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도박? 진돗개살해남은 왜 이시점에
공중파 방송 메인 뉴스 시간에
저녁 공중파 방송 메인 뉴스 시간에 스님도박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거의 매일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에 보도 되고 있는 기사 내용을 보면 ‘점입가경’이다. 이제 도박 사건을 넘어 ‘성매수’ 사건으로 번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도박사건에 이어 스님성매수 사건을 폭로한 성호스님에 대한 짤막한 인터뷰기사를 보았다. 5시간에 걸친 검찰조사를 마치고 난 후 인터뷰에 응한 성호스님의 모습은 이제까지 방송에서 본 당당한 어조와 달랐다. 여러 시간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어서일까 그다지 힘이 없어 보였다.
성호스님은 자신이 제기한 조계종 최고위층의 매수 사건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룸살롱에 갔으니 당연히 성매수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말하였다.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하여 조계종에서는 성호스님을 명예훼손 혐으로 고발할 예정이라 한다.
(성호스님 "승려 4명이 룸살롱 성매매" 또 폭로, SBS뉴스 2012-05-16)
성호스님이 의혹을 제기한 성매수 건은 스님도박사건처럼 확실한 물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이른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이다. 그런 성호스님은 또 다른 폭로를 준비하고 있다고 기자에게 말하였다.
성호스님의 말한마디에
성호스님의 짤막한 답변을 보면서 우리나라 언론이 성호스님의 말한마디에 놀아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 도박사건이 불거졌을 때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는 ‘억대 도박’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 대신 담배를 꼬나물고 술을 마시며 도박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런 기사 거리 하나만으로도 불자들은 매우 분노하였다. 그런 분노의 감정은 기사의 댓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부터이다.
성호스님이 도박사건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문제가 일파만파로 확대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억대’라는 말이 들어 간 것이다. 성호스님이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억대도박판이라고 말을 하자 기자들은 너도 나도 억대도박판이라고 기사를 쓴 것이다.
이와 같은 억대 이야기는 삽시간에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퍼져 스님들이 억대도박판을 벌인 것으로 보도 되었고, 이런 기사와 보도를 접한 국민들은 경악 하였다. 과연 스님들은 억대도박을 하였을까.
스님들은 ‘억대도박’을 하였을까
최근 인터넷 뉴스의 기사를 보면 ‘억대도박’이라는 슬그머니 빠져 있다. 초기에 ‘억대도박’이라 하여 ‘억대’라는 수식어 따라 다녔지만 최근 기사를 보면 억대가 붙어 있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실제로 스님들은 억대 도박판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공식적인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백만원대’라 한다. 그런 백만원대도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인데 스님들이 억대도박판을 벌렸다고 하자 사람들의 눈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룸살롱에 출입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 받기에 충분하다. 출가수행자로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욕을 먹어도 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부풀려 타격을 주려 하였다면 더 나쁜 것이다. 성호스님이 승가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 잡겠다고 하여 검찰 고발을 하고 언론 인터뷰한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으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은 도박한 스님들 못지 않게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런 성호 스님은 이미 조계종에서 멸빈 되어서 공식적으로는 스님이 아니라 한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더구나 룸살롱 출입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불자들과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고 한심해 보인다. 거기에다 이를 검찰하여 사회법에 의존하여 문제를 처리하려는 스님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불교계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를 내부적으로 처리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법에 의존한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저녁 메인 뉴스시간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친구들과 모임에서, 회사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스님과 도박, 성매수와 관련된 보도를 들었을 때 불자들은 심정은 참담한 것이다. 어서 빨리 보도가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친구모임에서, 회사 회식자리에서 도박과 성매수 등 낯 뜨거운 말을 메인 뉴스에서 들었을 때 그야말로 불자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심정이다.
일부 스님들간의 진흙탕 싸움에 왜 애꿎은 불자들이 피해를 보아야 하나. 왜 문제를 일으키는 스님들 때문에 부처님과 불교와 불자들이 모욕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불자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개판치는 스님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스님의 사춘기
개판치는 스님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수행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 진다. 한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한방주의’이다. 이른바 ‘간화선’ 수행을 말한다.
책이나 방송 등에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게 비슷하다.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어느 스님은 스님의 사춘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스님도 사춘기가 있다는 것이다.
스님의 사춘기는 40세부터 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스님은 20세에 출가하여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고 한다. 10년간 밥하고 빨래하고 지게 지고 은사스님을 시봉한 다음 간 곳이 선방이라 한다. 선방에서 10년간 보내고 나니 나이가 40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일종의 방황이 시작 되었는데, 이 때가 스님들의 사춘기라 하였다.
“답이 보이지 않는다, 갑갑해 미치겠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처음 스님이 되어 열심히 정진하다가 뜻 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방황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가 있다. 한 때 불교환경운동을 하다 지금은 잠적한 수경스님은 불교닷컴 인터뷰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간화선 올바른 수행법인가?스님은 한국불교의 간화선병(病)부터 진단했다. 간화선이 올바른 수행법인지 의문이고, 제대로 지도 점검할 스님이 없다는 것이다.
봉암사에서 20여년을 간화선 수행을 한 상좌가 얼마 전 토굴에 왔다. 묻더라.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스승이 없어서 그렇다. 누가 지도할 것이냐. 일례로 봉암사에서 적묵 스님을 조실로 모실려고 스님 70여명이 찾아왔다. 적묵 스님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나쁜놈 들. 내가 법이 없는데 어떻게 조실을 하느냐”며 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 때 적묵 스님은 내쳐 “5대총림 방장 가운데 제대로 지도점검해주는 이가 누가 있느냐”고 했다. 한 총림의 방장 스님이 옆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방에 가보면 제각각이다. 염불, 위파사나... 등등 간화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선방에 처음 갔더니 화두 3개를 늘어놓고 골라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1번 해보다 안 되니 2번 하고, 그래도 안 되니 3번을 해본다는 거다.”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 [봉축특집-④ 인터뷰] 길에서 만난 수경 스님, 바깥에서 안을 성찰 중인, 불교닷컴 2011년 5월)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길에서 만난 수.docx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길에서 만난 수.pdf
20여년간 간화선 수행을 한 제자가 “갑갑해 미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해도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안될 때 수행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것임에 틀림 없다.
바보, 천치, 멍청이가 되어야 공부가 잘 된다고
수경스님은 간화선 수행에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선방에서 간화선을 하긴 하지만 잘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화선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실제로 간화선 수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라디오 법문을 들어 보면 간화선 수행을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우리는 참선을 하는 것은 참나를 깨달아서 견성성불을 해서 생사해탈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데, 부처를 찾지도 말고 번뇌를 버리지도 말고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다못 자기의 본참 공안 ‘시심마’를 한 분은 ‘이뭐꼬’, 판치생모를 한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꼬’, 무자를 한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앞도 없고 옆도 없고 뒤도 돌아 볼 것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뭐꼬’ 이렇게 잡도리 해 갈 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많은 말이 필요가 없고 많은 경전을 읽을 필요도 없고 직하에 ‘대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하라고 하면 아무 뜻도 몰라도 괜찮아’ 아무 뜻을 모를수록 더욱 좋아 다못 바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부처될 생각도 말고 번뇌를 버릴려 생각도 말고 무슨 공덕을 쌓을려고 하지도 말고 착할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천치’가 되어서 ‘멍청이’가 되어 가지고 ‘이뭐꼬’ 하라 하면 ‘이뭐꼬’ 할 뿐인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뭐꼬’ 똥을 누면서도 ‘이뭐꼬’ 세수 하면서도 ‘이뭐꼬’ 목욕을 하면서도 ‘이뭐꼬’ 걸어가면서도 ‘이뭐꼬’ 앉아서도 ‘이뭐꼬’ 아무것도 필요가 없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건 간에 ‘이뭐꼬’ 알고 모르고도 상관이 없고 되고 안되고도 상관이 없고 번뇌가 일어나고 안일어나고도 상관이 없고 다못 ‘이뭐꼬’ 이렇게만 해갈 따름 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송담스님의 알기 쉬운 경전이야기, 2012-05-08일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선사는 깨달음과 해탈, 대자유를 얻기 위해서 먼저 ‘바보’가 되라고 한다. 그래서 말을 하지도 말고 책도 보지 말고 공부도 하지 말고 알려고 하지도 말라고 한다. 심지어 착한 일을 하여 공덕도 쌓지 말라고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앉으나 서나 똥을 눌 때도 항상 ‘이뭐꼬’ 하라고 한다. 이처럼 바보, 천치, 멍청이가 되어야 공부가 잘 된다고 한다.
이렇게 앉으나 서나 ‘이뭐꼬’ 하다 보면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답답하고 더 이상 진척이 안되어 꽉 막힐 때가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선사는 그런 현상이 나타날 때 공부가 더 잘 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화두타파의 순간
앞이 꽉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공부가 더 잘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버스웰 교수의 강의를 통하여 들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버스웰 교수는 화두타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폭발, 폭발시키다 입니다. 화두 참구를 계속하면 이 의정을 핵으로 마음이 점점 집중되어 뭉치면서 마음속에 엄청난 압력이 발생합니다. 이 압력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 개인적인 관점 전체를 위협합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이해해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점점 더 좌절하게 되고 마음은 점점 팽팽해집니다. 그러다 이 의정이 너무나 강렬해져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평소 현 상태에 대한 안주, 개인적인 관점이 의정이 압력으로 폭발하며 함께 완전히 폭발해버립니다. 이 폭발로 개인적 관점, 즉 ‘나’가 소멸합니다.
이로 인해 나와 남, 옳고 그름, 깨침과 깨치지 못함 사이의 분별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폭발, 의정의 폭발을 통해 만물이 완전히, 완벽히 서로 상입하고 있음을 똑똑히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개인이라는 관점이 없기 때문에 나는 만물과 상호 연결돼 있고 만물은 나와 상호 연결돼 있습니다. ‘나’란 제한된 개념이 아니라 무한성에서 오는 관점이지요.
(로버트 버스웰교수, 버스웰특강<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제26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26, 불교tv 2011-12-13)
버스웰 교수는 젊은 시절 70년대 후반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의 지도를 받아 몇 년간 스님으로 산적이 있다고 한다.
미국 UCLA주립대 교수이자 동국대 학술원장이기도 한 버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화두타파 장면에 대하여 의정의 폭발로 말하고 있다. ‘이뭐꼬’ 또는 ‘무’자 화두, ‘판치생모’ 화두를 들면서 의문을 하여 보지만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고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 좌절하게 되고 그럼에 따라 마음의 긴장 또한 팽창되어 건들면 터질 것 같은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 어떤 계기로 의정이 폭발하게 되는데 이를 화두가 타파 되었다고 한다.
화두가 타파되면 나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삼라만상과 ‘상입’이 일어남을 똑똑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고 ‘견성성불’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간화선 수행의 어두운 단면
하지만 이와 같은 케이스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다음과 같은 글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간화선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지금까지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펴낸 《간화선》에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즉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 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수행법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자랑하는 최고의 이상이자 목표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수행결사를 제안한 것은 대한불교조계종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편 도법 스님의 글에 따르면, “스님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수행자임을 자처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수행 하면 참선, 선방 수좌, 선사를 떠올리는 풍토이기 때문에 선방 못 가고 참선 못 하고 수좌가 아닌 경우 수행을 제대로 못 하는 것이라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 이처럼 훌륭한 간화선을 통해 수행한 스님들은 얼마나 많이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도법 스님은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고 탄식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보고는 충격적이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 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간화선 수행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할 뿐, 간화선 수행법 자체의 문제점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실천적 수행에 관한 한 다른 불교국가에 비해 뛰어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기도취적 입장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특히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간화선 수행법 자체는 물론 간화선 수행자들의 태도에서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성스님,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불교평론 2011-09-01)
마성스님은 한국불교에서 왜 깨달은 수행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도법스님의 말을 인용하였다. 1만 2천명이나 되는 수행자들이 간화선수행을 수십년 해도 아직까지 깨달음을 이루었다거나 견성성불하였다는 사람이 보기 드믈다는 것이다. 설령 깨달았다고 해도 그런 깨달음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라 한다. 해마다 두 차례씩 3개월 동안 안거에 들어가는 수천명의 스님들이 일이년도 아니고 10년, 20년, 30년, 평생을 선방에 앉아 있어도 깨달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뜻대로 공부가 되지 않았을 때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참선을 조금 하면 금방 깨달을 것 같아 출가하였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래서 강원에도 가지 않고 곧바로 ‘선방’으로 간다고 한다.
그런데 선방에서 처음 몇 년간은 열심히 정진하는데 10년이 넘어가도 한소식을 못하면 좌절 하게 된다고 한다. 더구나 선방은 참선하는 것 외에 특별히 하는 것이 없어서 책을 본다든가 교리 공부를 한다든가 심지어 예불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만 매달려 있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문제는 뜻대로 공부가 되지 않았을 때이다. 10년을 선방에서 공부해도 소식이 없을 때 엉뚱한 곳에서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함으로서 의정이 폭발하여 화두가 타파되는 것이 아니라,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선방에만 있다보니 경전공부나 교리공부 등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지계의식 마저 희박 하였을 때 ‘막행막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도박사건과 이로 인한 일부스님들의 이전투구 양상이 간화선 수행의 어두운 단면을 잘 드러낸 것은 아닐까.
개판치는 일부 스님들
개판치는 일부 스님들을 바라보는 불자들의 마음은 참담하다. 더구나 다종교 사회에서 가족간에도 종교가 다르고 직장이나 단체에서도 각자 종교가 다른 상황에서 불자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가 되었다.
타종교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나라 일부스님들은 수행도 제대로 하지 않고 포교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박등의 문제를 일으켜 오히려 불자들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
스님들이 불자들과 국민들을 제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불자들과 국민들이 승가에 대하여 염려 하는 세상이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승가교육이 잘 못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제까지 깨달음 위주의 한탕주의에 벗어나지 못한 결과로 본다. 깨달으면 다행이지만, 못 깨달았을 경우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하는 좌절감아 막행막식 도박, 파벌싸움 등으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희망의 ‘싹’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보인다. 최근 조계종 교육원에서 승가교육 제도를 대폭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 수 백년간 내려 오던 ‘서당식’ 강원교육을 폐지하고 현실에 맞게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가교육 체계는 어떻게 바뀐 것일까.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승가대학 교과과정 개편안
학년 |
구 승가대학 교육과정 |
개편과정 | |||
과목 |
내용 |
과목 |
내용 | ||
1 학년 |
치문과 |
치문 |
중국의 역대 선지식들의 유문을 편집한 책 |
초기&아비달마 불교 |
부처님 생애, 초기불교교리, 아비달마개론 |
禪 |
禪學 개론, 禪 사상사 | ||||
계율과 불교윤리 |
계율학 개론, 사미(니) 율의 | ||||
불교사 |
세계불교의 역사와 현황Ⅰ | ||||
교양 |
컴퓨터 실습, 문학 및 작문 연습 | ||||
2 학년 |
사집과 |
서장 |
대혜종고 스님이 선의 질문에 답한 편지글 |
아비달마&대승불교의 이해 |
구사론, 청정도론, 대승불교 개론, 중관, 유식 |
도서 |
중국 규봉 종밀스님의 중국 선 사상의 형성 |
禪 |
禪典 개설, 禪 수행론 | ||
선요 |
중국 고봉 원묘 스님의 선법의 요의를 적은 책 |
계율과 불교윤리 |
초기승단의 불교윤리, 초기 승단의 생활 규범 | ||
절요 |
보조국사 지눌의 선의 정혜쌍수를 말한 책 |
불교사 |
세계불교의 역사와 현황 Ⅱ | ||
어학 |
불교한문, 영어 | ||||
3 학년 |
사교과 |
능엄경 |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에 의거한 공관을 성립 |
대승불교의 이해 |
중관, 유식, 정토, 화엄 외 기타 |
기신론 |
대승경의 공통된 교리를 말함 |
禪 |
禪語錄 강독, 한국 禪 사상사 | ||
금강경 |
공, 무아를 설함. 집착을 경계함 |
계율과 불교윤리 |
대승보살계, 불교제도사 | ||
원각경 |
마음의 본 성품을 관함 |
불교사 |
한국불교사(조계종사, 종헌 종법의 이해 등) | ||
염불 의례 |
불공, 천도의식 및 기타(환자 방문, 영안실 집전, 영결식 집전 등) | ||||
어학 |
영어, 일어․중국어(선택) | ||||
교양 |
불교 문화(불교 문화재) | ||||
4 학년 |
대교과 |
화엄경 |
대승불교의 수행체계의 정립, 보살행과 깨달음 |
불교와 현대사회 |
불교와 사회(사회과학 일반), 포교의 이론과 실제, 불교상담, 비교종교학, 철학 개론 |
禪 |
禪과 현대사회, 參禪 지도 방법론 | ||||
계율과 불교윤리 |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현대사회의 실천불교 윤리 | ||||
어학 |
영어, 일어․중국어(선택) |
출처 ; 1.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2, 사찰 승가대학 교과과정 뜯어고친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38
지난 2010년 개편된 승가대학 개편 내용이다. 무려 수백년간 지속 되어 오던 서당식 교육이 폐지 된 것이다. 주로 중국불교와 대승경전, 그리고 조사스님들의 가르침 위주에서 부처님의 일생, 아미담마, 청정도론 등 초기불교 관련 내용이 들어간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승가대학 교과 과정은 현재 대부분의 강원에서 수용되어 교육중이라 한다.
이러한 교과과정은 한마디로 혁명적이라 볼 수 있다. 앞으로 한세대만 지나면 스님들은 법문 할 때 자신의 이야기 보다 ‘부처님의 일생이야기’를 주로 들려 줄 것이고 ‘니까야’나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에 근거한 법문을 하게 될 것이라 보여 진다.
‘진돗개 살해남’ 사건이 왜 이 시점에
종교관련 비리나 문제가 터졌을 때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일부의 소행이라고. 불교계에서 터진 이번 도박사건, 몰카동영상, 검찰고발 등과 같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스님들에 대하여 역시 일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들이나 포교일선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는 스님마저 덤태기를 쒸우고 싶지 않아 굳이 일부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 하고 이런 일이 벌어 졌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이 불교를 침몰시키기 위해서 확대 재생산 하는 케이스도 보여 진다. 이번 도박사건과 전혀 무관한 진돗개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승려에 의하여 살해 되었다는 진돗개 살해 사건은 이미 지난해 12월 4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스님도박 사건이 매스컴을 탈 때 다시 거론 된 것일까. 이는 불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누군가 이슈화’ 한 것에 틀림 없다. 더구나 진돗개를 살해한 자는 승적이 박탈된 자로서 스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서는 스님이 살해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일년의 사태를 보았을 때 불교의 스님들은 도박이나 하고 성매수나 하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이 가세하고 있고, 더구나 이미 지나간 사건을 그것도 스님이 아닌 자가 벌인 도끼 행각을 마치 스님이 한 것처럼 이슈화 한 것은 ‘불살생’을 주장하는 불교를 무력화 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불교계에서 일어난 문제는 불교계에서 풀어야
불교계에서 일어난 문제는 불교계에서 풀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검찰에 고발하여 사회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하다. 물론 아무리 이야기 해도 들어주지 않아 사회법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불자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한다면 매우 잘 못된 것이다.
더구나 부풀려 말한다거나 단지 소문만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매스콤에 흘렸을 때 국민들이 듣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면 스님들은 모두 똑 같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불자들에게 돌아 온다. 절에서 사는 스님들과 달리 불자들은 이웃종교인들과 늘 부딪치며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계 내부에서 불자들이 치열하게 비리스님들에 대하여 고발 하여야 한다. 그리고 제도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불교가 비구승 위주로 되어 있는 구조를 사부대중의 불교로 바꾸아야 한다.
스님들은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고 금전적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 하지 않아야 한다. 문화재를 국가에서 관리 하고 사찰입장료를 폐지하여야 한다. 기도와 천도재와 같은 기복과 방편대신 스님들은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 해야 한다. 그리고 재산관리 등 돈 문제와 관련 된 것은 모두 시주한 재가불자가 관리해 야 한다.
원래 불교는 법(Dhamma)의 종교이다. 마치 유일신교에서나 하는 것처럼 기도나 하는 기복불교가 아니다. 또 산자 보다 죽은 자를 천도 하는 것으로 먹고 사는 방편불교가 아니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 불자들의 도리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내부적으로 제도 개선을 할 수 있도록 잘못된 것은 고발하고 바로 잡도록 해야지 외부의 힘을 빌어서 바꾸려 한다면 이는 반불교 세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아무리 제도 개선을 요구하여도 마이동풍식이라면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종단 지도부는 더 이상 개망신 당하기 전에 불자들이 요구하는 사항을 수용하라!
‘부처님의 일생’부터 공부해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번 도박사건, 몰카사건은 잘 못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스님들의 ‘계행’이 무너졌기 때문이라 본다. 계행이 무너진 이유는 한국불교가 ‘깨달음 한방’에 의존하는 간화선만을 추구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스님들이 경전이나 교학을 공부하지 않고 오로지 큰 것 한방만 노리고 선방에 앉아 있는 한 이번에 발생한 도박사건, 몰카사건과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스님들은 지금 부터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듯이 가장 먼저 ‘부처님의 일생’부터 해야 한다. 부처님이 누구인지 무슨 말씀을 하였는지 ‘부처님 그 분’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교리공부를 하여야 한다. 교리 공부를 하게 되면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계정혜’ 삼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37조도품’으로 요약되고 이를 다시 요약하면 ‘팔정도’가 된다. 바로 팔정도가 계정혜 삼학이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전부이다.
“계(戒)에 굳건히 머물러서”
다른 곳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경전에 길이 다 있다. 초기 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만 따른 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수행이 안된다고 하여 자포자기, 막행막식으로 폭발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실레 빠띳타야 나로 사빤뇨
cittaṃ paññañca bhāvayaṃ, 찌땅 빤냔짜 바와양
Ātāpi nipako bhikkhu 아따삐 니빠꼬 빅쿠
so imaṃ vijaṭaye jaṭanti. 소 이망 위자따예 자딴띠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청정도론 제1장 계 1절, 상윳따니까야 S1.3.3)
“A wise man established in virtues,
develops his mind and wisdom
And that zealous and clever bhikkhu,
disentangles, the tangle.
이것이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 테라가 지은 테라와다 불교 부동의 준거틀이라 불리우는 청정도론(Visuddhi-magga) 제 1장 1절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말이다. 이 게송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데와따상윳따의 ‘매듭경(Jaṭāsuttaṃ, S1.3.3)’에 근거한다.
해탈과 열반, 대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말 할 것 없이 ‘계(戒, sīla)’를 굳건히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바탕 하에서 ‘마음을 닦을 것(定, samādhi)’과, ‘지혜(慧, paññā)’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2012-05-1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등소녀의 미소, 2012년 서울국제연등축제 (0) | 2012.05.20 |
---|---|
‘연등축제’의 날에 (0) | 2012.05.19 |
대리참회와 이메일 참회문 그리고 진정한 참회 (0) | 2012.05.15 |
방향을 잃어 버린 한국불교, 좋은 스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 (0) | 2012.05.14 |
오월이 되면 총림(叢林)에서 피는 꽃 (0) | 2012.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