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간화선
영화 삼사라(Samsara)
영화 삼사라(Samsara, 2001)가 있다. 색계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티벳불교의 주인공 스님은 어려서 불문에 들어 왔다. 5세때이다. 불문에 들어 왔다기 보다 맡겨졌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 스님은 자라서 훌륭한 수도승이 되었다. 더구나 3년3개월간 히말라야 동굴에서 홀로 명상수행을 하였는데 영화속의 장면을 보면 머리카락은 길어 어깨까지 닿고 수염 역시 길게 자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고행을 한 끝에 마침내 도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도를 이루면 대자유를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번뇌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번뇌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스승이 동굴에서 묵언 정진 하고 있는 고명한 승려에게 보낸다.
“이 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그 고명한 승려는 주인공스님에게 남녀교합하는 장면이 있는 그림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그림을 약간 기울이면 교합하는 장면이 해골로 변한다. 모든 애욕이 허무하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자가 적힌 하나의 액자를 펼쳐 보여 준다. 한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 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이 문구를 보고 주인공스님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다섯살 때 절에 맡겨져 오로지 절에서만 살며 더구나 고행수행까지 한 주인공스님에게 상상도 못한 문구가 충격으로 다가 온 것이다.
“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
도는 오로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절에서만 이루는 것인 줄 알았는데 ‘세상속에 도가 있다니’ 마치 속아 산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래서 은사 스님에게 항의 하듯이 묻는다. 부처님은 29세까지 속세에서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고, 이후 출가하여서도 세상속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자신은 다섯살에 절에 들어와 부처님 같이 수행하며 살아 왔지만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수행후에 온다던 대자유외 금욕후의 만족감은 어디 있죠?”라고 물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
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
이후 주인공 스님은 환속하여 예쁜 아내를 맞이 하여 아들을 두게 된다. 마치 부처님이 출가 전에 경험하였던 세속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
영화에서 주인공 스님은 자발적으로 출가하지 않았다. 다섯살 때 절에 왔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하여 맡겨 졌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처럼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하고 도를 찾아 출가 한 것이 아니라 절에 맡겨져 자란 소위 ‘동진출가’의 문제를 보여 주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자발적출가가 아닌 동진출가자의 경우 유독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아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속세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두려움이 교차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여자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속의 주인공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 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여자 문제로 본다.
출가자의 삶, 재가자의 삶
영화에서 “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 하였다. 이 말은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독신수행을 해야만 도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도는 세상 사람이 사는 곳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세속에 도가 있다”라는 말이 선가의 ‘선어록’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동국대학술원장이자 미국 UCLA 석좌교수이기도 한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불교TV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에서 말하는 이런 여러가지 의심들은 주로 재가자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의심들입니다. 스님들의 일상이 아닙니다. 사실 대혜선사의 글을 보면 스님들에 대해 인생이 너무 쉬운게 아니냐는 약간 놀라는 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일정이 이미 다 잡혀져 있어 이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한 의구심이나 좌절이 일어날 여지가 많지 않다는 것이죠. 흐름에 몸을 맞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제28회, 불교TV 2012-01-07)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선사에 따르면 선불교에서 견성성불을 이루기 위해서는 출가자 보다 재가자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재가자의 삶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출가자의 삶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심, 걱정, 비관, 절망 등을 겪을 가능성이 적어 깨달음을 이루는데 있어서 재가자 보다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삼사라 영화에서 말하는 “세상 모든 곳에 도가 있노라”라는 말과 일치 된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수행을 위하여 가장 이상적인 공간은 재가자의 생이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재가자의 삶에는 좌절과 당혹감, 불안이 올라올 기회가 아주 많이 있으니까요. 학생여러분들은 인생에 걱정거리가 많죠. 성적, 학위, 졸업후 취업, 결혼 등 의심, 우려, 걱정할 것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녀, 돈 걱정, 퇴직후 생활 등 재가자의 생애는 의심을 일으키는 경험들이 많습니다. 이 자잘한 공안으로 큰 의심이라는 핵이 있으면 상당히 유용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의심들이 큰 의심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쓰일 수 있으니까요.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제28회, 불교TV 2012-01-07)
재가자의 삶은 출가자의 삶보다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라 한다. 그에 따라 걱정거리도 많이 생겨 나는데, 이런 걱정, 의심 등 온갖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의정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정은 의심, 걱정 등과 달리 공안의 의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대의정이라고 한다. 참고로 버스웰 교수가 설명한 대의정 대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간화선의 세가지 요체는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이렇게 세가지이다. 대신근은 큰 믿음의 뿌리라는 뜻이고, 대분지는 큰 열정적인 의도, 대의정은 큰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고봉선사에 따르면 대신근에 대한 정의는 “이것은 마음속에서 수미산에 기댄 것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대분지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열정적인 의도’라고 해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고봉선사는 “이는 친부를 죽인 범죄자를 맞닥뜨렸을 때 마음에 불끈 올라오는 분심, 이 악당을 단칼에 베고 싶은 분노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대단히 독특하고 과격한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 ‘분(憤)’자가 바로 ‘분노’라는 뜻이라 한다.
다음으로 대의정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고봉선사는 “혼자 있을 때 뭔가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 이것이 발각되기 직전에 느끼는 불안감과 비슷하다”라고 매우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다음 아직 아무도 모를 때 누군가에게 발각 될까봐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상태라 한다. 의정이 이와 비슷한 감정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의정에 대하여 대혜선사도 역시 당혹감, 불안, 좌절 등으로 묘사 하였다고 한다. 마음을 닦는 입장에서 본다면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들리는 것들이다. 인도 불교전통,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렇게 굳은 믿음과 열정적인 분노가 마지막으로 의심으로 이어지는 것이 간화선이라 한다.
선불교의 놀라운 통찰 하나
간화선에서 세가지 요체중 믿음과 의심은 서로 상반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용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간화선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불자들이 알고 있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다른 것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오해를 벗어 나는 것이라 한다. 즉, 마음속에 있는 ‘불성’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는 심경의 변화를 말한다.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믿음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깨달음을 위한 촉매로 보고 있다.
버스웰 교수는 선불교에 놀라운 통찰이 하나 있다고 한다. 비록 우리가 불성을 갖춘 존재이지만, 비록 동아시아 불교 전체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은 내재한다는 개념을 초석으로 세워졌지만 현실은 불교전통에 따르면 무한겁의 전생동안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확신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망상에 빠진 존재라고 믿고 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열정적인 수행자라도 스스로가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습관의 무게를 극복 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깨달았다는 사실, 진리를 성취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현실과 인간본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적응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도구로서 무조건 믿음을 완벽히 닦는 데만 몰두 하는 대신, 대혜선사는 수행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올라 올 수 밖에 없는 이 의심을 이용하자고 제시한 것이라 한다. 이 의심을 영적 수행을 진전시키는 추진력으로 사용한 것이다.
믿음과 의심은‘공생관계’
선불교에서 밈음과 의심사이에 불가피하게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내가 이미 깨달은 부처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믿음과 “왜 깨달은 존재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나는 부처야” 하는 믿음과 “나는 망상에 빠져 있어”라는 의심을 말한다. 선불교에서는 이 긴장을 깨달음을 이루는 촉매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고봉선사는 이런 믿음과 의심이 일종의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다. 고봉은 의심이 일어나는 정도는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와 일치하며, 믿음의 본질은 의심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선불교에서는 의심이라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가졋다는 사실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가 본래부터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이 의심을 개발하면 깨달음을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주하는 사고방식에서 우리를 밀어내고 ‘나’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심이 사라지면
의심은 사실 믿음의 가장 깊숙한 후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긴장이 열정적인 의도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답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 너무나 좌절하다 못해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죽이려는 자식처럼 보이는 열정을 말한다.
공안에 의하여 일어난 의심을 대의정이라 한다. 큰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대의정 이외에도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의심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의심은 평범한 삶에서도 의심은 일어나는데, 반드시 의심 뿐만 아니라 불안, 우려, 당혹감 등 누구에게나 항상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고봉선사는 다 유용한 것이라 하였다. 심지어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의심들도 큰 의심, 화두를 짓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화두 수행을 통해 핵심적인 의정이 일어나고, 그 밖에 인생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의심, 어리둥절함, 교통체증으로 인한 짜증, 돈에 대한 걱정, 결혼 했으면 배우자, 스님이면 신도들에 대한 걱정, 우려, 의심들이 대의정을 중심으로 모여 대의정을 더 커지게 한다고 한다.
이 모든 의심이 공안으로 일어난 의정을 중심으로 모이면 마음속에 압력을 더욱 거세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궁극적으로 공안을 해결로 이끈다고 한다. 따라서 공안의 한 의심을 해결 할 수 있으면 어떠한 의심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대의정이 핵이 되어 모든 의심을 다 해결해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고봉선사는 이렇게 모든 의심이 사라지면 석가모니와 미륵과 똑같아 진다고 하였다. 석가모니는 현세불이고 미륵은 미래불이기 때문에 그들과 똑 같아 진다는 것이다.
재가자의 삶 자체가 수행공간
이렇게 버스웰교수는 의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간화선의 세가지 요체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의심을 하여 의정이 갖추어지게 되고 이 의정이 핵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한다. 이 핵이 갖추어지면 인생에 대한 모든 자잘한 의구심은 핵심적인 의정을 더욱 강화 시키는데 이런 현상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고봉과 대혜선사는 모두 간화선 수행을 위한 이상적인 공간은 절이 아니라 재가자의 생이라고 했습니다.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제28회, 불교TV 2012-01-07)
간화선을 주창한 선사들이 이상적인 수행공간이 재가자의 삶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나라 선사들로부터 결코 들어 본적이 없다. 이에 대하여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궁금해 질 수 밖에 없죠. 간화선 수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엄청난 관심과 집중을 요한다는 것을 알 겁니다. 세속의 삶속에서 쉽게 개발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선사들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일단 의심을 일으키고 나면 세속의 삶속에는 이를 강화시킬 기회가 많다가 아닐까 합니다.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제28회, 불교TV 2012-01-07)
버스웰 교수는 실제로 간화선 수행을 해 본 사람이다. 20대 초반 송광사에 출가 하여 구산스님으로부터 수년간 지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간화선이라는 것이 엄청난 집중을 요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절에 격리된 스님보다
그러나 의심을 일으키고 나서 그 이후에는 세속의 삶이 더 유리할 것이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봉과 대혜는 어떤 의미에서 세속의 삶을 종교 수행을 위한 이상적인 훈련소로 보았습니다. 좌절, 불안, 의심이 일어날 기회가 과하다 싶을 만큼 많으니까요. 간화선에서는 요긴한 무기입니다.
또한 재가자가 맞딱뜨리는 장애는 너무나 생애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고 또한 매우 유혹적입니다. 이성, 부, 명예 등 우리를 홀리게 하는 모든 속세의 장애들을 이겨 낼 수 있다면, 고봉선사가 ‘력(力)’ 즉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 크게 향상 됩니다.
역동적인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죠.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는 이 모든 장애와 유혹을 견뎌 낼 수 있으면 커다란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고봉선사는 절에 격리된 스님보다 오히려 더 강한 힘이 생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버트 버스웰,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제28회, 불교TV 2012-01-07)
간화선 수행자에게 의심이나 좌절 등 번뇌가 일어나면 날수록 좋다는 뜻이다. 그런 장애를 이겨 낼 수 있을 때 강한 힘이 생기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번뇌는 세속에 사는 재가자에게 많이 일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재가자의 삶 자체가 수행을 하기 위한 커다란 훈련소와 같다고 한다.
재출가를 결심하고
앞서 언급한 영화 삼사라에서 주인공 스님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출가한 주인공스님은 예쁜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들까지 두게 된다. 그런 주인공은 이제 더 이상 스님이 아니다. 들에 나가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재가자로서 삶을 살아 간다.
그렇게 재가자로서 삶을 살아 가다 은사스님의 입적소식을 듣게 되고 은사스님의 편지 내용을 보고 다시 ‘재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고뇌를 겪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게 영화에서 출가와 환속, 그리고 재출가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세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과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라고 말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경계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선사들은 해제가 되면 만행에 나선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수행의 경계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음을 알아 보기 위하여 일부로 시험에 든다는 것은 마치 소설가가 감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여 일부로 범죄를 저지른 후 감옥에 들어 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일부로 번뇌를 만들어 깨달음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일부로 경계를 시험 함으로서 번뇌를 유발하는 것과 달리 재가자의 삶자체는 번뇌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루 바삐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기 때문에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선사들이 추구하는 깨달음은 이와 다르다. 선불교식 깨달음은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본래 부처임을 깨닫기 위한 수단이 ‘의심’이고, 그 수행방법이 ‘분심’이라 한다.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는 것(ayoniso manasikāra)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번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번뇌의 경 (삽바사와경, M2)’에서 ‘나를 찾는 수행’자체를 번뇌로 간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쓰는 것(ayoniso manasikāra)’이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삽바사와경-Sabbāsavasuttaṃ -All Desires-모든 번뇌의 경, 맛지마니까야 M2, 전재성님역)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docx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pdf
이렇게 나를 찾는 수행은 번뇌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수행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간화선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의심을 들 수 있다.
의심은 알아차려할 대상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의심은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소이다. 그래서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해로운 마음으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띠빳타나경(염처경, M10)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안으로 의심이 존재하면 ‘나에게는 안으로 의심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으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안으로 의심이 없다.’라고 분명히 알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심이 생겨난다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생겨난 의심을 버리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버려진 의심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사띠빳타나경-Satipaṭṭhānasuttaṃ- Establishing Mindfulness-새김의 토대애 대한 경-염처경, 맛지마니까야 M10, 전재성님역)
사띠빳타나경(염처경-M10).docx 사띠빳타나경(염처경-M10).pdf
이렇게 부처님은 의심에 대하여 알아차려 소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지 이를 이용하여 깨달음으로 활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분심도 마찬가지이다. 분심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함께 소멸시켜야 할 번뇌로 본 것이다.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이처럼 간화선에서 활용되고 있는 의심과 분심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을 위하여 소멸시켜야 할 번뇌로 본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화선에서는 이와 같은 번뇌에 대하여 선불교식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는 마치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것과 비슷하다.
버스웰 교수는 화두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의학적 접근방법인데요, 동종요법(homopathy)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의학법인데요, 동종요법은 병을 치료 하기 위하여 의사들이 아주 소량의 독극물을 사용하여 몸의 질병 극복반응을 촉발시켜 병을 치료 하는 것입니다.
몸에 안 좋은 독약을 사용하여 보다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극소량의 비소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비소는 아주 위험한 독소이지요.
하지만 극히 미세한 분량을 처방하면 몸에 질병극복 반응을 촉발시켜 질병이 치유 될 수 있습니다. 꽤 오래된 의학이론으로 아마 신빙성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학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이론입니다.
(로버트 버스웰,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제 27회, 불교TV 2011-12-13)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언어라는 독약을 아주 소량 사용하여 보다 심각한 질병 즉, 개념화 자체 또는 개념화 과정 전체를 치유 하는 것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를 이용하여 보다 큰 번뇌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이 또한 간화선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시술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방법과 부처님의 수행방법은 너무나 다르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탐진치 등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지만, 간화선의 경우 번뇌로서 번뇌를 해결하여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번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깨달음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 하여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라는 말이 생겨 났을 정도이다.
문제는 없는 번뇌도 만들어 깨달음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제철의 만행도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계를 시험하는 좋은 기회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도박, 음주, 흡연, 룸살롱, 성매수, 은처 같은 낯뜨거운 용어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번뇌이자 동시에 수단으로 보는 것일까.
2012-06-19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반의 성공을 향한 단멸론자들의 도박 (0) | 2012.07.04 |
---|---|
다양하고 풍요로운 부처님의 중도사상(中道思想) (0) | 2012.07.03 |
초기불교가 미완성이라고? 일체지자로서의 삼마삼붓다(정등각자) (0) | 2012.06.01 |
거실에 빠알리 니까야를, 왜 빠알리 니까야를 사보아야 하는가 (0) | 2012.05.31 |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미안과 맛지마 니까야 (0) | 2012.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