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이 불타고 있다!”비유와 방편 없는 아딧땅경(연소경, S34.3.6)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7. 13:59

 

 

세상이 불타고 있다!”비유와 방편 없는 연소의 경

 

 

 

 

라일락꽃 향기

 

하늘의 공기는 더 없이 맑고 깨끗하다. 몇 일 전 내린 비로 인하여 도시의 가로는 생기가 도는 듯하다. 각종 소음과 탁한 공기로 대표되는 도시를 정화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번 내린 비로 인하여 이곳 저곳에서 꽃들이 피어 나고 있다.

 

절정을 이루던 벚꽃이 이번 비로 인하여 모두 져 버렸다. 그 대신 또 다른 꽃 들이 연이어 피어 나고 있다. 그 중 보라색의 라일락 꽃이 이제 한창이다. 진한 향내를 특징으로 하는 라일락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면 지금부터 꽃잔치가 또 다시 시작 되는 듯 하다.

 

 

 

 

 

 

라일락

 

 

 

 

방송 뉴스에 따르면 비가 한 번 내림으로 인하여 수백원의 경제효과가 발생된다고 한다. 탁한 도시의 공기가 정화되고 지저분한 가로의 청소효과, 농사를 앞둔 농촌의 해갈효과, 식수원 확보 효과 등 수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봄에 적당히 내리는 비는 고마운 것이라 한다.

 

바이블의 비의 비유와 법화경의 약초의 비유

 

이런 고마운 비에 대한 비유가 종교계에 있다. 이웃 블로거에서 본 댓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목사들이 잘 써 먹는 말중에,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어디 한군데만 내리는 게 아니고, 온 세상에 골고루 내리듯이, 예수의 사랑도 온 세상에 똑 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본 - 금각사를 향해서글의 댓글 중에)

 

 

어느 개신교인이 작성한 댓글이다. 그 개신교이 이와 같은 댓글을 단 이유는 우리나라를 포함 하여 일본 등 전 세계가 자신들의 종교로 채워 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댓글에서 인용한 비유가 매우 낯익었다. 그것은 불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화경 비유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가섭이여,

비유하면 삼천대천(大天)세계의 산과 내와 계곡(溪谷)과 평지에 나서 자라는 초목과 숲과 모든 약초들은 종류도 많고 이름과 모양도 각각 다르느니라.

 

빽빽한 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 비가 고루고루 흡족하게 내리면, 모든 초목과 숲과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새와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잎새와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새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상, ,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는데,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맞추어서 자라고, 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느니라.

 

비록 한 땅에서 나고 한 비로 축여 주는 것이지마는, 여러 가지 초목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법화경 제3권 약초유품)

 

 

법화경에 모두 일곱가지의 비유가 있다. 이를 법화칠유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약초의 비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별 없이 내리는 비와 같지만,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은 근기에 따라 다름을 말한 것이다.

 

기독교 바이블에서 말하는 비의 비유와 법화경에 말하는 약초의 비유는 매우 유사하다. 예수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로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유는 어느 쪽이 더 오리지날일까. 아니면 동시 발생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느 쪽이 오리지날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비의 비유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비유에 대한 이야기가 다수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장자궁자이야기와 바이블의 탕자이야기가 또 좋은 예일 것이다.

 

삼승방편 일승진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지만 법화경에만 있고 바이블에 보이지 않는 비유가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화택유(火宅喩)’ 이다.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이다. 화택유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화택유, 현대불교신문)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 화택유는 대승불교에서 일불승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성문, 연각, 보살에 대하여 삼승이라 하고 이를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로 비유 하였다. 하지만 법화경에 따르면 삼승은 방편이고 흰소가 끄는 일불승만이 진실이라 하였다.

 

이렇게 법화경에서는 삼승은 방편이고 일승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붙타는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양, 사슴, 소로 만든 수레를 보여 주는 방편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편은 일종의 속임수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라고 항의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이들을 불구덩이속으로 끌어 내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정당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가장 낮은 수준의 설명방법

 

어떤 이는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낮은 수준의 설명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가르침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법화경에서 보는 약초의 비유(약초유)나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화택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약초의 비유에서 비가 골고루 내리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비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지역은 비가 내리지만 다른 지역은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비가 내리되 폭우가 내려 모든 것을 쓸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바이블에서 말하는 예수의 사랑이나 법화경에서 말하는 근기에 따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법화경에서 불난집에 대한 비유 역시 비유로서 한계가 있다. 일불승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난집과 아이들, 그리고 거짓말로 보여지는 방편 등이 다소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설명방법이라는 혹평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중생들의 근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받아 들이는 것 또한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독화살을 맞았는데

 

비유로 설명한 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비유를 들어 자신의 가르침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경전 도처에 수 많은 비유를 볼 수 있다. 그런 비유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도 독화살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독화살에 대한 비유의 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 쭐라말룽꺄뿟따경(Cula-Malunkyaputta Sutta, M63)에 등장한다. 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이 독이 짙게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친척들이 와서 그를 외과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가

 

1)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왕족계층인지 사제계층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63, 전재성님)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docx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pdf

 

 

 

경에서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이에 대하여 누가 쏘았는지에 대하여 알려고 한다면 그렇게 알아 보는 동안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고 말 것이라 한다. 

 

부처님은 독화살을 예로 들어 독화살을 맞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독화살 대신 불난집으로 바꾸어 보았더니

 

이런 독화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비유는 아마도 불난집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마성스님의 글 (초기불교의 특질)에 따르면 독화살 대신 불난집으로 비유하여 설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독화살 대신 불난집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게 될 것이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의 집에 불이 났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친척들이 불을 끄러 왔다. 그런데 그가

 

1) ‘나는 불을 낸 사람이 왕족계층인지 사제계층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알아야 불을 끌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 문장은 독화살 대신 불난집으로 단어만 바꾼 것이다. 독화살의 비유보다 불난집으로 비유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가슴에 와 닿는 적절한 비유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독화살을 맞는 경우가 있었을 수 있지만 현대의 경우 독화살을 맞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불난집으로 바꾸어 본 것이다.

 

쭐라말룽꺄뿟따경 경에 따르면 독화살은 둑카()’를 상징한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독이 몸에 퍼져 가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독화살을 누가 쏘았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대신 독화살을 뽑아 내는 것이 급한 일인데, 독화살을 뽑아 내는 것을 사성제의 가르침으로 비유한 것이다. 독화살을 불난집으로 바꾸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집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양동이에 물을 넣어 불을 끄러 왔는데, 주인이 그들을 앞에 새워 놓고 지금 불을 낸자가 누근지 알기 전에 불을 끌 수 없다고 버틴다면 어떻게 될까. 불낸자를 알아내기 전에 또는 불난 원인을 밝혀 내기 전에 집은 홀라당 모두 다 타버릴 것이다. 따라서 불난 원인을 따지기 전에 불부터 먼저 꺼야 한다. 이때 불은 둑카를 상징하고 불을 끄는 것은 사성제를 상징한다.

 

이처럼 독화살의 비유는 둑카와 사성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있어서 매우 훌륭한 비유라 생각된다.

 

희론이 도움이 안되는 이유

 

 독화살을 제거 하는 방법이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말룽끼야뿟따여,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명했다.

말룽끼야뿟따여, 나는 왜 그러한 것들을 설명했는가?

 

말룽끼야뿟따여,

그것은 유익하고 청정한 삶과 관계가 있으며, 멀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멈추고 삼매에 들고 올바로 원만히 깨닫고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들을 설명했다.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63,전재성님)

 

 

 

마찬가지로 독화살을 불난집으로 바꾸어 패러디한 문장에서 불은 둑카()’에 해당되고, 불난집의 불을 끄는 것은 사성제를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자신의 집에 불이 났으면 그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불이 났는데 불을 누가 냈을까?”또는 불이 어떻게 났을까?”라고 의문하는 것은 쓸데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희론이기 때문이다.

 

희론은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10가지 형이상학적 의문과 나는 누구인가등의 삼세에 대한 의문 16가지가 대표적이다. 이는 를 찾는다든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과 같다.

 

 희론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유익하고 청정한 삶과 관계가 없고, 더우기 열반에 이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불은 일어 날 수 있다. 누군가 방화에 의하여 불이 날 수 있고, 전기 합선이나 누전 등으로 불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불난집의 비유는 현실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이렇게 불난집에 대한 비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매우 좋은 예인데, 부처님은 불타는 것에 대하여 비유와 방편 없이 직설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런 경이 초기경전에 있다.

 

환상적인 서울의 야경

 

서울에 북악스카이웨이가 있다. 북악산 능선에 있는 하늘 길이라는 뜻이다. 그 길 중간에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에 서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해질 무렵 서울의 경치는 장관이다. 이제 막 불을 밝히기 시작한 서울의 야경은 환상적이다.

 

 

 

 

 

서울야경

 

 

 

 

사람들은 서울의 야경을 보고서 감탄한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경치를 보고서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 서울의 경치는 아름답다. 특히 컬러풀한 불이 하나 둘씩 밝혀졌을 때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야경속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온갖 욕망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만약 부처님이 서울의 야경을 바로보고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하셨을까. 아마도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초기경에서 말씀 하셨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딧땅경- Āditta -Burning-연소경, 상윳따니까야 S35.28)

  

  

아딧땅경(연소경)의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세번째 법문이라 한다. 전법 초창기 깟사빠(kassapa) 삼형제의 지도 아래 천여명에 달하는 불을 숭배하는 결발수행자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이들을 신통으로 굴복 시켰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승가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경에서 부처님은 천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가야의 정상에서 “일체가 불타고 있다”라고  말씀 하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 하고 있다.  

 

 

부처님은 일체가 불타고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체라는 것은 세상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하는 일체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다. 눈과 귀 등으로 형상과 소리 등과 접하였을 때 아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말씀 하셨다.

 

이런 화법은 직설적이다. 법화경에서 일불승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난집을  비유와 방편으로서 표현한 것과 다르다. 부처님은 실제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모두 불타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세상은 대체 어떻게 불타고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은 대체 어떻게 불타고 있을까. 부처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인하여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번뇌의 불을 말한다. 또한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말씀 하셨다. 이는 괴로움의 불을 말한다.

 

부처님은 시각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대상을 보았을 때 안식(眼識)’이 생겨 나는데, 이때 세가지 느낌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樂受)’ ‘괴로운 느낌(苦受)’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한다.

 

이런 세가지 느낌은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그래서 좋으면 잡아 당기고, 싫으면 밀치는 것이다. 이것이 탐욕성냄이다. 탐욕은 거머 쥐는 고유성이 있고, 성냄은 밀쳐 내는 고유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을 중립적 느낌(upekkha vedana)’이라 하는데, 이는 조건에 따라 탐욕이나 성냄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중립의 느낌에 대하여 어리석음이라 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의 시각, 청각 등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에 대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온 세상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타는 세상에서 탈출하려면

 

이와 같이 불타는 세상으로부터 어떻게 탈출 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싫어하여 떠난다.

 

(아딧땅경- Āditta -Burning-연소경, 상윳따니까야 S34.3. 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감각기관의 느낌으로부터 싫어 하여 떠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알아차림에 대한 것이다. 좋고 싫은 것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 눈으로 어떤 형상을 보아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그런 느낌이 일어난 줄 알자는 것이다. 욕망이 일어 났을 때 , 나에게 욕망이 일어났구나라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욕망은 그 즉시 사라질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다음 마음, 이전의 마음을아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탐욕은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성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알아차렸을 때 탐욕과 성냄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느낌이 좋으면 욕심부리고, 느낌이 싫으면 성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세상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매순간 매번 불타고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타는 세상에서 알아차림 없이 살아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튀는 뜨거운 쇠젓가락으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의 특징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의 의식이 특징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아딧떼나경-Ādittena Blazing-연소와 함께경, 상윳따니까야 S34.18.8, 전재성님역)

 

  아딧떼나경(연소와 함께경-S34.18.8).docx

아딧떼나경(연소와함께경-S34.18.8).pdf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감각기관을 잘 못 지켜 감각적 느낌에 끄달려 다녔을 때 일어 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서 동물의 교미장면을 보았는데, 그것이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그 형상에 끄달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로 갑자기 죽었을 경우 어떻게 될까.

 

초기불교에서는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죽음과 다음 생 역시 하나의 마음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마음이 연결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 동물의 교미에 대한 형상에 끄달려 임종을 맞이 하였다면 그 형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경우 축생으로 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이 갑자기 일어나 갑자기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증오의 마음을 대상로 다음 생을 위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지옥이나 아수라와 같은 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임종시 일념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감각기관의 단속이 매우 중요함을 말한다. 좋고 싷은 느낌에 끌려 달리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때 좋고 싫은 것의 다른 이름은 다름아닌 탐욕성냄이다.

 

부적절한 비유

 

사람들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설명이 잘 되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설명한다. 주로 사실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 예를 경전에서도 종종 본다.

 

경전에서는 진리에 대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는 방식을 ‘비유’라 한다. 그래서 각종 비유를 들어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비유가 반드시 최상의 설명방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비유를 보면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헛점이 보인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어디 한군데만 내리는 게 아니고, 온 세상에 골고루 내리듯이, 예수의 사랑도 온 세상에 똑 같이 주어지는 것이다가 좋은 예이다.

 

비가 내릴 때 온 세상에 반드시 골고루 내리지 않는다. 아주 오랜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 주로 한 동네에서만 살고 있었을 때 골고루 내린다는 말은 맞지만, 요즘의 경우 들어 맞지 않는다. 어느 지역의 경우 비가 오지만, 또 어느 지역의 경우 맑은 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가 오더라도 적당히 오면 좋으련만 폭우가 쏟아질 경우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갈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비의 비유는 그다지 좋은 비유라고 볼 수 없다.

 

비유와 방편을 함께

 

법화경에서 보는 화택유역시 마찬가지라 보여진다. 삼승은 방편이고 일승만이 진실임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난집의 비유를 들었는데, 거기에다 거짓으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방편까지 사용하였다. 이렇게 일불승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와 방편을 동원하였지만 일불승 사상을 훌륭하게 설명하였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어느 면으로 보아서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보는 비유는 적절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독화살의 비유의 경우, 독화살을 맞아 독이 몸에 퍼져 감으로 인한 고통을 느꼈을 때 그 독화살을 둑카()’로 보고, 이에 대한 신속한 처방에 대한 것을 사성제로 보는것은 부처님의 탁월한 비유이다. 더구나 독화살을 맞은 과정에서 독화살이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날아 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희론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은 독화살의 비유를 더욱 더 빛나게 해준다.

 

비유나 방편 없이도

 

그런데 이런 비유나 방편없이도 진리 그 자체를 완전하게 설명한 경이 있다. 그것이 아딧땅경(연소경, S34.3.6)’이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라고 하였을 때 이에 대한 비유나 방편은 없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느낌을 받아 들였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진리를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가장 낮은 수준의 설명방식이라 한다. 이는 비유로서 진리 그 자체를 전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와 문자를 무시하고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만 진리를 설명가능한 것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극소수의 특별한 존재들이나 진리에 접근 가능하게 하는 특별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침은 누구나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버릴 것이 없다. 그런 초기경전을 접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행운이라 본다.

 

 

 

2012-04-27

진흙속의연꽃

 

아딧떼나경(연소와 함께경-S34.18.8).docx
0.03MB
아딧땅경(연소경-S34.3.6).docx
0.03MB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docx
0.02MB
아딧떼나경(연소와함께경-S34.18.8).pdf
0.17MB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pdf
0.12MB
아딧땅경(연소경-S34.3.6).pdf
0.1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