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한다고? 선발의 용어선점과 후발의 용어창작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26. 15:48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한다고?  선발의 용어선점과 후발의 용어창작

 

 

 

수행승들이여” vs “비구들이여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면 용어에 대하여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주로 빠알리 니까야 번역본에서 발견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 니까야 번역본이 존재한다. 하나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이하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 번역물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전연구원(이하 초불)의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의 번역물이다. 그런데 이 두 번역물을 비교해 보면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이 용어이다.  

 

빠알리 니까야 번역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이다. 성전협회의 경우 수행승들이여라고 부르고, 초불의 경우 비구들이여라고 부른다. 이는 빠알리어 빅카웨(bhikkhave)’를 서로 달리 번역한 결과이다.  

 

빠알리어 빅카웨는 비구들을 부르는 소리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초불의 번역어가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부처님의 제자라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비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비구들 뿐만 아니라 비구니 들도 있다. 그럴 경우 비구들이여하는 것은 맞지 않다. 또 부처님의 제자들은 출가자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라고 볼 수 있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한다면 모두 부처님의 제자라 볼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수행승들이여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더 욕심을 낸다면 수행자들이여라고 번역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또 하나 말 할 수 있는 것은 비구들이여하였을 때 이는 한역경전과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한역경전에서도 비구들이여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알리 니까야 번역물에서도 비구들이여라는 말을 보면 한역경전을 읽는 듯한 착각이 들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도 만족  시키고 또한 한역경전과 차별을 시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빅카웨(bhikkhave)라 하였을까

 

 

일본학자 미즈노 고오겐의 빨리어 문법(연기사)’에 따르면 빅카웨라는 용어는 정확한 빠알리어가 아니라고 한다. 빠알리어로  빅카워(bhikkhavo)’라고 표현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빠알리 니까야에서 빅카웨(bhikkhave)’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미즈노 고오겐은 성전이 서방어(빠알리어)로 옮겨 옮겨짐에 임해서도 그 옛날 석존을 사모해 이들 용어만큼은 옛날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은 아닐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빠알리니까야에서 비구들을 부르는 호칭은 예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빅카웨(bhikkhave)와 빅카워(bhikkhavo)가 문법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빅카웨(bhikkhave)를 고수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향수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독특하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민중어로 설법하였다고 한다. 지배층인 브라만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어인 마가다어로 설법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접하게 하자는 취지 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인도로 확산 되어 가자 부처님은 그 지방 토착어로 설법할 것을 권유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지방어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빠알리어도 그런 지방어의 일종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그 지방 언어를 이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자신의 가르침이 전파 되기를 바라셨다고 볼 수 있다.

 

번역은 스님들의 전유물일까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번역을 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춘 자라면 누가 번역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불교경전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경전 번역은 스님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스님들이 번역을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중국에 불교가 들어 왔을 때 이를 번역한 사람들이 구마라집과 같은 서역승들이었다. 이후 현장과 같은 중국 스님들이 인도로 직접 유학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하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한자문화권에서 경전 번역은 스님들의 몫이었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초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역경이 시작 되었다. 한역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운허스님과 같은 스님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한역 대승불교 경전의 번역자가 스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경전 번역은 스님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번역은 스님들의 몫으로 알고 있느 가운데 빠알리 니까야만큼은 다르다. 이는 스님이 아닌 재가자가 최초로 번역 하였기 때문이다. 자료에 따르면 최봉수박사가 율장 중 마하왁가를 1998년에 번역한 것이 최초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최초 번역자는 전재성박사이다. 1999년에 상윳따니까야 완역판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후 맛지마 니까야(전재성박사), 디가니까야(각묵스님), 앙굿따라니까야(대림스님) 순으로 차례로 번역되었다.

 

특히 전재성박사는 혼자의 힘으로 사부니까야를 모두 번역하였는데, 이는 세계최초의 일이라 한다. 이외에도 전재성 박사는 숫따니빠따, 법구경 등 소부라 불리우는 쿳다까니까야의 번역물도 다수 내 놓았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박사는 오부니까야 번역에 모두 관여한 셈이다.

 

선발주자의 번역용어 선점

 

현재 시중에는 전재성박사의 빠알리성전협회 번역물과 대림-각묵스님의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물이 팔리고 있다. 어는 번역물이 좋은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는 개인적인 취향하고도 관련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재성 박사의 번역물은 문장이 유려하고, 대림-각묵스님의 번역물은 약간 투박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원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 일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투박한 번역은 원어의 뜻을 잘 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거의 매일 니까야 번역물을 접한다. 그러다 보니  두 개의 번역물에 대한 장단점이 드러나 보인다. 특히 용어사용에 있어서 그렇다.

 

우리나라 최초로 니까야를 번역한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을 보면 빠알리 용어를 우리말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가급적 우리말로 아름답게 부담없이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좋은 번역어를 선점하였다고 보여진다.

 

선발주자와 차별화 하려다 보니

 

반면 후발주자인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용어 선택에 있어서 역시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선발주자인 전재성 박사의 번역 용어를 어떻게 피해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보여 진다. 다음과 같은 비교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먼저 부처님의 호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호칭 번역비교표

No

부처님 호칭

한역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초기불전연구원

(대림-각묵스님)

1

아라한

(Arahan)

應供

거룩한 님

아라한

2

삼마삼붓다

(Samma-­Sambuddha)

正遍知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바르게 깨달으신 분

3

윗자짜라나삼판나

(Vijja-carana-sampanna)

明行足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영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

4

수가따(Sugata)

善逝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피안으로 잘 가신 분

5

로까위두

(Lokavidu)

世間解

세상을 아는 님

세상을 잘 아는 분

6

아눗따라

(Anuttara)

無上士

위없이 높으신 님

가장 높으신 분

7

뿌리사담마사라티

(Purisadammasarathi)

調御丈夫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

8

삿타데와마눗사남

(Sattha devamanussanam)

天人師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신과 인간의 스승

9

붓다

(Buddha)

깨달은 님

부처님

10

바가와

(Bhagava)

世尊

세상에 존귀하신 님

세존

 

 

 

 

이 두 번역어를 보면 번역어 선택에 있어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전부 우리말 번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대림-각묵스님의 번역어의 경우 전재성박사의 박사의 번역어와 일치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단 로까위두 번역에서 세상을 아는 님에 대하여 세상을 잘 아는 님이라고 글자 하나가 다를 뿐이다.

 

또 하나 대림-각묵스님의 용어 선택을 보면 한글과 빠알리어어와 한자어를 혼용하였을 알 수 있다. 아라한은 빠알리어, 세존은 한자어 그대로이다. 이는 후발주자가 선발주자와 차별화 하려다 보니 3개 국어가 공존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를 오온의 번역어에서도 볼 수 있다.

 

존재의 다발 vs 무더기

 

초기불교 용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오온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하여 양번역자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오온호칭 번역비교표

No

오온

한역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박사)

초기불전연구원

(대림-각묵스님)

1

(kkhandha)

존재의 다발

무더기

2

(rūpa)

물질

물질

3

(vedanā)

감수

느낌

4

(saññā)

지각

인식

5

(sakhārā)

형성

상카라들

6

(viññāa)

의식

알음알이

 

 

오온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존재의 다발이라고 풀이 하였다. 이에 반하여 대림-각묵스님은 무더기라고 표현 하였다. 이는 번역어 따라 풍기는 뉘앙스가 다르다. 존재의 다발은 실체라고 믿는 것을 쪼개 보아야 실체란 없음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으로 보이고, 무더기는 칸다나 온의 용어 그 자체를 풀이한 듯이 보여진다.

 

전재성 박사가 존재의 다발이라고 쓴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붓다고사는 칸다를 더미(rasi)로 보았다. 그러나 칸다는 어깨의 근육처럼 다발로 뭉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단순히 더미라는 말은 긴밀한 연기적인 의존관계를 반영하기에는 통일성이 없는 개별적인 부품처럼 인식 될 수 있다. 역자는 그래서 다발이라는 말을 쓴다. 물질은 물질의 다발이고 정신은 정신의 다발이다. 그들은 상호 연관적으로 작용한다. 정신-신체적 복합체를 표현하는 칸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존재의 다발인 것이다.

 

(전재성박사,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이렇게 온(칸다)에 대한 용어 선택이 다름을 알 수 있으나 색수상행식에 있어서 용어 사용은 극명하게 갈린다. 전재성박사는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한자 용어를 사용하여 일관성을 보였다. 이는 용어의 선점으로 보인다. 반면 후발주자인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선발주자와 차별화 하다 보니 한자용어, 순수한글용어, 빠알리 용어가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알음알이는 무슨 뜻일까

 

이렇게 선발주자에 대한 후발주자의 차별화 전략은 용어 사용에 있어서 무리를 범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알음알이를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알음알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의미가 명확하지 않는 것이다. 알음알이에 대한 국어사전식 표현을 빌리면 서로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어려운 일을 잘 피하는 꾀바른 수단또는 늘어나는 재주나 슬기로 표현 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마음과 관련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알음알이는 선가에 사용되는 용어라 한다.  좋은 예가 사찰 주련에 있는 이 문을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피우지 말라라는 문구 일 것이다. 이처럼 알음알이는 선가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와 같이 선가에서나 사용하는 용어를 윈냐나()의 번역어로 사용하다 보니 뜻이 잘 다가 오지 않는 것이다. 반면 전재성 박사는 의식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용어의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만일 초불에서 알음알이 대신 의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면 이는 모방했다는 비판을 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염려해서 일까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알음알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알음알이는 선가의 스님들은 잘 알지 몰라도 일반 재가불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생소한 용어이다.

 

이처럼 선발주자의 용어를 피해 가다 보니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에 대하여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후발주자에게 큰 불이익이라 여겨진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이렇게 빠알리 니까야에 대한 번역어가 서로 다른 것은 선발주자에 대한 후발주자의 차별화 시도가 일차적 요인이고, 다음으로 출가자의 입장에서 번역어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생소해 보인다는 것이다. ‘알음알이(윈냐나)’잡도리하다(마나시까라)’가 대표적인 예이다.

 

알음알이잡도리하다라는 말은 모두 선가에 사용되는 말이다. 또 하나 선가에서 사용되는 말을 이용하여 만든 말이 있다. 그것은 마음챙김이다.

 

몇 년전 법보신문에서 사띠용어 논쟁이 있었다. 빠알리어 사띠(sati)를 우리말로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번역어가 정확한 것에 대한 논쟁이다. 크게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갈려져 토론이 진행 되었는데, 이에 수 많은 학자와 스님들이 참여 하여 각자 생각하는 바를 지면으로 통하여 알려 주었다.

 

사띠논쟁에 불을 당긴 것은 인경스님이었다. 사띠에 대한 번역어 마음챙김은 선가에서나 사용되는 잘못된 용어라고 주장하였다. 마음은 챙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발제자는 '마음챙김'이라는 역어를 바탕으로하여 '챙김'이라는 역어를 선호하는 편인데 사띠는 아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법이며 특히 청정도론 주석서 『빠라맛타만주사』에 나타나는 "사띠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aapana)*을 특징으로 한다"는 말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사띠를 표현하자면 '마음이 대상(명상주제)을 간단없이 챙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간화선을 표방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화두를 챙긴다. 화두를 잡도리한다"는 말이야말로 사띠의 의미를 가장 멋지게 담아낸 술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각묵스님, (산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구마라즙의 4 현장의 9 <1-3>. 불기 2546(2002)년 동안거, 실 상 사 화 림 원)

 

相(산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각묵스님.docx

 

 

 

각묵스님이 2002년 실상사에서 마음챙김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스님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선가의 화두챙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화두를 챙긴다. 화두를 잡도리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챙긴다” “잡도리한다라는 말은 선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라 한다. 모두 화두와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가에서 화두 참구하는 것이 가장 큰 일과이기 때문에 챙긴다” “잡도리한다라는 말은 당연한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선가를 벗어나 일상에서 그와 같은 말은 매우 생소하다. 더구나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사전을 따로 찾아 보아야 할 정도이다.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런데 선가에서나 사용되는 용어를 니까야 번역에 사용하였다는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선가에서는 아는 용어이지만 일반불자들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잡도리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대체 잡도리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대림스님이 번역한  앙굿따라니까야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남자는 안으로 남자의 기능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남자의 행위와 남자의 외관과 남자의 자만과 남자의 의욕과 남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장식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속박 경(A7:48), 대림스님역, 초기불전연구원)

 

 

경에서 “마음에 잡도리하고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선수행을 하는 스님들 외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이지?”하며 고개를 갸웃하게 할 것임에 틀림 없다. 여기서 잡도리하고라는 말은 빠알리어 마나시까라를 의미하며 주의 깊게 관찰함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선가에서나 사용되는 용어를 빠알리 니까야 번역어로서 사용되다 보니 그 의미가 잘 들어 오지 않는 것이다. “잡도리함” “마음챙김” “알음알이등이 이에 해당된다. 

 

새김을 슬며시 마음챙김으로 바꾸어 버려

 

사띠에 대한 번역어로서 초불에서는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는 새김으로 번역하였다. 같은 용어에 대한 번역이 매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을 보면 일괄적으로 새김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용어 하나만 보아도 누가 번역하였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경을 하나 입수하였다. 그런데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표현 되어 있었다.

 

 

10. 마음챙김의 토대에 대한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꾸루 국의 깜맛싸담마라고 하는 꾸루 족의 마을에 계셨다.

 

2. 그 때에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불렀다.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3. “수행승들이여, 뭇 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네 가지 마음챙김의 토대이다. 네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4.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1)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마음챙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

 

2)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마음챙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느낌에 대해 느낌을 관찰한다.

 

3)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마음챙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4)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고 깊이 마음챙겨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법에 대해 법을 관찰한다.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 맞지마니까야 M10,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의 사띠빳타나경(M10)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염처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의 제목이 마음챙김의 토대에 대한 경이라고 되어 있다. 번역내용은 전재성 박사가 한 것인데, 누군가 옮기는 과정에서 슬며시 제목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찾아 보니 원래의 제목은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제목만 슬며시 바꾼 것만 아니다. 내용도 바꾸어 버렸다. ‘새김이라는 말 대신 모조리 마음챙김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한다고?

 

이는 입력자가 임으로 바꾼 것이다. 저자도 모르는 사이에 용어가 새김에서 마음챙김으로 둔갑한 것이다. 만약 저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매우 실망할 것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새김이라는 말을 쓸만한 이유가 있어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맛지마니까야 해제에서 특별히 사띠 번역어 새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선 역자의 번역과 다른 초기경전의 역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진 번역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싸띠(sati)에 대한 것이다. 최근 위빠사나 수행자들 사이에 이 싸띠를 두고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마음지킴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싸띠는 내용적으로, 마음이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 사유나 숙고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채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고려한다면 싸띠를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몇 가지 모순을 갖는다.

 

첫째, 모든 가르침의 요소들이 마음과 관계되는 것인데 유독 싸띠에만 별도로 원래 없는 마음이라 단어가 부가될 이유가 없다.

 

둘째, 올바른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라는 말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지향하는 올바른 정진과 특히 내용상 구분이 어려워 질 수 있다.

 

셋째,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에서 토대가 되는 명상주제의 하나에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두고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나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지킴이라고 삼중적으로 번역하는 잘못이 발생할 수 있다.

 

넷째, 싸띠라는 빠알리어 자체는 마음은 커녕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뜻도 어원적으로 없다.

 

(전재성박사, 맛지마니까야 해제, 중요한 번역 술어에 대한 설명)

 

 

Mindfulness

 

 

 

전재성 박사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네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중에 세 번째 항을 보면 사념처에서 마음을 대상으로 할 때 마음에 대한 마음의 마음챙김이 될 수 있는 모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사띠라는 말에서 그 어떤 마음에 어원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띠의 뜻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아눗사라띠 아누위딱께띠),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5:3)

 

 

위 문구를 이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띠는 기억과 사유가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고,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재성 박사의 번역물을 누군가 컴퓨터로 입력하는 과정에 있어서 새김을 마음챙김으로 바꾸어 버린 것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행위로 보여 진다.

 

게송(Gatha) 번역을 보면

 

흔히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누구나 우리말로 옮길 수 있지만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경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고 더구나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환희심이 나게 한다며 제2창작이라 볼 수 있다.

 

번역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게송(Gatha)’이라 한다. 운문형식으로 되어 있는 게송은 짧은 문구에 상징적으로 표현 되어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면 번역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경전에서 상당수는 게송으로 되어 있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는 전체가 게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게송번역 능력이 불교경전의 성패를 좌우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로히땃사경(S2.26S)이 있다. 이 경의 말미에 게송이 하나 있는데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에서 애송되고 있는 유명한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한 성전협회와 초불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빠알리어

 

Na kho panāha āvuso, appatvā lokassa anta dukkhassa antakiriya vadāmi. Api cāha āvuso imasmiññeva byāmamatte kalebare sasaññimhi samanake lokañca paññāpemi. Lokasamudayañca lokanirodhañca lokanirodhagāminiñca paipadanti.

 

Gamanena na pattabbo lokassanto kudācana,
Na ca appatvā lokanta
dukkhā atthi pamocana.
Tasmā have lokavidū sumedho lokantagū vusitabrahmacariyo,
Lokassa anta
samītāvi ñatvā nāsisati1 lokamima parañcāti.

 

(Sayuttanikāyo Nānātitthiyavaggo  S2. 3. 6.)

 

 

 

2. 전재성박사 번역

 

 [세존]

그러나 벗이여, 나는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도 괴로움의 끝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벗이여, 나는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가르친다.

 

걸어서는 결코 세계의 끝에 이르지 못하지만

세계의 소멸에 이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남이 있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이는 세계의 끝에 이르고 깨끗한 삶을 성취하여

고요함에 이르러 세계의 끝을 잘 알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사경S2.3.6)

 

 

 

3.각묵스님 번역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사경 S2.26)

 

 

 

 

4.대림스님 번역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걸어서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남도 없다네.

그러므로 세상을 알고 슬기롭고

세상의 끝에 도달했고 청정범행을 완성했고

모든 악을 가라앉힌 자는 이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대림스님, 앙굿따라니까야 로히땃사경  A4:45)

 

 

 

5. 영문 번역

 

“Yet, friend, without reaching the end of the world, I say, there is no ending of un - pleasantness. Yet friend, in this fathom long body, this perceptive form, I appoint the world, its arising, its ceasing and the path leading to its cessation.

 

“The end of the world cannot be reached by traveling.
Yet, without coming to the end of the world,
there's no release from unpleasantness.
Therefore be wise, know the nature of the world.
Lead the holy life to the end of the world.
The appeased, know the end of the world.
And do not wish for, this or the other world.”

 

(Samyutta Nikāya Nānātitthiyavaggo  , Rohita - Rohita the Son of the Gods, S2. 3. 6)

 

  로히땃사경(S2.3.6).docx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전반적으로 부드럽다. 물이 흘러가듯이 번역이 매끄럽다. 그리고 가급적 우리말로 풀어 사용하였다. 더구나 마무리로 “~벗어남이 있네.” “~바라지 않네로 되어 있어 자로 끝나기 때문에  전형적인 운문형식으로 되어 있다.

 

반면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전반적으로 딱딱한 느낌이다. 또 문장이 끝날 때 “~말하지도 않는다.”처럼 자로 끝나 산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선발주자의 용어를 피해 가고자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대림스님의 경우 전반적으로 영문번역과 유사하다. 특히 게송 부분은 거의 같은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용어를 선점한 전재성 박사는 벗이여라고 순수 우리말을 사용하였으나, 용어를 선점당한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도반이여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출가자 출신의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용어 선택에 있어서도 선가의 용어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몸을 몸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 법문할 때 몸을 몸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몸뚱이라 한다. 이제까지 수 많은 법문을 불교방송이나 불교tv 등을 통해서 들어 왔지만 예외 없이 몸을 몸뚱이’ ‘몸뚱아리’ ‘몸띵이등으로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선가에서 말하는 몸뚱이라는 말이 니까야 번역물에 등장하고 더구나 아름다운 게송에 까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번역

 

우리나라에는 현재 두 개의 번역물이 존재한다. 하나는 재가자가 번역한 것이고 또 하나는 출자가가 번역한 것이다. 이는 또 비제도권과 제도권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경우 재자자로서 혼자의 힘으로 산저수전 다 겪으며 어려운 환경속에서 이루어 내었다. 승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주류이자 비제도권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대림-각묵스님의 경우 종단의 지원하에 비교적 좋은 환경 속에서 번역이 이루었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에 있어서 주류이자 제도권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재가자와 출가자, 비제도권과 제도권으로 나누어 보았을 때 재가자이자 비제도권의 경우 여러모로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번역을 훌륭하게 하였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면 얼마 가지 않아 사장될지 모른다. 그러나 제도권에 속해 있다면 같은 번역이라도 오래 갈 수 있다. 그것은 제도권에 속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종단의 스님이나 종단과 관련이 있는 교수가 글을 쓸 때 경전을 인용할 수 있는데, 이때 비구들이여로 시작 되는 번역물을 인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몇 달 지나면 초불에서 맛지마니까야가 출간 된다고 한다. 그런 맛지마니까야는 이미 10년전에 성전협회에서 출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번역물을 또 내 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이렇게 맛지마니까야가 초불에서 출간되면 초불의 경우 4부 니까야를 모두 갖추게 된다. 이는 이미 4부 니까야 완역을 끝낸 성전협회와의 경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니까야가 있다는 것은 한국불교로 보았을 때 매우 좋은 현상이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만일 한 종류의 니까야만 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문체나 용어가 있을지라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 밖에 없는 불교방송에서 듣기 싫어도 들을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왜 최초 번역이 중요한가

 

두 가지 종류의 니까야가 있을 때 스님들은 스님이 번역한 초불 번역물을 선호할 것이다. 이는 스님들의 기호에 맞게 번역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선불교를 지향하는 한국불교에서 선과 관련된 잡도리함” “마음챙김” “알음알이” “몸뚱이등과 같은 용어가 많이 발견 되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그런 용어는 스님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재가불자들은 잡도리함” “마음챙김” “알음알이” “몸뚱이등과 같은 용어는 낯설다. 별도로 국어사전을 찾아 보아야 할 정도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재가불자들에게 성전협회의 전재성 박사의 번역물이 맞을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일등만 기억된다고 한다. 역사상 수 많은 발명이 있었지만 최초 발명자 또는 발견자만 기억 될 뿐 그 이하의 발견자는 잊혀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번역에 있어서도 최초 번역의 의미가 매우 크다. 이는 번역어의 선점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된 전재성 박사의 번역물은 누구나 읽기 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단 내용은 심오하기 때문에 새기며 읽어야 한다고 전재성 박사는 동국대 정각원 법회에서 말하였다. 이는 번역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 볼 수 있다.

 

반면 후발주자는 번역에 있어서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특히 용어선택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용어가 많이 보인다. 심지어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승가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를 많이 채용하였기 때문에 승가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읽기에 부담 없고 환희심을 일으키는 번역물

 

이렇게 구분해 본 것은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출가자라도 초불번역스타일 보다 성전협회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재가자의 경우 그 반대 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번역물이 좋은 것인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읽기에 부담 없고 환희심을 일으키는 번역물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

 

 

2012-07-26

진흙속의연꽃

 

로히땃사경(S2.3.6).docx
0.04MB
相(산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각묵스님.docx
0.0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