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작은 나(i)와 큰 나(I), 신은 댓돌에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28. 11:33

 

 

작은 나(i)와 큰 나(I), 신은 댓돌에 있다

 

 

신은 어디에 있을까

 

신은 어디에 있을까. 신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영어로 ‘God’로서 창조주또는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Reality)’등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신은 짧게는 100년전에, 길게는 2600년전에 이미 결론이 난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을 찾는 현상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의견 : 신은 존재한다. 남대문시장의 ‘신’발 가게에도, 구두수선공의 작업공간에도, 유명상표 운동화 매장에도 있어서 증명된다. 고단한 인생 역경의 길 위에서... 여름날 뜨거운 아스팔트와 추운 겨울의 길 위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고단한 나를 버티게 하는 양다리의 발을 보호하는 그 신(고무신, 운동화, 구두 등등)이야 말로 진정한 ‘신’이며 항시 여기저기서 신을 마주한다. ‘나의 신은 댓돌에서나 존재’한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일 수 없다. 그는 겁쟁이며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못된 짓을 방기하고 인간에게 죄를 너무나 많이 지어 그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시 현명한 인간에게 징치를 당할 것을 겁내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신은 그 때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없다.

(법응스님, ? 나의 신은 댓돌에나 있습니다, 불교닷컴 2012-01-02)

 

나의 신은 댓돌에나 있습니다-법응스님.docx 나의 신은 댓돌에나 있습니다-법응스님.pdf 

 

 

 

 

 

댓돌에 놓인 하얀 고무신과 털신

 

 

 

올해 초 이병철회장의 영적질문에 대하여 천주교신부의 답변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법응스님이 불교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스님은 신은 댓돌에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마디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법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증명이 불가능한 것은 실상이 없는 존재이다.

현명한 자여! 님의 사유의 세계를 사물의 영역 안에서만 하시라.”

(법응스님, ? 나의 신은 댓돌에나 있습니다, 불교닷컴 2012-01-02)

 

 

스님은 증명이 불가능한 것은 실상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만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런 답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감각적 인지주의과학적 실증주의가 만능이 아니다라고. 또 신은 따지고만 들면 평생 신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무조건 믿어라든가 신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신이 분명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신은 명백히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신과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신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럽의 중세시대를 들 수 있다.

 

중세천년 동안 신학자들은 신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신을 찾는데 실패 하였다. 그런 신은 애시당초부터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세신학자들이 증명하려고 한 신은 어떤 신이었을까. 길희성교수의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다신숭배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서적인 신관, 즉 유일신 인격신관도 철학자들의 눈에는 항시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간주하는 성서적 인격신관의 본령은 하느님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지만, 인격신관은 자칫하면 인간의 온갖 욕망과 편견을 신에게 그대로 전이시키기에 매우 편리한 신관이다.

 

이런 면에서, 만약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성서적 인격신관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같은 사상과 접맥시켜 고차적인 형이상학적 신관을 수립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는 아마도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신의 암호-신이라는 암호.docx  신의 암호-신이라는 암호.pdf

 

 

 

길희성 교수는 중세시대의 신학자들의 역할에 대하여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만약 성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신학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는 신관이 확립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원래 이스라엘의 유일신은 야훼이었는데, 이는 인격신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신이란 사람 같은 신을 말한다. 사람처럼 화도 낼 줄 알고 탐욕도 부릴 줄 아는 신을 말한다. 그런 야훼는 바이블 구약에 등장하는데 잔인하고 파렴치한 신의 특성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야훼에게 그리스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날개가 달린 멋진 옷을 입혀 준 결과 야훼는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기독교의 유일신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에서 믿는 민족신 개념의 인격신인 야훼와 그리스 이데아 철학의 만남과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신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이상적인 신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일까. 이제 그 신을 증명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천년동안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마침내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종교개혁이 일아나 천년왕국은 무너지고 그 대신 유럽의 철학자들은 신을 찾는 대신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 하였다. 그러다 니체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신은 죽었다!”라고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중세시대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상적인 신은 신학자들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실재하였다면 지금 여기서 보여 주었어야 할 것이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굳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도 하지 말아야 했었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중세천년동안 신을 찾아 여행을 떠났고 , 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유일신교에서는 신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명칭과 이름만 다를 뿐이지

 

현대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길은 달라도 정상에서 만나듯, 종교는 서로 달라도 결국 하나의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길희성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하튼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사용된 여러 가지 신의 암호들을 알고 있다. 도(), 천(), 태극, 공(),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길희성교수,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

 

 

 

 

길희성 교수는 서로 다른 종교에서 부르는 여러가지 명칭들 즉, 도(), 천(), 태극, 공(),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하느님 등이 사실 알고 보면 신의 다양한 이름들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종교전통과 문화적 차이라 인하여 이름과 명칭이 달리 불리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식에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 불교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광스님은 자신의 저서 현대심리학으로 풀어 본 대승기신론(불광출판사)’에서 비로자나, 야훼, 알라는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한마음(일심)이라 하였고,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는 꿈속의 나꿈꾸는 나의 비유를 들어가며 결국 하느님이나 원효스님이 말하는 한마음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화답이라도 하듯이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불교평론에서 마침내 참나와 하느님은 같은 것이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와 불교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종교전통에 따라 명칭과 이름만 다를 뿐이지 존재의 근원 또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불교학자들은 100% 대승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학자중에 궁극적 실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같은 것이라 보여진다.

 

참나를 찾기 위한 노력

 

그런데 유일신교에서 하느님 즉, 신을 찾고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참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어떠할까.

 

아침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들으면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 인천 Y선원의 S스님의 이뭐꼬에 대한 법문이다. 늘 강조하는 것은 참나를 찾자는 것이다. 그 방법이 이뭐꼬라고 한다. 그래서 참나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고, 바로 2600년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참나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참나를 찾기 위한 노력이 쉬운 것 같지 않다. 불교TV 일요초청법회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출가하였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3년이면 될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10년동안 제방의 선원을 찾아 다니며 용맹정진하였지만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이렇게 10, 20, 30년 평생을 공부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수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봉암사에서 20여년을 간화선 수행을 한 상좌가 얼마 전 토굴에 왔다. 묻더라.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스승이 없어서 그렇다. 누가 지도할 것이냐. 일례로 봉암사에서 적묵 스님을 조실로 모실려고 스님 70여명이 찾아왔다. 적묵 스님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나쁜놈 들. 내가 법이 없는데 어떻게 조실을 하느냐”며 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 때 적묵 스님은 내쳐 “5대총림 방장 가운데 제대로 지도점검해주는 이가 누가 있느냐”고 했다. 한 총림의 방장 스님이 옆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방에 가보면 제각각이다. 염불, 위파사나... 등등 간화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선방에 처음 갔더니 화두 3개를 늘어놓고 골라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1번 해보다 안 되니 2번 하고, 그래도 안 되니 3번을 해본다는 거다.

미얀마에 가보면 한국 스님들이 많이 와 있다. 인도 힌두교사원에서도 여럿봤다. 인도에서는 3km 가량을 걸으면서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미얀마건 인도건 수행을 자유스럽게 한다.

한국사찰의 매력은 숲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숲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 한국 사찰에서도 숲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숲은 병든 이들을 치유할 뿐 아니라 수행에도 이 보다 좋을 순 없다.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 [봉축특집-④ 인터뷰] 길에서 만난 수경 스님, 바깥에서 안을 성찰 중인, 불교닷컴 2011-05)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길에서 만난 수.docx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길에서 만난 수.pdf

 

 

 

수경스님은 익숙하다. 한 번도 직접 대면하여 만나 본적은 없지만 지난 2008‘7.4시국법회‘8.27범불교도대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이 문수스님의 소신공양후 종단의 미온적인 대처에 불만을 품고 잠적한 것이다. 그 후 11개월만에 불교닷컴과의 인터뷰기사에서 볼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스님은 상좌의 고충에 대하여 토로 하였다. 한마디로 갑갑해 미치겠다는 것이다. 선방에서 간화선 수행을 해 보지만 되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문제에 대한 제기는 종종 기사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참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참나를 깨닫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나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나 대승불교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것이다.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결국 정상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르는 길에 대한 명칭이 전통과 문화에 따라 다른데, 그것을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하느님 등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룹에 참나도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중세천년동안 신학자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신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였지만 결국 실패 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참나가 하느님 그룹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결국 참나를 찾거나 증명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를 상대로한 이뭐꼬수행이라면 더 할 것이다. 설령 참나를 찾았다고 하여 그것이 현재 나에게 닥쳐 있는 고통스런 현실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30년전에 일러주었건만

 

신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라는 말이 있듯이 , 역시 참나도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하여 최근 M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법우님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붓다시대에 가장 불행했던 사람은 우빠까(Upaka)라는 외도입니다.

그는 부처님을 만났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되돌아 가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구제불능이라고 말합니다.

 

30년 전 만난 스님들에게 세상이 급변하기 때문에 스님들도 세속의 학문은 물론 초기불교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뭐고에 매달려

한 빵이면 끝난다고 큰 소리 치고 있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런 스님들은 대부분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그렇게 허송세월로 보내는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겠지만,

그들의 언행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훼손시키는 것은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구제는 말할 필요도 없고, 남까지 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M스님의 댓글에서)

 

 

M스님은 우리나라 수행자들이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참나를 찾아서 10, 20, 30, 평생을 선방에서 공부해도 요원하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수 십만명이 안거기간동안 용맹정진하지만 정작 깨달았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그마나 그것도 깨달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지만 선사들은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불교TV강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모두 유정을 지녔기 때문에 세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만 감각을 가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어느 정도는 그들이 사는 세상을 지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잠재성이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증거로 보는 것입니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제18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불교TV)

 

 

버스웰 교수는 마음을 지닌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궁극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법은 앞서 기독교신학자 길희성 교수가 말한 인간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신과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매개라는 말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 면에 있어서 선불교와 기독교신학은 서로 통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버스웰교수는 불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런 불성은 어떤 것일까.

 

왜 견성성불이 안되는 것일까

 

불교TV사이트에서 동국대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불성이란 중국에서 발생한 불교사상이라 한다. 그런데 불성과 비슷한 것이 인도에서 발생한 여래장사상이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과 불성사상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이라는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따타가따가르바(Tathagata-Garbha)라 한다. 여기서 따타가따는 여래를 말하고, 가르바는 태 또는 자궁을 말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여래자궁'이 된다.

 

이는 '부처가 될 가능성'을 말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서원을 세우면 3아승지 겁이상의 한량 없는 세월이 흐른 후 언젠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래장사상이 중국에 들어 오면서 불성사상으로 변질된다.

 

불성이라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붓다네이처(Buddha-Nature)이다. 부처(佛, Buddha)와 성품(性, Nature)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복합어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에서 불성사상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중국의 고유사상과 현세주의적인 중국인의 심성이 반영된 결과로 본다.

 

중국에서 성품이라는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다. 특히 유가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와 성품이 결합되어 불성이 되었는데, 이는 중국인의 현실주의와 현세주의의 반영의 산물이라 한다. 

 

중국에서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인도인들처럼 3아승지겁이나 되는 한량없는 세월을 보살행을 하며 기다릴 것도 없이  부처의 성품만 보아 버리면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선종에서 부처가 되는 것에 대하여 견성성불이라 한다. 견성하면 지금 여기 이 생에서도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스님들이 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참선을 하여도 견성성불 했다는 소식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불성이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마치 중세시대 신학자들이 야훼와 이데아론을 결합하여 새로운 중세신관을 만들어 놓고 이를 증명하려고 시도하려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아비담마에서 실재하는 것은 82가지로 본다. 이를 구경법이라 한다. 여기서 추상적인 것을 빼면 71법이 된다. 그런데 구경법의 특징은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자상(自相)라 한다. 또 모든 구경법에 있어서 공통적인 현상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이 있다. 이를 공상(共相)이라 한다. 이렇게 자상과 공상을 갖춘 구경법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탐욕이라는 구경법은 거머쥐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성냄이라는 구경법은 밀쳐내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머쥐는 것과 밀쳐내는 것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 어떻게 탐욕이 일어났는지, 또는 성냄이 일어 났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에 고유의 성질이 있을 수 없다. 또 단지 명칭이나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짐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불성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평생을 공부해도 견성성불이 이루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볼 수 있다.

 

눈먼 장님을 따르는 듯

 

부처님은 2600년 전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신은 있는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500명의 많은 비구와 함께 꼬살라를 유행하여 브라흐민 마을인 마나사까따로 가셨다. 그리고 마나가싸따의 북쪽 아찌라와띠 강변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그때 매우 유명하고 부유한 브라흐민들이 마나사까따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짱끼, 따룩카, 뽁카라사띠, 자눗소니, 또데야, 그리고 다른 유명하고 부유한 브라흐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는 이리 저리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참된 길과 그릇된 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젊은 브라흐민 와셋타는 말하였다.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길이며 바른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을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 이것은 뽁카라사띠 브라흐민의 가르침이다.”

 

이에 젊은 브라흐민 바라드와자가 말하였다.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길이며 바른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 이것은 따룩카 브라흐민의 가르침이다.

 

이 주장은 서로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그때 와셋타가 바라드와자에게 말하였다.

샤까족 출신의 사문 고따마께서 지금 아찌라와띠 강변 망고 숲에 계십니다. 그분은 깨달으신 분, 붓다라고 합니다. 그분에 대한 좋은 평판이 자자합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사문 고따마께 가서 이 문제를 여쭈어 봅시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새기도록 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와셋카가 바라드와자와의 이야기를 모두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셨다.

 

어떤 점에서 그대들 사이에 논쟁과 다툼과 의견의 다름이 있었는가?”

 

고따마 존자님,

참된 길과 그릇된 길에 대해서입니다. 다양한 브라흐민들은 각기 다양한 길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앗다리야, 띳띠리야, 찬도까, 찬다와, 브라흐마짜리야 브라흐민입니다. 이들 모두의 가르침이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끕니까? 마치 마을이나 도시의 근처에 많고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모두 함께 마을에서 만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브리흐민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길이 있지만 그 다양한 길을 따르는 사람을 모두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끕니까?”

 

와셋타, 그대는 그들 모두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님.”

 

부처님은 재차 물었다.

그대는 그들 모두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가?”

 

그렇게 말합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 중 어느 한사람이라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의 스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그 스승들 중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런데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은 베다 시구의 저자이고 베다 시구를 읊은 사람들이고 베다 시구를 쓴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브라흐민들은 그것들을 수집하여 반복해서 암송하고 또 반복한다. 어조나 남송은 정확하게 예전의 어조로 말하고 암송한다. 그들은 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들이다. 그런데 이들이우리는 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지를 알고 본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 중에 어느 누구도, 또한 그들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들 중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베다 시구의 저자이며 암송자들인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들은 전승된 그대로 정확하게 그대로의 어조로 암송한다. 전승을 그대로 암송하는 이들조차도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 지를 알고 본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브라흐마 신과의 하나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며, 바른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정말 터무니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와셋타, 그것은 마치 장님 세 사람이 끈을 서로 붙잡고 길을 가지만 맨 앞의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중간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맨 끝의 사람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고 같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뿐이며 단지 비고 공허한 말임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서 사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묻기를,

그녀가 무슨 계습에 속하는지 압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그대가 찾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과 가문을 압니까? 키가 큰지 작은지, 얼굴이 검은지 흰지, 도시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 어떤 마을에 사는지를 압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여인을 찾고 사랑한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와셋타, 이 사람의 말이 어리석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부처님, 정말 그의 말은 어리석음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찌라와띠 강을 건너 저쪽 강둑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냥 이쪽 강둑에 서서 소리지르기를, 저쪽 강둑아 이쪽으로 오너라!’하고 부르는 것과 같다. 와셋타, 이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빌고, 간원하고, 구슬린다고 해서 저쪽 강둑이 이쪽으로 오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그러므로 와셋타, 게 사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그 말들은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정말 그렇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이야기는 터무니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디가니까야  D13  떼윗자 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장님의 예를 들어 신이 없음을 설명하였다. 그 어느 누구도 신을 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전승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믿는 다는 것은 눈먼 장님을 따르는 것과 똑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신이 없다는 것 즉,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하느님,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 이라는 개념은 이미 2600년 전에 결론이 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이야기하셨을까.

 

부처님이 침묵한 이유

 

불교는 현실적인 종교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로움, 슬픔, 절망 등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지,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개념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하는 것이다.

 

설령 도(),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하느님,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 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안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괴로움, 슬픔, 절망 등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적인 희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고, 그런 개념은 단지 전승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희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침묵하였다. 부처님이 침묵한 이유에 대한 경이 있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때 존자 마하깟싸빠와 존자 싸리뿟따가 바라나시에 있는 이씨빠따나의 미가다야에 있었다.

 

그때 존자 싸리뿟따가 저녁 무렵 홀로 선정에 들었다가 일어나 존자 마하깟싸빠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존자 싸리뿟따는 존자 마하깟싸빠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은 뒤에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싸리뿟따는 존자 마하깟싸빠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싸리뿟따] "존자 깟싸빠여, 여래께서는 사후에도 참으로 존재합니까?"

 

[깟싸빠] "벗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그러면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깟싸빠] "벗이여, 세존께서는 마찬가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합니까?"

 

[깟싸빠] "벗이여, 세존께서는 마찬가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까?"

 

[깟싸빠] "벗이여, 세존께서는 마찬가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세존께서는 왜 그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깟싸빠] "벗이여, 그것은 유익함을 수반하지 않고 청정한 삶으로 이끌지 않으며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탐욕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며 소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적정을 위한 것이 아니며 신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올바로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열반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Na heta āvuso, atthasahita ādibrahmacariyaka,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vattati. Tasmā ta abyākata bhagavatā'ti.

 

[싸리뿟따] "벗이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무엇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깟싸빠] "벗이여, '이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왜 세존께서는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깟싸빠] "벗이여, 그것은 유익함을 수반하고 청정한 삶을 이끌며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고 탐욕을 끊기 위한 것이며 소멸을 위한 것이고 적정을 위한 것이며 신통을 위한 것이고 올바른 깨달음을 위한 것이며 열반을 위한 것인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Eta hi āvuso, atthasahita, eta ādibrahmacariyaka, et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vattati. Tasmā ta bhagavatā byākatanti.

 

(Tathāgata parammaraasutta- After Death- 침묵한 까닭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12, 전재성님역)

 

따타가따 빠람마라나경(침묵한 까닭의 경-S1.docx  따타가따 빠람마라나경(침묵한 까닭의 경-S15.pdf

 

 

 

경에서 부처님은 부처님의 사후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침묵한 이유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번뇌 다한 자의 죽음에 대하여 존재하느니, 존재하지 않는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희론에 지나지 않고 지금 고통스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결해야 될 일이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면서 작은 나(i)’큰 나(I)’를 찾아 가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삶은 늘 불만족의 연속이다. 도중에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이런 불만족은 육체적, 정신적 불만족과 더불어 타인으로 인하여 받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1. 태어남(jāti)

2. 늙음(Jrā)

3. 죽음(maraa)

4. 슬픔(soka)

5. 비탄(parideva)

6. 육체적 고통(dukkha)

7. 정신적 고통(domanassa)

8. 절망(upāyāsa)

9.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10.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piyavippayoga)

11.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icchitālābha)

12. 오취온(upādāna-kkhandha)

 

 

열두가지로 말씀 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의 모든 것이다. 이런 괴로움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외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아(i)가 있다거나 더 큰 나(I)가 있다는 등의 고유성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한 진리는

 

부처님은 이처럼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방법이다와 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지, 결코 도(),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하느님,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주시자, 그놈 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은 것이다.

 

청정도론에 진리를 설하신 부처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압박 없는 괴로움 없고 괴로움 떠난 압박 없으니

압박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그것을 떠나 따로 괴로움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괴로움 없다.

 

애착이 고통의 원인됨이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열반을 떠나 따로 고요 없고

그것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고요 없다.

 

고요한 상태가 확실하므로 이것을 진리라 한다.

 

길을 떠나 따로 출구 없고

출구가 없는 것은 길이 아니다.

 

진실한 출구이기 때문에 진리라 한다.

 

이처럼 지자들은 괴로움 등 네 가지 진리에 예외 없이

진실하고 헛되지 않으며 사실인 진리의 뜻을 설하셨다.

 

(청정도론 제16장 기능과 관리 25)

 

 

 

2012-03-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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