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부처님은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1. 12:58

 

 

부처님은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

 

 

 

 

 

자연의 드라마틱한 변화

 

도시의 겨울은 삭막하기만 하다. 각지고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도시의 실루엣과 회색빛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이미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날씨까지 추우면 그 정도는 더욱 더 심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꽃이 피고 새로운 잎파리가 돋아 나는 따뜻한 봄날을 꿈꾸는 것이다. 그런 봄이 마침내 왔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 없이 온 듯 하다.

 

봄의 시작은 달력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실질적으로 개나리의 개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노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비로소 봄이 왔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의 경우 개나리가 늦게 피었다. 그래서 개나리와 진달래와 벚꽃이 함께 피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꽃들이 져물려 할 때 진짜 봄을 알리는 새로운 시그널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은행나무에서 잎파리가 일제히 돋아나기 시작 하였기 때문이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봄의 전령사라면 은행나무 잎은 이제  봄이 본격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은행나무의 신록으로 인하여 도시의 풍경이 단번에 바뀌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연은 항상 극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그런 모습을 계절에서 본다. 특히 삭막한 도시에서 은행나무 잎파리를 보면 드라마틱한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4 20일을 전후하여 일제히 신록이 시작 되고, 11 20일을 전후하게 일제히 잎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벗은 몸을 가진 기간이 5개월이고, 초록이라는 옷을 입고 지내는 기간이 정확하게 7개월이다. 이제 그 시작점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은행나무에서 신록이 시작 되면 도시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진다. 이전의 나목에서 풍성한 초록옷을 입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지금부터 진짜 봄이 시작 되는 것이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봄은 꿈의 계절이다. 꽃길을 걷다보면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표현하는 문장을 종종 본다. 그런 꿈과 같은 행복이 좀 더 오래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마찬가지로 지금 행복한 사람이라면 지금 이 행복이 더 오래 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평온은 고요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설하셨다

이 세 가지 느낌은 갈애의 조건이기 때문에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대성인께서 설하셨다

느낌을 조건하지만 잠재성향이 없이는 갈애가 없다

그러므로 청정범행을 닦은 범천에게는 그것이 없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38)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이 고통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행복을 원한다. 반면 지금 이순간이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어 바라고 더 많은 행복을 원한다.

 

인간이 신()을 만든 이유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그것은 행복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갈애 때문이다. 그런 갈애로 인하여 사람들은 영원을 동경하게 되었다.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두 가지 방법을 상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는 자기 보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보존입니다.

인간은 자기 보호를 위해 신()을 만들었고,

또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영혼불멸 또는 아뜨만(atman)을 상정했습니다.”

 

(마성스님, 무상경’ 댓글에서)

 

 

이것이 부처님 당시 정통브라만교의 전형적인 교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교의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보는 유일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자기보호를 위한 것이고, 인간이 자기 보존을 위하여 영혼을 상정하였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계약

 

이는 신과의 계약을 뜻한다. 신이 인간을 보호해주고 그 대신 인간은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말하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구약은 야훼신과의 약속을 말하는 것으로 옛날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신관에 따른 신과의 새로운 약속인 것이다. 이렇게 서양의 유일신 종교는 신과 인간의 철저한 계약관계에 따라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계약같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마치 비즈니스를 하듯이 주고 받는 듯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영원히 이 젊음이 지속되기를, 이 행복이 지속되기를, 이 몸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갈애 때문이라 본 것이다.

 

영속론 아니면 단멸론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난 이상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 그 무엇을 상정하게 되었다. 그것을 영혼 또는 아뜨만이라 한다. 이는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허무감을 달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전자에 대하여 영속론(상견)들이라 하였고, 후자에 대하여 단멸론(단견)들이라 하였다.

 

이렇게 세상사람들은 영속론 아니면 단멸론에 사로잡혀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있을 수 없는 삿된 견해로 간주 하였다. 왜냐하면 연기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한 느낌

 

12연기에 따르면 상견과 단견이 생기는 요인은 모두 갈애 때문이다. 이는 느낌에 기반한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크게 세가지로 본다. 좋거나 싫거나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거나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좋으면 잡아 당기고, 싷으면 밀치는 것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으로도 설명된다. 느낌이 좋으면 가지고 싶은 탐욕이 생기고, 느낌이 싫으면 밀쳐내고 싶은 성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조건에 따라 탐욕이나 성냄으로 가는 중립의 상태를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상태는 누가 경험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아도 내가 좋다고 느끼고, 싫어도 내가 싫다고 느낀다. 그래서 욕심부리고 성을 내는데, 이는 철저하게 자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렇게 나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한 느낌은 갈애로 발전된다.

 

갈애는 기본적으로 감각적 욕망을 베이스에 깔고 앞서 언급한 영속론과 단멸로 구분된다. 그래서 갈애는 크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가지로 크게 구분된다.

 

여기서 존재에 대한 갈애가 영속론인데,  이는 몸은 죽지만 영혼은 영원히 살아 천국에서 영원히 살거나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고 믿는 단멸론자들의 견해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속론과 단멸론은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사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나()가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몸뚱이또는 몽뗑이’, ‘몸띵이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은 끝까지 살아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 역시 나를 기반으로 한다.

 

되는 대로 살다 이 한 몸 죽으면 끝이지 뭐하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단멸론 역시 나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제멋대로 태어나서 제멋대로 죽는다?

 

하지만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주장은 모두 맞지 않다. 이는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는 믿음들이기 때문이다. 연기법적으로 보았을 때 고정된 변치 않는 나는 있을 수 없다. 조건에 따라 변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그런 나를 부처님은 무아(anatta)’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연기법에 의하면,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의 인연이 있어야 소멸됩니다.

이를 테면 자신이 지은 업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가 남아 있는 한 그 업력에 의해 다음 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단멸견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연기법, 즉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르게 바라보는 자라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실지견(如實知見)입니다.

 

(마성스님, 무상경’ 댓글에서)

 

 

스님의 글에 따르면 생겨난 것도 생기게 한 인연이 있고, 소멸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태어나서 제멋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천차만별일까

 

태어나는데 있어서 그만한 인연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 모습은 모두 다 다르다. 설령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타고난 성향 역시 천차만별이다.

 

이뿐일까. 어떤 이는 아름다운 용모와 월등히 건강한 신체, 좋은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 한평생 수월하게 사는가 하면, 반면 어떤 이는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고단하고 형벌 같은 삶을 한평생 사는 경우도 있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인연(因緣)’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연은 원인(, hetu,헤뚜)’조건(, paccaya, 빳짜야)’을 말한다.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결과(, phala,팔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인연과(因緣果, hetu-paccaya-phala)’를 말한다.

 

업만 잔뜩 지어 놓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잔뜩 업을 지어 놓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지은 업을 인연으로 하여 반드시 과가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재생)’이 있는 것이다. 이는 환생과 다른 것이다.

 

환생은 선사들 표현방식대로 한다면 지금 이 몸띵이는 버려지지만 영혼만은 새로운 몸띵이를 만나는 것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환생(reincarnation)이다. 하지만 재생(rebirth)은 다르다.

 

재생은 몸띵이만 갈아 입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몸이 모두 원인과 조건에 따른 결과의 산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 따로’ ‘몸 따로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속에 있어 결과는

다른 이의 것도 아니고

다른 원인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씨앗들이 발아하는 과정으로 이 뜻을 성취할 수 있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69)

 

 

청정도론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상속된다고 하였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때 상속 주체는 없다는 것이다. 영혼이나 아뜨만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조건에 따른 상속만이 있을 뿐인데, 이를 씨앗이 발아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할 때 조건을 얻으면 시간이 지난 후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고통과 행복이라는 느낌의 무더기가 일어날 뿐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어날 만한 조건이 되어서 태어나는 것이지 어떤 주시자나 경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오직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에

경험하는 자라고 하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 나타날 때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듯이.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71)

 

 

태어 날 조건이 갖추어져 태어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결과가 있을 때 사람들은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전 과정을 경험하는 자가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상적인 말일 뿐이라고 한다. 마치 부속품들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나라고 하는 경험자를 상정하는 것 뿐이다. 과일이 열림으로서 나무에 과일이 열렸다라는 결과가 있듯이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고통 역시 하나의 무더기 또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조건에서 고통과 행복이라는 느낌의 무더기가 일어날 뿐이지 이를 경험하는 자라든가 주시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벚꽃은 일시에 모두 져 버리고 그 대신 세상은 신록으로 뒤덮히게 될 것이다. 드라마틱한 자연의 반전이다. 이렇게 매년 꽃이 피고 지곤 한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 어느 덧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랗을 때 다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영원히 사는 방법에 대하여 솔깃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과 계약을 맺고 영생을 부탁한다. 그 반대 급부로 막대한 공물을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주고받기식 비즈니스 관계처럼 신에 매달려 보지만 그것은 죽은 다음의 일이다.

 

아직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다. 그래서 누구나 죽음 이후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죽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영혼을 상정하고 천국과 천상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을 펼치셨다. 불교의 최대목표인 열반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 순간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사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이대로 계속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 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태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찍이 번뇌에 물든 자들이 생각해낸

오염된 가르침이 마가다 국에 나타났으니

불사(不死)의 문을 여소서.”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범천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청원하는 장면이다. ‘불사의 문을 열어달라는 말이다. 이때 불사(不死)’는 다름아닌 열반을 말한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불사는 열반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불사(不死)는 열반과 동의어

 

실제로 불사는 열반과 동의어로 쓰인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이 때에 어떤 수행승이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나눈 뒤에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그 수행승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탐욕의 제어, 성냄의 제어, 어리석음의 제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탐욕의 제어, 성냄의 제어, 어리석음의 제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이 탐욕의 제어, 성냄의 제어, 어리석음의 제어라는 것은 열반의 세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처럼 말씀하시자 그 수행승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불사(不死), 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불사란 어떠한 것이고 불사에 이르는 길은 어떠한 것입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불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

- 열반의 세계 : nibbanadhatu. 조건지워지지 않고 불사(不死)인 열반계(涅槃界).

 

(두띠야 빅쿠경-Dutiya bhikkhusutta- A Certain Monk- 어떤 수행승경, 상윳따니까야 S45.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어느 수행승의 질문에 대하여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 열반이라 하였다. 어느 수행승의 이어진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소멸하는 것이 불사라 하였다. 이는 열반과 불사가 다름이 아님을 말한다. 그런 불사에 이르는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를 닦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열반과 불사는 동의어임이 분명하다. 주석에서도 열반의 세계(nibbanadhatu, 닙바나다뚜)라는 것이 조건지워지지 않고 불사인 열반계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 불사는 빠알리어로 아마따(amata)이다.

 

열반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

 

경의 주석에 따르면 열반에 도달한 자에게 일상적인 죽음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자이기 때문에 비록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할지라도 죽었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어떻게 표현할까. 아라한의 경우 불사이며 다만 숨이 다할 때에는 존재의 다발(五蘊)의 짐을 내려놓을 뿐이라 한다.

 

그렇다면 열반에 대한 표현이 불사하나만 있을까. 초기경에 따르면 열반에 대한 표현은 매우 많다.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표현된 열반에 대한 언표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언표로 묘사된 열반

No

긍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부정적 언표로 묘사된 열반

1

(終極 antam)

무위(無爲 asankhata)

2

진리(眞諦 saccam)

무루(無漏 anasavam)

3

피안(彼岸 para)

불로(不老 ajaram)

4

극묘(極妙 nipuna)

무견(無見 anidassana)

5

지극히 보기 어려운 것(極難見 sududdasa)

무희론(無戱論 nippapanca)

6

견고함(堅固 dhuva)

무재난(無災 anitika)

7

비추어봄(照見 apalokita)

무재난의 상태(無災法 anitikadhamma)

8

적정(寂淨 santa)

무에(無碍 avyapajjha)

9

탁월함(勝妙 panita)

사라짐(離貪 viraja)

10

지복(至福 siva)

불사(不死 amata)

11

안온(安穩 khema)

갈애의 소멸(愛盡 tanhakkhaya)

12

아주 놀라운 것(希有 acchariya)

무착(無着 analayo)

13

예전에 없던 것(未曾有 abbhuta)

14

청정(淸淨 suddhi)

15

해탈(解脫 mutti)

16

( dipa)

17

동굴(洞窟 lena)

18

피난처(避難處 tana)

19

귀의처(歸依處 sarana)

20

구경(究竟 parayana)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한 묘사에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아(참나), 진여, 불성과 같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정통브라만교의 브라만신과 아뜨만을 부정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해탈=여래=열반=불성=무상정득각 이라고?

 

브라만이라는 창조주와 아뜨만이라는 영혼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분석기법을 사용하였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고 분해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을 보면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眞解脫者 卽是如來

如來者 卽是涅槃

 涅槃者 卽是無盡

無盡者 卽是佛性

佛性者 卽是決定

決定者 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大涅槃經 )

 

참된 해탈은 여래요,

여래는 열반이요,

열반은 다함 없음이요,

다함 없음은 불성이요,

불성은 결정적인 것이요,

결정적인 것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대열반경 5)

 

 

대승경전 열반경에 따르면 해탈=여래=열반=불성=무상정득각 이라는 등식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열반과 불성이 같다는 것이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열반은 빠알리어로 닙바나(Nibbana)이다. 그렇다면 불성은 산스크리트어나 빠알리어로 무어라 할까.

 

불성은 부처님 당시는 물론 인도불교에서 없는 용어이다. 불성은 오로지 중국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런 불성을 영어로 붓다네이쳐(Buddha-nature)’라 한다. 이는 붓다()와 성품()이 결합된 합성어이다. 인도의 붓다와 중국의 성품이 결합된 국제어인 것이다. 이런 불성은 여래장사상에서 기원한다.

 

여래장은 산스크리트에 있는 말이다. 여래장을 산스크리트어로 따타가따가르바(Tathagata-garbha)라 한다. 이는 여래(붓다)와 가르바(자궁)의 합성어이다. 여래장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말한다.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길다. 인도개념으로 따진다면 3아승지 겁이상 보살도를 닦아야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실주의자이자 현세주의자인 중국인들은 지금 당장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불성이라는 개념을 만든 이유이다. 즉 유교 등 중국 전통사상에서 사용된 성품을 붓다와 결합하여 불성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될 성품을 보기만 하면 부처를 이루는 것으로 본다.

 

이는 인도에서처럼 3아승지겁이나 되는 한량없는 세월을 보살도를 닦으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성품을 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선불교에서 이를 견성성불이라 한다.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처럼 불성은 중국에서 만들어낸 개념으로서 인도불교에는 없는 용어이고, 더구나 부처님 당시 역시 없는 용어이다. 그런 불성은 여래장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여래장 역시 부처님 당시에 없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그것도 중국에서 만든 개념인 불성과 열반이 같은 것이라는 대승열반경의 설명은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선불교에서 불성과 진여, 진아(참나)등은 동의어이다. 어떤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가정하여 이를 찾아 내고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마치 중세시대 야훼와 이데아론을 결합하여 이상적인 중세신관을 만들어 놓고 신학자들이 이를 증명하려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부처님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였다. 대표적으로 부처님당시 브라만신과 아뜨만이다. 초기경 도처에 등장하는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 연기법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부처님은 브라만과 같은 진아가 있다면, 아뜨만과 같은 영혼이 있다면, 굳이 오온으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분별하여 설명한 것이다.

 

부처님은 분별론자

 

언표로 묘사된 불사(amata)는 여러가지 열반에 대한 묘사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 불사의 경지는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멈추어 버리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여실지견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분리, 즉 분석은 상호작용하는 전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하게 알려진 방법이다. 붓다는 자신이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라고 했는데, 이는 분석을 통한 통찰이 세계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올바른 방법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재성님, [쌍윳따 니까야] 3권 해제)

 

 

선사들은 법문할 때 항상 하는 말이 분별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분별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별론자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무더기로 나누는가 하면 눈과 귀 등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선사들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행위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렇게 나누고 분별하여 설명하는 것이 여실지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교도를 구분하는 방법 하나

 

이렇게 초기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선불교에서 선사들의 가르침과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분별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왕은 남은 비구들에게 물었다.

“무슨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자세히 설명하셨습니까?”

“부처님은 분석적인 교리의 주창자셨습니다.”

비구들이 이렇게 답하자 왕은 장로 비구에게 물었다.

“온전히 깨달으신 분은 분석적인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왕이여,”

이에 왕은 말하였다.

“모든 존자님들, 이제 승단의 부처님 가르침은 깨끗해졌습니다. 이제 승단은 우뽀사타를 행하십시오.”

 

(사만따빠사디까, 마하왕사 5편,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3차 결집은 아소까대왕 당시 이루어졌다. 그 때 당시 불교교단에는 온 갖 이교도들이 다 들어와 있었다. 영원주의자, 유한주의자. 무한주의자, 궤변론자, 단멸론자, 회의론자. 유의식론자, 무의식론자 등을 말한다.

 

왕은 교단 정화를 위하여 일대일 면접식 질문에서 물어 보았다. 만일 분별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영원주의자로 간주하여 교단에서 쫒아 냈던 것이다.

 

이렇게 분별 여부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분히 따르는지 비구인지 아니면 이교도인지 구별하였던 것이다.

 

분별하고 분해하고 분석하여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하고 분해하고 분석하여 브라만(진아)과 아뜨만(영혼)이 없음을 밝혀 내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에서는 분별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참나를 찾자고 말한다. 몽띵이는 단지 옷을 갈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경험주체인 자아를 상정한다. 그래서 작은 나(i, 소아)가 큰 나(I,대아)와 합일 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가르침은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선불교에서 선사들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간화선이 최고라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최상승법이라 한다. 최상법으로서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함으로서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으로 이뭐꼬를 들 수 있다. 대의심, 대분심, 대신심을 내어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어묵동정 이뭐꼬하다보면 언젠가는 깨우치게 될 것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 하셨다. 불사를 실현하기 위한 깨달음이 팔정도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불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야말로 불사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은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2012-04-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