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윤회의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을까, 알라와까경(Sn1.10)
알라와까의 경
[Alavaka sutta](*1)
주해(*1)
이 사건은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뒤, 16년후의 사건이다.
알라비 국의 왕은 뱅골 보리수에 살고 있는 식인귀인 야차 알라와까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왕은 야차에게 매일 한 사람씩 제물로 바치기로 약속하고 풀려났다. 왕은 시장과 대신들의 도움으로 처음에는 죄인들을 제물로 바쳤고 죄인들이 떨어지자 각 가정에서 한 어린아이를 바쳐왔다.
여인들은 자신의 아이가 제물로 바쳐질 때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왕도를 떠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왕은 12년 동안이나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마침내 왕의 아들인 알라와까 꾸마라만이 남아서 차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왕은 왕자에게 옷을 잘 입히고 치장하여 야차에게 데리고 갔다.
그때 부처님은 자비의 눈으로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채고 야차들이 사는 궁전으로 찾아갔다. 야차 알라와까는 야차들이 모여사는 궁전에서 멀리 떨어진 히말라야에 가 있었다. 궁전의 문지기 가드라바는 부처님에게 대하는 야차들의 무례를 꾸짖고는 부처님께 궁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부처님은 가드라바가 히말라야로 가서 부처님의 도착을 알리는 동안 알라와까의 보좌에 앉았다. 부처님은 알라와까의 궁녀들과 야차 싸따기라와 헤마와따에게 설법을 했다. 싸따기라와 헤마와따는 마침 공중으로 날아서 히말라야의 모임에 가는 도중이었는데,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머리 위로 날 수가 없어서 야차 알라와까의 궁전에 내려와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설법을 듣고 경의를 표하고 여행을 다시 떠났다.
야차 알라와까가 가드라바와 싸따기라와 헤마와따에게서 부처님의 방문 소식을 듣자 매우 노하게 되어 자신의 이름을 전 인도를 진동시킬 만한 큰소리를 외치며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가지 신통한 힘을 모두 동원했으나 부처님을 그 보좌에서 끌어내릴 수가 없었다. 특수한 무기인 둣싸부다도 부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야차 알라와까는 부처님께 이 궁전을 나갈 것을 명령하면서 이 경전이 시작된다. 부처님은 세 차례나 그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그의 분노를 식힌 뒤에 네 번째에 그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야차 알라와까는 질문을 던져 부처님을 괴롭히려고 생각했다.
야차 알라와까의 부모는 깟싸빠 붓다로부터 이 경에 나오는 질문과 대답을 배워서 알라와까가 어렸을 때 가르쳐주었으나 알라와까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것들을 황금색 잎에 붉은 글씨로 기록해 그들의 궁전에 두었는데, 나중에 알라와까는 그것을 발견하였고, 이 경에서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 깟싸빠 부처님의 대답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야차 알라와까는 대단히 만족하였고 진리의 흐름에 든 이가 되었다.
날이 밝자 알라와까왕의 부하들이 알라와까 꾸마라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야차를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부처님의 설법이 끝났을 때에 야차들의 환호소리를 듣고 매우 놀랐다. 그들이 제물을 가져왔다고 야차 알라와까에게 고하고 왕자아이를 건네주자, 야차 알라와까는 부처님 앞에서 매우 부끄러워했다.
야차 알라와까는 그 왕자아이를 부처님에게 건네주었고 부처님은 아이를 축복하고 왕의 부하들에게 돌려주었다. 그 왕자아이는 이후에 알라와까의 손에서 부처님의 손으로 건네졌다는 의미에서 핫따까 알라와까로 알려지게 되었다.
알라와까 왕과 시민들은 야차 알라와까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벳싸바나 근처에 특별한 궁전을 마련하고 꽃과 향료등을 공급했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알라비(*1)국의 알라와까라는 야차의 처소에 계셨다.
주해(*1) 알라비국 :
사왓티에서 30 요자나 베나레스에서 12요자나 떨어진 도시 또는 나라의 이름이다. 사왓티와 라자가하 중간에 놓여 있었다.
이 도시의 왕과 주민은 모두 Alavaka라고 불리었고 나중에 거기에 살던 야챠도 Alavaka라고 불리었다. 이 도시에는 많은 수행승들이 살았고 승원도 있었다.
2.
이 때 야차 알라와까는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세존께서는 나가셨다.
또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3.
두 번째에도 야차 알라와까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다시 나가셨다.
다시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다시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4.
세 번째에도 야차 알라와까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또 다시 세존께서는 다시 나가셨다.
또 다시 야차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들어오시오”
[세존]
“벗이여, 좋습니다.”
또 다시 세존께서는 들어오셨다.
5.
네 번째에도 야차 알라와까는 말했다.
[알라와까]
“수행자여, 나가시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세존]
“나는 더 이상 나가지 않겠소 그대 할 일이나 하시오.”
[알라와까]
“수행자여,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그대가 내게 대답을 못한다면, 당신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당신의 심장을 찢은 뒤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강 건너로 내던지겠소.”
6.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세존]
“벗이여,
신들의 세계에서, 악마들의 세계에서,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의 후예 가운데,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의 세계에서, 내 마음을 산란케 하고 내 심장을 찢고 두 다리를 잡아 갠지스강 건너로 내던질 만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친구여, 그대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나 물어보시오.”
7.
야차 알라와까는 세존께 다음의 시로써 말을 걸었다.
[야차 알라와까]
“이 세상에서 사람의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까?
참으로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입니까?”
8.
[세존]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1)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다.
진실이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해(*1) 가르침 -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길에 대한 법(十善業道法)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법,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법,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법,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법,
5) 중상을 하는 것을 삼가는 법,
6)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는 법,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법,
8) 탐욕이 없는 것,
9) 분노가 없는 것,
10) 올바른 견해를 지니는 것.
9.
[야차 알라와까]
“사람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1) 건넙니까?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넙니까?
어떻게 괴로움을 뛰어 넘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
10.
[세존]
“사람은 믿음으로써 거센 물결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2) 건넙니다.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3)
지혜로 완전히 청정(*4)해집니다.
주해(*1) 거센 물결 :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거센 물결(暴流)에 비유한다. 열반은 그러한 거듭되는 윤회가 끝나 파도가 미치지 않는 해안을 뜻한다.
또 거센 물결에는 감각적 쾌락의 거센 물결, 견해의 거센 물결, 무지의 거센 물결이 있다. 거센 물결의 경에 따르면, 하늘사람과 세존의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데는 머물고 애쓰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올바른 귀의와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주해(*2)
방일하지 않음으로 존재의 거센 물결을 건너는 한번 돌아오는 님이나 그 경지를 향하는 님을 말한다.
주해(*3)
정진으로 존재의 거센 물결을 건너는 돌아오지 않는 님이나 그 경지를 향하는 님을 말한다.
주해(*4)
무지의 거센 물결을 건너는 거룩한 님이나 그 경지를 향하는 것을 말한다.
11.
[야차 알라와까]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혜를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재물을 얻습니까?
어떻게 해서 명성을 떨칩니까?
어떻게 해서 친교를 맺습니까?
또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서 슬픔을 여의겠습니까?”
12.
[세존]
“열반에 도달하기 위하여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믿고 방일하지 않고 현명한 자라면,
배우려는 열망을 통해 지혜(*1)를 얻습니다.
13.
알맞은 일을 하고(*2) 멍에를 지고(*3)
열심히 노력하는 자는 재물을 얻습니다.
그는 진실함으로써 명성을 떨치고, 보시함으로써 친교를 맺습니다.
14.
가정생활을 하는 신도일지라도(*4),
진실, 진리, 결단, 보시의 이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내세에 가서도 걱정이 없습니다.
15. 그리고 진실, 자제, 보시, 인내보다
이 세상에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널리 수행자나 바라문에게 물어보시오.”
주해(*1) 지혜
- MN.II.173에 따르면
“믿음이 확립되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섬기게 되고,
듣게 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마음챙김이 생겨나고
마음챙김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면 의욕이 생겨나게 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어 보게 됩니다”
주해(*2) 알맞은 일
- 장소와 시간 등을 벗어나지 않고 세간적 혹은 출세간적인 재산(예를 들어 아라한의 경지)을 얻는데 알맞은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말한다.
주해(*3) 멍에
- 책임으로서 멍에를 말한다. ‘마음의 힘으로 멍에를 버리지 않는’이다.
주해(*4) 가정생활을 하는 신도
-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자를 말한다.
16.
[야차 알라와까]
“어찌 다른 수행자들이나 바라문들에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커다란 과보가 있는 것을 부여 받았음을 저는 오늘 분명히 알았습니다.
17.
깨달은 님께서 알라비에서 지내려고 오신 것은 참으로 저에게 유익했습니다.
커다란 과보가 있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저는 오늘 분명히 알았습니다.
18.
올바로 깨달은 님과 잘 설해진 뛰어난 가르침에 예경하면서(*1)
저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주해(*1) 예경
- 여기서 우리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 가운데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귀의만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숫타니파타가 초기불경가운데서도 고층의 경전임을 알 수 있다.
- 알라와까의 경이 끝났다. –
(Āḷavakasuttaṃ -To Ālavaka the Demon-알라와까경, 숫따니빠따 Sn1.10,전새성님역)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
초기경의 특징은 ‘운문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언어나 문자 배열에 일정한 규칙이 가미 되어 운율이 형성된 글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게송을 들 수 있다.
게송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담마빠다나 숫따니빠따가 대표적이다. 상윳따니까야 처럼 비교적 고층이 속하는 초기경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게송의 특징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는 것이다. 문장에 대한 기교나 인위적은 조작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언어로 순진하고 활달하게 표현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알라와까경 역시 순진하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알라와까경 역시 게송형식으로 되어 있다.
야차(夜叉)는 무엇인가
알라와까경은 야차와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야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야차는 모질고 사악한 귀신의 하나로 묘사된다. 또한 대승불교에 따르면 야차는 염라국에 살면서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아 다루는 옥졸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야차는 빠알리어로 약카(yakkha)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Yaksha라 한다. 영어로 demon으로 표시 된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야차 이미지)
이처럼 야차는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 되고 있는데, 이런 야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야차(夜叉, yakkha)
야차는 일반적으로 비인간(非人間, amanussa)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들은 아귀(餓鬼, peta)들보다 위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선한 아귀들을 야차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PvA.45;55)
이들은 특히「자따까」에 자주 등장하는데 하늘을 날아다니고 벽을 관통해 지나가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고, 공양(供養)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보(財寶)나 아이를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야차녀는 매력으로 사내를 홀려서 잡아먹는 식인귀(食人鬼)로 묘사된다.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중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이 이들을 관장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제4장 주해에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 주해에 따르면, 야차는 아귀보다 위의 존재로 설명 되고 있다. 야차가 아귀 보다 위에 있는 존재라면 아수라 보다 아래에 위치 한다. 따라서 ‘악처’에 산다고 볼 수 있다.
알라와까경은 상윳따니까야에도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이고 무시무시한 이미지의 야차는 숫따니빠따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상윳따니까야는 56개의 주제로 구분 되어 있는데, 그 중 열번째 주제가 야차에 관한 것이다. 이를 ‘약카상윳따(Yakkha Saṃyutta, S10)’라 한다. 이 약카상윳따 12번째 경이 알라와까경(Āḷavakasutta, S10.1.12)인데, 이 경우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알라와까경(Sn1.10)과 일치한다. 그래서 알라와까경은 숫따니빠따에서도 볼 수 있고,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경의 주석에 따르면 야차는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악의적 신령의 뜻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초인간적 존재로서 야차
초인간적 존재로서 야차의 모습은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Devatā Saṃyutta,S1) 에서 보여 진다. 하늘사람과 부처님의 대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하늘사람]
"모든 하늘사람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즐기지만
먹을 것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참으로 누구입니까?"
[세존]
"믿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먹을 것이 따르네.
인색함을 반드시 이겨서 마음의 티끌을 극복하고 보시하세.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네"
(안나경-Annasuttaṃ-Food-먹을 것, 상윳따니까야 S1.1.5.2, 전재성님역)
불과 열줄도 안되는 매우 짧은 경이다. 하늘사람과 부처님과의 대화인데, 여기서 하늘사람은 때로‘야차’를 말한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보시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보시하고 배푸는 삶을 가지면 반드시 선처에 태어나게 된다는 매우 짤막한 가르침이다.
야차와 마라를 등장시키는 이유
이처럼 초기경에서는 야차와 부처님과의 대화내용이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속에서의 가르침 보다 더 수승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야차를 등장시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하는데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악마 마라의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다.
마라 중에 빠삐만이 있다. 이때 악마 빠삐만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부처님을 유혹하는 반대편에 있다. 그러나 다른 악마와 달리 늘 부처님과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활용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에서
야차 알라와까는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매우 생소하다.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수호경이자 호신주로 불리우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 길상승리게)에 알라와까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야망갈라가타는 여덟가지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게송이다. 그래서 여덟가지 에피소드가 여덟개의 게송으로 표현 되어 있는데, 그 중 두번째 게송이 알라와까와 관련된 것인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알라와까(Alavaka)
Mārātirekam-abhiyujjhita-sabbarattiṃ
마~라~띠레깜 아비윳지따 삽바랏띵
Ghorampan’ālavaka-makkham-athaddha-yakkhaṃ
고람빤 알라와까 막캄 아탓다 약캉
Khantī-sudanta-vidhinā/ jitavā /munindo
칸띠~ 수단따 위디나~ 지따와~무닌도
Taṃ-tejasā/ bhavatu /te /jaya-maṅgalāni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악마보다 더욱 흉폭해서 참을 수없이 완고한
야차 알라바까 밤낮으로 싸움걸어 올 때,
성자들의 제왕 인내와 자제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Jayamaṅgala Gāthā-吉祥勝利偈, 2번 게송, 전재성님역)
자야망갈라가타 2번 게송 알라와까, Imee Ooi창
吉祥胜利偈巴利文黄慧音唱诵(23분 30초, 3회 반복, 33M)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doc
게송에서 알라와까에 대한 묘사가 있다. 알라와까는 악마 보다 더 흉폭하고 성질 급하고 고집이 세다고 표현 되어 있다. 그리고 밤낮으로 싸움을 걸어 온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에 대한 도전을 말한다. 이에 대한 표현이 숫따니빠따 알라와까경에서 부처님에 대하여 세번이나 “나가라” “들어 오라” 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참고, 또 참고, 또 참았다.
이렇게 인내하고 자제하여 마침내 야차 알라와까를 굴복시킨 것에 대한 노래가 자야망갈라가타 두번째 게송이다.
‘거센 물결’이란
야차는 부처님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문제를 내듯이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거침없이 답변을 하는데,이는 과거 모든 부처님들이 하시던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모든 부처님들의 깨달음의 내용은 동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중 거센 물결에 대한 것이 있다.
야차가 “사람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넙니까?”라고 물어 보자, 부처님은 “믿음으로써 거센 물결을 건넌다”고 하였다. 이때 거센물결은 주석에 따르면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폭류(暴流, 거센물결)라 하였다.
게송에서 거센 물결( the flood)은 빠알리로 오감 (oghaṃ)이라 한다. 오감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것일까. 아비담마에서는 오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네 가지 폭류가 있으니
1) 감각적 욕망의 폭류
2) 존재의 폭류
3) 사견의 폭류
4) 무명의 폭류
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초기불전연구원)
오감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거센 물결’이라고 번역하였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폭류’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어로는 ‘The flood’라 한다.
왜 번역자마다 ‘번역어’가 다른가
이렇게 번역자마다 용어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가급적 먼저 번역한 용어를 쓰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이는 대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최초로 니까야를 번역한 전재성박사의 책은 순수한 한글번역을 많이 볼 수 있고, 후발주자라 볼 수 있는 초불의 경우 이를 피하여 한문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느 경우는 반대이다.
오온에서 윈냐나( viññāṇa)가 있다. 이는 색수상행식에서 식(識)을 말한다. 이 윈냐나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의식’이라고 한문식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후발주자인 초불의 번역에서는 순수한 우리말인 ‘알음알이’로 번역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먼저 번역한 용어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여진다. 참고로 양번역자의 오온에 대한 번역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오온에 대한 번역어 비교표
|
색온 (色蘊, rūpa-kkhandha)
|
수온 (受蘊, vedanā-kkhandha)
|
상온 (想蘊, saññā-kkhandha)
|
행온 (行蘊, saṅkhārā-kkhandha)
|
식온 (識蘊, viññāṇa-kkhandha)
|
전재성박사 (존재의 다발)
|
물질 |
감수 |
지각 |
형성 |
의식 |
초기불전연구원 (무더기) |
물질 |
느낌 |
인식 |
상카라들
|
알음알이
|
니까야를 최초로 번역한 전재성박사는 오온에 대하여 물질, 감수, 지각, 형성, 의식이라 하여 한문용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초불의 경우 물질,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 로 번역하였는데, 물질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다르다. 번역어중에 느낌과 알음알이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상카라는 빠알리어 그대로 쓰고 있다.
누구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가
이렇게 번역자 마다 번역어가 다르다 보니 이를 접하는 불자들은 혼란스러워 진다. 특히 가장 많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오온에서 조차 용어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두고 두고 혼돈을 야기 할 것임에 틀림 없다. 도대체 누구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가.
이런 경우 차라리 빠알리 원어를 쓰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오온에 대하여 루빠(색), 웨다나(수), 산냐(상), 상카라(행), 윈냐나(식)이라고 빠알리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거센물결 또는 폭류로 번역되는 오감(oghaṃ)도 마찬가지이다. 빠알리 그대로 ‘오감’으로 써도 될 것이다. 초기불교가 널리 퍼지면 오히려 원어를 사용하는 것이 의미 전달이 더 쉬울지 모르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나 ‘고’ 등으로 표현되는 ‘둑카’가 좋은 예이다. 둑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다 보니 이제 자연스럽게 된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거센 물결을 멈추게 하려면
경에서 부처님은 생사가 거듭되는 삶에 대하여 바다의 거센 물결에 비유 하였다. 물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사람이 생하고 멸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거센 물결을 윤회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거센 물결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Saddhāya taratī oghaṃ 삿다야 따라띠 오감
appamādena aṇṇavaṃ, 압빠마데나 안나왕
Viriyena dukkhamacceti 위리예나 둑카맛쩨띠
paññāya parisujjhati. 빤냐야 빠리숫자띠
“사람은 믿음으로써 거센 물결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 건넙니다.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집니다.
“With faith, the flood is crossed,
with diligence the ocean,
With effort unpleasantness gets exhausted,
and with wisdom purity comes about"
부처님은 윤회라는 거센물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믿음, 방일하지 않음, 정진, 지혜를 말한다. 이는 단계적 깨달음을 설명하고 있기도 한다.
생사를 결정할 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이와 같이 윤회를 말하는 거센 물결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숫따니빠다에서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는데, 다니야경에서 “거센 물결을 이기고 건너 피안에 이르렀으니”라는 문구가 있고, 헤마와따경에서 야차 헤마와따는 “누가 거센 물결을 건넙니까?”라고 묻는 문구가 있다.
또 ‘학인 멧따구의 질문에 대한 경’에서 멧따꾸는 “어떻게 현자들은 거센 물결, 태어남과 늙음,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런데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에서는 더 적극적이다. 우빠씨바는 “혼자서 커다란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비장한 각오로 묻는다. 생사를 결정할 만큼 절박해 보인다.
상윳따니까야 첫번째 경에
알라와까의 경에서 전재성 박사의 주석에 따르면 거센 물결에 대하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검색해 보니 데와따상윳따( S1)에 매우 짧은 경이 있는 것을 확인 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띠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어떤 하늘사람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바나를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한쪽으로 물러서서 그 하늘사람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어보았다.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이다"
[하늘사람]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참 열반에 도달한 거룩한 님을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친견하네"
이와 같이 하늘사람이 말했다. 스승께서는 가상히 여기셨다. 그 때 그 하늘사람은 '나의 스승이 가상히 여기신다'고 알고 세존께 예배를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오가따라나경-Oghataraṇasuttaṃ- 거센 물결경, 상윳따니까야 S1. 1.1, 전재성님역)
불과 반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매우 짧은 경이다. 그런데 이 경은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먼저 선 보이는 경이다. 그래서 S1.1.1로 표기 된다. 2,904개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이 경에서 부처님은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라고 하였다. 이 말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주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데는 머물고 애쓰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재성박사, 알라와까의 경 주석)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라는 것에 대하여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 하는 것”라고 하였다. 이는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와 같은 맥락이다. 욕심을 가지고 무언가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식 같은 것이다.
하면 할수록 까지는 것
주식의 경우 ‘탐욕의 장’이라 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한 목적으로 주식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욕’이 개입 되어 있다 보니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래를 한다. 심지어 초 단위로 수 없이 거래를 한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하여 몸 부림 치면 칠수록 잔고는 점점 줄어 든다. 하면 할수록 까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언가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수행을 하였을 때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안될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나를 찾는 수행’이라 볼 수 있다.
무언가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안되는 경우라면 이는 잘못된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제시 하지 않는 엉뚱한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나를 찾는 수행은 방향부터 잘못 되었기 때문에 결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 설령 목적지에 다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맞는 것인지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KTX열차를 타면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간 길을 명확히 제시 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이 입증해 보였다. 그런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대로만 따르면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참 열반”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상윳따니까야 첫번째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헤메이지 않고 열반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치 KTX열차를 타는 것과 같다.
KTX열차를 타면 지정된 좌석에 앉게 된다. 그리고 가장 빨리 최단거리로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해 준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치 KTX열차와 같은 것이라 보여 진다. 부처님이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경전 역시 KTX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전권을 구매한 법우님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법보시용으로 좋은 초기불교서적, 어떤 책이 좋을까”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니까야를 많이 사 보자는 취지로 작성된 글이다.
이 글의 영향이어서일까 어느 법우님이 글을 남겨 주셨다. 몹시도 수줍을 잘 타는 듯한 법우님이 ‘비밀 댓글’을 남겨 주었는데, 큰 마음 먹고 상윳따니까야 전권을 구매 하였다고 한다. 20만원대에 해당되는 경전 구입에 통큰 결정을 한 법우님에 박수를 보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만 하면
부처님의 담마에 대하여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말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보배중의 보배이고, 그 어느 가르침 보다 가장 수승하다는 말이다. 그런 가르침이 들어간 초기경전을 구입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견줄 것이 없는 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초기경전을 구입하였다는 것은 KTX 열차표를 끊어 놓았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 KTX 열차를 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가장 빨리 최단거리로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만 하면 KTX열차를 탄 것과 같은데,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참 열반에 도달 한 것”으로 묘사 하고 있다.
2012-07-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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