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누적조회수 300만명을 맞이 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26. 23:10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누적조회수 300만명을 맞이 하여

 

 

누적조회수 300만명

누적조회수가 300만명을 돌파 하였다. 조회수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보아 준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이 된다. 지난 2005년 블로그를 개설한 이래 꾸준히 글을 써왔고 최근에는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번 누적 조회수 300만명 을 맞이 하여 그 동안 작성한 소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블로그 개설일 및 조회수에 따른 소감문

No

연월일

개설기념

누적조회

소감문

1

2005/8/3

개설일

-

-

2

2006/8/3

1주년

조사안됨

인연(因緣)

3

2006/11/13

10만명돌파

10만명

블로그 조회수 10만회 돌파에 즈음하여

4

2007/8/3

2주년

21만명

넷심(Net) 바로 민심(民心)이다, 블로그활동 2주년을 맞아

5

2008/8/3

3주년

69만명

블로그 개설 3년, '쓰레기성 글' 되지 않기 위해서

6

2009/1/23

100만명돌파

100만명

블로그와 조회수, 뗄래야 없는 관계일까

7

2009/8/3

4주년

133만명

블로그개설 4주년에, ‘진흙속의연꽃’ 부담스러워

8

2010/1/10

200만명돌파

200만명

블로그 누적조회수 200만명 돌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하여

9

2010/8/3

5주년

238만명

매일 글을 쓰는 이유는, 블로그 만든지 만 5 되는 날에

10

2011/8/3

6주년

269만명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블로그 6주년 맞아

11

2012/5/26

300만명돌파

300만명

 

 

 

매년 블로그 개설일과 조회수 돌파에 따른 소감문을 작성하다 보니 매년 표도 업데이트 되고 있다.

 

첫 소감문은

 

첫 소감문은 블로그 개설 1주년이 되었을 때인 2006 8 3일이다. ‘인연이라는 제목으로 소감문을 작성하였다. 그저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 남의 글을 열심히 퍼 나르던 때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고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이다.

 

마침 블로그 만든지 1년이 되서 짤막한 소감문을 작성 하였는데 조회수는 표시 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블로그를 방문하는 네트즌도 별로 없었고 그다지 내세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회수가 10만명이 넘어 갔을 때 블로그의 중요성을 인식 하였다. 글을 직접쓰기 시작하면서 조회가 급증한 것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 한 것이 어필 된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이후 개설일과 조회수 돌파 마다 소감문을 올렸다.

 

가볍게 쓴 글이 메인에

 

블로그 개설 2주년이 되었을 때 21만명이 되었고, 3주년에 69만명이 되었다. 마침내 블로그를 만든지 4년 만인 2009 1월에 100만명을 돌파 하였다.

 

그런데 200만명이 되던 때가 2010 1월이다. 1년만에 100만명을 돌파 한 것이다. 이는 올린 글이 몇 차례 포털 메인 화면에 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실릴 때마다 최고 14만명이 조회하기도 하였다.

 

메인에 올라간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가볍게 쓴 글인데 포털의 담당자가 메인에 올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 글의 제목은 개종(改宗) 생각 하는 친구에게라는 글로서 조회수는 143,665명에 달하고 댓글이 무려 900개 넘고 165 군데에서 퍼 간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이렇게 몇 차례 메인으로 올라가다 보니 쉽게 일년만에 백만명이 조회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0만명으로부터 300만명(2012 5 26)에 이르기 까지 2 4개월이 걸렸다.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렸을까. 이는 메인에 올라 간 글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써도 종교관련 글이기 때문에 메인에 올라 가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조회수 개념이 바뀌것도 큰 이유이다. 일년 전 까지만 해도 조회수는 페이지뷰 개념이었다. 그러나 실제 방문자 개념으로 바뀌면서 일일 방문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전의 조회수는 거품이 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고

 

글쓰기는 생활화 되어 있다. 그리고 일상이다.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자듯이 글쓰기 역시 틈만 나면 쓴다. 바쁘면 일부로 틈을 내서라도 쓴다. 밥먹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글쓰기도 숙달이 되는 것 같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MS WORD를 띄워 놓고 글자 크기 12로 한 다음 하얀 여백을 맞이 한다. 미리 구상하고 있었던 시나리오를 써 나가면 된다. 그 과정에 무수한 검색이 이루어지고 글을 다듬고 하는 과정을 거친다. 마침내 인터넷에 올려 졌을 때 오늘 할 바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글쓰기가 너무 지나쳐 본업을 소홀히 한 경우도 있다. 본업과 부업이 뒤바뀐 듯한 경우를 말한다. 그러다 몇 차례 일할 기회를 놓치기도 하고 고객으로부터 일독촉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금전적 손실을 본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멈출 수 없다. 일도 중요하지만 일 못지 않게 글쓰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불교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려 놓아 방문하는 법우님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글을 작성함으로 인한 성취감과 또 삶의 흔적을 남겼다는 만족감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왜 유명인사들은 블로그를 하지 않을까

 

정보통신과 인터넷 시대에 누구든지 글을 쓸 수 있다. 반드시 글쓰기를 배워야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나 기자 또는 학자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녀 노소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누구든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글로서 표현 할 수 있는 시대이다.

 

본 블로그도 그런 취지로 만들어 졌다. 처음부터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글을 쓰다 보니 많이 많은 이들이 방문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조회수도 많아 지게 되고 검색에 걸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작가나 불교계의 학자, 스님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통불자의 글쓰기는삼류 B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하여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에 스님이나 교수, 기자 등 유명인의 블로그가 보이지 않는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하여 대부분 시간낭비로 생각하거나 그다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 일 것이다. 원고료도 나오지 않고 돈도 되지 않은 글쓰기를 몇 시간 투자하여 블로그를 관리 하는 유명인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여 좋은 글을 올려 놓은 블로그나 카페도 종종 보인다. 가물에 콩나듯 보이는 일부 극소수 스님들의 블로그나 카페가 그것이다. 이렇게 누가 원고료를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공을 들여 올린  글은 가치가 있다. 그래서 수 많은 불자들이 보고 가져가기도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블로그나 카페에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커다란 포교를 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보통불자의 글에 불과 하지만  글을 꾸준히 수 년간 올리다 보니 검색에 모두 걸린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스님들이나 교수나 기자 등 불교계를 이끌어 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 번쯤 방문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의견을 주지 않으면 누가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의 말씀을 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스님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기도 하고, 어느 시인은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해 주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스님은 좀 더 좋은 글을 쓰라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법보시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유명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이름 모를 수 많은 불자들도 있다. 짧은 댓글로 감사의 표시를 할 때 늘 지켜 보고 있음을 느낀다.

 

블로그나 카페는 사이버세상의 절

 

 방송하나의 역할은 수십개의 절의 역할과 맞먹는다고 하였다. 현실 세상이 이와 같다면 또 하나의 공간인 사이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공간에 유명 불교사이트가 있어서 많은 네티즌들이 찾아 온다면 절이 수십개 있는 것과 같다.

 

같은 이치로 불자들이 블로그나 카페를 각자 만들어 이를 잘 운영한다면 이 하나 생긴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반드시 현실세상에 있는 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넘나드는 또 하나의 세상, 인터넷 공간에서도 절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절을 만들어 기복과 방편이 아닌 부처님의 정법을 알린다면 법의 바퀴는 굴러 가는 것이다. 법의 바퀴가 현실 세계 뿐만 아니라 사이버세상에서도 굴러 가는 것이다.

 

사이버 세상에서도 멈출 수 없는 법의 바퀴

 

그런 법의 바퀴는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 appativattiya.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Sela,

I am the righteous king,

incomparable,

Righteously I turn the wheel,

not ever to be stopped."

 

(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이처럼 부처님의 진리의 바퀴는 거꾸로 돌릴 수 도 없고 막을 자도 없다. 따라서 현실세계는 물론 사이버 세상 등 어떤 세상이 되었건 법의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자세로 법의 바퀴를 굴려야 할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다짐이 있다.

 

 

Esa muñja parihare              에사 문장 빠리하레

dhīratthu mama jīvita,          디랏투 마마 지위땅
Sa
gāme me mata                 산가메 메 마땅

seyyo yañce jīve parājito.       세이요 얀쩨 지웨 빠라지또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We can partake of something to live,

yet life is sham To me death in a battle is superior than to live defeated.

 

(파다나경-Padhana sutta-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Sn3.2, 전재성님역)

  파다나경(Padhana sutta, 정진의 경 Sn3.2).pdf  파다나경(정진의 경- Sn3.2).docx

 

 

 

 

 

 

문자풀(蚊子草, 문자초)

Filipendula palmata (Pall)

蚊子草,所植物界,是薇目(Rosales)薇科(Rosaceae)、蚊子草(Filipendula) 植物。

국명: 단풍터리풀

사진 : http://en.wikipedia.org/wiki/Filipendula

 

 

 

 

부처님이 6년간 정진하며 고행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은 용맹정진을 함으로서 마라와의 싸움에서 이겼는데, 그 각오와 결의에 대한 게송이다. 

 

게송에서 문자 풀’이 나온다. 갈대의 일종으로 문사초라고 한다. 문자 풀을 걸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고대인도에서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둘레나 깃발이나 무기에 문자 풀을 묶었다’고 하였다. 전쟁드라마를 보면 전쟁에 임하기 전 이마에 하얀 끈을 질끈 동여 매는 과 같다. 이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기겠다는 각오를 말한다. 그래서 패해서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싸워 서서 죽겠다는 비장함이 베어 있다.

 

마라 나무찌(Namuci)

 

이렇게 부처님의 불퇴전의 각오를 말씀 하신 것은 마라 ‘나무찌(Namuci)’때문이다. 마라 나무치는 피골이 상접된 부처님에게의 고행정진을 포기하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성화에 제물을 올리고 많은  공덕을 쌓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청정한 브라흐민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초기경에 등장하는 마라는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마라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마라

No

구 분

마라

초기경전에서의 뜻

1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

 

빠삐만(波旬, Pāpiman),

사악한 자, 악마

나무찌(Namuci)

해탈을 방해하는 자

깐하(Kaha)

검은 자

안따까(Antaka)

끝을 내는 자

파라마타반두(pamatta-bhandu)

방일함의 친척

 

2

천인으로서의 마라

 

-욕계의 최고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에 주재하는 천인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

-마군(魔軍, Marāsena)이라는 군대도 가지고 있음

3

세간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

-열반(nibbāna)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윤회계, 즉 오온(五蘊)을 상징함

 

출처 :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마라는 크게 세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숫따니빠따 빠다나경(정진의 경)에 등장하는 마라 나무치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무치는 해탈을 방해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부처님의 6년간 고행정진하였을 때이다. 이는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 즉, 무상정등각을 이루기 이전에 마음의 해탈을 이루기 위한 고행정진 수행을 한 기간이다.

 

이렇게 초기경에서는 마라를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지만 후대 주석서에서는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마군을 동원하여

 

해탈을 방해하는 자로서의 마라 나무치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Samantā dhajini disvā yutta māra savāhini,
Yuddhāya paccuggacchāmi mā ma
hānā acāvayi.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를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I see Māra and his armies marching forward for the fight,

I go forward to meet them, do not stop me from my decision.

 

(파다나경-Padhana sutta-정진의 경, 18번 게송, 숫따니빠따 Sn3.2,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마라 나무치의 유혹을 불퇴전의 각오로 거절하자 이제 마라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코끼리가 등장하고 깃발을 둔 악마의 군대, 즉 마군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들을 맞아 싸우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절대 물러 서지 않겠다고 또 다짐 한다.

 

마군을 어떻게 물리쳤을까

 

그렇다면 부처님으 이들 마군을 어떻게 물리쳤을까. 그것은 다음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Yanteta nappasahati sena loko sadevako,
Tante paññāya gacchāmi ama
pattava asmanā.

결코 신들도 세상 사람도

그대의 군대를 정복 할 수 없지만,

굽지 않은 발우를 돌로 부수듯,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부순다.

 

If this army of heavenly and human quality is too much for me

I turn away wisely like turning away from an unripe fruit.

 

 (파다나경-Padhana sutta-정진의 경, 19번 게송, 숫따니빠따 Sn3.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지혜(paññā)로서 마군을 부순다고 하였다. 마라의 군대가 쳐 들어 올 때 마음챙김을 잘 하여 이 세상의 어느 신이나 어떤 사람도 정복 할 수 없는 악마의 군대를 물리친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 첫 번째 게송

 

이와 같이 마라의 군대를 물리친 이야기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자야망갈라가타라는 게송으로 전해 온다. 그런 자야망갈라가타는 모두 여덟가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부처님이 싸워서 승리한 내용을 모티브로 한 것인데 모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다. 그 중 하나가 마라의 군대 이야기이다.

 

자야망갈라가타에서 가장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것이 마라의 군대와 싸워 이긴 것에 대한 묘사를 짤막한 게송으로 압축하였는데, 이는 숫따니빠따 빠다나경(정진의 경)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자야망갈라가타에서 첫번째 게송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다.

 

 

 

Bahum sahassam-abhinimmita sayudham tam      

-훙 사하쌈-아비님미따 사-유당 땅

Girimekhalam uditaghora sasenamaram          

기리메카랑 우디따고라 사세나마랑

Danadidhammavidhina jitava munindo           

다나디담마위디나 지따와 무닌도

Tam tejasa bhavatu te jayamangalani.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망갈라니.

 

악마가 수천의 무기들을 가지고

기리메칼라라고 불리는 무서운 코끼리 위에 타고,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성자들의 제왕 자비로운 가르침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With a thousand arms and created weapons that

(Elephant) Girimekhala with Mara, risen with fierceness

together with his army,

Through righteous means, such as generosity, the Lord of Sages won.

Through that power may there be victorious auspices to you.

 

(자야망갈라가타-Jayamagala Gāthā- Stanzas of the victorious Auspices길상승리게 (吉祥勝利偈) -승리와 행운을 노래 하오니, 1번 게송, 전재성님역)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doc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pdf

 

 

 

 

자야망갈라가타 1번 게송

Imee Ooi창송

吉祥利偈巴利文慧音唱(23 30, 3회 반복, 33M)

 

 

 

 

마라들이 수천개에 달하는 무기를 들고 더구나 기리메칼라라고 하는 무서운 코끼리 등에 타고 있는 마라의 공격이 매우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빠다나경(정진의 경) 18번 게송에  설명된 내용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들 마라의 군대를 맞이 하여 자비로운 가르침으로 섭수하여 굴복 시켰다고 하였다. 이 내용 역시 빠다나 경에서 지혜로 부순다는 것과 일치 한다.

 

독립기념일과 혼례식 축가(祝歌)

 

이와 같은 자야망갈라 가타는 모두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위대한 승리(Jaya)와 부처님의 축복(magala)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게송이기 때문에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일종의 수호경(호주)로 불리운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전통의 종갓집이라 불리우는 스리랑카에서는 이 자야망갈라가타가 공적으로 독립기념일에 축가로 불러지고, 사적으로 혼례식에서 역시 축가로 불리워지고 있다.

 

 

 

 

 

독립기념일 축가로서 자야망갈라가타

2006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독립기념일에

스리랑카 소녀들이 자야망갈라가타를 부르고 있다.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NUlrYD71z4Y

 

 

 

 

 

 

 

혼례식 축가로서의 자야망갈라가타

 

 

 

왜 오온이 마라의 상징일까

 

부처님은 불퇴전의 각오로 마라의 군대와 싸워 이겼다. 이는 결국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여기서 자기자신은 오온을 말한다. 그 오온은 또 마라의 상징이다. 마라의 여러 의미중에 오온이 마라의 상징이라고 초기경에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오온이 마라의 상징일까. 그것은 오온을 또는 나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나,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였을 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온 그 자체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보면 마라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오온이 나의 것,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였기 때문에 세세생생윤회하여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것이다. 만일 오온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여기 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과 반대 되는 개념으로 오온을 보았고,  오온은 결국 마라와 같은 것이다라고 본 것이다.

 

자기자신과의 싸움

 

부처님은 마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는 자기자신과의 싸움, 즉 오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나, 자아, 영혼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버리라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참나를 수행을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거꾸로 가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버려라고 하였것만, 나를 찾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마라와 같은 편이고, 해탈과 열반을 결코 실현 할 수 없어서 세세생생 윤회하는 범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을 잘못 잡은 한국불교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앎에 대하여 어떤 이는 참나, 본마음을 찾는 수행에 방해 되는 알음알이로 간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통하여 본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재 한국불교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 또는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없는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방향을 잘 못 잡았으니 목적지도 다르고 길을 잃고 헤메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문과 승풍문란 행위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 블로그는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식의 자영업자의 글이자 소시민, 서민의 글이다.

 

스님처럼 수행한 적도 없고, 교수처럼 불교공부를 많이 한 적도 없다. 직장을 잃게 되는 바람에 인터넷과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러다 블로그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만의 글을 조심스럽게 쓰기 시작 하다 보니 알려 지게 되었다.

 

이처럼 미천한 자가 글쓰기가 좋아서 글을 쓰고 있고, 부처님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 역시 글을 쓰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글쓰기를 배워 본적이 없고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생각나는 대로 마구 갈겨 쓰기도 한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이 보았을 때 또 불교공부를 많이 한 스님이나 학자, 기자가 보았을 때 ‘3, B, 잡것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건 말건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2012-05-26

진흙속의연꽃

파다나경(정진의 경- Sn3.2).docx
0.02MB
파다나경(Padhana sutta, 정진의 경 Sn3.2).pdf
0.22MB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1.3MB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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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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