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의 자살과 사마시시, 불리한 내용까지 기록된 니까야의 위대성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지만 막연하게 죽음을 동경하던 때가 있을 것이다. 주로 청소년기 때 일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고 괴로우면 막연하게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낭만적이고 막연한 죽음에 대한 동경은 극한에 이르는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극기훈련’ 같은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테스트 하는 듯한 극기훈련을 겪고 나면 언제그랬느냐는 듯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하나의 ‘갈애’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갈애는 크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뉜다.
여기서 갈애라는 용어는 사전적 의미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존재의 근원적 욕망”이다. 마치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실 때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이런 갈애는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 또는 ‘나의 것’ ‘나의 몸’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죽고 싶다는 것 역시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 대하여 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죽어도 내가 죽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말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
오월이 오면 생각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다. 노대통령이 죽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에 대하여 그 때 당시 두 가지 커다란 시각이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이고, 또하나는 노무현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서 선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하여 굳이 자살이라는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의 ‘살신성인’ 또는 ‘투신공양’ 등으로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설령 자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자결’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노무현의 죽음이 단지 괴로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의로운 죽음으로서 대의를 위하여 희생한 우국지사의 충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에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표현 하였다. 견디다 못해 괴로워서 자살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추모의 분위기가 우세하였다. 그래서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 되고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급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워 하였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나 아쉽게 생각한다. 노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해 본다. 한나라에 대통령을 지낸 어른이 살아 있다는 것은 후임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두고 두고 아쉬운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죽었다. 그런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 선택에 대하여 살신성인, 투신공양, 자결 등으로 불러주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결단을 내려 죽었다는 것에 대한 것으로 본다면 ‘자살’이 맞다.
노무현대통령이 자살했다고 하여 노무현의 가치가 결코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살했다는 그 것 자체는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좋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자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마음 하나 잘못 먹으면 존재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장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매번 부딪치는 문제에 대하여 네 탓, 내 탓이라 하고,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 니까야에 있다고 하였다.
내 탓이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수 많은 괴로움을 겪는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네 탓’ 또는 ‘내 탓’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 괴로움의 원인이 남의 탓 또는 내 탓에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범부들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보통이다. “너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식이다. 그런데 좀 양식이 있는 사람들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내 탓’이라고 한다.
내 탓이라는 말은 최근 가톨릭에서 자주 쓰고 있다. 그래서 “내 탓이오!” 하는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내 탓으로 보는 것은 남의 탓으로 보는 것에 비하여 진일보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내 탓으로 보는 견해는 대승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발원문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업’으로 보는 견해이다. 자신이 지은 업대로 그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내 탓 으로 보는 견해는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경전적 근거가 없는 말이라 한다.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내 탓으로 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사건이 발생하여 괴로움이 발생하고 슬픔과 상처가 생겼을 때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보는 것은 정견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 고통에 대하여 올바른 생각 즉 정견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사람 탓이라고 하였을 때,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지적을 받은 사람은 원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서로 상처받을 것이다. 이런 상처의 본질에 대한 것이 법구경에서 “그 사람은 나를 욕했고 나를 때렸다(Dhp3)”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욕하고 때리고 굴복시고 더구나 빼앗아 갔을 때 사람들은 상처 받는다. 그래서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탓으로 돌려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문제 또한 해결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말한다.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이를 남의 탓이라고 하지 않고 내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소이다..”라고 하면 어떨까. 그렇게 가슴을 치면 괴로움이 좀 더 나아 질까?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질까?
부처님제자의 자살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에서 자살하면 좋지 않은 곳으로 간다고 한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등 악처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 허용하였을까. 전재성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탁발하다가 남의 준 것을 먹다 보면 콜레라 등 병에 걸렸을 경우가 있습니다. 경에도 있지만 치유 될 수 없는 병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부득이하게 뱀에 물린다든가 해서 고통이 너무 심해서 결국 자결을 할 때 부처님이 허락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라한에 한해서.. 아라한이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탐욕이 없고, 분노가 없고, 미움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에 한해서 허락을 했어요.
조금이라도 남을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은 원망할 수 없었어요. 수행이 완전한 경지에 오른 사람,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에 한해서 자살이 허용된 것이지 다른 사람은 자살할 수 없었어요. 자살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거에요.”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전재성박사의 법문에 따르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단, 아라한에 한해서라고 한다. 아라한이 되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미워하는 감정이 없이 때문에 남의 탓 또는 내 탓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디까비구의 자결
이와 같이 부처님은 번뇌 다한 제자에 한해서 자살을 허용 하였는데, 초기경전에서 제자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실려 있다. 상윳따니까야 고디까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벨루바나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고디까가 이씨길리 산 중턱의 검은 바위 위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다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두번째에도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세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세번째에도 존자 고디까는 그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네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네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다섯 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여섯 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러나 여섯 번째에도 고디까는 그 일시적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일곱번째로 존자 고디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을 얻었다.
그때 존자 고디까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이제 나는 여섯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의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
그때 악마 빠삐만이 존자 고디까가 품은 생각을 알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 이야기했다.
[빠삐만]
“그대는 위대한 영웅,
크게 슬기로운 자 초자연적인 힘과 명예로 빛나네.
모든 원한과 두려움을 초월한 자 눈 있는 자여, 그대의 발에 예배드리네.
위대한 영웅이여,
죽음을 초극한 분이여 그대의 제자가 죽음을 원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네. 빛의 주인이시여, 그를 말리게.
세존이시여,
세상에 알려진 분이여 어떻게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채
가르침에 기뻐하는 그대의 제자가 배우는 자로서 죽고자 하는가?”
그때 존자 고디까가 칼을 들었다.
한편 세존께서는 그가 악마 빠삐만인 것을 알아채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지혜로운 이들은 이처럼 삶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하네.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열반에 들었네."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우리들은 지금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간다. 거기서 양가의 자제 고디까가 칼을 들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행승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많은 수행승들과 함께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하셨다. 세존께서는 존자 고디까가 평상 위에 존재의 다발에서 해탈하여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너희들은 저 연기와 같은 아련한 것이 동쪽으로 움직이고 서쪽으로 움직이고 남쪽으로 움직이고 북쪽으로 움직이고 위쪽으로 움직이고 아래쪽으로 움직이며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느냐?"
[수행승]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모과나무로 만든 황색의 비파를 들고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써 말했다.
[빠삐만]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세존]
"슬기를 갖춘 영웅은 항상 선정을 즐기면서 참선하네.
목숨에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으로 정진하네.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
[송출자]
"악마 빠삐만은 슬픔으로 가득찬 나머지
허리의 비파를 떨어뜨리고 우울해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네."
(고디까경-Godhikasuttaṃ,상윳따니까야 S4.3.3, 전재성님역)
고디까경(S4.3.3).docx 고디까경(S4.3.3).pdf
Sona Hill and Udaya Hill, Rajgir, Bihar, India
경에서 고디까비구는 여섯번에 걸쳐 일시적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번뇌를 소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섯차례에 걸쳐 ‘퇴전’과 ‘불퇴전’을 반복하였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고디까는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라고 생각하여 자결을 결심한다. 그래서 칼로 자신의 목의 정맥을 끊어 자결하였다. 그렇다면 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한 고디까 비구는 어디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고디까의 자살소식을 듣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고디까비구가 자결한 이씨길리 산 중턱에 있는 검은 바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고디까 비구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즉 고디까 비구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고 하였다.
사마시시(samasisi)
부처님은 아라한에 대하여 자살을 허용하였다. 고디까의 자살 역시 그런 범주로 볼 수 있다. 고디까비구가 여섯번에 걸쳐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살한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 사마시시란 무엇일까. 그리고 부처님이 아라한에 한해서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느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사마시시는 「인시설론」(人施設論, Pug.19)에 처음 나타나는 단어로 여겨진다. 이것은 '동시에(sama)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 문자적으로는 머리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가지 목적이란 최고의 성위인 아라한됨과 완전한 열반(반열반=입멸)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입적한 것을 말한다.
주석서들은 병이 낫거나, 자세가 끝나거나, 목숨이 다하면서 아라한과를 얻고 바로 반열반에 드는것을 사마시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출처: S4.23 고디까 경 - 제자의 자결을 말리라 vs 갈애를 뿌리뽑아 열반에)
고디까경에서 부처님은 고디까가 자결하여 죽었을 때 “갈애를 뿌리채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디까 비구가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다 일곱번째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자결하였으므로 아라한이 되었고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은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동시에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지는 것을 ‘사마시시(samasisi)’라 한다. 그래서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paññatti)에서도 사마시시에 대하여 ‘동시(sama)’에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한 자(sisin)’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디까비구는 아라한이 되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석서에 따르면 사마시시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즉, ‘자세의 사마시시 (iriyapatha-samasisi)’ ‘병의 사마시시 (rpoga-samasisi)’ ‘목숨의 사마시시 (jivita-samasisi) ‘ 그리고 ‘느낌의 사마시시’ 이렇게 4가지의 사마시시를 말한다.
아라한의 인생관
부처님은 번뇌 다한 자에 한하여 죽음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탁발한 음식을 잘 못 먹어 콜레라 등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부처님은 자살을 허락한 것이다.
이러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12연기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라한의 인생관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전도된 인식이 없습니다. 아라한은 감각대상의 불선(不善)을 알고 있고, 이는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엇에도 갈애가 없습니다.
아라한도 불가피하게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의 생리적인 욕구를 들어줘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行苦 saṅkhāra-dukkha)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이러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빨리 죽기를 바라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지만 때 이른 죽음이나 육신의 해체를 바라는 마음은 파괴적 욕망으로 아라한은 거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장로게」(Thag.654; 606; 1003)에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어떤 아라한의 게송’이 있는 것입니다.
삶이란 크게 보아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을 뜻하기 때문에 아라한은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비록 오취온의 부담은 끊임없이 보살핌과 돌봄을 요구하지만 조금도 의지할 만하지 않습니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정신-물질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져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나면 아라한의 삶의 흐름은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래서 이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법문집에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따르면 번뇌 다한 자인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하였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자살은
마하시사야도의 근로자에 대한 비유는 어디서 근거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쑤씨마]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스승의 예찬을 받을 만한 거룩한 이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그때 세존께서 존자 싸리뿟따에 관해서 하늘아들 쑤씨마에게 이와 같은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분노하지 않고 욕심이 없고 온화하고 길들여져서
잘 훈련된 고용인처럼 때를 기다리는 싸리뿟따는 현자로 알려져 있네."
(수시마경-Susīm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2.3.9, 전재성님역)
수시마경(S2.3.9).docx 수시마경(S2.3.9).pdf
경에서 ‘잘 훈련된 고용인처럼’이라는 말은 경의 주석에 따르면 “붓다고사에 의하면, 번뇌를 끊은 자는 여러 다른 시간에 열반에 들게 되므로 고용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기다리듯이 열반의 때를 기다리므로 고용인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마하시사야도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법문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처럼 아라한은 마치 근로자가 월급을 기다리는 것처럼 완전한 열반을 기다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병이 생긴다든가 하여 더 이상 유지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부처님은 아라한에 한하여 자살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자살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렇게 불교에서 자살은 허용되었다. 단 번뇌 다한 자에 한해서 이다. 그러나 번뇌가 남아 있는 자가 자살하였을 때 미움과 원망 등의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결코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할 것이라 한다.
니까야에 그 해결방법이
지금 괴롭다고 하여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거나 ‘내 탓이오’하면서 내 탓으로 돌려 본들 괴로움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네 탓 또는 내 탓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로 본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의 본질과 그 해결 방법에 대하여 니까야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우빠바나경을 예로 들었다. 우빠바나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빠바나]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관해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제가 만약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세존을 허위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진리에 일치하는 바대로 설명하는 것이며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비난의 여지를 남기지 않겠습니까?”
(우빠와나경-Upavāṇ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3.6, 전재성님역)
우빠와나경(S12.3.6).docx 우빠와나경(S12.3.6).pdf
사람들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남의 탓’이라거나 또는 “내 탓이오!’하며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네 탓 또는 내 탓으로 해서 괴로움이라는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에 그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이미 2600년 부처님은 그 해답을 알려 주었다.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중의 하나인 우빠와나 존자가 부처님께 괴로움이 ‘네 탓’인지 또는 ‘내 탓’인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님의 제자가 이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겁니까 남이 만든겁니까라고 묻는 것은 절실하고 절박한 물음이에요. 이게 그냥 공부하기 위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살아남기 위해서 절박한 문제이었어요.”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초기경에서 제자가 부처님에게 질문하였을 때 그것은 매우 절박한 문제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생사가 걸린 문제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잘 못 한다면, 남의 탓 또는 내 탓으로 생각할 수 있고 더구나 번뇌가 다하지 못한자가 자살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우빠와나경(Upavāṇasuttaṃ,S12.3.6)애서
이렇게 제자가 목숨을 걸 정도로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을 때 부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을까.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이와 같이 내가 말한 바를 설명한다면 허위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진리에 일치하는 바대로 설명하는 것이며 법다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비난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그것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역시 접촉이 없이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우빠와나경-Upavāṇ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3.6,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접촉’ 때문이라 하였다. 네 탓 또는 내 탓으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지로 인하여
접촉이 없으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이즈 걸린 사람이 에이즈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이 남의 탓 또는 내 탓이 아니라 접촉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에이즈 걸린 사람은 자기가 잘 못해서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느낌이다. 자아는 없는데 자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자기가 잘 못해서 결렸더라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일까. 그것은 접촉에 기인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접촉이라고 보는 것은 문제의 원인에 대하여 정확하게 짚어 내는 것이라 한다.
괴로움이 네 탓이나 내 탓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촉에 의하여 일어 났고, 이는 결국 12연기적으로 보았을 때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 날 수 밖에 없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팟상 빠띳짜(Phassaṃ paṭicca, 접촉을 연유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위대한 것이다. 불쌍한 사람이나 부자를 보았을 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라는 처님의 가르침은 초등학생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심오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와 같이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 탓’이라 따지고 ‘내 탓이오’하며 자살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우빠바나가 부처님에게 질문한 것은 자신의 생사를 가를 정도로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Paṭiccasamuppannaṃ kho upavāṇa 빠띳짜사뭅빤나낭 코 우빠와나
dukkhaṃ vuttaṃ mayā. 둑캉 웃땅 마이야
Kiṃ paṭicca? 낑 빠띳짜
Phassaṃ paṭicca. 팟상 빠띳짜
우빠바나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Upavāṇa,
I have said that unpleasantness is dependently arisen.
Dependent on what is unpleasantness?
Dependent on a contact.
부처님은 괴로움이 발생되는 이유에 대하여 ‘팟상 빠띳짜(Phassaṃ paṭicca, 접촉을 연유로 하여)’라 하였다.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이 네 탓이라거나 내 탓이라거나 우연히 일어난다든가 누군가 벌주기 위해 만든 것 등이 아니라 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는 진리를 말씀 하신 것이다.
“너 때문이야!”와“내 탓이오!”의 허구성
그렇다면 이제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가 나를 욕하고 때리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그 인간 때문에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접촉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모든 것이 “내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로이다..” 하며 괴로움을 내 탓으로 돌리며 심지어 자살까지 하지만 이는 모두 접촉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이 “너 때문이야!” 또는 “내 탓이오!”라고 외치는 것은 철저하게 ‘나(我)’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나 또는 나의 몸, 나의 자아, 나의 영혼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해서 네 탓, 내 탓이 생겨 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괴로움은 끊이지 않고 자살 또한 끊임 없이 일어난다. 지금 죽어 버리면 모든 괴로움이 끝 날 것처럼 생각하는 것 역시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불교식 용어를 빌리면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죽고 싶은 것도 갈애로 보는 것이다. 그런 갈애는 나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일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득세하지만 자살이 끊이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확하게 전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미 2600년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고민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법을 내 놓으신 분이다. 그런 가르침이 니까야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니까야에 부처님 제자들의 자살기록이 실려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고디까경에서 고디까비구의 자살을 비롯하여 왁깔리경(Vakkali suttaṃ)에서의 왁깔리비구의 자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번뇌 다한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것이다.
불리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된 니까야
이처럼 초기경전에는 모든 괴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모두 다 들어 있는데,
4부 니까야를 완역한 전재성박사는 니까야의 위대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니까야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솔직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니 부처님 제자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누가 부처님을 따르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다 덮어 놓았을 것입니다. 기록에 안 남겼을 거라구요!
그런데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건 조작된 경전이 아닙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 2012-3-10일자)
니까야가 위대한 이유는 부처님 불리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예는 전세계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전세계의 모든 경전이 미사여구에다 화려하고 장엄한 묘사 위주로 되어 있지만 초기불교경전의 경우 숨기고 싶은 사항들도 솔직하게 기록 되어 있는데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니까야가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니까야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변형없이 지켜 온 것이라 한다.
2012-05-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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