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맹구우목 (盲龜遇木)’ 비유의 진실, 발라빤디따경(愚賢經, M129)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6. 17:29

 

 

맹구우목 (盲龜)’ 비유의 진실, 발라빤디따경(愚賢經, M129)

 

 

밤새 번개와 천둥소리로 소란하였다. 더구나 바로 앞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뒤이어 우뢰와 같은 천둥소리에 사람들은 겁을 먹기에 충분하다. 특히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욱 공포에 떨 것임에 틀림 없다.

 

십악(十惡) 정형구

 

사람들은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않고 사는 날이 없다. 그런 죄는 불선업의 결과를 말한다. 불선업이란 무엇인가. 불자들이 잘 알고 있는 천수경의 십악을 말한다. 그런데 십악의 원형이 니까야에 그대로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말한다.

 

 

Ta ki maññasi mahārāja,

idhāssa khattiyo pāātipātī adinnādāyī kāmesu micchācārī musāvādī pisunāvāco pharusāvāco samphappalāpī abhijjhālū byāpannacitto micchādiṭṭhi, kāyassa bhedā parammaraā apāya duggati vinipāta niraya upapajjeyya, no vā, katha vā te ettha hoti'ti?

 

 

“대왕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서 왕족들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분노를 품고,

잘못된 견해를 갖는다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겠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Great king,

there are warriors, who destroy life, take the not given, misbehave in sexuality, tell lies, slander, speak rough words, speak frivolous words, covet, those bear angry minds and wrong view, would they after death be born in decrease in hell? Or is it they would not be born in hell?”

 

(마두라경-Madhurasutta - The Discourse Given at Madhura-마두라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84, 전재성님역)

 

 

이와 같은 열가지 십악행은 불선업을 짓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악처로 가게 되어 있는데, 경전에서는 불행한 곳, 비참한 곳, 처참한 곳으로 묘사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이렇게 사악처를 말한다. 

 

누가 사악처에 떨어지는가

 

사악처에 나는 자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서 간 것일까.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등의 불선업을 저질렀을 때 불행하거나 비참한 곳에 태어 나리라는 것을 예상 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일 거짓말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는 등 불선업을 저질렀을 때 악처에 난다는 것을 안다면 결코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악처에 어떻게 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여기 어떤 이는 감각적 욕망들을 즐기리라 생각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을 조건으로 몸으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말로 삿된 행위를 하고, 마노로 삿된 행위를 한다. 삿된 행위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이고, 그 업으로 받은 무더기들(五蘊)이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이다. 무더기들이 생산되는 것이 태어남()이고, 성숙해감이 늙음()이고, 무너짐이 죽음()이다.

 

(청정도론, 7장 여섯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16)

 

 

청정도론에 따르면 악처에 태어나는 이유가 감각적 욕망 때문이라 한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삿된행위를 가득채웠기 때문이라 한다. , 앞서 언급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등으로 시작하는 10가지 십악에 대한 정형구를 말한다.

 

천상에 나려면

 

이렇게 악처에 나는 요인은 몸과 말과 생각에 따른 열가지 불선행에 따른다, 그렇더면 선처에 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이는 천상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같은 방법으로 선행을 한다. 선행을 가득 채웠기 때문에 다시 천상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청정도론, 7장 여섯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17)

 

 

천상에 나기 위해서는 먼저 천상에 태어나기를 발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는 생활을 하며 10선행을 하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천상은 욕계천상을 말한다.

 

무색계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이처럼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한 결과는 악처 아니면 선처이다. 그런데 도를 닦는 수행자들이 가는 세상이 있다. 어떤 수행자가 다음과 같이 발원하는 경우이다.

 

 

어떤 이는 무색계의 복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같은 방법으로 공무변처 등의 증득을 닦는다. 닦음을 원만히 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난다. 그가 그곳에 재생할 원인이 되는 업이 업으로서의 존재이고, 그 업으로 받은 무더기들이 재생으로서의 존재이다. 무더기들이 생산되는 것이 태어남이고, 성숙해감이 늙음이고, 부서짐이 죽음이다. (M.ii.263 참조) 이 방법은 나머지 취착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청정도론, 7장 여섯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19)

 

 

욕계에 살면서도 성적인 것에 대하여 혐오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남자와 여자의 성이 없는 세계 즉, 중성의 세계인 색계에 태어 나기를 발원하고 그에 합당한 선정수행을 한다면 범천 등의 색계세상에 태어 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에 대하여 혐오 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오로지 정신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동경할지 모른다. 그 경우 그런 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서 무색계선정의 도를 닦을 경우 그런 세계에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계가 공무변처 등의 무색계세상을 말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욕계천상 이상의 선처에 나는 경우 그에 합당한 발원을 하였을 때이고, 반면에 지옥 등 사악처의 경우 아무 생각 없이 살면서 10가지 불선업을 지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쾌락뒤에 긴 고통

 

사악처에 떨어지는 경우 무지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알면서도 저지른 죄 보다 몰라서 저지른 죄가 더 크다든가 무명이 대죄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알면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죄를 저질렀을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과거 전생부터 무수히 그에 따른 죄값을 단단히 치루고 왔기 때문이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10악과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선업을 짓는 것은 오래 된 습관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계속 도둑질을 하는 것은 과거에 형성된 습관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도둑질 하여 여러 차례 징역을 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주지 않은 것에 손을 대는 것이다.

 

삿된 음행도 마찬가지이다. 삿된 음행을 하였을 경우 순간적인 쾌락을 맛 보지만, 쾌락뒤에 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또 다시 유혹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어떻게 선처에서 악처로 떨어지나

 

맹구우목의 비유에서와 같이 어렵게 인간의 몸을 받아 정상적인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지은 업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휩쓸려 갔을 경우 삶의 과정에 있어서 선업 보다 악업을 더 많이 짓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에다 살인이나 성폭행, 도둑질 등  몸으로 중업을 지었을 경우 악처행은 피할 수 없다. 선처에서 악처로 나는 경우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처에서 악처로]

 

136.

예를 들면, 욕계 선처 가운데서 악업을 지은 자가 임종의 자리에 누울 때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 악업 혹은 악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하여 나타난다.

 

악업과 악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속행의 과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등록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 속행의 과정의 다음에 잠재의식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죽음의 마음이 일어난다.

 

죽음의 마음이 그치면 나타난 업이나 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악처에 포함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그 재생 연결식은 끊어지지 않은 번뇌의 힘에 떠밀린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의 대상을 가진 재생연결이다.

 

 

137.

다른사람의 경우에 죽을 때에 앞서 설한 업으로 지옥 등의 시뻘건 불길의 형상 등의 악처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해 나타난다.

 

잠재의식이 두 번 일어났다가 그칠 때 그 대상을 의지하여 전향 한 번, 죽음이 가까워져 속력이 느려지기 때문에 속행 다섯 번, 등록 두 번, 이렇게 세 가지 인식과정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잠재의식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고 죽음의 마음이 한 번 일어난다. 지금까지 11개 마음순간이 지나갔다.

 

그에게 마음순간의 수명이 다섯 번 남아있는 그 대상에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죽음의 마음 다음에 현재의 대상을 가진 재생연결이다.

 

 

138.

다른 사람의 경우에 죽을 때에 오문 가운데 하나로 탐욕 등이 원인이 된 저열한 대상이 나타난다. 순서대로 결정까지 일어났을 때 죽음이 가까워져 속력이 느려지기 때문에 다섯 번의 속행, 두 번의 등록이 일어난다.

 

그 다음에 잠재의식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고 죽음의 마음이 한번 일어난다. 지금까지 잠재의식 두 번, 전향, , 받아들임, 조사, 결정, 속행 다섯 번, 등록 두 번, 죽는 마음 한번, 이렇게 열다섯 마음순간이 지나갔다.

 

마음순간의 수명이 하나 남아있는 그 대상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이것도 과거의 대상을 가진 죽음의 마음 다음에 현재의 대상을 가진 재생연결이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선처의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와 현재의 대상을 가진 악처에 재생연결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36-138)

 

 

사람이 죽어 갈 때 자신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 중의 어느 하나에 조건 지어진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M.ii.164’는 무슨 뜻일까

 

위 청정도론 문장 중에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인 붓다고사는 부처님의 말씀인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는 문구를 인용하였다. 그래서 이 문구가 들어간 경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문구에 ‘M.ii.164’라는 근거 만으로 찾을 수 없었다. M자가 들어 가는 것으로 보아 단지 맛지마니까야일 것으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구가 들어간 경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우선 영문판 청정도론을 참조 하였다. 한글번역과 영문판의 순서는 같기 때문에 해당 절에 들어가니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와 같은 문구가 “Then [the evil deeds that he didin the past] … cover him [and overspread him and envelop him]”임을 알고, 이에 대한 문장 검색을 한 결과 영문사이트를 발견 하였는데 Balapanditasutta 라고 쓰여 있었다. 사이트에서 M129라는 문자가 보였다. M129는 맛지마니까야 129번 경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를 찾아 보니 그것은 발라빤디따경이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초기불교경전인 니까야가 영문으로 대부분 인터넷에 실려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초기불교가 전세계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구미에서 불교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불교는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초기불교또는 초기불교를 계승한 테라와다불교라는 사실이다.

 

어렵게 찾은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 M129)은 우리말 번역으로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또는  우현경이라 부른다.  글을 쓸 때 이미 한 번 언급된 경이다. 우리말 번역서 청정도론에서 단지 ‘M.ii.164’라고 만 되어 있으니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과거에 지은 악업이 덮칠 때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 인용된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는 문구는 경의 어디에 있을까. 경의 다음과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어리석은 자는 이와 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건전한 일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나를 수호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참으로 나는 불건전한 일을 하였다.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악을 짓고 포악하고 죄과를 지은 자들의 운명, 그 운명으로 수명이 다하면 떨어질 것이다. 그는 슬퍼하고 우울해 하며,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통곡하다가, 실신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은 세 번째의 고통과 불쾌를 느낀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의 9절, 전재성님역)

 

 

경에서 어리석은 자의 한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부처님의 담마를 모르는 무지한 자가 되는 대로 막행막식 하며 몸과 입과 마음으로 수 많은 악업을 저지르는데, 그 중 매우 중한 악업을 저질렀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살인하였을 때 비록 그가 완전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양심은 속일 수 없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늘 그 생각 떠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늙어 가면서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 생각은 더욱 더 커져서 마침내 해질녘 지상에 걸린 커다란 산봉우리 같은 그림자 처럼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 그림자는 그를 압도 하게 되고 마침내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그 산봉우리 그림자 즉, 살인행위에 표상이 떠 오르고, 그 표상에 대한 재생연결식이 생기는데, 그 경우 지옥과 같은 악처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표현이 경에서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라고 표현 되어 있는데, 이는 청정도론에 인용된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와 일치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지금으로부터 1600년전인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가 청정도론을 저술할 때 발라빤디따경(우현경, M129)의 문구를 인용하였다는 것은 그 만치 청정도론이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쓰여 졌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이와 같은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a)가 계발되어 수행자가 죽음과 수태의 본성을 잘 알게 되면 삶의 문제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a),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a), 그리고 무너짐의 지혜(bhaga-ñāa)를 성취하면 삶의 문제는 보다 더 명확해집니다. 왜냐하면 식()의 단위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란 현생의 마지막 식이 사라진 다음에 수태, 즉 내생의 처음 식()이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혜도 아직은 취약한 것으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예류의 성위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내생에 대한 모든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은 하지 않고 내생에 대해서 묻기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자와 철학자의 의견을 구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통을 지닌 아라한이라고 믿어지는 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a)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사라진 식()단위의 흐름에서 감각대상에 집착하는 새로운 식()의 단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수행자는 전생에서 죽은 마지막 순간에 한 대상에 대한 집착에 의해 조건 지어진 식의 단위와 함께 새로운 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기 직전의 식의 흐름은 물질적인 몸에 의존하면서 하나의 식 단위가 다음 식 단위로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죽은 다음 몸은 분해되고 식의 흐름은 다른 세계의 물질적인 과정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전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 전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구가 나가면 불은 꺼지지만 전기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낡은 전구를 새 전구로 갈아 끼우면 빛이 다시 들어옵니다. 여기서 전구, 전기, 빛은 모두 변화하는 물질적 과정이며, 우리는 이들의 무상한 성질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주석서는 메아리, 등불, 도장의 인각, 거울에 비친 영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음파가 벽이나 숲 등에 부딪쳐서 나오는 소리의 반향입니다. 우리가 소리와 메아리의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소리가 먼 곳까지 전이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얼굴이 그 거울 속에 비치는데 비록 자신의 얼굴과 거울에 비친 영상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불이 붙어 있는 등불은 다른 등불을 켜는데 쓸 수 있습니다.

 

불을 붙여준 등불이 여전히 타고 있으므로 새로운 등불의 불꽃은 이전의 등불이 분명히 아니지만, 이전의 두 등불과 두 개의 불꽃이 인과적으로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끝으로 도장은 그 표면과 같은 각인을 남기지만 실제로는 도장의 표면은 아니며 도장 없이 표면은 찍히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재생의 성질을 어렴풋이 알게 해줍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납니다. 죽은 뒤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는 이들 표상 중의 어느 하나에 조건 지어진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재생은 식의 마지막 단위가 다른 생으로 옮겨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임종 때의 표상에 의해 조건 지어집니다. 그래서 재생은 죽어가는 사람이 보는 표상이 인도하는 무명, 상카라 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생연결식은 전생과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두개의 연속되는 식 단위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한사람을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또는 전 생애동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임종의 마지막 식을 재생연결식과 함께 동일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천신계나 다른 세계에 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정신과 물질의 전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재생은 인과적으로 관련된 정신단위의 흐름과 관련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동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전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은 단견입니다. 이에 따르면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납니다.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단견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두 개의 연속된 삶이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관습적인 용어로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생이란 자아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상견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성숙한 위빠사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현생의 정신적 단위들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그들의 인과관계를 철저히 알기 때문에 이러한 단견과 상견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면 개인이 불멸하거나 단멸한다는 전도된 인식에 휘말릴 소지가 없습니다.

 

()의 본성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낙담 다음에 기쁨이 오고 또 기쁨 다음에 낙담이 옵니다. 고요한 마음 다음에 짜증이 오고

짜증 다음에 고요한 마음이 옵니다. 이러한 식()의 변화는 명확히 그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밤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식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연속된 식들 간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으로만 격리되었을 뿐인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의 두 가지 식 사이에도 똑같은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십이연기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 법문에 따르면 십이연기에서 식이 재생연결식을 뜻하는데, 이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로 보기 때문이다. 연기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인과 역시 조건에 따라 발생될 수 밖에 없는데, 특히 이번 생과 다음 생을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재생연결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재생연결식은 철저하게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할 수 없고,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조건에 따라 상속한다는 대전제를 말한다. 따라서 마음은 지금 이순간에도 생멸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는 전의 마음과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짐을 말한다. 이런 논리가 죽음과 재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마음 다음에 일어 나는 것이 재생연결의 마음인데, 이 마음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한 존재의 마지막 죽음에 마음에 일어난 업, 태어날 곳의 표상, 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끊임 없이 상속 되어 가는데,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매순간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매순간이 생일날이라 볼 수 있다.

 

불교의 지옥관

 

이렇게 선처에서 악처로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악처에서 선처로 갈 수도 있을까.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더구나 유일신교의 논리대로 라면 한번 지옥이면 영원히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가능하다. 어떻게 가능할까.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악처에서 선처로]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어두운 측면을 밝은 측면으로 바꾸어서 모든 것을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악처의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와 현재의 대상을 가진 선처의 재생연결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39)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문장이다. 그러나 매우 심오한 내용이다. 먼저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라는 문구이다. 이 내용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지옥이라면 지옥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를  충분히 받았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 질 수 있다. 마치 죄를 지은 자가 교도소에 들어가 징역을 산 것과 같다. 징역을 살고 만기 출소를 하면 충분히 죄값을 치룬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다 당하고 더 이상 당할 죄업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과거생에 지었던 선업  것이다.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 악업이 모두 소멸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이라곤 선업 밖에 없는 것이다.

 

중죄를 짓고 비록 지옥에 간 자라도 그가 삶의 과정에서 반드시 악업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악업도 짓고, 또 때에 따라서는 선업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생의 습관의 힘에 눌려 살인을 하게 되었을 경우 중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살인업에 대한 과보를 당연히 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살인 업에 대한 과보를 다 받고 난 후 남는 것은 이제 선업밖에 없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악처에서 인간이나 천상과 같은 선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지옥관과 유일신교의 지옥관에 대한 차이라 볼 수 있다.

 

미래에 겪어야 할 업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비록 지옥에 있더라도 그 악업이 다하면 얼마든지 천상에 태어 날 수 이있다고 보는데,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한 구절이 또 청정도론에 있다.

 

 

다른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은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

왜냐하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에 유전하는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

 

Others, however,

are reborn in a [sense-sphere] divine world

through kamma to be experienced in a future life.

For there is no being traversing the round of rebirths

who is destitute of kamma to be experienced in a future life.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35)

 

 

청정도론의 초월지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우주의 수축과 팽창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우주가 수축할 때 지옥 중생부터 범천 까지 남김 없이 소멸 되어 버리는데, 이 때 지옥 중생들이 어떻게 범천이라는 천상에 태어나는지에 대한 매우 짤막한 설명이 들어 있다.

 

그런데 악처에 떨어진 중생들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으로 인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하는 중생은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 말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라한이 있다. 아라한은 번뇌가 소멸된 자이므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로 사는 중생들은 번뇌가 다 소멸 되지 않는 한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게 되어 있으므로 삼계를 윤회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중죄를 지어 지옥에 태어난 지옥 중생이 갖은 고통을 다 겪고 난 다음 악업이 소멸 되었다고 하여 모든 업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악업은 소멸 되었지만 선업은 남아 있는 것이다. 남은 선업으로 인하여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한 설명이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이 윤회에 유전하는 중생이란 없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미래에 겪어야 할 업이 없는 것은 번뇌가 다한 오로지 아라한 밖에 없는 것이다.

 

맹구우목(盲龜)’ 비유의 진실

 

맹구우목이야기가 있다. 눈먼 거북이이야기이다. 흔히 스님들 또는 선사들 법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먼거북이 이야기가 초기 경전에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를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풍이 불면 그것은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그것은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북풍이 불면 그것은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풍이 불면 그것은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언젠가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의 9절, 전재성님역)

 

발라빤디따경(우현경-M129).docx

 

 

 

앞서 언급한 맛지마니까야 발라빤디따 경에 실려 있다. 그런데 스님들이나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

 

스님들은 거의 대부분 눈먼거북이 이야기를 하면서 단지 사람 몸 받기가 매우 힘든 것이라는 법문을 한다.  하지만 경에서는 눈먼 거북이와 악처에 떨어진 자들을 비교 하고 있다. 악처에 떨어진 자들이 선처에 올라 오기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구멍 뚫인 널판지에 머리를 내미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비유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로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나라 스님들이 법문할 때 눈먼거북이 이야기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고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전해 듣기만 하다 보니 사람 몸 받기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널판지 구멍에 머리 내미는 것으로 거의 대부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얻더라도

 

경에서 악처에 떨어진 자가 인간과 같은 선처에 나기가 맹구우목 이상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져서 아들을 잃고, 아내를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얽어 매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가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곳, 지옥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패배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면 이와 같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의 9절, 전재성님역)

 

 

 

 

 

turtle

 

 

 

부처님은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으로 대표 되는 악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악처는 공덕도 쌓을 수 없는 양육강식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악처에 있다 악업이 다 하여 설령 인간으로 태어 났다 하더라도 비천하고 미천하거나 육체적,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으로 본다. 그 결과 또 다시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죄업을 지어 다시 악처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처에서 선처로 나는 것이 거북이가 바다에서 널판지 구멍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 보다 더 확률을 낮게 본 것이다.

 

현명한 자는

 

이렇게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하면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십악행을 저질러서 항상 악처에 머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반면에 오계를 준수하고 십선행을 하는 현명한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현명한 자는 언젠가 어디선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인간의 지위를 얻더라도, 높은 가문, 왕족의 대부호의 가문, 또는 바라문의 대부호의 가문이나 장자의 대부호의 가문과 같은 부유하고 대부호이고 대자산가이고 금은이 많고 재물이 많고 돈과 곡식이 많은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잘 생기고, 보기에 좋고, 청정하고 연꽃처럼 최상의 용모를 갖추었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 등불을 얻는다.

 

그는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이겨서 커다란 재산을 취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도박꾼이 최초의 승부에 이겨서 커다란 재산을 취득하더라도 그 승리는 오히려 작다. 현명한 자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훨씬 커다란 승리이다.

 

수행승들이여,

현명한 자의 단계가 완전히 성숙하는 것은 이와 같다.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우현경,맛지마니까야 M129의 9절, 전재성님역)

 

 

현명한 자는 선처에 나게 되는데,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높은 가문에서 아름다운 용모로 태어난다고 한다. 이는 항상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선행을 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렇게 징역을 많이 살고 나왔어도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아직 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보시를 하고 지계하는 공덕을 쌓고 십선행을 하면 선처에 나고, 반대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일삼으면 악처에 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악처에 나더라도 영원히 악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악업이 소멸 될 경우 다시 선처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지은 업은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세상에서나 태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선처에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선근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하여 좋지 않은 조건으로 태어 날 가능성이 많다. 그에 따라 천대 받고, 무시 받고, 학대 받기 쉬워서 삶 자체가 고달프고 고단한 일생을 보낼 수 있다. 더구나 어리석고 지혜가 없다면 또 다시 악행을 저질로 곧바로 악처로 떨어 질 수 있다.

 

도둑질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이 근질근질 하여 남의 물건에 손이 가고, 그로 인하여 징역을 살고, 나와서 또 다시 도둑질하고, 또 징역을 살게 된다. 그렇게 징역을 많이 살고 나왔어도 손버릇이 여간해서는 고쳐 지지 않는다. 그래서 징역사는 기간이 밖에 나와서 사는 기간 보다 더 긴 경우가 발생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렇게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행을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10악행을 하는 것은 습관이 들어 잘 고쳐 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수행은 다름 아닌 습관을 들이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이를 다른 말로 수습(修習)’이라 한다.

 

경에 있는 내용 그대로 법문해야

 

발라빤디따경(愚賢經, M129)에서는 악처에서 선처로 가는 것에 대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맹구우목의 비유에 대하여 단지 인간의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는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경에 따르면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풀이 하면 지옥에 떨어진 자가 인간의 몸을 받는 것 보다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번씩 떠 올라 구멍 뚫린 널판지에 목을 내미는 것이 더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부터라도 스님들은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 때 반드시 경전적 근거를 들어야 하고 또 경에 있는 내용 그대로 법문해야 하지 않을까.

 

 

 

2012-07-06

진흙속의연꽃

발라빤디따경(우현경-M12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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