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보살사상은 이미 구현되어 있었다! 나와경(나룻배의 경, Sn2.8)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12. 15:05

 

 

보살사상은 이미 구현되어 있었다! 나와경(나룻배의 경, Sn2.8)

 

 

 

 

나와경

(Nava sutta-나룻배의 경)

 

 

[Nava sutta](*1)

 

 

주해(*1)

이 경은 가르침의 경(Dhammasutta)이라고도 불리며, 싸리뿟타와 목갈라나에 관계된 경이다. 라자가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웃빠띳사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 바라문 부인 루빠싸리가 아기를 가졌는데, 그와 이웃한 꼴리따 마을의 바라문 부인 목갈라니도 아기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같은 날에 태어났는데, 각각 마을 이름을 따서 우빠띳사와 꼴리야라고 불렀다.

 

그들은 같이 먼지구덩이에서 놀면서 함께 성장하였는데 항상 각각 오백명의 청년들에 둘러싸였고 그들이 이끄는 오백의 가마나 오백의 준마가 이끄는 수레와 함께 나들이를 했다. 라자가하에서 산정제(山頂祭)가 있는 날 시내에 마가다의 주민들이 잘 아는 왕족들이 마련된 자리에 앉아 화려한 행사를 보았다.

 

그런데 우빠띳사가 그들을 보고, 춤추고 노래하지만 그들은 모두 백년도 못가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꼴리따도 우빠띳사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들은 불사(不死)를 찾아서 출가하기로 서로 뜻을 모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버리고 라자가하로 가서 유행자인 싼자야에게 오백명의 바라문 청년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그들은 출가한지 며칠 되지 않아 세 가지 베다와 유행자의 가르침을 모두 터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산자야에게서 불사의 가르침을 얻지 못하고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때 이미 세존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불사의 가르침을 찾아 세상을 떠돌다 다시 라자가하로 돌아왔다. 이때에 마침 부처님의 제자인 앗싸지가 아침 일찍 탁발하러 나갔다.

 

우빠띳사는 그의 단아한 자태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를 보고 쫒아가 그의 감관이 맑고 깨끗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모든 현상은 원인에서 생겨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우빠띳사는 이 가르침을 듣고 진리의 눈을 떴다. 그리고 곧바로 꼴리야에게 가서 그를 불러 함께 부처님 앞에 승단에 가입했다. 그들은 수행승이 된 다음에 각각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가 먼저 이렛만에 네 가지의 위대한 존재(四大)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을 관찰하여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고, 사리뿟따는 열나흘 만에 느낌에 대한 통찰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리뿟따는 존자 앗싸지와 함께 한곳에서 보냈는데, 세존의 시중을 들고는 앗싸지의 시중도 들었다.

 

그는 존자 앗싸지를 ‘이 존자는 과거의 나의 스승이었다. 나는 이 존자로 인해서 세존의 가르침을 알게 되었다.’라고 시중을 들었다. 앗싸지가 한곳에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존자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다섯 번 예배하고 합장했다.

 

이것을 보고 수행승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수제자임에도 바라문교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방위를 향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에게 사리뿟따의 행위가 방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에 대한 예경임을 지적하면서 이 경전을 설했다.

 

 

1. [세존]

“누군가에게 배워 진리를(*1) 알게 되었다면,

마치 하늘사람이 제석천을 섬기듯, 그를 대하라.

많이 배운 사람은 섬김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진리를 밝혀 보인다.

 

2. 현명한 님은 그것을 추구해서(*2) 주의를 기울여,

진리에 따라(*3) 가르침을 실천한다.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 하여 게으르지 않는다면,

식견이 있는 자(*4), 슬기로운 자(*5), 지혜로운 자(*6)가 된다.

 

3. 가르침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질투심이 있는,

소인이나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 섬긴다면,

이 세상에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의심을 버리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른다.

 

4. 마치 사람이 물이 넘치고, 홍수가 져서,

물결이 거센 강에 빠지면, 그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런 이가 어찌 남을 건네 줄 수 있겠는가.

 

 

주해(*1)

배움의 진리와 실천의 진리를 말한다.

 

주해(*2)

‘결정적인 의지로서 밀고 나가’의 뜻이다.

 

주해(*3)

 통찰(vipassna)을 말한다.

 

주해(*4)

조건지어진 것을 식별하는 지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주해(*5)

다른 사람에게 명백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주해(*6)

 최상의 미묘한 진리를 꿰뚫어 보기 때문이다.

 

 

5.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서 그 의미를 경청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모르고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가 어찌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6.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줄 수 있는 것과 같이,

 

7.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1), 가르침을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

 

8.그러므로 참으로 현명하고 많이 배운 참사람과 가까이 하라.

의미를 알고 길을 추구하면서 가르침을 인식하면,

그는 안락을 얻으리라.”

 

 

주해(*1)

여덟 가지 세간의 법에 흔들리지 않는 성품을 지닌 자‘의 뜻이다.

여덟 가지 세간의 법이란

 

얻음,

잃음,

명예,

치욕,

비난,

칭찬,

행복,

불행

 

을 말한다.

 

 

- 나룻배의 경이 끝났다. -

 

 

(나와경- Nava sutta- The Ship- 나룻배의 경, 숫따니빠따 Sn2.8, 전재성님역)

 

  나와경(나룻배의 경-Sn2.8).docx 나와경(나룻배의 경-Sn2.8).pdf

 

 

 

보살사상을 암시하는 구절

 

숫따니빠따 쭐라왁가(작은 법문의 품)나와경이 있다. ‘나룻배의 경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나와 경을 접하는 순간, 이는 보살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일으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명한 자가 튼튼한 나룻배에 올라서 노와 키를 장착하고,

그 도구에 대하여 잘 알고 잘 다룬다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게송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건네준다라는 말이 바로 보살의 정신이라 볼 수 있다.

 

작은 수레와 큰 수레

 

흔히 대승불교전통에서 하는 말이 있다. 소승불교는 오로지 자신의 해탈과 열반만을 추구하는 불교라는 말이다. 그래서 열등하고 작은 탈것이라 하여 소승(小乘, Hinayana)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는 보살도를 추구하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두어서 뛰어나고 큰 탈것이라는 뜻의 대승(大乘, Mahayana)라는 명칭을 스스로 붙였다.

 

이처럼 작은 수레와 큰 수레로 나누어 소승과 대승을 설명하고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보살에 대한 개념이다.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은 붓다를 대신하여 자비행을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하지만, 테라와다전통에서 말하는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으로서 성도 이전의 부처님을 말한다.

 

보살의 조건은

 

이렇게 보살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하는 등 많은 선행을 쌓고, 이러한 공덕이 쌓인 결과 부처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보았을 때 보시를 하고 선행을 쌓고 공덕을 쌓는 자가 있다면 누구나 보살이라고 볼 수 있다.

 

나와경(나룻배경)에서 보는 것 같이 다른 많은 사람을 태워 건네 주는 것 같이라고 하였을 때, 이는 이미 보살도를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따로 보살이라는 명칭을 불러 주지 않아도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덟가지 세간에 법에 흔들리지 않는 자

 

경에서 비록 나룻배의 예를 들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나룻배 보다 더 큰 배가 될 수가 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대승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룻배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과도 같은 사람을 말한다. 경에서는 현명한 자라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주석에는 여덟가지 세간에 법에 흔들리지 않는 자라 하였다. 그 여덟가지 세간법은 다음과 같다.

 

 

1)얻음,

2)잃음,

3)명예,

4)치욕,

5)비난,

6)칭찬,

7)행복,

8)불행

 

(여덟가지 세간법)

 

 

이를 그룹으로 묶어 보면 크게 얻음과 잃음, 명예와 치욕, 비난과 칭찬, 행복과 불행 이렇게 네가지가 된다.

 

꽃이 피면 향내가 나듯이

 

이들 네가지 그룹은 좋은 것싫은 것이렇게  또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좋은 것은 탐욕과 관련 있고, 싫은 것은 성냄과 관련 있다. 결국 부처님이 말씀하고자 한 현자의 개념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난 자이거나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있는 성자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현자가 나오면 세상은 향내가 날 것이다. 꽃이 피면 향내로 인하여 벌이 모여 들듯이, 현자가 출현하였을 때 역시 법의 향내로 인하여 사람들이 모여 들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가르침을 귀를 기울이고 따르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깨우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현자 그 자체가 나룻배

 

좋고 싫음 등의 세간법에 흔들리지 않은 현자가 출현한 그 자체가 나룻배라 볼 수 있다. 그 배는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다. 그런 현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 거센 강물을 건너 갈 수 있는데,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Tasmā bhave sappurisa bhajetha        따스마 바웨 삽뿌리상 바제타
Medh
āvinañceva bahussutañca,            메다위난쩨바 바훗수딴짜
Aññ
āya attha paipajjamāno            안냐야 앗탕 빠띠빳자마노
Viññ
ātadhammo so sukha labhethāti.    윈냐따담모 소 수캉 라베타띠

 

그러므로 참으로 현명하고

많이 배운 참사람과 가까이 하라.

의미를 알고 길을 추구하면서 가르침을 인식하면,

그는 안락을 얻으리라.

 

Therefore associate Great Men

who are wise and learned.

Knowing the essence follow the method of experiencing

the Teaching and gain pleasantness.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떠난 현명한 자를 가까이 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면 반드시 ‘행복(sukha, pleasantness)’을 얻을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관련하여 멋진 시가 있다. 내설악 백담사에 가면 수 많은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중 한용운님의 '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시도 포함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나룻배와 행인' 시비(백담사)

 

 

 

 

이 시에 대하여 어떤 이는 보살사상과 관련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시에서 나는 나룻배라고 하였을 때 이는  보살을 말하고, “당신은 행인”이라는 말중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은 고해의 바다를 말하는데  이는 윤회하는 세상을 지칭한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님이 이 시를 지었을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그 때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상징시라고도 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나룻배와 행인”은 불교적, 명상적, 상징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보살사상은 이미 구현되어 있었다!

 

데바뷰 (déjà vu)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처음 해 보는 일이나 처음 보는 대상, 장소 따위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백담사 시비에서 나룻배와 행인을 처음 접하고 숫따니빠따에서 나와경(나룻배경)을 보았을 때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경에서 나룻배라는 단어를 접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백담사의 나룻배와 행인시비가 떠 올랐고, 여기서 말하는 나룻배는 보살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확인 하는 순간 보살사상이 대승불교의 전유물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초기경에 이미 보살사상이 표현 되어 있음을 알고 놀라웠다. 다만 용어가 현명한 자또는 지혜에 통달하고 자신을 수양하고 많은 것을 배워 동요하지 않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라는 말과 조금도 다름 없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소승법이나 소승불교로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굳이 소승이니 대승이니 보살사상이니 하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는 이미 보살사상이 구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2012-05-12

진흙속의연꽃

나와경(나룻배의 경-Sn2.8).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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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경(나룻배의 경-Sn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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