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까삘라경(정의로운 삶의 경, Sn2.6)
까삘라경
(Kapilasuttaṃ- Living according to the Teaching-정의로운 삶의 경, 숫따니빠따 Sn2.6,전재성님역)
[Dhammacariyasutta](*1)
이 경을 까삘라의 경이라고 부른다. 까삘라의 형은 쏘다나이고, 어머니는 싸디나이고 누이동생은 따빠나였다. 전 가족이 깟싸빠 부처님 시대에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든 이후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비구니 승단에 들어갔고 두 아들은 비구 승단에 들어갔다.
그들은 스승들에게 가르침에 대한 의무에 대해 묻자 거주상의 의무와 교법상의 의무가 있다고 했다. 거주상의 의무는 스승에게 5년 동안 계본과 경전과 명상수행을 배우는 것이고 교법상의 의무는 스스로 5부 경전을 습득하여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쏘다나는 거주상의 의무를 완수하고 명상수행을 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까삘라는 총명했으므로 거주상의 의무를 나중에 어른이 되어 수행하기로 하고, 먼저 교법상의 의무를 완수하기로 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곧 삼장의 교법에 통달했다. 그러나 자신의 학식에 교만해져서 옳건 그르건 모든 사람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는 형인 쏘다나 장로의 충고는 물론이고 어떤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고는 악한 행동을 일삼는데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그를 따랐다.
어느 날 까삘라는 계율의 항목을 외우는데, 어떤 수행승도 동조하지 않자 분노하여 가르침도 계율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처럼 깟싸빠 부처님의 가르침을 퇴전시키고 사라지게 했다.
그 때문에 형인 쏘다나 장로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까삘라는 그 결과 죽어서 아비지옥에 태어났다가 나중에 아찌라바따에서 물고기 까삘라맛차로 환생했다. 어떤 어부가 그 물고기를 잡아서 꼬쌀라국의 왕에게 바쳤다. 그 물고기는 황금색을 하고 있었는데, 왕은 그 황금색의 유래를 알려고 부처님 앞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물고기가 입을 열자 제따바나 전체가 악취로 진동했다. 부처님은 질문을 던져 그 물고기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부처님으로 부터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자신 때문에 지옥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의 죄악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아 물고기는 죽어서 다시 한 번 지옥에 태어났다.
부처님은 이때에 제따바나에 모여 있는 모든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1.
[세존]
"정의로운 삶, 순결한 삶, 이것을 위없는 재보라고 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더라도 마찬가지이다.
2.
만약 거친 말씨를 쓰고 남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짐승과 같다면(*1)
그 사람의 생활은 더욱 악해지고 자신을 더러운 먼지로 오염시킬 것이다.
3.
논쟁을 즐기는 수행승은 우매한 성품으로 덮여있어
깨달은 님께서 친히 설한 설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4.
그는 무명에 이끌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지옥으로 가는 길인 번뇌를 알지 못한다.
5.
참으로 이러한 수행승은 타락한 곳에 태어난다.
모태에서 모태로(*2) 암흑에서 암흑으로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게 된다.
6,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
부정한 사람은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
주해(*1)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는 짐승을 말한다.
주해(*2)
모태에 거듭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7.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자들은,
사실은 집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고,
악을 원하고 악한 의도를 갖고,
그의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8.
그대들은 모두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9.
그리하여 수행자가 아니면서 수행자인체하는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있고,
수행의 초원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 그 쌀겨들을 날려버려라.
10.
청정한 자들이라면 서로 새김을 가지고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리하면 서로 화합하여 사려 깊게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것이다.
- 정의로운 삶의 경이 끝났다. -
왜 경의 이름이 다른가
이 경의 빠알리 이름은 ‘까삘라경(Kapilasuttaṃ)’이다. 하지만 경에 까삘라라는 명칭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영문을 보면 ‘담마짜리야경 (Dhammacariya Sutta)’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또 전재성 박사는 경의 제목을 ‘정의로운 삶의 경’이라고 정하였다. 이렇게 경의 이름이 까삘라경(Kapilasuttaṃ)과 담마짜리야경 (Dhammacariya Sutta)으로 서로 다른 이유는 경의 주석에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경을 소개 하는 주석에 따르면 ‘까삘라’라는 명칭이 사람 이름으로 나온다. 따라서 사람의 명칭을 따서 ‘까삘라경’이라고 빠알리어 판에 나와 있지만, 실제로 가르침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단어인 담마짜리야를 따서 영문판에서는 ‘담마짜리야경’으로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익숙한 말 ‘담마짜리야’
‘담마짜리야’라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망갈라경(행복경,Sn2.4)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망갈라경 여섯번째 게송에 “다난짜 담마짜리야 짜(Dānañca dhammacariyā ca)”라는 말이 있다. 이 말뜻은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며”라는 뜻이다. 이때 ‘담마짜리야’는 ‘정의롭게’ 라고 번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까삘라경에서도 가장 첫번째로 “정의로운 삶, 순결한 삶”으로 시작 되는데, 빠알리어는 ‘담마찌에양 브라흐마찌에양(Dhammacieyaṃ brahmacieya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담마짜리야는 ‘정의롭게’ 또는 ‘법답게’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아는 것만 많아 잘난체 하는 사람
이 경은 법답게 사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주석에 따르면 깟사빠 부처님 당시 수행자에게 두 가지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거주상의 의무’이고, 또 하나는 ‘교법상의 의무’라 한다. 그런데 까삘라는 계와 경전과 명상수행의 거주상의 의무를 하지 않고 곧바로 교법상의 의무에 들어 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는 것은 많지만 계행이 되어 있지 않아 지혜가 개발 되지 않았다.
이렇게 까삘라가 교학만 공부하다 보니 아는 것만 많아져 잘난체 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까삘라는 계율의 항목을 외우는데, 어떤 수행승도 동조하지 않자 분노하여 가르침도 계율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처럼 깟싸빠 부처님의 가르침을 퇴전시키고 사라지게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단멸론자들이 연상된다.
연기법을 왜곡하는 자들
인터넷에서 단멸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런 그들은 아는 것이 많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잘난체 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아는 것에 대하여 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기 일쑤이다. 경의 문자에 집착하기 보다 문자를 넘어 생각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연기법이 조건발생적임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식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여 식과 명색을 함께 의존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윤회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형성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발생되고,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발생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식이 없으므로 윤회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하는 것이 연기법이라고 하였으니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것이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아라한선언을 어떻게 왜곡하였나
이와 같은 왜곡에 이어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초기경전에서 자주 볼 수 아라한선언이 있다.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전재성박사)
또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열반을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한역 아함경)
같은 내용이라도 해석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윤회라든가 후세라는 말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갈망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후세에 몸을 받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 후세이니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경전을 왜곡을 넘어 무시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번뇌를 소멸하여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 초기경의 가르침이지만, 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오로지 현생에서 마음의 작용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이 왜곡되다 보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퇴전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될까. 그것은 경의 주석에 있는 것과 같이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경에서 까삘라의 행위와 다름 없다. 주석에 따르면 까삘라는 ‘계율도 부처님의 가르침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로 작용할 것이다.
부처님이 오늘을 예견한 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 시키는 현상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으로 발전된다. 지금 인터넷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멸론자들의 행태를 보면 불자라고 볼 수 없다. 명백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폄훼하는 외도와 다름 없다. 경에서 말하는 까삘라와 같은 것이다.
그런 자들은 토론하기를 즐기는데, 특징은 비아냥거리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무안을 주는 등 매우 거칠다. 전혀 정어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경에서 “만약 거친 말씨를 쓰고 남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짐승과 같다면”라고 표현된 것과 일치 한다. 마치 부처님이 오늘날의 현실을 예측이라도 한듯이 보이는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더 자세하게 들어 맞는다. 부처님은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Kalahābhirato bhikkhu mohadhammena āvaṭo,
Akkhatampi na jānāti dhammā buddhena desitaṃ.
논쟁을 즐기는 수행승은 우매한 성품으로 덮여있어
깨달은 님께서 친히 설한 설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
There is the deluded bhikkhu, fond of strife.
He does not know the Teaching of the Enlightened one.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틀어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한 단멸론자들은 논쟁하기를 즐겨 한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듯이 똑 같은 말을 반복하며 오로지 현세만을 이야기 하며 자신들의 인식을 넘어 서는 것에 대해서는 모조리 부정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전생, 윤회, 천신, 목신, 신통 과 같은 용어만 나오면 모조리 경이 후대에 왜곡되었다고 주장하고 모두 쓰레기 통속에 넣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주석서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가르침도 계율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소름이 끼치도록 일치하는 것이다. 더구나 경에서 “깨달은 님께서 친히 설한 설법조차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단멸론자들이 인터넷에서 분탕질을 치는 것을 정확하게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
이렇게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을 알아 듣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단멸론자들이다. 그리고 온갖 더러운 언어를 써가며 수행자들을 조롱하기 일쑤인데, 경에서는 “그는 무명에 이끌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라고 표현 하였다.
실제로 단멸견을 가진 자들은 수행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특히 정법을 전하는 스님들의 말꼬투리를 잡아 조롱하는 것은 보통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왜곡하고 수행자를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
부정한 사람은 참으로 깨끗해지기 어렵다.
옛날 시골에서 변소를 ‘측간’ 또는 ‘뒷간’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수세식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재래식 화장실은 어떤 것일까.
재래식 화장실을 만드는 방법은 먼저 커다란 구덩이를 판다. 그리고 그 위에 널판지를 올려 놓는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재래식 화장실이다. 그러다 보니 똥을 누고 나면 똥이 쌓이게 된다. 쌓이고 쌓이다 보면 똥 구덩이이 똥이 가득하게 된다. 그래서 경에서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이라고 표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수행자들을 조롱하는 단멸론자의 주장은 ‘똥’과 같은 것이다. 그런 주장들이 모이고 모이면 어떻게 될까. 똥구덩이처럼 악취만 풍길 것이다. 실제로 단멸론자들이 뱉어 놓은 말들을 보면 마치 똥구덩이에 똥이 가득찬 듯 하다.
수행자를 괴롭히는 단멸론자들의 말로는
그렇다면 이렇게 가르침을 왜곡하여 더러운 언어를 사용하여 논쟁하기를 좋아하며 수행자를 괴롭히는 단멸론자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이는 경에 다음과 같이 고스란히 표현 되어 있다.
참으로 이러한 수행승은 타락한 곳에 태어난다.
모태에서 모태로 암흑에서 암흑으로 죽은 후에도 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퇴전시킴에 따른 과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내생은 없다라고 부정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타락한 곳 뿐이라 한다.
사실 그들의 글을 보면 윤회와 전생, 신통 등이 들어간 경에 대하여 “구라친다” “사기친다”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말끝마다 ‘쯔쯔’ 라든가 ‘ㅋㅋ’ 같은 표현이 다반사이다.
이렇게 정어가 전혀 안되어 있는 자들의 글이나 댓글을 보면 마치 똥통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마치 똥구덩이가 세월이 지나면, 똥으로 가득차듯”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정한 사람은 구제불능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였다.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그들이 육체와 정신은 의존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가 소멸되면 정신도 소멸되어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반대로 저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함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퇴전시키게 한 과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만 많아 교만하여 잘난체하여 토론을 즐기며 수행자를 욕보이게 한 과보 역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 그들이 가야 할 곳이란 정해져 있다. 아빤나까경(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M60)에 따르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은 허구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경에서 ‘논파 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처럼 단멸견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고 하였다.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수행자를 괴롭히는 단멸견을 가진 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bbe samaggā hutvāna abhinibbijjayātha naṃ,
Kāraṇḍavaṃ1 niddhamatha kasambuṃ cāpakassatha.
그대들은 모두 화합해서 그러한 사람을 물리치고
쌀겨처럼 그를 키질하여 쓰레기처럼 날려버려라.
All of you get together and dispel him,
Turn out the impure, throw out the rubbish
2012-07-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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