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미안과 맛지마 니까야
같은 초록이라도
신록의 계절이다. 거리의 가로는 이미 옷을 갈아 입은지 오래고, 산과 들에는 온통 초록일색이다. 초록색 옷을 입은 산하대지를 바라 보면 마음이 평화롭고 안정되고 뿌듯해 보인다. 산하대지가 벌거벗은 모습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녹색당이라는 당명이 있듯이 초록은 항상 평화와 환경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서울을 벗어나 접경지역 가까이서 보는 초록은 또 다른 느낌이다. 같은 초록이지만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라 감정이 다른 것이다.
서울 이북 지역에는 부대가 많이 있다. 그런 부대는 초록에 뒤덥혀 있는데 부대주변의 초록은 다른 지역의 초록과 달리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군대에서 보는 초록은 사람에 따라서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긴장과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초록색 군복과 초록색 차량, 그리고 초록색 식기, 초록색 담요, 초록색 벙커 등 군대에서는 온통 초록색 일색이다. 더구나 초록색 군복을 입고 가장 힘들다는 유격훈련을 ‘초록색 교장’에서 강도 높게 받았다면 그 기억은 매우 오래 토록 남을 것이다. 그래서 초록색만 보면 진저리를 치고 긴장의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색깔도 받아 들이기에 따라 사람마다 모두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군대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기가 밀고 내려 온다”
무엇이든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말로 아무리 말로 실감 있게 잘 설명한다고 할지라도 직접 경험한 것만 못한 것이다. 하지만 경험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있다. 남자라면 ‘출산’이 이에 해당 될 것이디.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서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하듯이 여자들에게 주어진 의무 아닌 의무가 출산이다. 오로지 여자만이 출산을 할 수 있는데, 그 출산에는 출산의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출산의 고통에 대하여 말이나 글로 설명하지만 직접 출산을 하지 않는 사람과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일지라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 말 중의 하나가 출산은 자신이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낳아 지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진통이 시작 되고 출산에 이르기 까지 과정이 자신의 의지와 힘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차라리 ‘아기가 밀고 내려 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공감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출산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태내의 고통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아이를 낳는 것도 참기 힘들지만 태어 나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태에서 나올 때 아기는 어떤 과정을 겪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 하였다. 먼저 태내에 있을 때 괴로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중생이 모태에 태어날 때 청련, 홍련, 백련 등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위장의 아래와 소장의 위인 위장막과 척추 중간의 아주 좁고 어둡고 갖가지 몸의 냄새가 퍼져있고 심한 악취가 통풍구로 순환하며 극도로 혐오스런 자궁에서 마치 썩은 생선과 썩은 죽과 오물구덩이 속의 벌레처럼 태어난다.
그곳에 태어나서 그는 열 달 동안 자궁에서 생긴 열로 자루에 넣어서 구워진 과자처럼 구어지고 경단처럼 쪄져서 구부리거나 펴는 것도 없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입태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37절)
우리가 태어 날 때 홍련과 백련 처럼 ‘우아하게’ 태어 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온갖 냄새가 진동하는 태내에서 마치 벌레처럼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쪼그린 상태에서 살게 되는데 공간이 좁다 보니 구부리거나 펼 수 도 없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열달을 기다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겪게 된다고 한다.
어머니가 갑자기 비틀거리거나 가거나 앉거나 일어서거나 돌 때 마치 술 취한 자의 손에 잡힌 새끼 염소처럼, 뱀 장수의 손아귀에 든 새끼 뱀처럼, 위로 끌리고 아래로 끌리며 위로 흔들리고 아래로 흔들리는 등의 습격으로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어머니가 찬물을 마실 때 마치 차디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고, 뜨거운 죽과 밥을 삼킬 때 마치 숯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 것을 삼킬 때 마치 숯불의 비가 쏟아지는 것 같고, 짜거나 신 것을 삼킬 때는 마치 도끼로 몸을 찍고 소금물을 붓는 등의 고문을 겪는 것 같이 극심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것은 임신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38절)
어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태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어머니가 찬물을 들이킬 때는 차디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뜨거운 물을 삼킬 때, 짜거나 신 것을 먹을 때 마치 고문을 받는 것 같다고 한다.
열쇠 구멍으로 큰 코끼리를 끄집어내듯이
이렇게 열달을 태내에서 보낸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이의 출산고통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출산할 때 그는 업으로 생긴 바람에 의해 거꾸로 틀어 자궁으로부터 마치 지옥의 낭떠러지와 같은 너무나 무서운 통로로 내던져지며, 마치 열쇠 구멍으로 큰 코끼리를 끄집어내듯이 극심하게 좁은 자궁의 입구를 통해 끄집어내어질 때, 마치 지옥 중생이 굴러내리는 바위에 의해서 부서질 때 괴로움이 일어나듯이 그에게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분만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40절)
출산할 때 어머니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이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출산하게 되면 머리가 아래로 향하여 나오게 되는데, 그 입구에 대하여 열쇠구멍 보다 작은 구멍에서 꼬끼리를 끄집어 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위가 부서지는 듯이 격렬한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출산다음에도
출산하였다고 하여 괴로움이 끝나는 것일까. 출산다음에 겪는 괴로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갓 태어난 그의 몸은 예민한 상처처럼 연약하다. 손에 들거나, 목욕시키거나, 씻기거나, 천으로 문지를 때 등에 바늘 끝으로 찌르고 칼날로 상처를 입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모태로부터 나옴에 기인한 괴로움이다.
(청정도론 제 16장 기능과 진리41절)
갓 태어난 아이는 매우 예민하다. 그래서 부드러운 강보에 쌓여 있긴 하지만 마치 칼날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본격적인 고통
이렇게 태내에서부터 출산시까지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런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본격적인 고통을 맛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➀ 태어남(jāti),
➁ 늙음(jarā),
➂ 죽음(maraṇa),
➃ 슬픔(soka),
➄ 비탄(parideva),
➅ 육체적인 고통(dukkha),
➆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➇ 절망(upāyāsa),
➈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➉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
태어나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고통이라 하였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고, 싫어 하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통이라 하였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고통은 이 육체와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김에 따라 ‘집착’하는 고통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색·수·상·행·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사람만이 태어 날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알에서 난 것들도 고통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서 나는 ‘난생’은 비록 사람처럼 느낌이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지 못하여 알 수 없지만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온 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 (Demian)’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가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에 대하여 한 세계를 파괴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헤세에 따르면 탄생이란 자신의 세계를 깨트리고 나가야하는 고독한 투쟁의 과정이다. 깨어나지 못한 어린 새에게 알 속은 세상의 전부이며, 좁은 세상의 따뜻한 온기와 평화로운 어둠 속에서 뼈가 생기고 살이 아문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이 어린 새의 숙명이다. 자신을 보호하던 알을 제 힘으로 배반하고 부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과정이다. 자라지 않는다면 고통도 따르지 않으련만, 세상 모든 것은 생겨남(生)과 동시에 사라짐(死)을 향해 달려가기에 성장은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헤르만 헤세는 “탄생이란 자신의 세계를 깨트리고 나가야하는 고독한 투쟁의 과정”이라 하였다. 알이 때가 되면 깨고 나와야 하는 것이 숙명이듯이 이제 까지 자신을 보호해 주던 모든 것으로부터 배반하여 부수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데미안은 어떤 줄거리일까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데미안은 어떤 줄거리일까. 인터넷 지식사이트에서 데미안의요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싱클레어는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 아래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정은 말 그대로 밝은 세계이며 선의 세계이다.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아주 어두운 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놀이 집단에 끼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허풍을 프란츠 크로머에게 떨게된다.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두운 생활을 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을 통해서 카인과 아벨이라는 새로운 해석으로 선과 악을 생각하게 되고, 데미안은 크로머를 만나 싱클레어를 옭아맨 올가미를 풀어준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 속의 두 세계의 갈등으로 즉, 금지된 것과 허락된 것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베크는 그런 싱클레어를 술집으로 유혹한다. 뒷골목의 어두운 모습, 시궁창의 풍경은 금지된 구역에 들어서게 되고 자기 소외와 자기 부정에 빠져 사회와 이사에 대해 아예 부정해 버린다.
그는 베크와 함께 카인과 아벨 신화의 이중성, 성의 금욕주의, 연애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타락한 모습에 우려를 나타낸다. 싱클레어는 정신이 성을 갈망하는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 소용돌이치는 마음에 따라 그런 곳에서 벗어나게 된다. 싱클레어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데미안을 닮아가고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아닌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하여 마침내 데미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안에서 어느새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다.
싱클레어는 지구에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그리고 데미안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새, 먼저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새, 그리고 신 아프락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프락사스는 빛과 어두움의 공존, 선신이면서 동시에 악신이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알게 된다. 그는 데미안의 편지를 통해서 자기 내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싱클레어가 어느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서 아프락사스에 대한 공감을 느끼고, 그에게 아프락사스에 대한 가르침도 받게 된다. 싱클레어는 정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데미안을 길에서 다시 만난다. 데미안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재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여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꿈, 운명, 탄생의 괴로움을 알려 준다.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같이 느끼게 되고 정신적인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 때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함께 참전한다.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하고 야전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나란히 누워 있다. 데미안은 만약 언젠가 자신이 필요하게 되면 싱클레어 스스로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키스를 그에게 전한다.
다음날 아침 데미안은 옆에 없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친구이며 지도자인 데미안과 꼭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줄거리, 다음 지식사이트)
데미안(Demian)
The cover of Demian by Hermann Hesse.
소설 데미안은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 개의 세계와 만나는데 데미안을 통해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데미안이 해 준말이 ‘병아리 부화’에 대한 것이라 한다.
헤르만 헤세는 누구일까
이와 같은 성장소설 데미안을 쓴 작가 헤르만 헤세는 누구일까. 소설 데미안을 판매하기 위한 인터넷 서점사이트에서 저자소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저자 헤르만 헤세
1877년 독일 남부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인이 되고자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친 뒤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한다.
열 다섯 살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십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 '페터 카멘친트','데미안' 등을 발표한다.
서른 세살이 되는 해 인도 여행을 감행.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기행' 을 쓴다.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군 입대를 자원하나 부적격 판정을 받고 독일 포로 구호 가구에서 일하며 전쟁 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한다.
이후 정치적 논문,경고문,호소문 등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글들을 발표하는 한편, 이상 사회의 실현을 꿈꾸며 다양한 소재의 동화를 집필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싯다르타','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동방순례','유리알 유희'등 세계 독자들을 매료하는 작품들을 발표,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1962년 8월 제2의 고향 몬타뇰라에서 영면.
(데미안 책소개)데미안(세계문학전집)(44)
소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세계적인 문호로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라 한다. 그런 데미안의 소설 중에 ‘싯다르타’가 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때가 1922년이라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헤르만 헤세는 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를 보고 영감을 받아
데미안에 ‘병아리 부화이야기’가 있다. 먼저의 세계를 부수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 가야 한다고 말하는 ‘부화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런 병아리 부화이야기를 헤르만 헤세가 처음으로 말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4부 니까야 완역자 전새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이 ‘맛지마니까야’가 ‘칼 오이겐 노이만’에 의해서 독일에서 완역되어 출간된 것이 1902년이었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이 ‘맛지마니까야’의 영감을 받아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비유를 주요 모티브로 사용한 데미안을 출간한 것이 1916년 이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하고 불멸의 작품 ‘싯다르타’를 출간한 것이 1922년 이었습니다.
(전재성박사,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해제에서)
전재성 박사는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해제글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병아리 부화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를 보고 영감을 받아 쓴 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떻게 맛지마니까야를 접하게 되었나
독일에서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완역되던 때가 1902년이라 한다. 칼 오이겐 노이만에 의하여 세계에서 두번째로 완역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보다 무려 100년 이상 빠르다.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지성들이 읽기 시작 하였는데, 이때 헤르만 헤세도 맛지마니까야를 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당시 헤르만 헤세가 어렸을 때에요. 삼촌집에 놀러 갔었는데.. 삼촌이 동양학자 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 노이만이 번역한 불경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린 헤르만 헤세가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었습니다. 나중에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이라는 책과 싯다르타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부 맛지마니까야라고 하는.. 제가 그것을 다 완역하였습니다. 4부 니까야를 다 완역하였는데, 맛지마니까야라고 하는 책 안에 데미안과 싯닥르타에 나오는 중요한 모티브가 들어가 있습니다.
만약에 헤르만 헤세가 그 당시 노이만이 번역한 초기불경을 접하지 못하였다면 그 글을 쓸 수가 없었어요. 졸탁의 비유라든가 여러가지 중요한 주제들은 전부 니까야 안에 나옵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3-03)
전재성 박사의 동국대 정각원 법회 동영상에 따르면 헤르만 헤세가 어렸을 적 삼촌집에 있는 니까야를 접하였다고 한다. 니까야를 보고서 소설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1902년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때 헤르만 헤세의 나이는 25세이다. 헤르만 헤세가 20대 시절에 맛지마 니까야를 읽고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쓴 것은 40대 시절이다.
이처럼 독일에서 니까야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의 젊은 지성들 사이에서 많이 읽혀진 결과 현대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쩨또낄라경(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M16)
그렇다면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젊은 시절에 영향을 주었다는 맛지마니까야의 병아리 부화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병아리부화이야기와 관련있는 경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알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의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
(쩨또킬라경-Cetokhīlasuttaṃ-The Arrow in the Mind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쩨또킬라경(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docx 쩨또킬라경(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pdf
이것이 대문호 헤르만 헤세에게 영감을 준 병아리부화이야기와 관련된 경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에 대해서
1)스승에 대해 의심
2)가르침에 대해 의심
3)참모임에 대해 의심
4)배움에 대해 의심
5)동료 수행자에 대해 화를 내고 불쾌하게 여기고 상처를 주고 냉담하는 것
이라고 설하였다.
또 부처님은 다섯 가지 마음의 속박에 대하여
1) 감각적 쾌락에 대해 탐욕.
2) 몸에 대해 탐욕.
3)물질에 대해 탐욕.
4)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고 잠자는 것을 즐기고 빈둥대는 것을 즐기고 졸리는 것을 즐기는 것.
5)‘나는 계행이나 금계나 고행이나 청정한 행위로 하늘 또는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식의 계금취견.
라고 말씀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다섯가지 마음의 황무지를 버리고, 다섯가지 마음의 속박을 제거 하면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성장, 번영, 충만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이와 같이 용맹을 수반하는
열다섯 가지 조건을 성취하면
그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며,
올바로 깨달을 수 있으며,
위없는 안온을 얻을 수 있다.
(쩨또킬라경-Cetokhīlasuttaṃ-The Arrow in the Mind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여기서 말하는 열다섯가지 조건이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다섯가지 마음의 황무지를 버리는 것, 다섯가지 속박을 버리는 것, 네가지 신통의 기초, 그리고 ‘용맹(ussolhi)’이라 하였다.
용맹 있는 자가 껍질을 깨고
이와 같은 열다섯가지 조건 중에 용맹에 주목한다. 주석에 따르면 용맹(ussolhi)은 ‘모든 것에 적용 되어야 하는 노력’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용맹 있는 자가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 결과 올바른 깨달음과 위 없는 안온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한 비유가 병아리 부화에 대한 것이다.
한 마리의 알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암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
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쩨또킬라경-Cetokhīlasuttaṃ-The Arrow in the Mind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달음의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병아리가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어미 닭이 해주는 것은 알을 품어 주는 것 밖에 없다.
선가의 줄탁동기(啐啄同機)
하지만 선가에서 말하는 줄탁은 이와 다르다.
선가에 줄탁동기 [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줄탁동기 [啐啄同機]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공안 가운데 하나.
啐 : 쭉쭉 빨 줄
啄 : 쫄 탁
同 : 같을 동
機 : 기회 기
원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던 말인데, 임제종(臨濟宗)의 공안집(公案集:화두집)이자 선종(禪宗)의 대표적인 불서(佛書)인 송(宋)나라 때의 《벽암록(碧巖錄)》에 공안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다.
공안은 화두라고도 하는데, 깨우침을 위한 물음의 요체이자 수수께끼로, 책으로 말하면 제목과 같은 것이다.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은 하나의 공안만 가지고도 평생을 참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몇 자 안 되는 공안일지라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이치가 숨어 있어 그 뜻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공안의 원래 뜻이 공공기관의 문서라는 점에서 보면, 일단 깨닫기만 하면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그 뜻이 명백해지는 것이 공안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문자의 뜻에 얽매이는 순간 깨달음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다시 관념에 빠진다. 선종에서는 이러한 관념의 세계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안은 최소한의 언어만을 사용한다.
줄탁동기는 이러한 깨우침과 관련된 공안이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는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줄'은 바로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기 위하여 쪼는 것을 가리킨다. 어미닭은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데, '탁'은 어미닭이 알을 쪼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알껍질을 쪼아 깨려는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병아리와 어미닭이 동시에 알을 쪼기는 하지만, 어미닭이 병아리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미닭은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데 작은 도움만 줄 뿐, 결국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병아리 자신이다.
이는 스승은 깨우침의 계기만 제시할 뿐이고, 나머지는 제자가 스스로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함을 의미한다. 또 깨달음에도 때가 있어 깨달아야 할 때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H.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병아리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말도 이와 같은 뜻이다. 줄탁지기·줄탁동시라고도 하고, 줄탁으로 줄여 쓰기도 한다.
(줄탁동기 [啐啄同機] , 다음 지식) |
다음 지식사이트에서 본 줄탁동기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공안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알껍질을 쪼아 깨려는 병아리는 깨달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요, 어미닭은 수행자에게 깨우침의 방법을 일러주는 스승이라고 설명한다.
줄탁이야기는 왜 서로 다를까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이야기는 이미 초기경전에 비유로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은 다르다. 초기경전에서는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으로 묘사된 것에 비하여 선종의 공안은 ‘안팍에서’ 껍질을 깨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이루는데 있어서 방법의 차이라 보여 지는데, 이는 곧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다르기 때문으로 본다. 부처님이 강조한 ‘위 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득정각)’과 선종에서 말하는 진여 불성 참나를 보는 ‘견성성불’식 깨달음은 다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 하신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알을 품은 닭이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병아리가 자신의 부리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있어서 제3자의 개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선종은 다르다. 스스로 깨닫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스승이 그 깨달음을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안팍에서 껍질을 쪼는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이는 선종의 전통에 기인한다.
선종에서는 문자나 말 보다 뜻과 마음을 더 중요시 하게 여긴다. 그래서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주장하며 법이란 오로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으로 전승된다고 본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사이가 아니면 법이 전달 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선종에 있어서 깨달음은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서 빠져 나오듯이 줄탁동기(啐啄同機) 로 설명하는 것이다.
놀라운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깨달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른 것에 의지하여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가르침, 그것을 요약하면 37조도품이고, 또 그것을 요약하면 8정도이고, 이 8정도는 바로 계정혜 3학을 말하는데, 이 계정혜 3학을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깨달음은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지 남이 나를 깨닫게 해 줄 수 없다. 그런 가르침이 병아리 부화의 비유라 볼 수 있다.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모티브로 하여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 가기 위해 먼저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헤르만 헤세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의 ‘병아리 부화비유’를 잘 이해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자신의 힘으로 깨쳐 나가는 것을 말한다.
2012-05-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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