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 짓는 사람과 공덕을 부정하는 자들
남는 것은 ‘빚’ 밖에
일로 인하여 만난 사람이 있다. 그는 개인회사를 10여년간 운영하였다. 그러나 최근 ‘파산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서 모든 것을 정리 한 것이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빚’ 밖에 없다고 하였다. 지난 10여년 동안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 치고 너무나 허망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파산으로 막을 내린 다는 것이다.
한때 잘 나가던 벤처사장이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광화문 앞을 지나가다 노숙자를 발견 하였다. 하도 불쌍해 보여서 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주 사드시지 마시고 꼭 밥 사먹으세요”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돈이 생기면 밥을 사먹기 보다 소주를 사마시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어느 날 선행을 한 그 벤처사장은 나중에 노숙자와 다름 없는 신세가 되었다. 회사가 부도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귀인’이 찾아 올 수 있도록
누구나 잘 나가던 때가 있다. 직장에서든 자신의 사업이든 인생의 전성기가 있는데, 대부분 돈을 아끼고 모으고 더 많이 벌기 위하여 투자 할 줄만 알았지 베풀고 사는 데 매우 인색하다. 보시는 돈을 더 많이 벌어 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다 보니 재벌이 되어야 본격적인 보시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잘 나가던 벤처사업가가 매달 일정액을 꾸준히 보시 하였다면 어쩌다 노숙자을 만나 만원 보시 한 것 이상의 공덕을 쌓았을 것이다. 설령 사업이 잘 안되어 회사가 망했다고 할지라도 그 동안의 보시공덕으로 인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보시공덕을 지으면 언젠가 몇 배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다. 적선을 하면 누구나 좋아 하기 때문에 어느 날 ‘귀인’이 찾아 올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전혀 공덕을 쌓지 않은 자가 나중에 잘 못되었을 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일묵스님의 신선한 법문
불교에서는 보시공덕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래서 계를 지키고 보시를 열심히 하면 나중에 죽어서 ‘선처’에 태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불교에 처음 입문한 초보자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시계생천’과 같은 쉬운 가르침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정도 가르침을 수용할 여건이 갖추어졌을 때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며 보시공덕을 짓는 것이 반드시 초보자에 한하고, 또 천상에 나기 위한 가르침에 국한 되는 것일까. 불교tv에서 일묵스님의 강좌를 들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불교tv에서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서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것이 그런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공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충만 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어떻게 보면 깨달음이 일어나거나 이런 경우는 없다는 거죠.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0회 공덕과 지혜 , 방송 보기: 불교TV)
일묵스님은 불교 tv 강좌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다.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공덕을 쌓는 것이라 한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런 말은 좀처럼 선사들의 법문에서 들어 보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라는 ‘이뭐꼬’ 화두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오로지 깨달음에 대하여만 이야기 할 뿐 공덕을 쌓으라는 법문을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묵스님의 법문이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은 대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거지만, 이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 그 이전에 갖추어야 될 것들은 상당히 많은 것이 요구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그 조건을 성숙시키는 그 과정이 바로 이런 ‘공덕행’을 쌓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지계, 보시 등의 공덕을 쌓는 행위가 반드시 천상에 나는 것만 해당되지 않는 것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같은 아라한이라도
이렇게 깨달음의 전제 조건으로 공덕행이 강조 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공덕행을 많이 닦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라한의 경우에는 과거의 공덕행으로 인하여 죽기 직전, 즉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기 직전에 선한과보가 올 것입니다. 실례로 ‘씨왈리 존자’는 엄청나게 많은 공양을 받았고 바꿀라 존자는 완벽하게 건강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라한도 불선행이 있으면 불선과보를 받게 되는데, 예를 들어, 로사까띳사 장로는 항상 공양물이 부족하였고 목갈라나 존자는 흉악범들에게 몰매 맞아죽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
아라한이 된 존자들의 과거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현생에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과거생에 지은 공덕에 따라 지금 받는 대우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로사까띠사(Losakatissa)장로 이야기
법문집에서는 여러 존자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 중 로사까띠사(Losakatissa)장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로사까띠사(Losakatissa)장로의 이야기는 본생경(J.41)에 나온다. 그는 까사파 부처님(迦葉佛)때 비구였는데 한 신자의 후원을 받으며 사원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라한 인 한 비구가 찾아왔는데 그가 계속해서 머물면 자신에게 오는 공양과 보시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내쫓을 궁리를 하였다.
하루는 신자가 둘을 공양에 초청했지만 그는 혼자만 갔다. 그리고 오지 않은 아라한 비구에게 전해달라고 건네 준 시주음식을 전달하지 않고 오는 도중에 길가에 내다 버렸다. 나중에 그의 의중을 알게 된 아라한 비구는 스스로 그 사원을 떠났다.
그 뒤에 그는 죽어 아귀가 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지옥에 태어났다. 수많은 세월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다가 업력이 아직 남아서 각각 5백생 동안 야차(Yakkha)와 개로 태어나 항상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꼬살라의 어부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어부마을과 부모에게 불운이 계속해서 닥쳐왔다. 즉, 마을전체가 왕의 형벌을 여러 번 받는 등 멸문직전에 이르게 되자 그것이 로사까띠싸로 인한 것임을 안 마을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몰아내었다. 나중에는 배고픔을 참다못한 어머니도 그를 길거리에 내다버렸다.
하루는 사리뿌따 존자가 길가의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7살 된 그를 우연히 보고 크게 불쌍히 여겨 사원으로 데리고 가서 말끔이 씻기고는 출가시켰다. 나중에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그의 불운은 여전하여 탁발을 나가도 항상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만을 받았다.
그가 입멸하는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안 사리뿌따 존자는 이 날 만큼은 그를 충분히 공양하게 하려고 함께 사왓띠로 갔다. 하지만 아무도 로사까띠싸에게 시주음식을 주지 않았고 사리뿌따 존자가 그를 일단 사원으로 돌려보낸 후 사람을 시켜 음식을 그에게 보냈지만 심부름꾼이 중간에 그것을 먹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사리뿌따 존자가 직접 발우에 음식을 담아가서 그 발우를 손으로 받치고 있으면서 로사까띠싸로 하여금 공양을 충분히 다 마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마지막 공양만은 충분히 들고는 바로 그날 저녁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들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 주해)
로사까띠사장로가 아라한이 되긴 하였지만 먹을 복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과거생에 공덕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생에서도 늘 배고프게 살았고, 죽음 직전에 마지막 공양마저 찾아 먹지 못할 뻔한 신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평소 오로지 자기자신만 생각하고 인색하게만 살았을 때 그에 대한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불교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이를 다른 말로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그런 깨달음을 빨리 얻는 존재도 있고, 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빠른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부처님 당시 시왈리(Sīvalī)존자는 출가를 시켰는데 머리를 깎으면서 첫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수다원과를, 두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사다함과를, 세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아나함과를, 머리를 다 깍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빨리 깨닫는 것은 공덕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바라밀’의 차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살로 있을 때 3아승지 겁 이상 십바라밀을 닦았다. 그결과 일체지를 얻어 정득각자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몰록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런 조건이 충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돈오라기 보다 ‘점수’에 가깝다. 그래서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Nāhaṃ bhikkhave ādikeneva aññārādhanaṃ vadāmi.
Api ca bhikkhave anupubbasikkhā anupubbakiriyā anupubbapaṭipadā aññārādhanā hoti.
수행승들이여,
나는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된다고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닦고
점차적으로 발전한 다음에 지혜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끼따기리경-Kīṭāgiri suttaṃ -Advice given at Kitagiri -끼따기리 설법의 경, 맛지마니까야 M7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최상의 지혜가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 선불교에서 조사스님들이 돈오를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은 지혜라는 것이 점차적으로 닦고 배우고 익혀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점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돈오가 아닌 점수인 것이 분명하다. 이는 부처님이 3아승지 겁 이상 십바라밀을 닦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공덕쌓기’는 필수적
이렇게 부처님은 바라밀을 닦아 마침내 정등각자가 되었는데, 부처님의 제자 들 역시 과거 전생에 바라밀행을 많이 닦으면 닦을수록, 공덕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깨달음의 길에 훨씬 더 빨리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이렇게 하고 선정도 열심히 닦고, 삼매도 열심히 익히고, 지혜도 많이 개발을 하고, 이렇게 하고 나면, 그런 것이 무르익어서, 충분히 성숙됐을 때, 어느 순간에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는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죠?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0회 공덕과 지혜 , 방송 보기: 불교TV)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계도 지키고 선정도 닦고, 지혜도 개발 해야 한다. 하지만 무르익어야 된다는 것이다. 조건이 갖추어져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뒷받침 하기 위한 ‘공덕쌓기’가 필수적인데, 일반적으로 보시를 말한다.
함께 기뻐하는 보시란?
돈이 있으면 재보시도 하고, 돈이 없으면 법당에 나와 청소라도 하는 것이라 한다.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얼마든지 보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회향하는 보시, 함께 기뻐하는 보시도 있다. 이중 함께 기뻐하는 보시란 무엇일까.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고 또 기뻐하는 보시가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은 남이 잘 됐을 때 배 아파하지 말고, 보통은 배가 아프잖아요. 배 아파 하잖아요. 배 아파 하는게 아니라 남이 잘 됐을 때 그것을 같이 기뻐해주는 거, 이게 기뻐하는 보시입니다.
그래서 남방에는 가 보면은 예를 들어서 누가 잘했다. 누가 선행을 하면 싸아두 싸아두 싸아두 이렇게 해 줍니다. 싸아두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면 선재, 선재. 이런 말입니다. ‘아 훌륭하다. 정말 훌륭하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남이 뭔가 선행을 하거나 좋은 일을 했을 때 ‘싸아두, 싸아두, 싸아두’ 이렇게 세 번을 해주면, 나도 같이 보시행을 하는게 된다는 거죠.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0회 공덕과 지혜 , 방송 보기: 불교TV)
누군가 법당에 5만원을 보시 한다고 하였을 때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함께 기뻐하는 보시일 것이다. 이 경우 5만원을 낸 것과 같은 효과라는 것이다. 말한마디 거들어서 5만원 보시한 효과를 본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사두(Sādhu), 사두(Sādhu), 사두(Sādhu)” 라고 말한다고 한다.
“사두(Sādhu), 사두(Sādhu), 사두(Sādhu)”
사두란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주해서에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사두
사두(Sādhu)는 √sad(즐기다, 맛보다, 향유하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PED에서 ‘sweet, nice, pleasant.’라고 설명되듯이 원래는 감미롭고, 좋고, 기분 좋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상좌부 불교국에서 누군가가 어떤 공덕 행을 하거나, 법문이 끝나면 이 말을 3번씩 합송함으로써 선업을 다 함께 기뻐주는 말이 되었다.
이럴 때에는 ‘장하구나. 착하도다. 선재(善哉)’ 등의 뜻이다. 이렇게 하는 사두라고 세 번 합송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진심으로 기뻐해줌으로써 그 공덕을 함께 나누려는 의미가 있다.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해모음, <초전법륜경> 제1장 126쪽, 김한상(수마나) 번역 및 역주)
빠알리어 사두의 의미는 “장하도다” “훌륭하다” 등의 뜻으로 공덕행이나 법문이 끝나면 세번 합송하는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에서는 금강경에 “선재 (善哉)”로 표현 되어 있다. 이 사두에 대하여 어떤 이는 “그려, 그려, 그려”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가장 수승한 공덕은 ‘법보시’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가장 수승한 공덕은 ‘법보시’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그 얻은 경지 만큼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만일 깨달음을 이룬 자라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쉬지 않고 굴러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수승한 보시로 보는 것이다.
공덕을 쌓지 않는다면
이렇게 보시공덕이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공덕을 쌓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생에 설사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거 무슨 행이 되겠어요? 이런 공덕을 쌓는 게 됩니다. 설사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공덕행이 없이 갑자기 아이뭐 이 세상에 깨닫지도 못하는데 공부는 뭐 공부, 이 생은 마음껏 즐기고 놀자.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다음 생하고도 똑같습니다. 다음 생은 더 어렵게 되겠죠 그죠?
(일묵스님,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0회 공덕과 지혜 , 방송 보기: 불교TV)
불자가 되면 오계를 준수하고 삼보를 믿는다. 그리고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공덕행을 쌓고 깨달음의 길로 가는 불자들이 있는가 하면 무늬만 불자인 경우도 많다. 공덕행을 짓지 않거나 반신반의 하는 경우를 말한다. 심지어 공덕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공덕을 부정하는 자들
부처님 당시에도 공덕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육사외도 중의 유물론자들이 이다. 특히 ‘아지타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이 가장 유명하였다.
이들 유물론자들의 특징은 인과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기법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지각 가능한 것만 믿었다. 자신의 눈과 귀 등 감각기관으로 확인 된 것만 믿는 것이다.
또 이들은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몸이 파괴되고 단멸하고 소실하여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하였다. 죽으면 끝이고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견해를 가진다.
우연론자인 ‘뿌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역시 인과를 부정하고 연기를 부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 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적으로 변화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뿌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가 말하기를
초기경에 따르면 이처럼 우연론자이며 동시에 단멸론자인 뿌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퍼하고 슬퍼하게 하여도, 피곤해하고 피곤하게 하여도, 전율하고 전율하게 하여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즈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고 또한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고 절단하도록 사키며,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즈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고 또한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고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까라또경-karoto- The Doer.- 업을 짓거나경, 상윳따니까야 S23.3.1.6, 전재성님역)
이 것이 부처님 당시 단멸론자이자 우연론자인 뿌라나 깟싸빠의 주장이다. 어떤 행위를 하든 과보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보시공덕 역시 없을 수 밖에 없다. 갠지스강만큼 보시하고 계행을 지켜도 아무런 과보도 없고 공덕도 없다고 한다.
가장 최악은 단멸견
이처럼 단멸론자들은 인과를 부정하고 연기를 믿지 않으니 보시나 지계를 지키며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이 완전한 소멸만 있을 뿐이라 주장한다.
단멸론은 영속론과 더불어 삿된 견해이다. 모두 연기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조건(paccaya)에 따라 앞서서 연속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영속론은 거짓이고, 또 법이 뒤이어 조건에 따라 연속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단멸론 역시 거짓이다. 이렇게 영속론과 단멸론은 이미 연기법으로 논파된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단멸론과 영속론자들은 끊임 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즉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단견과 상견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상견의 경우 지계하고 보시하여 천상에 나려 하기 때문에 어느 면으로 보아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가장 최악은 단견이다. 이는 인과 뿐만 아니라 도덕마저 부정하기 때문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모든 공덕을 부정하는 단멸론자들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
위바와 딴하(vibhava-taṇhā)라는 용어에서, 위바와(vibhava)는 존재하지 않음(無有), 비존재, 존재의 소멸을 뜻합니다. ‘살아있을 때만 존재하고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합니다. 이것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완전한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과 결부된 갈애입니다.
이 단견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지도자인 아지따가 주장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네 가지 근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져 있으며 죽으면, 몸을 이루는 땅의 요소(地大)가, 몸 밖의 생명이 없는 땅의 본체(덩어리)로 돌아간다. 이 말의 의미는, 살아있는 몸에 있을 때에는 딱딱함, 거친 것으로 나타나는 땅의 요소(地大)가 죽고 나서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땅의 요소와 융합하고 이어서 땅의 물질로 변했다가 다시 나무와 식물 따위의 땅의 요소로 변환된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물의 요소(水大)는 생명 없는 물의 본체(덩어리)로 흘러 들어갑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의 축축함, 유동성은 물의 본체의 축축함과 유동성으로 변한다. 살아있는 몸에 있던 불의 요소(火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불의 본체와 합쳐지고, 살아있는 몸에 있던 바람의 요소(風大)는 몸 밖의 생명 없는 바람의 본체로 흘러 들어간다. 모든 인지기능(눈, 귀, 코, 혀 등의 감각기관들)은 우주로 이동한다.“
허무주의자들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등을 개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단견斷見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 귀와 같은 물질적 형태가 스스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한다고 주장합니다. 감각기능에 속하는 의식(意, mana)도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하나로 표현되는 의식의 소멸을,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우주와 융합되거나 우주 속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바보이든 현명한 이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보는 내생에서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상응하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도 내생에서 자신이 지은 선업의 과보를 누리지 않는다. 죽은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허무주의적 견해를 취하는 아지따의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악행을 피하거나 선행을 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주장과 같이 정말로 죽은 뒤에는 내생이 없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죽음 이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자인自認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면 죽음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주장하던 바대로라면 살아있는 자아(앗따, atta)나 유정(有情, 삿따. satta)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지따가, 사람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도 자아와 유정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내생을 위해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쾌락을 누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은 소멸한다고 하는 이러한 허무주의적 견해와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위 법문은 마하시사야도가 1962년 미얀마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이다. 그런데 법문의 내용을 보면 그 때 당시 미얀마에서도 단멸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뿐만 아니라 50년전 미얀마에서도 아지따 께사깜발린이나 뿌라나 깟사빠와 같은 단멸론자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인터넷시대에도 단멸론자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시대의 단멸론자들
인터넷시대에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부처님이 지적하신 내용과 마하시사야도가 법문한 내용과 놀라우리 만치 일치한다. 그들은 인과를 부정하기 때문에 연기법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과 귀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믿고, 과학적으로 검증이 안된 것은 모두 조작 또는 왜곡으로 보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만을 강조하며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죽음 이후에 말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죽을 때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죽은 다음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단멸론자 들의 주장이다.
이런 단멸론자들은 결코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죽으면 완전히 소멸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보시, 지계, 공덕이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설령 단멸론자들이 부처님의 현세적인 가르침을 들먹이며 수행을 강조한다 하여도 공덕이 뒷 받침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또 법에 대하여 의심하고 법을 왜곡하는 회의론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도와 과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숫따니빠따의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 따르면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Sakkāyadiṭṭhi , 유신견), 매사의 의심( vicikicchitañca, 법에 대한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 (Sīlabbataṃ, 계금취)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대열에 들어 갈 수 없고, 또한 해탈과 열반을 성취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 중 법에 대한 의심, 즉 연기법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부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없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유물론)이나 뿌라나 깟사빠(우연론)의 제자라 볼 수 있다.
가르침이 틀림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부처님은 고통에 대하여 설하였다. 만일 부처님이 오로지 ‘고통’에 대해서만, 그리고 ‘무상’과 ‘무아’에 대해서만 설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법이 전승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지따 께사깜발린(유물론)이나 뿌라나 깟사빠(우연론)처럼 당대에 끝 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통의 원인과 소멸과 소멸방법에 대해서도 설하였다. 그래서 법의 바퀴가 오늘날 까지 굴러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길로 가면 해탈열반 하리라”는 미래의 약속이고 또 믿음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은 현재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비교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여 틀림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확실히 믿게 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밧데까랏따경, M131)”
라는 게송이 있다. 이 가르침은 ‘현법(現法, dittheva dhamma)’에 대한 것이다.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면, 즉 지금 여기에서 현상을 알아 차리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가르침이다. 신, 수, 신, 법으로 표현되는 사념처 수행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의 현실에 적용하여 하나도 틀림 없음을 알게 되면 신뢰가 생긴다. 이런 신뢰는 유일신교의 맹목적인 믿음과 다른 것이다. 확신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삿다(saddha)’라 한다.
이런 믿음이 생기면 초기경전에서 보여지는 윤회, 신통, 천신, 재생연결식 등 눈과 귀로 확인 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된다. 설령 나의 인지로 알 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부정하기 보다 ‘유보적’인 자세를 취하며 받아 들이게 된다. 이런 태도는 불교가 ‘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불교는 ‘종교’이다
만일 불교에 대하여 수학이나 물리와 같은 법칙으로 본다면 자신의 인지감각 또는 깜냥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또 불교를 철학적으로만 한정시켜 버린다면 역시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는 종교이다. 그것도 최고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종교로서 불교를 받아 들인다면 설령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내용이 있더라도 받아 들이게 된다. 불교가 반드시 ‘과학’이나 ‘철학’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과학이면서 철학이고 동시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 신통, 천신, 재생연결식, 지옥, 아귀, 아수라, 천신 등에 대하야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더 이상 불교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불교인을 가장한 외도들은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 내어 과학과 철학이라는 작은 울타리로 가두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풍요로운 가르침, 대기설법 (對機說法, pariyāya-desanā)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실현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매우 현실적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도 펴셨지만 근기가 약한 중생들을 위하여 지계하고 보시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도 동시에 펼치셨다. 이처럼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였는데, 이를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 (對機說法, pariyāya-desanā) 이라 한다. 같은 가르침이라도 받아 들이는 존재에 따라 이해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야짜나경(청원경, S6.1.1)에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 보았다”다고 하였다. 이는 중생들의 근기가 모두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근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법을 설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비방편설, 또는 비대기설법(nip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대표되는 ‘아비담마(Abhidhamma, 對法, 勝法)’를 들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5온, 12처, 18계, 22근, 4성제, 12연기이다. 이를 줄여서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이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특정한 존재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천인 등 모든 존재들을 위한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8만4천가지 법문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지계하고 보시하면 생천한다든가, 천신, 야차, 마라 등 초자연적 존재 등이 등장하는 것은 ‘대기설법’이라 볼 수 있다. 경에서 마라 빠삐만이 등장하였을 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하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처럼 대기설법을 하면 근기가 다른 사람들이 경을 이해하기 쉽고 신심이 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대기설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07-11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실현해야 할 것 (0) | 2012.07.19 |
---|---|
싫어하는 것과 만났을 때, 원한을 제거 하기 위한 다섯가지 방법 (0) | 2012.07.17 |
어떻게 해야 윤회의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을까, 알라와까경(Sn1.10) (0) | 2012.07.10 |
‘맹구우목 (盲龜遇木)’ 비유의 진실, 발라빤디따경(愚賢經, M129) (0) | 2012.07.06 |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 (0) | 201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