를 버리며,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제를 계발하는 등의 과업을 성취하게 되어 완전하게 다 이해합니다. 괴로움의 소멸인 멸제를 실현하어 전부 파악하여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따르면 우선, 멸제와 도제는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멸제와 도제에 대하여 특별히 알아차리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두 가지인, 고제와 집제에 대한 지혜는, 배워서 알아야 하고 또 이에 대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야 합니다.

 

들어서 아는 지혜, 문혜聞慧

 

우리가 인용한 주석서에 나오는 것처럼 오온五蘊이 고제苦諦이고 갈애가 집제集諦라는 것을 그냥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서 오온이란 초전법륜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인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오온을, 보고 듣는 순간에 나타나는 대상들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관련 항목에서 집제集諦를 종합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이 두 진리인, 고제와 집제를 아는 것은 연기법을 간략하게 아는 것이 됩니다.

 

청정도론의 대복주석서인 마하띠까에서는, 아싸지 장로가 설한, 모든 법은 원인이 있어서 생겨나며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말씀하신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agato aha(예 담마 헤뚭빠바와 떼삼 헤뚬 따타가또 아하),6라는 게송을 통해서 전체 연기법을 간략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6.

연기법(paiccasamuppāda)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후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 었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王舍城)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 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 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싸와 꼴 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2대 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뿌따와 마하 목갈라나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싸는 한 사문의 엄 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 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 다. 이 사문은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 를 성취한 아싸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거룩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 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떤 법(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겸손하게 말했다.“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우빠띠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 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싸지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 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게송을 한 수 읊었다.

 

그것이 바로 위의 게송이다. 우빠띠싸는 이 게송을 듣자마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는 것, yamkiñci samudaya dhammam sabbam tam nirodha dhammam’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율장, 대품에 나오는 전문은 다음과 같다.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 vādi mahā samano (Vin.i.40)

 

 

율장, 대품大品의 주석서에서도 아싸지 장로가 설한 ‘모든 법은 원인이 있어 생겨나며, ye dhammā hetuppabhavā’라는 게송으로 고제인 오취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싸지 장로는,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말씀하신다. tesam hetum tathāgato āham’ 라는 게송으로 집제를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제와 집제를 경청해서 간단히 배우고 나면 연기법도 간단히 배우게 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표와 원형 도해로 설명되는 12연기를 완전히 숙달하지 않으면 위빠사나를 계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주석서와 복주석서의 이러한 말씀과 어긋나는 것이고, 수행교법(빠띠빠띠-사사나, paipatti-sāsanā)7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7.

상좌부 불교에서는 법(Dhamma)교학(pariyatti), 수행(patipatti), 통찰(pat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교학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수행이란 ..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통찰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배움은 수행의 도, 수행은 통찰의 토대가 된다. 교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수행은 성위聖位를 증득하는 돌파구가 되기 때문이다.

 

 

빨리경전인, 마찌마 니까야(中部) 근본오십품根本五十品의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hāsankhaya Sutta)에서 우리는, 들어서 아는 문혜聞慧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오, 천인들의 왕인 제석천이여,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모든 법이 영원하고,

즐거운 것이며,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한 견해가 아니며

사실이 아니라고 들어서 배운다.8

 

 

8.

애진소경(愛盡小經 Culatahāsankhaya Sutta)의 관련 경문은 다음과 같다.

 

"간략하게 말해서 어떻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천인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되는가?

 

천인들의 왕, 제석천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 만약 비구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배운다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아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바르게 알아서,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나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한다.

 

그는 이러한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함을 알아차리며, 사라짐을 알아차리며, 소멸을 알아차리며, 버림을 알아차리면서 세상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태어나는 일이 없다.' 라고 분명히 안다.

 

천인들의 왕, 제석천이여, 간략하게 말해서 이렇게 하면 비구는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천인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된다.(M37)

 

 

이것은 비구가 보고 들을 때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門)에 나타나는 정신과 물질인 오취온을 영원한 것, 즐거운 것, 자아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일시적인 것이고, 괴로움은 있게 마련이며, 자아도 없다고 보면, 그는 충분히 들어서 아는 지혜인 문혜聞慧9를 지닌 것이고 이로써 스스로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9.

들어서 아는 지혜(聞慧)로 번역한 수따마야냐나(suta-maya-ñāa) suta(, 들음) maya(만들어진, 이루어진), ñāa(지혜)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이 suāti의 의미를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냥 ‘들었다’로 이해하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등 고대 인도의 전통에서는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듣는다는 것 이상으로서 ‘배웠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모든 가르침은 문자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승의 입에서 제자들에게로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로 빨리 경전에서 다문(多聞)의 의미로 많이 나타나는 바후수따(bahussuta)는 영어로도 ‘very learned’라고 번역되듯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보다는 많이 배워 지식과 학문과 수행과 인격이 고상하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법문을 이어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들어서 배운 비구는

알아차림과 실제 경험으로 모든 법을 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명상수행을 통해 어떻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ñāa)’등을 얻는가에 대하여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모든 법은 무상· 고· 무아이다.

2. 들어서 아는 지혜인 문혜聞慧로 충분하다.

3. 명상수행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4. 그리고 정신과 물질은, 무상과 불만족()의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1번과 2번은 (수행을 하는 데) 간단히 들어서 아는 지혜로 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3번은 보고, 듣는 등의 모든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려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보고, 듣는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상 두 가지 지혜를 초월지abhiññā pan~n~a-라고 하는데, 이는 세 가지 통찰지(빠린냐, parin~n~a-)가운데 하나로서 이미 실현을 이룬 지편지(知遍知, n~a-taparin~n~a-)를 말합니다.

 

4번은 ‘모든 법을 경험하고 모든 법을 두루 안다. sabba dhamma abhiññāya, sabba dhamma parijānāti, ’라는 가르침과 같이 모든 법에 대한 완전한 지혜와 모든 법이 가지고 있는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통찰지혜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추론에 의한 지혜(띠라나 빠린냐tirana-pariñāa, 度遍智, 조사의 통달지)와 끊음에 의한 지혜(빠다나 빠린냐, padhana- pariñāa, 斷遍智, 버림의 통달지)라는 심오한 지혜를 이룹니다.10

 

 

10.

청정도론(Vis.XX.3)에 따르면 세 가지의 통찰지(pariñña)가 있다. 통찰지의 영역은 full comprehension이다.

 

① 안 것의 통찰지(知邊知 nata-pariñña): 물질은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성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통찰지이다.

 

② 조사의 통찰지(審察邊知 tirana-pariñña):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빠사나의 통찰지이다.

 

③ 버림의 통찰지(斷邊知 padhana-pariñña):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빠사나의 통찰지이다.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모든 법이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들어서 배우는 정도의 문혜聞慧라면, 아라한의 도과를 위해 정진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래서 12연기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이 없이는 명상수행을 계발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은 빨리 경전인 애진소경(愛盡小經)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수행에 매진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고 수행의 교법이 번성하는데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12연기와 그 원형 도해 따위를 완전히 숙달하고 나서야만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12연기를 배울 시간과 기회가 없거나 12연기를 종합적으로 배우는데 속도가 느린 사람들은 비록 도과를 얻을 충분한 조건이나 자격인 바라밀(빠라미, pāramī)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도과를 성취할 기회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에 쭐라빤타까11라는 비구는 4주 동안이나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5자모字母로 된 게송12하나도 외우기 어려웠습니다.

 

 

11.

쭐라빤타까(Cula-panthaka)비구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상인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인과 눈이 맞아서 라자가하를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형은 마하빤타까(Mahā-panthaka)라고 불렸다.

 

두 형제는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빤따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하인이 도망 다니면서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후에 형과 함께 외갓집에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그의 형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을 뵈러 다녔기 때문에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도 형의 권유로 출가하여 형이 준 게송(A.iii.239)을 넉 달이나 외웠으나 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형은 그를 쫒아내려 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천 조각을 주시면서 ‘먼지 닦기(rajo-hara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셨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무애해와 육신통을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12.

45자모(字母)로 구성된 게송에 대해서는 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치 향기로운 꼬까나다의 연꽃이

아침에 향 내음을 풍기면서 피듯이

멀리 빛을 드리우신 부처님을 보라.

마치 허공에서 빛나는 태양과 같구나.”

(A.iii.239)

 

 

그렇기 때문에 그가 12연기의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내려주신 명상수련을 한지 불과 오전 중 반 나절 만에 아라한과와 선정신통지(자나 아빈냐, jha-na abhiññā)를 얻었으며 혜안도 얻었습니다.

 

초전법륜경 법문을 하는 기회에 우리는 여러분들과 같이 선하고 교육을 받았으며 명상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꺾고 낙담시키는 그런 언행을 삼갈 것을 권고합니다.

 

만약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수행에 매진하려고 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무더기, 토대, 요소, 진리, 기능, 12연기를 폭넓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하고 덕 있고 배움 깊고 현명한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법이 무상· 고· 무아라는 것만을 알아두면 됩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두 가지 세속적 진리, 다시 말해서 고제인 오온과 집제인 갈애에 의해서 범부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대다수 미얀마 불교인들은 이미 이러한 지혜를 많이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명상수행을 하기 직전이나 혹은 수행을 하는 중에 스승의 법문을 듣고 이러한 지혜를 갖출 수도 있습니다.

 

들어서 아는 지혜로 얻어진 이 점수에 대해 어떠한 회의懷疑나 의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신뢰할 만하고, 덕이 있으며, 배움이 깊고, 현명한 스승의 지도에 따라 명상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미 제3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요약을 하면, 수행은 근본 도, 예비단계의 도, 성스러운 도의 세 가지 도로 계발합니다. 이 세 가지의 도를 계발해서 열반에 이릅니다.

 

근본 도는 우리가 이전에 상세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業自性正見), 계율sīla, 근접집중 및 근본집중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요소인,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미얀마 불교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 믿음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의 도에 대해서는, 재가 수행자의 경우 아직 그것을 확립하지 못했으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계를 지켜서 완수할 수 있습니다. 비구 수행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계가 청정한지 일말의 의구심이 생기면 참회 과정을 거쳐 계를 청정히 해야 합니다.

 

집중을 이루기 위해서는, 들숨날숨(出入息 아나빠나. ānāpāna)과 같은 사마타 수련을 택해서 선정이나 근점삼매를 얻을 때까지 수련해야 합니다. 만일 시간이나 기회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에 수행자는,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근접집중과 비슷한 위빠사나의 찰나집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집중은 장애障碍를 몰아내고 심청정心淸淨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 도를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예비단계의 도 - 위빠사나의 도

 

앞에서 설한 대로 기본단계의 도를 계발한 후에, 수행자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각 현상들이 일어날 때마다 끊임없이 알아차려서 오취온인 고제苦諦의 실상을 지켜보기 시작합니다.

 

본문 제 3장과 4장에서는 이미 오온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오온을 영원함, 행복, 자아로 보고 집착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또 어떻게 이들의 실상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 집착을 제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하였습니다.

 

집중이 완전히 확립되면 정신과 물질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릴 때마다 이와 함께 무상· 고· 무아라는 그것의 실상인 자연적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그러한 알아차림을 계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구부림, 뻗음, 들어 올림, 앞으로 나아감, 움직임, 쉼 등 각각의 행위를 알아차리는 가운데, 수행자는 물질에서 뚜렷이 구분되는 아는 마음()을 인식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서 위빠사나 지혜 계발의 기초가 되는 첫 단계의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디가 니까야(長部)의 사문과경(沙門果經)과 마찌마 니까야(中部)의 선생우다이대경(善生優陀夷大經 Mahasakuludayi Sutta)에서 루비의 예를 들어, 어떻게 이 지혜를 계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물질과 정신의 구분 - 부처님의 비유13

 

 

13.

디가 니까야(長部)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D2)에 나오는 관련 경문은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예를 들면 깨끗하고 최상품인 유리 보석이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으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 손에 놓고서 ‘이 유리보석은 깨끗하고 최상품이며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는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구나.’라고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번뇌가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와 견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

 

 

갈색, 노란색, 빨강색, 흰색, 옅은 노란색의 실이 박혀 있는 웰루리야라는 보석을 관찰하기 위해 그것을 손바닥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보석에서 실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그는 보석의 몸체에 파묻혀있는 색깔 있는 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보여진() 대상에서 아는 마음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또 그는 보여진 대상으로 돌진하는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비유에서 물질적 대상은 보석과도 같고, 아는 마음()은 실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보석 안에 박힌 실처럼 아는 마음은 그 대상을 향해 파고듭니다. 그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얼마나 많은 유형의 물질이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마음, 마음의 작용(心所)등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냥 식의 물질적 대상에서 아는 마음을 구별하는 것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청정도론으로 가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통해서 수행자가 정신을 지켜보면 어떻게 분명해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방법으로 물질이 가진 성품을 구별하게 되면 이에 따라 물질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고, 얽힘이 풀리며 물질의 대상인 비물질, 즉 정신도 스스로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우리는 청정도론에서 이러한 구절을 보게 됩니다.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일어나고,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난다. 정신이 먹으려하고, 마시려하고, 말하려하고, 행동하려 하면 물질이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한다.

 

청정도론의 이 부분에서는 정신과 물질의 다양한 분류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물질에 관 다양한 분류를 숙고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계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이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것을 아는 마음과 보인 대상인 물질을 따로 따로 인식할 수 있을 때만 계발됩니다.

 

보이는 대상인 물질과 아는 마음인 정신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설사 명상수행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초보자가 책을 통해서, 아는 마음인 나마(nāma)가 물질인 몸(rūpa)에서 분리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실제 체험으로는 아는 마음과 물질인 몸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계발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이 두 가지에 대한 구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생각하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가 그 현상을 그대로 알아차리면, 생각하는 마음과 그 물질적 대상, 또는 괴로운 느낌과 그 통증의 장소까지도 따로 따로 구별하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에서 정신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아는 것으로,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오직 물질의 몸과 아는 마음만이 있을 뿐, 이 두 가지 외에는 살아있는 실체나 주체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닿음 등을 알아차리는 동안 집중의 힘이 더욱더 커짐에 따라 수행자는, 접촉할 물질적 몸이 있기 때문에 닿음을 알고 눈과 눈의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보고, 귀와 소리가 있기 때문에 듣고, 구부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구부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실재하는 자연적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자는 집착을 일으켰기 때문에 몸으로 행하거나 입으로 말하는 등의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선한 것이면 좋은 과보를, 불선한 것이면 불선한 과보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식으로 수행자는 과거에 쌓아놓은 바라밀 정도에 맞추어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

 

일어남, 꺼짐, 앉음, 닿음, , 들음, 생각함, 뻣뻣함, 화끈함, 통증 등을 알아차리는 동안 집중의 힘이 더욱더 강해짐에 따라, 수행자는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각 현상의 시작과 끝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는 것, 일어났다가는 곧이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엄청난 괴로움이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그래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도 있는 그대로를 아는 바른 견해입니다.

 

집중의 힘이 더 증장하면, 일어남, 꺼짐, 앉음, 구부림, 뻗음, 들음, 앞으로 나아감, 놓음 등의 행동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도, 수행자는 대상을 더 이상 몸, , 팔다리와 같은 모양이나 형태로 보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오로지 빠르게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만을 알아차릴 뿐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릴 대상의 재빠른 사라짐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알고 영원하지 않다는 것, 공포의 괴로움이라는 것, 자아라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됩니다.

 

알아차림의 대상은 나타나자마자 곧 사라지기 때문에 집착할 자아(atta)가 없습니다. 아는 마음()도 그렇게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집착할 자아가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본성을 꿰뚫는 지혜가 개발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ñāa)’가 생겨서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계발되는 단계에 이르는 시점부터 ‘‘있는 그대로’를 아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기울임인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또 여기에는 바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바른 집중(正定)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바른 알아차림(正念)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행자는 몸의 자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의 사념처四念處 중 한 가지 수행에 매진합니다. 수행자는 노력을 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바른 정진(正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하고 있을 때는,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 정념正念, 세 가지 ‘정의 도’와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 두 가지 ‘혜의 도’로 구성된, 다섯 가지 도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도는 각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주의 깊게 알아차리고, 아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석서는 이것을 행위자의 도(까나까 막가, kanaka-magga)라고 합니다. 더구나 계율에 어긋나지 않게 잘 지키고 절제(위라띠, virati)하여 완성되는 것이므로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과 같은 세 가지 계의 도와도 연결됩니다.

 

이것은 계· 정· 혜의 세 가지 도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명상수행을 시작하기 전부터도 계를 지키기 시작하여 계를 청정하게 보호합니다.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계율에 어긋나지 않고 그 청정함이 유지됩니다. 오히려 계는 더욱 더 청정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는 앞서 말한 ‘정의 도’와 ‘혜의 도’ 다섯 가지에, 세 가지 ‘계의 도’를 더하여, 현상을 알아차리는 매 순간마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마찌마 니까야(中部), 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의 대육처경(大六處經 Maha Salāyatanika Sutta)에서는 어떻게 팔정도를 계발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눈이 있는 그대로를 볼 때(알아차리는 순간), 그리고 시각 대상, 안식眼識, 시각접촉, 눈의 접촉으로 인해 일어나는 느낌 등을 있는 그대로 볼 때에는 눈, 시각 대상, 안식 등을 좋아하는 것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

 

눈과 그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을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혐오로 보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오취온五取蘊이 형상화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이들 대상에 대한 갈애도 소멸되고 사라진다.

 

“그러한 사람의 견해가 정견正見이다. 그의 생각이 정사유正思惟. 그의 노력이 정정진正精進이다. 그의 알아차림이 정견正念이다. 그의 집중이 정정正定이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수행자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을 잘 확립하였다. 이렇게 수행자는 팔정도를 확립하였다.

 

 

이상은, 보는 순간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구별해서 알고 눈, 시각대상 등 다섯 가지 진리의 실재하는 성품을 구별해서 알 때, 어떻게 팔정도가 계발되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간단히 추려놓은 것입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보기 위해서는 빨리어 경전, 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의 대육처경(大六處經 Maha Salāyatanika Sutta)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성스러운 도’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팔정도가 확립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해석상으로는 아주 잘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석서에서 의미하는 것이, ‘성스러운 도, ariya magg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위빠사나의 도, vipassana- magga’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스러운 도는 위빠사나의 도를 성취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해석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눈, 시각대상, 안식, 시각접촉과 느낌 등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얻어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반면에 성스러운 도는 눈, 시각대상 등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아는 기능만을 수행합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현상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에도, 이 다섯 가지 법이 일어날 때마다 분명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에 따라 팔정도가 계발됩니다. 지금까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계청정이 이루어지고 이로서 계의 도(실라 막가, sila magga)를 지키는 것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동안 자제해야 할 것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정신과 물질의 실재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과 같은 잘못된 말을 할 기회가 없습니다.

 

잠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무상과 소멸의 진정한 성품을 알았는데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는 대상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비방할 것도 없으며 헐뜯을 필요도 없으며, 한 마디로 대상과 관련한 나쁜 말을 할 기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생하고,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그릇된 생계에 종사하는 것과 같은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동안 실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대상과 관련하여 그릇된 말을 삼가는 정어正語, 그릇된 행위을 삼가하는 정업正業, 그릇된 생계를 삼가는 정명正命이 고찰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자제함으로써 정어, 정업, 정명이라는 계의 도가 정견을 계발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일어남, 꺼짐, 앉음, 감촉함, 생각함, 뻣뻣함, 화끈함, 통증, 들음, 봄 등을 알아차릴 때마다 팔정도와 함께 정견이 계발됩니다.

 

사제四諦 가운데 고제苦諦,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려서,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합니다. 고제가 일어날 때마다, 보고 듣는 것 등을 알아차림으로 계발하면, 수행의 대상인 법(dhamma), 팔정도가 계발됩니다.

 

그래서, 보고 듣는 것 등을 알아차려서 괴로움의 진리를 지켜보면 팔정도가 계발됩니다.

 

팔정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보고 듣는 것 등을 알아차려서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를 주시하여야 합니다.

 

고제苦諦, 보고, 듣는 등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수행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인데, 이 예비단계의 도는 바르게 그리고 잘 이해되어야 하는 인식대상(아람마나, ārammaa)입니다.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 막가 삿짜magga sacca-)는 고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계발되는 것으로, 잘 계발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를 주시함으로써만 팔정도를 계발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의 도가 완성될 때 비로소 열반이 실현됩니다.

 

고제는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고, 도제는 계발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물질, 정신, (sakhāra)과 같은 괴로움의 대상을 알아차리면, 단지 괴로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평화와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열반을 알아차려야 한다." 라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교법(사사나, sāsana)의 번창에 위배되는 독단이 나돌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지혜로 얻는 사성제의 진리

 

육문六門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림으로써, 현상들은 단지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아는 것이 괴로움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매 순간마다 끊음에 대한 통찰(斷通達, 빠다나 빠띠웨다. padhana pativedha)이 완수됩니다. 이는 괴로움의 진리를 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통찰지혜입니다.

 

무상· 고· 무아의 진정한 성품을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갈애가 일어날 틈이 없습니다. 이것이 집제集諦, 갈애의 일시적 소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매 순간마다 끊음의 통달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찰지혜는 대상을 지켜보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고 버려서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갈애가 소멸하면, 갈애의 궤도를 따르는 집착, (kamma), (san*kha-ra), , 정신과 물질이 소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14가 일어나지 않고 멈추게 됩니다.

 

 

14.

번뇌의 굴레(kilesa-vaṭṭa), 업의 굴레(kamma-vaṭṭa), 과보의 굴레(vipāka-vaṭṭa)는 존재들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굴레이다. 무명으로 눈멀고 갈애로 인해 내몰려서 사람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굴레가 업의 굴레를 일어나게 한다. 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굴레는 과보의 굴레를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굴레는 또 다른 번뇌의 굴레를 낳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 굴레는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돌아간다.

 

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 굴레를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과 존재()()의 굴레이고, 무명과 갈애와 집착은 번뇌의 굴레이고, (), 정신과 물질,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 감각접촉(), 느낌()과보의 굴레이다.

 

세 가지 굴레를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를 통해 얻어지는 일시적인 열반, 소멸(니로다, nirodha)입니다.

 

이렇게 위빠사나의 지혜는 일시적 정지인 소멸에 의해서 계발됩니다. 이는 성스러운 도에서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지는 성취는 대상을 직접 주시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알아차리는 매 순간마다 일시적인 소멸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경험에 의한 통달(現證通達, 삿치끼리야 빠띠웨다. sacchikiriya- pativedha)로서, 소멸을 알고 소멸을 실현함으로써 얻어지는 통찰 지혜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지켜볼 때마다,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선도하는 팔정도가 스스로 내면에서 계발됩니다. 이것을 수행의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수행에 의한 통달(바와나 빠띠웨다, bha-vana-pativeda)’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지혜도 알아차림을 통해서 직접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려 깊은 고찰을 해서 스스로 계발함으로써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알아차리고 아는 매 순간마다, 괴로움의 진리를 바르게 그리고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편지통달(遍知通達, 빠린냐나 빠띠웨다. parin~n~a-na pativedha)로서, ‘정확한 지식에 대한 통찰’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집제集諦는 일시적으로 정지합니다. 이것을 ‘끊음에 의한 통찰(斷通達, 빠다나 빠띠웨다. paha-na pativedha)’이라고 합니다. 일시적 소멸은 끊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의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통찰인 '경험에 의한 통찰(現證通達)’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도가 계발됩니다. 이것이 ‘수행에 의한 통찰’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괴로움의 진리를 바르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진리는 지켜봄을 통해서,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集諦)과 소멸(滅諦)과 도(道諦), 버림(끊음에 의한 통찰)과 실현(경험에 의한 통찰)과 계발(수행에 의한 통찰)을 통해서 완수하게 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위빠사나 도로서 사성제를 이해하고, 사성제를 이해한 후 이것을 완성시켜 성숙 될 때, 성스러운 도(열반)가 실현됩니다. 바른 견해가 주도하여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성스러운 도가 완전히 확립됩니다.

 

성스러운 도는 단 한번만 나타납니다. 이 단 한 번의 출현으로, 번뇌가 제거되고 이것이 제거되면 번뇌의 원인인 집제가 소멸하고,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를 바르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며, 성스러운 도인 도제를 계발하는 임무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의 바른 견해로 사성제를 한꺼번에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도를 통해 사성제를 이해하다

 

이것은 성스러운 도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열반의 평온함을 가져오는 멸제滅諦, 현실적인 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괴로움의 진리에 대한 이해는, 세속적인 정신과 물질 및 행의 끊임없는 생멸生滅이 참으로 괴롭고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완성시킬 때 그 과업이 완수됩니다.

 

정신과 물질, 및 행은 단지 괴로움이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아서, 이것들을 좋아하거나 갈애, 집착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갈애의 버림은 네 단계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도인 수다원도를 얻으면,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선처善處에 재생하더라도 일곱 번 이상을 넘지 않도록, 더 이상 그러한 갈애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두 번째 도인 사다함의 도를 얻으면,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갈애가 제거되고 욕계선처欲界善處에 두 번 이상 재생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도인 아나함도에서는, 미세한 형태의 욕망과 갈애가 제거됩니다.

 

네 번째 도인 아라한도에서는, 색계에 태어나려는 욕망(루빠-라가. rūpa-rāga)과 무색계에 태어나려는 욕망(아루빠-라가, arūpa-rāga), 즉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아나함과에 이른 사람에게는 존재에 대한 갈애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영원주의永遠主義라는 삿된 견해인 상견常見이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끊음을 통해 이해됨으로써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스러운 도에 대해서는, 계발을 통해 스스로 체험하고, 이해함으로써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의 세 가지 진리에 대한 이해는 각각 통찰지(빠린냐, parinn~n~a), 끊음(빠다나, padhana), 수행(바와나, bha-vana)으로 완수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성스러운 도의 지혜는 멸제를 실현함으로써 멸제를 알게 되고, 이로서 나머지 고제, 집제, 도제를 이해하는 과업을 완수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의 지혜는 고제를 지켜보고 앎으로써 나머지 집제, 멸제, 도제를 이해하는 과업도 완수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억을 돕는 주()로 요약을 합니다.

 

1. 도를 통하여 사성제四聖諦중 하나를 보게 될 때

2. 사성제 모두를 이해하게 된다.(꿰뚫어보는 통찰지혜가 확립된다)

 

괴로움의 진리를 주시하고 알아차려서 계발되면 위빠사나의 도가 증장하고, 팔정도가 확립되어 열반의 요소(涅槃界)로 돌진해 들어갑니다. 거기서는 물질적, 정신적인 행(상카라, san*kha-ra)의 대상은 물론, 그 행을 아는 마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합니다.

 

1. 갈애의 소멸로 괴로움의 소멸이 일어난다.

2. 진정한 도는 이 소멸을 실현하는 것이다.

 

갈애가 소멸하면 오온의 모든 괴로움도 함께 소멸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가 확립되는 순간 알아차림의 대상은 갈애의 소멸이 아닌 오온의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갈애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에서 말씀하신 것은 ‘행에 대한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오직 ‘행에 대한 모든 괴로움의 소멸’만이 멸제인 진정한 열반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반은 모든 행의 소멸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정신과 물질, 행이 존재하기를 그치고 소멸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확실하게 성스러운 도가 확립됩니다.

 

위빠사나는 소멸에 이르는 도의 구성요소이다

 

성스러운 도는, 모든 행고行苦의 소멸로 얻어지기 때문에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 dukkha nirodha- ga-mini- patipada- ariya saccā, ’라는 긴 제목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도가 없이 단독으로는, 모든 괴로움이 끝나는 열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쌓은 과거 바라밀에 따라, 그리고 위빠사나를 계기로 해서, 몇 시간, 몇 일, 몇 달간의 통찰지혜 수행을 해야만, 마치 위빠사나 도 가 스스로 나타나듯 그렇게 성스러운 도가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위빠사나 도를,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는 성스러운 도의 ‘예비단계의 도(pubbabhaga-magga)’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도가 선구자와 궁극적인 목표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더라도, 도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계발됩니다.

 

그래서 분별론(分別論 Vibhanga)의 주석서인 쌈모하위니다니에서는, 위빠사나 도는 소멸에 이르는 도의 기본 요소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여덟 가지 도는 여덟 가지 각지로 된 출세간의 성스러운 도이다. 이 성스러운 도와 세간의 위빠사나 도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를 구성하는 것으로 열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사성제의 도제道諦가 출세간의 도라고는 하지만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도가 없이는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위빠사나 도를 계발해서 위빠사나의 지혜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성스러운 도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와 그에 앞서 계발되어야 하는 초보적인 단계의 위빠사나 도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1. 근본 도, 예비단계의 도, 성스러운 도의 세 가지 고귀한 도

2. 이 세 가지 성스러운 도를 계발하면 곧바로 열반에 이른다.

 

우리는 도제道諦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이만 법문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선한 여러분 모두가 예비단계의 도인 위빠사나 도와 도제인 성스러운 도를 닦아서 멸제인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하루속히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제6)

 

 

마하시사야도의 도성제.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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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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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 30년을 절에 다녀도

 

우리나라 불자들은 대부분 사성제가 무엇인지, 팔정도가 무엇인지, 연기법이 어떤 것인지, 열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절에 십년, 이십년, 삼십년을 다녔어도 불교근본교리에 대하여 자신있게 설명 할 줄 아는 불자들이 드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1차적 요인으로서  근본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시키지 않는 사찰과 스님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 다음으로 불자들이 근본교리에 대하여 공부하지 않는 것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사람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하지만 불자들 대다수는 불교의 교리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교리나 수행은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자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보시하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안다.

 

불교의 교리는 쉽지 않다. 이는 많은 사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모든 것을 신의 뜻또는  신의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지만, 불교의 경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고도의 사유가 가능하여 독특한 불교이론이 성립되었다. 이런 불교근본교리는 누군가 설해주거나 경전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재가불자들이 근본교리에 대하여 다 알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삶을 살아가는 재가자들은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시하고 계를 지키는 것만 해도 훌륭한 것이라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중생의 안락과 행복이 불교의 목표라고 말하기도 한다. 괴연 이런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

 

만일 불교가 보시지계하여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든가 단지 현세에서 안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굳이 불교를 종교로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아시고

 

시계생천사상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율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 장자를 위하여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인 가르침을 주셨다. 장자의 마음이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아시고 부처님은 깨달으신 진리인 사성제의 가르침을 주셨다.

 

장자는 깨끗한 천에 물감이 쉽게 물들 듯이 그 자리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다라는 티없는 진리의 통찰력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담마를 보았고, 담마를 알았고, 담마를 얻었고, 담마속에 완전히 뛰어들어 의심을 제거하고, 주저함을 치워버리고, 스승의 가르침에 완전한 만족을 얻었다.

 

(율장 쭐라왁가 6,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부처님을 위하여 기원정사를 건립한 재가불자이다. 부처님이 재가불자에게 법을 설할 때는 경에 있는 것처럼 알기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 한 것이다. 생천(生天)’의 가르침이다. 보시(danā)하고  지계(sīla)하면 천상(saga)에 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법을 잘 이해 할 수 없는 재가자들에게 근기에 맞게 설해진 방편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재가자가 어느 정도 법에 대하여 눈이 열렸을 때 사성제로 대표되는 근본 가르침을 반드시 설하였다. 그 결과 재가자일지라도 법에 대한 통찰이 생겨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다.

 

이런 점으로 보았을 때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스님들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와 방편 그리고 보시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한다고 볼 수 없다.

 

부처님은 전법선언에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은 법을 설하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똑 같다.

 

재가불자들이 시계생천의 도리를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사성제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해 주어야 전법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불자들은 언제까지나 기복에 매달리게 될 것이고, 스님들은 천도재와 같은 방편에만 의지하게 되어 불교의 쇠락으로 이어질 것임에 틀림 없다.

 

법문의 진수를 보는 듯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은 1962년에 설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경전과 주석서에 근거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은 출가수행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대상이 되기 때문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다.  이처럼 주옥 같은 법문은 앞으로 100, 200년 후에도 어느 누군가에게 감명을 줄 것임에 틀림 없다. 법문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교과서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고, 법문의 진수를 보는 것 같다.

 

 

 

2012-04-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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