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스님들은 ‘귀의’대상이 아니다! 현행 ‘삼귀의’는 개정되어야
스님들끼리 진흙탕 싸움에
불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도박과 성매수 의혹에 관련된 스님들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현재 조계종단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어느 법우님은 “이번 기회에 천주교쪽으로 가볼까?” 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는 친구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또 친족을 불교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이번 추문으로 인하여 한발 빼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불교를 사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발원한 불자들에게 있어서 스님들의 이번 추문은 실망을 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땅밝기로 대표되는 유일신교의 직접적 타격 보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님들끼리 진흙탕 싸움에 불교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매우 염려 하는 것이다.
특히 종단 최고위층이 성매수 의혹에 휩싸여 신문과 방송, 인터넷 포털 메인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불자들의 ‘자존심’에 타격을 주고 있는데, 이런 소식을 접한 불자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는 성매수의혹에 휩싸인 당사자는 즉각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성매수 등 각종 의혹을 받고 있는 당사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있을수록 매스컴에서는 떠들어 댈 것이다. 마치 ‘롤플레잉게임’ 하듯이 그 자리에서 내려 올 때 까지 기사화 할 것이고 또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질 것이다.
각종 추문이 보도 되면 될수록 불교의 이미지는 점점 나빠져 결국 피해보는 것은 불자들이다. 각종 모임에서 자신이 불자임을 숨길 것이고, 서류작성에서도 불자임을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매스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몇 개월만 다루다 보면 불교신도가 ‘백만명’ 정도가 이탈 할 것이라는 어느 스님의 예측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사기꾼 대통령이 출현하면 세상은 탁해진다. 그런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았다. 따라서 ‘국격’은 자연스럽게 강등된다. 사기꾼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들 역시 사기꾼 대통령과 동급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매수 등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는 스님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다면 ‘불격’ 또한 낮아진다. 타종교인이 본다면 ‘그 밥에 그 나물’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여도 추문에 휩싸인 종단 최고위층과 불자들은 동격이 되어 버린다.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주변에 향기가 나고, 한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주변이 탁해진다고 하였다. 한사람의 사기꾼대통령이 출현하면 나라가 탁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한사람의 성매수 의혹을 가진 종단지도자가 출현하면 불교가 탁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사람의 사기꾼 대통령은 국민이 뽑았다. 그러나 한사람의 성매수 의혹에 휩싸인 종단지도자는 불자들이 뽑지 않았다. 불자들은 참정권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는 종회의원 전원과 각교구본사별로 10인의 선거인단이 구성되어 불과 200에서 300명 가량되는 선거인단에서 선출하기 때문이다.
총무원장이 되려면 이삼백명에 불과한 선거인단만 잘 관리하면 된다. 그러면 한국불교와 천만불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 갈 수 있다. 따라서 종단의 최고수장 자리는 재력있는 스님들의 차지가 되기 쉽다. 이와 같이 선거인단에 따른 간접선출 방식은 금권 종단정치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 개정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 직선제 선거 방식이다. 모든 스님들에게 투표권을 주어 선출하는 방식이다. 그럴경우 제 아무리 재력이 있는 스님일지라도 모든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여 관리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비구승들만의 것인가
그렇다면 총무원장 자리는 반드시 스님들만이 뽑을 수 있는 것일까. 재가불자들은 참여 할 수 없는 것일까. 잘못 선출된 종단 지도자로 인하여 참정권이 없는 불자들이 정신적으로 상처 받고 사회생활하면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매우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총무원장 직선을 하게 된다면 재가불자들도 당연히 참여 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비구승들만의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계종 종헌을 보면 “제 8 조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로써 구성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 종단이 비구승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구 뿐만 아니라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 이루어진 불교공동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 총무원장 직선을 한다면 모든 스님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재가불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 하여 투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재가불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어야
총무원장을 직선으로 뽑는다면 모바일로 하면 된다. 별도로 투표소에 갈 필요가 없다. 이는 지난해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검증된 것이다. 그때 당시 약 6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이나 핸드폰으로 투표 하였다. 이미 검증된 시스템이다. 마찬가지로 총무원장 선거를 모바일로 선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재가불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참여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조계종 ‘신도등록’한 불자들로 한정하면 된다. 신도회비를 납부하는 불자들을 말한다. 그런 불자들에게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을 부여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선거에 참여 하기 위해서라도 신도 등록을 많이 하게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이 불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어 총무원장선거 뿐만 아니라 중앙종회, 교구본사 주지 등 모든 선거에 확대 적용한다면 금권선거 등을 봉쇄할 수 있고 고질적인 문중이나 파벌 문제로 자유로울 수 있어서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 일석사조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증거 하나
불교는 스님들만의 것일까. 조계종 종헌에 따르면 엄연히 사부대중으로 구성한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한국불교는 스님들의 것이다. 특히 비구승들의 불교이다.
불교공동체가 사부대중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모든 불교의식에서 합송되고 있는 삼귀의이다.
삼귀의 중 승가에 대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하지만 삼귀의에 표현되어 있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는 잘못 된 것이라 한다. 왜 잘못된 표현일까.
최근 마성스님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을 보면 삼귀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불교도들이 행하는 삼귀의례에서 승(僧)은 아리야 상가, 즉 성승가(聖僧咖)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도들이 신앙적으로 귀의하는 대상은 삭발염의한 비구-비구니가 아니라 불교도들의 이상인 사쌍팔배의 성자인 것이다.”
(마성스님,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
마성스님은 삼귀의에서 승은 ‘성스런 승가’를 말한다고 한다. 성스런 승가란 빠알리어 ‘아리야 상가(ariya-sangha)’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magga)와 과(phala)를 이루신 성자를 말한다. 따라서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은 성스런 상가일 뿐이지 모든 스님을 다 귀의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승납이 오래 되고 도를 많이 닦고 학식이 높다고 하여도 결코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성스런 상가가 귀의의 대상일까
그렇다면 왜 성스런 상가가 귀의의 대상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고 초기경전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 해제에서 전재성박사는 승보(僧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한편 승보라고 하는 것은 불교도의 귀의처로 종교적 신앙의 대상가운데 하나가 된다. 초기불교의 경전에서는 그 구체적인 범주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구사론이나 대지도론에서는 그 범주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승보에는 비구-비구니 승가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흐름에 들기 시작한 님인 예류향에서부터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에 이르기까지의,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사쌍팔배)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승보의 개념은 쌍윳따니까야(SN.12.41)에서 규정하는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고, 보시 받을 만하고, 예배 받을 만하고, 세상에서 위없는 공덕의 밭이다’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전재성박사, 맛지마니까야 개정판 해제)
전재성 박사에 따르면 불자들의 귀의의 대상인 승보는 초기경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구사론이나 대지도론에 그 범위가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성자만이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승보를 규정하지 않는다면 모든 비구나 비구니가 귀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구족계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사미나 사미니건 간에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으면 모두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걸쳤더라도 점이나 보고 사주관상이나 보는 자들도 승보로 보아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쌍팔배의 성자를 승보라 하여 귀의의 대상으로 한정 하였는데, 이는 초기경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경에서 보는 승보의 개념
전재성 박사가 근거로 들고 있는 경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SN.12.41이다. 이 경은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이다. 우리말로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승보에 대하여 해제에 설명되어 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나타삔디까]
"흐름에 든 이는 어떠한 네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까?"
[세존]
"장자여,
거룩한 제자는 부처님에 대해 경험에 근거를 둔 청정한 믿음을 품고 있다.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라고.
그는 가르침에 대해 경험에 근거를 둔 청정한 믿음을 품고 있다.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그는 모임에 대해 경험에 근거를 둔 청정한 믿음을 품고 있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라고.
그는 성자들이 칭찬하는 계율을 갖추고 있다. 그 계율은 허물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더러움이 없고 얼룩이 없으며 자유로 이끌고 아는 자가 칭찬하며 남에게 영향받지 않고 삼매로 이끄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흐름에 든 이의 네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다."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1,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승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머리를 깍고 승복만 걸쳤다고 승보로서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승보라는 것이다.
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야디당 짜따리 뿌리사유가니
aṭṭha purisapuggalā, 앗타 뿌리사뿍갈라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에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āhuneyyo 아후네이요
pāhuneyyo 빠후네이요
dakkhiṇeyyo 닥키네이요
añjalikaraṇīyo 안잘리까라니요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 아눗따랑 뿐냐켓땅 로깟사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These disciple bhikkhus of the Blessed one are
worshipful,
worthy of hospitality,
worthy of gifts and
suitable to be worshipped with clasped hands.
They are a field of merit for the world.
이처럼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승보로서 귀의와 공양의 대상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한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보석경, Sn2.1)에서도
그 중에 숫따니빠따 라따나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6.
Ye puggalā aṭṭhasataṃ pasatthā 예 뿍갈라- 앗타사땅 빠삿타-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짯따-리 에따-니 유가-니 혼띠
Te dakkhiṇeyyā sugatassa sāvakā 떼 닥키네이야- 수가땃사 사-와까-
Etesu dinnāni mahapphalāni, 에떼수 딘나-니 마합팔라-니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
참사람으로 칭찬 받는다.
바른길 가신님의 제자로서 공양 받을 만 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참모임안에야 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7.
Ye suppayuttā manasā daḷhena 예 숩빠윳따- 마나사- 다헤나
Nikkāmino gotama sāsanamhi 닉까-미노 고따마 사-사나미
Te pattipattā amataṃ vigayha 떼 빳띠빳따- 아마땅 위개하
Laddhā mudhā nibbutiṃ bhuñjamānā 랏다- 무다- 닙부띵 분자마-나-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8.
Yathindakhīlo paṭhaviṃsito siyā 야틴다키-로 빠타윙시또 시야-
Catubbhi vātehi asampakampiyo, 짜뚭비 와-떼히 아삼빠깜삐요
Tathūpamaṃ sappurisaṃ vadāmi 따투-빠망 삽뿌리상 와다-미
Yo ariyasaccāni avecca passati, 요 아리야삿짜-니 아웻짜 빳사띠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마치 단단한 기둥이 땅위에 서 있으면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보는 참사람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9.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니
Kiñc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ṃ aṭṭhamaṃ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0.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야
Tayassu dhamm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īlabbataṃ vāpi yadatthi kiñci, 시-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ābhiṭhānāni abhabbo kātuṃ 차 짜-비타-나-니 아밥보 까-뚱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존재의 무리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1.
Kiñcāpi so kammaṃ karoti pāpakaṃ 낀짜-삐 소 깜망 까로띠 빠-빠깡
Kāyena vācā uda cetasā vā 까-예나 와-짜- 우다 쩨따사- 와-
Abhabbo so tassa paṭicchādāya 아밥바 소 땃사 빠띳차-다-야
Abhabbatā diṭṭhapadassa vuttā, 아밥바따- 딧타빠닷사 웃따-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감추지 못하니,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 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와 쿳다까빠타 (Khp 7), 전재성님역)
라따나경(Ratana Sutta) 6-11번 게송, Imee Ooi창
빠알리어 라따나(Ratana)는 세가지 보석 또는 보배라는 뜻이다. 이는 불법승 삼보 중에 승보에 대하여 여섯가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6번째 게송에서 부처님은 사쌍팔배의 성자가 승보임을 말하고 있고, 특히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조건에 대해서 10번 게송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과 매사의 의심, 그리고 잘못된 수행방법을 버렸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보통스님들은 귀의 대상이 아니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들은 범부나 다름없는 또 같은 중생일 뿐이다. 많은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서 최고 팔만사천 대겁까지 한량없는 세월을 수명대로 사는 존재 역시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부수고, 연기법으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회의적 의심, vicikicchā)을 버리고, 잘못된 수행(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을 하지 않아, 정견을 가진 수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스님이나 천상의 존재나 모두 범부와 같은 중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이 중생들에게’ 귀의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들은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귀의의 대상에 대하여 삼귀의가 아닌 이귀의로 하자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성자가 된 스님에게 귀의 하는 문제를 말한다.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문제가 발생된다. 마치 넌센스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부처님(불)과 가르침(법)에만 귀의하고 스님(승)에게는 귀의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귀의’만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말과 같다고 한다. 스님도 스님에게 귀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성자가 된 스님에게 귀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고 법랍이 높아도 나이가 어리고 법랍이 낮아도 성자가 된 자가 있다면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성자가 된 재가불자도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수다원이 된 재가 불자가 있다면 성자가 되지 못한 스님이 의지처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삭발하였다고 하여, 승복을 걸쳤다고 하여 모두 귀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자가 되지 못하였다면 범부중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에게 피난처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따라서 중생들의 귀의의 대상은 스님이 아니라 상가인 것이다.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행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歸依佛兩足尊)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離欲尊)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歸依僧衆中尊)
수정한 삼귀의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거룩한 승가에게 귀의합니다. (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
(마성스님,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
존재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가장 쉽게 설명되는 것이 열가지 족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의 소멸을 말한다. 그런 번뇌는 항상 탐진치로 대표 된다. 중생을 윤회하게 만드는 열가지 족쇄 안에 당연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열가지 족쇄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는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에 대한 것이다. 존재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말한다. 어떤 변치 않는 자아나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유신견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을 이루는 근원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를 찾는 수행을 하게 된다.
하지만 부처님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는 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어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신견을 가지고 ‘나’ 또는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면 범부(puthujjana)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 범부는 천인과 인간,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아직 중생을 윤회계에 묶어두고 있는 족쇄(結, saṁyojana)를 끊지 못한 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2012-05-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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