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싫어하는 것과 만났을 때, 원한을 제거 하기 위한 다섯가지 방법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17. 16:11

 

싫어하는 것과 만났을 때, 원한을 제거 하기 위한 다섯가지 방법

 

 

 

 

참고, 참고, 또 참는 수행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해야 할 여섯가지 수행이 육바라밀이다. 이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말한다. 이중 가장 하기 어려운 수행은 무엇일까.

 

육바라밀중에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 있다. 아무리 곤욕을 당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참고 견디는 수행을 말한다. 참고, 참고, 또 참는 수행이 인욕바라밀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절에서는 인욕바라밀 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가장 높다는 절로 12일 순례법회를 간 적이 있다. 법문시간에 주지스님은 절에서 인욕바라밀수행하기가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절에서는 사실 인욕바라밀 하기 위한 조건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로 인욕할 거리를 찾아서 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바라밀수행은 몰라도 인욕바라밀 만큼은 절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부로 만들어 수행한다는 말을 듣고 절이란 곳이 육바라밀수행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심산유곡에 있는 절에서 인욕할 거리를 별로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받게 되는 모욕, 수모 등 갖은 곤욕을 당할 조건이 성립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곤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걸망을 꾸리면 그만일 것이다.

 

이렇게 심산유곡에서 인욕할 거리가 없고 참고 또 참고 또 참는 수행이 없을 경우 어떻게 하고 보낼까. 더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과는 무엇일까.

 

“빈둥빈둥 하는 재미”로 산다고?

 

최근 휴심정에 길희성 교수의 글이 실렸다. 강화도에서 삼도학사를 운영하고 있는 길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있는 강화도에 멋진 사람 한 분이 살고 있다. 무슨 재미로 사냐고 물으면 “빈둥빈둥하는 재미로 산다.”고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고상한 말로는 ‘유유자적’이라고 부른다고 토를 달기도 한다.

 

“무슨 재미로”라는 물음은 따지고 보면 무엇에 마음을 두고, 무슨 가치에 의미를 두고 사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빈둥빈둥 하는 재미”란 어떤 특별한 재미나 의미 같은 것을 추구하는 건 없고 그저 평범하게 일상적 삶 자체를 즐긴다는 말로 이해된다.

 

약간 더 확대 해석하면, 인생이 뭐 별 것 있겠는가, 삶에 무슨 특별한 재미나 큰 의미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일종의 체념 내지 달관이 담긴 듯한 말이기도 하다.

 

(길희성 교수, 사느냐고 묻거든, 휴심정 2012-07-13) 

왜 사느냐고 묻거든.docx

 

 

 

길희성교수는 종교다원주의자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길은 달라도 만나는 곳은 하나라 한다. 마치 산에 올라 갈 때 여러 등산로가 있지만 결국 정상에서 만나는 것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결같이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런 길교수는 기독교신학자이자 동시에 목사이다.

 

유유자적 하며 찾는 것들은

 

길교수는 글에서 “빈둥빈둥하는 재미로 산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강화도의 삼도학사에 모여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빗대어 한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고상하게 말하면 유유자적한다는 말이다.

 

유유자적(悠悠自適)이란 어떤 말 일까. 사전식 표현에 따르면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사는 삶을 말한다. 마치 산속에 사는 도인을 연상시킨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깊은 산중에 사는 스님들 역시 유유자적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세상과 떨어져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상을 보낼까. 이에 대한 해답이 아마도 길희성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절대적 헌신의 대상을 찾았다 해도, 그것이 우리 밖에 타자로 존재하는 한 절대적 헌신은 자칫하면 인간소외를 초래하거나 억압의 기재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 또 어떤 약물이나 심리적 테크닉을 동원해서 평안을 구한다 해도, 혹은 예술적 영감이나 감동에 사로잡힌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영성가들은 육체와 영혼 너머에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실재에 주목한다. 우리로 하여금 좁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탈피하도록 부추기는 우리 내면의 또 다른 자아다.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spirit, pneuma, purusa), 아트만(atman), 내면의 빛(inner light), 속사람, 영혼의 근저, 불성, 진인, 진아, 진심, 도심, 공적영지(空寂靈知), 본연지성(本然之性), 양지(良知), 지성(intellectus), 씨알, 얼나, 나의 나(I-I)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참나(진아) 혹은 참사람(진인)은 나와 너의 차이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되는 개별적 자아나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보편적 자아이며 초월적 자아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혼과 육체의 탈(persona)을 벗도록 부추기며, 나와 너의 구별은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도 넘는 우주적 자아, 신과 인간의 경계마저 무너트리는 신적 자아(divine self)이다.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운 나의 참 자아이며, 나의 영혼의 근저이자 우주만물의 근저/근원/근거/(Grund, ground)이다. 여기서는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 곧 신과의 대면이고 자기 인식이 곧 신의 인식이다. 죄란 초월적 타자로서의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며, 구원이란 인간이 자기 밖의 어떤 높은 존재에 자신을 몽땅 양도하는 인간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자기실현이다

 

내 안에 있는 초월적/내재적 자아에 눈뜸으로 인해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 - , 신성(Gottheit), 브라흐만(Brahman), 초정신(Supermind)과 완벽한 일치(unity) 내지 하나 됨(at-one-ment, union)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의 경지로서 범아일여(梵我一如), 물아일체, 신화(deification), 신인합일, 천인합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경지야말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나와 너,  인간과 우주, 혹은 인간과 신의 분리와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적 평안의 경지다. 어머니의 모태(우주의 어머니)로 회귀하는 것과 같고 고향(우주만물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환향/환본/환원(還源)의 경지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일상적 자아, 온갖 욕망에 사로잡힌 좁은 이기적 자아를 벗어나야만 한다. 좁다란 자아의 해체, 무아, 망아, 탈아, 초탈, 죽음을 통해 참나, 참 생명을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길이다.

 

 

(길희성 교수, 사느냐고 묻거든, 휴심정 2012-07-13)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는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지는 같다고 하였다. 단지 이름만 달리 불리우고 있을 뿐이라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또는 하나님이나 힌두교의 브라흐만이 같고, 또 대승불교에서 찾고자 하는 참나도 같은 것이라 한다.

 

또 이들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spirit, pneuma, purusa), 아트만(atman), 내면의 빛(inner light), 속사람, 영혼의 근저, 불성, 진인, 진아, 진심, 도심, 공적영지(空寂靈知), 본연지성(本然之性), 양지(良知), 지성(intellectus), 씨알, 얼나, 나의 나(I-I) 등 도 이름만 달리 불리우고 있을 뿐이지 사실상 같은 것이라 한다.

 

길희성 교수의 이와 같은 종교관을 보면 결국 힌두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의 다름이 아니다.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나와 너,  인간과 우주, 혹은 인간과 신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길교수는 이에 대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 물아일체, 신화(deification), 신인합일, 천인합일 등으로 표현 하였다.

 

이와 같은 범아일여,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첫째 조건은 조용한 곳이어야 할 것이다. 깊은 산중, 동굴, 외딴 섬 등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적당할 것이다. 왜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깊은 산중에 있는 사찰일지라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게 되면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가게 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기 쉽상이다.

 

이렇게 세상과 철저하게 고립된 곳에서 범아일여, 물아일체, 신인합일, 천인합일의 수행을 하는데, 우리나라 선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평생 걸고 공부 해 볼만 한 것

 

우리나라 불교에서 해마다 두 차례 안거를 시행한다. 안거는 3개월 단위로서 보통 한철을 난다고 한다. 그 한철 동안 무엇을 하는 것일까.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인천 Y선원 S스님은 다음과 같이 법문한다.

 

 

우리는 참선을 하는 것은 참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을 해서 생사해탈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데, 부처를 찾지도 말고 번뇌를 버리지도 말고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다못 자기의 본참 공안 ‘시심마’를 한 분은 ‘이뭐꼬’, 판치생모를 한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꼬’, 무자를 한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앞도 없고 옆도 없고 뒤도 돌아 볼 것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뭐꼬’ 이렇게 잡도리 해 갈 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많은 말이 필요가 없고 많은 경전을 읽을 필요도 없고 직하에 ‘대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하라고 하면 아무 뜻도 몰라도 괜찮아’ 아무 뜻을 모를수록 더욱 좋아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부처될 생각도 말고 번뇌를 버릴려 생각도 말고 무슨 공덕을 쌓을려고 하지도 말고 착할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천치’가 되어서 ‘멍청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하라 하면 ‘이뭐꼬’ 할 뿐인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뭐꼬’  똥을 누면서도 ‘이뭐꼬’ 세수 하면서도 ‘이뭐꼬’ 목욕을 하면서도 ‘이뭐꼬’ 걸어가면서도 ‘이뭐꼬’  앉아서도 ‘이뭐꼬’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건 간에 ‘이뭐꼬’ 알고 모르고도 상관이 없고 되고 안되고도 상관이 없고 번뇌가 일어나고 안일어나고도 상관이 없고 다못 ‘이뭐꼬’ 이렇게만 해갈 따름 입니다.

 

(S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S스님의 알기 쉬운 경전이야기, 2012-05-08일자)

 

 

 S스님은 이뭐꼬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 몽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하며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화두가 폭발하여 견성성불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론으로 따져서도 안되고, 공부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 한다. 마치 바보, 천치, 멍청이 처럼 오로지 일념으로 이뭐꼬 하다 보면 된다고 한다. 그런 공부가 1년이 될지 5년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스님은 이뭐꼬 하는데 있어서 경전을 볼 필요도 없고, 공부를 할 필요도 없고, 공덕을 쌓을려고 하지도 말라고 한다. 오로지 이뭐꼬하며 바보처럼 의심만 하고 있으면 된다고 한다.

 

왜 선사들은 이렇게 산중에서 경전도 보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라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산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수행자에게 간화선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선사는 불교TV에서 이뭐꼬와 같은 간화선 수행은 사나이 대장부가 평생 걸고 공부 해 볼만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일까 선승들은 선방에서 화두 하나 들고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나를 만나기 위하여 10, 20, 30, 평생 공부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화두선은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아 가는 수행자에게 매우 적합한 수행으로 보여 진다.

 

무능력자를 양산하는 시스템

 

이렇게 세상과 인연을 끊고 마치 도교의 신선처럼 깊은 산중에서 아무 교학공부도 하지 않고, 아무 공덕도 쌓지 않고 오로지 이뭐꼬 하나로 10, 20, 30년 을 보내다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상태일까.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의 글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아스님은 불교관련 인터넷신문 기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에서 강원도 안 가고 선방에만 다녔다는 스님들이 미국에 오면 이분들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맨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식이지요.

 

이런 스님을 사찰이나 신도들이 환영할 리가 없지요. 이 스님을 이렇게 무능력자로 만들어 슬프게 하는 근본원인은 “강원 안가도 기초선원만 나오면 구족계 받는다.”는 종단의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입니다. 일생을 참선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소임이나 사찰운영 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참선만을 한다 해도, 배운 사람이 참선하는 것은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기초선원 제도는 없어져야 됩니다.

 

LA 불교의 모습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스님들을 서당식 강원교육에 선교육만 시키니 한탄스럽습니다. 작금의 종교편향으로 불교를 무시하는 현상은 기독교의 훼불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사안일로 일관해온 스님들의 결과입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붓다미디어,  2009 11 27)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일아스님은 한마디로 무능력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선방에서 화두만 들고 세월을 보낸 스님들이 세상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교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니 법문을 할 수 없고, 포교도 할 수 없고 그에 따라 불자들을 지도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행 한국불교의 수행체계는 무능력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를 찾는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처럼 무능력자를 양산 하는 한국불교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깨달음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 자신이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정견인데,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화두를 의심하여 분발하여 본래 나를 찾자는 것이다. 그 본래 나를 보통 참나라 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 참나를 찾자고 말한다. 그런 참나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의 주장과 일치 한다.

 

길교수는 여러 편의 자신의 글에서 참나라는 것이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spirit, pneuma, purusa), 아트만(atman), 내면의 빛(inner light), 속사람, 영혼의 근저, 불성, 진인, 진아, 진심, 도심, 공적영지(空寂靈知), 본연지성(本然之性), 양지(良知), 지성(intellectus), 씨알, 얼나, 나의 나(I-I) 등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선불교에서 나를 찾는 수행은 길교수가 말한 범아일여(梵我一如), 물아일체, 신화(deification), 신인합일, 천인합일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브라만과 아뜨만을 부정하였다. 이렇게 브라만교를 부정하여 성립된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길교수가 말한 하느님의 모상(imago dei), (spirit, pneuma, purusa), 아트만(atman), 내면의 빛(inner light), 속사람, 영혼의 근저, 불성, 진인, 진아, 진심, 도심, 공적영지(空寂靈知), 본연지성(本然之性), 양지(良知), 지성(intellectus), 씨알, 얼나, 나의 나(I-I) 등은 모두 부정된다. 따라서 나를 찾는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단언 할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먼저 고통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야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을까. 부처님은 현실적인 가르침을 펼치셨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며 범아일여, 신인합일,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셨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방법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 속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하여 일부러 인욕할 대상을 찾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인욕할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은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하는 곳이다. 어느 날 훌쩍 걸망 매고 떠나 버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만나기 싫은 자도 만나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욕하게 된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다. 고통을 소멸하려면 고통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12가지로 크게 분류 된다.

 

 

태어남(jāti),

늙음(jarā),

죽음(maraa),

슬픔(soka),

비탄(parideva),

육체적인 고통(dukkha),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절망(upāyāsa),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

 

 

이중 아홉번째인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도 고통 중의 하나인데, 이는 매일 일상에서 부딪치는 것이다. 도망갈래야 도망 갈 수 없고, 피할래야 피 할 수 없는 고통이다. 주로 인간과 인간사이의 접촉에 의하여 일어 나는 고통이다.

 

부처님은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싫어 하는 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질 때 쉽게 반응하는 것이 성냄이다. 싫어 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절대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할 때 일화가 잘 말해 준다.

 

부처님이 보살이었을 때 인욕바라밀행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금강경에 나오는 가리왕 이야기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갈기갈기 찢길 적에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었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옛날에 몸을 찢길 적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더라면 성을 내어 원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청정도론에 여러 개 실려 있다.

 

이처럼 부처님은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았는데, 부처님이 화를 내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탐진치에 찌들여 사는 범부들은 화를 낼 수 밖에 없다. 좋으면 거머 쥘려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보려면 화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을 찾아서

 

그렇다면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특히 싫어 하는 자들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자애수행을 닦을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의 경전의 예를 들고 있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앞서 설한 이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A.iii.186-90)”라는 증지부 다섯의 모음에 있는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āghātapaivinayasutta)’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청정도론, 9장 거룩한 마음가짐 21)

 

 

화를 다스림에 있어서 절복진노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적개심 즉, 성냄을 제거 하기 위하여 다섯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이 다섯가지 방법이 구체적으로 청정도론에 나오지 않고 단지 그런 내용이 경에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그래서 경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먼저 영문판 청정도론에서 위 구절을 찾았다. 검색하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nd in order to make the meaning of this clear the following sutta from the

Book of Fives should be cited in full: “Bhikkhus, there are five ways of dispelling

annoyance whereby annoyance arisen in a bhikkhu can be entirely dispelled”

(A III 186–90).

 

(영문판 청정도론, 냐나몰리 빅쿠, 청정도론, 9 21)

 

 

위문구에서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와 동일한 내용이

 

“Bhikkhus,

there are five ways of dispelling annoyance

whereby annoyance arisen in a bhikkhu can be entirely dispelled”

 

으로 되어 있다.

 

이 번역에서 냐마몰리 빅쿠는 빅쿠스(Bhikkhus, 비구들이여)’라 하였는데, 대림스님은 도반들이여라고 한 것이 다르다. 빠알리어로는 빅카웨 (bhikkhave)’로 되어 있다.

 

이 영문 문장을 이용하여 구글에서 문장검색한 결과 냐나몰리 빅쿠가 지은 PDF자료를 발견하였다. “The Four Sublime States라는 PDF자료이다.

 

이 자료에서 From the Aguttara Nikāya, 5:161 (spoken by the Buddha). Bhikkhus, there are these five ways of removing annoyance, by which annoyance can be ...”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내용을 보니  앙굿따라니까야(Aguttara Nikāya), 5:161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다섯번째 모음 161번 경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A5.161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으면 경을 찾기 쉽다. 그러나 청정도론의 냐나몰리 영문번역판이나 대림스님의 번역판에는 단지 A III 186–90’로 되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PTS 본을 따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A III 186–90’이라는 뜻은 PTS 본에서 앙굿따라니까야 제3 186페이지에 실려 있다는 뜻이다.

 

 A5.161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행한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원함을 제거함 경으로 되어 있다. 청정도론 한국어 번역판은 절복진노경이라고 한문식 이름의 경으로 소개 되어 있다. 빠알리어로 āghātapaivinayasutta’로 되어 있다.

 

이 경에 대하여 빠알리어와 영문판을 찾기 위하여 빠알리 삼장을 서비스하는 THE TIPITAKA사이트에 들어 가 보았다. 사이트에서 초불의 앙굿따라니까야에 원함 품이 제17장인 것을 알고, ‘THE TIPITAKA사이트에서 검색하여 보니 TPS 기준의 VOL3에 다섯모음(Pañcakanipāta)이 있고, 이 안에 17번째 품이 아가따왁고(Āghātavaggo)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따왁고(Āghātavaggo)에 두개의 경이 있는데, 첫번째와 두번째의 경이 First on repression of hurtfulness’와 ‘Second on repression of hurtfulness’ 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원한을 제거 하기 위한 다섯가지 방법

 

절복진노경, 원함을 제거함 경,  First on repression of hurtfulness 로 표현되는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Pahama - āghātapaivinayasutta)에서 부처님은 다섯가지 원함을 제거 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원한을 제거함이 있나니, 어떤 곳에서든 비구에게 일어난 원한을 이것으로 모두 제거해야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2.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3.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연민[]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4.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평온[]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5.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6.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굳게 확립해야 한다.

 

‘이 존자는 업이 바로 그의 주인이고,

그는 업의 상속자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의 권속이고,

업이 그의 의지처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그가 업을 지으면

그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원한을 제거함이 있나니, 어떤 곳에서든 비구에게 일어난 원한을 이것으로 모두 제거해야 한다.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Pahama - āghātapaivinayasutta - First on repression of hurtfulness- 원함을 제거함 경1, 앙굿따라니까야 A5.4.2.1(A5:161), 대림스님역)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원함을 제거함 첫번째 경-A5.4.2.1).docx

 

 

 

Bo Tree

 

 

부처님은 원한이 일어 났을 때 사무량심 즉, 자애(, mettā), 연민(, karuā), 더불어 기뻐함(, muditā), ④ 평온(, upekkhā)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원한 이라는 말은 적개심, 증오, 미워함 등 성내는 마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영문에서는 anger로 표현 하였다.

 

이렇게 원한은 사무량심을  닦아서 제거 해야 하지만, 그래도 증오의 마음이 일어나면 부처님은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항상 반조하라고 하였다. 그 정형구가 경에 표시 되어 있듯이

 

 

이 존자는 업이 바로 그의 주인이고,

그는 업의 상속자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의 권속이고,

업이 그의 의지처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그가 업을 지으면

그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업이 나의 주인이고, 나의 상속자이고, 나는 업에서 태어났고, 업은 나의 권속이고 의지처이다라고 항상 되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정견, 업자성정견

 

이와 같이 업이 나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라 한다.”

 

요약하면, 사성제(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정견의 도입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바른 알아차림(正念)과 바른 집중(正定)을 계발하는 방법으로 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정견이 있다고 합니다.

 

①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kammassakata-sammādiṭṭhi)

②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jhãna-sammādiṭṭhi)

③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

 

마찌마 니까야의 〈상분오십품(上分五十品)〉에서는 이와 비슷한 다섯 가지 견해를 언급하고 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 대신에 ‘반조에 대한 바른 견해 (paccevekhaa-sammādiṭṭhi)’를 언급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여섯 가지 바른 견해(正見)라고 합니다.

 

①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

②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

③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

⑥ 반조(返照)에 대한 바른 견해

 

여기에서 ‘과에 대한 바른 견해’는 네 가지 성스러운 도의 결과인 네 가지 과() 에서 나오는 바른 견해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으면 자연적으로 그 과의 지혜도 따라옵니다..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반조에 대한 바른 견해’는 도와 과를 얻은 후 자연적으로 오는 자기 반조입니다. 그것이 생겨나도록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따라 수행자는 오직, 다음에 상세히 설명할, 처음 네 가지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제3 165페이지)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에 따르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 업자성정견이라하고 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주석서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러한 업자성정견은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정견으로 알려져 있다. 세속적인 정견이 있다면 출세간적 정견도 있을 것이다. 법문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출세간의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정견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세속적인 정견으로서 업자성정견이 있고, 또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으로서 사성제가 있다.

 

업과 업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를 믿어야

 

세속적인 정견으로서 업자성정견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이어지는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인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은 업과 업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행위는 업이고 행위는 선하거나 나쁜 과보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악업을 짓는 사람은 나쁜 과보를 받습니다. 범죄자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으며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욕설은 욕설로 되돌아오고, 악의에 차서 험악한 시선으로 쳐다본다면 자신에게도 험악하고 강압적인 시선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반면에 행복한 미소는 행복한 미소를 불러옵니다. 다정하게 인사하면 반드시 다정한 친절로 되돌아옵니다.

 

품행이 방정한 어린이는 어려서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번영을 누리는 성공한 어른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돈벌이가 되는 장사나 사업을 하면 부자가 되어 번영을 누립니다. 하지만 도박과 같은 무익한 노력은 반드시 파멸을 가져옵니다. 선하거나 나쁜 행위에 따라오는 그러한 선과보(善果報)와 불선과보(不善果報)의 사례를 우리는 일상에서 체험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과보를 불러오고 나쁜 행위는 나쁜 과보를 불러오는 이 업의 법칙은 끝없는 윤회과정에서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나쁜 행위의 과보로 지금 생에 짧은 수명, 온갖 질병, 추함, 가난, 추종자나 시종들이 없는 것과 같은 나쁜 과보를 받아 고통을 치러야 합니다. 현생에서 살생하고, 남을 괴롭히고, 도둑질하고, 빼앗고 거짓말하는 등의 나쁜 행위를 하면 다음 생에 그 행위에 수반하는 나쁜 과보를 받아 낮은 중생계에 떨어지는 것으로 그 과보를 맺을 것입니다.

 

전생에 행한 선행의 결과는 지금 생에 좋은 과보로 열매를 맺고 장수를 누리고, 질병에 걸리지 않고, 아름다움과 부를 누리고,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살생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빼앗지 않고 선량한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봉사하면 더 높은 중생계에 나서 이러한 선한 행위의 과보를 받습니다.

 

선한 행위로 인한 선한 과보와 나쁜 행위로 인한 나쁜 과보는 분명히 실재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바로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업자성정견입니다.

 

이러한 믿음, 즉 바른 견해는 통찰지처럼 자신의 꿰뚫는 직관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알려진 사례와 그 신뢰성을 스스로 가늠해보고 나서 스승들의 말씀과 경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견해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바른 견해는 열 가지 공덕행의 토대(puñña-kiriya-vattu)가 되며, 선행에 대한 바른견해(sucarita-sammādiṭṭhi)라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업과 업의 과보가 있는 것을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를 사견(邪見, micchādiṭṭhi)이라고 합니다. 이는 열 가지 악행(十惡行)의 하나로 분류되며 악행에 대한 삿된 견해(ducarita-micchādiṭṭhi)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우리의「삭감경(削減經 Sallekha Sutta)」법문 제 2권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제3 167-168페이지)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이라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가 있다는 견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십선행을 하고 십악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십선행과 십악행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업을 말한다.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 A5.4.2.2 또는 A5:162)

 

위에 언급된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 (원함을 제거함 첫번째 경, A5.4.2.1 또는 A5:161)  에서는 원한을 제거 함에 있어서 다섯가지 방법에 대하여 말하였다. 즉, 자애(, mettā), 연민(, karuā),  더불어 기뻐함(, muditā),  평온(, upekkhā) 수행을 하고, 업이 자신이 주임임을 반조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원한을 제거함에 있어서 경이 하나 더 있다.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 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 A5.4.2.2 또는 A5:162)이 바로 그것이다.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에서도 역시 원한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다섯가지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데 먼저 언급한 경과 내용이 다르다. 이는 신구의 삼업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원한을 제거하는 다섯가지  방법

No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

(원함을 제거함 첫번째 경, A5.4.2.1 또는 A5:161)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

( 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 A5.4.2.2 또는 A5:162)

 

원한 제거 하는 방업

원한발생 다섯가지 경우

원한 제거하는 방법

1

자애(, mettā)

몸으로 짓는 행위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말로 짓는 행위는 청정

몸으로 짓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는 마음에 두지 말고 그때는 그가 말로 짓는 청정한 행위만을 마음에 두어야 함

2

연민(, karuā)

말로 짓는 행위는 청정하지 못하지만 몸으로 짓는 행위는 청정

말로 짓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는 그때 마음에 두지 말고 그때는 그가 몸으로 짓는 청정한 행위만을 마음에 두어야 함

 

3

더불어 기뻐함(, muditā)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지만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

몸으로 짓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도 마음에 두지 말고 말로 짓는 청정하지 못한 행위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함.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는 것만을 마음에 두어야 함

4

평온(, upekkhā)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지도 못함

연민하는 마음을 내고 동정하는 마음을 내고 애민하는 마음을 내야 함

5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고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음

그가 몸으로 짓는 청정한 행위도 마음에 두어야 하고, 그가 말로 짓는 청정한 행위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는 것도 마음에 두어야 함

 

 

 

위 표에서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 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 A5.4.2.2 또는 A5:162)을 보면 모두 다섯가지 케이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내야 하는 이유

 

이중 최악이 네번째인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지도 못하는 자를 보았을 때이다. 이 경우 대부분 분노를 느끼지만 부처님은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씀 하였을까.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원한을 제거해야 합니까?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가 먼 길을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앞쪽으로도 마을이 멀리 있고 뒤로도 마을이 멀리 있어 그는 적당한 음식도 얻을 수 없고 적당한 약도 얻을 수 없고 적당한 간병인도 구할 수 없고 마을로 인도해주는 사람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먼 길을 가고 있던 다른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 그에 대해서 연민하는 마음을 내고 동정하는 마음을 내고 애민하는 마음을 낼 것입니다.

 

‘오, 참으로 이 사람이 적당한 음식도 얻고 적당한 약도 얻고 적당한 간병인도 구하고 마을로 인도해주는 사람도 얻기를.’이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이 사람이 여기서 쓰러져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몸으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말로 짓는 행위도 청정하지 못하고 때때로 마음이 맑고 마음이 고요함을 얻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연민하는 마음을 내고 동정하는 마음을 내고 애민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오, 참으로 이 사람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기를. 말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말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기를.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기를.’이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이 존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처참한 곳[苦界], 불행한 곳[惡處],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지 않았으면.’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반들이여,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원한을 제거해야 합니다.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Dutiya - āghātapaivinayasutta - Second on repression of hurtfulness -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 앙굿따라니까야 A5.4.2.2(A5:162), 대림스님역)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A5.4.2.2).docx

 

 

 

 

신구의  삼업이 모두 청정하지 못한 자들 즉,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업을 짓는 자에게 원한을 갖거나 화를 내거나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이 악업을 지음에 따라 악처에 태어 날 것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악처에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정하고 연민하는 마음이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수 없이 싫어 하는 이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원한이나 성냄, 미워함, 증오의 감정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어떻게 되뇌이어야 하나

 

살아 가면서 수 도 없이 싫어 하는 대상과 만난다. 싫어 하는 대상과 만난다는 것은 번뇌를 유발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하여 매번 도망만 다닐 수 없다. 도망만 다니다 보면 결국 세상과 등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 경우 인욕바라밀을 닦고 싶어도 닦을 수 없을 것이다. 산좋고, 물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빈둥거리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 가는 이들에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삶은 산중의 생활과 다르다. 만나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부딪치기 싫어도 또 보며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싫다고 하여 부모를 버릴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직장상사가 미워서 사표 쓰고 나 올 수 없는 것과 같다. 같이 사는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 갈아 치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원치 않는 만남, 싫어 하는 것과의 만남은 피 할 수 없다. 또한 치매라든가 정신적, 신체적 장애 등 각종 장애와  맞닥뜨렸을 때 이 또한 원치 않는 만남이 되어 고통을 유발한다. 이런 경우 마음속에 분노가 일고 원한과 증오, 적개심이 일어난다. 이럴 때 부처님은 자애 등 사무량심을 닦으면 원한은 사라질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이나 미움의 감정이 남아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싫어 하는 것과 만남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그 때 마다 업을 짓는다. 특히 아주 싫어 하는 대상과 만났을 때 펼연적으로 몸으로든, 말로든, 마음으로든 악업을 지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업은 누가 짊어 지고 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 하였다. 이말은 업을 자신이 안고 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하여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이는 출세간적 정견인 사성제와 달리 세간적 정견이라 한다. 그래서 싫어 하는 대상과 만나 분노가 치밀어 올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또 다른 업을 지으려 할 때 부처님은 항상 다음과 같이 되뇌이라 하셨다.

 

 

"kammassako ayamāyasmā

kammadāyādo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isarao.

Ya kamma karissati kalyāa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o bhavissatī"

 

이 존자는 업이 바로 그의 주인이고,

그는 업의 상속자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의 권속이고,

업이 그의 의지처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그가 업을 지으면

그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This good one is the owner of actions.

He is the inheritor, origin,

relation and refuge of actions.

Whatever actions good or bad he does,

will be his heritage.

 

 

이렇게 내가 지은 모든 행위가 결국 내가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그에 따라 응당 그 과보는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지은 업, 그 끝을 알 수 없는 전생에 지은 모든 업의 모든 결과가 지금 여기 현재의 나라고 볼 수 있다.

 

강물 같은 공덕을 짓는다면

 

그렇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지은 업으로 인하여 미래의 나 또한 결정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은 업 중에서 선업공덕 보다 악업이 더 많다고 생각되면 불행하고, 비참하고, 처참한 악처에 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라도 선업 공덕을 많이 지어야 한다. 선업이 악업 보다 훨씬 더 많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이 조금 밖에 없는 잔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 잔에 있는 적은 물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세존이시여,

그 물잔 속의 물이 조금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 강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세존이시여,

그 강가 강은 많은 물의 적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소금 덩이로는 마실 수 없이 짜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나까빨라경-Loakapallasutta - The crystal of salt -소금덩이 경, 앙굿따라니까야 A3.10.9 또는 A3:99 , 대림스님역)

 

로나까빨라경(소금덩이경 A3.10.9또는 A3.99).docx

 

 

 

로나까빨라경을 우리말로 소금덩이경이라 한다. 부처님이 소금덩어리를 비유로 한 법문이다.

 

경에서 소금덩어리를 강물에 집어 넣으면 조금도 짠맛이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지금 악업이라는 소금덩어리가 있지만 강물 같은 공덕을 지으면 그 악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지혜를 닦아 통찰지를 얻으면 비록 이제까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악업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음 생에 털끝 만치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2012-07-17

진흙속의연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원함을 제거함 첫번째 경-A5.4.2.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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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묻거든.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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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0.07MB
두띠야 아가따빠띠위나야경(원함을 제거함 두번째 경-A5.4.2.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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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0.52MB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0.07MB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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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나까빨라경(소금덩이경 A3.10.9또는 A3.99).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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