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기절정의 혜민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된 설법을 구사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2. 8. 1. 19:44

 

 

인기절정의 혜민스님,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된 설법을 구사해야

 

 

 

인기절정의 혜민스님

 

혜민스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것 같다. 최근 혜민스님의 대중강의 일정표를 보면 거의 매일 이루어지고 있고 심지어 하루에 두 차례에 열리는 것도 있다. 참고로 혜민스님의 블로그에 소개된 대중강의 일정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7월 14일, 오후 4시:

광주 KT문화재단 웨딩홀 마음 치유 콘써트 (동구청 근처, 위치 링크 아래):

 

7월 15일 오전 11시:

군산 흥천사 법회 

 

7월 17일 낮 12시:

대전 롯데 백화점 문화센터 마음치유 강의

(대전 롯데 문화센터로 전화 문의)

 

7월 17일 저녁 7시:

서울 김포 롯데 문화홀 마음치유 강의

(김포 롯데 문화센터로 전화 문의)

 

7월 19일 오후 3시

익산 원광 대학교, 마음치유 원리 강연

 

7월 19일 저녁 6시

전주 롯데 백화점 문화센터 마음치유 강의

(전주 롯데로 전화 문의)

 

7월 21일 오후 4시:

부산 MBC 홀 마음치유 콘써트 

 

7월 21일 저녁 8시:

부산 해운대 부처님 마을, 강연 

(MBC홀에 들어가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7월 22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상도선원 일요법회

 

7월 23일 저녁 7시30분:

대구 엑스코, 마음치유 콘써트

 

7월 24일 오전 10시30분:

대구 보성선원, 법회

 

7월 28일 저녁 7시:

제주 한라대학교, 마음치유 콘써트

 

7월 30일 오후 4시:

서울 고려대학교 도서관, 강연 

(16일부터 도서관 웹싸이트 통해 접수)

 

8월 3일 대략 오후 6시쯤

서울 SBS 방송국, 지식나눔 콘써트 아이러브인 녹화

(방송 모객 광고 일주일후에 방영 시작)

 

(혜민스님의 대중강의 일정표)

 

 

7월 중순이후 일정표인데 거의 살인일정이라 볼 수 있다. 전국을 무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혜민스님의 인기는 법륜스님과 거의 맞먹는 듯하다.

 

불교계는 물론 전국민들도 이제 혜민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된 것 같다. 아마도 여러 차례의 공중파 방송출연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혜민스님은 여러모로 스타스님이 될 조건을 타고 난 것 같다. 우선 외모부터 영화배우 빰치는 미남형이고 하바드대학으로 표현되는 남부러울 것 없는 학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렇게 외모와 학벌, 현직교수등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스펙에다 스님이라니 세간의 주목을 받고도 남음직 하다.

 

혜민스님을 알게 된 것은

 

혜민스님을 알게 된 것은 지난 2005년도이다.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2005년도 법보신문을 통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당시 혜민스님은 법보신문 세심청정이라는 컬럼에 글을 기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바드 학생신분일 때이다.

 

그때 당시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는데,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였고 그 대신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 실려 있는 좋은 글을 퍼 나르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 그때 혜민스님의 글도 열심히 퍼 날랐다. 그렇게 한 이유는 글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주로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낀점 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블로그 고층(2005년 또는 2006)에 들어가면 그 때 당시 혜민스님의 글을 볼 수 있다.

 

혜민스님의 글을 접하면서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를 마친 다음에 서명하는 것이었다. ‘연월일을 쓰고 자신의 법명인 혜민이라는 문자를 기록 하는 서명을 본 것이다. 2006년부터 글쓰기를 하면서 이를 채용하였다. 그래서 직접 작성한 모든 글에 반드시 연월일을 작성하고 그 밑에 붙인 글자로 하여 진흙속의연꽃이라고 서명을 하였다.

 

혜민스님의 불교관은?

 

최근 혜민스님의 인기가 치솟음에 따라 불교계는 물론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올랐다. 그래서 국민멘토로 부상하였는데, 혜민스님의 말 한마디에 위로 받는 수 많은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가 된 것 같다.  21만명 이상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혜민스님의 트위터에서는 연일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최근 박태환 선수와 관련 하여 박태환 선수, 괜찮아요. 괜찮아요. 정말로 열심히 끝까지 잘 해 주었어요. 얼마나 맘 고생 했을까. 토닥토닥~ (7 28)” 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계는 물로 전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혜민스님이지만 스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스님의 대중법회에서 법문한 내용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이제열 법사는 미디어붓다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하지만 스님의 다보법회 설법 내용들 속에는 치열한 구도의지와 수행 정신은 엿볼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해 정견(正見)을 갖추고 공부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혜민 스님이 설법한 내용 가운데에서 스님의 개인적 체험에 관한 것들은 그렇다 치고, 논자가 무엇보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곳은 “원래부터 있어 왔던…” 운운하는 부분이다. 스님은 설법 가운데에서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찾는 것이 불교이며 수행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불교가 몸과 마음과 세계의 근원이 되는 주인공을 찾고 본래면목을 깨닫고 참나, 진아(眞我) 따위를 보는 종교인가? 원래부터 있어온 그것이라는 표현을 중점적으로 두고 설법을 했는데, 스님이 진아론(眞我論)을 믿는 힌두교도인지 아니면 성리를 주장하는 도교(道敎)의 수행자인지 정체성에 의문이 간다.

 

(이제열법사, 有見 지니고 설법하는 혜민스님은 힌두교 수행자인가? 도교의 수행자인가?  미디어붓다 2012-07-31)

 

 

 

사진 : 디어

 

 

재가결사 법림을 이끌고 있는 이제열법사는 혜민스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다. 스님의 법문중에 불교의 정체성을 의심받을 만한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주인공또는 본래면목이라는 말이다. 이런 용어 사용에 대하여 힌두교의 교리를 주장하는지 도교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사실 혜민스님의 불교관에 대해서는 몇 차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스님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을 보고 나서이다. 스님이 올린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뒤는 무형상이라서 컴퓨터 모니터보듯 볼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확인할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그럼 조금전까지만 해도 텅텅비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까요?

텅텅비어 고요했는데 그 텅텅비어 고요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거

그리고 지성知性 있어서 빛보다 빠르게 안다는 거

텅텅비어 아주 고요한 상태로 살아있는 그것이 내 본성입니다.

그것이 알아챔, 앎 자체입니다.

내면의 빛을 본다던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던가

천상에 있는 듯한 말할수 없는 지복감이나

부처님, 예수님을 명상이나 기도중에 만난다던가

화두가 깨지고 밑둥이 확 빠진듯한 느낌이나

내 몸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한 상태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경험이 아니고

 

 

오직 

오직

오직 앎만이 해탈을 시켜 줍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해탈할것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앏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앎 스스로를 확인할때 그렇다는 것을 앎니다.

즉 이 앎은 희한하게도 앎 스스로를 확인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앎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앎이 묘 부려서 

둘로 셋으로 나온후 원래 하나라는 것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앎은

개념적 앎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나간후에 

그 마음 바탕을 확인한 앎입니다

즉 텅텅 빈 본성이 듣고 말하고 쓰고 다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텅텅 빈채로 있는 그 본성은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한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즉 아주 고요히 텅빈채로 있는 그것이 즉 앎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마음의식) 공간=앎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앎을 통해서 

눈을 떠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앎에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앎 자체가 공간화 되어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앎과 공간안의 대상들이 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마음뿐 입니다.

 

 

하나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앎자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비여있다는 앎이 물질에 스며들어 보입니다.

즉 물질, 사람, 소리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앎이 물체를 투과하면서 자성自性 없이 비여서 있음을 스스로 앎니다.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실을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놈 스스로가 있는 그 자리 ,  관자재 보살이 이것이라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문 不二門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 앎이라는 사실을

비어서 고요한데 영묘하게 아는 공적영지 空寂靈知 바로 이거라는 사실을

눈앞에 홀로 밝은 이놈

이 앎만 또렸합니다!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이글은 혜민스님이 2011 12월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글을 하나 쓴 것이 있는데 <‘그놈’이나 ‘그분’이나,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이다.  

 

어느 기독교인은

 

위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글이 실리고 난후 혜민스님의 블로그에는 수십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주로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 어느 기독교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기도 하였다.

 

 

요한복음 1장을 읽는 기분인데요ㅎ
여기 수행법으로 가면 불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없는듯해요.
다르다면 그 앎을 인격화시킨 것이 기독교라는...^^
저도 이런 기도법이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긴해요.
짧은 저의 지식을 주워섬겨 비유한다면
앎이라는 신에 공명 내지는 감응하는
거울뉴런을 제한하는 인슐라 영역(몸에서 뇌로 오는 감각정보의 물류센터)의 차단방법...?
그래서 신 혹은 앎과 하나되는 경험, 공감하게 되는거죠...
하지만 우린 실제로 몸을 가진 인간이기도 하고
또한 산 위에서만 살 수 없거든요..
지루한 일상과 어쩌면 악다구니같은 세상의 필요가 기다리고 있으니....^^
위에 어느분 언급하셨듯 일상으로 돌아가는순간,
그 깨달음의 경험들은 언제그랬나싶게 무색하게 느껴지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삶의 현실에 튼튼하게 기반한 기도, 평범한 삶을 살아나가는 기도가
속세를 살아나가는 우리에게는 또한 많이 요청된다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이의 댓글)

 

 

어느 기독교인은 혜민스님의 글 깨달음이란?’글을 읽고 마치 요한복음 1장을 접하는 기분이라고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기독교 바이블의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분과 혜민스님의 글에서 ‘그놈’과 거의 같은 느낌이다. 더구나 혜민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그놈에 대하여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라고 말하였는데, 그놈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뿐인님’을 줄이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를 보고 그 기독교인은 댓글에서 요한복음1장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혜민스님의 글에서 말하는 그놈은 받아 들이기에 따라 기독교의 그분으로 오해하기 쉽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선불교의 영향때문이라 본다. 혜민스님이 법문한 내용이 모두 선종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선사들의 법문을 들으면 참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종정에 취임한 진제스님의 경우 입을 열었다 하면 참나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이제열법사는 미디어붓다 기고문에서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입만 열면 끊임없이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등의 언설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리고 표현 하고 있다.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을 찾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개념이 나오게 되었을까. 특히 선불교에서 일상화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요즘은 스마트폰시대이다. 010 정책에 따라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스마트폰은 일종의 소형컴퓨터와 같다. 각자 작은 컴퓨터를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스마트 폰이다. 그런 스마트폰에서 전화기능은 수많은 부가 기능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종전의 핸드폰에서는 전화기능이 메인이었다면 스마트폰에서 전화기능은 서브기능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스마트폰인데 종종 방에서 스마트폰을 볼때가 있다. 그럴경우 불교TV와 접속한다. 수많은 법문과 강좌가 스마트폰 사용자에 맞도록 올려져 있는데, 그 중에 김종욱 교수의 강좌시리즈가 있다. 그 중에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이 있다. 23강을 보면 자성(自性)’에 대한 강좌가 있는데, 이 강좌에서 김종욱 교수는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자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자성은 고유성개념입니다.”

 

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자성(自性)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설일체유부의 자성과 대승불교의 자성과 선불교의 자성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자성에 대하여 실체성으로 본다고 한다. 이런 실체성이 결국 새로이 일어난 대승불교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용수의 중론은 설일체 유부의 실체성을 비판하여 무자성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 와서 다시 자성을 찾자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일체유부에서 주장하는 자성과 대승의 자성과 선불교의 자성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먼저 설일체유부의 자성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자성은 고유성개념입니다. 자기만의 존재방식이 그만의 고유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최종적으로 부활시키고자 한 것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것인데, 이렇게 보면 설일체유가 주장하는 자성이라는 것은 대승불교가 공격을 하기 이전에 그 자신의 입장으로 본다면 제가 보기에는 고유성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김종욱 교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제23강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 자성, 2008-03-24) 

 

 

김종욱 교수는 설일체유부의 75법에 대하여 실체성이라기 보다 고유성의 주장에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오온 무아라고 했을 때 색은 색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실체성이 아니라 고유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75법에 대하여 자신들끼리는 원래부터 고유성으로 쓴 것이라 한다.

 

중관학에서 이해하는 실체성

 

대승불교가 일어날 당시 설일체유부는 가장 영향력이 큰 학파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설일체유부를 극복하지 않으면 성립되기 힘들었기 때문에 치고 넘어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부의 고유성을 공격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 예로 중관학을 들수 있는데, 중관학에 따르면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것은 실체성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75법이 독립해 있다는 것을 반박한 것이다. ‘독립해 있다면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연기법과 모순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한 것이다. 연기이므로 고립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용수는 설일체유부는 연기이므로 유자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은 연기이므로 무자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라 한다. 연기를 관계성이라고 이해 한다면 관계성과 독립성은 충돌하기 때문에 독립적 실체성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수에 따르면 자성이 없다는 것(무자성)은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라 한다. 그래서 연기이므로 공이다라는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설일체유부룰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소위 무자성 공이라고 하였을 때는 용수의 중관학에서 이해하는 실체성으로서의 그 자성을 주로 이야기 하는 것이라 한다. 인도의 대승불교이다.

 

선불교에서는  자성을 찾자고 하는데

 

그런데 중국으로 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중국에서 선불교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을 이야기한다.  

 

견성이란 무엇일까. 이는 견자성(見自性), 견불성(見佛性)을 의미한다. 우리 내면의 자성과 불성을 보기만 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불교에서는 자성을 보자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자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소승부파불교에 가까운 것이다.

 

대승에서는 자성이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같은 대승인 선불교에서는  자성을 찾자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글자로 보면 다 자성이라는 한글자이지만 내용이 다릅니다.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자성이 고유성이고, 중관학에서는 자성이 실체성이라면, 선불교의 자성은 본래성인 것입니다. 연기를 깨우쳐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그 능력이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가 성립하고 나서도 천년이 훨씬 더 지나고 난 다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부처님과 멀어져 갑니다. 멀어질수록 우리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김종욱 교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23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자성, 2008-03-24) 

 

 

설일체유부는 연기를 유자성으로 보았고, 인도 대승에서는 연기를 무자성으로 보았지만, 선불교에서는 연기를 통한 자각의 가능성이 내 속에 있느냐 없느냐로 본 것이라 한다. 이것이 천년의 시차와 중국이라는 지역적 차이로 인하여 발생된 개념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천년이나 지난 나도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라고 하며 그런 것에 관심있었다고 한다. 즉 본래성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자성

비고

설일체유부(부파불교)

고유성

연기-유자성

중관학(용수, 인도대승)

실체성

연기-무자성

선불교(중국불교)

본래성

연기를 통한 자각의 가능성

 

 

표에서 중요한 것은 자성에 대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경우 인도대승에서 75법에 대하여 독립된 실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라 공격하였지만, 유부에서는 자신들끼리는 자성에 대하여 고유성이 발현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부를 공격한 용수는 연기이므로 무자성이라 주장하였고, 이는 연기를 또한 관계성이라 보았다. 이를 공의 논리로 설명하였는데, 결과론적으로 자성에 실체가 있다라고 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대하여 진공묘유로 설명한다.

 

이렇게 유부는 자성에 대하여 고유성’, 중관학에서는 실체성’, 선불교에서는 본래성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중국식대로 소화 된 것이 선불교

 

선불교 주장의 핵심은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이 두 개의 용어에서 주목해야 할 문자는 심()과 성()이라 한다. 선불교의 모토는 돌아가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아 성불하는 것이다. 그 때 성()불성일 수도 있고 자성일 수도 있다.

 

선불교는 중국불교의 독자적인 학파라 한다. 당나라에서 시작하여 송나라 때 만개를 하였는데, 가장 중국적인 불교의 대표로 본다. 중요한 것은 선불교가 중국적불교라는 것이다. 중국적이라는 말은 심성론인성론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철학의 핵심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 오기 이전에 이미 중국만의 독자적인 철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을 말한다. 이렇게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고도의 철학체계가 있었는데, 그것을 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성철학을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같은 것이다.

 

핵심은 성에 대한 담론이다. 태어날 때의 그 마음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본성은 모두 마음을 통해서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오자 중국식대로 소화 된 것이 선불교라 한다. 따라서 불성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내면의 심성을 개발하면 되는데, 나의 자성을 개발하면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선불교에서의 불성 또는 자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일체유부의 자성(스바바와)과 무관하게 지극히 중국철학적 발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성이라는 것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용수로 대표 되는 인도대승과도 다른 것이다.

 

상호의존적 관계성으로 보는 연기

 

하지만 김종욱 교수는 설일체유부의 고유성, 중관학의 실체성, 선불교의 본래성에 대하여 다 성립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다 틀리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설일체유부도 일리가 있는데, 이는  그만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연기를 관계성으로 본다면 실체성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여 무자성 공이라 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고, 선불교도 우리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본래면목을 회복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본다면 선불교의 본래성을 자성이라고  해서 견성하자고 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연기를 통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기는 관계성입니다. 상호의존적 관계성입니다.  

 

(김종욱 교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23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자성, 2008-03-24) 

 

 

김종욱 교수는 연기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관계성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이고 충돌 되지 않는 것이라 한다.고유성, 실체성, 본래성은 모두 연기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대철학적으로 본다면 관계성 속에서 어떻게 고유성과 비실체성(공성),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철학의 영원한 테마라 한다.

 

법계연기는 어떤 것일까

 

김종욱 교수는 관계성 속에서 어떻게 고유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말한다. 그런 관계성을 연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에 해당된다. 그런 법계연기는 어떤 것일까,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엄종에서는 인도사상가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더럽고, 타락하고, 무상하고, 고통에 가득 찼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존재 자체로 깨달음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힌 그믈을 형성하며, 그 그믈 안에서 각 부분들은 모두 연결되어 거대하고 완전한 전체, 일체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근간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수히 많은 차원에서 서로 연결된 상입, 혹은 완전한 융합, 즉 원융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근본개념은 이 상호관계가 개별성을 정의한다는 것이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고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정해진다고 한다그래서 개인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지는 상호관계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산물로 보는 것이다.

 

(로버트 버스웰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8)

 

 

이와 같은 대승의 법계연기는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 법계연기의 특징은 상호의존으로 본다. 이는 선형적인 인과가 아니라 무한대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인과를 말한다. 그래서 “우주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만물이 서로를 창조한다”는것이다. 이런 인과에 대한 설명은 초기불교와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인과가 ‘선형적으로’ 설명된다. 근본원인이 있고 부수적인 조건들과 합쳐져서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주변조건이 갖추어 지면 원인이 과보를 맺는 것이다. 만물은 모든 조건이 들어 맞아야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조건들이 제거되면 모든 만물이 소멸할 것이며 따라서 만물이 무상한다고 믿는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된 설법을 구사해야

 

이처럼 초기불교의 연기와 대승불교의 연기관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불교는 중국적 토양속에서 발생된 중국화된 불교로서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또 다른 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초기불교와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예를 혜민스님의 법문에서 볼 수 있다.

 

혜민스님이 법문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 중국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에 근거 한 것이다. 그런 법문에 대하여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초기불교를 접하고 있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더구나 참나, 본래면목과 같은 실체론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것도 확산 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혜민스님은 중국식 불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설법을 할 필요가 있다. 이제열 법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들어야 할 듯하다.

 

 

혜민 스님은 외국의 명문대학 출신 교수라는 경력과 출가 수행자라는 신분으로 불자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서 있어 언어의 파급력이 매우 큰 분이다. 따라서 스님은 누구보다도 더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된 설법을 구사해야 하고 정법에 입각한 교화 활동을 펴야한다고 본다.

 

(이제열법사, 有見을 지니고 설법하는 혜민스님은 힌두교 수행자인가? 도교의 수행자인가?  미디어붓다 2012-07-31)

 

 

 

2012-08-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