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31. 15:12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법보시 해준 이에게 감사를

 

요즘은 글을 썼다 하면 10페이지가 넘어 가는 경우가 많다. 폰트 사이즈 12로 맞추어 놓고 여백을 채워나가다 보면 금새 10페이지 가까이 되는데, 그렇게 되기 까지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의 문구를 삽입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말로 번역한 경을 몇 군데 삽입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고 또 다른 글을 인용하고 살을 붙이다 보면 금새 10페이지가 된다.

 

이렇게 글쓰기가 수월해진 것은 초기경전에 대한 자료를 법보시 받았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보시를 해 준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이렇게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하다보니 그 이전의 글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전 글의 경우 오로지 자신의 머리로 작성한 글이었으나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다 보니 너무 편하고 수월한 것이다. 글쓰는 맛도 나고 더구나 공부도 자연 스럽게 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료의 공유화도 가능하기 때문에 일석이조, 일석삼조, 그 이상의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것을 왜 읽지 않습니까?”

 

이렇게 글쓰기가 수월해지고 글쓰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은 전적으로 법보시해준 분의 덕택이지만 무엇보다 초기경전을 번역한 이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전재성박사이다.

 

전재성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빠알리 대장경을 번역하였다. 1999년 우리말로 된 상윳따니까야가 출판 됨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부처님의 원음을 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후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소위 4부 니까야를 모두 완역하였는데, 이는 세계역사상 최초라 한다. 후학들이 비교적 좋은 환경속에서 번역한 것과 달리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고통스런 삶 속에서 이루어낸 쾌거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수십년간에 걸쳐 번역한 니까야는 얼마나 많이 팔렸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그 대장경을 다 번역하였습니다. 삼사십권이나 되요. 그런데 일년에 몇권이나 나가는지 아십니까? 일년에 많아 보아야 100권에서 150. 역사적인 부처님이 목숨을 걸고 도달한 진리, 우리처럼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경전이 번역이 됐는데 .. 그 것을 왜 읽지 않습니까?”

 

(전재성박사, 2012년 3월31 정각원 토요법회, 미디어붓다 2012-05-16)

 

 

놀라운 말이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수십년 번역한 책이 고작 일년에 많아야 100권에서 150권 밖에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후 40년간 마을에서 마을로 목숨을 걸고 전달하고자 하였던 진리에 대한 기록물을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한탄이다. 목이 매이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 것을 왜 읽지 않습니까?”라고 호소 하듯이 일갈한다.

 

빠알리 니까야에 매료된 이유

 

그렇다면 우리는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할까. 그 이유에 대하여. 불교평론 2000년 가을호에 실린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박사는 빠알리 니까야에 매료 된 이야기부터 하였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빠알리 니까야에 매료가 된 것은 수학의 법칙보다도 자명하고 명석한 초기경전의 논리 때문이었고 그 수정처럼 맑은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애쓴 페터 노이야르 선생의 삶을 상기하며 니까야 번역에 임했다.

 

(전재성박사,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불교평론 2000년 가을 4)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전재성.docx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전재성.pdf

 

 

 

빠알리 니까야에 매료된 이유가 논리적이기 마치 수학의 법칙처럼 논리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초기불교를 좋하는 사람들 중에 이공계출신이 많다고 한다.

 

초기불교와 디지털논리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컴류터 공학 등 이공계 학문은 철저하게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1+1 2가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되지 않는 다고 믿는 다.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논리에 대하여 어느 블로거는 디지털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1 0, 있음과 없음 등으로 똑똑 떨어지는 것처럼 초기불교는 디지털 시대에 딱 들어 맞는다고 한다. 반면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아나로그로 본다. 1 0으로 똑똑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로 연결된 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수행의 궁극적 목적에서도 차이가 난다.

 

아날로그 방식의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의 경우 깨달음에 대하여 나와 궁극적 실재의 합일로 보지만. 디지털 방식의 초기불교의 경우 삶에 대하여 순간순간 생멸하는 점들의 연결로 보기 때문에 어느 한 포인트에서 조건이 끊어지면 열반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선불교에서는 해탈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결코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는 삶의 과정자체가 모두 하나로 연결된 한마음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떠 오르는 태양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디지털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마치 컴퓨터 시스템을 보는 듯한 논리로 되어 있어서 디지털불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를 바탕으로 한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가르침이 초기불교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의 지성들이 불교를 좋아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는 불교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것이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

 

전재성박사의 번역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문체가 매우 유려하다. 이는 가급적 우리말로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 이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빠알리 어는 표음문자로서 대단히 분석적이고 구체적인 언어구조를 갖고 있는 인도 유럽어이고, 한문은 표의문자로서 직관적이고 추상적 언어구조를 갖고 있다. 부처님의 원음인 니까야는 아함경으로 번역되면서 그 분석적인 언어 구조를 상실하고 추상화되고 격의(格義)불교화된 감이 없지 않다. 역사적인 부처님은 분별론자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빠알리 대장경에서 다르마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일이다.

더구나 니까야와 아함경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빠알리 대장경을 일본의 남전 대장경처럼 한역술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한다면 그것은 빠알리 대장경이 아니라 아함경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나중에 발전한 대승불교의 현란한 교리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또는 흔히 발생하는 교리의 잘못된 왜곡과 굴절을 시정하기 위해서도 초기불교의 원형을 담고 있는 빠알리 경전을 읽어야 한다. 이하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왜 읽어야 하는지를 좀더 부연하고자 한다.

(전재성박사,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불교평론 2000년 가을 4)

 

 

전박사의 글에 따르면 부처님은 분별론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는 선종에서 선사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듯이 말하는 분별하지 말라라는 말과 대조된다.

 

이렇게 부처님이 분별론자라고 불리운 것은 분석적 기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몸과 마음을 분해하고 분석하여 설명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논리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1+1 2가 되는 것처럼 수학적 논리를 보는 것과 같은 체계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 분석적 설명방법은 표음문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글자 하나가 하나의 이미지 또는 상징을 의미하는 한자는 표의 문자로서 논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말로 풀어 쓴 노력이 지나쳐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우리말로 풀어 쓴 노력에 대한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로서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So devayānamāruyha viraja so vahāpatha,
K
āmarāga virājetvā brahmalokūpago ahū.

 

그는 하늘의 길, 먼지를 떨어버린

큰길에 올라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그의 태생이 막지 못했습니다.

 

139. He ascended the heavenly chariot and rode resplendent on the highway

Giving up sensuality was born in the world of Brahmā, birth did not stop him from that.

 

(와살라경-The Outcaste-천한 사람의 경, 31번 게송,  숫따니빠따 Sn1.7, 전재성님역)

 

 

경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하늘을 말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범천(브라흐마, Brahmā)’를 말하고, 하느님 나라는 범천의 세계 (the world of Brahmā)’를 말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풀어 쓰다 보니 우리나라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같은 발음으로 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장단점이 있다. 이름이나 지명 등은 고유명사로서 원어 그대로 불러 주어야 하나 너무 지나친 듯한 느낌이 든다. 이는 가급적 한자어를 쓰지 않기 위하여 시도한 것이라 보여진다. 한역술어를 그대로 사용하면 아함경과 그다지 구별이 되지 않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로 아름답게 풀어 쓴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풀어 쓴 결과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부처님의 덕성을 찬탄하는 부처님의 별칭에 대한 것이다.

 

 

itipi so                         이띠삐 소

bhagavā                          바가와

araha,                         아라항

sammāsambuddho,                  삼마삼붓도

vijjācaraasampanno,             윗자짜라나삼빤노

sugato,                          수가또

lokavidū,                        로까위두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

satthā devamanussāna,          삿타 데와마눗사낭

buddho,                          붓도

bhagavā                          바가와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That Blessed one is

worthy,

rightfully enlightened,

endowed with knowledge and conduct,

well gone,

knower of the worlds,

is incomparable tamer of those to be tamed,

Teacher of gods and men,

enlightened

and blessed.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1, 전재성님역)

 

 

 

대승불교 한자문화권에서 알고 있는 응공, 정변지 등 여래십호로 불리우는 용어를 우리말로 풀었는데, 다음과 같은 표로 비교해 보면 훨씬 더 친근함을 알 수 있다

 

 

 

부처님호칭 번역비교표

No

부처님 호칭

한역

전재성박사

영어

1

아라한(Arahan)

應供(응공)

거룩한 님

worthy

2

삼마삼붓다(Samma-­Sambuddha)

正遍知(정변지)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rightfully enlightened

3

윗자짜라나삼판나(Vijja-carana-sampanna)

明行足(명행족)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endowed with knowledge and conduct

4

수가따(Sugata)

善逝(선서)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well gone

5

로까위두(Lokavidu)

世間解(세간해)

세상을 아는 님

knower of the worlds

6

아눗따라(Anuttara)

無上士(무상사)

위없이 높으신 님

7

뿌리사담마사라티(Purisadammasarathi)

調御丈夫(조어장부)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incomparable tamer of those to be tamed

8

삿타데와마눗사남(Sattha devamanussanam)

天人師(천인사)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Teacher of gods and men

9

붓다(Buddha)

()

깨달은 님

enlightened

10

바가와(Bhagava)

世尊(세존)

세상에 존귀하신 님

blessed

 

 

 

모두 님자를 붙여 번역어를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별칭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자 번역와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부처님이 친근해 보임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전재성 박사는 우리말을 사용하여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 하려 애쓴 것을 번역서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시도는 경전읽기가 지루하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이라 보여진다.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한 오계설명

 

그런데 니까야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민중어로 부처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에 최대한 풀어서 설명한 흔적을 경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역되면서 한자의 특성상 대폭 의미가 축소 된 것이다. 그런 것의 대표적인 예를 들라면 오계와 삼귀의를 들 수 있다.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서 불자가 된다. 그리고 오계를 준수함으로서 실천적적인 신행생활을 영위 한다. 이중 오계를 보면 한역의 경우 단순하게

 

1) 불살생(不殺生 :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

2) 불투도(不偸盜 :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3) 불사음(不邪淫 : 정당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말 것),

4)불망어(不妄語 : 거짓말을 하지 말 것),

5)불음주(不飮酒 : 술을 마시지 말 것)

 

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모호 하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번째 불투도란 말도 애매하다. 세상이 모두 도둑놈인데 도둑질이 어디 있는가 묻는다면 애매해진다. 그러나 원어에는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전재성박사,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 불교평론 2000년 가을 4)

 

 

한자어 불투도(不偸盜)를 번역하면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것이라고 해석되는데 이는 애매모호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다라고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역오계

한역풀이

빠알리 니까야 표현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불투도(不偸盜)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불사음(不邪淫)

정당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말 것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 것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말 것

곡주나 과일주 등 취기 있는 것에 취하지 않는 계행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어느 것 한가지 명확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삼보귀의 신앙고백문

 

삼귀의도 마찬가지이다. 한역 삼귀의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만든 한글삼귀의문은 매우 단순하다.

 

한글삼귀의문이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지만 왜 귀의 하는지에 대하여 불자들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빠알리 니까야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한글삼귀의문

빠알리 니까야 삼보귀의 신앙고백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으신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

올바른 길을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시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으신 님,

세상에 존경받는 님이시옵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세상의 존경받는 님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며,

승화시키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이 하나하나에게 알려지는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합니다.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합니다.

이와 같이 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시고,

대접받을 만하시고,

선물받을 만하시고,

존경받을 만하시고,

세상에 가장 높은 복전이옵니다.

 

 

 

특히 승보에 대한 것을 보면 참모임(상가)에 대하여 사쌍팔배의 성자의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을 승보로 여기고 있지만 초기불교에서의 승보의 개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스런 성자의 커뮤니티를 말한다.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과 고결한 덕성을 노래로

 

빠알리 니까야에서 오계에 대한 정의와 삼보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표현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부처님에 대한 표현도 구체적이고 명확한데 인간미가 넘쳐 흐른다. 이점은 신격화 되고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 대승경전속의 부처님과 대비 된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부처님, 인정이 넘치는 부처님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 널리 애송되는 노래가 있다. 나라시하가타(Narasiha Gatha)이다. 한역으로 인중사자게라 하고, 전재성박사는 인간사자의 노래라고 번역하였다. 그 나라시하가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시하가타

(Narasīhagāthā)

 

 

1.

Cakkavarakitarattasupādo,       짝까와란끼따랏따수빠도

lakkhaamaṇḍita-āyatapahī,      락카나만디따 아야따빤히

cāmarachattavibhūsitapādo,       짜마라찻따위부시따빠도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붉은 성스러운 두 발은 탁월한 법륜으로 장식되고,

긴 팔꿈치는 성스러운 징표들로 치장되셨고,

발등은 불자(拂子)와 양산으로 분장되셨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2.

Sakyakumāravaro sukhumālo,       사끼야꾸마라와로 수쿠말로

lakkhaacittikapuṇṇasarīro,      락카나찟띠까뿐나사리로

lokahitāya gato naravīro,        로까히따야 가또 나라위로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우아하고 고귀한 석가족의 왕자님,

몸은 성스러운 징표로 가득 차시고,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 가운데 영웅이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3.

Puṇṇasasakanibho mukhavaṇṇo,    뿐낫산깐니보 무카완노

devanarāna' piyo naranāgo,       데와나라나 삐요 나라나고

mattagajindavilāsitagāmī,        맛따가진다윌라시따가미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얼굴 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4.

Khattiyasambhava-aggakulīno,     캇띠야삼바와 악가꿀리노

devamanussanamassitapādo,        데와마눗사나맛시따빠도

sīlasamādhipatiṭṭhitacitto,       실라삼마디빠띳티따찟또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왕족으로 태어난 귀족으로서 하늘사람과 인간의 존귀함을 받는 님,

마음은 계율과 삼매로 잘 이루어진 님,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5.

Āyatatugasusaṇṭhitanāso,        아이야따뚠가수산티따나소

gopakhumo abhinīlasunetto,       고빠쿠모 아비닐라수넷또

indadhanū-abhinīlabhamūko,       인다다누 아비닐라수넷또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잘 생긴 코는 길고 두드러지며, 속눈썹은 젊은 여자의 것과 같고,

눈은 사파이어의 푸른빛이고, 눈썹은 무지게 같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6.

Vaṭṭasumaṭṭasusaṇṭhitagīvo,        왓따수맛따수산티따기워

sīhahanū migarājasarīro,         시하하누 미가라자사리로

kañcanasucchavi-uttamavaṇṇo,     깐짜나숫차위 웃따마완노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잘 생긴 목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턱은 사자와 같고,

몸은 짐승의 왕과 같고, 훌륭한 피부는 승묘한 황금색이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7. Siniddhasugambhiramañjusaghoso,시닛다수감비라만주사고소

higulabandhusurattasujivho,     힌굴라반두수랏따수지보

vīsativīsatisetasudanto,         위삿띠위삿띠세따수단또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훌륭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고,

혀는 주홍처럼 선홍색이고,

치아는 스무개씩 가지런히 하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8.

Añjanavaṇṇasunīlasukeso,         안자나완나수닐라수께소

kañcanapaṭṭavisuddhanalāo,       깐짜나빳따위숫다날라또

osadhipaṇḍarasuddhasu-uṇṇo,      오사디빤다라숫다수 운노

esa hi tuyha pitā narasīho.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칠흙같은 심청색이고,

이마는 황금색 평판처럼 청정하고 육계는 새벽의 효성처럼 밝게 빛나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9.

Gacchati nīlapathe viya cando,   갓차띠 닐라빠테 위이야 짠도

tāragaāparivehitarūpo,         따라가나빠리웨티따루뽀

sāvakamajjhagato Samaindo,      사와까맛자가또 삼마닌도
esa hi tuyha pit
ā narasīho ti.   에사 히 뚜이하 삐따 나라시호

 

많은 별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수행자들의 제왕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나라시하가타- Narasīhagāthā- Verses about a Lion of a Man- 인간사자의 노래, 전재성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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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시하가타(Narasīhagāthā, 인간사자의 노래)

   

Imee Ooi창송

http://audio.buddhistdoor.com/...47a26c6a/1.mp3(6분18초)

 

 

 

 

 

우리나라 불자들은 32 80종호로 표현되는 부처님상을 떠 올린다. 그런 부처님상 대로 그림을 그려 본다면 보통사람과 다른 이상한 모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시하가타에 표현된 부처님의 이미지는 인간모습 그대로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처음으로 카필라성을 방문하였을 때 야소다라 부인이 어린 라훌라에게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부처님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부처님의 신체적 특징과 고결한 덕성에 대하여 백수의 왕인 사자를 빗대어 가르쳐 준 것이다. 

 

나라시하가타는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 재가자들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다고 한다.

 

 

 

 

 

야소다라왕비와 라훌라(Yasodhara and rahula)

 

 

 

이렇게 전재성박사는 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에서 빠알리 니까야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PTS의 노력이 있었기에

 

그렇다면 한글빠알리니까야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볼 수 있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정각원 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베끼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학자들이 베끼는 것이 아니에요. 사경사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경사들이 사경을 하다보면 졸아요 졸아. 그러다 보면 한줄씩 빼먹는다고.

 

제가 독일에서 공부를 해 보니까 티베트대장경, 빠알리대장경, 산스크리트대장경을 다 진열해 놓고 봐요. 그런데 보니까 한문도 한줄이 빠진거에요. 산스크리트나 빠알리에 있는데 한문이 한줄이 없어요. 이건 사경사가 졸다가 빼 먹은 거에요.

 

한문대장경이라도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한문이 너무 심오해지는 거에요. 앞뒤가 해석이 안되니까. 한줄 빼먹었으니까. 그러면 심오하게 해석해 버린다고.

 

그런데 진리는 명백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읽어서 알아야 되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써 놓았겠어요.  빠알리 대장경도 마찬가지에요.

 

미얀마본, 태국본, 스리랑카본 라오스 캄보디아 본이 있어요. 그런데 다 대조를 해가지고 배열을 해야 되요 번역하려면. 왜냐하면 한줄씩 빠진 것을 붙잡고 평생 봐 보아야 무슨말인지 몰라요. 이상하게 심오하게 해석한다고. 그건 잘못된 거에요.

 

그래서 영국 PTS에서 엄청난 작업을 한 것입니다. 각나라 필사본들, 그 손으로 긁어서 쓴 것, 알아보기도 힘든 것, 다 대조해가지고 로마나이즈화해서 기호로 만든 거에요.

 

이건 번역하기 보다 힘든 작업입니다. 그걸 영국 PTS에서 한 것입니다. 불교국가에서 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국가에서 돈 한푼이라도 영국에 보태 준 것이 없어요. 자기들이 좋아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작업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제가 번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않으면 스리랑카본, 태국본, 미얀마본 다 갖다 놓고 할라다 보면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전재성박사, 2012년 3월31 정각원 토요법회, 미디어붓다 2012-05-16)

 

 

오늘날 볼 수 있는 한글 빠알리니까야는 어느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구전으로 전승된 니까야를 싱할리어로 문자화 하고 이을 다시 로마나이즈화 하는 과정에 있어서 빠알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 PTS)의 노력이 매우 컷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한글 번역이 가능하였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눈물겨운 원본지키기

 

오늘날 불자들은 한글로 번역된 우리말 니까야를 손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까지 번역자의 노력이 있었고, 그 이전에 빠알리성전협회(PTS)의 노력이 결정적 이었다. 각국어로 된 빠알리경전을 일일이 대조하면서 혹시 미싱된 것이 없는지 확인 한 다음에 이를 알파벳으로 로마나이즈화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독일, 프랑스, 일본, 우리나라 등 전세계로 부처님의 원음이 전달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그런데 PTS의 노력이 있기 이전에 이미 스리랑카에서는 목숨을 건 원본지키기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종교 시조는 글을 남기지 않는다. 시조가 말을 하면 제자들이 이를 기억하여 전승하는 형식을 취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것이 빠알리 니까야이다.

 

3차 결집후 빠알리 삼장이 공인되면서 이를 전세계에 퍼뜨린 인물이 아쇼카대왕이다. 그 아쇼카대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최초로 스리랑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그런데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온 빠알리 니까야가 큰 위기를 맞는다. 그것은 기원전 1세기경 스리랑카에서 큰 기근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무려 12년간의 기근으로 인하여 비구들이 아사할 지경에 이르자 구전으로만 전승되어 오던 빠알리삼장을 싱할리어로 기록 하게 된다.  5세기 붓다고사 시대까지 무려 오백년 이상 싱할리어로 가두어 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안전한 원본지키기가 되었다. 그때 당시 인도대륙에서는 힌두교가 브라만교의 뒤를 이어 흥기하고 있었고 이런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운동이 일어 났는데, 빠알리삼장을 싱할리어로 오백년 이상 가두어 놓다 보니 대륙의 변화무쌍한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부처님의 원음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구전으로 전승되고, 싱할리 문자로 가두고, PTS 에서 로마나이즈화 하여 우리말로 번역된 것이 빠알리니까야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난하고 눈물겨운 과정을 거쳐 전승된 빠알리니까야가 잘 읽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빠알리니까야의 가치를 몰라서 일 것이다. 그래서 책이 잘 팔리지 않은 것이라 보여 진다.

 

거실에 상윳따니까야 한질 꼽혀 있다면

 

불자들이라면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생활을 한다. 삼보에 귀의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빠알리니까야 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것도 마치 부처님이 면전에 있는 것처럼, 부처님이 마치 옆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접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빠알리니까야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책을 사 보아야 읽을 수 있다. 거실 한편 장식장에 양주나 와인 대신 상윳따니까야 한질이 꼽혀 있다면 집안에 부처님을 모셔 놓은 것과 같다.

 

그런 책은 먹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셔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유행에 지난 옷처럼 쓸모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은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끝까지 남는다. 그런 책을 보시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보시중에 최상의 보시가 법보시라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른 것 보다 책을 사서 보시 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 그런 책은 일단 사 두면 남는다. 누가 보아도 보게 읽게 되어 있다. 언젠가 읽을 인연이 되면 떠들어 보기 때문이다.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빠알리니까야는 읽기에 어려운 책이 아니다. 대승경전처럼 인내를 가지고 읽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 정도 수준만 되도 읽어 낼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이 심오하기 때문에 되새기며 읽으면 된다.

 

경전을 읽는 것도 수행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다리를 꼬고 앉아서 좌선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108배를 해야 무언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다. 경전을 사경하는 것도 수행이고, 경전을 읽는 것도 수행이다. 빠알리니까야를 구입하여 꾸준히 매일 읽어가며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도 수행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수행에 대하여 수습(修習)’이라고 하였다. 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을 말한다.

 

불자라면 빠알리니까야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그 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빠알리니까야를 구입하여야 한다.

 

 

  

2012-05-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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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전재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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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야 하는가-전재성.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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