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눈물의 다짐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25. 14:10

 

눈물의 다짐

 

 

 

실수를 하였는데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이런 실수 저런 실수를 할 수 있다. 또 큰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작은 실수를 할 수 있다. 늘 실수는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다 실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손실로 직결된다. 바로 금전적인 손해로 연결된다.

 

일하다 실수 하였다. 전화를 받고서 알았다. 전화가 오면 대부분 좋은 전화거나 긍정적인 경우가 많은데, 실수 하였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리고 매우 씁쓸하다. 그것은 곧바로 금전적 손실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수를 하였을 경우 솔직하게 인정하고 두 말없이 다시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된다. 하지만 신뢰에 금이 간다. 잘못한 것을 돈으로 때울 수 있을지 몰라도 실수함으로 인하여 고객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 결과 신뢰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결국 고객이 떠나는 문제가 발생된다. 따라서 실수가 발생되면 이중 삼중으로 고통 받는다.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하고 두눈을 부릎뜨고 살펴 보지만 용케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확인에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이다. 이런 경우 옛속담이 진리이다.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넌다는 말이다.

 

이번 실수 역시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간 것이 화근이었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들면 바로 연락해서 알아 보아야 했으나 자의적 판단결과 이번에 된통 당한 것이다.

 

만약 월급생활자가 실수를 하였다면, 그것도 큰 피해를 주는 실수를 하였다면 퇴출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호되게 야단 맞게 될 것이고 실력을 의심받게 되거 여러가지 부정적인 꼬리표가 달라 붙게 될 것이다.

 

실수가 일어날 만한 조건이

 

그러나 실수는 늘 있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 하면 실수는 많이 줄어 들 수 있다. 그런 결과 오늘 날과 같은 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는 과거 일어난 모든 사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잘 되었건  못 되었건간에 지금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모든 행위에 대한 상속의 결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mmassakomhi                            깜마삿꼬미

kammadāyādo                              깜마다야도

kammayoni                                깜마아요니

kammabandhu                              깜마반두

kammapaisarao                          깜마빠띠사라노

 

ya kamma karissāmi kalyāa         양 깜망 까릿사미 깔리야낭

vā pāpaka vā tassa dāyādo bhavissāmīti 야 빠빠깡 와 땃사 다야도 바윗사미띠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I am the owner of actions,

the inheritor,

the origin,

the relation and refuge of actions.

 

Whatever actions I do,

good or evil

I will be their inheritor.

 

(다사담마경-Dasadhamma sutta, 앙굿따라니까야 A10.48, 대림스님역)

 

 

부처님은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 업의 상속자(dāyāda, inheritor)가 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한다. 설령 그 자리에 있어서 사고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고가 일어날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일을 하다 실수한 것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런 실수가 일어날 만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얼키고 설켜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에 대하여 업에 대한 과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업보라 한다. 지은 업이 익어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고 나서 크게 잘못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이제까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수 많은 업이 언젠가 결과로 나타날 것임에 틀림 없다. 마치 빚진 자에게 청구서가 날아 오듯이, 어느 날 갑자기 전화 한통으로 알려 주듯이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심지어 업이 나의 의지처라고 말씀 하셨다.

 

, 내가 잘못했구나

 

실수는 쓰라린 것이다. 후회의 감정과 함께 왜 그렇게 하였을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 보았더라면..” 하며 아쉬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난 일을 되새기며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후회에 대하여 해로운 마음(불선심)’으로 분류 하여 놓았을 것이다.

 

후회를 빠알리어로 꾸꿋짜(kukucca)’라 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뉘우치며 어쩔줄 몰라 하는 마음상태라 한다. 잘못을 하였을 때, 실수를 저질렀을 때 후회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후회는 자신에게 성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후회는 성냄과 관계된 불선한 마음으로 분류 된다. 참고로 탐욕과 성냄과 관계된 심리현상은 다음과 같다.

 

 

 

 

심리현상(cetasika)

 

탐욕에 관계된 세가지

탐욕(, lobha)

 

사견(邪見, diṭṭhi)

 

자만(, māna)

 

성냄과 관계된 네가지

성냄(, dosa)

 

질투(, issā)

 

인색(, macchariya)

 

후회(惡作, kukucca)

, 내가 잘못했구나

 

 

후회는 성냄, 질투, 인색과 함께 성냄과 관련된 심리현상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냄은 밀쳐 내는 고유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후회 역시 밀쳐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성질을 내는 것을 말한다.

 

후회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후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악한 것을 행하였음이 악행을 했음이다.

그것의 상태가 후회이다.

나중에 속을 태우는 특징을 가진다.

좋은 일을 행하지 않은 것과

나쁜 일을 행한 것을 슬퍼하는 역할을 한다.

뉘우침으로 나타난다.

행함과 행하지 아니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노예의 근성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 14장 무더기, 174)

 

 

후회한다는 것이 악행, 속을 태우는 것, 슬퍼하는 것, 뉘우침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일을 하다 실수하여 전화 한 통화 받게 되었을 때 위 내용이 고스란히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적적 손실이 나서 속이 상하고, 고객이 떨어져 나갈까 봐 노심초사하고, 다시는 실수 하지 않겟다고 다짐 하는 것이 청정도론에서 언급된 내용과 꼭 들어 맞는다.

 

후회는 들뜸과 함께

 

이런 후회는 또 마음의 장애로도 설명된다. 신체에 장애가 있듯이 마음에도 장애가 있는데, 후회가 그 마음의 장애에 포함 된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장애를 일반적으로 오장애라 한다. 다섯가지 마음의 장애를 말한다.

 

다섯가지 마음의 장애는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

 

를 말한다.

 

 

그런데 후회는 들뜸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회는 왜 들뜸과 함께 하는 것일까. 아비담마 도표를 찾아 보았다.

 

아비담마 도표에 따르면 후회와 들뜸은 소속이 다르다, 후회의 경우 불선한 때때로 마음의 작용(sabba-akusala-pakiṇṇka-cetasika)’이라 하여 성냄, 질투, 인색과 한 그룹이지만, 들뜸의 경우 모든 불선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 (sabba-akusala-sadhārana-cetasika)’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회가 때때로 일어나는 것임에 비하여 들뜸은 모든 해로운 마음에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성냄이나 질투, 인색, 후회, 탐욕, 자만 등 불선한 마음이 일어 날 때 공통적으로 들뜸이 일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장애에 있어서 후회와 들뜸을 함께 묶어 놓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후회와 들뜸은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래서

 

“삼매는 욕탐(감각적 욕망)과 양립하지 못하고,

희열은 악의와,

일으킨 생각은 해태·혼침과,

행복은 들뜸·후회와,

지속적인 고찰은 의심과 양립할 수

없다”

 

고 빼따까(藏釋論, Pe)에서 설했다.

 

(청정도론, 제4장 땅의 까시나, 104절)

 

 

후회와 들뜸을 없애려면 선정삼매에 들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였을 때 오장애를 억누룰 수 있는데, 그것은

 

일으킨 생각으로 해태와 혼침을 물리칠 수 있고,

지속적 고찰로 인하여 회의적 의심이 사라지고,

희열을 느낌에 따라 악의는 억압되고,

행복을 맛봄에 따라 들뜸과 후회가 사라지고

마음을 집중시킴에 따라 감각적 욕망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후회의 감정은 행복과 반대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행복감을 맛 본다면 후회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빤짜웨라경(다섯가지 금계경,S36.1.5)에서

 

실수는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알고 실수를 하였다면 이는 고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지르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 것이 아마도 도둑질, 사음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를 하고 오계를 준수 하는 것을 말한다. 오계는 출재가를 막론 하고 공통적인 기본 계율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런 오계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 하여 진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존자 아누룻다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존자 아누룻다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을 드렸다.

 

[아누룻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사람을 초월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여인은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에 해당하는 여인이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까?

 

[세존]

아누룻다여,

다섯가지 법에 해당하는 여인이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다섯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생명을 빼앗는 것,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

애욕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곡주와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이다.

 

아누룻다여,

이와 같은 다섯가지 법에 해당하는 여인이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빤짜웨라경-Pañcaverasutta- The Five Observances -다섯가지 금계, 상윳따니까야S36.1.5,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의 마뚜가마상윳따(Mātugāma Sayutta, S36)에서 오계의 원형으로 보이는 경을 발견하였다. 제목은 빤짜웨라경(Pañcaverasutta)이다. 영어로 The Five Observances’라 하였다.

 

한자어로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망어,불음주라 부르는 오계에 대하여 경에서는

 

생명을 빼앗는 것,

주지 않는 것을 훔치는 것,

애욕에서 잘못을 범하는 것,

거짓말을 하는 것,

곡주와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

 

이라 하였다.

 

삼귀의와 함께 오계를 합창하는 스리랑카

 

이러한 오계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실린 주해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오계(五戒, pañca-sīlāni)

 

오계(五戒, pañca-sīlāni)는 불교에 입문한 재가자들이 평생 동안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이다. 상좌부 불교국,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항상 삼귀의와 함께 이러한 오계를 합창하는 것으로 법회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팔계(八戒, aṭṭha-sīla)는 한 달에 네 번, 그믐날,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이 뜨는 포살일(布薩日, uposatha)이나 집중수행처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지키는 계율이다.

 

(1) Pāātipāt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빠나디빠따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2) Adinnād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주어지지 않은 물건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3) Kāmesu micchācār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까메수 밋차짜라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삿된 음행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4) Musāvād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무사와다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거짓말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5)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수라메라야 맛자빠마다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술과 약물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6) Vikālabhoja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위깔라보자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때 아닌 때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7) Nacca-gīta-vādita-visukkadassana

mālā-gandha-vilepana-dhārana-maṇḍaa-vibhūsanaṭṭ hāna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닛싸, 기따, 와디따, 위수카 다싸나, 말라간다, 위레빠나, 다라나, 만 다나, 위부사나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무용, 노래, 음악을 보고 듣거나 꽃이나 향으로 분장하고 장신구로 치장함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8) Uccāsayana mahāsaya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

옥싸사야나 마하사야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

높은 침상이나 커다란 침상에서 자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주해 모음,김한상 번역 및 역주,1.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2.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3.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모두 8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5계가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될 사항이다.

 

그런데 주석을 보면 5계는 불자라면 평생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스리랑카의 경우 삼귀의와 함께 오계를 합창하는 것으로 법회를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귀의로 법회를 시작하지만 오계를 합창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계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인가

 

우리나에서도 법회를 시작할 때 삼귀의와 함께 오계를 합송해야 한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평생지켜야 할 오계를 매일 되새겨도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법회에서 오계를 합창하지 않는 이유는 오계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모른다.

 

오계는 지키기 쉽지 않다. 특히 불음주계가 그렇다. 불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마시기 싫어도 술을 입에 대는 경우가 발생되는데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 전현수 박사는 불교TV에서 술을 마실 때 마시긴 마시되 알아차리면서 마셔라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세상을 살다 보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고, 또 술의 힘을 빌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술은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이 아니라 음식이면서 차라리 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고된 노동 끝에 한잔 들이키는 술은 노동의 피로를 풀게 하고 내일을 향한 새로운 활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을 하지 않는 수행자가 술을 마셨을 경우 어떻게 될까.

 

오계를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

 

최근 불교계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일부 스님들의 도박행위와 이를 도촬한 동영상, 검찰고발 등으로 인하여 스님들끼리 이전투구 현상이 벌어짐에 따라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고 있는데, 이런 스님들의 행태에 대하여 불자들은 매우 분노 하고 있다.

 

거기에다 종단 최고위층 스님에 대한 성매수 의혹 등 갖가지 추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불자들은 절에 가는 것 조차 창피 하게 생각하고 있고 불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스님들이 계율을 준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계율을 잘 지켜야 할 출가자들이 화투, 카드, 도박, 음주, 은처, 매음, 성매수 등의 용어가 난무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계율인 오계를 지키지 않아서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스님들의 행태는 명백히 오계를 위반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오계를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 초기경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였다.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go to a bad state, to decrease and are reborn in hell).라고.

 

이 오랜 세월을 윤회하면서 우리도 한때

 

도박을 하여 몰래 카메라에 찍히고 검찰에 고발당하여 포토라인에 서는 순간 최대의 치욕을 경험할 것이다. 룸살롱을 출입하여 성매수 의혹을 받고 있다면 좌불안석이 되어 매일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 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치욕과 괴로움에 대하여 일을 저지른 당사자들만 맛 본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이에 해당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과정에 있어서 나도 한 번쯤 저런 경우를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관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둑가따경-Duggatasutta- In Unpleasantness- 불행경, 상윳따니까야 S14.2.1,전재성님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Beggar

 

 

 

부처님은 불행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이런 마음은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동정심, 자비심과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사랑과 자비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것은 조건부 사랑이 되기 쉽고, 일방적인 동정이 되기 쉽다.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자만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자만(, māna)은 불선한 마음으로서 탐욕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동등감이나 열등감 역시 자만에 속하는데, 이런 마음 역시 탐욕에 뿌리둔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불행에 처한 사람을 이해 하려면 자비의 마음 보다도 나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조하라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스님들이 잘못 하여 검찰청 포토 라인에 섰을 때 그 비난과 모욕, 치욕은 세세생생 남아 있을 것이다. 스님이 되기 까지 그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 한 번 삐끗하는 바람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에 빠져 버린 것이다.

 

일하다 실수 하여 돈으로 때우는 것과 달리 오계를 범함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고통 받고 다음 세상에서도 고통 받을 것이기 때문에 양쪽세상 모두에서 고통 받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오계를 준수 하며 지금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길섶에서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도둑으로 살면서 부녀자를 약탈하다가 사로잡혀 목을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띵사맛따경-Tisamatta - About Thirty Monks- 삼십 명, 상윳따니까야 S14.2.3,전재성님역)

 

 

 

  

Beheading

 

 

 

띵사맛따경에서는 오계를 지키지 않아 목이 잘린 경우를 말하고 있다. 도둑질 하다 붙잡혀 목이 잘리기를 수 도 없이 반복하였고, 부녀자를 성폭행 하다 붙잡혀 또 목이 베이길 이루 말할 수 없이 반복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흘린 피의 양이 사대양의 바닷물 보다 더 많을 것이라 한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좋아서도 눈물이 나고 슬퍼서도 눈물이 나지만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이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 진짜 이유가 없어서 우는 것일까.

 

영화박하사탕이 있다. 1999년 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다. 줄거리를 보면 20년만의 야유회가 열리던 날. 느닷없이 영호(설경구)가 나타난다. 그는 이미 실성한 모습이다. 의아한 눈길로 영호를 바라보는 친구들. 영호의 광기는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철교 위에 올라 울부짖는다. 거꾸로 가는 기차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가면 영호의 과거가 펼쳐진다. 이와 같은 영화를 다른 말로 시간역행영화라 한다.

 

과거로 돌아 갈래!”하며 철교에서 절규하는 장면이 처음 부분이다.  이후 시간이 역행하여 주인공의 살아 온 과정이 파노라마 치듯이 보여 준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주인공은 20대 초반 순수한 청년으로 돌아 와 있다. 그런데 주인공은 철교를 하염없이 바라 본다. 그리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주인공은 왜 철교를 보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 눈물은 이유 없는 눈물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으앙하고 울음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신고 한다. 이 아이의 눈물은 의미가 없는 눈물일까. 불자중에는 절에 가서 한 없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 눈물도 의미가 없는 눈물일까. 시집간날 첫날 밤에 한없이 울었다는 유행가의 노래가사도 이유 없는 눈물일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괜스럽게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이다. 영화속의 주인공이 20대 초반 순수한 마음에서 철교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었다면 이후 전개 될 파란 만장한 삶에 대한 눈물일 것이다.

 

 

 

 

 

 

맹구우목의 비유 보다 더 실감나는

 

이러한 경전의 이야기에 대하여 4부니까야 완역자 전재성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 거짓말을 하게 된 것도 간단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서 거짓말을 보다 덜 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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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엄청나게 그러한 과거의 목이 잘리고 흘린 피가 바다보다 많은 그런 시행착오, 여러분이 잘못하고 그 엄청난 벌을 받아 가지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다시는 안해야 겠다고 눈물로 다짐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고 하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전재성박사,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2회 2012-03-10일자, 미디어붓다 )

 

 

우리들이 오계를 지키려 하는 것은 과거 전생의 끔찍한 기억때문이라 볼 수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윤회과정 속에서 거짓말 한다고 붙잡혀 고통을 얼마나 당했는지, 술을 마시다 실수로 또는 의도적으로 부녀자를 폭행하다 붙잡혀 목이 얼마나 잘렸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계를 지키지 않아 목이 잘릴 때 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노라고 눈물의 다짐을 수 도 없이 한 결과 오늘날 여기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몸으로 그것도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접한 것도 수 도 없이 목이 잘리고, 눈물을 흘리고 참회한 결과라 보는데, 이런 설명은 맹구우목의 비유 보다 더 실감나는 것이다.

 

우리들도 과거에 그와 같은 일을 무수하게 겪었을 것

 

누구나 실수 할 수 있다. 사소한 실수이건 중대한 실수이건 반드시 후회가 뒤따른다. 그 때 마다 재발 방지에 대한 다짐을 하게 된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그런데 모르고 저지른 실수가 아닌 의도가 실린 못된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오계에 대한 것이다. 그 중 살생에 대한 것을 보면, 불자라면 누구나 살생하는 것에 대하여 꺼려 한다. 왜 그럴까.

 

진정한 불자라면 낚시 등과 같이 산목숨을 죽이려 하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상상도 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미 다 경험 해 보았기 때문이다.

 

살인하다 붙들려 목이 잘린 경우가 부지기 수이고, 그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른다. 오계 중의 음행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다면 출가수행자들이 시주돈으로 도박을 하였다면 이는 사실상 도적질에 해당하여 불투도계를 어긴 것이 되고, 그 과정에서 술을 마셨다면 불음주계를 어긴 것이고, 성매수 의혹을 받는 등 매음을 하였다면 불사음계를 어긴 것이다이로 인하여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 등에 널리 알려져 불교계가 개망신을 당하였다면 불자들에 대한 간접적으로 죽인 것에 해당 되므로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불살생계를 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계를 어긴 스님이 불자들 앞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이는 언행일치가 안되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경우에 해당되므로 불망어계를 어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계를 모두 어기게 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스님들은 비방과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동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들이라고 해서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과거에 그와 같은 일을 무수하게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이 잘릴 때마다 눈물로 참회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도박을 하고 성매수 의혹에 싸여 있는 스님에 대하여 비난과 비방에 앞서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거룩한 여덟가지 진리를 보면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들 모두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기 때문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눈물을 다짐을 하면서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날 것을 말하고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Pācīnavaso tivarāna rohitassāna vakako,
Suppiy
āna suphassoti māgadhānañca vepullo.
Anicc
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
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1겁의 세월을 윤회하며 한 사람이 남겨 놓은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 위대한 선인은 말씀하셨네.

 

그런데 큰 산은 이처럼 베뿔라 산이라고 불리우니

깃자꾸따의 북서쪽에 놓여 있고 그곳에 마가다의 산성이 있네.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것 거룩한 진리를 살펴보면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거룩한 여덟 가지의 진리를 보면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자멸할 것이네."

 

 

The Pacīnavamsa belonged to the Tivaras.
Vankaka belonged to the Rohitas
Supassa belonged
to the Suppiyas
And Vepulla to the Magadhans
Indeed, determinations are impermanent,
Their nature is to rise and fall.
They rise and then fall,
Their surcease is bliss.”

 

(웨뿔라빱바땅경-Vepullapabbata - The Vepulla Rock- 사람, 상윳따니까야 S14.2.10,전재성님역)

 

 

 

 

자꾸(Gijjhakuta, )

 

 

 

 

 

 

懺悔文 慧音

 

往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嗔癡

從身語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비롯함이 없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은 모든 악업은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그로 인하여 몸과 말과 마음으로 죄업을 짖게 되어서

저는 이제 이렇게 부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참회 합니다.

 

 

 

 

 

 

 

 

 

 

2012-05-25

진흙속의연꽃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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