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축제’의 날에
‘연등축제’의 날에
오늘은 ‘연등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명칭이 ‘연등회’로 바뀌긴 하였지만 아직도 연등축제라는 말이 익숙하다. 2004년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한 이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참여해 왔는데, 직접참여 하기 보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고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연등축제와 관련하여 쓴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등축제 관련 글
년도 |
연등축제 |
출발지 |
2007년 |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 |
2008년 |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 |
2009년 |
동국대 대운동장 | |
2010년 |
동국대 대운동장 | |
2011년 |
동국대 대운동장 |
2007년 연등축제 사진모음
음악: Metta(자애송, Imee Ooi 창)
현재 연등축제 출발지는 ‘동국대’이다. 2009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대문운동장 이었다.
5만명의 불자들이 모여 성대한 개막식 과 함께 각종 공연이 열렸던 야구장은 연등축제 최적의 장소이었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이 당선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동대문운동장 지역을 세계적인 의류 메카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에 따라 우리나라 스포츠역사의 산실이라 볼 수 있는 동대문운동장이 헐리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2009년부터 연등축제 개막 행사장이 동국대 대운동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동국대는 구 동대문운동장과 멀지 않다. 도보로 약 10여분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동국대는 매우 익숙하다.
‘원위치’된 연등회 개막장소
동국대에 처음 가본 것은 중학교 시절이다. 그 때 당시 제등행렬 출발장소가 동국대 대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연등축제 개막장소는 원위치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연등축제 개막장소와 행렬코스는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연등축제 코스
기간 |
행렬코스 |
기간 |
거리 |
개막장소 |
1955~1975 |
조계사와 종로 일대 |
20년 |
약 5Km |
동국대 대운동장(70년대 전반기) |
1976~1995 |
여의도à조계사 |
19년 |
약 10Km |
여의도 |
1996~2008 |
동대문 운동장à종로à조계사 |
14년 |
약 5Km |
동대문운동장 |
2009~현재 |
동국대 대운동장à종로à조계사 |
3 년째 |
약 5Km |
동국대 대운동장 |
표를 보면 연등축제는 1955년부터 시작 된 것으로 되어 있다. 위의 자료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여 알아 낸 것이다.
표를 보면 행렬코스가 기간별로 다르다. 처음에는 종로이었으나 중간에 여의도코스로 바뀌고 다시 종로코스로 원위치 한 것을 알 수 있다. 개막장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현재 연등회 개막장소인 동국대 대운동장은 1970년대 전반기 제등행렬 출발장소 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대문운동장이 헐림에 따라 무려 30여년만에 원위치 된 것이다. 그런 동국대 대운동장은 매우 익숙하다. 중학교 시절 그곳에서 제등행렬 출발을 하였기 때문이다.
첫 경험은 강렬하다
조계종 종립학교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배정받아 간 학교가 그때 당시 종로5가에 있었던 ‘동대부중’이었다.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라는 매우 긴 교명을 가진 학교이었다.
동대부중은 조계종 종립학교 이었기 때문에 세칭 ‘불교학교’라 한다. 그래서 교과과정에 불교와 관련된 교육시간이 따로 있었다. 일주일 한 시간 배정 되어 있는 불교시간에서 일학년 때 ‘부처님의 생애’에 대하여 배우고 이삼학년 때는 고승열전 등을 배웠다.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강렬하다.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찬가지로 중학교에서 처음 접한 불교 역시 강렬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특히 일학년 때 배운 ‘부처님의 일생’이 그랬다. 얄팍한 중학교 용 불교교재에 지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출가,성도, 열반에 이르기 까지 오늘 날 보는 부처님 일생에 대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사문유관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부처님이 태자로 있을 때 까삘라성 바깥으로 놀러 나갔다가 본 노인, 병든사람, 죽은 사람, 수행자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강렬 하였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또 교재에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부처님이 우루웰라 산상에서 손가락으로 아래 마을을 가리키는 장면의 ‘삽화’와 함께 들어가 있어서 기억이 매우 생생하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삽화와 함께 설명되어 있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는 문구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부처님은 왜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고 하였을까. 이런 의문은 그 때 당시부터 계속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은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풀렸다. 최근의 일이다. 상윳따니까야 아딧따경(Ādittaṃ -연소경,34.3. 6)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수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아딧땅경- Ādittaṃ -Burning-연소경, 상윳따니까야 S34.3. 6, 전재성님역)
아딧땅경(연소경)의 주석에 따르면 이 경은 부처님의 세번째 법문이라 한다. 전법 초창기 깟사빠(kassapa) 삼형제의 지도 아래 천여명에 달하는 불을 숭배하는 결발수행자들이 있었는데, 부처님이 이들을 신통으로 굴복 시켰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인 승가가 구성되었다고 한다.
경에서 부처님은 천명의 수행승들과 함께 가야의 정상에서 “일체가 불타고 있다”라고 말씀 하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 하고 있다. 여기서 일체라는 것은 세상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하는 일체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다. 눈과 귀 등으로 형상과 소리 등과 접하였을 때 아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초기경을 접하고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부처님이 말한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세상이 아니라 눈, 귀, 코 등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다. 따라서 감각기관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을 때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일어 날 수 있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
이렇게 접한 불교는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그것은 마음이 그다지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부처님의 일생을 통하여 접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만일 천지창조등과 같이 비현실적 이야기나 초월적인 기적 이야기, 신격화된 부처님에 대한 내용위주로 교재가 꾸며 졌다면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사문유관, 유성출가 등 팔상도에 그려진 그림 이야기를 설명하듯이 꾸며진 교재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초기경전에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설법이 들을 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계생천과 같은 쉬운 가르침에서부터 사성제에 이르기 까지 설법하면 어느 누구라도 교화가 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 결과 “티없는 법의 눈이 열렸다”라는 표현과 함께 “생긴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한다” 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 나이에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적당한 표현이 아마도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일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중학교 시절 불교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있었다. ‘불교선생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교법사’라 한다.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강렬하기 때문에 처음 접한 불교를 가르치는 교법사 선생님 또한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당시 30세 안팍으로 보였던 교법사 선생님은 반곱슬머리에 이마가 훤칠하고 특히 하얀 피부를 가진 얼굴은 귀한 집의 귀공자 스타일로 보였다. 더구나 얼굴은 맑고 깨끗하여 마치 면전에서 부처님을 보는 것 같았다. 부처님이 살아 계신다면 교법사님의 얼굴과 같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던 때이다.
그런 교법사님을 잊고 지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불교와 인연이 끊어 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전 불교tv사이트를 보다 우연히 교법사선생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하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고 낯이 익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이 그 선생님일지 모른다고 생각 되었다. 그래서 강의 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틀림 없는 그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시절 교법사 선생님 이었던 것이다.
그분은 조용길 교수님이다. 불교tv 사이트 설명에 따르면 동국대 교수이자 아함불교 실천회 회장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조용길 교수
동국대 교수이자 아함불교 실천회 회장
(생활속의 아함경, 아함경 서론 - 식(食)에 관하여, 2009-09-14)
70년대 중반 중학교 교법사이었던 선생님이 세월이 흐른 후에 동국대 교수님으로 되신 것이다.
흰 쥐와 검은 쥐 이야기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면서 부처님의 일생에 있는 내용과 별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는데, 기억 나는 것 중의 하나가 ‘흰 쥐와 검은 쥐 이야기’ 이었다.
‘흰 쥐와 검은 쥐 이야기’는 매우 실감났다. 칠판에 그림을 그려 주면서 까지 설명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그 그림과 이야기가 잘 매칭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흰 쥐와 검은 쥐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인터넷을 찾아 보았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쉬라바스티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에 세존께서 대중 가운데서 승광왕(勝光王)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나는 지금 대왕을 위하여 한 가지 비유로써 생사의 맛과 그 근심스러움을 말하리니, 잘 듣고 잘 기억하시오.
한량없이 먼 겁 전에 어떤 사람이 광야에 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황급히 달아나면서 의지할 데가 없었소. 그러다가 그는 어떤 우물이 있고 그 곁에 나무뿌리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소. 그는 곧 그 나무뿌리를 잡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소.
그 때 마침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그 나무뿌리를 번갈아 갉고 있었고, 그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 독사가 그를 물려하였으며, 우물 밑에는 독룡(毒龍)이 있었소.
그는 그 독사가 몹시 두려웠고 나무뿌리가 끊어질까 걱정이었소. 그런데 그 나무에는 벌꿀이 있어서 다섯 방울씩 입에 떨어지고 나무가 흔들리자 벌이 흩어져 내려와 그를 쏘았으며, 또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소.”
왕은 말하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 보잘 것 없는 맛을 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때에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 광야란 끝없는 무명(無明)의 긴 밤에 비유한 것이요, 그 사람은 중생에 비유한 것이며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우물은 생사에, 그 험한 언덕의 나무뿌리는 목숨에 비유한 것이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는 밤과 낮에, 나무뿌리를 갉는 것은 찰나찰나 목숨이 줄어드는 데, 네 마리 독사는 4대(大)에 비유한 것이며, 벌꿀은 5욕(欲)에, 벌은 삿된 소견에, 불은 늙음과 병에, 독룡은 죽음에 비유한 것이오.
그러므로 대왕은 알아야 하오. 생ㆍ노ㆍ병ㆍ사는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언제나 그것을 명심하고 5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하오.”
그 때에 승광대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사의 근심스러움을 듣자 일찍이 알지 못했던 일이라 생사를 아주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장하고 공경하며 한마음으로 우러러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큰 자비로 저를 위해 이처럼 미묘한 법의 이치를 말씀하였사오니, 저는 지금부터 우러러 받들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장하오. 대왕이여, 그 말대로 실행하고 방일하지 마시오.”
이때에 승광대왕과 대중들은 모두 다 환희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이것이 게송을 뺀 〈불설비유경〉의 전문이다. 게송이라 해야 앞서 산문으로 설한 비유의 내용을 반복해서 읊은 20구가 전부다.
이 경은 아마도 수많은 불교경전들 중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유명한 경전이 아닌가 싶다. 그 누구도, 형언하기 어려운 인생의 본질을 이토록 짧은 몇 마디로 이토록 예리하게 적시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절간의 벽마다 그림으로 그려 전하고 있다.
이 경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과 쾌락,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죽음과 괴로움의 본질이 촌철살인의 비유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우리가 인생을 언제나 이렇게 직시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갈 길은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태연히 산다.
(윤영해 / 동국대 교수, 촌철살인의 비유, ‘불설비유경’, 불교신문 2003.10.08 )
불설비유경
윤영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불설비유경’은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유명한 경전이라 한다. 그것은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짧은 몇 마디로 표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찰 법당의 벽에 탱화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나이 어린 중학생들에게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림을 곁들여 매우 실감나게 설명해 준 ‘흰쥐 검은 쥐 이야기(불설비유경)’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줄에 매달려 간간히 떨어지는 꿀맛에 취해 현실을 똑 바로 보지 못함을 매우 실감나게 설명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선생님의 젊은 시절 모습을 앨범에서 보았다.
앨범을 정리하다 중학교 졸업앨범에 실려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조용길 선생님
동대부중 교법사 시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용길 교수님은 현재 잠실‘불광사’의 전신은 ‘불광법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60년대 강남 봉은사에서 광덕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대학생 신분으로서 광덕스님이 주도하에 만들어진 대불련 창립에 관여 하였고, 이후 광덕스님을 도와서 불광법회를 만들고 신불교운동을 주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20대 처녀 시절부터 불광법회를 다녔다는 어느 보살님의 말에 서도 알 수 있었다. 그 보살님에 따르면 70년대 중반 불광법회 사회를 본 사람이 바로 조용길 교수님이었다고 말하였다. 조용길 교수님은 중학교 교법사로 근무하면서 불광법회 사회도 보는 등 신불교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광법회 당시 사진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불교신문 사이트를 보다 광덕스님과 함께 법회를 하고 있는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대각회법회
종단 행정을 접고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대각사에서
불광운동을 펼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광덕스님 모습.
사진: 불교신문
사진에서 중앙이 광덕스님이고 앞줄 가운데
점퍼차림으로 마이크를 쥐고 합장하고 있는 분이 젊은 시절 조용길선생님이다.
불기2519년의 제등행렬 행사
중학교 앨범을 보니 교외 활동에 대한 사진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제등행렬에 대한 사진이 눈에 띄었는데, 사진을 보니 그 때 당시 기억이 떠 올랐다.
현재 연등회(연등축제)가 열리는 장소는 동국대 대운동장이다. 그 곳에서 오후에 개막식을 하고 공연을 한 다음 저녁 7시에 종로거리를 행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학교 당시도 마찬가지 이었다.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행사를 한 후 종로거리를 행진한 후 조계사에서 해산 하는 식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현재의 연등축제는 부처님오신날을 피하여 일주일에서 열흘전 토요일이지만, 그 때 당시에는 부처님오신날 당일 저녁에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때 당시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열린 제등행렬 개막 행사에 대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기2519년제등행렬 행사 장면
동국대 대운동장(1975년)
사진을 보니 ‘유신시절’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순수한 종교행사에 ‘총화호국안보’라는 말이 보이고 더구나 국가 안보와 국토 통일을 바라는 제등행렬로 명명 된 것이다.
단상에는 스님석과 귀빈석으로 나누어져 있고 단하에는 제복 차림의 학생이 서 있어서 분위기가 딱딱해 보여 요즘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국제불교도기(International Buddhist Flag)
눈여겨 볼 것 중의 하나가 불교를 상징하는 ‘기’에 대한 것인데, 왼쪽의 만(卍)자와 함께 오른 쪽에 ‘국제불교도기’가 걸려 있다. 1880년 스리랑카에서 올코트 대령이 만들었다는 불교도기가 그 때 당시에도 공식행사에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올코트 대령이 만든 창작물은 1952년 세계불교도 대회가 열렸을 때 국제불교도기(International Buddhist Flag)로서 받아 들여 졌다고 한다.
국제불교도기(International Buddhist Flag)
국제불교도기의 의미
색깔 |
신체적 오라 |
상징 |
일반적 의미 | |
1 |
파랑색 (Blue) |
부처님의 머리카락에서 방사 |
자비 (Universal Compassion) |
모든 존재에 대한 무량한 자비를 상징 |
2 |
노랑색 (Yellow) |
부처님의 피부에서 방사 |
중도 (The Middle Path) |
모든 극단을 피하고 균형과 해탈을 얻기 위한 중도를 상징 |
3 |
빨강색 (Red) |
부처님의 살에서 방사 |
축복 (Blessing) |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되는 축복을 상징 |
4 |
하얀색 (White) |
부처님의 뼈와 치아에서 방사 |
청정과 해탈 (Purity and Liberation) |
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해탈을 상징 |
5 |
주황색 (Orange) |
부처님의 손바닥, 뒤꿈치, 입술 에서 방사 |
지혜 (Wisdom) |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흔들림 없는지혜를 상징 |
6 |
5색조합 |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편적임을 상징 |
출처 ; http://www.saloeurm.com/buddhistflag.htm
제등행렬 모습은 어떠 하였을까
그렇다면 그 때 당시 제등행렬 모습은 어떠 하였을까. 행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전체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 때 당시에도 수 많은 불자들이 제등행렬에 참여 하였다. 하지만 요즘과 같은 축제성격은 아니었다. 용이 불을 내뿜는다든가 공작이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볼거리는 없었다. 문자 그대로 등을 들고 행진하는 제등행렬이었다. 이런 제등행렬에 대하여 앨범에 실려 있는 시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중반 제등행렬
앨범 속에만 남아 있는 학교
종로5가 연지동에 있었던 조계종 종립중학교 동대부중은 다른 곳으로 이전 되었다. 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교실이 있는 건물은 해체 되었고 그 자리에 유일신교의 건물이 들어 섰다. 추억속의 교사건물은 오직 앨범속에만 남아 있다.
구 동대부중 교사
부처님의 가르침에 제행무상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물 역시 제행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모습 그 대로의 부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제등행렬의 개막장소로 활용 되었던 동국대학교이다. 지난 2009년 30여년만에 다시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연등축제 개막식이 열렸는데, 그 때 당시 본 동국대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 모습이었다. 대운동장도 그 때와 변함이 없고, 정각원도 그 자리에 있다.
동국대 대운동장(2009)
동국대 정각원(2009)
그런데 무엇 보다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부처님상’이다. 본관 앞에 서 있는 부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모습 그 대로이다.
동국대 부처님상(2009)
201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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