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잃어 버린 한국불교, 좋은 스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
최상승법의 유래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최상승법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소승법 위에 대승법이 있고, 대승법 위에 최상승법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최상승법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나온 말일까.
남진제 북송담이라 불리우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선사인 송담스님의 불교방송 불교강좌 법문을 들어 보면 최상승법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째서 이 수행하는 방법이 염불도 있고, 주력도 있고, 대승경전도 있고, 기도하는 법도 있고, 여러가지 법이 있는데 하필 이 참선 하는 스님들은 ‘참선이 제일이다’ 참선만을 내세우냐. 부처님이 설한 법은 팔만사천법이 낱낱이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해나가기만 하면 다 훌륭한 것이지 어찌 참선만이 제일이라고 자기가 하는 것만이 제일이라고 주장을 하고 자기가 하고 있지 않은 다른 것을 보잘 것 없는 방편법으로 폄하를 해서 격하를 시키느냐 이렇게 질문을 한 분도 있습니다.
그 말씀도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최상승법은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하신 법문, 그 중생근기에 맞추어서 수 없는 묘하고도 거룩한 법을 설하시고도 ‘나는 49년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도 없노라’하신데에 발판을 두고서 설해진 법인 것입니다. 49년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도 그것을 한마디로서 ‘나는 한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한 바로 그 말씀이 이 최승법을 설하신 바로 한마디 인 것 입니다.”
송담스님은 최상승법의 유래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근거로 들고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나는 49년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도 없노라”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이 49년동안 설한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방편법문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말이나 문자로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전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된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한 것이고 진실된 것이라 한다. 그런 가르침을 이어 받은 것이 선불교이고 화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상법이라고 한다.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의 유래
이처럼 최상승법의 근거가 되는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는 말은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니까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말은 인터넷검색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효림 스님은 "<금강경>에서 뿐만 아니라 <열반경>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다"라며 "<열반경>에도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49년 동안 법을 설했다고 하지 마라. 나는 사실은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는 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데 없는 법을 보고 설했다고 얘기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효림스님, 발가벗긴 금강경, 속살 어루만지다, 오마이뉴스 2009-11-26)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는 이야기는 대승경전인 열반경에 실려 있는 말이라 한다. 우리나라 선사들이나 스님들의 법문에서 자주 듣는 말이 바로 49년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오로지 대승불교권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결코 “49년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또 부처님은 45년동안 설법하다 열반 하였지 49년동안 설법하지 않았다. 49년설은 북방전승설 따른 것으로서 부처님의 출가를 19세로 보고 12년 고행을 하여 성도 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부처님의 일대기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전법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선사들은 부처님은 한 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고 주장하며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설한 것이 최상승법이라 말하지만, 조사스님들이 남긴 그 많은 선어록과 법문은 왜 있는 것일까. 또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문자와 언어로 최상승법의 설명을 하는 것일까. 최상승법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으로 전승된 것이라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을까.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최근 불교tv사이트를 보면 새로운 법문이 시작 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스님들 위주의 법문인데, 그 중에 하나가 ‘성담’스님의 법문이다.
성담스님의 법문은 매우 독특하다. 노래를 부르면서 법문하는 것이다. 성담스님만의 독특한 창법으로 부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노래한다.
길 안내문
자기 속에 부처님과 똑 같은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남을 의지하지 말고 바깥에서 구하지 말라.
오직 자신을 믿고 의지하라.
이세상 어떤 것도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생긴다.
이것은 진리이니 이 진리를 믿고 의지하라.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속에 보배가 있는 줄 모르고
바깥에서 찾는 사람이다.
자기 마음 밭에 생각의 씨앗을 뿌려라.
그러면 싹이 나와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어
나도 먹고 남도 줄 수 있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자신이 가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다.
이 가르침을 믿어라 이것이 길이니라.
(성담스님, 성담스님의 행복 110 지혜축제, 불교tv 2012-04-16)
‘길 안내문’이라는 제목의 게송이다. 이 게송중의 일부를 보면 매우 익숙한 구절이 있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말은 바이블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장1-14절)” 라는 말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말과 똑 같다.
시방세계에 두루하신 하나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문에서 바이블에 실려 있는 문구를 활용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이어지는 법문을 보면 또 있다. 스님은 첫 구절 “자기 속에 부처님과 똑 같은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라는 문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칠판에 써 놓았다.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
시방세계 두루 하신 부처님
언제 어디서나 항상 계시는 부처님
스님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지나가면 안된다고 한다. 진짜인지 확인을 해 보아여 한다고 말한다. ‘충만하다’ ‘두루하다’ ‘항상 계시다’라는 말에 대하여 나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불교에서만 하는가? 한번 살펴봐라.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말을 해요.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 시방세계에 두루하신 하나님,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러잖아요. 이 부처님이라는 단어만 불교에서 전용으로 쓸 뿐이지 다른 종교도 이렇게 하느님 하는 거에요.
어쨌든 이말이 똑 같에요. 이런 것 하나만 알아도 종교의 갈등 자체가 있을 수 없어요. 종교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고요. 자기가 눈을 못 떠서 그렇지. 그래서 우리 종교가 더 낫다고 하는 것은 나는 까막눈입니다 하고 자기가 선전하는 거에요.”
(성담스님, 성담스님의 행복 110 지혜축제, 불교tv 2012-04-16)
참으로 놀라운 법문이다. 부처님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종교가 똑같다는 말과 다름 없다.
모든 종교가 똑 같은 것이라면 굳이 불교를
이렇게 모든 종교가 똑 같은 것이라면 굳이 불교를 믿을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관세음보살이 영험하기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에게 비교될 수 있을까. 스님의 법문이 사실이라면 불자들은 먼 산중에 있는 절에 힘겹게 올라 갈 것이 아니라 바로 집옆에 있는 교회에 다니면 될 것이다.
스님이 말하는 길 안내문이라는 게송은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초기경전은 물론 대승경전에서 조차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와 같은 문구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만들었을까. 아마도 스님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만들었는지 모른다.
스님은 퇴마사?
불교TV에서 본 또 하나의 법문이 있다. 영가천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가 하루에 열시간 스무시간 몇 년 기도해서 영가천도를 딱 시키고 나니까 내 스스로도 자유의 몸을 얻고, 내 스스로 남을 치료 할 수 있고 퇴마할 수 있지만, 간섭을 안해요. 내가 그것을 잘 안해. 왜 그러냐. 저울의 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무슨 말이냐. 함부로 퇴마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에요.
자 보세요. 조상님들이 몸에 붙었는데 ‘나가!’하고 쫒아 버리고 이렇게 하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그래서 하도 죽겠다고 해서 퇴마 시켜서 빼 내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또 붙어 왔어. 그래 ‘너 왜 들어 갔니?’ 그러니까 ‘아니 우리 집안인데 스님이 왜 간섭해요? 그리고 내가 가라면 어디로 갑니까?’. 이 조상은 퇴마나 쫒아 내는 것이 아니에요.
(수월스님, 수월스님의 기도명상 불교대학, 불교TV 2012-02-09)
영가 천도에 대한 법문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진짜 영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몸은 없고 영혼만 있는 영가가 갈 곳이 없어 자신의 가족에게 들러 붙어 못살게 군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제까지 닦은 기도의 힘으로 영가를 떼어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님이 영가 천도할 때 퇴마도 하지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영가를 떼어 내면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절에다 ‘영구위패’등 모시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 갈 곳 없는 영가가 절에 있게 되어 사람 몸에 붙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님은 퇴마사 같다. 실제로 퇴마도 한다고 하니 스님은 퇴마사라고 볼 수 있다.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에 영가에 대한 이야기와 퇴마에 대한 가르침이 있을까. 스님은 어떤 경전에 근거하여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만든 법어 ‘행복창조 10선’
이렇게 스님들이 경전을 근거로 법문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것을 자신의 법문에 활용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스타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월호스님의 경우 다음과 같은 자신만의 어록을 만들었다.
행복창조 10선
1. 행복도 불행도 내 작품이다.
2. 내가 인(因)이요 남이 연(緣)이다. 과거의 인(因)이 현재의 연(緣)이다. 현 재의 인(因)이 미래의 연(緣)이다.
3. 구걸하지 말고 창조하자
4.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 할 수 없다면 언제 어디서 행복 할 수 있으랴
5. 나는 억세게 재수 좋은 사람이다.
6. 모든 것은 한 때이다. 걱정할 시간에 기도 하자.
7. 걸림돌이 디딤돌이다. 잡초가 약초다.
8. 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비교하자.
9. 판사가 되지 말고 관찰자가 되자.
10. 언젠가 이 세상에 없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월호스님, 행복창조 10선)
이것이 월호스님이 제창한 생활법문이다. 간단하고 짧은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 이 문구에 대하여 선창하고 신도들이 후창하는 식으로 법문을 펼쳐 나간다.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치유의 기도’
또 한명의 스타스님이 있다. 불교방송에서 주말에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를 진행하는 정목스님이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방송중에 매번 낭송했었다.
치유의 기도
모든 중생들을 위해 지금까지 무수한
붓다들께서 출현하셨지만
붓다들이 제 곁에 있다 하더라도
제 눈이 어둡고 어리석어
아직도 직접 부처님들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오늘은 건강하고 먹을 것도 있고 큰 어려움이 없다 해도
삶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이 몸은 이 생애 잠시 빌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선업을 지을 수 있는 인연과 기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났을 때에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 이 몸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나룻배로 여기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저는 이렇게 발원합니다.
몸과 마음 정신 어디에 함께 있든 우리의 모든 고통이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
전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전생에서 느꼈던 모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이번 생에서 얻었던 모든 기쁨과 지혜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슬픔과 두려움, 질병과 부정적인 생각들은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제가 무엇을 하든지 결코 남들에게 해가 되지 말고
누구든지 저를 만날 때마다 좋은 이익 얻게 되소서.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내든 칭찬을 하든
그것이 곧 그들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저를 비난하며 해치거나 모욕을 주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기 바라며 오히려 그로 인해 깨달음 얻으소서
전 생애를 통해 나와 인연 지은 모든 존재들에게
부족했던 지난날을 용서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bbs불교방송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에서)
정목스님이 진행하는 불교방송 음악프로에서 낭송하는 치유의 기도문을 보면 “불성의 밝은 빛 속에 치유되게 하소서 ”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하소서”라고 하는 형식은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다. 다시 말해서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도문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면 통용가능할 지 모르지만, 창조주 또는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에 맞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은 왜 이런 문구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다보니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좀처럼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설령 법문을 근거로 이야기 한다고 할지라도 근거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선사가 한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다.
이렇게 경전을 무시하는 전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송담스님이 언급하였듯이 부처님이 열반할 때 “나는 49년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문자를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와 팔만사천 법문 외 별도의 전승이 있다는 ‘교외별전’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소의 경전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주장하다 보니 자신이 말한 것이 곧 부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님이기 때문에 자신이 말한 것 역시 부처님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왜 선사들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경전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 안내문’’행복창조 10선’ ‘치유의 기도’처럼 자신만의 가르침을 선 보이는 이유가 될 것이다.
중구난방 법문
우리나라 불교는 임제종 계통의 맥을 잇고 있다. 그래서 스님들이 모두 임제문도이고 임제스님의 자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거의 대부분 ‘선’에 대한 것이다.
문자와 언어를 배격한다는 선사들은 수 많은 선어록을 남겼고, 선사들 또한 자신만의 어록을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법문하고 있다. 그런 법문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선사들의 법문은 모두 다르다. 말하는 이 모두가 부처이다 보니 자신의 말이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이처럼 중구난방처럼 보이는 각자의 어록을 중심으로 법문하다 보니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모두 같은 것이 되고, 종교 또한 똑 같은 것이라는 법문이 전국민을 상대로 전파를 타고 있는 것이다.
방향을 상실한 한국불교
최근 스님들 도박사건이 터졌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서는 연일 도박사건에 대하여 보도 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 한번 거론 할 때 마다 불교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그 결과 신도수가 대폭 줄어 들 것이다. 그에 따라 감소로 나타나 이런 상태가 유지 된다면 한국불교는 앞으로 한세대 안에 ‘소수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도박과 같은 있어서는 안될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이는 한국불교가 방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방향이 없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에 따라 신도들도 우왕좌왕하게 되어서 갈피를 못 잡게 된다. 스님들마다 하는 이야기가 모두 다르고 신행방법 또한 모두 다르기 때문에 종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번 도박사건과 관련하여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조계종의 조계사 주지스님이 포함 되어 있다. 현재 주지스님은 종적을 감추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야반도주 하듯이 짐을 꾸려 방을 비운 것이다. 그런 스님에 대하여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참회는 커녕 몰래 숨어 버린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도박사건과 관련이 없는 다른 스님들이 인터넷과 SNS등을 통하여 대신 사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도박사건의 주인공인 조계사 주지스님 역시 방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보너스달에 보너스 없는 셈치고"
이번 도박사건의 당사자이자 중앙종회 의원이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조계사 주지 토진스님은 관음재일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박사건이 나기 10일전의 법문이다.
“보너스달에 있는 한달 동안은 그 시간은 좋은데 다 써야 돼. 아들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또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세상을 위해서 다. 욕심사나운 놈이 보너스 타 가지고.. 어떤 사람은 보너스 타 가지고 저 혼자 다 쓰는 경우도 있어. 그 사람은 볼 것도 없이 지옥가는 거야.
그래서 윤달에 보너스달에 보너스 없는 셈치고 잘 나누어 쓰지 않는 사람은 시간과 생명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지옥가는 거라. 어디로 가요. 안가면 내가 보내 드릴 테니까.”
(토진스님, 조계사 관음재일법회 토진스님법문(2012. 4. 14 ) -Jogyesa dharma talk, 유튜브)
사진 : 조계사 홈페이지
토진스님은 도박사건이 나기 10일 전 조계사 관음재일 법회에서 나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보너스달에 보너스를 받았으면 없는 셈 치고 이웃에 나누라는 것이다. 나누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한다. 지옥에 안가면 자신이 지옥에 보내드릴 것이라 한다.
물론 웃으면서 한 이야기 이지만 유튜브 동영상에 올려진 또 다른 법문을 들어 보아도 강조하는 사항은 늘 보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직영사찰 재산관리인 스님은
조계사는 총무원의 직영사찰이다. 직영사찰은 총무원장이 관할하는 사찰로서, 재정ㆍ포교 등 종단 정책사업을 직접 집행하는 사찰을 말한다. 이렇게 직영사찰을 운영하는 것은 ‘수입’이 좋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계사와 봉은사와 유명기도처로 알려져 있는 갓바위 선본사와 관음기도도량으로 유명한 강화 보문사가 이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수입이 좋은 사찰이 수입분담금 사찰이다. 불자들은 물론 일반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관광지 성격의 사찰이다. 도선사, 연주암, 석굴암, 낙산사, 봉정암, 내장사, 보리암 등을 말한다.
이들 사찰로부터 분담금을 받아 조계종이 유지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직영사찰(조계사, 봉은사, 선본사, 보문사)은 매우 중요한 사찰로서 총무원장이 주지로 되어 있다. 다만 직접적으로 관할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재산관리인을 파견하는데 토진 스님이 그런 케이스이다. 일반적으로 직영사찰의 재산관리인 스님은 총무원장의 측근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대구 선본사의 경우 재산관리인 스님은 현 총무원장스님의 속가 조카라 한다.
재산관리인으로서 조계사 주지인 토진스님이 하는 일은 동영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신도들이 시주를 많이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회 때 마다 보시공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문은 찾아 볼 수 없다.
보시공덕만 말하는 법문
신심있는 불자들은 스님들의 법문을 듣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달려 온다. 산중에 있는 사찰이든 도심에 있는 사찰이든 한 번 나서면 몇 시간 또는 반나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런데 법문이 신통치 않다면 어떨까. 더구나 보시공덕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거기에다 지옥운운 한다면, 또 매번 한 이야기를 반복 한다면 법회에 나올 마음이 일어 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길을 마다 하지 않고 참석하는 불자들은 대부분 ‘노보살’들이다. 법당에서 젊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법문할 때 지칭하는 말은 항상 “보살님들”이다.
보시공덕만 이야기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 법문에서 배울 것은 없어 보였다. 법사들이 법문하면 반드시 필기구를 지참하여 노트할 준비를 하는데, 보시공덕만을 강조하는 스님들의 법문에서 단 한 줄도 적을 것이 없다.
좋은 스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
스님들이 도박을 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업을 하다 망한 스님도 있다. 이 모든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불자들의 시주돈이다. 피땀흘려 노동의 대가로 마련한 돈을 보시한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돈을 노름으로 탕진하는가 하면 사기를 당해서 모두 날려 버린다. 법문할 때는 좋은 말을 하지만 행동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좋은 스님을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스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스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둘째, 어느 경전을 의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셋째, 스승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넷째, 언행이 일치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스님이나 스승을 선택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수 백개에 달하는 불교 종파중에 스승이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지 가장 먼저 알아야 하고, 종파를 알았다면 그 종파의 ‘소의경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스승’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스승이 없이 혼자 깨달았다면 자기자신이 스승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행에 대한 것이다. 말로 하는 것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진리를 설하면서 음주, 도박 등 막행막식을 한다면 언행일치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대한힌두교 조계종’과 ‘대한기독교 조계종’
이번 도박사건으로 인하여 불자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특히 겉과 속이 다르고 언행일치가 되어 있지 않은 스님들을 믿고 따랐을 경우 더욱 더 상실감이 컷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방향이 상실된 채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외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스님들이 저마다 ‘길 안내문’이나 ‘행복 10선’ ‘치유의 기도문’등을 만들어 불자들에게 법문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 일 뿐이다.
또 부처님이 그토록 경계하였던 영속론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부처님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단견(斷見)과 함께 “자아와 이 세상은 영원하다”는 상견(常見)을 모두 부정 하였다.
이와 같은 양극단은 연기법에 따르면 모두 ‘삿된 견해(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상견은 거짓이고, 뒤이어 법이 일어나기 때문에 단견 역시 거짓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스님들은 영원론 또는 영혼론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주장한다. 모든 법이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가천도나 영혼 윤회를 주장한다면 이는 상견에 해당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영원주의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스님들이 영가나 영혼, 근원과 합일을 주장한다면 ‘대한힌두교 조계종’이라 불러야 될 것이다. 만일 스님들이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 시방세계 두루 하신 부처님, 언제 어디서나 항상 계시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면서 부처님 대신 하나님을 넣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대한기독교 조계종’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불자들의 깨어남 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초기경전에 잘 설해져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 외에 따로 의지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오로지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셨다.
이제 불자들이 깨어나야 한다. 불자들의 깨어남 만이 한국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개혁할 수 있다. 불자들이 무지할 때, 경을 모를 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지 못 하였을 때 제2의 도박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불자들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부처님 뿐이다. 부처님만이 믿고 따를 대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경전이 불자들이 신봉해야 할 소의경전이다.
“세상의 존경받는 분이 나의 스승이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제자 시수빠짤라 수행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수행녀 씨쑤빠짤라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
싸밧티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발우를 물리고 나서 대낮을 보내려고 안다 숲으로 갔다. 그녀는 안다 숲속 깊숙이 들어가 한 나무 밑에 앉았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수행녀 씨쑤빠짤라에게 몸의 털이 곤두서는 두려운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수행녀 씨쑤빠짤라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수행녀 씨쑤빠짤라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빠삐만]
"수행녀여,
그대는 어떠한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는가?"
[씨쑤빠짤라]
"벗이여,
나는 어떠한 이교도의 가르침도 기뻐하지 않는다."
[빠삐만]
"왜 머리를 삭발했는가? 그대는 수행녀처럼 보이는데
이교도의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어리석게 무엇을 하고 있는가?"
[씨쑤빠짤라]
"외도(外道)인 이교도들은 잘못된 견해를 믿으니
나는 그들의 법을 기뻐하지 않네. 그들은 법을 잘 모르네.
여기 싹가 족의 집에 태어난 이 깨달은 이, 견줄 데 없는 이
모든 것 극복하고 악마를 제거하고 모든 것에 정복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집착이 없는 이 눈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보네.
모든 업력의 멸진에 이르러 집착이 파괴되어 해탈했으니
세상의 존경받는 분이 나의 스승이네. 나는 그의 가르침을 기뻐한다네."
그때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씨쑤빠짤라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시수빠짤라경- Sīsūpacālāsuttaṃ, 상윳따니까야, S5. 1.8, 전재성님역)
2012-05-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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