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실현해야 할 것
‘ㅉㅉ’ ‘ㅋㅋ’
종종 인터넷토론사이트의 대화를 보면 ‘이전투구’를 보는 것 같다. 특히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단멸론자들의 글을 보면 온갖 부정적인 표현이 난무한다. ‘ㅉㅉ’하며 혀를 차는 듯한 표현과, ‘ㅋㅋ’하며 조소하는 듯한 표현은 다반사이고, ‘사기’친다느니 ‘구라’친다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상대방의 감정을 최대한 자극하여 분노를 폭발시켜서 굴복하게 하고자 하는 심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을 보면 마치 도끼를 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S6.1.10)”라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이들 단멸론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사성제이다. 사성제이외의 다른 것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고소멸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사용을 보면 전혀 사성제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 같지 않다. 전혀 ‘정어(正語)’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어는 팔정도에서 바른 언어를 말한다.
계행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그들
팔정도에서 정어는 정업, 정명과 함께 계(戒)에 속한다. 계정혜 삼학중의 계를 말한다. 그런 정어는 어떤 것일까.
팔정도에서 정어(正語, sammā-vācā)는 초기경에서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에 대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토론 사이트에서 다반사로 나오는 “ㅉㅉ’ ‘ㅋㅋ’ “사기치지 마라” “구라치지 마라” 등의 표현이 모두 정어에 위반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상하고 모략하고 욕지거리를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촌장이여, 나는 욕지거리를 하는 것에 대하여 알고 욕지거리를 한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이렇게 이행해서 욕지거리를 한다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도 나는 잘 압니다.
(빠딸리야경-Pāṭaliy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41.1.13, 전재성님역)
욕지거리한 과보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비방, 중상모략, 비아냥 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지만 단멸론자들은 사성제를 강조하면서도 온갖 부정적인 언사를 서슴없이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공덕을 지어 천상에 난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행을 해도 악처에 떨어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부정하다 보니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비아냥, 비방, 조롱, 조소, 험담, 잡담 등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계행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성제를 들먹이고 수행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앞뒤가 전혀 안맞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망갈라경(행복경, Sn2.4)에서 행복의 조건으로서 가장 먼저 언급한 갓이 “아세와나 짜 발라낭 (Asevanā ca bālānaṃ,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이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행복의 가장 첫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정어(正語)를 하려면
그렇다면 정어(正語)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정신과 물질의 실재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과 같은 잘못된 말을 할 기회가 없습니다. 잠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무상과 소멸의 진정한 성품을 알았는데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는 대상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비방할 것도 없으며 헐뜯을 필요도 없으며, 한 마디로 대상과 관련한 나쁜 말을 할 기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6장)
거짓말 등 정어와 위배되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알아차려야 한다고 말한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계는 자동으로 지켜 질 것이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바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정신과 물질의 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우리는 청정도론에서 이러한 구절을 보게 됩니다.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이 일어나고,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이 일어난다.
정신이 먹으려하고, 마시려하고, 말하려하고, 행동하려 하면
물질이 먹고, 마시고, 말하고, 행한다.’
청정도론의 이 부분에서는 정신과 물질의 다양한 분류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물질에 관 다양한 분류를 숙고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계발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이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것을 아는 마음과 보인 대상인 물질을 따로 따로 인식할 수 있을 때만 계발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6장)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무아에 대한 것이다. 사실 불자들은 무아에 대하여 잘 모른다. 무아가 삼법인 중의 하나인 것은 알고 있지만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한국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 만큼이나 생소한 것이 무아이다. 그런 무아를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개발해야 할 지혜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라고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ñāṇa)라 한다.
여기서 물질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육체가 아니다. 육체라고 하면 영혼이라는 개념이 들어 가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육체가 아닌 물질(rūp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또 영혼이 아닌 정신(nāma)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이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것을 아는 마음과 보인 대상인 물질을 따로 따로 인식할 수 있을 때만 계발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6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 영혼은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죽지 않고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닌다고 믿는다. 특히 선불교에서 이뭐꼬 화두가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누구인고?”하며 의심 하는데, 이는 윤회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어떤 고정불변하는 자아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윤회의 주체이자, 모든 행위와 경험의 주체로서 자아 또는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이런 지혜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 수행의 단계로 말하여지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에 속해 있다. 또 16단계의 지혜에서 두 번째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인데, 이는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을 접하게 되면 이 두 가지 지혜는 자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육체와 영혼이 아닌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상이 일어나 사라짐을 봄으로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개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개발 되었을 때 통찰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마하시사야도는 이에 대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를 ‘정견’이라 한다. 바른 견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직 물질인 몸과 아는 마음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실체나 주체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나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견해 즉, 정견이라고 한다.
만일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될까. 그것은 보이는 대로 보고, 듣는 대로 듣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좋아 하거나 싫어 하게 된다. 좋아 하게 되면 집착하게 되고 그에 따른 행위로 인하여 과보가 만들어 진다. 그러나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즉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는 것, 일어났다가 곧 이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
마하시사야도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정견이라 하였다. 그리고 법문집에서 팔정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ñāṇa)’가 생겨서 위빠사나의 바른 견해가 계발되는 단계에 이르는 시점부터 ‘‘있는 그대로’를 아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기울임인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또 여기에는 바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바른 집중(正定)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바른 알아차림(正念)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행자는 몸의 자세[身], 느낌[受], 마음[心], 마음의 대상[法]의 사념처四念處 중 한 가지 수행에 매진합니다. 수행자는 노력을 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바른 정진(正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수행을 하고 있을 때는,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 정념正念의, 세 가지 ‘정定의 도’와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의, 두 가지 ‘혜慧의 도’로 구성된, 다섯 가지 도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이 다섯 가지의 도는 각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주의 깊게 알아차리고, 아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석서는 이것을 행위자의 도(까나까 막가, kanaka-magga)라고 합니다. 더구나 계율에 어긋나지 않게 잘 지키고 절제(위라띠, virati)하여 완성되는 것이므로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과 같은 세 가지 계戒의 도와도 연결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6장)
팔정도에서 정견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는 바른 견해가 바로 서야 그 다음 단계의 수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팔정도에서 항상 정견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 다음으로 정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인데, 이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를 아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임’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사유는 정견과 함께 ‘혜(慧, paññā)’에 속하기 때문에 항상 정견과 함께 설명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定, samādhi)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팔정도에서 정에 속한 것은 정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정정(正定, sammā-samãdhi), 정념(正念, sammā-sati)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정정이 바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집중이라 설명되어 있고, 그런 상태에서 몸의 자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 한가지 수행에 매진 것이 정념이라 한다. 그런 노력를 해서 알아 차리기 때문에 이를 정정진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정견과 정사유, 정정진과 정정과 정념 이렇게 다섯가지는 모든 행위가 일어 날 때 마다 알아차림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을 때 결코 계를 범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여실지(如實智),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 ñāṇa)
이렇게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에서 팔정도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사실 위와 같은 설명은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실려 있는 사항이다. 이는 테라와다 불교의 법사들은 철저하게 초기경전이나 주석서를 근거로 하여 법문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형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시각의식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시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시각접촉에서 생겨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할 때에,
시각에 애착하고, 형상에 애착하고, 시각의식에 애착하고, 시각접촉에 애착하고, 시각접촉에서 생겨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애착한다.
이와 같이 애착하여 속박되고 미혹되고 유혹되는 자에게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미래에 스스로 시설된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고 환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 환희하는 갈애가 성장한다. 그에게 신체적인 곤란이 증가하고 정신적인 곤란이 증가하고, 그에게 신체적인 고통이 증가하고 정신적인 고통이 증가하고 그에게 신체적인 고뇌가 증가하고 정신적인 고뇌가 증가한다. 그는 신체적인 괴로움을 체험하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체험한다.
(마하살라야따니까경-Mahāsaḷāyatanika suttaṃ -The Longer Discourse on the Six Spheres-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마하살라야따니까경(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149).docx
이와 같이 부처님은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 볼 것을 강조 하였다. 이 경에서 키워드는 ‘있는 그대로’이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Cakkhuṃ bhikkhave, ajānaṃ apassaṃ yathābhūtaṃ,
rūpe ajānaṃ apassaṃ yathābhūtaṃ,
cakkhuviññāṇaṃ ajānaṃ apassaṃ yathābhūtaṃ,
수행승들이여,
시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형상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시각의식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시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빠알리로 ‘야타부따(yathābhūta)’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각, 형상, 시각의식, 시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였다. ‘좋다’ ‘싫다’라고 보이는 대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한다. 또 다른 말로 여실지(如實智)라 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 ñāṇa)라 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ñāṇa, 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라 한다.
어떻게 팔정도가 완성되는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알게 되었을 때 올바른 견해가 생긴다고 한다. 그것이 팔정도에서 말하는 정견이다. 이렇게 정견이 생겼을 때 다음과 같은 사항이 자동적으로 따라 오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견해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사유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정진하면,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정진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새기면,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새김이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집중하면, 그것이 그에게 올바른 집중이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그의 신체적인 행위와 언어적인 행위와 생활의 양식은 청정해졌다. 이와 같이 해서 그에게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수행에 의하여 완성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네 가지 새김의 토대가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네 가지 신통의 기초가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다섯 가지 능력이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다섯 가지 힘이 수행에 의하여 완성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가 수행에 의하여 완성된다.
(마하살라야따니까경-Mahāsaḷāyatanika suttaṃ -The Longer Discourse on the Six Spheres-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위 내용은 마하시사야도가 말한 것과 같다. 마하시사야도가 초기경을 근거로 하여 법문하였기 때문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팔정도가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위빠사나를 통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말한다.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눈, 시각대상, 안식, 시각접촉과 느낌 등의 성품을 아는 지혜가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팔정도가 개발되고 그에 따라 계는 자동적으로 지켜 질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숫따니빠따 ‘셀라경(Sn3.7)’에서
팔정도는 성스런 도( ariya magga)에 대한 것이다. 성스런 도를 닦아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여 불사의 경지에 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크게 세가지가 있다. 이는 숫따니빠따에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주고 있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아빈네이양 아빈냐땅.
bhāvetabbañca bhāvitaṃ; 바웨땁반짜 바위땅.
Pahātabbaṃ pahīnaṃ me, 빠하땁방 빠히낭 메,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따스마 붓도스미 브라흐마나.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Brahmin,
realzing, what should be realized,
developing what should be developed.
I have dispelled what should be dispelled,
therefore I'm enlightened."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자라 하였다. 그 조건으로 세가지를 들고 있다. 알아야 할 것과 닦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교학(pariyatti)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은 수행(paṭipatti)을 말한다. 그렇다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항상 궁금하였다.
알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실현해야 할 것
그런데 위에 언급된 마하살라야따니까경(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M149)을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경에서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두 가지 법, 즉 멈춤과 통찰이 함께 수반한다. 그는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은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안다. 그는 곧바른 앎으로 버려야 할 것은 곧바른 앎으로 버린다. 그는 곧바른 앎으로 닦아야 할 것은 곧바른 앎으로 닦는다. 그는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은 곧바른 앎으로 실현한다.
Katame ca bhikkhave, dhammā abhiññā pariññeyyā: pañcupādānakkhandho'tissa vacanīyaṃ seyyathīdaṃ: rūpūpādānakkhandho vedanūpādānakkhandho saññūpādānakkhandho saṅ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ṇūpādānakkhandho. Ime dhammā abhiññā pariññeyyā.
Katame ca bhikkhave, dhammā abhiññā pahātabbā: avijjā ca bhavataṇhā ca. Ime dhammā abhiññā pahātabbā.
Katame ca bhikkhave, dhammā abhiññā bhāvetabbā: samatho ca vipassanā ca. Ime dhammā abhiññā bhāvetabbā.
Katame ca bhikkhave, dhammā abhiññā sacchikātabbā: vijjā ca vimutti ca. Ime dhammā abhiññā sacchikātabbāti.
1)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두루 알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을 말한다. 곧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이 있는데, 이것들은 두루 알아야 할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버려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무명과 존재의 갈애가 있는데, 이것들은 버려야 할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닦아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멈춤과 관찰이 있는데, 이것들은 닦아야 할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곧바른 앎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란 어떠한 것인가? 명지와 해탈이 있는데, 이것들은 실현해야 할 것이다.
Bhikkhus, what things should be thoroughly known from the depth? The reply is the five holding masses, such as the holding mass of matter, the holding mass of feelings, the holding mass of perceptions, the holding mass of determinations and the holding mass of consciousness.
Bhikkhus, what things should be dispelled knowing from the depth? Ignorance and the craving `to be' should be dispelled knowing deeply.
Bhikkhus, what things should be developed knowing deeply? Calm and insight should be developed knowing deeply.
Bhikkhus, what things should be realized knowing deeply? Knowledge and release should be realized knowing deeply.
(마하살라야따니까경-Mahāsaḷāyatanika suttaṃ -The Longer Discourse on the Six Spheres- 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49,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알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실현해야 할 것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셀라경에서는 알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이렇게 세가지 이었지만 마하살라야따니까경에서는 ‘실현해야 할 것’하나가 더 있어서 네 가지이다.
경에서 버려야 할 것에 대하여 ‘무명’과 ‘존재의 갈애’라 하였다. 이는 12연기에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근본 원인을 말한다. 특히 갈애의 경우 미래의 과보를 가져 오게 될 현재의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12연기의 연결 고리가 끊겨져 고통에서 해방되고 윤회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버려야 할 것은 결국 현재 지금 여기에서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갈애’에 대한 것이었다.
표로 요약하면
경에서 말한 네 가지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알아야 할 것 (pariññeyyā) |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오취온) (pañcupādānakkhandho'tissa) |
교학(pariyatti) |
버려야 할 것 (pahātabbā) |
무명과 존재의 갈애 (avijjā ca bhavataṇhā) |
통찰(paṭivedha) |
닦아야 할 것 (bhāvetabbā) |
멈춤과 관찰 (samatho ca vipassanā) |
수행(paṭipatti) |
실현해야 할 것 (sacchikātabbā) |
명지와 해탈 (vijjā ca vimutti) |
|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법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고통이 야기 되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철저하게 먼저 알아야 하고,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무명과 갈애는 버려야 하고, 특히 갈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알아차려야 하고,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시대
이와 같은 가르침은 교학(pariyatti)과 수행과 통찰로 압축 될 수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 이와 같은 세가지가 갖추어진 가르침을 정법이라 한다. 정법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정법(삿담마, saddhamma)
삿담마(saddhamma)에서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 ‘바른, 참다운, 진실한’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바른)+dhamma(법)으로 분해되며 ‘바른 법, 참된 법, 정법(正法)’을 뜻하고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ṭipatti), 통찰(paṭ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1) 교학(pariyatti)이란 빠알리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ṭipatti)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ṭ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61. 바른 선행과 그릇된 선행 1번 주해)
새는 좌우 날개로 날아 다닌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교학과 수행이라는 두 개로 구분된다. 교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 되어 있는 빠알리 삼장을 공부하는 것을 말하고, 수행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 즉, 팔정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통찰지를 얻어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정법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한다.
201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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