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거룩한 스님들과 상가(Sangha), 한글삼귀의는 ‘횡포’이자 ‘희극’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22. 18:51

 

 

거룩한 스님들과 상가(Sangha), 한글삼귀의는 횡포이자 ‘희극

 

 

이보(二寶)’에 귀의

 

불교를 믿는 사람을 불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수계를 받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에서 불자가 된다는 의미는 약간 다르다. 초기경전 율장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지 얼마되지 않았을때 부처님은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삼매에 잠겨 계셨다. 그때 따뿟사와 발리까 두 상인이 욱깔라에서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클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보리죽과 꿀을 가지고 부처님께 나아가 인사를 드린 후 공손하게 말하였다.

 

"부처님, 여기 보리죽과 꿀을 받아 주십시오." 이 공양의 공덕으로 저희들에게 오랫동안 행복과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공양을 다 드셨을때, 따뿟사와 발리까는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숙여 절하며 말하였다.

 

"부처님, 저희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저희들을 재가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이와 같이 두 상인 따뿟사와 발리까는 '부처님과 가르침' 이 두가지에 귀의한 최초의 재가 신도가 되었다."

 

(율장 마하왁가 14,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일아스님)

 

 

율장 마하왁가에 따르면 최초의 재가신자가 된 따뿟사와 발리까는 부처님(,Buddha)과 가르침(, Dhamma)에 귀의 함으로서 불자가 되었다. 아직 승단이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보(二寶)’에 귀의 한 것이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불교에서 불법승을 삼보라 한다. 세 가지 보배 또는 보석, 보물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을 펼칠 때  세 가지 보배 중에 승보는 없었다. 하지만 야사와 야사의 친구 등 양가집 자제들이 대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 하자 이 세상에 아라한이 60명이 되었다.

 

어느 정도 교단으로서 성격이 갖추어지자 부처님은 유명한 전법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까삿빠 삼형제가 귀의 하자 교단은 1000명이 넘었다. 이렇게 1000명이 넘는 교단이 성립되자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대나무숲을 기증하여 죽림정사가 만들어 졌다.

 

그 무렵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가 250명의 방랑수행자들과 함께 귀의 함에 따라 커다란 교단이 되었고 성자들의 상가인 승보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를 삼보라 한다.

 

이렇게 교단이 성립되고 불법승 삼보가 정립되었을 때 불자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불자가 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재가신도가 되는 길 : 삼보와 오계의 가르침

 

 어느 때 부처님은 까빌라왓투의 사꺄족이 사는 마을의 니그로다 승원에 계셨다. 그때 사까족의 마하나마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마하나마,

붓다(부처님),

담마(가르침),

상가(승가)에 귀의하면 재가신도가 된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계행을 갖추는 것입니까?"

 

"재가신도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렇게 재가신도는 계행을 갖춘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믿음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그는 여래의 깨달음에 대하여 믿음을 갖는다.

부처님은

'아라한이시며,

온전히 깨달으신 분,

지혜와 덕행을 갖춘 분,

바른 길로 잘 가신 분,

세상을 잘 아는 분,

견줄 바가 없는 분,

사람을 길들이는 분, 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

이시다.

이와 같이 재가신도는 믿음을 성취한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보시를 성취하는 것입니까?

 

"재가신도는 집에 살면서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걸림 없이 너그럽게 베풀며, 손이 커서 아낌없이 베풀며, 남에게 주는 것에 기쁨을 느끼며, 남을 위해 자신을 베풀며 보시와 나누는 것을 기뻐한다. 이와 같이 재가신도는 보시를 성취한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지혜를 성취하는 것입니까?"

 

"여기 지혜로운 재가신도가 있다. 그는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가 있다. 그런데 그 지혜는 거룩하고 꿰뚫어 보는 지혜이며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 지혜이다. 이와 같이 재가신도는 지혜를 성취한다."

 

(상윳따니까야 , 55 삿짜상윳따 37,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일아스님)

 

 

 

 

Kapilavastu

 

 

 

 

부처님은 재가신도가 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 할 것을 말하였다. 그렇게 하면 재가신도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수계를 하면 불자가 되는 것과 다르다. 가장 먼저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고, 그 다음에 오계를 준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불법승 삼보를 의지처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불교방송 음악프로인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이를 진행하는 스님은 마지막 멘트를 날릴 때 “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 ”라고 말한다. 불자들의 귀의 대상이 불법승 삼보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앞에 경배 올리자고 하는 것은 불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부처님 뵈러 절에 가지 스님보고 절에 가나?”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1.1.5.1).”고 강조 하였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의지할 대상은 불법승 세 가지 보배이다. 불법승 삼보에 의지 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는 다면 불자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최근 마성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터진 스님도박사건에 대하여 스님의 블로그에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라는 글을 올렸다. 잡아함경 제30권 제837경에 실려 있는 과환경(過患經)’ 을 인용 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을 믿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생길 것이니, 저 사람이 혹 계()를 범하고 율()을 어겼을 때에는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공경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존경하는데, 대중 스님들은 그를 버리고 천대한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塔寺]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첫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다음에는 사람을 공경하고 믿을 때 공경을 받는 사람이 계를 범하거나 율을 어겨서 대중 스님들이 그를 칭찬하지 않으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지금 대중 스님들은 칭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두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또 만일 저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다른 지방을 유행하게 되면, 그를 공경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공경하는 사람이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인간 세상을 유행하고 있으니, 내가 이제 무슨 인연으로 저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세 번째 허물이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고 나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목숨을 마쳤으니, 이제 무슨 인연으로 그 절에 들어가겠는가?' 

 

 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는 까닭에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다섯 번째 허물이라 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비구들아, 마땅히 '부처님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과, 법과 승가에 대한 무너지지 않는 깨끗한 믿음을 성취하고 거룩한 계를 성취하리라'고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

 

 

 

경에서 스님을 믿었다가 실망한 케이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치 요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신도들이 절을 떠나는 이유가 스님들이 계행등과 관련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부처님 뵈러 절에 가지 스님보고 절에가나?”라는 말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 더구나 속세로 환속한 스님들을 보면 절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고 그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점차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이 때 상가는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무식한 소리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불법승 삼보에서 승보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이는 한글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승의 개념이 공동체로서의 상가이고, 그것도 성자들의 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승보의 개념을 스님들 개별적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커뮤니티로서의 승보의 개념에 대하여 스님으로 바꾸어 놓았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S시인이 댓글을 주셨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을 "승가에 귀의한다" 혹은 "승단에 귀의한다"로 바꾸어야 한다고 불교티브이 송현 시인의 행복발견 특강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도 되지 않는 무식한 소리라고 봅니다.  스님과 승단이란 개념은 하늘과 땅만큼 의미가 다릅니다

 

가령, 승려 개인 중에는 화투도 치고 안쳤다 하고, 고급 룸살롱에 가고 안갔다 하고, 2차 가고도 안갔다 하고, 마눌 감춰두고도 안 안감춰 두었다고 하고, 엄청난 시줏돈 가로채고 안 챘다 하고 , 영가 천도한다고 엄청난 돈을 받아챙기고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고, 점봐주고 돈 받고도 돈 안 받았다고 하고 별별 또라이 별별 함량미달 승려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승려 개인을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마땅히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님들의 집단인 승단 혹은 승가를 함부로 매도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승려 집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교사 중에 영 실력도 없고 엉터리들이 있다고 해서 교사라는 직업 자체를 매도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삼귀의 셋째 줄은 당장 "승단에 귀의한다" 혹은 "승가에 귀의한다"로 바로 잡는 것이 상식에도 맞는 일입니다.

 

(S시인, “보통스님들은귀의대상이 아니다!  현행삼귀의는 개정되어야 댓글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스님과 승단은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글삼귀의에 따르면 승단으로서의 개념인 상가(Sangha)에 대하여 스님들 이라고 적용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잘못 하였을 때 모든 비난이 승단으로 집중되는 폐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허물이 발견 되었을 때 이를 비판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승단을 비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한글삼귀의에서 표현 되어 있듯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스님들의 허물이 신문과 방송, 인터넷포털 메인뉴스에 장식 되었을 때 불교계 전체가 매도 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승단에 귀의한다" 혹은 "승가에 귀의한다"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스님들이 개판 쳤을 때

 

삼귀의에서 승보는 성자들의 커뮤니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초기경전이나 주석서에도 그렇게 언급되어 있다. 그렇지 않고 스님들을 승보로 본다면 개별적인 스님 역시 승보가 될 것이다. 이는 공동체로서의 상가개념과 거리가 먼 것이다.

 

어떤 이는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말 자체가 커뮤니티로서의 성스런 상가를 의미하는 승보라고 보고 있지만, 문자 자체의 의미로 본다면 스님을 승보로 해석되는 것이다.

 

승보의 개념은 공동체의 개념임에 틀림 없다. 그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성자가 된 사쌍팔배의 성인들을 말한다. 그런 성자의 공동체가 불자들이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승보를 말한다.

 

문제는 한글삼귀의가 나오면서 문제가 되었다. 모든 법회의식에서 한글삼귀의를 노래가락으로 합송하고 있는데,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문구로 인하여 스님들은 자동적으로 승보로 보이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이 개판쳤을 때 불교계와 불자들 전체가 매도 되는 현상이 발생되고 있다.

 

이처럼 한글삼귀의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승보는 바로 스님들이라는 등식을 만들었는데 다른 나라는 어떠할까.

 

귀의승화합존(歸依僧和合尊)’을 제대로 번역하였더라면

 

승보에 대하여 먼저 한글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았다. 일반적으로 한글 위키피디아는 영문을 번역해 놓은 경우가 많다.

 

 

 

귀의

 

귀의(歸依)(, Buddha) · (, Dharma) · (, Sagha)3(三寶)에 귀투(歸投)하여 믿음에 몸을 맡기고 신앙함을 말한다.[1] 이를 삼귀의(三歸依)라고 하며, 불교신앙의 전부를 나타낸다.[1] 그리고 귀명(歸命)은 범어 나마스의 역어로, 그 음을 따서 나무(南無)라 하는데, 이는 귀의한 마음을 말로 나타낸 것이다.[1]

 

3(三寶)에 대해서 귀의하는 맹서의 말은 일반적으로 삼귀의문(三歸依文)이라고 불리는데, "나무귀의불(南無歸依佛), 나무귀의법(南無歸依法), 나무귀의승(南無歸依僧)"이라는 문구이다.[2] 불교도로서의 계() 받을 에 맹세의 말로 세 번 되풀이해서 왼다.[2] 즉 이 맹세로 불교도가 되는 일이 결정된다.[2]

 

무엇 때문에 3에 귀의하는가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2]

 

귀의불무상존(歸依佛無上尊):

부처는 최상무상(最上無上)의 인격 완성자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불법탐욕을 떠나게 하는 존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귀의승화합존(歸依僧和合尊):

불교 교단은 평등화합의 이상사회이기 때문에 귀의한다

 

(귀의, 한글위키피디아)

 

 

한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승보에 대하여 한문 귀의승화합존(歸依僧和合尊)’불교 교단은 평등화합의 이상사회이기 때문에 귀의한다로 되어 있어서, 승보가 한글삼귀의 거룩한 스님들처럼  개별적인 스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문 귀의승화합존(歸依僧和合尊)’ 제대로 번역하여 한글삼귀의를 만들었다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문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승보의 개념은

 

다음으로 영문 위키피디아 표현된 삼귀의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Three Jewels

 

The Three Jewels, also called the Three Treasures, the Siemese Triples, Three Refuges, or the Triple Gem (त्रिरत्न (triratna)) (Pali: tiratana), are the three things that Buddhists take refuge in, and look toward for guidance, in the process known as taking refuge.

 

The Three Jewels are:

 

Buddha

Sanskrit, Pali: The Enlightened or Awakened one; Chn: 佛陀, Fótuó, Jpn: , Butsu, Tib: sangs-rgyas, Mong: burqan

depending on one's interpretation, can mean the historical Buddha (Shakyamuni) or the Buddha nature—the ideal or highest spiritual potential that exists within all beings;

 

Dharma

Sanskrit: The Teaching; Pali: Dharmam, Chn: , Fǎ, Jpn: Hō, Tib: chos, Mong: nom

the teachings of the Buddha.

 

Sangha

Sanskrit, Pali: The Community; Chn: , Sēng, Jpn: Sō, Tib: dge-'dun, Mong: quvaraɣ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attained enlightenment, who may help a practicing Buddhist to do the same. Also used more broadly to refer to the community

 

(Three Jewels, 영문위키피디아)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상가(Sanhga)에 대하여 커뮤니티(공동체)’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커뮤니티일까.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깨달은 성자의 공동체를 말한다고 표기 되어 있다. 넓은 의미로 승가공동체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한글삼귀의 처럼 스님들 개별개념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서도

 

상가의 개념에 대하여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았다. 승가에 대한 개념을 보면 다음과 같다.

 

 

サンガ(僧伽)と

 

僧伽(サンガ)は、一般に「」といかえることもできるが、時代はもちろん、現代においても上座部仏教乗仏教わず、在家信者まないな、出家者たちの共同体である。しかしながら、日本仏教各宗派教団は、戒律出家者存在しないため、定義上僧伽(サンガ)ではない

 

상가란

승가는 일반적으로 승단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지만, 석가당시 시대는 물론 현재에서도 상좌부불교, 대승불교를 막론하고 재가신자를 포함하지 않은 순수한 출가자 공동체이다. 하지만 일본불교의 각종파의 교단은 계율을 준수하는 복수의 출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의상 승가는 아니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승가를 출가자의 공동체(出家者たちの共同体)로 규정하고 있다. 한글삼귀의 처럼 거룩한 스님들이 아닌 커뮤니티임을 알 수 있다.

 

성자승가와 범부승가

 

그런데 일본의 경우 계율문제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승가는 아니라고 한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글에서 먼저 교단에 대한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教団

 

かくして仏教教団は、各地成立し、それぞれ活動っていた。このような現前僧伽ぶ。ところが、5から20人位までのである現前僧伽活動になると、僧伽自身統制、さらに相互連絡等必要じ、やがて四方僧伽ばれるような僧伽全体組織必要となってきた。

乗仏教成立してからは、を「聞僧伽」(しょうもんそうぎゃ)とび、教団を「菩薩僧伽」とんだ。菩薩僧伽では、在家出家明瞭でなく、[要出典]めて僧伽とも (gaNa गण) ともんでいる。った聖者を「聖者僧伽」とび、つとしてはこの聖者僧伽であるともなされ、一般を「凡夫僧伽」「世俗僧伽」ともいう。[要出典]

後世乗仏教には、一体一体三同体三)の見方れ、それまでの別体三見方主張された。

後世日本では教団する出家者を「」とようになった。

 

교단

불교 교단이 각지에 성립하여 각각 활동을 해 나갔다. 이와 같은 집단을 현전승가라 부른다. 그런데 5인에서 20인 까지의 집단으로 구성된 현전승가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승가자신의 통제, 거기에다 상호연락등의 필요가 발생되어 마침내 사방승가라 불리우는 승가전체의 조직이 필요로 되었다.

 

대승불교가 성립하고 나소 기존의 승을 성문승가라 부르고, 대승의 교단을 보살승가라 불렀다. 보살승가에서는 재가출가의 구별이 명료 하지 않아 양자를 포함하여 승가로서 (, gaNa)’이라 부르고 있다. 깨달은 성자의 집단을 성자승가라 부르고, 삼보의 하나로서 승은 이 성자승가를  일컫는 것과 함께  일반의 승을 범부승가’ ‘세속승가라 말한다.

 

후세 대승불교에서는 불법승의 삼보를 일체로 하는 일체삼보(동체삼보)’로 보는 방법이 출현하고 이제까지의 별체삼보관과 별도의 보기라고 주장하였다.

 

후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교단에 속하는 개개인 출가자를 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성립과 함께 승가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 이전의 초기불교 교단을 성문승가 또는 성자승가로 지칭하지만, 대승불교가 성립되고 난 후 출가재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아 모두 으로 부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승가의 개념도 범부승가’ ‘세속승가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승가는 엄밀히 말하면 부처님의 승가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공의 논리로 재해석하여 별도의 불교를 만들어 낸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 올수록 스님들 자체를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성자개념으로서, 공동개념으로서 승가가 스님 개개인을 지칭하는 승으로 변질되어 삼보중의 하나인 승보로서 바뀐 것이라 볼 수 있다.

 

승가가 완전히 소멸된 일본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본불교에서 승은 승가가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매우 놀라웁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四分律

日本仏教において、史的いられてきたである。比丘二百五十戒遵守する。 において、日本では完全僧伽消滅しているため、律宗などで儀式上必要から、形式的受戒する場合などから戒師する必要がある。

 

 

사분률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율이 있다. 비구는 250계를 준수하는 것이다. 현상에 있어서 일본에서는 완전히 승가가 소멸되어 있기 때문에 율종에서는 의식상의 필요에 따라 형식적으로 수계하는 경우 중국등 으로부터 계사를 초빙하여 할 필요가 있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현재 일본에서는 실질적으로 승가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250가지나 되는 비구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매우 솔직한 고백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수계를 할 경우 이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더구나 계를 줄 계사도 없어서 중국 등 외국으로부터 계사를 초빙하여 형식적으로 치룬다고 한다.

 

태국의 고승을 계사로 하여

 

이런 점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권 국가에서는 계율을 잘 지키지 않는 경향이 강하므로 우리나라 역시 다른 나라로부터 계사를 초빙하여 수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된 마성스님의 글이 있다.

 

 

한국불교는 승단 정화 이후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구라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구족계의 계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국의 고승을 초청하여 구족계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태국의 고승들이 한국에 와서 남방 전통의 구족계를 수여했다.

 

이것은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크나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 교단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한국의 승려들이 상좌불교 국가인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상좌부 전통의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태국의 장로들은 한국불교의 승단에 태국의 계맥을 전해 준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세계불교에서의 태국불교(Thai Buddhism in the Buddhist World)》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 마성, 불교평론 2011-9-6)

 

 

1973년 태국스님들을 계사로 초빙하여 수계식을 열었다고 한다. 이유는 한국비구계의 계맥이 단절되어 계를 줄 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서 보는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

 

계를 받은 스님들은 누구일까

 

 그렇다면 그때 당시 계를 받은 스님들은 누구일까. 불교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님들이 다른 불교국가에서 학업을 추구하도록 파견돼 왔다. 최근 몇 년간 상좌부 불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 승단은 한국 스님들을 상좌불교 국가들로 보낼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의 상좌부 수계도 환영하고 있다. 1973(불기 2516)에 태국 상좌부 스님들이 서울에서 수계식을 열기 위해 초대를 받고 가서 약 마흔 분의 한국 스님들을 상좌부 계단에 맞아들였다.

 

위의 인용문 내용과 같이 한국불교계에서 태국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비구계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성(道成) 스님(전 해인사·대흥사 주지, 현 부산 태종사 회주·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의 증언에 따르면, 1973 3월 말경 양산 통도사에서 남방 구족계 수계식이 거행되었다. 이때의 수계는 계첩을 발부하지 않았으며, 수계식 기념사진도 촬영하지 않았다. 다만 수계의 증표로 남방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았다. 수계를 받은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도성 스님은 당시 수계를 받은 스님들의 명단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이 받은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고암과 경산 스님은 계를 받았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이때 천축사의 천장 스님은 한 발은 계단 안에 한 발은 계단 밖에 두고 수계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한편 그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남방불교의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이 있었다. 일각 스님은 인도에 가서 받았으며, 거해 스님은 태국에 가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때를 상좌불교의 도입 시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좌부의 장로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한국불교계에서는 이때 받은 수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수계 받은 사실 자체를 지금까지 숨기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 마성, 불교평론 2011-9-6)

 

 

그때 당시 태국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의 명단이 보인다. 모두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고승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후 남방불교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쉬쉬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왜 삭발하는가

 

이렇게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태국스님을 계사로 하여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은 사실상 승가가 소멸 되었음을 말한다. 더구나 일본의 경우 종파불교이기 때문에 모두 제각각으로서 비구라고 볼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다음과 같은  글이 매우 실감나는 일본불교의 현실이다.

 

 

僧侶規律としてがある。め(丸刈)て境地する""への第一とされる。は、ったものである。古代インドでは、るのは最大恥辱とされ、重罪したする一種刑罰であったが、らののためんでした。それに弟子たちもったものである。

なお、罪人刑罰は、日本するなどられるものであった。

した僧侶が、還俗してばすことは(ちくはつ)という[4]

近年有僧侶もみうけられるが、現代日本教団には、一部具足戒ける習慣がなくらはには僧侶比丘)ではないので問題はないともえる

 

삭발

승려의 규율로서 삭발이 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해탈을 향한 제일보로 간주된다. 삭발의 유래는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고대인도에서는 두발을 자르는 것은 최대의 치욕으로 간주되어 중죄를 범한 자에 대한 일종의 형벌과 같았지만, 부처님 스스로 해탈로 나아가기 위하여 삭발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도 따라 하게 되었다. 또한 죄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형벌은 중국의 장형이나 일본의 천죄에 대한 의식으로서 널리 보여지는 것이었다.

 

삭발한 승려가 환속하여 머리를 기르는 것을 축발이라고 한다.

 

근년 유발의 승려도 눈에 띠는데, 현대 일본의 전통교단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구족계를 받는 관습은 없어서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승려(비구)가 아니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고대인도에서는 삭발하는 것이 최대의 치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해탈을 실현하기 위하여 삭발하였고 제자들도 따라서 승려는 삭발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다.

 

하지만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에서 유발승려도 눈에 띠는데 엄밀히 말하면 승려가 아니라고 한다. 더구나 일본불교의 경우 일부 교단을 제외 하고 구족계를 받는 관습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일본에서는 완전히 승가가 소멸(日本では完全僧伽消滅)’  되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승려는 제사자

 

일본에서 승가가 소멸되었다고 말한 것은 250개에 달하는 비구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각 종파의 승려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에서 승려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一般にいわれる僧侶

日本現代では、無戒僧職祭祀者大多めるので慣習としてらのことも一般僧侶ぶ。 しかし、上述した比丘比丘尼定義からすれば、らを僧侶ぶのはりである

 

일반적으로 승려라 함은

일본, 특히 현재 상황에서는 무계(無戒)로 승직을 영위하는 제사자가 대다수를 차지 하고 있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그들을 승려라 부른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비구-비구니로서의 정의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승려라고 부르는 것은  잘 못된 것이다.

(,  일본어 위키피디아)

 

 

솔직한 고백이라 보여진다. 계를 지키지 않고 구족계도 받지 않은 단지 직업으로서 삶을 꾸려 가고 는 것이 일본불교에 있어서 승려의 역할이다. 더구나 죽은 자를 위한 제사가 주된 일이라 한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스님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재를 지내주는 것이 일본불교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놀라웁게도빠일어 삼귀의가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본불교에서 상가는 없어졌고 또한 승려라고 부를 수 도 없을 정도로 직업화, 세속화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본 불교에서 삼귀의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처럼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으로 부르는 것일까. 삼귀의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본불교에 진종()’이 있다. 정토종 계열이다. 일본진종의 법회의식 식순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

 

 

 

1 

五常
宗宗歌
(パ)
のなかに
、いのちにめるとき 御遠忌マソング
なんまんだぶつの子守歌 御遠忌イメジソング
聖親鸞

 

(日豊教区, 2010515)

 

 

식순에 삼귀의가 있는데 놀라웁게도빠일어 삼귀의이다. 승가가 소멸하여 비구, 비구니가 없어서 단지 직업으로서 승려가 있을 뿐인 일본에서 승보는 스님들이 아니라 성스런 상가공동체인 것이다. 세속화된 승려가 결코 승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 본다.

 

일본진종의 빠일리 삼귀의 의례

 

유튜브 동영상으로 본 일본진종의 삼귀의 의례는 다음과 같다.

 

 

 

 

 

삼귀의

日豊教区

삼귀의례를 빠알리어로 하고 있다.

 

 

 

삭발한 승려는 보이지 않는다. 삼귀의는 순수한 빠알리어로 진행하고 있다.

 

정토종 계열에서 빠알리 삼귀의를 하고 있다면 다른 종파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일본 조동종에서도

 

일본에 조동종이 있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조동종(曹洞宗)중국의 조동종과 일본의 조동종이 있다. 중국 불교에서 조동종은 임제종 · 위앙종 · 운문종 · 법안종과 더불어 선종 5의 하나이다. 일본 불교에서 조동종은 보화종 · 일본달마종 · 임제종 · 황벽종과 더불어 선종 계통의 종파의 하나이다.”

 

라고 설명 되어 있다. 우리나라 조계종 처럼 선종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일본조동종의 종조는 도겐선사(道元: 1200~1253)인데 1227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장옹여정(長翁如淨)의 법을 이어 묵조선을 계승하였고 1129 귀국하여 일본에 조동종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선종과 매우 유사한 일본조동종에서는 삼귀의를 어떻게 봉행할까.

 

일본조동종 옥천사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依三(きえさんぼう)  【依文(さんきえもん)

 

 

 (なむきえぶつ)
 
 (なむきえほう)
 
 (なむきえそう)

 

 

曹洞宗では、修行道場一般寺院在家場合そのいろいろながありますが、
泉寺では檀家法事などで、めにに、懺悔文、それからこの依文(さんきえもん)えておむことにしております。
 
南無
南無依法
南無依僧
 
無上尊(むじょうそん)
依法離塵尊(りじんそん)
依僧和合尊(わごうそん)
 
(きょう)
依法竟
依僧竟
(きょう)=おわる。
(おわ)る=完全依仕切っております。というようなじです。

 

 

一般にも「ブッダムサラナムガッチャミ」という言葉いたもあるといますが、
初期仏教では、のようにえます。

 

(일반인중에는 붓다무 사라나무 갓차미라는 말을 들은 분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초기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합창합니다)


 

 
ブッダム
サラナムガッチャ
  
いたします。
 
ダッマム
サラナムガッチャ
  
)にいたします。
 
サンガム
サラナムガッチャ
  
聖者)にいたします。
 
 
ドゥティヤム
ピ  ブッダムサラナムガッチャ
  (ふたた)
は、いたします。
 
ドゥティヤム
ピ  ダッマムサラナムガッチャ
  
は、)にいたします。
 
ドゥティヤム
ピ  サンガムサラナムガッチャ
  
は、聖者)にいたします。
 
タティヤム
ピ  ブッダムサラナムガッチャ
  三度(みたび)は、
いたします。
 
タティヤム
ピ  ダッマムサラナムガッチャ
  三度(みたび)は、
)にいたします。
 
タティヤム
ピ  サンガムサラナムガッチャ
  三度(みたび)は、
聖者)にいたします。
 
 
めにえ、は、そして三度(みたび)は、というように
一度一回一回きちんと間違えなく確認して、三度(みたび)えるのだということを日本語ったとき、
これは
大切な、いことだといました。
 
曹洞宗正式うのは3回繰し、意識しているのですが、
このように、
び、三度(みたび)、という言葉けてえるには、さや調子などでわらなかったものかもれないといます。
 それはともかく、「ドゥティヤム
ピ …」「タティヤムピ …」とパきで意味をしっかり確認しながら、聖者じて丁寧依文えてみると、それだけでも自分のこころがわるがします。
 
きとしけるものがせでありますように

(먼저 처음 부르고, 다음에 두번 나는, 그리고 세 번 나는,  이와 같이 매번 일회일회 정확히 세 번 부르는 것을 일본어 역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친절하고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조동종의 삼귀의도 정식으로 하는 것은 3회 반복하고 두중의 회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와 같이 두 번 세 번 이라는 말을 붙여서 부르는 것은 글이 길어지거나 읽는 리듬과 관계등 전달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도띠야무삐 다띠야무삐 라는 빠알리어 음향으로 의미를 확실히 확인 하면서 불--성자의 승단을 생각하면서 정중하게 삼귀의문을 부르면 그것만으로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기분이 됩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仏教 No.3, 일본 조동종 옥천사)

 

 

일본 조동종 옥천사 자료에 따르면 선종계통에서도 빠알리 삼귀의를 봉행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빠알리 삼귀의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써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승보에 대하여 성자의 승단(聖者)’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여 놓았다.

 

정토종 등과 비교하여 불교전통이 살아 있다고 알려져 있는 조동종에서 승보에 대하여 우리나라 식으로 스님들이라 하지 않고, 더구나 빠알리 삼귀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고 그 방법까지 제시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 불교식 혼례에서 빠알리 삼귀의가

 

이렇게 일본의 경우 각 종파마다 빠알리 삼귀의가 일반화 된 듯 보인다. 그런데 빠알리 삼귀의 낭송이 혼례식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동영상이 이를 잘 말해 준다.

 

 

 

 

 

 

 

さんきえ

일본의 불교식 혼례

혼례식에서 빠알리 삼귀의가 낭송되고 있다.

 

 

 

일본에서 빠알리삼귀의는 사찰이나 결혼식 뿐만 아니라 문화 행사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문화 갤러리에서 기타 소리에 맞추어 빠알리 삼귀의가 낭송되고 있는 동영상이다.

 

 

 

 

 

 

 

依五戒文(パ

삼귀의오계문(빠알리어)

高山龍智バンドウジロウによる仏教コラボライブ
2011611日本橋小馬町ンツリギャラリ
※バンドウジロウ
個展比類なきこのマントラ」最終日
出演高山龍智ヴォカル)+バンドウジロウ(ギター・プマシン)

 

 

 


이처럼 문화행사에서도 빠알리 삼귀의가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가(Sangha)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한 넌센스

 

신문과 방송, 인터넷포털 메인뉴스에서 스님들의 도박, 몰카, 검찰고발 등 마치 진흙탕속에서 싸우고 있는 개싸움의 모습을 연출 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승가이다. 이런 승가에 속해 있는 스님들은 한글삼귀의에 따르면 귀의의 대상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믿는 불법승 삼보 중의 하나인 승보로서 간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보의 의미는 한글삼귀의에서 표현된 스님들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스님 개개인을 지칭하는 듯한 개별적 존재로서 승보가 아니라 승가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개개인의 스님과 공동체(커뮤니티, Sangha)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마치 승보가 스님을 지칭하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한글삼귀의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안다면 잘못된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승보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강 사라낭 갓차미(Sagha saraa gacchāmi)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명백히 상가(Sangha)라고 표기 되어 있다. 또한 한문삼귀의에서도 귀의승화합존을 제대로 번역하였더라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와 같은 문장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상가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한 넌센스로 보여진다.

 

스님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그렇다면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로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승보를 스님들로 바꾼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스님들의 권위에 대한 것이다.

 

스님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 스님앞에서 삼배하는 제도라 한다. 이는 1947년 봉암사 결사 이후부터 생겨난 제도라 한다. 그 이전 까지만 해도 재가불자가 스님앞에서 삼배하는 것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947년 봉암사 결사 이후 출가와 재가의 위상이 급격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삼배를 관습화 하는 등 승속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유에 대하여 마성스님은자신의 홈페이지글중에 너무 라는 글에서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승려의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한 조치 때문으로 본다고 하였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현행 한글삼귀의에서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고 하는 것 역시 승속구분과 승려의 신분향상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런 한글삼귀의가 출현한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보고 있다.

 

 

만만치 않은 부작용

 

이렇게 승려의 신분을 향상시키고 승과 속을 구분하기 위한 조치로서 보여지는 한글삼귀의에서 승보 개념이 상가, 즉 커뮤니티가 아닌 개개 스님들로 바뀐 결과 스님들의 지위는 대폭 올라 갔을지 모르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도박, 몰카, 검찰고발 등 스님들이 개싸움을 벌였을 때 그것은 고스란히 승가전체가 욕먹게 되고 불교계 전체가 개망신 당하고 불자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사태로 발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보의 개념을 원래대로 커뮤니티로 돌려 놓는다면 설령 어느 스님이 개판쳐도 승가 전체가 욕먹는 일은 줄어 들 것이다.

 

이렇게 승보에 대하여 스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또 하나 문제 되는 것은 사람을 믿음으로 인하여 상처 받는 것이다.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과환경에서와 같이 스님이 계율을 지키지 않거나 환속하였을 때 신도들이 절을 떠나고 심지어 개종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중들을 믿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한것과 일맥 상통한다.

 

한글삼귀의는 횡포이자  코메디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한글삼귀의에서 승보개념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한글삼귀의에서 승보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였을 때 이는 국제적 망신거리라 볼 수 있다. 승보가 커뮤니티라는 개념조차 모르고 개개스님을 승보개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무개념에 대하여 이민용 참여불교 재가연대 공동대표는 2010 10 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불교유신을 다시 생각하다’라는 낭독회에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현대문으로 번역시킨 한글삼귀의에 대하여 승가의횡포이자 하나의 희극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이렇게 한글삼귀의는 횡포 희극두 단어로 요약된다. 이는 한국불교가 스님들만의 것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코메디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스님들간의 폭력, 은처, 횡령, 도박, 매음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승가전체가 욕을 먹고 불교계가 개망신을 당하고 불자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스님들을 승보로 격상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한스님의 허물이 불교계 전체를 욕보이고 불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 해야 할까. 당연히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상가(Sangha)이다. 이때 상가는 성스러운 성자의 상가를 말한다. 성스런 상가가 없다면 부처님의 말씀대로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 않고 가르침과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자신 밖에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ttā hi attano nātho        앗따 히 앗따노 나토

ko hi nātho paro siyā       꼬 히 나토 빠로 시야

attana hi sudantena         앗따나 히 수단떼나

nātha labhati dullabha  나탕 랍바띠 둘라방

 

 

진정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

어떻게 남을 자기의 의지처로 삼으랴?

자기를 잘 단련시킴으로써만

자기를 의지처로 만들 수 있는 것.

이는 실로 성취하기 어렵다.

 

 

(법구경, Dhp160)

 

 

2012-05-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