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탄광의 광부가 석탄을 캐는 심정으로…”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책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7. 30. 15:49

 

 

탄광의 광부가 석탄을 캐는 심정으로…”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책들

 

 

 

법구경 담마빠다를 구입하고

 

책을 한 권 구입하였다. ‘법구경이다. 시중에 수 많은 법구경이 있지만 특별히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법구경 담마빠다를 구입하였다. 그런데 구입비용이 만만치 않다. 정가가 5만원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가격 비교를 하여 가장 싼 곳에 주문하였다.

 

이렇게 가격이 꽤 됨에도 불구하고 구입하려는 것은 빠알리 원본을 직역한 것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 많은 법구경을 보아 왔지만 대부분 일본어판등을 참고 하여 중역한 것이 대부분이고 심하게 윤문한 흔적을 보이는 것이 많다.

 

인터넷에서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법구경 담마빠다는 빠알리 원전번역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사원에서 전승되어 온 문헌학적 주해를 보충해 2023개의 주석을 달아 놓았다고 한다. 철학적 주석뿐만 아니라 방대한 인연담까지 총망라하여 세계최초로 출간한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86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 된 것 같다.

 

이렇게 단순히 게송만 직역한 것이 아니라 인연담, 주석 등 철학적 사유 등 각종 읽을 거리가 있다는 것이 매력을 끌었다. 이런 점이 가격이 비싼 느낀 점이 들지만 저자 특유의 고증과 해석을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주저 없이 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저자의 명쾌하고 유려한 번역때문이다. 특히 게송에서 그렇다.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것이 게송이라 하는데, 이는 인문학적, 철학적 소양이 밑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게송에 대한 번역문은 이미 상윳따니까야나 숫따니빠따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런 번역을 한 전재성 박사는 어떤 분일까.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책들

 

전재성 박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책과 인터넷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전재성 박사는 4부 니까야 완역자로 알려져 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일 뿐만 아니라 세계최초라 한다. 한사람의 힘으로 4부 니까야를 번역한 것은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4부 니까야 뿐만 아니라 쿳다까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전들도 번역하였다는 사실이다. 숫따니빠따, 법구경, 우다나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 박사는 5부 니까야 번역에 모두 관계 되어 있는데, 이런 기록은 아마 전세계적으로 깨어지지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책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4부 니까야를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편의상 다른 번역자들도 함께 실었다. 그리고 주요한 요약본도 함께 소개 하였다.

 

 

4부니까야

 

니까야

 

성전협회

초불

1

디가니까야

(Digha Nikaya)

-긴 길이의 경.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의 경우 96페이지에 달한다.

-웅대하고 철학적 내용으로 구성됨.

-34

-디가니까야

(2011 1, 전재성박사)

 

-요약본: 신들과 인간의 스승

디가니까야

(2006 3, 각묵스님)

2

맛지마니까야

(Majjhima Nikaya)

-중간길이의 경.

-3-8페이지정도의 길이.

-수행을 위한 가장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

-152

-맛지마 니까야

(2003년 초간 5, 2009년 개정판 1, 전재성박사)

 

-요약본: 명상수행의 바다

-

3

상윳따니까야

(Samyutta Nikaya)

-56개의 주제로 구성됨.

-반페이지도 않되는 짧은 경부터 그 길이가 다양함.

-단순하고 소박한 문장구조으로 고층으로 분류됨.

-2,904

-쌍윳따니까야 (1999년 초간, 2002년 전 11권 완간,

2007 개정본 전7, 전재성박사)

 

-요약본: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상윳따니까야

(2009년 전6, 각묵스님)

 

-요약본: 초기불교의 이해

4

앙굿따라니까야

(Anguttara Nikaya)

-법수에 따라 구분됨.

-가장 늦게 성립된 경.

-기본적인 윤리, 수행, 바른 지혜를 강조.

-2,344

앙굿따라니까야

(2008 11. 전재성박사)

-앙굿따라니까야

(2007, 대림스님)

 

-요약본: 가려 뽑은 앙굿따라 니까야

 

 

표를 보면 4부 니까야 번역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전재성박사로 대표 되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물이고, 또 하나는 대림-각묵스님으로 대표 되는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물이다.

 

이 두 가지 부류에서 전재성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니까야를 번역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4부 니까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상윳따니까야(1999)와 맛지마니까야(2003)를 최초로 번역 하였다.

 

이후 각묵스님의 디가니까야(2006), 대림스님의 앙굿따라니까야(2007), 전재성박사의 앙굿따라니까야(2008),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2009), 전재성박사의 디가니까야(2011) 순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는 빠알리니까야 번역본을 모두 갖게 되었다.

 

 

이렇게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서 핵심만 추려 한권으로 만든 책도 있다. 전재성 박사의 경우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이라는 책은 상윳따니까야의 요약본이고, ‘명상수행의 바다는 맛지마니까야의 요약본이고, ‘신들과 인간의 스승의 스승은 디가니까야의 요약본이다.

 

초기불전 연구원의 경우 초기불교의 이해는 상윳따니까야를 기본으로 하여 편집된 교리서이고, ‘가려뽑은 앙굿따라니까야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을 뽑아서 한권으로 만든 책이다.

 

이렇게 니까야를 한권으로 가려 뽑아 만든 이유는 일종의 경전 맛보기라 볼 수 있다. 이만원대의 책이 구매에도 부담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일종의 안내서라고도 볼 수 있다.

 

게송 번역은 어려운 것이라는데

 

다음으로 쿳다까니까야에 대한 것이다.

 

 

쿳다까니까야(Khuddaka Nikaya)

 

경전

 

성전협회

초불

1

쿳다까빠타

(Khuddakapatha,小誦經)

-20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경 9개로 이루어짐

-초심자들의 수련을 위한 가르침으로 편집

축복이나 예식의 독송용

-9

 

 

2

담마빠다

(Dhammapada, 法句經)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

-윤리적인 가르침으로 진리의 정수가 응축된 단순하고 짧은 게송

-붓다고사의 주석서에 350개의 인연담이 있음

-423게송

-BC 4-3세기

법구경 담마파다

(2008 , 전재성박사)

 

3

우다나

(Udana, 自說經)

-부처님 자신이 마음에 깊이 감동되어 스스로 말씀하신 게송.

-80 게송

우다나

(2009, 전재성박사)

 

4

이띠웃따까

(Itivuttaka, 如是語經)

-매경마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를 강조.

-자설경과 유사한 경.

-게송과 산문이 섞여 있음

-112

 

 

5

숫따니빠따

(Sutta Nipata, 經集)

 

-1, 4, 5장의 주석서가 닛데사임.

-경의 내용이 다른 니까야와 소송경에 사용됨.

-고층적인 문체와 게송, 단순하고 소박한 기르침

-55,1149게송

- 부처님재세시

숫타니파타

(2004, 전재성박사)

 

6

위마나왓뚜

(Vimanavatthu, 天宮事經)

 

-천신에게 전생에 어떤 선업을 쌓아 이런 좋은 세계에 태어났는지를 물음.

-천신들의 공덕에 대한 인연담을 소개

-85이야기

 

 

7

뻬따왓뚜

(Petavatthu, 餓鬼事經)

 

-아귀에게 어떤 악업을 지었기에 아귀로 태어났느냐는 물음.

-아귀들의 악행에 대한 과보이야기를 소개

-51이야기

 

 

8

테라가타

(Theragatha, 長老偈經)

 

-264명의 장로비구의 게송.

-장로비구들의 깨달음과 수행, 해탈의 기쁨의 게송을 모은 것.

-5세기에 담마빨라는 게송에 대한 주석을 함

-1279게송

-부처님재세시

 

 

9

테리가타

(Therigatha,長老尼偈經)

 

-92명의 장로비구니의 게송.

-20개의 게송이 다른 빠알리경전에 있어서 고층에 속함.

-장로비구니들의 깨달음과 수행, 해탈의 기쁨의 게송을 모은 것.

-5세기에 담마빨라는 게송에 대한 주석을 함

-522게송

- 고층에속함

 

 

10

자따까

(Jataka, 本生經)

 

-가장방대한 경전.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5세기 붓다고사가 주석함.

-32547이야기

-BC3세기

 

 

11

닛데사

(Niddesa, 義釋)

 

숫따니빠따1, 4, 5장의 주석서.

-가장초기의 주석서로 논장의 성격

 

 

12

빠띠삼비다막가

(Patisambhidamagga, 無碍解道)

-논장의 형태로 교리를 분석적으로 다룸.

-이론을 분석하고 해설한 논서

 

 

13

아빠다나

(Apadana, 譬喩經)

 

-자서전적인 경으로 붓다와 아라한의 과거생에 대한 이야기.

-559명의 장로 아라한, 40명의 장로니 아라한 자신들의 게송

 

 

14

붓다왕사

(Buddhavamsa, 佛種性經)

 

-고따마 붓다의 짧은 역사적 이야기와 과거 24불에 대한 이야기.

-미래 멧떼야붓다(미륵불)가 올 것이라 예언.

-성립연대 늦음

 

 

15

짜리야삐따까

(Cariyapitaka, 所行藏經)

 

-자따까에서 가져온 35개의 고따마 붓다의 전생이야기.

-35이야기

-성립연대 늦음

 

 

16

넷띠빠까라나

(Nettipakarana)

 

 

 

17

뻬따꼬빠데사

(Petakopadesa)

 

 

 

18

밀린다판하

(Milinda Panha)

 

 

 

 

 

표에서 전재성박사는 숫따니빠따를 2004년에 번역출판 하였고, 법구경은 2008년에, 우다나는 2009년에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경전은 모두 게송에 관한 것으로 번역하기 힘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경우 그 동안 니까야 번역을 한 바탕이 있어서 그 번역의 힘이 무르익어 게송 번역을 해 낸 것이라 보여진다.    

 

번역에 오류가 있다는데

 

그렇다면 이와 같이 수천개의 경과 수만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전재성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니까야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4부 니까야를 세계최초로 완역하였다. 그런 그에게 어떤 이는 한국판 구마라집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기도 한다. 인도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역경한 서역 출신 승려  구마라집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니까야 번역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초 또는 세계최초라는 타이틀이 전재성박사에게 붙어 다니지만 번역과정은 험난 하였다. 찬사 뿐만 아니라 비난도 받았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지적은 번역에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오류가 있길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인터넷으로 전재성 번역오류를 키워드로 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였다. 전재성 박사의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실려 있었던 내용이라 한다.

 

 

Name : 수행자

Subject: 쌍윳따 니까야에서 문의 사항

 

안녕하세요?
번역해주신 경전을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쌍윳따' 중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는 모든 경에서,
'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란 문장은,
'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고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가 아닌지 의문이 갑니다.
원문과 다시 한번 대조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Name : 전재성

Subject: [re] 쌍윳따 니까야에서 문의 사항

 

지적하신 부분은 옳습니다.  쌍윳다니까야의 초간본에서는 반복부분이 내용상 꺼꾸로 들어간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당시에 번역조건이 너무다 열악하다보니 교정진도 없었고 한 번 읽어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가 종종있고 긍정이 부정이되었다던가 부정이 긍정이 된 경우나 정형구를 따붙이가 잘못된 경우가 있습니다. 곧 출간된 예정인 쌍윳따니까야 개정본이나 이미 출간된 개정판 엔솔로지인 오늘 부처님께 문는다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대승에서 초기불교로카페에서)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려져 있는 것을 가져 온 것이다. 질문자는 번역이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지적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솔직하게 시인한다.

 

그런데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편집상 실수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열악한 번역환경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1999년 최초로 상윳따니까야를 출간할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과 출간환경이 열악하였고 그 결과 교정한 번 보아 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출간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의 언론 인터뷰를 보도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쌍윳따 니까야가 처음으로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자 일반 불자들의 반응도 굉장히 좋은 편이란다. 번역작업을 진행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처음에 발심을 하였지만 중반에 자금조달이 잘 안 되어 어려웠고, 책을 내며 4, 5권 부분의 교정이 잘못 되어 독자들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이 있다고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11 <인연모음> 뒤에 번역상의 문제점을 밝혀 놓았으며 6, 8권 목차 다음에도 교정표를 만들어 넣었단다.

 

(전재성 박사, 전재성 박사님과 엮어진 쌍윳따 니까야, 월간 붓다 2002년 3월호)

 

 

2002년 도 월간 붓다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에서 잘못 편집된 부분은 제4권과 5권이라 한다. 앞서 어느 독자가 지적한 24상윳따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4권과 5권이라면 이는 2000년에 발행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재성 박사의 상윳따니까야는 우리나라 최초로 1999년에 1-3권이 발행되었고 이후 해마다 4권이 발행되어 2002년에 11권이 완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2000년에 발행된 책 4권과 5권이 편집상 문제가 발견되어 11(2002년 발행)에서 문제점을 밝혀 놓았다고 한다. 이후 4권과 5권은 별도로 개정판이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1권을 7권으로 묶는 개정판(2007)이 출간됨으로서 모든 오류는 해결된 것으로 본다.

 

1권으로 개정한 맛지마니까야

 

이런 교정상의 문제는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발견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 니까야 개정판해제에서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전집은 칼 오이겐 노이만 이후 전세계에서는 두 번째로 완전 복원 되어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어 출판된 초간본<<맛지마니까야>> 5 152경을 한 권으로 출간한 것인데, 초간본에서 복원이 누락된 부분을 다시 보완하고 개정하여 윤문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칠년전 초간본을 낼 때만 하더라도 열악한 조건하에 문장이 반복되는 경우 시험적 번역의 삽입으로 인한 오역의 가능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출간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번 <<맛지마니까야>> 교정과정에서 발견된 기 출간된 본 협회 책의 중대한 오역에 대해서는 일러두기 페이지에, 교정란을 만들어 밝혔습니다.

 

(전재성박사,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해제)

 

 

전재성박사는 맛지마니까야 오류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초간본이 간행될 당시 역시 조건이 열악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시험적 번역으로 삽입한 문구가 그대로 실리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개정판에서는 모든 오류가 해결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세간에서 말하는전재성박사가 번역한 오류에 대한 것이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편집상의 오류인데, 이는 열악한 환경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번역할 당시 환경은 어떠했을까

 

이런 오역이나 오타가 발견되면 번역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가슴을 찌르듯 아팠다라고 표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 박사가 번역할 당시 환경은 어떠했을까. 월간 붓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재성 박사님은 1989년부터 이 쌍윳따 니까야 번역작업을 시작하셨다. 도중에 화재가 나서 3,000권 정도의 장서가 불에 타 버린 적도 있었고, 원고 일부가 소실되었던 적도 있었다. 후원이 거의 끊어졌던 적도…. 그 와중에 빠알리 대장경 번역을 잘 번역하기 위해 번역의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빠알리 어 사전과 범어 문법책을 펴냈으며, 올초 쌍윳따 니까야를 완역하여 봉정식을 가졌다.

 

(전재성 박사, 전재성 박사님과 엮어진 쌍윳따 니까야, 월간 붓다 2002년 3월호)

 

 

전재성박사의 역경작업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989년부터 번역이 시작 되었지만 불운하게도 화재로 타 버리고, 번역도중에 후원이 끊겨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중단 되기도 하였고, 다시 번역을 하긴 하였으나 돈이 없어서 출간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도법스님으로부터 후원 약속을 받고 간신히 1999년 우리나라 최초로 상윳따니까야 3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게 되었을까.

 

소승경전이라고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절에

 

그것은 번역이 시작될 당시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초기불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남방테라와다 불교는 소승불교이고 더구나  근기가 낮은 자들이나 보는 열등한 경전이라는 인식이 불교계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환경속에서 니까야를 번역한다고 하였을 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이다후원도 끊긴 상태에서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한역경전 역경작업과 대조된다.

 

1960년대 초반 통합종단이 발족한 이래 조계종의 역경사업은 3대 추진 과제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단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또 중국의 경우 역경을 작업을 할 때 황실에서 후원을 하여 집단을 이루어 번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환경과 달리 전재성박사의 역경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는 고난에 찬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빠알리 니까야에 대한 무지, 더구나 소승경전이라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 대승불교의 환경속에서 더구나 화재를 겪어 모든 자료가 불타버리고 또 모든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생계마저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빠알리 니까야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혼자힘으로 삼중고, 사중고를 감내 하면서 어렵게 이루어진 출간이었지만 혼자 하다 보니 교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번역에 있어서 오류가 난 것이다. 그래서 비판론자들은 말하기를 전재성 박사의 번역에 대하여 오류 투성이라고 한다.

 

개정판이 왜 중요한가

 

어느 책이든지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수천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하다 보면 크고 작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처음 나오는 것 치고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어느 제품이든지 첫 제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지만 반대로 어느 곳에 오류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필드에 나가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 가전제품, 소프트웨어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류가 발생되면 즉각적으로 보완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생산에 완전한 제품을 내 놓게 된다. 출판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전재성 박사의 번역상의 오류는 교정 조차 봐 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보여 진다. 하지만 개정판에서 이미 보완 조치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오류는 보이지 않고 있다고 본다. 마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미가 피어나듯이,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 나듯이 오롯이 서  있는 것이 현재의 개정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개정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개정판은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2007년에 7권으로 정비 되었고, 맛지마니까야의 경우 2009년 단권 1600여 페이지로 완결 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전재성 박사의 번역물이 오류 투성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처음 간행된 출판물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재성 박사의 번역에 대하여 여전히 의구심을 품고 있다면 아마도 전재성 박사의 번역 스타일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탄광의 광부가 석탄을 캐는 심정으로…”

 

그렇다면 전재성 박사는 어떤 스타일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학을 다닐 때 서대문에 있는 보육원에서 야학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쉽게 불교를 설명하고 싶었으나 한문자체의 어려움이 불교를 접하기 어렵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려운데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때 원전의 직역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것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근본적 동기다. 나는 경전 번역작업을 탄광의 광부가 석탄을 캐는 심정으로 했다.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고 책을 번역해놓고도 출판비가 없어 지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앞이 캄캄한 경우가 많았다. 앞이 캄캄할 바에야 탄광의 광부처럼 작업하자며 스스로 위안하고 견뎌내며 이것을 완성했다.

 

사간동에 사무실이 있을 때였다. 2년 간 <쌍윳따 니까야> 1, 2권을 번역했는데, 연구소에 불이나 3천 권의 장서가 불타고 원고도 일부 소실되었다. 그래서 한때 번역사업이 중단됐었다.

 

이후 한국불교대학 스리랑카 빠알리 불교대학에서 빠알리어를 강의하면서 <빠알리어사전> 2권 발간하였고 어원적으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해 <범어문법학>이란 책도 발간했다.

 

그리고 나서 과거에 했던 번역작업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법스님을 비롯해 정대, 월주 원혜 스님 등이 도와주셔서 1년에 4권씩 책을 출판해 현재 12권이 나오게 됐다. 그 분들께 감사 드린다.

 

혼자 번역을 해서 번역의 객관성을 의심하는 항간의 우려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번역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초기불교연기사상이라는 논문을 써서 소위 문맥의 앞뒤라든가 철학적 개념 등을 분석했다. 또한 <쌍윳따 니까야>의 경우 세계적으로 많은 번역본이 있어 영어판, 독일어판, 일어판 등을 함께 살펴보는 작업을 병행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번역본에는 6천 개의 주석을 달아 완성도를 높였고, 설사 내가 번역한 용어에 동의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색인을 통해 그 어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번역은 현대적인 학문적 소양이 있으면 불자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전재성박사, 쌍윳따니까야 봉정법회, 2002.01.21 ) 

 

 

지난 2002년 상윳따니까야 봉정법회를 앞두고 불교관련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니까야번역 작업에 대하여 마치 막장의 광부와 같은 심정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이루어진 번역 작업이 고독하게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번역, 불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용어

 

전재성박사의 번역목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자는데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글을 알기만 하면 초등학생도 이해 할 수 있는 번역서를 만들고자 함이다. 더구나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 할 수 있도록 누구나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는 번역서가 불자들 뿐만 아니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우리말 위주로 되어 있다. 어려운 한자 용어를 가급적 배제하고 철저하게 풀어 쓴 것이다. 그런 노력 중의 일부가 부처님에 대한 호칭을 보면 알 수 있다.

 

 

거룩한 님(아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정득각자)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명행족)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선서)

세상을 아는 님(세간해)

위없이 높으신 님(무상사)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조어장부)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천인사)

세상에 존귀하신 님(세존)

 

 

또 한가지 전재성박사의 번역문특징은 화자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하늘사람이 한쪽으로 물러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하늘사람]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다네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가리"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다네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는 조용히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우빠니야띠경-Upanīyati sutta - Comparing- 덧없음 경, 상윳따니까야 S1.1.3, 전재성님역)

 

 

데와따상윳따 세번째에 등장하는 매우 짤막한 경이다. 경에서 데와따(하늘사람)가 부처님에게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시로 읊자, 부처님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고 역시 시로서 읊는다.

 

이렇게 전재성 박사의 모든 번역문은 [하늘사람] [세존]  하는 식으로 대화자가 구분 되어 있다. 이런 구분법에 대하여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과 제자의 대화는 거의 다 번역이 됐지요. 과거에도 일본어책에서 중역본은 나왔는데 부처님의 문답을 어느 것이 질문이고 어느 것이 대답인지구분을 하지 않아서 제자의 말이 부처님 말로 소개된 책도 있어요."

 

(전재성 박사, [서화숙의 만남] 초기불교 연구 권위자 전재성 박사, 한국일보 2012-05-27)

 

 

부처님과 대화하는 이들을 문답식으로 구분하여 놓은 것은 어느 것이 부처님 말씀인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화자를 구분하여 놓지 않아 제자의 말을 부처님의 말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문답식 문장으로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한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되도록이면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였고, 더구나 부처님과의 문답 형식으로 대화자를 구분하여 놓았기 때문에 불교를 처음 접한사람이나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라는 번역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그러나 이런 스타일을 모두 좋아 하는 것 같지 않다. 지나치게 우리 말을 고집하고 지나치게 쉽게 풀어 쓰다 보니 역으로 반발감이 생길 우려도 있는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어 중에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31.

그는 하늘의 길, 먼지를 떨어버린

큰길에 올라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그의 태생이 막지 못했습니다.

 

(와살라경- Vasala sutta-천한 사람의 경, 숫따니빠따 Sn1.7,전재성님역)

 

 

와살라경에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라는 말도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에 왜 이런 말이 나올까. 이런 말을 써도 되는 것일까. 특히 기독교와 공존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하느님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 온다. 이는 한국의 불자들에게 있어서 반기독교적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또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엄밀히 따진다면 우리 고유의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늘님’, ‘하느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땅에 들어 오고 난 이후 하느님 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에따라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마치 기독교 전용용어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은 불자들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빠알리 니까야 번역자는 과감하게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전재성박사의 번역본에서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접하였을 때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자주 접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되었다. 니까야에 표현된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나 여호화가 아니라 범천을 의미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범천은 색계 초선천에 해당된다. 그런 범천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 믿는 창조주를 말한다. 그런데 범천의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범천 자신이 창조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착각일 뿐 범천 보다 더 높은 세계에서 공덕이 다하여 아래 세상으로 떨어진 윤회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단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이 윤회한 존재인 줄 잊어 버린 것으로 경(바까 범천 이야기)에서는 묘사 되고 있다.

 

이렇게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윤회속에 존재하는 범천이고,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범천의 세상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주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기억에서 잊어 버린 커다란 착각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윤회 할 수 밖에 없는 범부중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범부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제도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파격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가불자와 국민들 모두를 위한 경전

 

전재성박사의 번역은 파격적이다. 특히 1700년 불교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니라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그렇다. 이제까지 경전이라는 것은 모두 한역경전이었고, 그에 따라 한자용어가 매우 낯익은 종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재성박사의 번역문은 한자용어를 모두 우리말로 풀이하여 적용 하였기 때문에 불편해 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구나 반기독교적 정서가 팽배한 한국불교에서 하느님또는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는 거부감을 주었을 것이다. 또 한글을 깨친 초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문답식으로 역어진 경전을 보면 양에 차지 않았는지 모른다. 한편 수행승들이여로 시작되는 경의 문구 또한 거부감이 있었을지 모른다. 한역 경전은 예외 없이 비구들이여라고 시작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수 기득권층으로부터 반발을 예상하면서 이렇게 까지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인터뷰기사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인터뷰 기사에서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가 너무 어려운 차원에서만 존재한다면 박물관식 불교라 생각한다. 일상용어로 얼마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상언어로 이야기 할 때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도 있고 참다운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불교학계나 종단이 이러한 부분에 소홀한 것 같다.

 

사실은 일상용어로 새롭게 풀이되지 않는다면 학문이라든지 훌륭한 설법이라도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전재성박사, 쌍윳따니까야 봉정법회, 2002.01.21 ) 

 

 

전재성박사는 일상용어를 강조 하였다. 승가에서나 사용되는 용어를 불자들이 알리 없다. ‘알음알이라든가 잡도리하다등과 같은 용어는 전형적인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런 용어를 번역에 도입하였을 때 일반재가불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상용어를 사용하였고 또 가급적이면 한자용어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이하여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철저하게 일반재가불자위주이고 또 국민들 모두를 위한 경전이라 보여 진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다르게 현실은 냉혹한 것 같다. 기존 보수 기득권층에서 이를 인정해 주지 않으려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승단에서 별도로 경전번역이 착수 된 것으로 보여진다.

 

승단에서 별도로 니까야번역에 착수한 까닭은?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학계에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학자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번역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 한다.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도 한역경전과 차별화 된 파격을 보이고 누구나 쉽게 읽고 감동할 수 있는 번역을 하였을지라도 사 주지 않거나 채용하지 않으면 사장 되고 말 것이다. 특히 종단과 학계, 언론계 등 주류 제도권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다면 세월이 흐른 다음 잊혀 지고 말 것이다.  그런 조짐은 이미 보이고 있다.

 

지난 봄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전재성박사는 현재 팔리고 있는 니까야가 일년에 100여권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평생 니까야 번역에 매진하여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또 수천년 동안 목숨을 걸고 지켜 왔던 부처님의 원음이 너무 팔리지 않은 것에 대한 허탈한 심정을 말한 것이다. 

 

왜 이렇게 안 팔리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주류 제도권 불교의 외면도 한몫 했으리라 작용된다. 혹시 재가불자가 번역한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편견은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실참 수행을 해본 스님만이 바른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오만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번역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너무 쉬운 말을 사용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비구들이여라고 하지 않고 수행승들이여라고 해서일까.

 

온갖 추측이 들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류 제도권에서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별도의 니까야 번역을 또 다시 착수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2012-07-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