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단멸론자들의 바이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21. 16:13

 

 

단멸론자들의 바이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대승불교에 속고, 초기불교에도 속았다고

 

몇 년전 댓글을 열심히 주시던 법우님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법우님은 태도가 돌변하였다. 댓글에 기독교로 개종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속고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처음 불교에 입문했을 때 대승불교를 접하였는데, 대승불교가 최고 인줄 알았었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염불도 하고, 108배도 하고, 주력수행 등 열심히 기도 하였는데,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 동안 속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초기불교에도 속았다고 한다. 그래서 개종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의 바이블

 

그렇다면 그 법우는 왜 개종하기로 마음 먹었을까. 그것은 어느 공부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부터라고 한다.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법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것은 K모라는 사람이 이끄는 공부모임이었는데, 교재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이하 깨공이라 칭함)”라는 책이라 하였다.

 

깨공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현재 단멸론자들의 바이블과도 같다. 단멸론자들이 믿고 의지 하는 책이 바로 깨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멸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에 들어 가 보면 깨공에 써진 내용을 위주로 논리가 전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멸론자들이 불교경전 보다 더 소중이 여기는 깨공은 어떤 책일까.

 

인터넷에 소개된 깨공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도연기법을 올바르게 배우다!

수도산 봉은사에서 안거 중인 훤일 규암 스님의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을 중생에게 가르치고자 설하신 최초의 수행법인 '중도연기법'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중도연기법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 책은 오직 현세의 구복이나 내세의 발복만을 염원하는 우리에게 중도연기법의 이해와 수행에 대한 중요성을 생생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특히 중도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함으로써 고해의 바다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이끈다.

 

(책소개,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민족사, 2009 3월 발간)

 

 

 

 

 

깨공은 읽어 보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인터넷을 통하여 볼 수 있었는데 불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해석한 것으로 책이 출간 된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책의 저자 훤일 규암스님

 

이 책을 쓴 이는 훤일 규암스님이라 한다. 훤일 규암스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다.

 

 

저자 훤일 규암

1987
년 사미계 수지. 1990년 비구계 수지. 해인사강원 대교과 졸업.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제방선원 및 백담사 무문관 6년 정진. 현재 수도산 봉은사 안거.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한 인터넷 카페 “부처님말씀 바로알기 모임(
http://cafe.daum.net/realbuddhism)” 운영중.

(책소개,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민족사, 2009 3월 발간)

 

 

저자 훤일 규암 스님은 1987년 사미계를 수지 하고, 1900년 비구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스님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으나 더 이상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카페 단멸론자가 본 불교

 

그 대신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기위한 인터넷 카페이 있다는 것을 소개 하고 있다. 그 카페로 들어가 보니 놀랍게도 단멸론자가 본 불교(http://cafe.daum.net/realbuddhism)”라는 타이틀의 카페이름이 나온다. 이 카페의 공지사항을 보면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다음과 같은 공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본 카페는 오프라인 모임을 바탕으로, 기존의 불교와는 다른 견해(단멸론)을 얘기하기 위해서 개설되었습니다.

 

(단멸론자가 불교’ 카페)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단멸론이 인터넷 시대에 버젓이 논의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삿된 견해인 단멸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카페가 만들어 졌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깨공의 내용이 마치 바이블처럼 간주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런 면으로 본다면 훤일 규암스님이 지었다는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라는 책은 단멸론임에 틀림 없다. 어떻게 그런 책이 불서를 전문으로 보급하는 민족사에서 간행 되었는지 의문이다.

 

단멸론자를 양성하는 오프라인 공부모임

 

깨공이 출간 된 것은 2009년이다. 이 무렵에 부처님 말씀 바로 알기라는 오프라인 모임이 생겨 났는데, 그 리더가 OO’라 한다. 그 김OO는 깨공의 감수를 맡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오프라인 모임에서 깨공을 공부하면서 일부가 인터넷에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 하였는데, 그 중의 한명이 앞서 언급한 개종 운운한 법우이다.

 

깨공으로 공부한 이들이 인터넷에서 활동하면서 주장한 내용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단멸론이다. 어느 단멸론자가 남긴 글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헌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면 육체와 정신의 상호의존, 조건지어짐을 납득하고, 그것의 조건지음이 허물어지면 인식의 발생토대가 사라져버린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현생에서 이미 []라고 할만한 것이 색수상행식 어디에도 없음을 현실에서 확인하고 평온한 삶을 산다따라서 생명기능이 허물어질때도, 죽음앞에서 []가 죽는구나 하고 두려움과 슬픔에 떨지 않는다...부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유물단멸론자들과 부처님의 연기법을 바르게 이해하고 수행하는 제자들의 차이점은 현생에서 현실에서 드러나는 법을 어떻게 확인하고 살고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몸과 정신이 따로따로 죽는게 아니고 몸과 정신의 조건지음이 허물어지면 생명기능이 끝나는 겁니다.   몸과 정신의 조건지음이 허물어질때 []라는 인식이야  당연히 발생의 토대가 사라졌으니 끝나죠.

 

(단멸론자 M)

 

 

이 글에서 핵심은 몸과 정신이 따로따로 죽는게 아니고 몸과 정신의 조건지음이 허물어지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한다는데

 

포인트는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은 항상 육체에 기반을 두면서 정신과의 의존관계에 역점을 둔다. 그리고 초기경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고 수()가 다해 마치면
곧 현재 세계에서 일체의 감각이 다 그쳐 쉬게 된다
.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늘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

(身壞命終 壽已畢訖
即於現世一切所覺 便盡 止息
當知至竟16)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2.

만약 저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수상행식]이 종말을 고하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若彼終後

即於爾時一切永滅

無餘 永滅

[잡아함 969. 장조경(長爪經)]

 

 

3.

그는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고,
육체적인 요소들[시체]만 남게 될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철저한 검증 경」(S12:51)]

 

 

단멸론자들은 주로 아함경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깨공도 마찬가지이다. 빠알리 니까야가 아니라 아함경을 인용하는 경우는 이들의 구미에 맞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위의 세가지 예가 대표적이다. 모두 공통된 특징은 육체와 정신에 대한 것이다.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도 사라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終後)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그러나 이는 초기경전을 왜곡한 것이다. 경을 거두절미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경을 읽어 보면 이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아라한선언이 있었다. 아라한이 된 자만이 적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라고 하여 영속론도 배제하였지만 단멸론도 배제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라한이 죽어서 열반으로 든다는 것에 대하여 단멸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하는 것이 연기법이라고?

 

그렇다면 단멸론자들은 왜 육체와 정신의 상호의존을 말하면서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할까. 이는 깨공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 보여 진다.

 

 

12연기법 중 3번째 4번째에 위치한 식과 명색의 관계에서도 기존의 불교 교리에서는 ‘식’을 재생연결식, 혹은 전생의 업식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 )

 

 

연기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에 있어서 나름대로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것은 ()’에 대한 것이다. 식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의지처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과 명색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다름아닌 육체와 정신을 뜻한다. 육체와 정신이 없는 것은 존재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 하여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를 연기법이라 하였다. 과연 이 말은 맞는 것일까.

 

니까야에서 연기법의 정형구를 보면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연기법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 Venerable Kacchānagotta,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깟짜나곳따경(S12.1.2.5).docx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법의 정형구이다. 이런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 정형구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조건(paccaya,)’이다. 무엇을 조건으로 무엇이 생겨나고 할 때 의 조건을 말한다. 따라서 의식 또한 조건의 산물이다. 그래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생겨나며라고 말씀 하셨다. 그 어디에도 의식과 명색이 함께 붙어 있는 경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공에서는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라고 하면서 십이연기에 있어서 세번째 단계로 표현되는 의식()을 애써 부정하고 있다.

 

십이연기조차 서슴없이 왜곡하는 깨공

 

깨공에서 십이연기법에 대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부처님은 조건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명색은 의식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 아니면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명색은 의식을 조건으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의식은 형성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 아니면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의식은 형성을 조건으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이와 같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마하딴하상카야경(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docx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십이연기에 대하여 역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식과 명색에 관하여 부처님은 분명하게 조건지워져 발생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깨공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의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한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단멸론자들은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해야만 단멸론의 정당성을 확보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십이연기조차 서슴없이 왜곡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단멸론자들의 주장대로 연기가 조건이 아닌 상호의존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의존을 키워드로 하여 상윳따니까야를 검색하여 보았다. 그 어디에서도 연기법에 있어서 의존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육체가 없으면 정신이 없다로 둔갑

 

그런데 상호의존을 키워드로 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전재성박사의 다음과 같은 연기에 대한 해제글이다.

 

 

여기서 우리가 좀더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감각영역은 정신()과 사물()의 관계이다. 다른 것들은 예를 들어 시각능력()과 시각대상()이 시각영역(眼入)의 통일장 속에 상호의존적 관계로 있는 것처럼 주어져 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는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의 관계에 있다. 물론 정신()과 사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신과 사물의 상호의존성을 파기하는 듯한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심위법본(心爲法本)의 사상이 있다.

 

"사물들은 정신에 의해 선행되고 정신에 의해 이끌어지며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여기서 분명히 사물과 정신은 상호의존적 수반관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정신을 조건으로 사물이 성립한다는 일방적 인과관계로만 주어지고 있으나 결코 상호의존적인 수반관계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의식()과 존재의 다발(名色 또는 五蘊)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전재성박사, 한글상윳따니까야 제 6권 해제)

 

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전재성 박사가 연기에 대한 상윳따를 해제하는 글에서 연기의 상호의존에 대하여 이야기한 내용이다.

 

 

연기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문구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문구이다. 이는 한자어로 약무차즉무피(若無此卽無彼)’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의 연기는 상호의존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가 조건 발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문구는 단멸론에 악용될 소지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단멸론자들은 이 문구를 악용하고 있다. 그것이 육체와 정신의 관계이다. 그래서 육체가 없으면 정신이 없다라고 하여 단멸론을 정당화 하는 것이다.

 

연기의 상호의존성을 파기하는 게송

 

그러나 이런 상호의존성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에 대한 예가 법구경 1번 게송이라는 것이다. 법구경 1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Manopubbagamā dhammā          마노뿝방가마 담마

manoseṭṭhā manomayā;              마노셋타 마노마야

Manasā ce paduṭṭhena,             마나사 쩻 빠둣테나

bhāsati vā karoti vā;            바사띠 와 까로띠 와

Tato na dukkhamanveti,         따또 낭 둑카만웨띠

cakkava vahato pada.          짝깡와 와하또 빠당

 

마음이 모든 법을 앞서가고

마음이 모든 법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의해서 온갖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담마빠다 , Dhp1, 거해스님역)

 

담마빠다전문(빠알리-영어-한글).hwp

 

 

 

법구경 1번 게송을 보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연기의 상호의존성을 파기하고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앞서 간다고 표현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마음은 마노(mano)를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 의()로 해석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심, , 식을 혼용하여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노를 일반적으로 마음이라 한다.

 

이렇게 마음이 앞서 가고 그 다음 법이 일어남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법구경 1번 게송이다. 그래서 이를 오온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뒤이어 법이 일어나는데, 이때 일어나는 법이 수상행으로서 마음부수 또는 마음의 작용이라 한다. 마음과 마음부수의 관계인 것이다. 이는 순차적이라기 보다 거의 동시발생적으로 본다. 다만 마음이 더 앞서 가는 것으로 표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의도가 있으면 뒤이어 행위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연기는 조건발생적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연기는 상호의존 관계라기 보다 조건발생에 더 가깝다. 그래서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명색은 의식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 아니면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전재성 박사는 이와 같이 조건발생하는 연기에 대하여 이어지는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형화된 연기에서 의식은 존재의 다발에 선행하며 의식을 조건으로 존재의 다발이 생성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은 독립된 실체로서의 순수의식이 아니라 형성()을 조건으로 하고 그것을 수반하는 의식인 것이다.

 

제식연기(齊識緣起)에서 주어지는 존재의 다발에 의한 의식의 생성이라는 역인과관계에서도 의식은 최소한 다른 존재의 다발과의 수반적인 지위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경전에서는 내적인 정신과 외적인 사물의 통일장에 수반되는 의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내적인 정신이 괴멸되지 않고 외적인 사물이 그 영역으로 들어와서 합당한 결합이 있게 되면 그때 합당한 의식의 요소가 나타난다."

 

물론 이와 같은 인과관계는 내적인 감각능력과 외적인 감각대상의 전반에 걸쳐 동일하게 서술되고 있다. 이것은 내적 감각능력과 외적 감각대상을 조건으로 감각적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다 상세히 서술한 것인데, 역동적인 감각영역의 장()의 성립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신()을 포함하는 감각능력이 존재론적으로 우선하고 거기에 사물()을 포함하는 외적 감각대상이 수반하여 결합(samannahara)이 있게 되면 그에 합당한 의식의 요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결합이라고 번역된 samannahara는 주의(注意)란 뜻으로 잘 알려진 것으로, 의식의 요소가 나타나기 이전에 의식의 수반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3요소들이 갖추어지면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구체적인 의식의 요소들이 나타나 나머지 요소를 수반하는 상태가 역동적인 감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물()들이 정신에 의해 선행되고 이끌어지고 만들어진다는 의미는 감각영역의 장 속에서는 사물()에 대한 정신의 선행성이나 수반적 관계는 보장될 수 있으나 '만들어진다' 는 생성관계는 보장될 수 없다.

 

이 문제는 초기불교에서 정신()과 마음(), 의식()이 구별 없이 사용되었던 것에 초점을 맞추어 정형화된 연기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리적 요소(名色)가 생겨난다' 는 보다 근본적인 미시적 인과관계로 환원시킬 때에만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감각영역이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대상과 의식을 수반하는 역동적인 활동의 장인 것을 살펴보았다.

 

(전재성박사, 한글상윳따니까야 제 6권 해제)

 

 

전박사에 따르면 모든 영역에 있어서 마음이 앞서 간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라 한다. 의도가 있음으로 인해서 이어지는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처에서 경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경행을 할 때

 

경행을 할 때 발을 들어 올리려 할 때 먼저 들어 올리려는 의도가 있다. 이렇게 경행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려는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이를 빠알리어로 나마루빠 빠리체다 냐나 (nāmarūpa-pariccheda-ñāa)’라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16단계 지혜중 가장 첫번째로 개발 되어야 할 지혜이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면 다음 단계는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를 개발하게 된다. 이를 빠알리어로 빳자야 빠릿가냐나(paccaya pariggha ñāna)’라 한다. 이 두번째 지혜는 원인과 결과 즉, 연기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체득하는 지혜를 말한다.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는 초기불교 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수행처에서 경행 등으로 체득하게 한다.

 

하지만 단멸론자들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무시한다. 대신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한다고 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다라는 연기를 들어 합리화 시킨다. 그러다 보니 인과가 부정되기 일쑤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없으니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가 개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사성제와 사념처 수행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하다.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감각적 영역에 있어서 마음이 앞서 가는 것에 대하여 오온에서 색 즉, 사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보장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시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연기법은 철저하게 조건발생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 있어서 삼세양중인과로 보았을 때 재생연결식이 가능한 것이다.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단멸론자들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만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한면만 보고 다른 면은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근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법을 설하기도 하였다. 이를 비방편설, 또는 비대기설법(nip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으로 대표되는 ‘아비담마(Abhidhamma, 對法, 勝法)’를 들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5, 12, 18, 22, 4성제, 12연기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특정한 사람, 특수계층, 특별난 사람들에게만 법을 설하지 않았다. 자비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방편설이고 대기설법이다. 이렇게 중생들의 근기가 다르다 보니 갖가지 대기설법이 펼쳐 졌는데, 팔만사천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는 중생들의 근기가 팔만사천가지나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부처님은 근기가 다른 이들에게 알아 들을 수 있게 법을 설하다 보니 니까야에 천신이나 목신, 지옥과 천상, 신통, 윤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수 없이 등장한다. 이는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이다. 가르침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항상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 가르침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받아 들일 수 있다. 삼보에 대한 믿음 없이 단지 자신의 육감에 따른 깜냥으로 판단하거나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천신, 지옥, 천상, 신통, 윤회 등이 등장하는 경이 모두 후대에 조작 되었다고 오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멸론자들은 왜 윤회와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경끼를 일으키나

 

삼보에 대한 믿음 없이 법을 회의적으로 보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윤회와 이에 관련된 재생연결식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육체와 정신을 상호의존적으로 보는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육체가 무너지면 정신 또한 사라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윤회는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해서도 안된다. 더구나 윤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생연결식에 대해서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이다. 이는 모두 육체와 정신을 상호의존으로 보기 때문이다.

 

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하고 있는 아하라경(자양분경, S12.2.1)

 

하지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를 알게 된다면 십이연기는 윤회와 재생연결식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된다. 그런 예를 빠알리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하고 있는다는 다음과 같은 경이 대표적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음식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아하라경-Ahara Sutta- Nutriment-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12.2.1, 전재성님역)

 

  아하라경-자양분경.docx

 

 

 

아하라경(자양분경)은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고 있다. 내용에서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이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는 삼바웨시낭 삼바웨신(sambhavesīna-sambhavesin)’이다.  이에 대한 뜻풀이는 구생자(求生者)’라는 뜻이고, 영어로 ‘one who is seeking birt’h’번역된다.

 

의식의 자양분과 재생연결식

 

여기서 부처님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중 네 번째가 의식의 자양분 (viññāa catuttha, 윈냐낭 쭈뚯땅)’ 이라 하였다. 이 용어와 관련하여 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식의 자양분 즉 식식(識食)’은 죽을 때의 마음에 대한 것이라 한다. , ‘수태의식을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며 무엇을 원천으로 하는가?

 

명색은 의식을 원인으로 하고 의식을 근거로 하며 의식을 원천으로 한다.

 

(아하라경-Ahara Sutta- Nutriment-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12.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명색이 의식을 근거로 일어난다고 하였다. 깨공에서 말하는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라는 주장과 다른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명백히 재생연결식으로 십이연기를 설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기를 상호의존 관계로 보면 절대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주석서가 쓰여 졌는데, 그 중에 청정도론이 있다.

 

청정도론에서 재생연결식에 대한 설명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십이연기와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그 중 재생연결식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물질이 있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재생연결의 정신 물질이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고 알겠는가?’라고,

 

[답한다.]

경과 추론으로 알 수 있다. 경에

 

“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Dhs.5)

 

라는 방법으로 여러 곳에서 느낌 등이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추론으로는, 마음으로부터 생긴 물질을 봄으로써 보지 않은 물질도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 알 수 있다. 마음이 편안하거나 편안하지 않거나 간에 그것에 적합한 물질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본 것을 통하여 보지 않은 것도 추론하여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여기서 이미 생긴 물질을 봄으로써 보지 않은 재생연결의 물질도 알음알이()를 조건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마음에서 생긴 물질처럼 업에서 생긴 물질도 알음알이가 그 조건이라고 빳타나에서 설하셨다. 이와 같이 조건의 방법으로 판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물질이 있다’라는 구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2연기의 상세한 해설, 202)

 

 

여기서 알음알이는 식()을 말한다. 초불에서 펴낸 모든 번역물에서 윈냐나알음알이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의식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빠알리 윈냐나()을 두고 한편에서는 알음알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의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 장로는 십이연기에 있어서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보았다. 그래야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을 재생연결식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있을까. 그런 점을 염려 했음인지 붓다고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라고 물으면서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설명한다.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Dhs.5)

 

이런 의문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풍조가 있고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모두 허구로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붓다고사는 철저하게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라서 재생연결식을 설명하였다. 즉 부처님이 말씀하신 조건법(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Dhs.5)”라고 하였는데, 이는 법구경 1번 게송 마음이 모든 법을 앞서가고 마음이 모든 법을 지배한다.”는 내용과 일치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경에 걸쳐서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재생연결식은 형성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재생연결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일어 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빳타나(Paṭṭhāna)란 무엇일까

 

이렇게 재생연결식이라는 조건으로 명색이 발생된 것에 대하여  보지는 않았지만 추론으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연기법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은 추론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추론의 근거로서 빳타나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빳타나란 무엇일까. 빳타나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빳타나(Paṭṭhāna)

 

인습적으로 ‘자아’니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인 존재의 인과법과 연기를 다루고 있는 논서로, 아비담마에서 가장 방대하고 중요한 논서이다. 특히 미얀마 아비담마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담마상가니에 나타나는 삼개 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개 조(duka)로 된 100개의 논모 전체에 대해서 24가지 조건(paccaya)을 적용시키고 있는 매우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중요한 날에 이 「뺏타나」를 암송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여러 스님 들이 번갈아가면서 총 80시간 이상을 독송해야 전체를 다 읽어낼 수 있다.한역으로는 발취론(發趣論)이라 한다.

 

(빳타나,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주해서)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빳타나는 조건에 대한 논서이다. 연기법이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일종의 조건에 대한 설명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조건은 총24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구생연(俱生緣, sahajata-paccaya)’이 있다.

 

이 구생연은 앞서 언급된 법구경 1번 게송 ““마음이 모든 법을 앞서가고 마음이 모든 법을 지배한다.”에 적용될 수 있다. 오온에서 마음()과 마음부수(수상행)함께 생긴 조건이라고 설명될 때 구생연이 적용된다. , 구생연은 함께 생긴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건에 대한 것이 모두 24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빳타나 (Paṭṭhāna, 發趣論)’라 한다.

 

법은 현자들이 지혜로 알 수 있는 것

 

이렇게 5세기의 붓다고사는 철저하게 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연기법의 조건과 논장의 빳타나를 이용하여 재생연결식을 설명한 것이다. 이를 볼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믿지 못하겠다든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비록 재생연결식이 범부들의 깜냥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자들의 지혜로는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멸론자들

 

단멸론자들은 매우 단순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훤일스님이 쓰고 김종수가 감수한 깨달음에도 법칙이 있다라는 책에 크게 의존하는 듯이 보인다.

 

특히 금과옥조로 여기는 문구가 ‘식’과 명색은 따로 떼래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이다. ‘식’이 없으면 명색은 존재할 수 없고 명색이 없으면 ‘식’은 성립시킬 수가 없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을 상호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인데, 이는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더구나 육체와 정신이 상호의존하는 것이 연기법이라 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문구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위의 문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에 대하여 이것 대신에 육체를 집어 넣고, 저것 대신에 정신을 집어 넣으면 단멸론자들이 바라는 답이 나온다. ,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육체가 있을 때 정신이 있으며,

육체가 생겨남으로써 정신이 생겨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연기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 하는데 사용된다. 결정적으로 단멸론자들은 위의 연기송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육체가 없을 때 정신도 없으며,

육체가 소멸됨으로서 정신도 소멸된다

 

 

이렇게 완벽하게 단멸론을 설명하는 것이다. 더구나 깨공(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에서도 이런 형태가 연기법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반불교적 작태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반불교적 작태라 아니 할 수 없다. 부처님은 결코 그렇게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문구 다음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그대들이 이처럼 말한다면, 나도 또한 이와 같이 말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근심, 불안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마하딴하상카야경-Mahātanhāsan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박사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십이연기를 설하셨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다음에 이어서 조건으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라고 조건을 들어서 말씀 하신 것이다.

 

하지만 깨공에서는 거두 절미하고 앞의 연기송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만 차용하여 육체와 정신의 상호의존이 연기라고 궤변을 늘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보고 공부한 자들이 모두 단멸론자가 되어 인터넷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만드는 깨공

 

단멸론과 관련하여 깨공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 재세 시 육사외도 스승들이 있었다.
그들 스승들은 미래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만이 다음 생을 예언한다."라는
말을 들은 선니라는 외도 수행자가
의심이 생겨 부처님께 법을 묻게 되었다.

선니의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자아 취착을 끊은 자들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다시는 계속해 태어나지 않는다.

즉 내세는 없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육사외도의 스승들은 상견과 단견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내세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설하셨다.
 
그렇다면 '육사외도 스승 중에
사후 단멸론을 주장하는 외도 스승들과 부처님의
내세에 대한 말씀은 같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하신 단멸론과
외도 스승들이 주장하는 단멸론과는 결코 같지 않다.
 
그 이유는 외도들의 스승은 깨달은 자나 깨닫지 못한 자나
그들이 어디로 가서 태어날지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깨닫지 못한 자들은 내세가 있고,
깨달은 자들에게는 내세가 없다."라고 하셨다.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내생이 있다."라고 하신 것은
어리석은 범부들이 바른 법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자아취착을 끊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생이 있다."라고 하신 것이다.

 

(깨달음에도 공식이 있다 247~249p, 김종수감수, 훤일 지음, 민족사간 )

 

 

선니경에 있는 내용에 대한 것이다. 선니경은 한역아함경이다. 일반적으로 한역하함경은 니까야와 비교하여 부처님 원음과 거리가 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경전의 성립배경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니까야의 경우 제1차 결집이후 비구들에 의하여 구전하여 오다, BC3세기 마우리아 왕조 아소까 대왕 당시 빠알리 삼장이 성립되어 스리랑카에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역아함경의 경우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것이 서역을 거쳐 중국에 이르러 한역되었기 때문에 니까야에서 많이 변질 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니까야와 100% 일치 하는 것이 아니라 60-70 프로 정도 내용이 맞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한역아함경은 여러나라를 거치는 전승과정에서 뜻이 왜곡 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니까야가 한글로 번역되어 온 마당에 소의경전으로 삼기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아함경의 선니경에 부처님이 내세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이 설하신 단멸론~”운운 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오해 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부처님은 단정적인 어투로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정말 내세는 없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말을 하였을까. 그리고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북대 임승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는 현상계를 넘어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불변적 실체로서의 자아라든가 영혼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그러나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경험적 자아 혹은 영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격의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해서는 기꺼이 인정하였고, 사후의 세계에도 그것은 계속된다고 가르쳤다. '지니사경' 에 나타나듯이 붓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들려준다.

 

초기불교 경전에 근거하는 한 붓다는 내세와 윤리를 인정하였다. 윤회를 멈춘 사후의 아라한에 대해서도 생각과 논의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말했을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단정적인 어투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임승택교수, 절대적 소멸 주장에 침묵으로 대처하다, 문 2011-05-24)

 

  절대적 소멸 주장에 침묵으로 대처하다-임승택.docx

 

 

 

임승택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은 단정적인 어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내세는 없다든가 단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죽고나면 그대로 소멸하여 없어지고 만다는 방식의 가르침을 펼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리뿟따와 깟사빠의 담론에서

 

이는 사리뿟따와 깟사빠의 담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존자 깟싸빠여,

여래께서는 사후에도 참으로 존재합니까?"

 

"벗이여,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벗이여,

그러면 여래께서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벗이여,

세존께서는 마찬가지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왜 그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벗이여,

그것은 유익함을 수반하지 않고 청정한 삶으로 이끌지 않으며 싫어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탐욕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며 소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적정을 위한 것이 아니며 초월적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올바로 깨달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열반을 위한 것이 아닌 까닭에 세존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따타가타 빠람마라나경-Tathāgata parammaraasutta - After Death- 사후 침묵한 까닭, 상윳따니까야 S15. 1.12, 전재성님역)

 

  따타가타 빠람마라나경(사후 침묵한 까닭-S15.1.12).docx

 

 

 

이처럼 부처님은 아라한의 사후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존재하지 않다느니, 단멸한다느니 와 같이 단정적으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영원과 단멸을 말하는 것은 극단적 견해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이야말로 조건적 발생이라고 하는 연기의 본질이라고 할 때 연기소생의 연생의 특성은 유와 무로 관찰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유 또는 무라고 하는 개념은 관찰할 수 없는 것으로 극단적인 견해이며 형이상학적 가정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의 토대에는 우빠니샤드적 범아일여의 영원주의와 사후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무()로 귀속시키는 유물론적인 허무주의가 있다.

 

(전재성박사, 한글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

 

 

전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은 조건 발생적으로 보기 때문에 연기의 특성상 있다’ ‘없다이렇게 단정적으로 관찰 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유와 무, 영원과 단멸을 말하는 것은 극단적 견해라 한다. 이는 연기법에 맞지 않는 것이다.

 

영원론과 단멸론이 연기법으로 논파된 실례

 

그래서 영원론과 단멸론은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한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면서,

① 앞의 단어로 영원함 등이 없음을

② 뒤의 단어로 단멸 등의 논파를

③ 두 단어를 합쳐서 바른 방법을 밝혔다.

 

앞의 단어로 :

 

빠띳짜라는 단어는 조건의 화합을 가리킨다.

 

생기는 법들은 조건의 화합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그 빠띳짜라는 단어는 영원하다거나, 원인없이 생긴다거나, 신이나 창조주 등 거짓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거나, 지배자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학설 등으로 분류되는 영원함 등이 없음을 보여준다.

 

영원하다거나 원인 없이 생긴다는 견해 등에게 이 조건의 화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뒤의 단어로 :

 

사뭅빠다라는 단어는 법들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조건이 화합할 때 법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멸이라거나 허무하다거나 지금이 없다는 견해가 논파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뭅빠다라는 단어는 단멸이라는 등이 논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법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단멸하고, 허무하고 지음이 없는 견해가 발붙일 수 있겠는가?

 

두 단어를 [합쳐서] :

 

각 조건이 화합하여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전체 단어인 빠띳짜사뭅빠다는 중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가 짓고 그가 경험한다.

그가 짓고 제 3자가 경험한다(S..20)

 

라는 견해를 버린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를 고집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넘어서지 않는다.(M..234)”

 

이와 같이 전체 단어인 빠띳짜사뭅빠다는 바른 방법을 보여준다. 이것이 빠띳짜사뭅빠다라는 단어의 뜻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1-24)

 

 

이것이 청정도론에서 영원론과 단멸론에 대한 논파에 대한 것이다.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법들이 일어날 때 단멸론이 발붙이지 못하고, 조건에 따라 법들이 일어나 상속하기 때문에 영원론 또한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사물의 계속됨을 보면서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또한 사물의 사라짐을 보면서 영원하다고도 말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공에서는 부처님이 내세는 없다든가 단멸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중도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깨공이 중도연기를 설명한 책이라고 서평에 적어 놓았는데,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부처님당시에도 단멸론이 있었다

 

이와 같이 깨공은 경에 대한 왜곡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책을 공부한 이들 역시 경에 대한 왜곡과 교리에 대한 왜곡을 서슴지 않는다. 이렇게 부처님을 가르침을 비틀어 자신들 만의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을 보면 단멸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 의존 관계에 있기 때문에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모두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책을 통해서 배운 단멸론자들의 줄기찬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괴로움이 있을 때 괴로움에 집착하고 괴로움에 탐착하여 이와 같이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천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

 

네가지 위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흙은 흙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죽은 자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곡을 하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재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는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는 견해를 일으킨다."

 

(낫티경-Natthidinna sutta- Nothing- 없음경, 상윳따니까야 S23.1.5, 전재성님역)

 

  낫티경(없음경-S23.1.5).docx

 

 

 

부처님이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의 가르침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아지따는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유명한 유물론자이었다. 그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네가지 원소로 만들어졌으며, 목숨이 다하고 죽으면 땅은 땅의 세계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세계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세계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세계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기관은 허공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유물론자들의 특징은

 

이러한 유물론자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전재성박사는 해제글에서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감각적으로 지각가능한 인상만을 인정한다

둘째,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

 

 

오늘날의 단멸론자들은 유물론자들과 다를 바 없다. 항상 육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오감 즉, 안이비설신의로만 확인 된 것 외에 믿지 않는다. 설령 지구 반대편에 전혀 모르는 종족이 살고 있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 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눈으로, 귀로, 코 등으로 확인 되지 않은 것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단멸론자들에게 있어서 윤회이니, 재생연결식이니, 천신, 천상, 지옥, 신통등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일까 이와 같은 용어만 나오면 이성을 잃듯이 경끼를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범부의 깜냥에 지나지 않는다. 현자의 지혜의 눈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

 

다음으로 유물론자들은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고 하였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문장 검색을 해 보았으나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추론을 해 보았다.

 

여기서 분리된 지각이라는 것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사실은 사실 윤회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때 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결국 원인과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얼굴과 성향이 모두 다르게 태어나는 이유는 과거 전생의 원인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이지만, 단멸론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단지 지금 여기 있느 것 자체만 문제를 삼기 때문에, 왜 서로 얼굴과 성향이 다른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분리된 지각에 물질적 실체성을 부여함으로써 인과성을 부정한다.”라는 문구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

 

유물론자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두 가지만 언급하였지만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유물론자들은 들이 대는 또 하나의 잣대가 있다. 그것은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이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범부들의 깜냥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과학이라는 것이 발전되는 것이고, 지금의 과학과 미래의 과학이 다를진대 그 때마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댄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범부의 깜냥이 아닌 현자의 지혜로 관찰 해야 된다. 그 지혜라는 것이 다름 아닌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다. 모든 것을 연기법으로 관찰하였을 때 모든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청정도론에 기록 되어 있다.

 

깨공을 출판한 민족사와 단멸론을 주장한 조계종 훤일스님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들은 보시의 공덕도 없고, 선악의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어서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도 육체가 파괴되어 죽으면 단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판 단멸론자들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특히 깨공을 읽고 공부한 자들이 그렇다.

 

현대판 단멸론자들은 죽고 나면 남는 것이 없으니 공덕을 지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절대 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또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 사용을 보면 정어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로도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인과를 부정한 결과로 본다.  

 

이렇게 선악에 대한 과보와 인과를 부정하는 자들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라 하여 마치 바이블처럼 떠 받들고 있는 깨공은 민족사에서 간행 되었다. 민족사는 우리나라 불서를 전문적으로 내는 곳이고 더구나 민족사 윤창화 사장은 불교 관련 토론에서 패널로 참석하거나 불교방송 등에 대담으로 출연하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논객이다. 그런 민족사에서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몰아가는 책 깨공을 출판하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 깨공의 저자 훤일스님의 경우 조계종 소속의 승려라고 하는데, 단멸론을 주장하는 책을 지었다는 것은 조계종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단멸론이 우리나라 불교계에 침투 하여 불자들을 커다란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모두에 언급한 어느 법우의 개종이야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단멸론의 확산에 따라 사회기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당 성폭행건수가 2.25

 

지난 주 일요일 저녁 공영방송에서 성폭행에 대한 다큐프로를 보았다. ‘여성범죄와 밤길에 대한 보고서라는 프로이다. 이 프로에서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에 대한 고발이 있었다. 바로 집앞에서 주차하는 여성운전자를 위협하여 차를 빼앗고 성폭행한 후 금품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수법들이다.

 

이렇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납치가 지난 해 79건이고, 성폭행은 2만건이라 한다. 성폭행이 2만건이면 매일 54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당 2.25명에 해당 된다.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에 희생된다는 것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이런 프로를 볼 때 마다 우리나라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에서든지 이와 같은 범죄가 일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특징은 인과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단멸론을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인과를 부정하고 서슴없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인과를 믿고 윤회와 내세를 믿는다면 그와 같은 범죄를 태연히 저지를 수 있을까.

  

단멸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또 하나의 부류는 자살자들이다. 불교TV에서 강연한 정신과 전문의 전현수 박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내생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인생을 원타임(One Time)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윤회를 믿으면 어떤 이점들이 있을까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할 때 불교적 가르침을 주입하여 자살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된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윤회를 믿으면 삶의 이점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열다섯가지로 말한다.

 

 

윤회를 믿으면

 

첫째, 자살을 하지 않는다.

둘째,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셋째, 불교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고 예류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한다.

넷째, 다음생을 준비하게 된다.

다섯째, 불만이 없고 행복해진다.

여섯째, 현재상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째,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한다.

여덟째,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아홉째, 남에게 해를 끼지지 않고 남을 돕는다.

열째, 보시를 열심히 한다.

열한째, 절 운영에 걱정이 없다.

열두째, 불법승 삼보를 믿게 된다.

열세째, 나날이 의미가 있고 새롭게 된다.

열넷째,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게 된다.

열다섯째, 마음이 든든하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불교계

 

우리 사회에 성폭행이라든가 자살자가 해마다 늘어 나는 이유는 종교가 제역할을 하지 않아서라고 본다. 특히 불교계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불교국가와 비교된다.

 

미얀미나 스리랑카, 부탄 등의 불교국가는 나라와 국민들은 가난할지언정 자살율이 현저하게 낮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매우 높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는 나라 일수록 자살율이 낮고 행복지수 또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자살율이 증가하고 성폭행이 시간당 2.25명에 이른다는 것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은 책임도 있을 것이다.

 

 

사람 몸받아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쉽게 자살하거나 악행을 하면 악처로 떨어질 것이 명약관화 하다. 이렇게 악행을 하고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불교적 가치관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반사회적인 단멸론자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육체와 정신은 상호의존하는 것이라 하면서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함께 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을 버젓이 주장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단멸론자들은 반사회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더구나 그런 단멸론의 진원지가 조계종 소속의 휜일스님이고, ‘깨달에도 단계가 있다라는 책을 발간 해 준 곳이 민족사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단멸론은 반사회적이다. 단멸론이 확산되어 죽으면 끝이다라는 삿된견해를 가진 자들이 많어지면 질수록 사랑하는 사람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성폭행등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단멸론으로 인하여 나이 어린 청소년의 자살 등이 급증한다면, 단멸론자들은 최악의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이 인터넷에서 버젓이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불교관이 확립되지 않은 불자들에게 혼란을 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계를 흙탕물로 만들고 반사회적인 단멸론자들은 한마디로  혐오의 대상이다. 마치 계를 어겨서 반승반속인자와 같은 것이다.

 

이들 단멸론자들에 대하여 계를 어긴 자에 대한 청정도론식 표현을 빌린다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1) 단멸론자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 단멸론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 단멸론자들은 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 단멸론자들은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토막과 같다.

(5) 단멸론자들은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 단멸론자들은 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 단멸론자들은 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8) 단멸론자들은 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9) 단멸론자들은 수승한 법을 증득 할 수 없으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 단멸론자들은 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으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 단멸론자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2012-07-21

진흙속의연꽃

 

깟짜나곳따경(S12.1.2.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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