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고? 일체지자로서의 삼마삼붓다(정등각자)
같은 태양이지만
태양이 있다. 낮에 떠 있는 태양은 오전이나 오후나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런데 오후에 보는 태양, 그것도 해질 녁에 보는 태양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는다. 지금 온 세상을 다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과 한 두시간만 지나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아침 일찍 동녁에 떠 오르고 있는 태양이 있다. 오후 늦게 떠 있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비추고 있는데, 그 비추는 시간은 하루 종일 간다. 그래서 이를 ‘떠 오르는 태양’이라 한다.
이렇게 지는 해와 떠오르는 태양은 모든 산하대지를 똑 같이 환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추는 시간은 다르다.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지는 해는 노년기라 볼 수 있고, 떠오르는 태양은 청년기라 볼 수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라 본다.
떠오르는 불교
요즘 불자들이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에 실망한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초기경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의 초기불교 강좌가 미어 터질 정도로 성황이라 한다. 이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대승불교전통이 우세하다. 사찰은 말할 것도 없고 불자들이 쉽게 접하는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 경전을 위주로 한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선사들의 선에 대한 가르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제도권 밖에 인터넷공간에서는 초기불교를 포함하여 다양한 불교교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 현실의 주류 제도권 불교와 사이버상의 비주류 비제도권 불교로 양분화 되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인터넷공간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익명을 전제로 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초기불교가 점차 힘을 얻어 가고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
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고?
초기불교에 관심을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시대가 본격화된 2000년 무렵이라 보여 진다. 그 때 당시 초기불교와 제도권 불교간의 교리 논쟁이 불교평론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그 때 당시 마성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마성스님, 초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 불교평론 2002년 11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한 글인데, 눈에 띄는 대목이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라는 내용이다. 대승불교론자들이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선사들이나 교수들의 법문이나 강의에서 종종 듣는다.
김호성교수 말하기를
초기불교가 불완전하다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덜 완성된 것이라는 말과 같다. 이런 식의 주장을 뒷받침하듯이 최근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김호성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자가 스승과 다른 학풍으로 스승과 다른 깨침으로 다른 방편으로 다른 방법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스님들 같으면 학인들을 지도 하면서 각각 다른 특색있는 가풍을 형성하고 사상을 형성하고 가르침을 형성하고 할 때 발전이 있어요.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 2500년 전의 가르침이 지금도 그대로 2500년 동안 물려져 내려왔다.. 어떤 분은 그것을 굉장히 강조 하며 주장 하는 사람도 많아요. 우리나라 불자나 불교인중에. 그러면 2500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극속에서 발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한게 250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불법에 관여를 했고,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인도, 한국, 티벳, 일본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김호성교수,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012-04-12, 미디어붓다)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김호성교수가 일본 입벤스님의 나무아미타불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한 말이다.
김교수는 불교의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학문이 발전하는 것처럼 불교도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2500년 전 부처님에 의하여 창시된 불교가 부처님당시 그대로의 불교라면 발전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성스님의 논문에 언급된 대로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인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서 발전되었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김호성 교수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 한 것, 미완성 된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김교수는 또 전달과정에서 왜곡 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 예로서 개그맨 허참이 진행하였던 프로중에 ‘말 전달놀이’의 예를 들었다. 처음 화자가 한 말과 최종적으로 전달 받은 자의 말이 서로 다름을 빗대어 한 말이다. 그래서 지금 전승된 불교경전이 왜곡되었지 않나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김호성 교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완성인 것,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와 같은 시각은 대승불교학자 뿐만 아니라 선사들도 동일시각을 가지고 있다.
남진제
지난 5월28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라디오를 틀자 마침 봉축법요식이 진행 되고 있었다. 조계종 종정으로 새로 취임한 진제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표 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이 같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내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반야(般若)의 밝은 지혜(智慧)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인개개(人人個個)가 참나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참나를 찾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참나는 모든 생명(生命)의 근원이요, 형상(形相)과 사상(思想)의 갈등을 넘어선 상호이해와 자유평등의 당체(當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다 같이 행복하고 지혜롭게 살고자 한다면,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하고 일상생활 가운데 오매불망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해서 일념(一念)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정진(精進)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인류여, 안으로는 참나를 찾는 데 게으름이 없고, 밖으로는 남을 돕고 베푸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나를 찾지 않으면 마음의 번뇌와 갈등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고, 복은 짓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상생활 가운데 남을 도우면서 바르게 참선을 닦아 나가면, 마음의 온갖 번뇌와 갈등이 봄눈 녹듯 사라져 다 같이 지혜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제스님, “참나 찾아 반야 지혜 회복하자” 진제법원 조계종 종정예하 부처님오신날 법어, 불교신문 2012-05-25)
진제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당일 법문에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스님이 늘 하는 말인 ‘父母未生前本來面目(부모미생전본래면목)’ 화두를 말하였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하고 일상생활에서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화두는 진제종정스님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 없다. 언제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나 이 화두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 당일 역시 이 화두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스님이 말한 화두로 확철대오하였을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스님이 있다.
북송담
우리나라에 선사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대선사도 있다. 대선사 중에서도 유명한 두분을 들라면 진제대선사와 송담대선사를 들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신문에서는 이 두분을 가리켜 ‘남진제 북송담’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기도 하였다.
북송담이라는 명칭을 듣고 있는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은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법을 생사윤회로 할지언정 소승삶을 바라지 말라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소승이라는 것은 세속의 허망한 것과 집착심을 떼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이지 불교의 구경법이 아닙니다.
어린애가 화택속에서 노는데 팔려가지고 불속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장난감를 만들어 불속에서 빨리 나오에 하기 위한 소승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4일자 , http://www.bbsi.co.kr/)
송담스님은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법이라 하였다. 중생구제를 위하여 임시 방편으로 설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런 소승법은 구경법이 아니라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법이라고 말한 송담스님은 다른 날 라디오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천년전 가비라국의 싯달타태자로 태어난 부처님 그 부처님은 우리를 제도하기 위하여 잠시 화신으로서 나타나셨을 뿐 진짜 부처님은 아닌 것 입니다. 아니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면 진짜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 진짜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다 말씀 할 수 없습니다. 온 허공계, 온 대천세계에 가득 차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계신다, 이렇게 생겼다 이렇게 말씀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9일자)
송담스님은 ‘진짜부처님’에 대하여 말하였다. 진짜부처님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임시방편의 소승법을 설하였기 때문에 진짜 부처님으로 볼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송담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부처님이 언설로 표현한 것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정한다. 그대신 말이 없는 가운데 마음으로 전한 법이 진실한 법이라고 하였다. 그 것이 바로 본래면목 참나라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참나’라 하였다. 이런 주장은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려 놓기에 충분하다.
하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방송이나 불교TV를 보면 거의 대부분 선사들의 법문이나 선어록 또는 대승강좌 일색인데, 선사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참나에 대한 것이다. 이중 진제스님의 경우 ‘부모미생전본래면목’화두에 대한 것이 빠지지 않고, 송담스님의 경우 ‘이뭐꼬’ 화두에 대한 이야기로 법문이 진행된다.
특히 송담스님의 경우 최근 불교방송에서 몇 달째 불교강좌시간에서 법문을 하고 있는데, ‘이뭐꼬’화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 나가면서 소승법과 대비되는 ‘정법’과 ‘최상승법’에 대한 말을 빼 놓지 않는다. 지난 몇 개월간의 강좌가 이렇게 “이뭐꼬” “정법” “최상승법” 이야기만 반복적으로 늘어 놓다 보니 지난 번 했던 말을 이번에 또 하는 식이 되었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잔소리로 들리기 쉽다. 선사들의 법문도 마찬가지이다. 하던 말 또 하고 또하고 하는 식의 법문을 듣다보면 그 다음에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예측이 된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화두나 ‘이뭐꼬’화두에 대한 이야기 역시 하던 말 또하고 또하고 식이다. 소승법, 정법, 최상승법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녹음기 틀어 놓듯이 반복적인 이야기에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단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완전한 것, 미완성인 것이라는 식의 발언도 빼 놓지 않는다.
과연 이런 식의 법문에 젊은 층이나 청년 불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현응스님은
이처럼 대승불교학자나 선사들의 법문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불완전한 것, 미완성 된 것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은 현 조계종 교육원장 소임을 맡고 있는 ‘현응스님’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불교의 가르침은 삶과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입장이었다. 즉 기본불교는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깨워 주었지만,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어 나가야 하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현응스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불교평론 44호 2010-09-06)
현응스님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기본불교라는 카테고리에 넣은 다음, 기본불교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 또는 미완성인 것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실재론에 서 있는 다른 종교, 사상들과 대항할 ‘적극적인 연기적 역사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연기론을 이해한 불교도들에게 삶을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하는 보다 진전된 불교 이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불교의 가르침은 이러한 교리적 도전에 응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포함하는 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이다.
(현응스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불교평론 44호 2010-09-06)
대승불교의 성립배경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대승교가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불교는 샤카무니 개인의 견해일 뿐이라고
이처럼 대승불교의 학자, 이판스님, 사판스님 모두 대승불교가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하여 초기불교가 미완성인 것에 대하여 포커스를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주류 제도권의 주장만은 아니다. 비주류 비제도권 선사로서 댓글을 주신 어느 산중승님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가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한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님 댓글)
산중승님은 삼보사찰중의 하나에 속한 문중사문으로서 수십년 선방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 산중승님의 글을 보면 앞서 언급한 대승불교학자나 이판스님, 사판스님의 주장과 너무나 똑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 미완성된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불교는 소승법에서 대승법으로, 다시 최상승법으로 계속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주류불교에서는
이런 주장은 아마도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주류불교’를 테라와다불교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류불교라는 용어는 동국대학술원장이자 미국UCLA대 석좌교수인 로버트 버스웰 교수가 불교TV강좌에서 사용하던 말이다.
테라와다 불교는 초기불교의 전통을 비교적 잘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 대승학자나 선사들이 주장하는 미완성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마성스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마성스님, 초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에 대한 검토, 불교평론 2002년 11호)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론을 이야기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종갓집이라 불리우는 스리랑카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미얀마, 계율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태국 등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국가들도 공통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주류불교라고 불리우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미완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완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꿀 것도 없고 개선할 것도 없는 것으로 본다.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부처님가르침 자체가 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사조에 물들 것을 염려 하였다. 그래서 원본을 지켜내기 위하여 눈물겨운 보전 노력이 있었다. 때로는 구전으로, 때로는 기록으로 남겨 부처님의 가르침외 다른 것이 들어 갈 수 없도록 목숨을 걸고 지켜 온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ñāṇa)’로 표현된다.
일체지자 삼마삼붓다
일체지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부처님의 별호가 잘 설명해 준다. 역사적인 부처님에 대하여 북방과 남방을 막론하고 부처님에 대하여
1) 아라한(應供, Arahan),
2)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3) 명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明行足, Vijjā-caraṇa-sampanna),
4)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Sugata),
5)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 Lokavidū),
6)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Anuttara),
7)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8)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ṃ),
9) 부처님(佛, Buddha),
10) 세존(世尊, Bhagavā).
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열가지 항목으로 설명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하다거나 미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부처님의 별호 중에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는 명칭이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라 한다. 한역으로 정등각자라 한다. 남북방을 막론하고 왜 이런 명칭을 붙여 주었을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정등각(正等覺)을 의미하는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는 오직 부처님들만 얻을 수 있는 아라한 도의 지혜입니다. 부처님들은 이 아라한 도의 지혜를 어떠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직관력으로 얻으셨습니다.
이 아라한 도과의 지혜로 부처님들은 모든 것을 바르고 완벽하게 알게 됩니다. 이는 이 지혜와 더불어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ta ñāṇa)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장)
부처님에 대하여 정등각자라는 명칭을 붙여 준 것은 ‘일체지자’이기 때문이다. 일체를 아는 지혜를 가진 자에게 정등각자라는 칭호를 붙여 준다는 것이다. 그런 정등각을 의미하는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 정등각)는 오직 부처님들만 얻을 수 있는 아라한 도의 지혜라 한다.
깨달음의 구분
정등각에 대한 마하시사야도의 풀이에 따르면 삼마(sammā)는 바르게(正), 삼(sam)은 스스로,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마삼보디는 혼자 힘으로 바르게 증득한 정등각(正等覺)을 뜻한다고 한다.
이는 벽지불이나 성문이 얻는 지혜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런 지혜의 차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의 구분
구분 |
깨달음 |
내 용 |
부처님 |
삼마삼보디 (sammā-sambodhi, 正等覺) |
-어떠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직관력으로 얻는 아라한도의 지혜. -이 지혜와 더불어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 -ta ñāṇa)가 동시에 일어남 -법을 펼 수 있음 |
벽지불 |
삼보디 (sambodhi, 正覺)
|
-바르게 깨닫는 삼마(sammā)의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스스로 증득한 지혜인 정각(正覺)을 의미함. -법을 펼 수 없음 |
성문 |
보디 (bodhi, 覺)
|
-혼자 힘으로(無上, sam), 바른(sammā) 깨달음을 얻는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그냥 간단히 깨달음(覺)이라 함. -부처님의 담마를 실천하여 아라한이 됨 |
이처럼 정등각자는 일체지자임을 알 수 있다. 정등각자가 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혜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일체지자로서의 정등각자는 오직 부처님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이다.
그런데 벽지불의 경우 바르게 깨닫긴 하였으나 일체지자는 아니다. 그래서 법을 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성문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들이다. 그래서 되어 죽고 태어나는 일 없는 아라한이 되어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선포를 유보한 이유
만약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이 임시방편이고 소승법이고 불완전한 것이고 미완성된 것이라면 부처님이 과연 법을 펼치셨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완전한 것이라면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사함빠띠의 청원을 받아주거나 그 유명한 전법선언을 자신있게 하였을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정등각자가 되셨음을 선포하시길 얼마동안이나 유보하셨을까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진리를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 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인 끼짜 냐나, 이루었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사성제에 관한 지혜가 완전하고 명료하지 않다면 부처님은 그러한 선언을 유보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명확한 시간제한을 정하기 위해 아라한의 도를 증득하기 바로 직전인 카손 보름의 다음날, 이른 새벽까지 그 선포를 유보하셨음을 뜻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장)
부처님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한 후에 곧바로 정등각자가 되셨음을 선포 하지 않았다. 선포를 유보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유보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위 없는 법에 대한 법을 즉각적으로 선포 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성제에 대한 지혜가 명료해지기 전에 부처님께서 정등각을 이루었다는 선언을 하셨다면 이들 천인, 마라, 범천들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질문, 문의, 쟁점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답과 답변을 주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인간들과 밀접한 교류가 없는 이러한 천인, 마라, 범천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구상의 인간세계에는 바라문과 사문으로 알려진 고행자와 유행자(流行者)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또 천인이라고 널리 알려진 왕들과 일반 백성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탐문 조사하여 준비한 질문과 문의에 답변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당시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는 푸루나 까사빠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 사문과 재가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면밀히 검증해보니,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이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정등각의 지혜를 증득하기 전에 부처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면 역시 비슷한 곤경에 처하셨을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장)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법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선포를 유보한 것은 자신이 깨달은 지혜가 명료해지기를 바랬기 때문 이었다. 삼계에 존재하는 천상, 인간 등 널리 알려진 존재들의 주장과 비교 검증이 필요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선포하고
하지만 부처님은 정등각자가 되었음을 선포해야 될 때가 되자 선포 하게 되었다.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Yato ca kho,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m tiparivattam dvādasākaram yathābhutam ñāṇadassanam suvisuddham ahosi, athāham,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hmake sassamanabrahmāniya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m sammāsambodhim abhisambuddhoti paccannāsim.
“비구들이여,
하지만 사성제에 관한 나의 증득과 통찰지혜가 세 가지 측면과 열두 가지 방법으로, 완전하고 확고해졌을 때, 나는 천인, 마라, 범천계에게, 사문과 바라문, 왕과 사람의 무리에게, 위없는 깨달음, 즉 무상정등각을 스스로 바르게 이해하고 증득하고 깨달았다고 선포하였다.”
(초전법륜경)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위없는 바른 법이 여러가지 측면으로 고찰하였을 때 완전하고 확고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삼계에 깨달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경에서 세가지 측면과 열두가지 방법은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1)사제(四諦)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혜,
2)해야 할 일을 아는 지혜, 해야
3)할 일을 다 했음을 아는 지혜
등을 말하고 이 세 가지 지혜에서 파생된 열두 가지 방법이라 한다. 이러한 지혜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았을 때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득각)을 이루신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선언은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곳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예리한 지성을 가진 천인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마라들, 더 강력한 지성을 가진 범천, 그리고 범천이나 사문과 바라문 등으로 구성된 인간계 전체를 향한 것이다. 어떤 검증없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계를 향하여
그래서 부처님은 삼계를 향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외쳤다.
akuppa me vimutti, 아꿉빠 메 위뭇띠
ayamantima jāti, 아이야만띠마 자띠
natthi dani punabbhavo 낫티 다니 뿌납바워
내 마음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며,
금생이 나의 마지막 생이며,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초전법륜경)
부처님이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에 지혜의 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의 눈으로 보자 해탈이 확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번뇌가 선정삼매로 억눌려 진 것이 아니라 뿌리 채 뽑혀 나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번뇌가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태어남은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중생들이 임종 때 나타나는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새로운 태어남은 없는 것이라 한 것이다.
지나간 시절을 반조하고
이렇게 외치고 나서 부처님은 지나간 시절을 다음과 같이 ‘반조’하였다.
Anekajātisaṃsāraṃ 아네까자띠삼사랑
sandhāvissaṃ anibbisaṃ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ṃ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ṃ 둑카 자띠 뿌납뿌낭.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Gahakāraka diṭṭhosi 가하까라까 딧토시
puna gehaṃ na kāhasi 뿌나 게항 나 까하시
sabbā te phāsukā bhaggā 삽바 떼 빠수까 박가
gahakūtaṃ visankhataṃ 가하꾸땅 위상카땅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visankhāragataṃ cittaṃ 위산카라가땅 찟땅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딴하낭 카야맛자가.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법구경,Dhp153-154,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이 게송에서 ‘갈애’가 윤회의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게송에서 ‘집 짓는 자’가 바로 갈애이다. 그런 갈애가 붙타버렸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완전한 것
선사들은 종종 법문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본래면목’ ‘참나’를 찾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 불교방송이나 불교tv등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방송법문에서 거침없이 말하는 선사들은 또 한결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승법’이라고 한다.
이처럼 선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중생교화를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말한 것이지 진실한 법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오로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것이라 하며 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더욱이 선사들을 비롯하여 대승불교학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덜 된 것으로 본다.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주류불교에서는 선사들의 생각과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이는 깨닫고 난 다음과 가르침으로 펴는 동안 또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처음 깨달았을 당시 모든 것을 아는 일체지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네.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어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이, 위없는 스승이네.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으니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하여 까씨 성으로 가네.
눈 먼 세계에서 감로의 북을 두드리리.’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ṃ- The Noble Search-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고 오비구에게 초전법륜을 설하기 위해 베나레스(가야)로 향하여 가는 도중 나형외도 니간따 나따뿌따의 제자인 나체수행자 ‘우빠까(Upaka)를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처음부터 이루신 분이다. 이를 빠알리로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라 한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에게만 붙이는 호칭이다.
이처럼 일체지자가 되어야만 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벽지불이 정각을 이루었지만 바르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법을 펼칠 수 없는 이유로 설명된다. 따라서 부처님처럼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가 완전하여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등각(삼마삼보디)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는 현재 떠오르는 태양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정등각자로서의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불완전’하다느니 ‘미완성되’었다느니 하면서 진짜 부처님은 허공계에 따로 계시고, 깨달음 또한 사성제가 아닌 본래면목 참나를 찾는 것이라 한다. 이런 주장은 불자들을 큰 혼란에 빠뜨린다.
하지만 초기불교가 급속히 퍼지는 인터넷시대를 맞아 불자들이 부처님의 원음을 가까이 함으로서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선사들이 주장하는 깨달음과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는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녹음기를 틀어 놓듯이 같은 말을 매번 반복하는 식의 법문은 젊은 층에 감동을 주기는커녕 불교에 대하여 ‘회의감’마저 가지게 만든다.
선사들이 말하는 참나, 대체 참나를 찾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참나를 찾으면 지금 당면한 고통이 해결된다는 말인가.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 또는 참나를 찾는 수행이라는 것이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한 이 세상을 이루는 원인으로서‘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은 허망한 관념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을 펴면서 불자들에게 혼란에 빠뜨린다. 더구나 법문도중 나무아미타블 게송 노래를 읊어 대는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 것일까.
현실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것이다. 생노병사를 포함하여 여러가지 고통에 대하여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였을 때 이에 대하여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방법이다”라고 하였을 때 역시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 소멸, 소멸방법에 대하여 말씀 하신 분이 부처님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 즉, 삼마삼붓다(정등각자)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체지자로서의 정등각자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이다. 그런 초기불교는 현재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sambuddhassa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 붓닷사)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2012-06-01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中道思想) (0) | 2012.07.03 |
---|---|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간화선 (0) | 2012.06.19 |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0) | 2012.05.31 |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미안과 맛지마 니까야 (0) | 2012.05.18 |
간화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M2) (0) | 2012.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