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中道思想)
“다시 애기로 태어 나서 멋지게 살아갈래요”
언젠가 TV에서 어느 나이 드신 할머니가 말한 것이 생각난다. “젊어지고 싶지 않나요?”라는 PD의 질문에 “다시 애기로 태어 나서 멋지게 살아갈래요”라고 대답하였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 한다. 그래서 “~껄~, ~껄, ~껄”한다고 한다. 다시 한번 인생의 기회가 주어지면 하고 싶은 것을 꼭 이루리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회를 믿고 기정사실화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태어나서 늙어 병들어 죽을 때 인생이 ‘원타임’이 아니라 계속 진행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윤회관은 법우님들에게도 들을 수 있는데, 대부분의 여성법우님들의 경우 다시 태어나면 “다시 여자로 태어 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성차별 등 불이익을 많이 받기 때문에 다음에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랄 줄 알았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불교는 윤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윤회를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불교가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윤회를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는 결국 종식시켜야 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어나고 죽는 일이 없는 윤회를 종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가르침에 대한 대표적인 것이 초전법륜경이다. 그런 초전법륜경에 중도사상이 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중에
성철스님의 백일법문 중에 ‘중도’에 대한 법문이 있다. 법문 중에 다음과 같이 언급 하였다.
그 동안에 다섯 비구가 깨쳐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비구에게 설한 내용이 공무아(空無我)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전법륜에서 중도. 팔정도. 사성제. 공을 전부 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하셨다고 평합니다.
동시에 어떤 학자는 부처님이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어떻게 다서시 비구에게 전부 다 하실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부처님이 나중에 말씀한 것을 후대 사람들이 한데 묶어 놓은 것이지 일시에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친 근본자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근본적으로 깨치신 것이 중도이면서 팔정도이고 사성제이며 공(空)이기 때문에 한 시간 이내에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고 한 장으로도 다 설명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경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인정되는 초전법륜에서 이렇게 사성제를 비롯하여 공무아(空無我)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사상이 근본불교의 사상이 아니라고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 5. 공사상(空思想)과 중도)
성철스님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평생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셨다”고 표현 하였다.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하여 중도사상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강조 하였는데, 가장 먼저 예로 든 것이 초전법륜경이다. 그런 초전법륜경은 경장에 있지 않고 ‘율장’에 있다. 가장 핵심은 중도사상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사상이 왜 중요할까.
참고로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은 1967년 해인사 동안거 당시 중도사상을 핵심으로 인도의 원시불교에서 중국선종 및 우리나라 선종사상까지 언급하고 있다.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한 법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팔리어(pali)로 씌어진 남전장경(南傳藏經)의 번역문을 인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에 해당하는 북전(北傳)의 한역(漢譯)경문을 일부 발췌하여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世尊)은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두 변(二邊)이 있으니 출가자는 가까이하지 말지니라. 무엇을 (그)둘이라 하는가.
(첫째는)여러 욕망을 애욕하고 탐착하는 일은 하열하고 비천하여 범부의 소행이요,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둘째는)스스로 번뇌하고 고뇌하는 일은 괴로움으로서 현성(賢聖)이 아니고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여래(如來)는 이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南傳大, 律部 3, p. 18)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하는 두변(兩邊) 가운데는 선. 악(善惡), 유무(有無)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기에서는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들었습니다.
인용한 경문에 있는 두 변 중 첫번째는 욕망에 탐착하는 욕락(欲樂), 즉 낙(樂)을 말한 것이고, 두번째는 고행에 집착하는 괴로움, 즉 고(苦)를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실정에 따라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으며, 부처님을 따라서 최초로 출가한 다섯 비구도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고행을 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였으므로 부처님이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이 고(苦)와 낙(樂)을 예로 든 것입니다.
많은 출가자들이 세간의 향락을 버릴 줄만 알고 고행하는 괴로움, 이것도 병인 줄 모르고 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해탈하려면 고(苦)와 낙(樂)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깨달은 것, 정등각(正等覺)한 내용이 중도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苦)와 낙(樂)을 버린다는 것이 어찌 그다지 어려운 것인가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고(苦)와 낙(樂)을 버리라고 한 것은, 평범하게 말씀하신 것이지 철학적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중생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바로 깨쳐서 해탈을 얻기 전에는 무엇을 대하든지 그것은 고(苦)가 아니면 낙(樂)이고 낙(樂)이 아니면 고(苦)라서 항상 양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설사 열반(涅般)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닙니다.
고(苦)와 낙(樂)을 떠난다는 것은 세간의 고(苦). 낙(樂)이라든지 출세간의 낙(樂)이라든지 모든 집착을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하며, 그 고(苦)와 낙(樂)등 일체의 양변을 떠난 경계를 중도라 합니다. 이렇게 양변을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했다는 이 초전법륜을 중도대선언(中道大宣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부처님의 근본법륜이라는 것은 세계의 어느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 5. 공사상(空思想)과 중도)
성철스님은 초전법륜경의 중도를 설명할 때 먼저 빠알리 남전대장경에 실려 있는 번역을 기본 자료 하고 있다. 성철스님이 법문할 당시 1967년의 경우 우리말 빠알리 니까야가 번역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서 완역된 빠알리 대장경(이를 일본에서는 남전대장경이라 함)을 우리 말로 풀이하여 설명한 것이다. 참고로 남전대장경은 1941년 부터 6년간 40여명의 일본의 불교학자들이 빠알리어 대장경을 일본어로 완역한 것이다. 우리보다 60여년이 빠른 것이다.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스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고와 락에 대하여 하나의 예로 든 것이라 한다. 유와 무 등 여러가지 상대적인 것이 있으나 특별히 고와 락을 예로 든 것은 오비구들이 고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고와 락의 양변을 떠난 중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열반(涅般)을 성취하였다 하여도 열반의 낙에 머물면 그것도 병으로서 중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숫타니파타의 ‘도피안품’에 실려 있다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두 극단인 두변에도 집착하지 않고 가운데도 집착하지 말라는 설명과 함께 “이것이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의 행동입니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렇게 숫타니파타에 실려 있는“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문구에 대하여 대장부의 행동이라고 극찬하였는데, 이에 대한 빠알리어 원어를 찾아 보았다.
이 세상의 양극단과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다양한 존재에 대해서도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생각한 뒤에 도그마에 사로잡히는
어떠한 피난처들도 그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빠라맛타까경-Paramaṭṭhaka suttaṃ- Upholding a View- 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숫따니빠따 Sn4.5, 전재성님역)
빠라맛타까경(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Sn4.5).docx
숫따니빠따 제4장 앗타까왁가(Aṭṭhaka Vagga)의 다섯번째 경인 빠라맛타까경(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에 실려 있는 여섯 번째 게송이다.
이 게송에서 ‘양극단’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접촉과 접촉의 원인 등의 두 가지 경계에 대한 것’을 말한다. 십이연기에서 접촉의 원인은 여섯 가지 감각의 장(6입)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자의 생각으로는 여기서는 영원주의나 허무주의에 입각한 유무(有無)나 단상(斷常)의 극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빠라맛타까경의 ‘양극단’에 대한 주석)
양극단은 상견과 단견에 대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게송에서 ‘원하는 바’는 ‘갈애’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 “원하는 바(갈애)가 없습니다”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숫타니파타의 또 다른 번역이 있다.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법정스님의 수타니파타는 일본 남전대장경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정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양극단에 대해서,
여러 생존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원하는 바가 없다.
모든 사물에 대해 단정할 만한 고집이 그에게는 조금도 없다.
(의뜸가는 것, 801번 게송, 법정스님역)
법정스님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원하는 바가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를 성철스님은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빠일리 원본은 어떠 할까. 영문과 우리말을 포함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Yasasubhayante paṇidhidha natthi 야사수바얀떼 빠니디다 낫티
Bhavābhavāya idhavā huraṃ vā, 바와바와야 이다와 후랑 와
Nivesanā tassa na santi keci 니웨사나 땃사 나 산띠 께치
Dhammesu niccheyya samuggahitaṃ. 담메수 닛체이야 사뭇가히땅
이 세상의 양극단과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다양한 존재에 대해서도
원하는 바가 없습니다.
생각한 뒤에 도그마에 사로잡히는
어떠한 피난처들도 그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Do not wish for the two extremities
of being and non-being here, or hereafter,
Think discriminately about the Teaching
and have no roosting places.
(빠라맛타까경-Paramaṭṭhaka suttaṃ- Upholding a View- 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숫따니빠따 Sn4.5, 전재성님역)
‘원하는 것이 없다’거나 ‘바라는 것이 없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이상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애’가 일어 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유무양변을 떠난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성철스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였을까.
일본불교학자 ‘우정백수(宇井伯壽)’의 글을 인용하여
성철스님은 이어지는 법문에서 팔정도에서 정견이 곧 중도라고 하였고, 십이연기에서도 역시 중도를 나타내는 귀중한 진리라 하였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중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전연경’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초기불교는 물론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이르기 까지 이 경전의 문구를 인용하지 않은 경우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가전연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을까.
가전연경은 한페이지 정도 되는 짤막한 경이다. 성철스님은 일본남전대장경의 가전연경을 인용하였는데, 특히 일본불교학자 ‘우정백수(우이 하쿠쥬, 宇井伯壽, 1882-1963)’가 저술한 인도철학연구 제2권을 인용하였다. 그 인용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生)은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모든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를 불구하고 이 원리는 정하여진 것으로서 법의 고정성(固定性), 법의 정칙성(定則性)곧 상의성(相依性)이니라.
여래는 이것을 깨치고 이것에 도달하느니라. 깨치고 도달하여서 이것을 널리 알리고 말해 주고 자세히 설하고 분별하여 명료히 하느니라.
너희들은 보아라.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여기에서 진여성(眞如性). 불허망성(不虛妄性). 불이여성(不異如性). 상의성(相依性)을 띠고 있으니 이것을 곧 연기(緣起)라고 말하느니라.
(宇井伯壽著 印度哲學硏究 第二)
위 글은 일본불교학자 ‘우정백수(우이 하쿠쥬)’가 자신의 방식대로 가전연경을 해설한 것이다. 법의 ‘상의성’을 이야기 하면서 진여성(眞如性)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문구를 근거로 하여 성철스님은 “이 번역에 의하면 연기는 제법이 상의함을 말한 것이며, 그것은 진여를 바탕으로 한 진여성이라는 점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가전연경에 대한 한역아함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다음에는 이 경전에 해당하는 한역 경전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때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마땅히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느니라. 무명(無明)을 연(緣)하여 행(行)이 있으며 행(行)을 연(緣)하여 식(識)이 있으며 내지 이렇고 이렇게 하여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純大苦聚)가 모이느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 하는가. 무명이 지어짐을 말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이것을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알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무명(無明)을 연(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생(生)을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다고 하느니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항상 머물러 법은 법계에 머무느니라. 그것은 여래가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고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여 열어보이고 드러내 밝히니, 생(生)을 연(緣)하므로 노(老). 병(病). 사(死). 와 우(憂). 비(悲). 뇌(惱). 고(苦). 가 있다고 하느니라.
이들 모든 법은, 법이 머무르며(法住), 법이 공하며(法空)법이 여여하며(法如), 법이 그러하며(法爾), 법이 여여함(如)을 떠나지 아니하며, 법은 여여와 다르지 아니하며, 참으로 진실하여 전도되지 아니하니, 이와같이 연기에 수순하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爾時世尊 告諸比丘하사대 我今當設因緣法 及緣生法하리니 云何爲
因緣法고 謂此有故彼有니 謂緣無明行하며 緣行識乃至如是如是하
여 純大苦聚集이니라. 云何緣生法고 謂緣無明行하니라. 若佛出世
커나 若末出世커나 此法常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
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演說하며 開示願發하니 謂緣無明有行하
고 乃至緣生有老死하니라. 若佛出世커나 若末出世커나 此法은 常
住하여 法住法界하느니라. 彼如來自所覺知하고 成等正覺하여 爲人
演說하며 開示願發하니 謂緣生苦로 有老病死憂悲惱苦하니라 此等
諸法은 法住이며 法空이며 法如며 法爾며 法不爾如며 法不爾如며
審諦眞實하여 不願倒니 如是(따를 수)順緣起를 是名緣生法이니
라.
(雜阿含經 第12券:大正藏 第2券 p. 84)
역시 우정백수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우정백수의 한역아함경 가전연경에 대한 것이라 한다. 이 글에 대한 성철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연기법은 항상 있어서 법이 법계에 머문다는 표현속에 연기의 근본이 다 드러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진여법계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이 머문다(法住)’라는 것에 대하여 법이 연기하여 존재함을 말하며, 연기한 법은 다 공하므로 ‘법이 공하다(法空)’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앞의 파리문 경전에서는 연기법과 연생법을 진여성(眞如性). 불허망성(不虛妄性). 불이여성(不異如性). 상의성(相依性)이라 말한 것을, 여기 한역 경전에서는 '법이 머물고(法住)법이 공(法空)하며, 법이 여여하고(法如)법 그대로다(法爾)'거나, '법이 여여와 다르지 않다(法不異如)'라고 말했는데 이 양자의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거의 같다고 하겟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3. 십이연기(十二緣起))
가전연경에 있어서 빠알리어문에서는 연기법과 연생법에 대하여 진여성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역아함경에서는 법공등으로 표현이 달라도 내용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불교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빠알리 원문과 어떻게 다를까.
깟짜나곳따경 그 어디에도
한역 가전연경은 잡아함경 301번 경이다. 이에 대응되는 빠알리 니까야에 있다. 이를 깟짜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ṃ, S12.1.5)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깟짜나곳따경에 성철스님이 말한대로 진여성이나 법공 등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을까. 빠알리 니까야 우리말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깟짜야나곳따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깟짜야나곳따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깟짜야나]
"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 하는데 세존이시여, 올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의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취착, 주착을 통해 얽매여 있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접근하고 취착하고 마음으로 욕구하여 유입되고 잠재되는 것에 다다르지 않고 붙잡지 않고 주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면 일어난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사라진다'고 의심하지 않고 혼란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에게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지식이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가 생겨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존재(atthita, 有)와 비존재(natthita, 無)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양극단은 바른 관찰을 하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생겨나는 사실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단멸론은 거짓이 되고,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해가는 것을 관찰한다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상주론 역시 거짓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영원론과 단멸론을 배격하기 위하여 연기법으로서 설명하였는데, 성철스님의 경우 ‘진여성’과 ‘법공’ 등으로 확대 해석 하였다고 보여진다.
대승비불설 비판
그렇다면 성철스님은 왜 초기경의 중도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 돌아가신 후 몇 백년뒤에 성립되었든간에 어떤 경전이든 중도사상에 입각해서 설법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 법이고 그렇지 않다면 부처님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앞에서 말한 천태종이나 화엄종이나 선종 등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이었다는 것이증명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학자들이 잘 몰라서 대승불교를 의심하고 소승불교만이 부처님 불교가 아닌가 하고 연구해 보았지만 부처님의 근본불교가 중도사상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뒤에는 대승비불설은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3) 대승비불설 비판)
스님은 대승비불설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비록 대승경전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도사상’을 담고 있으면 불설로 본다는 것이다.
용수와 마명의 대승불교운동은
이처럼 중도사상이 담겨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름 없다는 것은 용수에 대한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스님은 용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면 인도에 있어서 용수(龍樹)보살이나 마명(馬鳴)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운동(大乘佛敎運動)이란 무엇인가?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대승불교는 용수보살 자신의 불교이지 부처님 불교는 아니라고 하여 소승불교만이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불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근본불교가 중도에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판명됨으로 해서 그런 주장은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주창한 대승불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그때까지 있었던 부파불교에서 벗어나 바로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3) 대승비불설 비판)
용수가 주장한 중도사상은 근본불교로의 복구 운동이었다고 한다. 이는 용수가 부파불교를 비판한 것을 말한다. 부파불교시대 당시 ‘무견’을 주장하는 부파와 ‘유견’을 주장하는 부파로 갈라져 수백년간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용수보살이 나타나 중도논리로 ‘파사현정’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친히 설한 근본불교로의 복구운동이었다고 스님은 설명한다.
용수의 팔불중도를 보면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용수가 공의 논리로 주장한 ‘팔불중도’는 부처님의 중도사상과 다른 것이다.
용수의 팔불중도는 다음과 같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개별존재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대한 부정.
- 불상부단(不常不斷) : 존재의 영원함과 단절됨에 대한 부정.
- 불일불이(不一不異) : 존재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부정.
- 불래불거(不來不去) : 존재의 개별 원인과 개별 결과에 대한 부정.
이렇게 용수는 공사상에 입각하여 팔불중도를 정립하였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
하지만, 전재성 박사의 해제 글에 따르면 용수의 팔불중도 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중도사상이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No |
구 분 |
내 용 |
1 |
유무중도 (有無中道)
|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존재인 유(有)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無)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됨) |
2 |
자타중도 (自他中道)
|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lineality)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음) |
3 |
단상중도 (斷常中道)
|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
4 |
일이중도 (一異中道)
|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다른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바라문이여, 이들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
(연기법에서는 현상계의 동일성과 차별성이 모두 부정됨) |
5 |
거래중도 (去來中道)
|
"수행승들이여, 눈(眼)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
(인과관계가 궁극적으로 거래(去來)라고 하는 근접성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음. 이러한 관점은 요즈음 발달된 과학철학의 이론에서도 드러남-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
6 |
생멸중도 (生滅中道)
|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생기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의처(依處)가 없고 전기(轉起)가 없고 대상(對象)이 없으므로 이것이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나는 설한다"
(우다나) |
7 |
고락중도 (苦樂中道)
|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감각적 쾌락에 의해 탐착하는 것을 일삼은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범부의 소행으로 성현의 법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두번째는] 스스로 괴롭힘을 일삼는 것은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법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이 생기게 하고 지혜가 생기게 하며 적정, 승지(勝智), 등각(等覺), 열반으로 이끈다."
(초전법륜경) |
(출처: 전재성 박사의 우리말 상윳따 해제글)
이처럼 초기경전인 빠알리 니까야에서 보는 중도사상은 용수의 중도설 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수보살의 파사현정(破邪顯正)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은 중도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 되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 경전에 실려 있는 경을 중심으로 하여 중도사상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는 대승불교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초기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중도사상이 담겨 있으면 모두 불설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중도를 설명함에 있어서 주로 일본불교학자의 저술을 인용하여 설명 하였다.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선종의 논리로 보았을 때 파격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빠알리 니까야에서 표현된 중도와 용수로 대표되는 대승의 중도는 같지 않다. 공의 논리가 개입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수나 마명의 대승불교 운동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은 '삿된 것을 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破邪顯正)'는 것이었습니다. 즉 유견(有見)이 아니면 무견(無見)인 소승불교의 삿된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바른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나선 것이 용수보살의 근본 목적이며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용수보살은[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道論)]을 저술하여 부처님의 근본사상인 중도를 찬양하였습니다.
도! 이것만이 부처님의 정통사상이라고 주장하여 그의 제자 제바존자(提婆尊者)와 같이 부파불교의 추종자들과 논쟁을 벌여 변견을 부숴버리고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복구시키기 위해서 활약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란 시대적으로 봐서는 혹 부처님과 5. 6백년의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상적으로 봐서는 부처님 근본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는 정통이 아니며 대승불교가 정통인 것입니다.
하나 덧붙일 것은 시대적으로 보아서 불교를 원시불교(原始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나눕니다. 원시불교를 다시 부처님 당시와 직계 자제들이 있었던 불멸 후 30년까지를 대개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부처님께서 돌아 가신 후 백년까지를 협의의 원시불교라 합니다.
부파불교란 곧 소승불교로서 불멸 후 1세기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기까지 4. 5백년 사이를 말하고 또 대승불교는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일어난 새로운 불교를 말합니다.
근본불교인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인 소승불교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부파불교시대에 있어서는 유견 아니면 무견, 무견 아니면 유견의 변견으로 각기 자기 교설을 주자한 소승불교로서 중도사상이 없는데 반하여, 근본불교는 중도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교설이 설하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는 부처님 사상을 오해한 변질된 불교이며 정통의 불교는 아니라는 것은, 요즈음 와서 학자들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근본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공적이 제일 큰 사람은 우정백수(宇井伯壽)박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2. 중도 사상)
성철스님은 일본의 불교학자 ‘우정백수(宇井伯壽, 우이 하쿠쥬)’의 공적을 이야기 하면서 대승경전이라는 것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중도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5, 6백년 차이가 나도 사상적으로 보아도 근본불교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보고 있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를 계승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를 계승한 것이라면 굳이 대승불교를 신봉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 용수는 중론과 대지도론을 저술하여 근본불교의 중도사상을 찬양하였다 하는데, 그렇다면 굳이 팔불중도로 대표되는 용수의 중도사상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대승불교가 근본불교를 계승한 것이라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용수의 팔불중도 보다 더 다양하고 더 풍요롭다고 하지 않은가!
2012-07-03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구우목 (盲龜遇木)’ 비유의 진실, 발라빤디따경(愚賢經, M129) (0) | 2012.07.06 |
---|---|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 (0) | 2012.07.04 |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간화선 (0) | 2012.06.19 |
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고? 일체지자로서의 삼마삼붓다(정등각자) (0) | 2012.06.01 |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0) | 2012.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