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전재성박사의 동국대 정각원 법회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9. 13:54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전재성박사의 동국대 정각원 법회를 보고

 

 

 

진짜 부처님과 가짜부처님

 

 

“3천년전 가비라국의 싯달타태자로 태어난 부처님 그 부처님은 우리를 제도하기 위하여 잠시 화신으로서 나타나셨을 뿐 진짜 부처님은 아닌 것 입니다.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진짜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 진짜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다 말씀 할 수 없습니다. 온 허공계, 온 대천세계에 가득 차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계신다, 이렇게 생겼다 이렇게 말씀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띵이도 부처님의 일부라 말 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 마음도 그 위대한 부처님의 일부라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아도 부처님 품안에 있고, 눈을 떠도 부처님 품안에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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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것은 너무 뜻이 깊어서 여러 어린이 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부처님은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마음을 허공같이 갖난어린아이 같이 깨끗한 마음이 될 때에는 정말 부처님 품안에 안겨 있는 때 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9일자)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이 법문한 내용의 일부이다. 이 법문에서 선사는 ‘진짜부처님’에 대하여 말하였다. 진짜부처님은 따로 있다는 말이다.

 

진짜가 있다면 가짜도 있을 것이다. 진짜는 진짜 아닌 것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문의 내용처럼 진짜부처님이 따로 있다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진짜가 아닌 ‘가짜부처님’이란 말인가!

 

법문에서 주어를 바꾸었더니

 

법문에서 말한 진짜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문장이다. 우리나라가 온통 십자가 천지이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치고 교회 한번 가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선사의 법문에서 주어만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진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다 말씀 할 수 없습니다. 온 허공계, 온 대천세계에 가득 차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계신다, 이렇게 생겼다 이렇게 말씀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띵이도 ‘하나님’의 일부라 말 할 수 있고, 우리의 생각 마음도 그 위대한 ‘하나님’의 일부라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아도 ‘하나님’ 품안에 있고, 눈을 떠도 ‘하나님’ 품안에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선사의 법문에서 ‘부처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치환한 것이다. 이렇게 용어를 바꾸어 놓고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거의 대부분 목사의 설교를 연상 할 것이다.

 

불성앞에 경배하자고?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불자들이 즐겨 듣는 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정목스님의 말을 들 수 있다. 이 프로에서 정목스님은 클로징멘트를 할 때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

 

 

방송을 끝내는 멘트에서 남긴 말은 ‘불성’앞에 경배 올리자는 것이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성품을 보면 성불한다는 ‘견성성불’의 대상이다. 그런 불성을 인격화 하여 경배 올리자고 하였다.

 

경배란 무엇일까.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경배1 [敬拜]

 

(1)

경의나 공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공손히 절함.

 

사신이 왕에게 경배를 올렸다.

아기의 몸을 앞으로 숙여서 경배를 드리는 자세로 만든 뒤 등을 문질러 주었다.

참고어 경례 1 (敬禮) I

 

(2)

신이나 높은 사람을 숭배함.

아랍인들은 알라에 대한 경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3)

공경하여 절함의 뜻으로, 한문투의 편지 끝에 쓰는 말.

 

(경배1 [敬拜])

 

 

사전에 따르면 경배라는 용어는 공손히 절하는 것이라 한다. 또 신이나 높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정목스님이 말한 불성앞에 경배올리자하고 하였을 때 그 불성은 불성이 인격화된 것임에 틀림없다.

 

인격신은 사람의 격을 갖춘 신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구약에서 야훼와 같은 신의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른바 불성이 인격신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그런 인격신에게 경배하자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또는 하나님에게 경배올리자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이처럼 아니 계신데 없는 부처님과 마치 인격신을 보는 듯한 불성을 말하는 것이 요즘 방송에서 접하는 불타관이다.

 

이런 불타관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타관이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은 단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보여 준 것일 뿐 진짜 부처님은 온 우주 법계에 상주하고 있고, 그런 부처님의 성품이 우리의 마음에 내재하고 있어서 그 불성만 본다면 모두 성불할 수있다는 것이 선사들이 말하는 법문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목사들이 설교하는 내용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법문이 이십여년전 이었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전세계가 글로벌화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나라 불교 역시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더구나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고 있는 인터넷시대에 한문투의 대승경전이나 대승경전속의 부처님 이야기는 더 이상 감동을 주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현실은 풀리지 않은 문제로 가득한데, 허공속의 부처님이나 거룩한 불성앞에 경배 올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의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처럼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기도하여 모든 것을 그분의 뜻이라고 보는 신의론(神意論)’도 아니기 때문에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같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의 화엄경 해제글에서

 

선사들의 법문 못지 않게 대승경전 역시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문제를 풀어 주기에는 미흡하다. 이는 선사들의 선어록만큼이나 대승경전의 내용 역시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묘사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는 화엄경을 역경한 법정스님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국역경원에서 출판된 신역 화엄경해제에서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슬하였다.

 

 

사실 80권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처럼 재미있는 글도 아니고 비현실적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장광설에 질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화엄경의, 구름 일 듯 2백 가지로 물으면 병에서 물을 쏟아 내듯이 2천 가지로 대답을 하는 그 요설 변재를 감내하기란 참으로 힘이 듣다. 털어낼대로 털어내고 알짜로만 가려 뽑는다고 했지만(이런 표현이 용납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사람이나 끝까지 읽어 낼지 알 수 없다.”

 

(법정스님, 신역화엄경-동국역경원,  ‘해제글’에서)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고 나서 대승불교의 최고경전이라고 불리우는 화엄경 한 권 읽지 않는다면 말이 될 것 같지 않아 사게 된 것이 법정스님의 ‘신역화엄경’이었다.

 

그런데 해제글에서 스님은 화엄경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인상적 이었다. 대승불교 최고봉이라는 화엄경에 대하여 ‘장광설’이라든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읽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 그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요설변재’라니! 그 때 당시 참으로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번역한  화엄경을 끝까지 읽어 낼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고 의문하는 것 역시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샀으니 읽어 보기로 하였다.

 

인내로 읽었지만

 

화엄경을 읽어 나가면서 법정스님이 해제글에서 말한 그 내용이 와 닿았다. 스님이 언급한 몇사람이나 끝까지 읽어 낼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말대로 도무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를 물으면 열가지 말이 튀어나오는 요술방망이처럼 보였다.

 

화엄경을 손에 쥐면 몇 페이지 넘기기 어려울 정도이어서 스님이 말씀한 장광설’ ‘요설변재라는 말이 실감난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보살 마하살의 다 함 없는 공덕장회향인가. 보살 마하살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고 일으킨 선근과 삼세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고 일으킨 선근과 모든 부처님께 설법해주기를 청하여 일으킨 선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불가사의하고 광대한 경계를 깨닫고 일으킨 선근, 과거.미래.현재 모든 부처님의 선근이 다함없음을 보살들이 부지런히 닦아서 얻는 선근, 삼세 부처님들이 정각을 이루고 바른 법륜을 굴리어 중생 교화하는 것을 보살이 다 알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어 생긴 선근, 삼세부처님들이 처음 발심하여 보살행을 닦아 정각을 이루고 열반에 드는 것을 보이고, 열반에 든 후 정법이 이 세상에 머무르고 법이 다 하기 까지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 생긴 선근들이 있다.

 

(신역 화엄경- 제5회향- 다함 없는 공덕장 회향, 법정스님역)

 

 

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화엄경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어내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읽다 말다 때로는 수면용으로 하다 보니 여러 달이 걸렸다. 그런데 책을 한 번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이 없었다. 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스님의 표현대로 ‘인내를 가지고 책을 한권 읽어 냈다’는 사실 그 자체 이상은 없었다.

 

“A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접한다는 금강경이 있다. 금강경은 5,249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경으로서 화엄경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대승경전이 다 그렇듯이 읽어내기 역시 쉽지 않다.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는 금강경에 대하여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는 한 그 뜻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부처가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그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 부르는 것이니라.

(금강경, 제13분 여법수지분)

 

 

이 말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으로 금강경을 접한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되내이며 무슨 뜻일까 하고 의문한다. 마치 화두처럼 보이는 것이다.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식의 문구는 별도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려 준다고 할지라도 곧 잊어 버린다.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식의 문구는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대한 것이다. 공사상을 표현하다 보니 문장이 꼬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불자들은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어려워 한다. 그러다 보니 불교는 어려운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108배 절수행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정진기도 등으로 돌아 서는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정각원 법문

 

“A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식으로 불교는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이 화엄경에서 보는 것처럼 어지간한 인내 없이 읽어내기가 어려운 것인가. 이런 의문을 단 번에 씻어 내는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여 설하여 졌던 초기경전이다. 흔히 빠알리 니까야라 부른다.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 당시 지배층의 언어가 아닌 민중어로 설해져 있기 때문에 주로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고, 경전을 보면 초등학생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매우 심오하다고 한다. 그런 빠알리니까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았다. 그것은 미디어붓다사이트에 실려 있는 전재성박사의 영상법문을 통해서이다.

 

동국대 정각원 토요정기법회에서 법문한 전재성박사는 4부 니까야의 번역자이다. 20여년에 걸쳐 4부 니까야를 완역하였는데, 이런 케이스는 세계최초라고 한다.

 

전재성박사는 1999년 상윳따니까야를 우리말로 완역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가르침을 소개 하였다. 이 후 4부 니까야를 완역하고 숫따니빠따와 법구경 등 수십권을 번역한 바있는데 대중법회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는 처음이라 보여진다.

 

전박사는 지난 2004년 또는 2005년에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매일 강의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법문하는 것은 인터넷상으로 처음 본다. 

 

독특한 질문식 법문

 

법문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변재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더구나 목소리까지 좋다면 최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법문을 잘한다고 하여 모든 것을 잘 하는 것 같지 않다. 법문은 잘 하지만 글로서 표현 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다. 글을 잘쓰는 사람이라면 소설가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런데 글을 잘 쓴다고 하여 대중연설을 잘 한다는 보장이 없다. 한가지 재능이 있다고 하여 또 다른 재능을 갖는 경우가 드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대중연설을 잘하는 사람, 좌담을 잘 하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등 매우 다양한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재능을 모두 갖춘 사람들은 매우 드믈다. 전재성박사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4부 니까야를 번역하고 수십권의 책을 남겼지만 대중 앞에서 법문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니 대중을 휘어 잡아 대중을 웃겼다 울렸다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전재성박사의 법문을 보면 비록 미사여구를 이용한 화려한 언변은 아닐지라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에 대한 핵심을 전하려고 하는 열정이 돋 보였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독특한 질문식 법문이었다.

 

전재성박사는 대중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가 아주 가난한 사람을 만났어요. 아주 가난하고 초라하고 빈곤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에 어떤 생각을 해야 죄를 짓지 않은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잘못이 없겠습니까?”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길이나 전철에서 걸인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전철에서 보는 걸인들 중에는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볼 수 있고 매우 불행에 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런 사람들을 보았을 때 대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죄를 짓지 않는 바른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대중들에게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 차례 되묻는다.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런 마음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하여 전박사는 또 묻는다. 만약에 불쌍한 마음을 일으켰을 때 불쌍함을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 한다. 왜 그럴까. 불쌍하고 느꼈다면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상대방은 자괴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 올바른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일으켜야 할까. 그런데 칸트철학이나 서양철학을 뒤져 보아도 안나온다는 것이다. 선불교를 아무리 닦아도 그 답은 안 나온다고 한다.

 

행복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길고 지리하게 묻는 형식의 법문이다. 이번에는 반전을 시도하는 질문을 던진다.

 

 

“굉장히 부자가 지나간다고 봅시다. 어마 어마하게 잘살고, 어마하게 검은세단을 타고 아주 부유한 사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이 들까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이번에는 어마어마한 부자에 대하여 말한다. 고급아파트에 살며 최고급승용차를 몰고 최고급 브랜드의 옷을 걸친 부자를 보았을 때 어떠한 마음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앞서 걸인과 비교되는 것이다. 아주 불행한 자와 매우 행복한 자를 대비하여 질문한 것이다.

 

세가지 자만심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매우 부유한 자를 보았을 때 일어나는 마음은 “부럽다”이다. 그런데 이런 부러운 마음이 과연 올바른 마음이냐는 것이다.

 

전박사는 “불쌍하다” 또는 “부럽다”라는 마음은 올바른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 ‘번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와 같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기경전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등감이나 우월감이나 동등한 감정 이런 감정이 다 자만심이라 했어요. 자만심을 부처님이 세가지로 구분했어요. 열등감, 이것도 일종의 자만심이에요. 우월감, 이것은 당연히 자만심이죠. 그 다음에 동등하다는 것도 자만심이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일자, 미디어붓다 2012-04-10)

 

 

자만심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이다. 그런데 우월감 뿐만 아니라 동등감과 열등감도 자만심에 속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생활속의 아비담마에 대한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다.

 

열등감이 왜 자만심에 속할까

 

자만을 마나(mana)’라고 한다. 마나를 지닌 사람은 오만하고 인색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기 쉽다. 지위, 재산, 지식, 건강 등에서 남보다 뛰어날 때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남들을 얕잡아 본다. 또 지위, 재산 등에서 남들과 동등할 때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지 않다. 나도 또한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까.”그리고는 여전히 자만으로 우쭐거린다.

 

그들의 지위, 재산, 지식, 건강 등이 다른 사람들보다 낮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높은 지위, 재산 등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진 것만을 먹을 뿐이고, 내가 일한 만큼만 얻을 뿐이다. 왜 다른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한단 말인가?”

 

비록 남들보다 열등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만심에 차 있다.

 

(생활속의 아비담마, (8) 2 - 사떼야(거짓부리, 위선), 마나(자만)|)

 

 

부자에 대한 열등감에 차 있는 사람은 부자의 재산 등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발동한다. 불법과 탈법 등 부정한 방법등으로 재산을 모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열등감이 바로 자만심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있는 것

 

그래서 어떤 마음이 일어난 것이고 우월감이고 어떤 것이 열등감이고 어떤 것이 죄가 되는 것인지 제대로알아야 된다고 전박사는 강조한다. 그래야 자만심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마음을 배운적이 없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물론 대학교 철학 교과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전박사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있다고 한다. 이것이 4부니까야를 완역한 전박사의 답이다.

 

전박사는 드디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둑가땅경- Duggata - In Unpleasantness-불행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2.1, 전재성님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아나마딱가 상윳따_S15_.pdf

 

 

 

이 경은 상윳따니까야 아나마딱가 상윳따( Anamatagga sayutta)에 실려 있는 ‘불행의 경( Duggata - In Unpleasantness, S14.2.1)’ 에 대한 내용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와 영문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볼 때는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한다.

 

 

“amhehipi evarūpa       암헤이삐 에와루빵

paccanubhūta iminā       빳짜누부땅 이미나

dīghena addhunāti       디게나 앗두나띠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

 

“I too have suffered this,

during this long time of existences”

 

 

전재성박사는 바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질문형식의 법문을 이어 나갔고 전세계 어느 교과서나 철학서적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여기는 것이 바른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졌을 때 우월감이라는 자만심을 가지지 않고 불쌍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더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열등감이라는 자만심을 가지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 이 마음 또한 초기경에 고스란히 표기 되어 있다. ‘행복의 경(Sukhita - In Pleasantness, S14.2.2)’에 실려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행복의 경에 있는 내용은 불행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중에 불행이라는 단어를 행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나 보다 부유한 사람, 나 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관하는 것이다.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들이었다’

고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라 한다. 이런 가르침은 부처님이 길을 가다가 제자들에게 직접 일러주신 것이라 한다.

 

자비보다 근본적인 가르침

 

우리가 인간인 이상 상대방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그런 과정에서 번뇌가 일어 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 불행에 빠진 사람을 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자비’ 등을 생각하지만, 그런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통과 번뇌를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는 가르침을 펼쳐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전박사는 “여기에는 어마 어마한 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하게 ‘나도 다 아는 거네’하며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굉장히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경에서 불행한자과 행복한자에 대하여 양극단의 예을 들어 설명하였다. 하지만 한 때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관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경에서 1) 풀과 나무 2) 흙덩이 3) 눈물 4) 5) 6) 겨자 7) 제자 8) 갠지즈 강 9) 지팡이 10) 사람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중 ‘눈물경(Assusutta, S14.1.3)’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눈물경-Assusutta, S14.1.3)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하여 유전하여 왔는데, 그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흘린 눈물에 대한 것이다. 사랑하는 님과 헤어질 때 흘린 눈물의 양이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자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자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딸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눈물경-Assusutta, S14.1.3)

 

 

경에서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사대양이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윤회하면서 흘린 것은 눈물만이 아닐 것이다. 젖에 대한 비유도 있기 때문이다. 경에서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의 양은

 

이렇게 눈물, 젖등을 비유로 부처님은 설명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비유도 있다.

 

 

한때 세존께 라자가하에 있는 벨루바나에 계셨다.

 

그때 빠바에서 온 30명의 수행승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숲에서만 사는 자, 걸식으로만 사는 자, 분소의만 입는 자, 세 가지 옷만을 걸치는 자, 아직 번뇌에 얽매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그때 세존께 이와 같이 생각이 떠올랐다. '빠바에서 온 30명의 수행승들은 모두 숲에서만 사는 자, 걸식으로만 사는 자, 분소의만 입는 자, 세 가지 옷만을 걸치는 자, 아직 번뇌에 얽매인 자들이다. 내가 지금 그들의 마음을 이 자리에서 취착이 없이 번뇌에서 해탈하도록 가르침을 설하면 어떨까?'

 

그래서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와 사대양에 있는 물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많겠는가?"

 

[수행승]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으로 미루어보건데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세존]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통해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물소로 태어나 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양으로 태어나 양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염소로 태어나 염소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사슴으로 태어나 사슴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닭으로 태어나 닭이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은 만족하여 세존의 말씀에 기뻐했다. 이와 같은 법문을 설하셨을 때 빠바에서 온 30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취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하였다.

 

(삼십 명경 -ATisamattasutta, S14.2.3)

 

 

삼십명경에서는 윤회하면서 흘린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 피 중에는 갖가지 사연이 다 들어 있다.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축생으로 살다 흘린 피, 사람으로 태어 났지만 도둑으로 살다 목이 잘려 흘린피, 남의 부녀자를 강간하다 붙잡혀 목이 잘려 흘린 피 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는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혁명하면서 흘린 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피를 흘리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 한다. 지금 우리들은 과거에 온 갖 것을 다 맛 보았다고 한다. 그런 표현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이렇게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를 통하여 뭇삶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픔을 맛보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무덤만 증대시켰다고 한다. 그런 무덤에 있는 뼈들을 모아 보면 산을 이룰 것이라 한다. 그런 ‘뼈의 산’에 대한 경이 ‘웨뿔라산경(Vepullapabbata - The Vepulla Rock, S14.2.10)’이다.

 

질투를 해서 안되는 이유

 

전재성 박사는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 지나간다고 하여 질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나를 때렸다, 착취하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이게 정답이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회 2012-03-10일자, 미디어붓다 )

 

 

 

전박사는 불쌍한 사람이나 부자를 보았을 때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라 한다. 그래야 일단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순진무구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죄를 짓지 않는 마음이라 한다.

 

정답은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불쌍하다는 감정에 도취되어 가다보면 결국은 자기자신도 불행함을 맛보고 남도 불행함을 맛보고 더구나 해결책도 없다는 것이다. 불쌍하게 여긴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안에 여러 불행이 있을 수 있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라 한다. 보면 불쌍하고 괴로울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럴 때 전박사는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눈물로 다짐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생까지 소급하여 무수한 세월의 겁을 소급하여 올라가는데, 전박사는 인간으로 태어 났다는 사실이 이게 어마 어마한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전박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 있게 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거짓말을 하게 된 것도 간단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서 거짓말을 보다 덜 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

.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엄청나게 그러한 과거의 목이 잘리고 흘린 피가 바다보다 많은 그런 시행착오, 여러분이 잘못하고 그 엄청난 벌을 받아 가지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다시는 안해야 겠다고 눈물로 다짐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고 하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회 2012-03-10일자, 미디어붓다 )

 

 

 

 

띠라따나(Tiratana,삼귀의게)

 

 

 

 

2012-04-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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