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4. 16:03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

 

 

 

윤회를 의심하는 자들

 

수행처에서 들은 말이 있다. 법사의 말에 따르면 종종 윤회가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다 보니 혹시 어느 분에게 교육받았는지 물어 본다는 것이다. 듣기로 부산에 있는 모 법사가 그런 주장을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 볼 수 있는 현상 중의 하나가 단멸론자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면서 윤회를 부정한다. 그리고 오로지 지금 여기서 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라 주장한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선사들이 사성제나 연기법문을 거의 하지 않은 현실에서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현생에서만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 내생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것 같다. 지금 여기서 고를 소멸도 못하는데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희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도 일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초심자들이 이들 단멸론자들의 현실주의적, 과학적 실증주의적, 감각적 인지주의적 주장을 들으면 그럴 듯 하게 들릴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어떤 식으로 주장을 하는 것일까. 경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 몇 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고 수()가 다해 마치면
곧 현재 세계에서 일체의 감각이 다 그쳐 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늘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身壞命終 壽已畢訖
即於現世一切所覺 便盡 止息
當知至竟16)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2.

만약 저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수상행식]이 종말을 고하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若彼終後

即於爾時一切永滅

無餘 永滅

[잡아함 969. 장조경(長爪經)]

 

 

3.

그는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고,
육체적인 요소들[시체]만 남게 될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철저한 검증 경」(S12:51)]

 

 

단멸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경전을 신뢰하지 않는다. 모두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와 연기법등 부처님의 일부 근본 가르침만 신뢰하고, 윤회나 신통이나 천상 등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모두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에 실려 있는 문구를 활용하여 단멸론을 설명한다. 주로  한역아함경이다. 한문으로 된 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특히 단멸론을 주장할 때 거두절미하고 위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몸과 정신이 따로따로 죽는게 아니고

몸과 정신의 조건지음이 허물어지면

생명기능이 끝나는 겁니다.   

 

(인터넷 단멸론자)

 

 

이것이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또한 무너지는 것으로 본다. 몸과 마음이 연기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생명기능이 끝나면 내생이니 윤회이니 거론 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뿐더러 아무 필요 없는 희론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니라도 주장한다.

 

애매모호한 한역 아함경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경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단멸론자들이 인용한 경 중에 먼저 화파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세존께서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화파여,

화파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비구가 무명이 이미 다하고 명()이 이미 생겨났으면 그는 무명이 이미 다하고 명이 이미 생겨난 다음에 뒷세상의 몸[後身]에 대하여 감각을 내면 곧 뒷세상의 몸에 대하여 감각을 낸 줄을 알며, 뒷세상의 수명에 대하여 감각을 내면, 곧 뒷세상의 수명에 대하여 감각을 낸 줄을 안다.

 

그리고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고 수()가 다해 미치면 곧 현재 세계에서 일체의 감각이 다 그쳐 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늘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아함 12, 화파경, 동국역경원)

 

  화파경(한역중아함).docx

 

 

 

한역 중아함경에 있는 화파경과 대응되는 빠알리 맛지마니까야에서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한역 아함경에만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역 아함경의 번역을 보면 단멸론자들의 주장처럼 분명히 몸이 무너지면 일체 감각이 다 쉬게 된다는 말이 있어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논리를 뒷받침 한다.

 

하지만  그 앞 절에 조건이 있다. 무명이 다하고 생겨 난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명이 다하고 난 뒤에 어떻게 다시 몸을 받아 생겨 난다는 것일까. 경에서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고 더구나 12연기법에도 맞지 않는다.

 

이처럼 애매모호 한 것이 한역아함경이라 보여진다. 이런 애매모호함 때문에 단멸론자들이 근거로 활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단멸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장조경

 

이런 애매모한 경이 하나 더 있다. 단멸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장조경이 바로 그것이다. 한역 아함경 장조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彼於此三受

覺苦覺樂覺不苦不樂

彼受 若集 若滅 若味 若患 若出 如實知如實知已

即於彼受觀察無常觀生滅觀離觀滅盡觀捨

彼於分齊受覺如實知
分齊受覺如實知

若彼終後

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화종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이른바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이 세 가지 느낌은 무엇이 이 되며,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변한 것인가? 즉 이 세 가지 느낌감촉이 인이 되고, 감촉이 발생이 되며, 감촉에서 생기고, 감촉이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감촉이 발생하면 느낌이 발생하고, 감촉이 사라지면 느낌도 곧 사라져서 지극히 고요하고 맑고 시원하게 되느니라.

 

그는 이 세 가지 느낌인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에 대해서, 느낌발생·사라짐·맛·근심,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을 참답게 알고, 그것을 참답게 안 뒤에는 곧 그 느낌무상한 것이라고 관하고, 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그에 대한 탐욕을 여의어야 한다고 관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관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계감각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알고, 목숨한계감각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알아서,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장조경, 잡아함 969)

 

 

문제는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에 대한 번역이다. 이 번역에 대하여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에 대한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거두절미하고 이 부분만 발췌하여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한다.

 

하지만 앞구절을 읽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느낌에 대하여 알아차릴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구체적인 말이 없다. 그리고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무너져 남는 것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단멸론자들이 애용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아라한 선언이 있어야

 

그런데 한역 장조경과 대응되는 것이 빠알리 맛지마니까야에 있다. 디가나카경(M74)이다. 이 경에서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뿐 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이 보아서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즐거운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괴로운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여 해탈합니다.

 

해탈되면 그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일어나며, 나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분명히 압니다.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맛지마니까야 M74, 전재성박사역, 한역대응경전: 잡아함경 969. 長爪經)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M74).docx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M74).pdf

 

 

 

한역 아함경에서는 볼 수 없는 아라한선언이 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남은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한역과 빠알리 원문과 다른 점이다. 애매모호하지 않고 모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단멸론자들이 발 붙일 공간이 없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거두절미하고

 

단멸론자들이 언급한 경중에 빠알리니까야가 하나 포함 되어 있다. ‘철저한 검증 경(S12:51)’이 그것이다. 이 또한 단멸에 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애용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 또한 앞뒤 문구를 보면 단멸론자들의 거두절미식 일방적인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단멸론자들이 언급한 철저한 검증경은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원어는 빠리위망사나경(Parivīmasanasutta)’인데 전재성 박사는 숙고경이라 번역하였다. 빠리위망사나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행위로 아무 것도 형성하지 않고 생각으로 아무 것도 형성하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아무 것에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이 없으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참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

 

고 잘 안다.

.

.

.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가마에서 뜨거운 도자기를 꺼내 평지에 놓으면 거기에 있던 열기가 거기에서 소멸하여 그릇만 남듯이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몸의 기력이 다했다는 느낌을 감수하면 '나는 몸의 기력이 다했다는 느낌을 감수하고 있다' 고 안다.

 

그가 목숨이 다했다는 느낌을 감수하면 '나는 목숨이 다했다는 느낌을 감수하고 있다' 고 안다.

 

그는 몸이 부서진 결과로 목숨이 다한 뒤에 이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모든 느낌이 식어버릴 것이며 오로지 유해만이 남을 것이라고 안다.

 

(빠리위망사나경-Parivīmasanasutta- Examination-숙고경, 상윳따니까야 S12.6.1, 전재성님역)

 

  빠리위망사나경(숙고-S12.6.1).docx

 

 

 

경에서 단멸론자들은 거두절미하고 가장 아래 부분에 있는 그는 몸이 부서진 결과로 목숨이 다한 뒤에 이 세상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모든 느낌이 식어버릴 것이며 오로지 유해만이 남을 것이라는 문구만 발췌 하여 사용한다.

 

그러나 이 문구 이전에 경에서는 아라한선언이 이미 언급되어 있다. 아라한이 되어야만 완전한 열반에 들어 다시 나고 태어남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에게만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나타날 수 없다.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고통과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삶을 살아 가는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러 더 이상 의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명색이 일어나지 않아 더 이상 태어남은 없게 된다.

 

태어남이 없다는 것은 죽음 또한 있을 수 없다. 이는  오로지 모든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번뇌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아라한선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번뇌의 소멸에 대하여 언급함 없이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라는 한역 아함경의 문구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윤회하는가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면 중생들은 윤회 할 수 밖에 없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의 고리가 회전을 하기 때문에, 연결고리를 끊지 않는 한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근본 원인으로 무명갈애라고 하였다. 과거의 무명으로 인하여 현재 내가 있고, 현재의 갈애로 인하여 미래에 또 다른 생이 계속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을 하기 때문에 느낌을 알아 차려야 한다. 모든 불교수행은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이런 느낌을 알아 차리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나온다.

 

이렇게 느낌을 알아차려 더 이상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다시 태어남의 조건이 되는 의식이 더 이상 일어 나지 않게 되었을 때 이를 열반이라 하는데, 단멸론자들은 이런 과정을 무시한다. 단지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지면 남는 것이 없다는 말만 주장하는 것이다.

 

재생연결식에 대한 이해부족

 

단멸론자들의 주장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왜 끊임없이 계속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직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선업이나 불선업의 결과로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과 함께 모든 정신과 물질이 소멸되자마자, 새로운 정신과 물질과 함께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영혼의 전이에 대한 믿음인 상견(常見)이나,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단견(斷見)에 빠지기 쉽습니다.

 

단견은 죽은 다음의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무명이 어떻게 상카라[]에 이르고,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 느낌[], 갈애[]등이 어떻게 인과관계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현실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새로운 생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12연기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

 

  12연기법문-마하시사야도.hwp

 

 

 

마하시사야도는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윤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재생연결식 또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되거나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무지에서 비롯 된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연기법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무명이 어떻게 상카라()에 이르고, 여섯 감각장소(六入), 감각접촉(), 느낌(), 갈애()등이 어떻게 인과관계의 사슬을 구성하고 있는지는 현실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재생연결식만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죽은 다음에 새로운 생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에 기반을 두어 사유하는 배운 사람들은 대체로 상카라가 재생연결식을 일으킨다는 가르침을 받아 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합리적이고 체험적인 접근방법이 못되기 때문에 오늘날 단멸론자 들이나 유물론적 인생관을 가진 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고 한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를 알아야

 

그러나 이는 수행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자는 마음의 단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또 차례로 일어났다가는 번개 같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체험으로 발견하는 것이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행자는 처음에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수행자가 명상의 지혜(sammāsana-ñāa)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aya-ñāa)를 얻었을 때야 비로소 그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a)가 생기면서 수행자는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재생에 대해서 어떤 의심도 없어지는 시기는 명상의 지혜와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를 얻고 나서부터입니다.

 

(마하시사야도, 12연기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

 

 

마하시사야도는 원인과 결과의 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정신-물질의 지혜에 이어 두번째 지혜를 말한다.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면 재생연결식에 대한 개념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단멸론은 어떻게 논파 되었나

 

이는 연기법으로도 설명된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혹은 먼저 것은 단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원인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상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일어난 것들의 늙고 죽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86)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 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 hetu)과 조건(, paticca)과 결과(, phala) 인연과(因緣 果, hetu-paticca-phala)’로 설명된다. 따라서 결과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원인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말하기 때문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단견)은 거짓이 된다.

 

이와 같은 연기법은 마음은 영원한 것이라는 영원론(상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도 적용 될 수 있다. 이미 일어 난 것들이 죽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단견과 상견은 연기법으로 모두 논파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건을 통해 일어남을 보기 때문에 단일화의 방법이 분명해진다. 원인과 조건이 연결되어 상속이 끊어지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더욱 철저하게 단견을 버린다.

 

순간을 통해 일어남을 보기 때문에 다양화의 방법이 분명해진다. 항상 새로운 것이 일어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더욱 철저하게 상견을 버린다.

 

조건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기 때문에 무관심의 방법이 분명해진다. 법들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더욱 철저하게 자아에 대한 견해를 버린다.

 

조건을 통해 일어남을 보기 때문에 정해진 법의 방법이 분명해진다. 조건에 따라 결과가 일어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때 더욱 철저하게 업 지음이 없다는 견해를 버린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02)

 

 

이처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져 결과를 남기는 연기법을 알면 영원론이나 단멸론은 발을 붙이지 못하게끔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 등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견해가 일어 나는 것은 법에 대하여 ‘무지’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다고?

 

부처님 당시에도 단멸론자들이 있었다. 유물론자인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이 대표적이다. 그는 오직 현세만이 있을 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4요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특징은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 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지따와 같은 유물론자에 대하여 외도로 간주하고 매우 비판하였다. 그런데 아지따와 같은 부류를 지금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단멸론자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으로 자꾸 결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sasāra) 속에서

 

하지만 부처님은 내생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신 법문이 초기경전 도처에 있다. 두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Anekajātisasāra        아네까자-띠삼사-

sandhāvissa anibbisa   산다-위쌍 아닙비상

gahakāra gavesanto       가하까-랑 가웨산또

dukkhā jāti punappuna    둑카- -띠 뿌납뿌낭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둑카였네.

 

 Through many a birth in samsara have I wandered in vain,

seeking in the builder of this house (of life).

Repeated birth is indeed suffering!

 

(법구경, Dhp153, 거해스님)

 

 

법구경에서 보는 부처님의 오도송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윤회(sasāra)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 태어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sasāra) 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또 하나 불행경(Duggatasutta)’을 들 수 있다. 이 경은 한역아함경에서 볼 수 없고 니까야에만 실려 있는 경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둑가따경-Duggatasutta- In Unpleasantness- 불행경, 상윳따니까야 S14.2.1,전재성님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4).docx

 

 

 

경에서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 문구에 대한 빠알리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Bhikkhave, sasāro,              빅카웨 삼사로

pubbā koi na paññāyati           뿝바 꼬띠 나 빤냐야띠

avijjānīvaraāna sattāna      아윗자니와라나낭 삿따낭

tahāsayojanāna               딴하상요자나낭

sandhāvata sasarata         산다와땅 삼사라땅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Monks,

without an end is the train of existence,

a beginning cannot be pointed out of beings enveloped in ignorance

and bound by craving, running from one existence to another.

 

 

이렇게 부처님은 윤회(sasāra)에 대하여 명확히 초기경전 도처에서 말씀 하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이와 같은 경전상의 가르침마저 부정한다. 


 

 

Samsara Eye

 

 


단멸론자의 말로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의 말로는 어떠할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난다까는 오늘날 서인도의 뭄바이 지방 북쪽에 있는 수랏타(Surattha)국을 다스리던 삥갈라(Pigala)왕의 장군이었습니다.

 

난다까는 보시 등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삿된 견해를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뱅골 보리수에 사는 아귀가 되었지만 난다까의 딸이 한 비구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자신의 공덕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자 천상의 음료수와 음식을 무한정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난다까는 그제야 업의 법칙을 이해하고 전생에 삿된 견해를 고수했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하루는 삥갈라 왕을 자신의 처소로 데려와서 왕과 시종들을 천상의 잔치로 접대하였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서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고, 난다까는 삿된 견해를 지니고, 도덕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 보시를 극구 반대한 업보로 악처에 태어났으며, 자기 딸이 공덕을 나누어 줌으로써 한순간에 자신의 처지가 바뀌게 된 경위를 들려주었습니다.

 

난다까는 죽고 나서 겪을 괴로움, 즉 인간계에 있을 때 삿된 견해를 지니고 성자를 헐뜯었던 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지옥의 무시무시한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마하시사야도, 12연기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

 

 

아귀사(餓鬼事)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한 단멸론자가 죽어서 아귀로 태어 났는데, 그는 보시를 하는 것이 쓸데 없는 짓이라는 삿된 견해를 갖고 또 성자를 비방한 과보 때문이라 한다.

 

오늘의 상황을 예측이라도 하듯이

 

죽음과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종교인들은 온 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하며  자신들의 논리를 주징한다. 이처럼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세상에 대하여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데  단멸론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단멸론자들은 죽으면 남는 것이 없고 저 세상도 없다고 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내부에서 조차 윤회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진짜 저 세상은 없는 것일까. 죽으면 끝이고 내생은 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막 살아 왔는데, 막상 죽고 나니 저 세상이 있을 경우 어떻게 될까.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하듯이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견해를 갖는다면, 그는 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사유를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언어를 말한다면, 그는 잘못된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세계를 아는 거룩한 이들에게 적대하는 것이 됩니다.

 

저 세상이 존재할 때에 ‘저 세상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악한 계행을 실천하며 앞서 있었던 선한 계행을 버립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 잘못된 언어, 거룩한 이에 대한 적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려줌, 스스로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 이러한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잘못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 The Inquiring Teaching-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아빤나까경(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docx

 

 

 

부처님은 먼저 저 세상은 없다라는 삿된 견해를 갖는 자들에 대하여 올바른 것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단멸론자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단멸론으로 받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절반의 성공을 위한 도박

 

내생은 없다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자들이여,

이것에 대하여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 The Inquiring Teaching-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반반의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첫째, 죽은 다음에 저 세상이 없을 경우이다.  이 경우 단멸론자들은 안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한 대로 “죽으면 끝이다”라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되는 대로 살면서 악행을 많이 저질렀을 때,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악행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둘째, 죽은 다음에 저 세상이 있을 경우이다. 이 경우 단멸론자들은 낭패를 보게 된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막행막식 하며 살았는데, 막상 죽어 보니 저 세상이 펼쳐 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 단멸론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불행한 곳, 처참한 곳, 비참한 곳인 악처가 되기 쉽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단멸론자의 선택은 절반의 성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절반의 성공을 위하여 도박을 거는 것 같아 보인다.

 

단멸론자들의 논리가 힘을 얻을 경우

 

만일 단멸론자들의 논리가 힘을 얻었을 경우 어떻게 될까.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 추구하는 삶만 가질 뿐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다라는 단멸론이 대세를 이룰 때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 단멸론이 대세일 때 막행막식하는 사람이 늘어 날 것이다. 사람들 중에 한 번 뿐인 인생인데라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경우 죽음 이후에 대하여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모르고, 아직까지 죽어서 되돌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은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죽으면 끝이지 뭐”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도 일종의 단멸론이다.

 

죽음과 내생, 윤회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즐기고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결과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게 되고 죽는 순간까지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도살장에 들어 가기 직전까지 발정난 돼지같은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둘째, 단멸론이 대세일 때 자살자가 급증할 것이다. 자살자들은 대게 내세나 내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어려움에 처해도 죽고 싶다고 한다. 요즘 청소년들과 연예인들의 자살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실제로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경우가 많다. 어떤 말을 하건 간에 “~죽겠다고 말한다. 아파도 아파 죽겠다라 하고, 좋아도 좋아 죽겠다라고 한다. 이처럼 죽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뒷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다는 단멸론이 힘을 얻을 때 쉽게 목숨을 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와 같은 단멸론으로 인한 막행막식과 자살은 절반의 성공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멸론자의 입장에서 내생이 없으면 성공이고, 내생이 있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박과 같은 것이다.  단멸론자의 말을 믿고 절반의 성공을 위하여 자살을 시도 한다면 낭패 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버리고 있다.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a- The Inquiring Teaching-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지런히 공덕을 쌓고 내생과 윤회를 믿는 자들은 저 세상이 있든 없든 간에 문제 될 것이 없다. 내생이 있으면 쌓은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날 것이고,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생은 없다는 단멸론을 믿어 막행막식하며 악행만 하고 산 사람이 죽었을 때, 내생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내생이 있다면 악처행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쪽만을 충족시키는 도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에서 논파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부수려 하지만 부수어 질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윤회를 믿으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부처님은 내생과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은 바른 견해라고 경에서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은 논파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윤회를 믿으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는 불교TV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열다섯까지 이득에 대하여 말하였다.

 

 

첫째, 윤회를 믿으면 자살을 하지 않는다.

둘째, 윤회를 믿으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셋째, 윤회를 믿으면 불교수행을 열심히 하게 된다.

넷째, 윤회를 믿으면 다음생을 준비하게 된다.

다섯째, 윤회를 믿으면 불만이 없고 행복해진다.

여섯째, 윤회를 믿으면 현재상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째, 윤회를 믿으면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한다.

여덟째, 윤회를 믿으면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아홉째, 윤회를 믿으면 남에게 해를 끼지지 않고 남을 돕는다.

열째, 윤회를 믿으면 보시를 열심히 한다.

열한째, 윤회를 믿으면 절 운영에 걱정이 없다.

열두째, 윤회를 믿으면 불법승 삼보를 믿게 된다.

열세째, 윤회를 믿으면 나날이 의미가 있고 새롭게 된다.

열넷째, 윤회를 믿으면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게 된다.

열다섯째, 윤회를 믿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전현수박사,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 , 제37 윤회는 불교의 핵심인가2)

 

 

윤회를 믿으면 가장 첫번째로 자살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요즘 청소년과 연예인들의 자살이 급증하고 있는데, 윤회에 대한 믿음을 주면 자살율은 훨씬 낮아 질 것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윤회를 믿으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였다. 내생에 대한 확신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는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만들어 버리는 외도들

 

단멸론자들을 과연 불자로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고 열심히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을 단멸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외도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만일 단멸론자의 의견대로 부처님이 오로지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치고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 당대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까지 쉼 없이 굴러 오고, 또 가르침을 훼손없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 온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판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그런 단멸론자들은 불자들이 아니라 외도일 뿐이다.

 

불교인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불교인을 가장한 것이 외도이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식 표현을 빌리자면 불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불교인이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단멸론 견해를 가진 자들은

 

이처럼 단멸론자들은 불교인 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불교인을 가장한 외도들에 지나지 않다. 붓다고사식 표현을 빌면 단멸론의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단멸론 견해를 가진 자들은

 

(1)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 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토막과 같다.

(5)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 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 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8) 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9) 수승한 법을 증득 할 수 없으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 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으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2012-07-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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